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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夷 高句驪國은 현재 漢代의 遼東郡을
○ 宋書註 001
夷蠻列傳註 002
高句驪國註 003
東夷 高句驪國註 004은 현재 漢代의 遼東郡을 지배하고 있다.註 005
고구려왕 高璉註 006이 晋 安帝 義熙 9년(A.D.413; 高句麗 長壽王 1)에 長史註 007 高翼을 보내어 表文을 올리고 赭白馬를 바쳤다. [安帝는] 고연을 使持節 都督營州註 008諸軍事註 009 征東將軍 高句驪王 樂浪公註 010으로 삼았다.註 011
高祖가 왕위에 오른 뒤 詔書를 내려 말하기를,
“使持節 都督營州諸軍事 征東將軍 高句驪王 樂浪公 璉과 使持節 督百濟諸軍事 鎭東將軍 百濟王 映은 함께 해외에 있으면서 바른 도리를 지키어 멀리서 貢物을 보내 오고 있오. 이제 [宋나라의] 開國을 알리어 기쁨을 나누어 가지려 하오. 璉은 征東大將軍으로, 映은 鎭東大將軍으로 삼고, 持節·都督·王·公의 칭호는 그대로 인정하겠오.”
라고 하였다.註 012
[永初] 3년(A.D.422; 高句麗 長壽王 10)에 [高]璉에게 散騎常侍와 督平州註 013諸軍事라는 벼슬을 더해 주었다.
註) 001
南朝 齊의 武帝 永明 5~6年間(487~488)에 沈約이 奉勅撰한 宋 8世(420~479) 60년간의 正史. 帝紀 10·志 30·列傳 60, 總 100卷.
『宋書』의 편찬은 齊 永明 5年(487)에 명을 받고 1년도 채 못되어 완성하였다. 이와 같이 짧은 기간에 이루어진 것은 徐爰의 舊本을 添加하거나 削筆하는데 그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宋書』가 완성된 것은 齊代였으나 撰者를 梁 沈約이라 한 것은 그가 梁朝에서 官吏生活을 마쳤기 때문이다.
『宋書』의 내용중 卷1부터 卷10까지는 「帝紀」로 「武帝紀」로부터 「順帝紀」까지 10卷으로 되어 있다. 「帝紀」의 서술은 『三國志』의 例에 따라 廻護의 法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즉, 晋·宋 交替期에 宋 武帝의 功績과 晋 恭帝의 自願禪位를 들어 逼奪한 흔적과 謀殺한 사실을 記述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齊의 纂奪 흔적도 애매하게 기술하고 있다.
卷11부터 卷40까지는 志(志序·律·曆·禮·樂·天文·符瑞·五行·州郡·百官)로 10項目 30卷으로 나누어져 있다. 「志序」는 분량이 적어 「律志」와 合卷하였으며, 그밖에 地理를 州郡으로 고치고, 禮는 郊祀·祭祀·朝會·輿服을 합하였으며, 符瑞은 새로 만든 것이다. 그리고 「律志」· 「曆志」는 何承天의 舊議에 근거하였다.
卷41부터 卷100까지는 列傳으로 自序 1卷 외에 「諸臣列傳」이 있고 그밖에 後妃·宗室·孝義·良吏·隱逸·恩倖·夷蠻·二凶의 列傳으로 되어 있다. 특별히 새로 정한 編目은 없으나 佞倖을 恩倖으로 고치고 「二凶傳」을 卷末에 附傳으로 넣었다. 특히 『宋書』의 列傳에는 立傳한 필요가 없는 인물이 있거나 北魏의 사실에 錯誤가 많으니, 沈約은 文人을 중시하여 謝靈運·顏廷之·袁淑·袁粲과 같은 人物을 獨立된 卷에 넣고 있다. 『宋書』에는 表가 없으나 후대에 補充한 것으로 淸代 萬斯同의 「歷代年表」에 3編이 있다.
일반적으로 六朝의 正史는 거의가 당시의 문인귀족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으니, 沈約의 『宋書』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 때문에 역사의 현실에 대한 감상에 빠진 것도 있었던 것 같다. 더우기 本紀의 열전에 대해서는 특정한 인물에 대해서 그가 행한 惡事를 은폐한 것이 지적된다. 이는 『宋書』列傳에 실린 인물의 자손이 당시에 현존해 있고, 또 대부분은 朝廷의 고관이었으므로 그 사실을 直書하면 해로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宋書』列傳은 그 인물의 관력을 열거하는 데에 주력하여 무미건조한 느낌을 주는데, 이것은 『宋書』가 속성으로 이루어진 책으로 그 사료를 熟成할 여유가 없었던 結果이다.
≪參考文獻≫
『四庫全書 總目提要』 45 正史類 1.
高柄翊, 「中國正史의 外國列傳-朝鮮傳을 中心으로-」『東亞交涉史의 硏究』1970, 서울大出版部.
楊家駱主編, 『二十五史述要』世界書局印行.
李宗侗, 『史學槩要』1968, 正中書局.
岡崎文夫, 「梁の沈約と宋書」『歷史と地理』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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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02
『宋書』의 「夷蠻列傳」은 「索虜列傳」· 「鮮卑吐谷渾傳」과 더불어 3卷으로 이루어진 外國列傳 중의 하나인데, 그 내용은 다시 南夷·西南夷·東夷·蠻의 순으로 編目이 나뉘어져 있다. 이와 같이 夷 또는 蠻으로 다수의 異民族을 通稱하고 그를 한데 묶어 기술함은 바로 앞서 劉宋代에 편찬된 『後漢書』의 「東夷列傳」과 「南蠻西南夷傳」에서 영향받은 것이라 하겠으며, 특히 『宋書』의 경우 「北魏列傳」을 「索虜傳」이라 하였음을 보면 그 이면에는 다수의 北方系 異民族 王朝의 대두로 華·夷의 구별이 한층 강조되는 南北朝時代의 思潮가 크게 작용하고 있다고 하겠다.
≪參考文獻≫
高柄翊, 「中國正史의 外國列傳」『東亞交涉史의 硏究』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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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03
『宋書』의 高句驪國傳은 앞서 편찬된 『後漢書』나 『三國志』와는 달리 일반적인 生活相이나 制度 또는 前代의 交聘關係 기사를 수록하지 않고, 대부분 劉宋 當代 즉, 高句麗로서는 長壽王 一代의 交聘往來 기사로 일관하고 있는데, 그 또한 거의 高句麗의 貢獻·高句麗王에 대한 封爵記事·그에 결부되는 詔文 등으로 이루어져 있어 그 이면에 華夷觀이 크게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만 馮弘의 高句麗로의 투항에 관련된 내용만이 다소 색다른 면을 보이고 있다.
≪參考文獻≫
高柄翊, 「中國正史의 外國列傳」『東亞交涉史의 硏究』1970.
朴性鳳, 「東夷傳 高句麗關係記事의 整理」『韓國硏究資料叢刊』6, 1981, 慶熙大傳統文化硏究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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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04
『宋書』에서는 高句麗를 高句驪·高驪·高麗 등으로 表記하고 있다. 中國正史의 경우 高句麗의 表記는 『漢書』에서 『晋書』에 이르기까지는 高句驪 또는 高句麗(『後漢書』 이후)로 표기하였으며, 그 略稱에 해당되는 것으로 句驪 또는 句麗라고 표기하여 왔다. 그런데 『宋書』에서는 다시 그 略稱에 해당하는 高驪 또는 高麗라는 表記가 나타나며, 이후의 諸史書에서는 『梁書』를 제외하고는 모두 高句驪 또는 高麗로 그 表記가 통일되고 있다. 그리고 『梁書』의 경우도 驪字를 사용한 表記는 前史를 많이 전재하고 있는 高句麗傳에만 국한되어 나오고 있어 같은 성향을 보인다.
  高句驪 句驪 高句麗 句麗 高 驪 高 麗
宋 書   
南齊書     
梁 書
陳 書    
魏 書    
北齊書     
周 書    
<참조>
『三國志』高句麗傳 註 2)
高句麗
高句麗의 語源에 대해 살펴보면 외몽고 Orkhon 河畔에 세워진 古突厥碑文에선 Bökli라 하였는데, 古터키語에서 B音은 M音과 換置됨으로 Bökli는 Mökli로서 貊句麗를 표기한 것이다. 『梵語雜名』에서도 高麗를 畒俱里(Mokuli)로 訓을 붙여 놓았다. 이로 보아 高句麗는 원래 句麗에 해당하는 土着語의 音에서 비롯하는 단어에 ‘高’字가 美稱으로 덧붙여진 것이며 때로는 그 種族名에 따라 ‘貊’ 字를 冠하기도 한 것 같다. 中原高句麗碑에선 高麗로 표기하였고, 『魏書』이후『周書』·『隋書』등에서도 高麗로 기술하였다. 이는 곧 5C 이후부터는 高句麗가 國內外에서 高麗로도 稱해졌음을 말하여 준다. 『日本書紀』에서도 고구려를 狛(고마) 또는 高麗로 표기하였다.
句麗라는 말의 語源에 대해서는 城 또는 谷·洞·邑 등을 뜻하는 고구려말 ‘溝漊’에서 비롯하였다는 說이 유력하다. ‘忽’을 이와 같은 말로 보기도 한다.
高句麗國의 기원에 관해 『三國史記』에선 B.C. 37년 夫餘에서 南下한 朱蒙集團에 의해 건국되었다고 한다. 700년 唐의 洛陽에서 죽은 고구려유민 高慈의 墓誌에서는 고구려가 B.C. 40년에 건국되었다고 하여 비슷한 紀元을 전한다. 이는 고구려국 존립 당시 桂婁部 王室의 입장에서 정립된 建國 紀年이다. 그런데 『三國史記』의 朱蒙傳說에 의하면 朱蒙이 내려올 당시 이미 先住集團으로서 松讓王의 沸流國이 존재하고 있다. 이것은 桂婁部 王室의 대두가 그전 단계부터 압록강 중류유역일대에 전개되고 있던 高句麗族의 諸集團의 성장을 토대로 하여 가능했음을 말해준다. 중강군 토성리와 시중군 노남리 등에서 발견되는 冶鐵址를 포함한 B.C.1세기 무렵을 前後한 시기의 철기문화 유적들은 그러한 集團들이 남긴 자취이다.
『漢書』 「地理志」에는 玄菟郡의 屬縣으로서 高句驪縣이 있는데, 이는 곧 현도군이 설치된 B.C. 107년에는 이미 고구려라는 명칭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현도군은 고구려족의 저항을 받아 B.C. 75년에 興京 老城方面으로 退縮케 되었고 압록강 중류 유역의 고구려족은 漢의 직접적인 지배망에서 벗어났다. 그뒤 계속된 漢郡縣의 간접적인 지배망과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일련의 투쟁을 하면서, 이 지역의 諸集團들은 곧 『三國史記』에서 傳하는 某某那와 같은, 상호통합과 聯盟을 해나가 강력한 고대국가체제를 구축해 나갔다. 이러한 一連의 과정 속에서 諸那集團을 통합하는 주도권이 消奴部에서 桂婁部로 넘어가게 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消奴部에서 桂婁部로의 王室의 交代는 聯盟體長의 交替였으니, 고구려족 전체의 입장에서 보면 연장선상으로 파악될 수도 있다. 高句麗 末期의 秘記類에서 보이는 高句麗 900年 有國說이나 文武王의 安勝에 대한 册封文에서 보이는 800년 有國說은 그러한 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參考文獻≫
李丙燾, 「高句麗國號考」『서울大論文集』3, 1956(『韓國古代史硏究』1976, 博英社)
李弘稙, 「高句麗秘記考」『歷史學報』17·18 合輯, 1962.
盧泰敦, 「三國의 成立과 發展」『한국사』1977.
岩佐精一郞, 「古突厥碑文のBökli及びPar Purmについて」『岩佐精一郞遺稿』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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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05
漢의 遼東郡은 그 初期의 위치에 있어서는 많은 논란이 되고 있으나 中國正史에 나타나는 後代의 이해로는 대체로 遼河를 中心으로 주로 그 以東에 위치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따라서 이 기사는 당시 高句麗의 영역이 遼河 地域에 이르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참조>
『史記』 「朝鮮列傳」 註 8)
遼東
秦·漢代 遼東의 位置해명은 古朝鮮의 영역 문제를 이해함에 있어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史學界에서는 遼東의 위치비정을 둘러싼 논의가 다양하게 개진되어 왔다. 종래 古朝鮮의 영역을 鴨綠江 이남지역에서 찾은 견해에 의하면 秦·漢代 遼東은 현재 遼河에서 鴨綠江에 이르는 지역으로 이해하며, 또 古朝鮮 영역을 淸川江 이남으로 이해하는 견해에 따르면 遼東의 위치는 遼河 以東에서 淸川江에 이르는 지역으로 제시되고 있다. 따라서 이같은 견해에 의하면 秦·漢代 遼東郡의 領域은 遼河 이동지역이 되며 遼東과 遼西의 境界가 현재의 遼河로서 파악케 된다.
한편, 李趾麟은『戰國策』 「燕策」의 ‘蘇秦……說燕文侯曰 燕東有朝鮮遼東’이란 내용에서 朝鮮의 遼東이 존재했음을 강조하고, 이 지역에 점차 秦의 세력이 침투하였고 漢初에 ‘燕分爲遼東’(『史記』 「秦楚之祭月表」義帝 元年)한 사실 등에 근거할 때 秦·漢初에는 遼東國과 遼東郡이 존재했다고 이해하였다. 즉, 燕王 韓廣이 遼東王이 되어 無終에 도읍하고 燕將 戚茶가 燕의 王이 되어 薊에 도읍한 사실 (『史記』 「項羽列傳」)에서 遼東國과 遼東郡이 구별되고 있음을 강조하고 各都邑地를 고려하여 燕과 구별되는 遼東을 灤河이동에서 찾고 있다. 이같은 내용은 秦二世가 碣石山에 다녀온 사실을 遼東에 갔다온 것으로 이해하여, (『史記』 「秦始皇本紀」) 현재의 山海關에 존재한 碣石山의 위치에 의하여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고 설명하였다. 또한 현재의 灤河를 당시에는 遼水로 稱했음을 논증하면서 이를 보강하여 秦·漢初의 遼東은 현채의 灤河이동임을 강조하였다. ( 「秦·漢 遼東郡의 위치」pp.55~64) 이같은 견해는 최근 尹乃鉉에 의해 부연되고 있다. ( 「古朝鮮의 위치와 疆域」 pp.15~80) 그러나 이러한 견해들은 史料해석에 논리적 비약이 심하여 많은 문제점들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최근에 제기된 고조선의 중심이 요등에서 大同江 유역으로 이동하였다는 견해에 의하면, 燕代의 遼東郡은 遼河 中流의 군사기지에 불과한 것이있으며, 秦代에는 그 범위가 압록강까지 확대되였으나 군현지배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漢代부터라고 한다. 따라서 燕將 秦開 침입 이전의 고조선 영역은 요동을 중심으로 大凌河 유역에까지 이르렀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徐榮洙, 「古朝鮮의 위치와 강역」)
이와 같이 秦·漢代 遼東의 위치에 관한 현재의 논의는 그 西邊이 현재의 遼河라는 견해와 灤河라는 견해로 나누어짐을 알 수 있다. 이는 古朝鮮의 中心地가 韓半島인가 또는 현재의 遼東지역인가라는 문제 및 古朝鮮 강역의 범위가 어디까지인가 하는 문제와 연결되는 중요한 쟁점이다. 그린데 최근의 遼東지역의 考古學的 發掘成果와 文獻考證에 의거할 때 古朝鮮의 초기 中心地는 현채의 遼東지역으로 이해되어지며, 특히 大凌河以東 지역에서 古朝鮮의 독자적 문화와 정치무대를 보게 되므로 이에 대한 충분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參考文獻≫
『管子』卷23.
『山海經』卷12 「海內北經」
『漢書』卷28 「地理志」 第8下 遼東郡條.
『水經』卷上 「 大遼水」
李丙燾, 「衛氏朝鮮興亡考」『韓國古代史硏究』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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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乃鉉, 「古朝鮮의 위치와 疆域」『韓國古代史新論』1986.
徐榮洙, 「古朝鮮의 위치와 강역」『韓國史市民講座』제 2 집, 1988.
리지린, 「진(秦)·한(漢)대 료동군의 위치」『력사과학』1963년 1호:『고조선연구』1964.
리상호, 「고조선 중심을 평양으로 보는 견해들에 대한 비판」 (상)『력사과학』1963년 2호.
허승종, 「중국『사기』에 보이는 ‘료동고새’에 대하여」『력사과학』1966년 2호; 「기원전 3세기말∼2세기초의 한나라 료동군(遼東郡)에 대하여」『력사과학』1967년 4호.
리순진·장주협, 『고조선문제연구』1973.
최택선·리란우편, 『고조선문제연구론문집』1976.
文物編集委員會編, 『中國考古學三十年』1981.
유. 엠. 부찐, 『古朝鮮』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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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06
高璉은 高句麗 第20代 長壽王으로 『三國史記』에서는 그의 諱를 巨璉이라고도 하였다. 그는 413年부터 490年까지 약 80年間의 在位기간 동안에 수도를 國內城에서 平壤으로 옮겨 적극적인 南下政策을 폈으며, 中國에 대해서는 北朝의 魏, 南朝의 宋·齊의 대립된 두 세력을 조종하는 外交關係를 맺어 高句麗의 國祭的 位置를 높였다. 高句麗가 정치·경제 등 가장 완비된 제도를 갖추면서 일종의 專制王權을 구축한 것도 이 시기의 일이며(李基東, 「貴族國家의 形成과 發展」pp.170~172) 그 末年에는 滿洲와 半島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옹위하여 中國과 雌雄을 겨루게 되었다.
高璉의 기록과 관련하여 高句麗王의 姓에 대해 살펴보면 本文에서는 高璉이라 하여 高句麗王의 姓이 ‘高’임을 밝히고 있는데, 이 기록은 『三國史記』東明聖王條의 내용을 제외하고는 실제 高句麗의 王姓을 高로 표현한 처음의 예이다. 『三國史記』에서는 始祖 東明聖王의 ‘姓은 高氏’라 하여 高句麗의 王室姓이 高氏임을 傳하고 있다. 그리고 『三國遺事』 「王曆」에 의하면 제2대 琉璃王으로부터 연이은 3王을 ‘姓解氏’라고 하고 있으며, 또 제3대부터 5대까지 3王의 경우는 그 名에 解가 모칭되고 있다. 따라서 高句麗의 王室姓이 당초부터 高氏였는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이 기록과 더불어 이후 高句麗人의 姓에 高氏가 다수 나타난다는 점을 보면 적어도 長壽王代 이후에는 王室姓이 高였음은 분명하다고 하겠다. 그리고 高句麗人으로 後燕의 慕容寶의 養子가 되었던 慕容雲에 관하여 『晋書』 「慕容雲載記」에서 ‘祖父和 高句驪之支庶 自云高陽氏之苗裔 故以高爲氏焉’이라고 하였음을 보면 그것은 다시 晋末 以前으로 소급된다고 생각된다. 다만 여기서 ‘高陽氏之苗裔云云’함은 대체로 중국적인 附會라고 생각되며, 『三國史記』에 전하는 바와 같이 그 國名에서 유래한 것으로 생각된다.
<참조>
1.『魏書』百濟傳 註 32)
璉(長壽王)
『三國史記』 「高句麗本紀」長壽王 卽位條에 ‘長壽王 諱巨連 一作璉 開土王之元子也’라 되어 있다. 中國의 正史 中 高句麗 王姓을 ‘高氏’라 한 것은『宋書』가 그 최초이다.『晋書』 「慕容雲載記」및『資治通鑑』 「安帝紀」隆安 元年(397)條에도 ‘高句麗 自云高陽氏之苗裔 故以高爲氏’라 되어 있다.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8 「高句麗本紀」6 長壽王 卽位條.
『資治通鑑』卷109 「安帝紀」31 隆安 元年條.
2.『魏書』百濟傳 註 33)
民庶崩離
이 記事에 관하여 단순히 高句麗를 비난하기 위한 내용 이상의 것이 있으며, 이것은 長壽王이 그의 平壤遷都와 거기에 따른 徒民政策 및 南下政策에 반대하는 大臣·疆族을 억압했던 史實로서 이해된다고 하는 견해와, (李萬烈, 『講座三國時代史』p.145) 이를 부연하여 大臣疆族을 무수히 戮殺하였다는 것은 平壤遷都에 따른 강력한 王權强化政策에 반발하는 勢力들에 대해 長壽王이 대숙청을 단행한 데서 빚어진 産物이라 하겠으며 이것은 결국 王權에 반발하는 貴族勢力들이 淘汰되고 王權의 專制化가 한층 强化되어진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 보는 견해가 있다.(盧重國, 「高句麗律令에 關한 一試論」p.104)
≪參考文獻≫
李萬烈, 『講座三國時代史』1976, 知識産業社.
盧重國, 「高句麗律令에 關한 一試論」『東方學志』21, 1979.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3 「高句麗本紀」1 始祖 東明聖王條.
『三國遺事』卷1 「王曆」
『晋書』卷124 「慕容雲載記」24.
李基東, 「貴族國家의 形成과 發展」『韓國史講座』(古代編), 1982, 一潮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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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07
長史란 諸史의 長이라는 의미에서 秦代에 비롯된 官職名으로 高句麗의 경우를 보면 『三國史記』 「職官志」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梁書』高句驪傳에는 廣開土大王으로 추정되는 高句麗王 安의 代에 처음으로 長史·司馬·參軍 등의 官職이 설치되었다고 전하며, 또 本書를 비롯하여 몇몇 史書에는 長壽王代에 長史라는 職名으로 中國에 使臣으로 往來한 人物이 다수 적출되고 있다. 따라서 高句麗에서는 대략 廣開土大王代로부터 長壽王代에 걸쳐 長史라는 官職이 있었음이 확실하다.
그런데 『梁書』에서 長史·司馬·參軍의 職이 함께 설치되었다고 전하는 예와 더불어, 『晋書』 「職官志」에서 諸公 및 開府位從公者의 경우 그 屬官에 長史를 두고, 그 중 加兵者에게는 司馬를 증치하고 持節都督이 된 자에게는 參軍을 증치하였다고 하는 점과, 本傳에서 高句麗王 高璉을 使持節都督營州諸軍事征東將軍高句麗王樂浪公으로 封하고 있는 점을 관련지어 보면, 高句麗의 長史 및 司馬·參軍 등은 바로 高句麗王이 封爵됨에 따른 屬官으로 설치된 것 같다. 즉, 長史라는 職은 高句麗 國內의 職制라기 보다는 中國과의 封爵關係에 부수되는 것으로 對中國關係에서만 이용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특히 高句麗에 있어서 대체로 中國에 使臣으로 왕래한 사람들이 長史라는 職名을 갖고 있는 점 및 『翰苑』所引『高麗記』에서 小城에 可邏達을 두었는데 長史에 비정된다고 한 점 등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후 南北朝時代의 諸國이 모두 晋의 制度를 답습하여 長史·司馬·參軍 등이 諸公의 幕僚 중 그 주축을 이루고 있음을 보면 그러한 체제는 한동안 지속되었다고 보여진다.
≪參考文獻≫
『晋書』卷24 「職官志」14.
『宋書』卷39 「百官志」29上.
『南齊書』卷16 「百官志」8.
『梁書』卷54 「東夷列傳」高句驪條.
『翰苑』所引『高麗記』
金翰奎, 「南北朝時代의 中國的 世界秩序와 古代韓國의 幕府制」『韓國古代의 國家와 社會』1985, 一潮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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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08
營州는 옛 12州의 하나로 舜이 靑州의 東南 遼東의 땅을 나누어 설치하였다고 한다.
대략 지금의 河北省에서 遼寧省에 이르는 지역이다. 그러나 歷代의 營州는 그 領域과 治所가 다소 변하여 갔다. 당대인 晋代에는 전하는 바 없었으나 北魏의 營州는 『魏書』 「地形志」에 의하면 領郡이 6이고 領縣이 14이며, 治所는 지금의 熱河省 朝陽縣인 和龍城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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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09
持節이란 天子가 내린 符節을 지녔다는 뜻으로 漢代에서 비롯되었다. 晋代에는 使持節을 上으로, 持節을 中으로, 假節을 下로 삼았는데, 將軍이 君主로부터 독자적인 권한을 위임받은 것을 의미하는 加號로 사용되었다.
都督이란 軍事權을 장악한다는 의미로 역시 漢代에서 비롯되었다. 晋代에는 都督諸軍을 上으로, 監諸軍을 次, 督諸軍을 下로 삼았는데, 일정지역의 軍統帥權을 위임받는 것을 의미하는 加號였다.
이 양자는 魏·晋이래 대체로 刺史에게 함께 주어졌으며, 그 책임의 경중에 따라 使持節·都督과 持節·督으로 나누어 加號되고 있다.
使持節都督營州諸軍事에 高璉을 除授함은 곧 東晋이 高句麗의 長壽王에게 營州의 軍事的 統帥權을 위임한다는 의미가 된다. 그런데 당시 營州가 北燕의 領域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대체로 北方의 諸朝를 견제하는 의미에서 주어진 형식적인 加號였다는 감이 없지 않다.
그러나 廣開土王陵碑에서 전하듯이 永樂 5年(395) 廣開土王이 碑麗를 征討하고 襄平道를 따라 北豊 등지를 경유하여 回軍함이나, 同王 11년 遼河를 넘어 後燕의 都城에 가까운 宿軍城을 공략한 사실, 또 좀 뒤의 일이지만 北燕의 末王 馮弘이 高句麗에 투항한 사실 등을 고려할 때 그러한 加號는 일면 좀 더 실질적인 高句麗의 營州地方에 대한 점유 내지는 軍事的 영향력이 있어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後日『舊唐書』에서 전성기 高句麗의 疆域이 西北으로는 遼水를 건너 營州에 이르렀다고 함도 바로 그러한 상황을 전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한편 이 기사 이후 南朝의 諸王朝는 계속 高句麗王을 册封함에 있어 持節·都督의 號를 加하고 있으며, 특히 宋代이후에는 督平州軍事를 더하여 營·平 2州의 都督으로 임명하고 있는데, 그 또한 위와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營州·平州 地域이 高句麗의 점유 내지는 영향속에 있었음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參考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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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書』卷39 「百官志」29上.
『南齊書』卷58 「東南夷列傳」高句麗國條.
『梁書』卷54 「東夷列傳」高句驪條.
『翰苑』所引『高麗記』
金翰奎, 「南北朝時代의 中國的 世界秩序와 古代韓國의 幕府制」『韓國古代의 國家와 社會』1985.
徐榮洙, 「高句麗의 大陸進出과 對中外交의 性格」『季刊京鄕』87년 여름호,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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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10
여기서 樂浪公이란 長壽王에게 주어진 封爵이다.
樂浪이라 함은 前漢의 武帝가 衛滿系의 古朝鮮을 멸망시키고 설치한 漢의 東方4郡중 朝鮮縣이 首縣으로 되어 있는 樂浪郡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후 歷代 中國王朝에서 韓民族의 유력한 諸王에게 樂浪의 명칭으로 封爵한 예가 다수 적출된다. 즉, 高句麗의 長壽王과 文咨明王이 樂浪公이라는 封爵을 받고 있으며, 新羅의 경우 眞興王이후 眞智王과 武烈王, 孝昭王을 제외하고는 聖德王까지의 7王이 樂浪郡公 혹은 樂浪郡王이라는 封爵을 받고 있다.
이러한 樂浪이라는 명칭으로서 高句麗·新羅王에 대한 封爵은 대체로 樂浪郡이 소멸된 후에도 中國의 諸王朝가 樂浪을 그들의 東方領域의 槪念으로 사용한 데에서 온 것이라고 생각되며, 다른 한편으로는 『三國史記』에 전하는 大武神王·美川王代의 高句麗의 樂浪征伐과도 어떤 연관성이 있지 않은가 한다.
그리고 특히 高句麗王에 대한 樂浪公의 封爵은 唐代에 이르러 高句麗의 首都였던 平壤에 樂浪郡의 중심지가 있었다는 說이 성립되는 것과 일정한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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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11
이 記事가 本傳에 登載됨은 本文 以後에 나타나는 宋 高祖의 詔文에서 高句麗王에 대한 封爵이 이 爵號를 계속 이어나가고 있는 데에서 연유한 것이라고 생각되며, 晋에서 長壽王에게 내린 이 爵號는 3國의 王에 대한 최초의 中國爵號이다. 本文의 내용과 대응되는 기사로 『晋書』 「安帝紀」에는 ‘(義熙 九年) 是歲 高句麗·倭國及西南夷銅頭大師 並獻方物’로, 『三國史記』長壽王 元年條에는 ‘遣長史高翼入晋奉表獻赭白馬 安帝封王高句麗王樂浪郡公’이라 되어 있다.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8 「高句麗本紀」6 長壽王 元年條.
『晋書』卷10 「安帝紀」10 義熙 9年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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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12
本文의 내용과 대응하는 記事로 『宋書』 「武帝紀」에는 ‘征東將軍高句驪王高璉進號征東大將軍 鎭東將軍百濟王扶餘映進號鎭東大將軍’이라 되어 있으며, 『三國史記』長壽王 元年條 및 『宋書』百濟國傳에도 그 대응기사가 나타나고 있다.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8 「高句麗本紀」6 長壽王 元年條.
『宋書』卷3 「武帝紀」3下 永初 元年條; 卷97 「夷蠻列傳」百濟國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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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13
平州는 원래 幽州界로서 後漢末 公孫度가 일시 平州牧을 두기도 하였으나, 晋代에 다시 幽州에서 5郡國을 나누어 설치된 州이다. 지금의 遼寧省·熱河省 등지의 滿洲 地域으로 晋代에는 統縣이 36개였으며 그 治所는 昌黎였다. 그리고 北魏에서는 『魏書』 「地形志」에 의하면 領郡이 2이고 領縣이 5로 治所는 지금의 河北省 盧龍縣인 肥如縣이다.
≪參考文獻≫
『晋書』卷14 「地理志」4 平州條.
『魏書』卷106上 「地形志」5上 平州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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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http://db.history.go.kr/id/sa_001_0030_0020 (accessed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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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sa_001_0030_0020,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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