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百濟國033033 百濟國傳 南北朝 正史의 東夷傳은 그 편찬 시기나 내용의 성격으로 보아 두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한 유형은 『宋書』·『南齊書』·『魏書』등이고, 또 다른 유형은 『梁書』·『周書』·『隋書』·『南史』『北史』등이다. 전자는 南北朝時代에 편찬된 것으로 各 王朝의 멸망 직후에 이루어졌으며, 또한 前史書에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경향의 기술 방법이 채택되고 있다. 즉, 前史書의 轉錄없이 독자적인 외교관계 기사를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反하여 후자는 거의 唐의 太宗 年間에서 高宗 初에 걸쳐서 이루어진 것으로 唐初에 형성된 공통적인 東夷傳 記述方式을 보이고 있다.
『宋書』 百濟傳에서는 전적으로 宋一代의 對百濟 關係 記事만이 기록되어 있을 뿐, 通
時代的이고 일반적인 사회상에 대한 기술은 전혀 없다. 따라서 『後漢書』와 같이 前史書를 轉錄한 부분이 없고, 宋과 百濟와의 朝聘 往來·封王의 記事만으로 채워져 있다. 이 外交 기록은 대부분 『三國史記』에도 나타나지 않는 기사로서 百濟 腆支王~蓋鹵王에 이르는 시기의 對中國關係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로 평가되며, 또 백제의 晋平郡 설치 등 遼西 진출 기록이 처음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參考文獻≫
金庠基, 「百濟의 遼西經略에 對하여」『白山學報』3, 1967.
高柄翊, 「中國正史의 外國列傳-朝鮮傳을 中心으로-」『東亞交涉史의 硏究』1970, 서울大出版部.
朴性鳳, 『東夷傳 百濟關係 資料』(『韓國硏究資料叢刊』제7집), 1985, 慶熙大傳統文化硏究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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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濟國034034 百濟國 百濟는 원래 辰王이 지배하는 馬韓을 구성하는 城邑國家의 하나인 伯濟가 발전한 것이었다. 伯濟가 언제부터 漢江 유역 일대의 여러 城邑國家를 거느리는 聯盟王國으로 성장하였는지 확실치가 않다. 그러나 魏 지배하의 樂浪郡과 帶方郡이 대규모 침략을 해오던 A.D. 246년에는 이미 한강유역에 새로운 세력이 크게 성장하고 있었다.
<참조>
『魏書』百濟傳 註 2)
百濟國
(가) 國號
國號와 관련, 參考할 史料는 다음과 같다.
①『後漢書』「東夷列傳」韓條: 韓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辰 …… 凡七十八國 伯濟是其一國焉
②『梁書』「東夷列傳」百濟條 및『南史』「夷貊列傳」百濟條: 百濟者 其先東夷有三韓國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弁韓·辰韓各十二國 馬韓有五十四國 大國萬餘家 小國數千家 總十餘萬戶 百濟卽其一也
③『隋書』「東夷列傳」百濟條: …… (中略) …… 初以百家濟海 因號百濟
④『北史』「列傳」百濟條 …… (中略) …… 初以百家濟 因號百濟
⑤『三國史記』「百濟本紀」始祖溫祚王條: …… (中略) …… 溫祚都河南慰禮城 以十臣爲輔翼 國號十濟 是前漢城帝鴻嘉三年也 沸流以彌鄒土濕水鹹 不得安居 歸見慰禮 都邑鼎定 人民安泰 遂慙悔而死 其臣民皆歸於慰禮 後以來時百姓樂從 改號百濟
이러한 史料를 採用, 語源的으로 해석하여 ‘伯濟=百濟=찻=밝은 성’이라고 한 견해도 있고, (李丙燾,「歷代國號의 變遷」pp.22~23) 歷史的·國家段階의 發展으로 把握하여 ‘伯濟=百濟=部族國家=部族聯盟國家(征服的 팽창단계)로 발전했다고 한 硏究도 있다.(金哲埈,「百濟社會와 그 文化」p.48; 李萬烈,「三國의 抗爭」p.463)
(나) 建國說話
百濟 建國說話와 關係있는 史料는『三國史記』外에 中國·日本의 史書에도 기재되어 있다. 百濟의 建國始祖說話는 대체로 아래의 네 가지로 分類할 수 있다.
① 始祖 溫祚說(『三國史記』「百濟本紀」)
② 始祖 沸流說(同上 割註)
③ 始祖 都慕說(『續日本記』「桓武紀」延歷 9년(790) 7월조)
④ 始祖 仇台說(『周書』및『隋書』百濟傳)
이 중 ③의 始祖 都慕說은 百濟 멸망 후 日本에 이주한 왕실의 後裔氏族인 이른바 百濟王 仁貞이 百濟의 太祖를 都慕王이라 하였는데 이 都慕는 鄒牟(朱蒙)를 가리키는 것과,『新撰姓氏錄』에 수록되어 있는 百濟계통 후예씨족들의 系譜에 그들 각자의 中始祖인 貴首王·毘有王·武寧王을 모두 都慕王의 후손이라 기록하고 있어, 日本에 망명한 百濟왕족의 후예들이 시조를 都慕王으로 여기고 있는 데서 百濟가 본래 高句麗와 밀접한 관계에 있던 어떤 族團에 의해서 건국된 나라임을 짐작케 해주고 있으며, (李基東,『韓國史講座』p.131) 이는 全 扶餘族이 共通으로 가지는 始祖 東明說이다.(金哲埈,「百濟建國考」p.8)
④의 始祖 仇台說은 建國說話가 아니라 古爾王代에 百濟國家가 성장하여 이를 인식하게 된 中國側의 史實 記錄의 성격을 가지는 것인 바 이에 대해서는『周書』및『隋書』에서 다루어질 것이다.
①과 ②의 始祖 溫祚說과 始祖 沸流說은 建國主體勢力·出身·建國年代·王室系譜 등의 문제로까지 발전되어지기 때문에 百濟史硏究에 있어서 始發點이 된다고도 할 수 있을 만큼 복잡성을 띄고 있는데, 金哲埈은 百濟의 溫祚 始祖說話는 東明神話의 成立期間보다는 뒤늦은 그 다음 단계에서 東明神話가 再生産되는 형태로 성립되었던 까닭에 東明神話의 附屬的인 性格을 면치 못하나, 그것이 神話的 性格의 것이 아니라, 說話 傳承의 性格을 가졌다는 점에서 그 說話의 歷史性이 보다 信憑되는 면이 있는데, 北扶餘·高句麗(卒本扶餘)·東濊(東扶餘)·百濟(南扶餘)가 分裂하기 이전 段階에 北中國 어느 地域 原住地에(『魏書』에 보이는 ‘昔北方有槀離之國者’의 槀離之國도 原住地는 아닌 것 같고, 지금으로서는 山東省 방면으로 추측함) 있었던 全 扶餘族의 生活圈이 무너지면서 各部族別로 東으로 移動할 때에 東明神話의 發生이 있었다고 보았다. 따라서 原住地에 있었을 적에도 그 原貌를 알 수는 없으나 다른 形態의 神話가 따로 있었는데, 第1次 分裂이 있었을 적의 神話가 古之亡人인 北扶餘族의 東明神話로 나타났고, 第2次 分裂時의 所産은 高句麗系의 東明神話로서, 이것은 1次 所産인 北扶餘의 槀離國說話와 高句麗 太祖王系 이후의 高句麗 王系神話를 연결시킨 것이며, 그 다음 第3次로서는 高句麗의 傍系로서의 百濟의 溫祚說話가 성립되었다고 보았다. 또한 始祖 溫祚說話 자체는 始祖 沸流說話보다 後期에 成立되면서 뒷 時代의 윤색을 받았다고 하였다.(金哲埈, 앞의 논문, pp.10~45)
≪參考文獻≫
『三國史記』卷23「百濟本紀」1 始祖溫祚王條.
『後漢書』卷85「東夷列傳」韓條.
『梁書』卷54「東夷列傳」百濟條.
『隋書』卷81「東夷列傳」百濟條.
『南史』卷79「東夷列傳」下 百濟條.
『北史』卷94「列傳」百濟條.
『續日本記』卷40「桓武紀」延歷 9年條.
李弘稙,「百濟建國說話에 대한 再檢討」『韓國古代史의 硏究』1971, 新丘文化社.
李丙燾,「歷代國號의 變遷」『斗室餘滴』1975, 博英社.
金哲埈,「百濟社會와 그 文化」『韓國古代社會硏究』1975, 知識産業社;「百濟建國考」『百濟硏究』13, 1983.
千寬宇,「三韓의 國家形成-三韓攷-」『韓國學報』2·3合輯, 1976.
李鍾旭,「百濟의 國家形成」『大丘學報」11, 1976;「百濟王國의 成立」『大丘學報』12·13合輯, 1977.
李萬烈,「三國의 抗爭」『韓國史』2, 1978, 국사편찬위원회.
車勇杰,「百濟의 祭天祀地와 政治體制의 變化」『韓國學報』11, 1978.
盧明鎬,「百濟의 東明神話와 東明廟」『歷史學硏究』X, 1981.
李基東,「百濟 王室交代論에 대하여」『百濟硏究』12, 1981(『百濟硏究』13 再收錄, 1983.
盧重國,「百濟國의 成立과 發展」『震檀學報』60(韓國文化심포지움『百濟初期文化의 綜合的 檢討』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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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본래 高[句]驪와 더불어 遼東의 동쪽 1천여리 밖에 있었다.035035 百濟國 本與高驪俱在遼東之東千餘里 百濟가 高句麗와 同種이라는 것은 모든 史書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더 評論할 필요가 없다. 百濟의 位置를 설명하면서 高句麗를 끌어들인 것은 이 時期의 高句麗가 상대적으로 강성하였음을 보여 준다. 『三國志』「東夷傳」高句麗條에 ‘高句麗在遼東之東千里’라는 記事가 있으니, 『宋書』에서 언급하고 있는 百濟와 高句麗가 遼東의 東쪽 千里에 있다는 것은 『三國志』의 자료에 근거하여 기술하였음을 보여준다.
≪參考文獻≫
『三國志』卷30「東夷傳」高句麗條.
鄭寅普, 『朝鮮史硏究』1947, 서울신문사.
申采浩, 『朝鮮史硏究草』1945; 『朝鮮上古史』1948, 鐘路書院.
金映遂, 「百濟國都變遷에 對하여」『全北大論文集』1, 1957.
金哲埈, 「韓國古代國家發達史」『韓國文化史大系』Ⅰ, 1964.
千寬宇, 「南北의 古代國家」『新東亞』97, 1972, 東亞日報社; 「三韓의 國家形成-三韓攷 第3部-」『韓國學報』3, 1976.
崔槿黙, 「百濟關係史料 其一」『百濟硏究』4, 1973.
李丙燾, 『韓國古代史硏究』1976, 博英社.
李萬烈, 「百濟의 成立과 發展」『講座三國時代史』1976, 知識産業社.
李鍾旭, 「百濟의 國家形成」『大丘史學』11, 1976.
朴進熙, 「三國의 爭覇와 그 領域變化」『檀國大碩士論文集』1982.
津田左右吉, 「百濟に關すゐ日本書紀の記載」『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8, 1921.
今西龍, 『百濟史硏究』1934, 近澤書店, 東京.
村上四男, 「百濟史についての一考察」『東洋史學論集』3號,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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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 고[구]려는 요동을, 백제는 遼西를 경략하여 차지하였다.036036 百濟略有遼西 百濟가 遼西地方을 占有하였다는 事實은 『宋書』·『梁書』 등의 中國史書에 등장하고 있어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百濟의 遼西경략에 대해서는 여기의 『宋書』 보다 『梁書』 百濟傳에서 한층 자세한 전말을 읽을 수 있다. 『梁書』 百濟傳에는 ‘其國本與句驪在遼東之東 晋世句驪旣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晋平二郡地矣 自置百濟郡’ 이라는 句節이 있다.
이 자료를 『宋書』와 비교하여 보면 百濟郡까지 거론하고 있다. 그런데 『梁書』의 기술은 당시 사신들의 來往이 잦았던 점에서 신빙성이 있다고 보아도 틀림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百濟의 遼西경략설은 『南史』의 百濟傳에도 同一하게 보이고 있으나, 『晋書』에서는 馬韓傳으로 대치시켜 놓았기 때문에 이 같은 사실들이 除外되어 있다.
여기서 한 가지 덧붙여 이야기해야 할 것은 『職貢圖』의 百濟國使條에 보이는 記錄들이다. 이 記錄의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百濟는 원래 來夷였던 馬韓에 속했던 나라이다. 晋末에 高句麗가 遼東 樂浪을 略有하였고 (百濟가) 遼西의 晋平縣을 略有하였다. 晋나라 시기부터 中國에 대하여 늘 貢物을 바쳐 常朝하였다.
『職貢圖』에 보이는 百濟國使의 記錄은 百濟를 說明하는 조항이지 高句麗를 대상으로 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高句麗가 遼東 樂浪을 점유하였고 또한 遼西의 晋平縣을 略有하였다고 서술해 놓고 있다. 이것은 앞에서 본 『梁書』의 구체적인 記錄이나 여기『宋書』의 記錄과 차이가 나고 있다. 따라서 『職貢圖』百濟國使條에 보이는 記錄에는 百濟라는 두 글자가 빠져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遼西의 晋平縣을 점유한 것은 高句麗가 아니고 百濟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우리나라측의 史書인 『三國史記』나 『三國遺事』에는 이러한 사실이 실려 있지 않은데 이것은 新羅 中心의 歷史서술에서 나타난 결과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자료의 누락으로 볼 수 밖에 없다고 생각된다.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해야 할 사항은 百濟가 晋나라 때 遼西·晋平 2郡을 차지하였다고 하는 바 바로『晋書』에 그러한 記錄이 없다는 점에서 이를 의심하는 의견도 있다.
≪參考文獻≫
『梁書』 卷54 「諸夷列傳」 百濟條.
『職貢圖』 百濟國使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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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庠基, 「百濟의 遼西經略에 對하여」『白山學報』3,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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方善柱, 「百濟軍의 華北進出과 그 背景」『白山學報』11, 1971; 「薉·百濟關係虎符에 대하여」『史叢』17·18合輯,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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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哲埈, 「百濟社會와 그 文化」『武寧王陵發掘調査報告書』1973.
李萬烈, 「百濟의 成立과 發展」『講座三國時代史』1976.
盧泰敦, 「古代國家의 成立과 發展」『韓國史』2, 1978, 國史編纂委員會.
李玟洙, 「百濟의 遼西經略에 關한 考察」『韓社大論文集』10, 1980.
徐榮洙, 「古代韓中關係硏究試論」『學術論叢』5, 1981.
李明揆, 「百濟對外關係에 關한 一試論-大陸進出說 考察을 위한 하나의 假說로서-」『史學硏究』37, 1983.
朴京哲, 「高句麗軍事行動에 關한 一考察- 5~7C 高句麗大陸政策과 關聯하여-」『高大大學院碩士學位論文』1985.
김세익, 「중국 요서지방에 있었던 백제의 군에 대하여」『력사과학』1,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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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가 통치한 곳은 晋平郡 晋平縣이라 한다.

註 033
百濟國傳 : 南北朝 正史의 東夷傳은 그 편찬 시기나 내용의 성격으로 보아 두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한 유형은 『宋書』·『南齊書』·『魏書』등이고, 또 다른 유형은 『梁書』·『周書』·『隋書』·『南史』『北史』등이다. 전자는 南北朝時代에 편찬된 것으로 各 王朝의 멸망 직후에 이루어졌으며, 또한 前史書에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경향의 기술 방법이 채택되고 있다. 즉, 前史書의 轉錄없이 독자적인 외교관계 기사를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反하여 후자는 거의 唐의 太宗 年間에서 高宗 初에 걸쳐서 이루어진 것으로 唐初에 형성된 공통적인 東夷傳 記述方式을 보이고 있다.
『宋書』 百濟傳에서는 전적으로 宋一代의 對百濟 關係 記事만이 기록되어 있을 뿐, 通
時代的이고 일반적인 사회상에 대한 기술은 전혀 없다. 따라서 『後漢書』와 같이 前史書를 轉錄한 부분이 없고, 宋과 百濟와의 朝聘 往來·封王의 記事만으로 채워져 있다. 이 外交 기록은 대부분 『三國史記』에도 나타나지 않는 기사로서 百濟 腆支王~蓋鹵王에 이르는 시기의 對中國關係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로 평가되며, 또 백제의 晋平郡 설치 등 遼西 진출 기록이 처음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參考文獻≫
金庠基, 「百濟의 遼西經略에 對하여」『白山學報』3, 1967.
高柄翊, 「中國正史의 外國列傳-朝鮮傳을 中心으로-」『東亞交涉史의 硏究』1970, 서울大出版部.
朴性鳳, 『東夷傳 百濟關係 資料』(『韓國硏究資料叢刊』제7집), 1985, 慶熙大傳統文化硏究所.
註 034
百濟國 : 百濟는 원래 辰王이 지배하는 馬韓을 구성하는 城邑國家의 하나인 伯濟가 발전한 것이었다. 伯濟가 언제부터 漢江 유역 일대의 여러 城邑國家를 거느리는 聯盟王國으로 성장하였는지 확실치가 않다. 그러나 魏 지배하의 樂浪郡과 帶方郡이 대규모 침략을 해오던 A.D. 246년에는 이미 한강유역에 새로운 세력이 크게 성장하고 있었다.
<참조>
『魏書』百濟傳 註 2)
百濟國
(가) 國號
國號와 관련, 參考할 史料는 다음과 같다.
①『後漢書』「東夷列傳」韓條: 韓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辰 …… 凡七十八國 伯濟是其一國焉
②『梁書』「東夷列傳」百濟條 및『南史』「夷貊列傳」百濟條: 百濟者 其先東夷有三韓國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弁韓·辰韓各十二國 馬韓有五十四國 大國萬餘家 小國數千家 總十餘萬戶 百濟卽其一也
③『隋書』「東夷列傳」百濟條: …… (中略) …… 初以百家濟海 因號百濟
④『北史』「列傳」百濟條 …… (中略) …… 初以百家濟 因號百濟
⑤『三國史記』「百濟本紀」始祖溫祚王條: …… (中略) …… 溫祚都河南慰禮城 以十臣爲輔翼 國號十濟 是前漢城帝鴻嘉三年也 沸流以彌鄒土濕水鹹 不得安居 歸見慰禮 都邑鼎定 人民安泰 遂慙悔而死 其臣民皆歸於慰禮 後以來時百姓樂從 改號百濟
이러한 史料를 採用, 語源的으로 해석하여 ‘伯濟=百濟=찻=밝은 성’이라고 한 견해도 있고, (李丙燾,「歷代國號의 變遷」pp.22~23) 歷史的·國家段階의 發展으로 把握하여 ‘伯濟=百濟=部族國家=部族聯盟國家(征服的 팽창단계)로 발전했다고 한 硏究도 있다.(金哲埈,「百濟社會와 그 文化」p.48; 李萬烈,「三國의 抗爭」p.463)
(나) 建國說話
百濟 建國說話와 關係있는 史料는『三國史記』外에 中國·日本의 史書에도 기재되어 있다. 百濟의 建國始祖說話는 대체로 아래의 네 가지로 分類할 수 있다.
① 始祖 溫祚說(『三國史記』「百濟本紀」)
② 始祖 沸流說(同上 割註)
③ 始祖 都慕說(『續日本記』「桓武紀」延歷 9년(790) 7월조)
④ 始祖 仇台說(『周書』및『隋書』百濟傳)
이 중 ③의 始祖 都慕說은 百濟 멸망 후 日本에 이주한 왕실의 後裔氏族인 이른바 百濟王 仁貞이 百濟의 太祖를 都慕王이라 하였는데 이 都慕는 鄒牟(朱蒙)를 가리키는 것과,『新撰姓氏錄』에 수록되어 있는 百濟계통 후예씨족들의 系譜에 그들 각자의 中始祖인 貴首王·毘有王·武寧王을 모두 都慕王의 후손이라 기록하고 있어, 日本에 망명한 百濟왕족의 후예들이 시조를 都慕王으로 여기고 있는 데서 百濟가 본래 高句麗와 밀접한 관계에 있던 어떤 族團에 의해서 건국된 나라임을 짐작케 해주고 있으며, (李基東,『韓國史講座』p.131) 이는 全 扶餘族이 共通으로 가지는 始祖 東明說이다.(金哲埈,「百濟建國考」p.8)
④의 始祖 仇台說은 建國說話가 아니라 古爾王代에 百濟國家가 성장하여 이를 인식하게 된 中國側의 史實 記錄의 성격을 가지는 것인 바 이에 대해서는『周書』및『隋書』에서 다루어질 것이다.
①과 ②의 始祖 溫祚說과 始祖 沸流說은 建國主體勢力·出身·建國年代·王室系譜 등의 문제로까지 발전되어지기 때문에 百濟史硏究에 있어서 始發點이 된다고도 할 수 있을 만큼 복잡성을 띄고 있는데, 金哲埈은 百濟의 溫祚 始祖說話는 東明神話의 成立期間보다는 뒤늦은 그 다음 단계에서 東明神話가 再生産되는 형태로 성립되었던 까닭에 東明神話의 附屬的인 性格을 면치 못하나, 그것이 神話的 性格의 것이 아니라, 說話 傳承의 性格을 가졌다는 점에서 그 說話의 歷史性이 보다 信憑되는 면이 있는데, 北扶餘·高句麗(卒本扶餘)·東濊(東扶餘)·百濟(南扶餘)가 分裂하기 이전 段階에 北中國 어느 地域 原住地에(『魏書』에 보이는 ‘昔北方有槀離之國者’의 槀離之國도 原住地는 아닌 것 같고, 지금으로서는 山東省 방면으로 추측함) 있었던 全 扶餘族의 生活圈이 무너지면서 各部族別로 東으로 移動할 때에 東明神話의 發生이 있었다고 보았다. 따라서 原住地에 있었을 적에도 그 原貌를 알 수는 없으나 다른 形態의 神話가 따로 있었는데, 第1次 分裂이 있었을 적의 神話가 古之亡人인 北扶餘族의 東明神話로 나타났고, 第2次 分裂時의 所産은 高句麗系의 東明神話로서, 이것은 1次 所産인 北扶餘의 槀離國說話와 高句麗 太祖王系 이후의 高句麗 王系神話를 연결시킨 것이며, 그 다음 第3次로서는 高句麗의 傍系로서의 百濟의 溫祚說話가 성립되었다고 보았다. 또한 始祖 溫祚說話 자체는 始祖 沸流說話보다 後期에 成立되면서 뒷 時代의 윤색을 받았다고 하였다.(金哲埈, 앞의 논문, pp.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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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隋書』卷81「東夷列傳」百濟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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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史』卷94「列傳」百濟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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盧重國,「百濟國의 成立과 發展」『震檀學報』60(韓國文化심포지움『百濟初期文化의 綜合的 檢討』1985)
註 035
百濟國 本與高驪俱在遼東之東千餘里 : 百濟가 高句麗와 同種이라는 것은 모든 史書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더 評論할 필요가 없다. 百濟의 位置를 설명하면서 高句麗를 끌어들인 것은 이 時期의 高句麗가 상대적으로 강성하였음을 보여 준다. 『三國志』「東夷傳」高句麗條에 ‘高句麗在遼東之東千里’라는 記事가 있으니, 『宋書』에서 언급하고 있는 百濟와 高句麗가 遼東의 東쪽 千里에 있다는 것은 『三國志』의 자료에 근거하여 기술하였음을 보여준다.
≪參考文獻≫
『三國志』卷30「東夷傳」高句麗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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村上四男, 「百濟史についての一考察」『東洋史學論集』3號, 1954.
註 036
百濟略有遼西 : 百濟가 遼西地方을 占有하였다는 事實은 『宋書』·『梁書』 등의 中國史書에 등장하고 있어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百濟의 遼西경략에 대해서는 여기의 『宋書』 보다 『梁書』 百濟傳에서 한층 자세한 전말을 읽을 수 있다. 『梁書』 百濟傳에는 ‘其國本與句驪在遼東之東 晋世句驪旣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晋平二郡地矣 自置百濟郡’ 이라는 句節이 있다.
이 자료를 『宋書』와 비교하여 보면 百濟郡까지 거론하고 있다. 그런데 『梁書』의 기술은 당시 사신들의 來往이 잦았던 점에서 신빙성이 있다고 보아도 틀림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百濟의 遼西경략설은 『南史』의 百濟傳에도 同一하게 보이고 있으나, 『晋書』에서는 馬韓傳으로 대치시켜 놓았기 때문에 이 같은 사실들이 除外되어 있다.
여기서 한 가지 덧붙여 이야기해야 할 것은 『職貢圖』의 百濟國使條에 보이는 記錄들이다. 이 記錄의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百濟는 원래 來夷였던 馬韓에 속했던 나라이다. 晋末에 高句麗가 遼東 樂浪을 略有하였고 (百濟가) 遼西의 晋平縣을 略有하였다. 晋나라 시기부터 中國에 대하여 늘 貢物을 바쳐 常朝하였다.
『職貢圖』에 보이는 百濟國使의 記錄은 百濟를 說明하는 조항이지 高句麗를 대상으로 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高句麗가 遼東 樂浪을 점유하였고 또한 遼西의 晋平縣을 略有하였다고 서술해 놓고 있다. 이것은 앞에서 본 『梁書』의 구체적인 記錄이나 여기『宋書』의 記錄과 차이가 나고 있다. 따라서 『職貢圖』百濟國使條에 보이는 記錄에는 百濟라는 두 글자가 빠져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遼西의 晋平縣을 점유한 것은 高句麗가 아니고 百濟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우리나라측의 史書인 『三國史記』나 『三國遺事』에는 이러한 사실이 실려 있지 않은데 이것은 新羅 中心의 歷史서술에서 나타난 결과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자료의 누락으로 볼 수 밖에 없다고 생각된다.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해야 할 사항은 百濟가 晋나라 때 遼西·晋平 2郡을 차지하였다고 하는 바 바로『晋書』에 그러한 記錄이 없다는 점에서 이를 의심하는 의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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