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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姓은 夫餘氏로 ‘於羅瑕’라 부르며,
○ 왕의 姓은 夫餘氏로 ‘於羅瑕’註 060라 부르며, 백성들은 ‘鞬吉支’註 061라고 부르니 이는 중국 말로 모두 왕이라는 뜻이다. 왕의 아내는 ‘於陸’이라 호칭하니, 중국 말로 왕비라는 뜻이다.
벼슬은 16品階가 있다. 左平註 062은 5명으로 一品, 達率註 063은 30명으로 二品, 恩率은 三品, 德率은 四品, 扞率은 五品, 柰率은 六品이다. 六品 이상은 冠을 銀華로 장식하였다.
將德은 七品으로 紫帶를 두르고, 施德은 八品으로 皂帶, 固德은 九品으로 赤帶, 季德은 十品으로 靑帶를 각각 둘렀다. 十一品 對德과 十二品 文督은 모두 黃帶를 두르고, 十三品 武督註 064과 十四品 佐軍註 065·十五品 振武·十六品 克虞는 모두 白帶를 둘렀다.
恩率 이하는 일정한 定員이 없고註 066 각기 部署가 있어서 여러 가지 사무를 나누어 관장하였다.
內官註 067으로는 前內部·穀部·肉部·內掠部·外掠部註 068·馬部·刀部·功德部·藥部·木部·法部·後官部가 있고, 外官註 069으로는 司軍部註 070·司徒部註 071·司空部註 072·司寇部註 073·點口部·客部·外舍部·綢部·日官部·都市部註 074가 있다.
註) 060
百濟 言語에 대한 기록인 『梁書』 百濟傳의 ‘今言語·服章 略與高驪同’과 더불어 이 句節은 百濟語가 二重構造로 이루어졌다고 하는 방증사료로 이용되어 왔다. 즉, 百濟語는 夫餘-高句麗系의 支配族言語(於羅瑕·於陸)와 土着馬韓系統인 被支配族言語(鞬吉支)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李丙燾, 『譯註 三國史記』p.351의 註 1; 李基文, 「韓國古代諸語系統論」pp.186~189; 千寬宇, 「三韓의 國家形成」pp.132~133; 千寬宇, 「馬韓諸國의 位置 試論」p.204)
李基文은 百濟語의 二重構造가 얼마나 오래 지속되었는지 추정할 수는 없으나 支配族의 言語가 被支配族의 言語를 전면적으로 同化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被支配族의 언어에 同化되어 갔을 것으로 추측하였다. 그리고 『梁書』의 기록과는 달리 현재 남아 있는 百濟의 언어자료들을 검토한 결과 百濟語가 高句麗語와는 많이 다르고 新羅語와 매우 비슷하다고 밝혔다. (앞의 논문, p.187) 또한 百濟語硏究에 있어서 중요한 자료 중의 하나가 古代 日本語인데, 百濟의 文物과 함께 日本에 흘러 들어간 百濟語 단어들이 고스란히 古代 日本의 기록에 남아 있다고 하면서 本文의 기사를 지적하였다. 즉, 百濟語의 音相과 의미를 분명히 제시하고 있어 그 기록 자체만으로도 높은 신빙성을 가지고 있는데, 『日本書紀』에서 百濟의 王을 orikoke, worikokisi, konikisi, kokisi 등으로, 夫人(妃)을 woriku, woruku, orike 등으로 새기고 있음은 이 기록의 신빙성을 완전무결하게 한다고 주장하였다. ( 「百濟語硏究와 관련된 몇 問題」p.260)
千寬宇는 『日本書紀』의 ‘키시’(王·君·吉士)-‘코니키시’(國王·王·主)에서 ‘코니키시’는 鞬吉支와 비교되고, ‘오루쿠’(王后)-‘코니오루쿠’(太后·王后)에서 ‘오루쿠’는 於陸과 대비되는데, 王의 뜻이라는 於羅瑕도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앞의 논문, p.132)
李丙燾는 王稱에 대한 固有語로서 『周書』에서만 治者階級인 夫餘系統에서는 ‘於羅瑕’라 하고 被治階級인 馬韓系統에서는 ‘鞬吉支’라 하며, 王室에서는 妻(王妃)를 ‘於陸’이라고 한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는데, ‘於羅瑕’는 종래 巫歌의 ‘어라아 만수(萬壽·萬歲)’ 云云의 ‘어라아’로, ‘於陸’은 後世語에 男同生의 妻稱인 ‘올케’로 변한 것 같다고 하였다. 그리고 『日本書紀』에서 百濟王을 ‘コニキシ(코니키시)’ 또한 ‘コキシ(코키시)’라고 訓讀한 것은 『周書』의 鞬吉支와 同音임을 알 수가 있는데, ‘鞬’·‘コニ’·‘コ’ (コ는 コニ의 略音)는 國語에 ‘큰(大)’의 寫音이고, ‘吉支’·‘キシ’는 吉師(百濟語)와 같이 貴人의 尊稱이라고 하였다. (앞의 책, p.351)
≪參考文獻≫
李崇寧, 「百濟語 硏究와 資料面의 問題點」『百濟硏究』2, 1971.
都守熙, 「百濟王稱語小考-於羅瑕·鞬吉支·구드래·구다라를 중심으로-」『百濟硏究』3, 1972; 「百濟地名硏究」『百濟硏究』10·11, 1979·1980; 「百濟前期의 言語에 관한 硏究」『百濟硏究』13, 1982.
김선기, 「백제 지명 속에 있는 고대음운 변천」『百濟硏究』4, 1973.
趙載勳, 「百濟語硏究序說」『百濟文化』6, 1973.
兪昌均, 「百濟地名·表記用字에 對한 檢討」『嶺南大論文集(人文篇)』9, 1975.
千寬宇, 「三韓의 國家形成」(下)『韓國學報』3, 1976; 「馬韓諸國의 位置 試論」『東洋學』9, 1979.
李丙燾, 『譯註 三國史記』1977.
姜吉云, 「百濟語의 系統論」『百濟硏究』8·9, 1977·1978.
李基文, 「韓國古代諸語系統論」『韓國史』23, 1978; 「百濟語硏究와 관련된 몇 問題」『百濟硏究』13,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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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61
鞬吉支는 ‘鞬’과 ‘吉支’로 나누어 ‘鞬’은 ‘큰’으로 해석하고 ‘吉支’는 新羅 7官等의 ‘一吉飡·乙吉干’이나 14官等의 ‘吉次·吉士’와 일치시켜 해석하기도 하였다. (李基文, 「百濟語硏究와 관련된 몇 問題」p.261) ‘吉支’와 관련하여 李基文은 종래의 학자들이 ‘吉’을 漢字音으로만 읽어 日本記錄의 kisi를 소홀히 다뤘다는 것 즉, ‘吉’의 末音에 流音이 있었다면 그것이 日本語에서 완전히 무시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과, 古代 日本語에서 ‘君’의 새김이 kimi로 나타나는데 百濟 人名에 한하여 kisi로 나타나는 사실은 kisi가 kimi와 같은 의미의 百濟語 단어였을 것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古代 日本語의 kimi를 新羅의 ‘寐錦’(廣開土王陵碑)·‘尼師今’(『三國史記』)·‘尼叱今·齒叱今’(『三國遺事』)에 나오는‘錦·今’의 借用이라고 보고, 이 ‘금’이 본래는 族長, 나중에는 王을 가리키는 단어였다고 하였다. (앞의 논문, pp.260~261) 그리하여 新羅語에서는 ‘君’의 새김이 ‘금’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中世國語의 ‘님금’을 ‘님’(主)와 ‘금’(君)으로 분석하여 이렇게 볼 때 新羅語의 ‘금’과 百濟語의 ‘吉支’가 日本語에 들어가 kimi와 kisi로 공존했었다는 흥미있는 결론에 도달된다고 하였다. (앞의 논문, pp.261~262)
≪參考文獻≫
李基文, 「百濟語硏究와 관련된 몇 問題」『百濟硏究』13,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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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62
『三國史記』에는 腆支王 4年條의 ‘拜餘信爲上佐平 委以軍國正事 上佐平之職始於此 若今之家宰’에서 上佐平의 명칭이 보이며, 『日本書紀』에는 「欽明紀」4年條에 上佐平·中佐平·下佐平 등이 보이고 있다.
盧重國은 만약 欽命 4年(聖王 21年)에 『周書』에 나오는 5人의 佐平이 上·中·下로 구분되었다면 이것은 首都를 上·中·下·前·後로 구획한 것과 어떤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였다. ( 「泗沘時代 百濟支配體制의 變遷」pp.58~59)
梁起鍚의 <百濟佐平就任人物表>는 佐平에 대한 이해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 「熊津時代의 百濟支配層硏究」p.18의 表)

<百濟佐平就任人物表>
<百濟佐平就任人物表>
時代 官名 人 物 時代 官名 人 物



溫 祚 右 輔 乙音, 解婁


文 周 兵 官 解仇
多 婁 左 輔 屹于 三 斤 · 眞男
  右 輔 眞會 東 城 兵 官 眞老, 燕突
古 爾 右 輔 質, 眞忠  內 法 沙若思
  內 臣 優壽  衛 士 苩加
  內 頭 眞可  內 頭 莫古解
  內 法 優豆 武 寧 · 因友
  衛 士 高壽


· 燕謨
  朝 廷 昆奴  麻鹵, 木劦麻那
  兵 官 惟己  沙宅己婁
比 流 兵 官 解仇  木尹貴
  內 臣 優福, 眞義 · 解讎, 王孝隣
近肖古 朝 廷 眞淨 義慈 · 仲常, 殷相, 任子
近仇首 內 臣 眞高道   正福, 成忠, 義直
辰 斯 兎 官 眞嘉謨   興首, 常永, 覺伽
阿 莘 內 臣   正武
  兵 官 眞武  智積, 沙宅千福
腆 支 內 臣 (餘信)  岐味
  內 法 (解須)  · 綠福, 國辨成
  兵 官 解丘   沙宅孫登
  上佐平 餘信   
毗 有 上佐平 餘須   
蓋 鹵 上佐平 文周   

百濟官制에 대하여 언급한 문헌으로는 『三國史記』 外에 『周書』·『隋書』·『北史』·『舊唐書』·『新唐書』·『通典』·『括地志』 및 『日本書紀』가 있는데, 『日本書紀』는 체계있는 서술이 아니고 官名이 人名에 冠해진 部名과 함께 나올 뿐이다. 中國側 史書와 『三國史記』에 보면 다음의 <表>와 같다. (盧重國, 「百濟王室의 南遷과 支配勢力의 變遷」p.79의 表)
百濟의 官制에 대해서는 22部의 官制確立은 대개 南遷 以後의 事實로 보이지만, 官等制와 6佐平의 制는 南遷 以前 즉, 建國初期에 이미 成立되었으며, (李丙燾, 『韓國史』p.544) 漢城時代의 內臣·內頭·內法·衛士·朝廷·兵官佐平 등 6 佐平에서

<中國史書 및 三國史記에 보이는 百濟官階表>
<中國史書 및 三國史記에 보이는 百濟官階表>
周 書 北 史 三 國 史 記
古 爾 王 紀
舊 唐 書 三國史記 古爾王紀
一品 佐平 五人↑ 佐平 五人↑ 佐平(六人) 內臣佐平 : 掌宣納事 內臣佐平 : 掌宣納事
二品 達率 三十人 達率 三十人 達率



內頭佐平 : 掌庫藏事 內頭佐平 : 掌庫藏事
  
三品 恩率  恩率  恩率 內法佐平 : 掌禮儀事 內法佐平 : 掌禮儀事
四品 德率  德率  德率  衛士佐平 : 掌宿衛兵事 衛士佐平 : 掌宿衛事
五品 扞率  扞率  扞率  朝廷佐平 : 掌刑獄事 朝廷佐平 : 掌刑獄事
六品 奈率  奈率  奈率  兵官佐平 : 掌在外兵 兵官佐平 : 掌外兵事
七品 將德
將德
將德   
八品 施德
施德
施德   
九品 周德
周德
周德    
十品 季德
季德
季德   
十一品 對德 對德 對德   
十二品 文督 文督 文督   
十三品 武督  武督  武督   
十四品 佐軍  佐軍  佐軍    
十五品 振武  振武  振武   
十六品 克虞  克虞  克虞   

泗沘時代의 內官 12部와 外官 10部 등 총 22部司에 이르기까지 잘 정비된 官府들이 있었다고 한다. (李基東, 『韓國史溝座』p.223)
위와 같은 槪說的 理解 위에 최근의 연구들을 살펴보면, 李鍾旭은 百濟의 최고 관직을 통한 政治制度의 변화상을 추구하여 ① 第1期(溫祚~古爾 27年 1月 以前): 左補·右補가 최고의 관직 ② 第2期(古爾王 27年 1月~腆支王 4年 1月 以前): 南堂中心의 政治組織을 편성하였는데 南堂의 구성원들은 16官等의 體系안에 편입된 中央貴族들로서, 그 중 6佐平은 최고의 官等·官職으로 屬官을 거느림 ③ 第3期(腆支王 4年 1月~東城王 末年): 최고 관직은 上佐平으로, 上佐平은 6佐平의 우두머리인 동시에 王命의 出納이 그를 통해서 이루어지니, 王의 측근으로서 佐平을 감시하고 견제함 ④ 第4期(東城王 末年~義慈王 末年): 上佐平 중심체제에서 22部制로 변화하여 6佐平體制는 무너지고 佐平은 수적으로 증가하여 명예직화되었다는 4期로 百濟史를 구분하였다. ( 「百濟의 佐平」pp.40~42)
盧重國은 6佐平·16官等制의 百濟官制는『三國史記』가 말하는 古爾王代의 관제가 아니라 『周書』와 『舊唐書』가 나타내주고 있는 泗沘時代의 사실이라고 보면서, 그 근거로 『周書』나 『舊唐書』에 기록된 사실들은 원칙적으로 (北)周代나 唐代의 역사적 사건들을 기록한 것이라는 점과, 百濟官制를 論할 때 中央官制 뿐 아니라 5部·5方制라는 지방관제도 함께 정비되었을 것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地方制度의 본격적인 실시는 泗沘時代가 된다는 점 및 『周書』의 5佐平이 『舊唐書』에서는 6佐平으로 변화되고 있는데, 이는 唐의 六典組織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점을 들었다. (앞의 논문, pp.80~83) 그리고 上佐平과 6佐平과의 관계에 대해서 上佐平은 6佐平과는 별도로 두어져 6佐平 위에 위치하는 존재로 파악하고 있는 대부분의 견해(李丙燾, 『譯註 三國史記』p.383; 李基白, 「百濟王位繼承考」p.27; 坂元義種, 「五世紀の百濟大王とその王·侯」p.73; 李鍾旭, 앞의 논문, pp.38~44)와는 달리 泗沘時代의 6佐平 中 內臣佐平은 그 以前時代인 5佐平時代의 上佐平의 職能을 계승·강화시킨 것이라고 하였다. (앞의 논문, p.69)
≪參考文獻≫
『三國史記』卷25 「百濟本紀」3 腆支王 4年條.
李丙燾, 『韓國史』(古代篇), 1959; 『譯註 三國史記』1977.
李基白, 「百濟王位繼承考」『歷史學報』11, 1959.
李基東, 『百濟史講座』(古代篇), 1963.
李鍾旭, 「百濟의 佐平」『震檀學報』45, 1978.
盧重國, 「百濟王室의 南遷과 支配勢力의 變遷」『韓國史論』4, 1978; 「泗沘時代 百濟支配體制의 變遷」『韓㳓劤博士停年紀念史學論叢』1981.
車勇杰, 「百濟의 祭天祀地와 政治體制의 變化」『韓國學報』11, 1978
梁起鍚, 「熊津時代의 百濟支配層硏究-王權强化政策과 關聯하여-」『史學志』14, 1980; 「百濟 腆支王代의 政治的 變革」『湖西史學』10, 1982.
坂元義種, 「五世紀の百濟大王とその王·侯」『朝鮮史硏究會論文集』4,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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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63
百濟의 官制에 있어서 古爾王代의 정비가 갖는 의미는 重大하다. 盧重國은 百濟官制인 6佐平·16官等制의 기초가 마련된 古爾王代에 있어서 그 관제의 기본 골격은 ‘佐平’·‘率’級·‘德’級이었다고 하면서 ‘率’級 관등의 성격을 규명하였다. ( 「解氏와 扶餘氏의 王室交替와 初期百濟의 成長」pp.130~134) 즉, 16官等制에서 ‘率’을 共通末字로 갖는 官名으로는 達率·恩率·德率·扞率·奈率이 있는데, 이들은 率을 기본으로 하고 거기에 達·恩 등의 접두어가 붙으면서 점자 分化·擴大되었다고 하였다. 國語學에서 古語의 率을 고구려 관명인 意侯俟·褥薩·褥奢의 俟·薩·奢와 同一하게 ‘’·‘’ 또는 ‘솔’·‘술’·‘수리’로 읽는데, 兩國의 공통점은 ‘率’을 일정한 지역을 다스리는 족장(지배자)으로 본다는데 있다고 하였다. 이외에 『禮記』 「王制篇」의 ‘千里之外設方伯 五國以爲屬屬有長 十國以爲連 連有帥三十國以爲率 率有正 二百一十國以爲州 州有伯’이라 한데서 中國의 率(帥)에게 지방행정구획 내지는 지방의 지배자란 의미가 내포되어 있어 國語學에서의 率과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고, 『三國志』韓傳에 보이는 渠帥의 명칭인 臣智나 邑借의 ‘치’가 支·智와 같이 지배자·족장을 뜻하는 의미로서, ‘邑借’는 ‘골치’ 즉, 고을의 지배자를 지칭하니, 이것은 原義가 地方支配者인 率과 서로 비슷한 의미를 지녔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率’은 邑借의 후신으로 百濟연맹체의 집권력 성장과정에서 中央貴族化된 족장계급이라고 추정하였다. (앞의 논문, pp.134~135) 이어서 이러한 ‘率’들이 會議體를 구성하여 國事를 논의한 것을 ‘諸率會義’라 명명하였다. 三國과 대비되는 이들 ‘率’級에 대해서 그의 견해를 종합하여 表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三國의 國事論議會議體 比較表>
<三國의 國事論議會議體 比較表>
  族長의 稱→ 中央官名
化된 稱
中央 집권력 강화
이후의 국사논의체
會議場所 및 主宰者
高句麗 懮台(于台)→
兄 大加·小加⇒諸加
諸加會議 神聖之所로서의 田臘地→ 國相 설
치 이전은 王
新 羅 于 → 等 · 大等 大等會議(和白會議) 神聖之所로서의 四靈 地→
上大等 설치 이전은 王
百 濟 臣智
邑借→ 率(大率 → 諸率)
諸率會議 南堂→ 佐平 설치 이전은 王
(※虎岩寺의 政事岩 故事)

한편 金哲埈은 百濟의 官名은 高句麗·新羅에서의 族長的인 성격이 드물고, 그 官名들이 모두 漢字意味로 해석되며 또 抽象的으로 表現되어 있어 麗·羅와 커다란 차이가 있는 바, ‘達率’의 ‘達’은 아마도 우리 古語를, 그리고 第6品의 奈率의 ‘奈’는 新羅의 ‘奈麻’를 연상케 한다고 추측하였다. ( 「百濟社會와 그 文化」p.63)
≪參考文獻≫
『禮記』 「王制篇」5.
金哲埈, 「百濟社會와 그 文化」『韓國古代社會硏究』1975.
盧重國, 「解氏와 扶餘氏의 王室交替와 初期百濟의 成長」『金哲埈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1983, 知識産業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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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64
本文의 文督·武督으로 表示한 것은 우리 나라 歷史에 있어서 처음으로 文武의 區分을 表示한 증거라고 본 견해가 있다. (金哲埈, 「百濟社會와 그 文化」p.63)
≪參考文獻≫
金哲埈, 「百濟社會와 그 文化」『韓國古代社會硏究』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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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65
金哲埈은 佐軍·振武·克虞는 ‘下級軍人類’일 것으로 추정하였다. ( 「百濟社會와 그 문화」p.63)
≪參考文獻≫
金哲埈, 「百濟社會와 그 文化」『韓國古代社會硏究』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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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66
3品 以下에만 定員규정이 없음에 대하여 盧重國은 百濟가 漢城 및 熊律時代를 거치면서 신진세력들의 진출 등으로 말미암아 귀족이 숫적으로 확대되자, 이러한 諸貴族세력들을 지배체계내에 흡수·편제하고자 하는 방책에서 官無常員이라는 조처가 나온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 「泗沘時代 百濟支配體制의 變遷」p.58)
≪參考文獻≫
盧重國, 「泗沘時代 百濟支配體制의 變遷」『韓㳓劤博士停年紀念史學論叢』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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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67
內官 12部, 外官 10部의 行政官署에서 內官은 宮中事務를, 外官은 府中의 一般庶政을 담당했던 것으로 이해되어 왔는데, 22部의 구체적인 職務에 관해서는 그 名稱에서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이 22部司 중 일반 행정관청에 비하여 官內府 소속의 관청숫자가 더 많은 것은 특기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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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68
이것은 倉庫를 의미하는 것으로, 高句麗의 ‘桴京’에서 淵源한 듯 하다.
≪參考文獻≫
李基東, 『韓國史講座』(古代篇), 1982.
稻葉岩吉, 「百濟の椋及び椋部」『釋京』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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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69
外官에는 司軍(司馬)·司徒·司空·司寇 등 中國 古代의 周禮를 본뜬 天地春秋夏冬의 6官 이름이 그대로 쓰여지고 있다. 李基東은 北周는 『書經』 「周官」의 6官制를 채택하였는데, 百濟가 威德王 24·25年(577·578) 두차례에 걸쳐 北周에 使臣을 보낸 바 있으니, 北周의 제도를 모방했을 蓋然性이 크며, 이들 官名이 『周書』百濟博에 보이는 것은 이같은 추측을 더욱 강하게 해준다고 하였다. 또한 周代의 復古的인 관제는 貴族的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官僚的인 성격을 띄고 있는데, 百濟가 이같은 취지에서 北周의 제도를 채택하였는지는 의문스럽다고 하였다. (『韓國史講座』p.224)
盧重國은 22部司 중에서도 司軍部·司徒部·司空部·司寇部는 一般庶政을 담당하는 外官諸部司의 冒頭를 占하고 있어 그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는데, 이들의 명칭이 中國古制의 명칭을 그대로 借用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看過할 수 없다고 하였다. 中國古制를 통하여 그 職事를 보면 司軍部는 軍事關係, 司徒部는 敎育과 儀禮關係, 司空部는 經濟·財務關係, 司寇部는 刑罰關係 업무를 관장하였으니, 이들이 관장하고 있는 職事는 국가운영에 있어서 要職이었으며, 이는 바로 君主중심의 정치와 行政의 一面貌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 「泗沘時代 百濟支配體制의 變遷」pp.59~60)
≪參考文獻≫
盧重國, 「泗沘時代 百濟支配體制의 變遷」 「韓㳓劤博士停年紀念史學論叢」1981.
李基東, 『韓國史講座』(古代篇),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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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70
司軍部의 司軍에 대해서는 中國古典에서 그 名稱을 찾을 수 없다. 다만 司軍이라는 名稱이 의미하는 내용에서 미루어 보아 『周禮』나 『書經』에 보이는 ‘掌邦政統六師 平邦國’하는 司馬와 통하지 않을까 한다. (盧重國, 「泗沘時代 百濟支配體制의 變遷」p.60)
≪參考文獻≫
盧重國, 「泗沘時代 百濟支配體制의 變遷」 「韓㳓劤博士停年紀念史學論叢」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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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71
이에 대하여 『周禮』 「地官司徒」에는 ‘惟王建國 辨方正位 體國經野 設官分職 以爲民極 乃立地官司徒 使帥其屬而掌邦敎 以佐王安擾邦國’으로, 『書經』 「周官」에는 ‘司徒掌邦敎 敷五典 擾兆民’으로 기록되어 있다.
≪參考文獻≫
『周禮』卷9 「地官司徒」2.
『書經』 「周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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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72
이에 대해 『書經』 「周官」에는 ‘司空掌邦土 居四民 時地利’라 되어 있고, 『禮記』 「王制」에는 ‘司空執度 度地居民 山川沮澤 時四時 量地遠近 興事任力’이라 되어 있다.
≪參考文獻≫
『書經』 「周官」
『禮記』 「王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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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73
『周禮』 「秋官司寇」에는 ‘乃立秋官司寇 使帥基屬而掌邦禁 而佐王刑邦國’이라 되어 있고, 『書經』 「周官」에는 ‘司寇掌邦禁 詰姦慝 刑暴亂’이라 되어 있다.
≪參考文獻≫
『周禮』 卷34 「秋官司寇」5.
『書經』 「周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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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74

以上의 外官 10部에 대하여 李丙燾는 그 職事를 司軍部(軍部)·司徒部(文敎部)·司空部(土木部)·司寇部(司法部)·點口部(戶籍部)·外舍部(外戚部)·客部(外交部)·綢部(財務部)·日官部(天文氣象部)·都市部(市廛部)라 하였다. (『譯註 三國史記』p.610)
≪參考文獻≫
文定昌, 『百濟史』1975, 柏文堂.
李丙燾, 『譯註 三國史記』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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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http://db.history.go.kr/id/sa_001_0030_0020 (accessed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http://db.history.go.kr/id/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2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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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sa_001_0030_0020,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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