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單單大山領의 서쪽은 樂浪에 소속되었으며,
○ 單單大山領의 서쪽은 樂浪에 소속되었으며, 領의 동쪽 일곱 縣은 [東部]都尉가 통치하는데 그 백성은 모두 濊人이다. 그 뒤 都尉를 폐지하고 그들의 우두머리(渠帥)를 封하여 侯로 삼았다. 오늘날의 不耐濊는 모두 그 종족이다. 漢末에는 다시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그 나라의 풍속은 山川을 중요시하여 산과 내마다 각기 구분이 있어註 141 함부로 들어가지 않는다. 同姓끼리는 결혼하지 않는다.註 142 꺼리는 것이 많아서 병을 앓거나 사람이 죽으면 옛 집을 버리고 곧 다시 새 집을 지어 산다. 삼베가 산출되며 누에를 쳐서 옷감을 만든다.註 143 새벽에 별자리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그 해의 풍흉을 미리 안다.註 144 珠玉은 보물로 여기지 않는다.
註) 141
산과 내를 경계로 한 일정지역이 각 邑落에 귀속되어 있었음을 뜻한다. 다른 부락의 사람들이 허락없이 이 지역 내에 들어와 활동하면 곧 그에 대한 벌(責禍)을 부과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곧 당시 東濊社會에서 각 읍락의 區域 內에서의 경작지는 그 住民들에게 개별적으로 占有되었더라도 그에 대한 원천적인 소유권은 읍락에 귀속되었으며, 山林과 河川 및 草地 등은 共有의 상태이었음을 말해주는 바이다. 근세기 초까지도 시베리아의 소-ㄹ족(Shors), 에벤크족(Evenks), 토파라족(Tofalas) 등과 같은 종족의 各 氏族들은 江이나 일정지역을 저마다의 배타적인 생활권으로 소유하고 있으면서 씨족공동체적인 생활을 영위해 나가고 있었다. 이는 濊族의 그것과 상통하는 면을 보여준다. 濊의 각 姓(氏族)은 族外婚의 단위가 되는 등의 기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기록에 의거해 東濊社會가 氏族制 社會 末期의 상태에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그런데 당시 東濊社會에선 농업이 상당히 진전되었고, 生口 즉, 노예도 존재하는 등 씨족공동체적인 상태는 벗어났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邑落單位의 공동체적 면모는 아직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參考文獻≫
金哲埈, 「新羅時代의 親族集團」『韓國史硏究』1, 1968 (『韓國古代社會硏究』1975)
M.G. Levin & Pipotapov, 『The Peoples of Siberia』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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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42
같은 씨족 내에서의 혼인이 금지되었다는 뜻이다. 이 당시 濊에는 아직 중국식의 姓이 없었으며 同姓이라는 用語는 씨족단위를 姓으로 이해한 중국인 나름의 표현이다. 部落外婚·同姓不婚 등 일정한 단위집단 바깥에서 배우자를 구하는 것은 집단 간의 연계관계를 통해 용이한 물품교환 및 상호안전을 도모하려는 데에서 비롯되었다. 반대로 內婚은 그 社會의 동질성을 유지하기 爲한 目的에서 成立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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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43
누에를 쳐서 명주실(綿絲)을 뽑아낼 수 있었다는 뜻이다. 이것은 곧 비단의 전단계인 명주(綿布)를 짤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後代에 들어와 목화솜으로 짜는 綿布는 이와 구별하여 眞緜이라 불렀다. 『三國志』韓傳에는 馬韓人도 명주를 짤줄 알았다는 기사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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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44
하늘의 별자리를 잘 관찰하여 풍·흉년을 예언하였다는 것은 東濊人들이 그들 나름의 기후변동과 曆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그에 의거해 농사를 조정·관리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당시 沃沮人들이 농사를 잘 지었고, 東濊人들이 누에를 치고 麻布를 짜는 등 직조기술이 상당하였다는 것과 연결되는 바로서, 東濊社會의 농업기술이 상당히 진전된 것임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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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기사명, 자료명. URL (검색날짜)
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http://db.history.go.kr/id/sa_001_0030_0020 (accessed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http://db.history.go.kr/id/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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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기사명, 자료명.(사이트명, URL, ID, 검색날짜)
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sa_001_0030_0020,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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