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加羅國은 三韓의 한 種族이다.
○ 加羅註 051
加羅國은 三韓의 한 種族이다. 註 052
建元 원년(A.D.479; 新羅 炤知王 1) 국왕 荷知註 053가 사신을 보내와 방물을 바쳤다. 이에 詔書를 내렸다.
“널리 헤아려 비로소 [조정에] 올라오니, 멀리 있는 夷가 두루 德에 감화됨이라. 加羅王 荷知는 먼 동쪽 바다 밖에서 폐백을 받들고 관문을 두드렸으니, 輔國將軍 本國王의 벼슬을 제수함이 합당하다.”
註) 051
加耶는 중국문헌에는 加羅 또는 加邏로 표기되어 있으며, 韓國·日本側 기록에는 加羅·加良·加耶·伽倻·狗邪·駕洛 등으로 다양하게 표기되어 있다. 加耶는 ‘갓나라(邊國)’를 뜻하는 말로 보기도 하며, (李丙燾, 「加羅史上의 諸問題」p.306) 一族·同族을 뜻하는 滿洲語의 hala, 혹은 퉁구스어의 kala, Xala와 관련이 있으리라는 說도 있다.(崔鶴根, 『國語方言硏究』)
중국정사중 加耶에 대하여 立傳하고 있는 것은 『南齊書』가 유일한데, 이는 5C 末 加耶의 해상발전이 활발하였음을 반영한 것으로 주목된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南齊書』加羅傳은 國王 荷知가 479年 南齊와 교섭하여 册封을 받았다는 사실만 기록되어 있을 뿐, 加耶에 관한 보다 상세한 상태서술은 없다.
≪參考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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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眞鏡大師寶月淩空塔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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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52
加羅가 三韓의 한 種族이라는 것은 弁辰을 두고 말한 것으로 이해된다. 즉, 『後漢書』·『三國志』등의 史料上에는 三韓에 加羅가 들어있지 않았으나, 弁辰지역에서 加羅가 뒤에 등장하여 弁辰지역과 加羅가 차지한 지역이 대체로 같게 되었기 때문에 加羅가 三韓의 한 種族이라고 말하게 된 것 같다.
『三國志』 「東夷傳」弁辰條에 3C 중엽 洛東江 중·하류지역의 弁韓 12國이 있었다고 하였으나, 이들 나라 중 狗邪國·彌烏邪馬國·安邪國을 제외하고는 그 위치를 알 수 없다. 그런데 『三國遺事』에 인용된 『駕洛國記』에서는 本加耶를 비롯한 大加耶·古寧加耶·星山加耶·小加耶 등 6加耶의 이름이 보이며, 같은 책에 인용된 『本朝史略』에서는 本加耶 대신 非火加耶의 이름이 보인다. 12國이나 加耶 6國은 개별로 볼 수 없다고 생각되며, 대개 4C初를 경계로 하여 弁韓에서 加耶로 그 명칭이 바뀌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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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53
加耶의 여러 나라 중에서 洛東江 河口에 위치한 本加耶는 A.D. 1C 경부터 海上交易의 중심지로 발전하여 中國 郡縣과 日本에 대한 무역 중계지로서의 기능을 가졌는데, 이러한 활발한 海上 活動을 통하여 本加耶는 洛東江 河口의 加耶 小國은 물론 加耶 全體를 대표하는 盟主로 등장한 듯 하다,
또한 5C 중엽 이후 高句麗가 平壤 遷都(427)를 계기로 하여 적극적인 남하 정책을 펴기 시작하면서 加耶는 百濟·新羅의 두 나라에 있어 전략상 더욱 필요하게 되었다. 따라서 本文의 ‘建元元年 國王荷知使來獻’은 이 당시에 加耶에서 中國 南朝에 使臣을 보내어 국제무대에 등장하려고 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荷知가 加耶의 여러 나라 가운데서 어느 나라의 王인지는 확실히 밝혀지고 있지 않으나, 本文에 나오는 ‘本國王’으로 미루어 本加耶의 國王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駕洛國記』의 本加耶世系에는 479년 당시의 王이 銍知王(451~492)으로 되어 있어 그 이름이 같지 않다. 여기에서 그를 大加耶의 王으로 보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千寬宇, 「復元 加耶史」p.110) 또한 『駕洛國記』의 紀年에 상당한 오차를 인정할 수 있다는 입장에서 荷知王을 銍知王 다음의 鉗知王에 比擬하는 견해도 있다.(今西龍, 「加羅彊域考」p.337)
≪參考文獻≫
『三國遺事』卷2 「紀異」2 所錄 『駕洛國記』
千寬宇, 「復元 加耶史」(下)『文學과 知性』31, 1978.
李基白·李基東 共著, 『韓國史講座』(古代篇), 1982.
今西龍, 「加羅疆域考」『朝鮮古史の硏究』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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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http://db.history.go.kr/id/sa_001_0030_0020 (accessed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http://db.history.go.kr/id/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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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sa_001_0030_0020,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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