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加羅051051 加羅傳 加耶는 중국문헌에는 加羅 또는 加邏로 표기되어 있으며, 韓國·日本側 기록에는 加羅·加良·加耶·伽倻·狗邪·駕洛 등으로 다양하게 표기되어 있다. 加耶는 ‘갓나라(邊國)’를 뜻하는 말로 보기도 하며, (李丙燾, 「加羅史上의 諸問題」p.306) 一族·同族을 뜻하는 滿洲語의 hala, 혹은 퉁구스어의 kala, Xala와 관련이 있으리라는 說도 있다.(崔鶴根,『國語方言硏究』)
중국정사중 加耶에 대하여 立傳하고 있는 것은 『南齊書』가 유일한데, 이는 5C 末 加耶의 해상발전이 활발하였음을 반영한 것으로 주목된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南齊書』加羅傳은 國王 荷知가 479年 南齊와 교섭하여 册封을 받았다는 사실만 기록되어 있을 뿐, 加耶에 관한 보다 상세한 상태서술은 없다.
≪參考文獻≫
廣開土大王陵碑.
新羅眞鏡大師寶月淩空塔碑.
『三國史記』卷34「地理志」1 康州 高靈郡條.
『三國遺事』卷2「紀異」2 所錄 『駕洛國記』
『日本書紀』卷19 欽明天皇 23年條.
丁仲煥, 「辰國三韓及加羅名稱考」『釜山大開校10周年記念論文集』1956; 『加羅史草』1962, 釜山大韓日文化硏究所.
崔鶴根, 『國語方言硏究』1968, 서울大出版部.
千寬宇, 「三韓의 成立過程」『史學硏究』26, 1975; 「復元 加耶史」『文學과 知性』28·29·31, 1977~78.
李丙燾, 「加羅史上의 諸問題」『韓國古代史硏究』1976, 博英社.
文定昌, 『伽倻史』1978, 柏文堂.
李基白·李基東 共著, 『韓國史講座』(古代篇), 1982, 一潮閣.
金泰植, 「5세기후반 大加耶의 발전에 대한 硏究」『韓國史論』12,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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加羅國은 三韓의 한 種族이다. 052052 加羅國 三韓種也 加羅가 三韓의 한 種族이라는 것은 弁辰을 두고 말한 것으로 이해된다. 즉, 『後漢書』·『三國志』등의 史料上에는 三韓에 加羅가 들어있지 않았으나, 弁辰지역에서 加羅가 뒤에 등장하여 弁辰지역과 加羅가 차지한 지역이 대체로 같게 되었기 때문에 加羅가 三韓의 한 種族이라고 말하게 된 것 같다.
『三國志』「東夷傳」弁辰條에 3C 중엽 洛東江 중·하류지역의 弁韓 12國이 있었다고 하였으나, 이들 나라 중 狗邪國·彌烏邪馬國·安邪國을 제외하고는 그 위치를 알 수 없다. 그런데 『三國遺事』에 인용된 『駕洛國記』에서는 本加耶를 비롯한 大加耶·古寧加耶·星山加耶·小加耶 등 6加耶의 이름이 보이며, 같은 책에 인용된 『本朝史略』에서는 本加耶 대신 非火加耶의 이름이 보인다. 12國이나 加耶 6國은 개별로 볼 수 없다고 생각되며, 대개 4C初를 경계로 하여 弁韓에서 加耶로 그 명칭이 바뀌는 것으로 보인다.
≪參考文獻≫
李弘稙, 「任那問題を中心とする欽明紀の整理-主要關係人物の硏究-」『靑丘學叢』25, 1936.
丁仲煥, 「辰國三韓及加羅名稱考」『釜山大開校10周年記念論文集』1956; 『加羅史草』1962; 「加羅史硏究-日本關係를 中心으로-」『東亞論叢』4, 1968.
金錫亨, 『초기조일관계연구』1960(『古代朝日關係史-大和政權と任那-』朝鮮史硏究會編譯, 1969, 勁草書房);「三韓三國の日本列島內分國について」『歷史評論』165·168·169,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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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金廷鶴, 「金海地方의 先史文化」『金海地區綜合學術調査報告書』1973; 「加耶境域新攷-加耶史硏究(Ⅰ)-」『釜山大學校論文集』21, 1976; 「任那と日本」『日本の歷史』別卷 1, 1977; 「金海禮安里古墳群發掘調査報告」『韓國考古學報』2, 1979; 「古代國家의 發達(伽耶)」『韓國考古學報』12, 1982; 「加耶史의 硏究」『史學硏究』37, 1983.
朴東伯, 「伽倻의 金屬文化와 日本에 미친 影響」『馬山敎育大學論文集』4, 1973; 「伽倻國數와 位置考」『馬山敎育大學論文集』6, 1975.
李炳銑, 「駕洛國의 國名·王名·姓氏名·人名의 表記와 金海地名考」『釜山大學校論文集』15, 1973.
千寬宇, 「任那問題について」『韓』14, 1973; 「任那問題」『韓』18·19·23·25, 1973~1974; 「辰·弁韓諸國의 位置試論」『白山學報』20, 1976; 「復元 加耶史」『文學과 知性』28·29·31, 1977년 여름·가을호, 1978년 봄호; 「任那日本府管見」『韓』78, 1977.
尹世英, 「古新羅·伽倻古墳의 編年에 關하여-古墳出土 冠帽를 中心으로-」『白山學報』17, 1974; 「古新羅伽耶古墳の編年案をめぐって-伊藤秋男氏の見解に對する反論-」『考古學ジゃ-ナル』111, 1975.
鄭基漢, 「伽耶問題에 對한 綜合的 整理」『高麗大學校大學院碩士學位論文集』1975.
文暻鉉, 「伽倻史의 新考察-大伽耶問題를 中心으로-」『大丘史學』9, 1975; 「加耶聯盟形成의 經濟的 考察」『大丘史學』12·13合輯, 1977.
李丙燾, 『韓國古代史硏究』1976.
李鍾琦, 『駕洛國探査』1977, 一志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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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哲埈, 「能步戰과 便鞍馬」『韓㳓劤博士停年紀念史學論叢』1981, 知識産業社.
朱甫噋 , 「加耶滅亡問題에 대한 一考察」『慶北史學』4, 1982.
李永植, 「加耶諸國의 國家形成問題-加耶聯盟說의 再檢討와 戰爭記事分析을 중심으로-」『高麗大學校大學院碩士學位論文』1983.
尹錫曉, 「伽倻의 倭地進出에 대한 硏究」『白山學報』28, 1984.
權鶴洙, 「加耶諸國의 成長과 環境」『白山學報』30·31合輯, 1985.
金貞培, 「任那日本府說의 虛構性-日本書紀史料批判 및 廣開土王陵碑文을 中心으로-」『思想과 政策』1, 1984.
芳●(加/良)登, 「日本에 있어서의 百濟史硏究의 意義」『馬韓·百濟文化』7, 1984.
李貞姬, 「古代日本의 政治的 勢力成長에 對하여-任那日本府와의 關係檢討를 爲한 試論으로-」『韓國傳統文化硏究』1, 1985.
金泰植, 「5세기후반 大加耶의 발전에 대한 硏究」『韓國史論』12, 1985.
金鉉球, 『任那の對外關係と任那日本府の實體-大和政權の對外關係硏究-』1985, 吉川弘文館.
林泰輔, 「加羅の起源『史學雜誌』2卷 25號, 1891; 「加羅の起源續考」『史學雜誌』5編 3號, 1894; 『支那上代之硏究』1927.
津田左右吉, 「韓史に見える廣義の加羅及び駕洛國記の六伽耶に就いて」『朝鮮歷史地理』1, 1911; 「任那疆域考」『朝鮮歷史地理』3, 1913.
關野貞, 「伽耶時代の遺蹟」『考古學雜誌』1卷 7號, 1911.
今西龍, 「加羅疆域考(上·下)」『史林』4卷 3·4號, 1914.
三品彰英, 『日本書紀日鮮關係記事考證(上)』, 1923, 吉川弘文館; 「日本書紀日韓關係記事考證」『朝鮮學報』14輯, 1959.
宮崎道三郞, 「任那疆域考」『宮崎博士法制史論集』1929.
大原利武, 「任那加耶考」『小田先生頌壽記念朝鮮論集』1934.
那珂通世, 「朝鮮古史考」『史學雜誌』47編 3號~49編 10號, 1936~1938.
末松保和, 「任那問題の緖末」『歷史任那興亡史』1卷 7號, 1948; 『任那興亡史』1960, 吉川弘文館.
村上四男, 「金官國補遺」『朝鮮學報』31輯, 1964.
坂元義種, 「古代東アヅアの國際關係」『ヒストリア』49·50, 1967~1968.
井上秀雄, 「任那諸國の地理的條件」『小葉田淳敎授退官記念國史論集』31~46, 1971.
鬼頭淸明, 「加耶諸國の史的發展について」·「任那日本府の問題」『日本古代國家の形成と東アヅア』1976.
平野邦雄, 「繼體·欽明紀の對外關係記事」『古代東アヅア史論集』(下), 1978.
山尾幸久, 「任那に關する-試論」『古代東アヅア史論集』(下),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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建元 원년(A.D.479; 新羅 炤知王 1) 국왕 荷知053053 荷知 加耶의 여러 나라 중에서 洛東江 河口에 위치한 本加耶는 A.D. 1C 경부터 海上交易의 중심지로 발전하여 中國 郡縣과 日本에 대한 무역 중계지로서의 기능을 가졌는데, 이러한 활발한 海上 活動을 통하여 本加耶는 洛東江 河口의 加耶 小國은 물론 加耶 全體를 대표하는 盟主로 등장한 듯 하다,
또한 5C 중엽 이후 高句麗가 平壤 遷都(427)를 계기로 하여 적극적인 남하 정책을 펴기 시작하면서 加耶는 百濟·新羅의 두 나라에 있어 전략상 더욱 필요하게 되었다. 따라서 本文의 ‘建元元年 國王荷知使來獻’은 이 당시에 加耶에서 中國 南朝에 使臣을 보내어 국제무대에 등장하려고 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荷知가 加耶의 여러 나라 가운데서 어느 나라의 王인지는 확실히 밝혀지고 있지 않으나, 本文에 나오는 ‘本國王’으로 미루어 本加耶의 國王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駕洛國記』의 本加耶世系에는 479년 당시의 王이 銍知王(451~492)으로 되어 있어 그 이름이 같지 않다. 여기에서 그를 大加耶의 王으로 보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千寬宇, 「復元 加耶史」p.110) 또한 『駕洛國記』의 紀年에 상당한 오차를 인정할 수 있다는 입장에서 荷知王을 銍知王 다음의 鉗知王에 比擬하는 견해도 있다.(今西龍, 「加羅彊域考」p.337)
≪參考文獻≫
『三國遺事』卷2「紀異」2 所錄 『駕洛國記』
千寬宇, 「復元 加耶史」(下)『文學과 知性』31, 1978.
李基白·李基東 共著, 『韓國史講座』(古代篇), 1982.
今西龍, 「加羅疆域考」『朝鮮古史の硏究』19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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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사신을 보내와 방물을 바쳤다. 이에 詔書를 내렸다.
“널리 헤아려 비로소 [조정에] 올라오니, 멀리 있는 夷가 두루 德에 감화됨이라. 加羅王 荷知는 먼 동쪽 바다 밖에서 폐백을 받들고 관문을 두드렸으니, 輔國將軍 本國王의 벼슬을 제수함이 합당하다.”

註 051
加羅傳 : 加耶는 중국문헌에는 加羅 또는 加邏로 표기되어 있으며, 韓國·日本側 기록에는 加羅·加良·加耶·伽倻·狗邪·駕洛 등으로 다양하게 표기되어 있다. 加耶는 ‘갓나라(邊國)’를 뜻하는 말로 보기도 하며, (李丙燾, 「加羅史上의 諸問題」p.306) 一族·同族을 뜻하는 滿洲語의 hala, 혹은 퉁구스어의 kala, Xala와 관련이 있으리라는 說도 있다.(崔鶴根,『國語方言硏究』)
중국정사중 加耶에 대하여 立傳하고 있는 것은 『南齊書』가 유일한데, 이는 5C 末 加耶의 해상발전이 활발하였음을 반영한 것으로 주목된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南齊書』加羅傳은 國王 荷知가 479年 南齊와 교섭하여 册封을 받았다는 사실만 기록되어 있을 뿐, 加耶에 관한 보다 상세한 상태서술은 없다.
≪參考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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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眞鏡大師寶月淩空塔碑.
『三國史記』卷34「地理志」1 康州 高靈郡條.
『三國遺事』卷2「紀異」2 所錄 『駕洛國記』
『日本書紀』卷19 欽明天皇 23年條.
丁仲煥, 「辰國三韓及加羅名稱考」『釜山大開校10周年記念論文集』1956; 『加羅史草』1962, 釜山大韓日文化硏究所.
崔鶴根, 『國語方言硏究』1968, 서울大出版部.
千寬宇, 「三韓의 成立過程」『史學硏究』26, 1975; 「復元 加耶史」『文學과 知性』28·29·31, 1977~78.
李丙燾, 「加羅史上의 諸問題」『韓國古代史硏究』1976, 博英社.
文定昌, 『伽倻史』1978, 柏文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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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泰植, 「5세기후반 大加耶의 발전에 대한 硏究」『韓國史論』12, 1985.
註 052
加羅國 三韓種也 : 加羅가 三韓의 한 種族이라는 것은 弁辰을 두고 말한 것으로 이해된다. 즉, 『後漢書』·『三國志』등의 史料上에는 三韓에 加羅가 들어있지 않았으나, 弁辰지역에서 加羅가 뒤에 등장하여 弁辰지역과 加羅가 차지한 지역이 대체로 같게 되었기 때문에 加羅가 三韓의 한 種族이라고 말하게 된 것 같다.
『三國志』「東夷傳」弁辰條에 3C 중엽 洛東江 중·하류지역의 弁韓 12國이 있었다고 하였으나, 이들 나라 중 狗邪國·彌烏邪馬國·安邪國을 제외하고는 그 위치를 알 수 없다. 그런데 『三國遺事』에 인용된 『駕洛國記』에서는 本加耶를 비롯한 大加耶·古寧加耶·星山加耶·小加耶 등 6加耶의 이름이 보이며, 같은 책에 인용된 『本朝史略』에서는 本加耶 대신 非火加耶의 이름이 보인다. 12國이나 加耶 6國은 개별로 볼 수 없다고 생각되며, 대개 4C初를 경계로 하여 弁韓에서 加耶로 그 명칭이 바뀌는 것으로 보인다.
≪參考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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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仲煥, 「辰國三韓及加羅名稱考」『釜山大開校10周年記念論文集』1956; 『加羅史草』1962; 「加羅史硏究-日本關係를 中心으로-」『東亞論叢』4,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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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昌雨, 『駕洛國史傳記』1962, 國都文化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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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金廷鶴, 「金海地方의 先史文化」『金海地區綜合學術調査報告書』1973; 「加耶境域新攷-加耶史硏究(Ⅰ)-」『釜山大學校論文集』21, 1976; 「任那と日本」『日本の歷史』別卷 1, 1977; 「金海禮安里古墳群發掘調査報告」『韓國考古學報』2, 1979; 「古代國家의 發達(伽耶)」『韓國考古學報』12, 1982; 「加耶史의 硏究」『史學硏究』37,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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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寬宇, 「任那問題について」『韓』14, 1973; 「任那問題」『韓』18·19·23·25, 1973~1974; 「辰·弁韓諸國의 位置試論」『白山學報』20, 1976; 「復元 加耶史」『文學과 知性』28·29·31, 1977년 여름·가을호, 1978년 봄호; 「任那日本府管見」『韓』78, 1977.
尹世英, 「古新羅·伽倻古墳의 編年에 關하여-古墳出土 冠帽를 中心으로-」『白山學報』17, 1974; 「古新羅伽耶古墳の編年案をめぐって-伊藤秋男氏の見解に對する反論-」『考古學ジゃ-ナル』111,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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津田左右吉, 「韓史に見える廣義の加羅及び駕洛國記の六伽耶に就いて」『朝鮮歷史地理』1, 1911; 「任那疆域考」『朝鮮歷史地理』3, 1913.
關野貞, 「伽耶時代の遺蹟」『考古學雜誌』1卷 7號,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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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尾幸久, 「任那に關する-試論」『古代東アヅア史論集』(下), 1978.
註 053
荷知 : 加耶의 여러 나라 중에서 洛東江 河口에 위치한 本加耶는 A.D. 1C 경부터 海上交易의 중심지로 발전하여 中國 郡縣과 日本에 대한 무역 중계지로서의 기능을 가졌는데, 이러한 활발한 海上 活動을 통하여 本加耶는 洛東江 河口의 加耶 小國은 물론 加耶 全體를 대표하는 盟主로 등장한 듯 하다,
또한 5C 중엽 이후 高句麗가 平壤 遷都(427)를 계기로 하여 적극적인 남하 정책을 펴기 시작하면서 加耶는 百濟·新羅의 두 나라에 있어 전략상 더욱 필요하게 되었다. 따라서 本文의 ‘建元元年 國王荷知使來獻’은 이 당시에 加耶에서 中國 南朝에 使臣을 보내어 국제무대에 등장하려고 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荷知가 加耶의 여러 나라 가운데서 어느 나라의 王인지는 확실히 밝혀지고 있지 않으나, 本文에 나오는 ‘本國王’으로 미루어 本加耶의 國王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駕洛國記』의 本加耶世系에는 479년 당시의 王이 銍知王(451~492)으로 되어 있어 그 이름이 같지 않다. 여기에서 그를 大加耶의 王으로 보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千寬宇, 「復元 加耶史」p.110) 또한 『駕洛國記』의 紀年에 상당한 오차를 인정할 수 있다는 입장에서 荷知王을 銍知王 다음의 鉗知王에 比擬하는 견해도 있다.(今西龍, 「加羅彊域考」p.337)
≪參考文獻≫
『三國遺事』卷2「紀異」2 所錄 『駕洛國記』
千寬宇, 「復元 加耶史」(下)『文學과 知性』31, 1978.
李基白·李基東 共著, 『韓國史講座』(古代篇), 1982.
今西龍, 「加羅疆域考」『朝鮮古史の硏究』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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