馬韓은 [三韓 中에서] 서쪽에 위치하였다.
○ 馬韓은 [三韓 中에서] 서쪽에 위치하였다. 그 백성은 土著生活을 하고 곡식을 심으며 누에치기와 뽕나무 가꿀 줄을 알고 綿布를 만들었다. [나라마다] 각각 長帥가 있어서, 세력이 강대한 사람은 스스로 臣智라 하고, 그 다음은 邑借라 하였다.
[그 나라 사람들은] 산과 바다 사이에 흩어져 살았으며 城郭이 없었다.註 156
馬韓에 城郭이 없다는 이 記事는 어떤 기준에 의거해서 기술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일반적으로 城郭은 外敵을 방어하기 위한 방편으로 築城을 한 것을 말하는데, 이 時期에 馬韓에 一切의 城이 없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 面이 있다. 혹 中國의 城郭을 기준으로 삼아서 그러한 形態의 城郭이 馬韓에는 없다는 것인지 그것도 잘 알 수가 없다.
우리나라에는 이미 紀元 前後하여 築造된 土城이 各處에 散在하여 있거니와, 그것은 地域과 時期에 따라서 규모의 大小를 달리하는 각종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學界 一部에서는 종래의 部族國家 대신에 城邑國家說을 주장하고 있으나, 이는 더 검토해 볼 여지가 있는 問題이다. 文獻으로도 確實한 자료제시가 힘겨울 뿐만 아니라 考古學上으로도 檢證해야 할 事項들이 상당히 많다. 원래의 城邑國家는 治者中心의 集團과 연결하여 고찰되어야 하는 것이다.
≪參考文獻≫
李丙燾, 「朝鮮古代の城郭に就いて」『朝光』1941, 朝光社.
尹武炳, 「城郭」『韓國その民族と文化』1966, 學園社.
千寬宇 編, 「討論 : 韓國史의 爭點」『新東亞』1971(『韓國上古史의 爭點』1975, 一潮閣); 「三國志 韓傳의 再檢討」『震檀學報』41, 1976.
池憲英, 「産長山下地名考(上)-豆良伊城에 對하여(續)-」『百濟硏究』4, 1973.
全榮來, 「扶安地方 古代圍郭遺蹟과 그 遺物」『全北遺蹟調査報告』4, 1975.
金貞培, 「蘇塗의 政治史的 意味」『歷史學報』79, 1978.
大原利武, 「朝鮮の古代史に就いて」『文敎の朝鮮』91號, 1933.
우리나라에는 이미 紀元 前後하여 築造된 土城이 各處에 散在하여 있거니와, 그것은 地域과 時期에 따라서 규모의 大小를 달리하는 각종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學界 一部에서는 종래의 部族國家 대신에 城邑國家說을 주장하고 있으나, 이는 더 검토해 볼 여지가 있는 問題이다. 文獻으로도 確實한 자료제시가 힘겨울 뿐만 아니라 考古學上으로도 檢證해야 할 事項들이 상당히 많다. 원래의 城邑國家는 治者中心의 集團과 연결하여 고찰되어야 하는 것이다.
≪參考文獻≫
李丙燾, 「朝鮮古代の城郭に就いて」『朝光』1941, 朝光社.
尹武炳, 「城郭」『韓國その民族と文化』1966, 學園社.
千寬宇 編, 「討論 : 韓國史의 爭點」『新東亞』1971(『韓國上古史의 爭點』1975, 一潮閣); 「三國志 韓傳의 再檢討」『震檀學報』41, 1976.
池憲英, 「産長山下地名考(上)-豆良伊城에 對하여(續)-」『百濟硏究』4, 1973.
全榮來, 「扶安地方 古代圍郭遺蹟과 그 遺物」『全北遺蹟調査報告』4, 1975.
金貞培, 「蘇塗의 政治史的 意味」『歷史學報』79, 1978.
大原利武, 「朝鮮の古代史に就いて」『文敎の朝鮮』91號, 1933.
[馬韓의 諸國으로는] 爰襄國·牟水國·桑外國·小石索國·大石索國·優休牟涿國·臣濆沽國·伯濟國·速盧不斯國·日華國·古誕者國·古離國·怒藍國·月支國註 157·咨離牟盧國·素謂乾國·古爰國·莫盧國·卑離國·占離卑國·臣釁國·支侵國·狗盧國·卑彌國·監奚卑離國·古蒲國·致利鞠國·冉路國·兒林國·駟盧國·內卑離國·感奚國·萬盧國·辟卑離國·臼斯烏旦國·一離國·不彌國·支半國·狗素國·捷盧國·牟盧卑離國·臣蘇塗國·莫盧國·占臘國·臨素半國·臣雲新國·如來卑離國·楚山塗卑離國·一難國·狗奚國·不雲國·不斯濆邪國·爰池國·乾馬國·楚離國 등 모두 5십여國이 있다. 큰 나라는 萬餘家이고, 작은 나라는 數千家로서 總 10餘萬戶이다.
『三國志』 「東夷傳」에서는 ‘月支國’으로 되어 있으나, 『翰苑』에 引用된 『魏略』이나 『後漢書』등에는 ‘目支國’으로 明記되어 있다. 따라서 ‘月’은 ‘目’의 誤字임이 分明하다. ‘辰王治目支國’이라고 하는 기술에서 불 수 있듯이 目支國은 馬韓諸國 가운데서 한때 강한 위치에 있었던 社會인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 目支國의 位置에 대해서 확실한 地名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일찍이 茶山(『疆域考』 「三韓總考」)이라 韓鎭書(『海東繹史』 「地理考」) 등은 準王의 南奔과 관련이 있다고 傳해지는 釜山에다 관심을 두고 있고, 李丙燾는 稷山 地方에다 比定하며,( 「三韓問題의 硏究」pp.242~248) 千寬宇는 仁川을 지목하고 있다.( 「目支國考」pp.13~16) 이 位置比定은 文獻만으로 고찰하기가 매우 힘들기 때문에 考古學의 성과를 십분 활용해야 問題해결에 실마리가 풀릴 것이다.
≪參考文獻≫
『後漢書』卷85 「東夷列傳」韓條.
『翰苑』三韓條 所引『魏略』
申采浩, 「前後三韓考」『朝鮮史硏究草』1929.
李丙燾, 「三韓問題의 硏究」『韓國古代史硏究』4, 1976.
金貞培, 「三韓位置에 對한 從來說과 文化性格의 檢討」『史學硏究』20, 1968; 「準王 및 辰國과 三韓正統論의 諸問題」『韓國史硏究』13, 1976; 「辰國의 政治發展段階」『領土問題硏究』창간호, 1983.
李賢惠, 「三韓의 國邑과 그 成長에 대하여」『歷史學報』69, 1976.
千寬宇, 「目支國考」『韓國史硏究』24, 1978.
≪參考文獻≫
『後漢書』卷85 「東夷列傳」韓條.
『翰苑』三韓條 所引『魏略』
申采浩, 「前後三韓考」『朝鮮史硏究草』1929.
李丙燾, 「三韓問題의 硏究」『韓國古代史硏究』4, 1976.
金貞培, 「三韓位置에 對한 從來說과 文化性格의 檢討」『史學硏究』20, 1968; 「準王 및 辰國과 三韓正統論의 諸問題」『韓國史硏究』13, 1976; 「辰國의 政治發展段階」『領土問題硏究』창간호, 1983.
李賢惠, 「三韓의 國邑과 그 成長에 대하여」『歷史學報』69, 1976.
千寬宇, 「目支國考」『韓國史硏究』24, 1978.
辰王註 158은 月支國을 통치한다. 臣智에게는 간혹 우대하는 호칭인 臣雲遣支報 安邪踧支 濆臣離兒不例 狗邪秦支廉註 159의 稱號를 더하기도 한다. 그들의 관직에는 魏率善·邑君·歸義侯·中郞將·都尉·伯長이 있다.
辰王은 目支國을 統治하는 지도자로 그 범위가 限定되어 있다. 辰王의 稱號를 言語學的으로 해명하려고 하지만 아직까지도 이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臣智와 어떤 관련이 있는 것 같으나 역시 충분히 해명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三國志』 「東夷傳」에서의 辰王의 權限범위와 『後漢書』 「東夷列傳」에서의 辰王의 相對的인 해석이 크게 다르기 때문에 이를 연구하는 學者의 立場에 따라 辰王의 性格을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三國志』의 史料를 따르게 될 경우 目支國을 다스리며 주위를 제어하는 정도의 統治者로 辰王이 해석되지만, 『後漢書』를 引用할 경우 狀況은 아주 다르게 된다. 『後漢書』 「東夷列傳」에서는 辰王이 三韓 全體를 다스리는 王으로 나타나므로, 결국은 三韓社會의 政治問題를 넓게 논의하게 될 때 논란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後漢書』의 辰王은 韓國史의 歷史發展 段階에서는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存在가 된다. 辰王은 『三國志』의 記事대로 目支國을 다스린 지배자이며, 馬韓社會에서 강한 위치에 있었던 社會로 파악하면 순조로울 것이다.
≪參考文獻≫
『後漢書』卷85 「東夷列傳」韓條.
金貞培, 「三韓位置에 對한 從來說과 文化性格의 檢討」『史學硏究』20, 1968; 「辰國과 韓에 關한 考察」『史叢』12·13合輯, 1968; 「辰國의 政治發展段階」『領土問題硏究』창간호, 1983.
金廷鶴, 「魏志 韓傳 小考」『釜山大文理大論文集』14, 1975.
李丙燾, 「三韓問題의 硏究」『韓國古代史硏究』1976.
千寬宇, 「韓國史에서 본 騎馬民族說」『讀書生活』11·12月號, 1976; 「三韓의 國家形成(上·下)」『韓國學報』2·3合輯, 1976.
李賢惠, 「馬韓 小國의 形成에 대하여」『歷史學報』92, 1981.
三品影英, 「史實と考證」『史學雜誌』55編 1號, 1944.
末松保和, 「新羅建國考」『新羅史の諸問題』1954.
江上波夫, 「日本におけるの民族の形成と國家の起源」『東洋文化硏究所紀要』32號, 1965.
三上次男, 「古代の南朝鮮」『古代東北アジア史硏究』1966.
오히려 『三國志』 「東夷傳」에서의 辰王의 權限범위와 『後漢書』 「東夷列傳」에서의 辰王의 相對的인 해석이 크게 다르기 때문에 이를 연구하는 學者의 立場에 따라 辰王의 性格을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三國志』의 史料를 따르게 될 경우 目支國을 다스리며 주위를 제어하는 정도의 統治者로 辰王이 해석되지만, 『後漢書』를 引用할 경우 狀況은 아주 다르게 된다. 『後漢書』 「東夷列傳」에서는 辰王이 三韓 全體를 다스리는 王으로 나타나므로, 결국은 三韓社會의 政治問題를 넓게 논의하게 될 때 논란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後漢書』의 辰王은 韓國史의 歷史發展 段階에서는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存在가 된다. 辰王은 『三國志』의 記事대로 目支國을 다스린 지배자이며, 馬韓社會에서 강한 위치에 있었던 社會로 파악하면 순조로울 것이다.
≪參考文獻≫
『後漢書』卷85 「東夷列傳」韓條.
金貞培, 「三韓位置에 對한 從來說과 文化性格의 檢討」『史學硏究』20, 1968; 「辰國과 韓에 關한 考察」『史叢』12·13合輯, 1968; 「辰國의 政治發展段階」『領土問題硏究』창간호, 1983.
金廷鶴, 「魏志 韓傳 小考」『釜山大文理大論文集』14, 1975.
李丙燾, 「三韓問題의 硏究」『韓國古代史硏究』1976.
千寬宇, 「韓國史에서 본 騎馬民族說」『讀書生活』11·12月號, 1976; 「三韓의 國家形成(上·下)」『韓國學報』2·3合輯, 1976.
李賢惠, 「馬韓 小國의 形成에 대하여」『歷史學報』92, 1981.
三品影英, 「史實と考證」『史學雜誌』55編 1號, 1944.
末松保和, 「新羅建國考」『新羅史の諸問題』1954.
江上波夫, 「日本におけるの民族の形成と國家の起源」『東洋文化硏究所紀要』32號, 1965.
三上次男, 「古代の南朝鮮」『古代東北アジア史硏究』1966.
註) 156
馬韓에 城郭이 없다는 이 記事는 어떤 기준에 의거해서 기술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일반적으로 城郭은 外敵을 방어하기 위한 방편으로 築城을 한 것을 말하는데, 이 時期에 馬韓에 一切의 城이 없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 面이 있다. 혹 中國의 城郭을 기준으로 삼아서 그러한 形態의 城郭이 馬韓에는 없다는 것인지 그것도 잘 알 수가 없다.
우리나라에는 이미 紀元 前後하여 築造된 土城이 各處에 散在하여 있거니와, 그것은 地域과 時期에 따라서 규모의 大小를 달리하는 각종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學界 一部에서는 종래의 部族國家 대신에 城邑國家說을 주장하고 있으나, 이는 더 검토해 볼 여지가 있는 問題이다. 文獻으로도 確實한 자료제시가 힘겨울 뿐만 아니라 考古學上으로도 檢證해야 할 事項들이 상당히 많다. 원래의 城邑國家는 治者中心의 集團과 연결하여 고찰되어야 하는 것이다.
≪參考文獻≫
李丙燾, 「朝鮮古代の城郭に就いて」『朝光』1941, 朝光社.
尹武炳, 「城郭」『韓國その民族と文化』1966, 學園社.
千寬宇 編, 「討論 : 韓國史의 爭點」『新東亞』1971(『韓國上古史의 爭點』1975, 一潮閣); 「三國志 韓傳의 再檢討」『震檀學報』41, 1976.
池憲英, 「産長山下地名考(上)-豆良伊城에 對하여(續)-」『百濟硏究』4, 1973.
全榮來, 「扶安地方 古代圍郭遺蹟과 그 遺物」『全北遺蹟調査報告』4, 1975.
金貞培, 「蘇塗의 政治史的 意味」『歷史學報』79, 1978.
大原利武, 「朝鮮の古代史に就いて」『文敎の朝鮮』91號, 1933.
우리나라에는 이미 紀元 前後하여 築造된 土城이 各處에 散在하여 있거니와, 그것은 地域과 時期에 따라서 규모의 大小를 달리하는 각종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學界 一部에서는 종래의 部族國家 대신에 城邑國家說을 주장하고 있으나, 이는 더 검토해 볼 여지가 있는 問題이다. 文獻으로도 確實한 자료제시가 힘겨울 뿐만 아니라 考古學上으로도 檢證해야 할 事項들이 상당히 많다. 원래의 城邑國家는 治者中心의 集團과 연결하여 고찰되어야 하는 것이다.
≪參考文獻≫
李丙燾, 「朝鮮古代の城郭に就いて」『朝光』1941, 朝光社.
尹武炳, 「城郭」『韓國その民族と文化』1966, 學園社.
千寬宇 編, 「討論 : 韓國史의 爭點」『新東亞』1971(『韓國上古史의 爭點』1975, 一潮閣); 「三國志 韓傳의 再檢討」『震檀學報』41, 1976.
池憲英, 「産長山下地名考(上)-豆良伊城에 對하여(續)-」『百濟硏究』4, 1973.
全榮來, 「扶安地方 古代圍郭遺蹟과 그 遺物」『全北遺蹟調査報告』4, 1975.
金貞培, 「蘇塗의 政治史的 意味」『歷史學報』79, 1978.
大原利武, 「朝鮮の古代史に就いて」『文敎の朝鮮』91號, 1933.
註) 157
『三國志』 「東夷傳」에서는 ‘月支國’으로 되어 있으나, 『翰苑』에 引用된 『魏略』이나 『後漢書』등에는 ‘目支國’으로 明記되어 있다. 따라서 ‘月’은 ‘目’의 誤字임이 分明하다. ‘辰王治目支國’이라고 하는 기술에서 불 수 있듯이 目支國은 馬韓諸國 가운데서 한때 강한 위치에 있었던 社會인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 目支國의 位置에 대해서 확실한 地名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일찍이 茶山(『疆域考』 「三韓總考」)이라 韓鎭書(『海東繹史』 「地理考」) 등은 準王의 南奔과 관련이 있다고 傳해지는 釜山에다 관심을 두고 있고, 李丙燾는 稷山 地方에다 比定하며,( 「三韓問題의 硏究」pp.242~248) 千寬宇는 仁川을 지목하고 있다.( 「目支國考」pp.13~16) 이 位置比定은 文獻만으로 고찰하기가 매우 힘들기 때문에 考古學의 성과를 십분 활용해야 問題해결에 실마리가 풀릴 것이다.
≪參考文獻≫
『後漢書』卷85 「東夷列傳」韓條.
『翰苑』三韓條 所引『魏略』
申采浩, 「前後三韓考」『朝鮮史硏究草』1929.
李丙燾, 「三韓問題의 硏究」『韓國古代史硏究』4, 1976.
金貞培, 「三韓位置에 對한 從來說과 文化性格의 檢討」『史學硏究』20, 1968; 「準王 및 辰國과 三韓正統論의 諸問題」『韓國史硏究』13, 1976; 「辰國의 政治發展段階」『領土問題硏究』창간호, 1983.
李賢惠, 「三韓의 國邑과 그 成長에 대하여」『歷史學報』69, 1976.
千寬宇, 「目支國考」『韓國史硏究』24, 1978.
≪參考文獻≫
『後漢書』卷85 「東夷列傳」韓條.
『翰苑』三韓條 所引『魏略』
申采浩, 「前後三韓考」『朝鮮史硏究草』1929.
李丙燾, 「三韓問題의 硏究」『韓國古代史硏究』4, 1976.
金貞培, 「三韓位置에 對한 從來說과 文化性格의 檢討」『史學硏究』20, 1968; 「準王 및 辰國과 三韓正統論의 諸問題」『韓國史硏究』13, 1976; 「辰國의 政治發展段階」『領土問題硏究』창간호, 1983.
李賢惠, 「三韓의 國邑과 그 成長에 대하여」『歷史學報』69, 1976.
千寬宇, 「目支國考」『韓國史硏究』24, 1978.
註) 158
辰王은 目支國을 統治하는 지도자로 그 범위가 限定되어 있다. 辰王의 稱號를 言語學的으로 해명하려고 하지만 아직까지도 이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臣智와 어떤 관련이 있는 것 같으나 역시 충분히 해명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三國志』 「東夷傳」에서의 辰王의 權限범위와 『後漢書』 「東夷列傳」에서의 辰王의 相對的인 해석이 크게 다르기 때문에 이를 연구하는 學者의 立場에 따라 辰王의 性格을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三國志』의 史料를 따르게 될 경우 目支國을 다스리며 주위를 제어하는 정도의 統治者로 辰王이 해석되지만, 『後漢書』를 引用할 경우 狀況은 아주 다르게 된다. 『後漢書』 「東夷列傳」에서는 辰王이 三韓 全體를 다스리는 王으로 나타나므로, 결국은 三韓社會의 政治問題를 넓게 논의하게 될 때 논란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後漢書』의 辰王은 韓國史의 歷史發展 段階에서는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存在가 된다. 辰王은 『三國志』의 記事대로 目支國을 다스린 지배자이며, 馬韓社會에서 강한 위치에 있었던 社會로 파악하면 순조로울 것이다.
≪參考文獻≫
『後漢書』卷85 「東夷列傳」韓條.
金貞培, 「三韓位置에 對한 從來說과 文化性格의 檢討」『史學硏究』20, 1968; 「辰國과 韓에 關한 考察」『史叢』12·13合輯, 1968; 「辰國의 政治發展段階」『領土問題硏究』창간호, 1983.
金廷鶴, 「魏志 韓傳 小考」『釜山大文理大論文集』14, 1975.
李丙燾, 「三韓問題의 硏究」『韓國古代史硏究』1976.
千寬宇, 「韓國史에서 본 騎馬民族說」『讀書生活』11·12月號, 1976; 「三韓의 國家形成(上·下)」『韓國學報』2·3合輯, 1976.
李賢惠, 「馬韓 小國의 形成에 대하여」『歷史學報』92, 1981.
三品影英, 「史實と考證」『史學雜誌』55編 1號, 1944.
末松保和, 「新羅建國考」『新羅史の諸問題』1954.
江上波夫, 「日本におけるの民族の形成と國家の起源」『東洋文化硏究所紀要』32號, 1965.
三上次男, 「古代の南朝鮮」『古代東北アジア史硏究』1966.
오히려 『三國志』 「東夷傳」에서의 辰王의 權限범위와 『後漢書』 「東夷列傳」에서의 辰王의 相對的인 해석이 크게 다르기 때문에 이를 연구하는 學者의 立場에 따라 辰王의 性格을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三國志』의 史料를 따르게 될 경우 目支國을 다스리며 주위를 제어하는 정도의 統治者로 辰王이 해석되지만, 『後漢書』를 引用할 경우 狀況은 아주 다르게 된다. 『後漢書』 「東夷列傳」에서는 辰王이 三韓 全體를 다스리는 王으로 나타나므로, 결국은 三韓社會의 政治問題를 넓게 논의하게 될 때 논란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後漢書』의 辰王은 韓國史의 歷史發展 段階에서는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存在가 된다. 辰王은 『三國志』의 記事대로 目支國을 다스린 지배자이며, 馬韓社會에서 강한 위치에 있었던 社會로 파악하면 순조로울 것이다.
≪參考文獻≫
『後漢書』卷85 「東夷列傳」韓條.
金貞培, 「三韓位置에 對한 從來說과 文化性格의 檢討」『史學硏究』20, 1968; 「辰國과 韓에 關한 考察」『史叢』12·13合輯, 1968; 「辰國의 政治發展段階」『領土問題硏究』창간호, 1983.
金廷鶴, 「魏志 韓傳 小考」『釜山大文理大論文集』14, 1975.
李丙燾, 「三韓問題의 硏究」『韓國古代史硏究』1976.
千寬宇, 「韓國史에서 본 騎馬民族說」『讀書生活』11·12月號, 1976; 「三韓의 國家形成(上·下)」『韓國學報』2·3合輯, 1976.
李賢惠, 「馬韓 小國의 形成에 대하여」『歷史學報』92, 1981.
三品影英, 「史實と考證」『史學雜誌』55編 1號, 1944.
末松保和, 「新羅建國考」『新羅史の諸問題』1954.
江上波夫, 「日本におけるの民族の形成と國家の起源」『東洋文化硏究所紀要』32號, 1965.
三上次男, 「古代の南朝鮮」『古代東北アジア史硏究』1966.
주제분류
- 정치>왕실>국왕>국명·연호
- 정치>행정>관등>중앙관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