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한은 처음 6國이었다가 차츰 나뉘어져 12國이 되었는데,111111 辰韓始有六國 稍分爲十二 辰韓12國에 대해서 그 위치는 아직 확정되지 못하고 있다.
① 己柢國은 安東(古陁郡-李丙燾)과 豊基(基木鎭-千寬宇)로,
② 不斯國은 昌寧(比斯伐-李丙燾)과 安東(千寬宇)으로,
③ 勤耆國은 迎日郡(李丙燾)과 淸道(千寬宇)로,
④ 難彌離彌凍國은 義城郡 丹密面(李丙燾)과 昌寧郡 靈山(千寬宇)으로,
⑤ 冉奚國은 蔚山市 鹽浦(李丙燾)와 大邱지방(千寬宇)으로
⑥ 軍彌國은 泗川郡 昆陽(李丙燾)과 漆谷郡 仁同(千寬宇)으로,
⑦ 如湛國은 軍威(李丙燾)와 義城郡 塔里(千寬宇)로,
⑧ 戶路國은 尙州郡 咸昌面(李丙燾)과 永川(千寬宇)으로,
⑨ 州鮮國은 慶山郡 慈仁과 慶山押督國(千寬宇)으로,
⑩ 馬延國은 密陽(千寬宇)으로,
⑪ 斯盧國은 慶州一帶(新羅의 모체)로,
⑫ 優由國은 淸道(李丙燾)나 蔚珍으로 비정하고 있다.(李丙燾,「三韓의 諸小國問題」pp.274~276; 千寬宇,「辰·弁韓諸國의 位置 試論」pp.218~223)
그러나 이러한 地名考證이 대부분 言語學的인 方法에 따른 추측이며, 확실한 考古學的인 論證이나 뚜렷한 사실 확인은 어려운 실정이다.
≪參考文獻≫
李丙燾,「三韓의 諸小國問題」『韓國古代史硏究』1976.
千寬宇,「辰·弁韓諸國의 位置 試論」『白山學報』20,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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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그 중의 한 나라이다.
그 나라는 百濟의 동남쪽 5천여리 밖에 있다. 동으로는 큰 바다와 沿해 있고, 남북으로는 [高]句驪·百濟와 접하고 있다. 魏나라 때는 新盧라 불렀고, 宋나라 때는 新羅 또는 斯羅라 하였는데,112112 魏時曰新盧 宋時曰新羅 或曰斯羅 新羅라는 뜻을『三國史記』에서는 ‘德業曰新 羅者網羅四方之義’라고 하여 儒敎思想의 표현으로 생각하여 왔다. 이에 대해서 韓鎭書는 그의『海東繹史』에서 ‘東語 新曰斯伊 國曰羅’라 하여 새나라로 생각하였다. 梁柱東도 이에 따라 東方·東土로 간주하였다. 즉, 斯羅·新羅·斯盧·尸羅는 모두 의 借字로서 東方(東土)의 뜻으로 보고, 徐伐·鷄林·東京 등을 로 읽어 는 東·新·曙의 뜻으로, 은 光明國土로 보아 (徐那伐) 즉, 東川原으로 풀이하였다.(『古歌硏究』pp.40~42)
이에 대해서 田蒙秀는 실애벌 즉, 谷川原(山谷의 나라)으로 보았으며(「新羅의 名義」p.14) 安在鴻은 실(谷)·시로(城)의 뜻으로 풀이하였다.(『新羅上古史鑑』pp.169~170) 李丙燾는 徐那伐·蘇伐의 뜻을 高·上·聖의 뜻으로 풀어 百濟의 蘇夫里나 高句麗의 수릿골과 같은 Capital의 의미로 파악하였다.(「高句麗國號考」p.12) 趙芝薰의 경우도 의 뜻을 上國·高國·神國 등으로 설명하고 있다.(「新羅國號硏究論考」pp.15~17) 이와 비슷한 주장은 李在秀에게서 계속되고 있다.(「朴赫居世傳說論考」)
그러나 末松保和·三品彰英·今西龍 등은 을 金國 또는 鐵國으로 풀이한 바 있거니와,(末松保和,「朝鮮古代諸國の開國傳說と國姓」; 今西龍,『新羅史硏究』) 일찍부터 신라는 金國의 나라로 中東에 알려진 바도 있었다.(金定慰,「中世 이슬람 文獻에 비친 韓國像」) 이에 대해 文暻鉉은 신라가 곧  혹은 의 音借 내지 訓借의 漢字同音同訓 異字로 보았다. 즉, 그는 徐那(羅)伐·斯(新)盧·尸羅는 音借이며 新羅·鷄林·鷄貴는 訓借로 생각하였다.(「新羅國號의 硏究」pp.4~6) 다시 말해서 新字는 (시·쇠)란 原義를 갖고 있으니만치 란 黃金·鐵·銅의 뜻이며, 황금의 고귀하고 光輝에서 光明·東·新·高貴·寶物의 뜻으로 바뀐 것이다. 羅字는 那·耶와 같이 地·土·村·國을 의미하는 것으로 奴·讓·那(고구려)·洛·耶(가라)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伐은 新羅地名의 語尾에 붙이는 것으로 光明·原·國을 의미하는 (불)로 音讀한 것이다.(文暻鉉, 앞의 논문, p.5) 즉, 新羅는 北方의 鐵器文化를 가진 民族(古朝鮮系)이 南下하여 金村()을 건설하였고, 그것이 점차 확대되면서 그 村名도 로, 그 支配族의 姓氏도 (金·昔)로 한 연후에 儒敎思想의 표현인 新羅로 雅化한 것이라고 생각된다.(文暻鉉, 앞의 논문, p.6)
≪參考文獻≫
『三國史記』卷4「新羅本紀」4 智證王條.
『海東繹史』續3 辰韓條.
安在鴻,『新羅上古史鑑』1947.
李丙燾,「高句麗國號考」『서울大論文集』3, 1956.
梁柱東,『古歌硏究』1957.
田蒙秀,「新羅의 名義」『한글』77, 1940.
趙芝薰,「新羅國號硏究論考」『高麗大五十周年紀念論文集』1955.
李在秀,「朴赫居世傳說論考」『高秉幹博士頌壽紀念論叢』1960.
金定慰,「中世 이슬람 文獻에 비친 韓國像」『韓國史硏究』16, 1977.
文暻鉉,「新羅國號의 硏究」『新羅史硏究』1983, 慶北大出版部.
末松保和,「朝鮮古代諸國の開國傳說と國姓について」『歷史』1·2·3·4, 1948.
今西龍,『新羅史硏究』1970, 圖書刊行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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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작아서 독자적으로 사신을 파견할 수 없었다. 普通 2년(A.D. 521; 新羅 法興王 8)에 姓은 募, 이름은 秦인 [신라]왕이 처음으로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백제를 따라와 방물을 바쳤다.113113 普通二年 始使使隨百濟奉獻方物 新羅가 최초로 對梁入朝한 普通 2年(521)은 法興王 8년에 해당한다. 이에 대해서『三國史記』에도 ‘遣使於梁貢方物’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러한 對中交涉은 奈勿王 26년(381)의 前秦 通交 이후 140年만의 일이다. 더욱이 法興王代의 入梁이 百濟使臣을 따라간 사실로 된『梁書』의 기록은 사실과 다르다고 본다. 그 이유는 첫째, 6세기 초엽 新羅의 성장과 外交的 進出은 어느 정도 百濟와 대등한 단계에 이르렀다는 점이며, 둘째로는『三國史記』의「百濟本紀」에서 武寧王이 12年(512)에 入朝한 기록은 찾을 수 있지만, 521年(武寧王 21)에는 그러한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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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11
辰韓始有六國 稍分爲十二 : 辰韓12國에 대해서 그 위치는 아직 확정되지 못하고 있다.
① 己柢國은 安東(古陁郡-李丙燾)과 豊基(基木鎭-千寬宇)로,
② 不斯國은 昌寧(比斯伐-李丙燾)과 安東(千寬宇)으로,
③ 勤耆國은 迎日郡(李丙燾)과 淸道(千寬宇)로,
④ 難彌離彌凍國은 義城郡 丹密面(李丙燾)과 昌寧郡 靈山(千寬宇)으로,
⑤ 冉奚國은 蔚山市 鹽浦(李丙燾)와 大邱지방(千寬宇)으로
⑥ 軍彌國은 泗川郡 昆陽(李丙燾)과 漆谷郡 仁同(千寬宇)으로,
⑦ 如湛國은 軍威(李丙燾)와 義城郡 塔里(千寬宇)로,
⑧ 戶路國은 尙州郡 咸昌面(李丙燾)과 永川(千寬宇)으로,
⑨ 州鮮國은 慶山郡 慈仁과 慶山押督國(千寬宇)으로,
⑩ 馬延國은 密陽(千寬宇)으로,
⑪ 斯盧國은 慶州一帶(新羅의 모체)로,
⑫ 優由國은 淸道(李丙燾)나 蔚珍으로 비정하고 있다.(李丙燾,「三韓의 諸小國問題」pp.274~276; 千寬宇,「辰·弁韓諸國의 位置 試論」pp.218~223)
그러나 이러한 地名考證이 대부분 言語學的인 方法에 따른 추측이며, 확실한 考古學的인 論證이나 뚜렷한 사실 확인은 어려운 실정이다.
≪參考文獻≫
李丙燾,「三韓의 諸小國問題」『韓國古代史硏究』1976.
千寬宇,「辰·弁韓諸國의 位置 試論」『白山學報』20, 1976.
註 112
魏時曰新盧 宋時曰新羅 或曰斯羅 : 新羅라는 뜻을『三國史記』에서는 ‘德業曰新 羅者網羅四方之義’라고 하여 儒敎思想의 표현으로 생각하여 왔다. 이에 대해서 韓鎭書는 그의『海東繹史』에서 ‘東語 新曰斯伊 國曰羅’라 하여 새나라로 생각하였다. 梁柱東도 이에 따라 東方·東土로 간주하였다. 즉, 斯羅·新羅·斯盧·尸羅는 모두 의 借字로서 東方(東土)의 뜻으로 보고, 徐伐·鷄林·東京 등을 로 읽어 는 東·新·曙의 뜻으로, 은 光明國土로 보아 (徐那伐) 즉, 東川原으로 풀이하였다.(『古歌硏究』pp.40~42)
이에 대해서 田蒙秀는 실애벌 즉, 谷川原(山谷의 나라)으로 보았으며(「新羅의 名義」p.14) 安在鴻은 실(谷)·시로(城)의 뜻으로 풀이하였다.(『新羅上古史鑑』pp.169~170) 李丙燾는 徐那伐·蘇伐의 뜻을 高·上·聖의 뜻으로 풀어 百濟의 蘇夫里나 高句麗의 수릿골과 같은 Capital의 의미로 파악하였다.(「高句麗國號考」p.12) 趙芝薰의 경우도 의 뜻을 上國·高國·神國 등으로 설명하고 있다.(「新羅國號硏究論考」pp.15~17) 이와 비슷한 주장은 李在秀에게서 계속되고 있다.(「朴赫居世傳說論考」)
그러나 末松保和·三品彰英·今西龍 등은 을 金國 또는 鐵國으로 풀이한 바 있거니와,(末松保和,「朝鮮古代諸國の開國傳說と國姓」; 今西龍,『新羅史硏究』) 일찍부터 신라는 金國의 나라로 中東에 알려진 바도 있었다.(金定慰,「中世 이슬람 文獻에 비친 韓國像」) 이에 대해 文暻鉉은 신라가 곧  혹은 의 音借 내지 訓借의 漢字同音同訓 異字로 보았다. 즉, 그는 徐那(羅)伐·斯(新)盧·尸羅는 音借이며 新羅·鷄林·鷄貴는 訓借로 생각하였다.(「新羅國號의 硏究」pp.4~6) 다시 말해서 新字는 (시·쇠)란 原義를 갖고 있으니만치 란 黃金·鐵·銅의 뜻이며, 황금의 고귀하고 光輝에서 光明·東·新·高貴·寶物의 뜻으로 바뀐 것이다. 羅字는 那·耶와 같이 地·土·村·國을 의미하는 것으로 奴·讓·那(고구려)·洛·耶(가라)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伐은 新羅地名의 語尾에 붙이는 것으로 光明·原·國을 의미하는 (불)로 音讀한 것이다.(文暻鉉, 앞의 논문, p.5) 즉, 新羅는 北方의 鐵器文化를 가진 民族(古朝鮮系)이 南下하여 金村()을 건설하였고, 그것이 점차 확대되면서 그 村名도 로, 그 支配族의 姓氏도 (金·昔)로 한 연후에 儒敎思想의 표현인 新羅로 雅化한 것이라고 생각된다.(文暻鉉, 앞의 논문, p.6)
≪參考文獻≫
『三國史記』卷4「新羅本紀」4 智證王條.
『海東繹史』續3 辰韓條.
安在鴻,『新羅上古史鑑』1947.
李丙燾,「高句麗國號考」『서울大論文集』3, 1956.
梁柱東,『古歌硏究』1957.
田蒙秀,「新羅의 名義」『한글』77, 1940.
趙芝薰,「新羅國號硏究論考」『高麗大五十周年紀念論文集』1955.
李在秀,「朴赫居世傳說論考」『高秉幹博士頌壽紀念論叢』1960.
金定慰,「中世 이슬람 文獻에 비친 韓國像」『韓國史硏究』16, 1977.
文暻鉉,「新羅國號의 硏究」『新羅史硏究』1983, 慶北大出版部.
末松保和,「朝鮮古代諸國の開國傳說と國姓について」『歷史』1·2·3·4, 1948.
今西龍,『新羅史硏究』1970, 圖書刊行社.
註 113
普通二年 始使使隨百濟奉獻方物 : 新羅가 최초로 對梁入朝한 普通 2年(521)은 法興王 8년에 해당한다. 이에 대해서『三國史記』에도 ‘遣使於梁貢方物’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러한 對中交涉은 奈勿王 26년(381)의 前秦 通交 이후 140年만의 일이다. 더욱이 法興王代의 入梁이 百濟使臣을 따라간 사실로 된『梁書』의 기록은 사실과 다르다고 본다. 그 이유는 첫째, 6세기 초엽 新羅의 성장과 外交的 進出은 어느 정도 百濟와 대등한 단계에 이르렀다는 점이며, 둘째로는『三國史記』의「百濟本紀」에서 武寧王이 12年(512)에 入朝한 기록은 찾을 수 있지만, 521年(武寧王 21)에는 그러한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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