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新羅052052 新羅傳 『南史』新羅傳은 中國正史 중 처음으로 新羅에 대해 立傳한『梁書』新羅傳의 記錄을 그대로 轉載하고 있어 內容面에서 볼 때 별로 새로운 것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新羅의 出自에 대해서는 이를 생략하고 ‘其先事詳北史’라 하여『北史』를 參照시켜 놓고 있다. 이는『北史』도 같이 著述한 李延壽가 同一列傳에서 같은 내용의 記錄을 중복시키지 않으려 한 의도때문으로 보인다(高柄翊, 「中國正史의 外國列傳」p.32). 그 외에『梁書』新羅傳과 다른 점은 그 官名 가운데 『梁書』에는 보이지 않은 ‘壹旱支’를 더 써 넣은 것 뿐이다.
≪參考文獻≫
『梁書』卷54「東夷列傳」新羅條.
高柄翊, 「中國正史의 外國列傳-朝鮮傳을 中心으로-」『東亞交涉史의 硏究』1970, 서울大 出版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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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의 선조에 관한 사적은『北史』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신라는 百濟의 동남쪽 5천여리 밖에 있다. 국토의 동쪽은 큰 바다와 沿해 있고, 남과 북은 [高]句麗·百濟와 접하고 있다.
魏나라 때는 新盧라 불렀고, 宋나라 때는 新羅 혹은 斯羅라 하였는데,053053 魏時曰新盧 宋時曰新羅 或曰斯羅 新羅의 國號는 新盧·新羅·斯羅 이외에도 徐伐·徐羅(那)伐·斯盧·尸羅·鷄林·鷄貴 등으로 다양하며, 이들은 각각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참조>
1.『梁書』新羅傳 註 2)
新羅
新羅의 國號는 徐伐·徐羅(那)伐·斯盧·斯羅·尸羅·鷄林·鷄貴 등으로 다양한 편이며, 이들은 각기 다른 의미를 갖는다. 우선 新羅란 國號는『三國史記』智證王 4年(503)條의 ‘始祖創業已來 國名未定 或稱斯羅 或稱斯盧 或言新羅臣等以爲新者德業日新 羅者網羅四方之義 則其爲國號宜矣’에서 온 듯 하다. 新羅를 단순히 儒敎的인 理想的 國家觀을 나타낸 美辭麗句로 보기 쉽지만,(文暻鉉,「新羅國號의 硏究」p.2) 智證王을 전후한 新羅社會의 政治的 成熟度의 반영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申瀅植,「新羅史의 時代區分」p.17)
즉, 잡다한 여러 명칭으로부터 新羅에로의 고정은 급격한 新羅의 정치적 팽창을 의미한다. 또한 新羅라는 國號는 414년에 세워진 廣開土王陵碑에도 나타나고, 5세기 중에 세워진 中原高句麗碑에도 역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대외적으로 新羅를 대표하는 國號로서 新羅라는 용어가 사용된 것은 보다 오래전부터의 일이 아닌가 싶다. 新羅의 國號에 대한 諸文獻의 내용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가) 三國史記
① 徐那伐(赫居世卽位 號居西干 時年十三 國號徐那伐, 卷1)
② 鷄林(脫解尼師今九年 以其出於金櫝姓金氏 改始林名鷄林 因以爲國號, 卷1)
③ 斯羅·斯盧(國號曰徐耶伐 或云斯羅 或云斯盧 或云新羅, 卷34「地理」)
(나) 三國遺事
① 徐羅伐(國號徐羅伐又徐伐, 卷1「紀異」)
② 矩矩吒·䃜說羅(天竺人號海東云 矩矩吒䃜說羅 矩矩吒言雞也 䃜說羅言貴也 彼土相傳云 其國敬雞神而取尊, 卷4「義解」歸竺諸師)
(다) 帝王韻紀
尸羅(檀君據朝鮮之域爲王 故尸羅高禮 南北沃沮東北扶餘穢與貊 皆檀君之壽也, 卷下)
(라) 金石文
① 鷄林(此國于今不知佛法 爾後三千餘月 鷄林有聖王出 大興佛敎, 阿道和尙碑)
② 鷄林(鷄林地在鰲山側, 智證大師寂照之塔碑)
(마) 外國文獻
① 新盧·新羅(魏時曰斯盧 宋時曰新羅 或曰斯羅,『南史』新羅傳)
② 斯羅(或稱斯羅 其王本百濟人,『册府元龜』「外臣部」)
③ 鷄林(任那者去筑紫國二千餘里 北阻海以在鷄林之西南,『日本書紀』崇神天皇 65年)
이상의 예로 보아 新羅라는 國號가 나타나기 전에는 여러 가지의 이름이 있었으나, 6世紀 이후에는 거의 新羅로만 쓰여진 듯 하다. 奈勿王 26年(381)에 前秦에 入朝한 사실은 있으나, 國號 制定(智證王 4年, 503) 이후 최초로 中國과 交涉을 가진 것은 法興王 8年(521)의 對梁入朝이다. 그러므로 6世紀 초엽 이후 辰韓 또는 新盧의 후신으로써 新羅가 中國文獻에 기록되어 있다고 할 것이다.
徐羅伐·斯盧와 新羅는 모두 同一語의 相異한 표기로 생각될 수 있지만, 전자는 慶州一帶의 작은 세력집단이었던 때의 慶州勢力을, 후자는 상당한 廣域을 차지한 큰 세력국가를 표시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千寬宇,「三韓의 成立過程」p.42) 이러한 예는 伯濟와 百濟, 狗耶와 加耶의 관계와 비슷한 경우라 할 것이다.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新羅本紀」1 赫居世條·脫解尼師今條; 卷4「新羅本紀」4 智證王條; 卷34「地理志」1 新羅條.
『三國遺事』卷1「紀異」1 赫居世條; 卷4「義解」5 歸竺諸師條.
『帝王韻紀』卷4.
『南史』卷79「東夷列傳」新羅條.
『册府元龜』卷956「外臣部」種族條.
『日本書紀』卷5 崇神天皇 65年條.
千寬宇,「三韓의 成立過程」『史學硏究』26, 1975.
申瀅植,「新羅史의 時代區分」『韓國史硏究』18, 1977.
文暻鉉,「新羅國號의 硏究」『新羅史硏究』1983.
2.『梁書』新羅傳 註 6)
魏時曰新盧 宋時曰新羅 或曰斯羅
新羅라는 뜻을『三國史記』에서는 ‘德業曰新 羅者網羅四方之義’라고 하여 儒敎思想의 표현으로 생각하여 왔다. 이에 대해서 韓鎭書는 그의『海東繹史』에서 ‘東語 新曰斯伊 國曰羅’라 하여 새나라로 생각하였다. 梁柱東도 이에 따라 東方·東土로 간주하였다. 즉, 斯羅·新羅·斯盧·尸羅는 모두 의 借字로서 東方(東土)의 뜻으로 보고, 徐伐·鷄林·東京 등을 로 읽어 는 東·新·曙의 뜻으로, 은 光明國土로 보아 (徐那伐) 즉, 東川原으로 풀이하였다.(『古歌硏究』pp.40~42)
이에 대해서 田蒙秀는 실애벌 즉, 谷川原(山谷의 나라)으로 보았으며(「新羅의 名義」p.14) 安在鴻은 실(谷)·시로(城)의 뜻으로 풀이하였다.(『新羅上古史鑑』pp.169~170) 李丙燾는 徐那伐·蘇伐의 뜻을 高·上·聖의 뜻으로 풀어 百濟의 蘇夫里나 高句麗의 수릿골과 같은 Capital의 의미로 파악하였다.(「高句麗國號考」p.12) 趙芝薰의 경우도 의 뜻을 上國·高國·神國 등으로 설명하고 있다.(「新羅國號硏究論考」pp.15~17) 이와 비슷한 주장은 李在秀에게서 계속되고 있다.(「朴赫居世傳說論考」)
그러나 末松保和·三品彰英·今西龍 등은 을 金國 또는 鐵國으로 풀이한 바 있거니와,(末松保和,「朝鮮古代諸國の開國傳說と國姓」; 今西龍,『新羅史硏究』) 일찍부터 신라는 金國의 나라로 中東에 알려진 바도 있었다.(金定慰,「中世 이슬람 文獻에 비친 韓國像」) 이에 대해 文暻鉉은 신라가 곧  혹은 의 音借 내지 訓借의 漢字同音同訓 異字로 보았다. 즉, 그는 徐那(羅)伐·斯(新)盧·尸羅는 音借이며 新羅·鷄林·鷄貴는 訓借로 생각하였다.(「新羅國號의 硏究」pp.4~6) 다시 말해서 新字는 (시·쇠)란 原義를 갖고 있으니만치 란 黃金·鐵·銅의 뜻이며, 황금의 고귀하고 光輝에서 光明·東·新·高貴·寶物의 뜻으로 바뀐 것이다. 羅字는 那·耶와 같이 地·土·村·國을 의미하는 것으로 奴·讓·那(고구려)·洛·耶(가라)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伐은 新羅地名의 語尾에 붙이는 것으로 光明·原·國을 의미하는 (불)로 音讀한 것이다.(文暻鉉, 앞의 논문, p.5) 즉, 新羅는 北方의 鐵器文化를 가진 民族(古朝鮮系)이 南下하여 金村()을 건설하였고, 그것이 점차 확대되면서 그 村名도 로, 그 支配族의 姓氏도 (金·昔)로 한 연후에 儒敎思想의 표현인 新羅로 雅化한 것이라고 생각된다.(文暻鉉, 앞의 논문, p.6)
≪參考文獻≫
『三國史記』卷4「新羅本紀」4 智證王條.
『海東繹史』續3 辰韓條.
安在鴻,『新羅上古史鑑』1947.
李丙燾,「高句麗國號考」『서울大論文集』3, 1956.
梁柱東,『古歌硏究』1957.
田蒙秀,「新羅의 名義」『한글』77, 1940.
趙芝薰,「新羅國號硏究論考」『高麗大五十周年紀念論文集』1955.
李在秀,「朴赫居世傳說論考」『高秉幹博士頌壽紀念論叢』1960.
金定慰,「中世 이슬람 文獻에 비친 韓國像」『韓國史硏究』16, 1977.
文暻鉉,「新羅國號의 硏究」『新羅史硏究』1983, 慶北大出版部.
末松保和,「朝鮮古代諸國の開國傳說と國姓について」『歷史』1·2·3·4, 1948.
今西龍,『新羅史硏究』1970, 圖書刊行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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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작아서 독자적으로 사신을 파견할 수 없었다. 普通 2년(A.D.521; 新羅 法興王 8)에 姓은 募, 이름은 泰인 [신라]왕054054 王姓募名泰 法興王(514~540)은 원이름이 原宗이며, 中國측 기록에는 募泰(『南史』·『册府元龜』)라고 되어 있다. 智證王의 元子로서 母는 延帝夫人, 妃는 保刀夫人이었다.
王位에 27년간 있으면서 佛敎公認, 律令, 公服制定, 上大等·兵部令始置 등 新羅를 급진적으로 성장시켜 眞興王代의 극성기를 유도하였다. 그러나 後嗣가 없어 동생(立宗)의 아들(眞興王)이 王位를 계승케 되었으니 그 家系는 다음과 같다.
奈勿王(『三國史記』의거)

≪參考文獻≫
『三國史記』卷3·4「新羅本紀」3·4.
『三國遺事』卷1「王曆」1.
『册府元龜』「外臣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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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처음으로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백제를 따라와 방물을 바쳤다.

註 052
新羅傳 : 『南史』新羅傳은 中國正史 중 처음으로 新羅에 대해 立傳한『梁書』新羅傳의 記錄을 그대로 轉載하고 있어 內容面에서 볼 때 별로 새로운 것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新羅의 出自에 대해서는 이를 생략하고 ‘其先事詳北史’라 하여『北史』를 參照시켜 놓고 있다. 이는『北史』도 같이 著述한 李延壽가 同一列傳에서 같은 내용의 記錄을 중복시키지 않으려 한 의도때문으로 보인다(高柄翊, 「中國正史의 外國列傳」p.32). 그 외에『梁書』新羅傳과 다른 점은 그 官名 가운데 『梁書』에는 보이지 않은 ‘壹旱支’를 더 써 넣은 것 뿐이다.
≪參考文獻≫
『梁書』卷54「東夷列傳」新羅條.
高柄翊, 「中國正史의 外國列傳-朝鮮傳을 中心으로-」『東亞交涉史의 硏究』1970, 서울大 出版部.
註 053
魏時曰新盧 宋時曰新羅 或曰斯羅 : 新羅의 國號는 新盧·新羅·斯羅 이외에도 徐伐·徐羅(那)伐·斯盧·尸羅·鷄林·鷄貴 등으로 다양하며, 이들은 각각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참조>
1.『梁書』新羅傳 註 2)
新羅
新羅의 國號는 徐伐·徐羅(那)伐·斯盧·斯羅·尸羅·鷄林·鷄貴 등으로 다양한 편이며, 이들은 각기 다른 의미를 갖는다. 우선 新羅란 國號는『三國史記』智證王 4年(503)條의 ‘始祖創業已來 國名未定 或稱斯羅 或稱斯盧 或言新羅臣等以爲新者德業日新 羅者網羅四方之義 則其爲國號宜矣’에서 온 듯 하다. 新羅를 단순히 儒敎的인 理想的 國家觀을 나타낸 美辭麗句로 보기 쉽지만,(文暻鉉,「新羅國號의 硏究」p.2) 智證王을 전후한 新羅社會의 政治的 成熟度의 반영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申瀅植,「新羅史의 時代區分」p.17)
즉, 잡다한 여러 명칭으로부터 新羅에로의 고정은 급격한 新羅의 정치적 팽창을 의미한다. 또한 新羅라는 國號는 414년에 세워진 廣開土王陵碑에도 나타나고, 5세기 중에 세워진 中原高句麗碑에도 역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대외적으로 新羅를 대표하는 國號로서 新羅라는 용어가 사용된 것은 보다 오래전부터의 일이 아닌가 싶다. 新羅의 國號에 대한 諸文獻의 내용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가) 三國史記
① 徐那伐(赫居世卽位 號居西干 時年十三 國號徐那伐, 卷1)
② 鷄林(脫解尼師今九年 以其出於金櫝姓金氏 改始林名鷄林 因以爲國號, 卷1)
③ 斯羅·斯盧(國號曰徐耶伐 或云斯羅 或云斯盧 或云新羅, 卷34「地理」)
(나) 三國遺事
① 徐羅伐(國號徐羅伐又徐伐, 卷1「紀異」)
② 矩矩吒·䃜說羅(天竺人號海東云 矩矩吒䃜說羅 矩矩吒言雞也 䃜說羅言貴也 彼土相傳云 其國敬雞神而取尊, 卷4「義解」歸竺諸師)
(다) 帝王韻紀
尸羅(檀君據朝鮮之域爲王 故尸羅高禮 南北沃沮東北扶餘穢與貊 皆檀君之壽也, 卷下)
(라) 金石文
① 鷄林(此國于今不知佛法 爾後三千餘月 鷄林有聖王出 大興佛敎, 阿道和尙碑)
② 鷄林(鷄林地在鰲山側, 智證大師寂照之塔碑)
(마) 外國文獻
① 新盧·新羅(魏時曰斯盧 宋時曰新羅 或曰斯羅,『南史』新羅傳)
② 斯羅(或稱斯羅 其王本百濟人,『册府元龜』「外臣部」)
③ 鷄林(任那者去筑紫國二千餘里 北阻海以在鷄林之西南,『日本書紀』崇神天皇 65年)
이상의 예로 보아 新羅라는 國號가 나타나기 전에는 여러 가지의 이름이 있었으나, 6世紀 이후에는 거의 新羅로만 쓰여진 듯 하다. 奈勿王 26年(381)에 前秦에 入朝한 사실은 있으나, 國號 制定(智證王 4年, 503) 이후 최초로 中國과 交涉을 가진 것은 法興王 8年(521)의 對梁入朝이다. 그러므로 6世紀 초엽 이후 辰韓 또는 新盧의 후신으로써 新羅가 中國文獻에 기록되어 있다고 할 것이다.
徐羅伐·斯盧와 新羅는 모두 同一語의 相異한 표기로 생각될 수 있지만, 전자는 慶州一帶의 작은 세력집단이었던 때의 慶州勢力을, 후자는 상당한 廣域을 차지한 큰 세력국가를 표시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千寬宇,「三韓의 成立過程」p.42) 이러한 예는 伯濟와 百濟, 狗耶와 加耶의 관계와 비슷한 경우라 할 것이다.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新羅本紀」1 赫居世條·脫解尼師今條; 卷4「新羅本紀」4 智證王條; 卷34「地理志」1 新羅條.
『三國遺事』卷1「紀異」1 赫居世條; 卷4「義解」5 歸竺諸師條.
『帝王韻紀』卷4.
『南史』卷79「東夷列傳」新羅條.
『册府元龜』卷956「外臣部」種族條.
『日本書紀』卷5 崇神天皇 65年條.
千寬宇,「三韓의 成立過程」『史學硏究』26, 1975.
申瀅植,「新羅史의 時代區分」『韓國史硏究』18, 1977.
文暻鉉,「新羅國號의 硏究」『新羅史硏究』1983.
2.『梁書』新羅傳 註 6)
魏時曰新盧 宋時曰新羅 或曰斯羅
新羅라는 뜻을『三國史記』에서는 ‘德業曰新 羅者網羅四方之義’라고 하여 儒敎思想의 표현으로 생각하여 왔다. 이에 대해서 韓鎭書는 그의『海東繹史』에서 ‘東語 新曰斯伊 國曰羅’라 하여 새나라로 생각하였다. 梁柱東도 이에 따라 東方·東土로 간주하였다. 즉, 斯羅·新羅·斯盧·尸羅는 모두 의 借字로서 東方(東土)의 뜻으로 보고, 徐伐·鷄林·東京 등을 로 읽어 는 東·新·曙의 뜻으로, 은 光明國土로 보아 (徐那伐) 즉, 東川原으로 풀이하였다.(『古歌硏究』pp.40~42)
이에 대해서 田蒙秀는 실애벌 즉, 谷川原(山谷의 나라)으로 보았으며(「新羅의 名義」p.14) 安在鴻은 실(谷)·시로(城)의 뜻으로 풀이하였다.(『新羅上古史鑑』pp.169~170) 李丙燾는 徐那伐·蘇伐의 뜻을 高·上·聖의 뜻으로 풀어 百濟의 蘇夫里나 高句麗의 수릿골과 같은 Capital의 의미로 파악하였다.(「高句麗國號考」p.12) 趙芝薰의 경우도 의 뜻을 上國·高國·神國 등으로 설명하고 있다.(「新羅國號硏究論考」pp.15~17) 이와 비슷한 주장은 李在秀에게서 계속되고 있다.(「朴赫居世傳說論考」)
그러나 末松保和·三品彰英·今西龍 등은 을 金國 또는 鐵國으로 풀이한 바 있거니와,(末松保和,「朝鮮古代諸國の開國傳說と國姓」; 今西龍,『新羅史硏究』) 일찍부터 신라는 金國의 나라로 中東에 알려진 바도 있었다.(金定慰,「中世 이슬람 文獻에 비친 韓國像」) 이에 대해 文暻鉉은 신라가 곧  혹은 의 音借 내지 訓借의 漢字同音同訓 異字로 보았다. 즉, 그는 徐那(羅)伐·斯(新)盧·尸羅는 音借이며 新羅·鷄林·鷄貴는 訓借로 생각하였다.(「新羅國號의 硏究」pp.4~6) 다시 말해서 新字는 (시·쇠)란 原義를 갖고 있으니만치 란 黃金·鐵·銅의 뜻이며, 황금의 고귀하고 光輝에서 光明·東·新·高貴·寶物의 뜻으로 바뀐 것이다. 羅字는 那·耶와 같이 地·土·村·國을 의미하는 것으로 奴·讓·那(고구려)·洛·耶(가라)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伐은 新羅地名의 語尾에 붙이는 것으로 光明·原·國을 의미하는 (불)로 音讀한 것이다.(文暻鉉, 앞의 논문, p.5) 즉, 新羅는 北方의 鐵器文化를 가진 民族(古朝鮮系)이 南下하여 金村()을 건설하였고, 그것이 점차 확대되면서 그 村名도 로, 그 支配族의 姓氏도 (金·昔)로 한 연후에 儒敎思想의 표현인 新羅로 雅化한 것이라고 생각된다.(文暻鉉, 앞의 논문, p.6)
≪參考文獻≫
『三國史記』卷4「新羅本紀」4 智證王條.
『海東繹史』續3 辰韓條.
安在鴻,『新羅上古史鑑』1947.
李丙燾,「高句麗國號考」『서울大論文集』3, 1956.
梁柱東,『古歌硏究』1957.
田蒙秀,「新羅의 名義」『한글』77, 1940.
趙芝薰,「新羅國號硏究論考」『高麗大五十周年紀念論文集』1955.
李在秀,「朴赫居世傳說論考」『高秉幹博士頌壽紀念論叢』1960.
金定慰,「中世 이슬람 文獻에 비친 韓國像」『韓國史硏究』16, 1977.
文暻鉉,「新羅國號의 硏究」『新羅史硏究』1983, 慶北大出版部.
末松保和,「朝鮮古代諸國の開國傳說と國姓について」『歷史』1·2·3·4, 1948.
今西龍,『新羅史硏究』1970, 圖書刊行社.
註 054
王姓募名泰 : 法興王(514~540)은 원이름이 原宗이며, 中國측 기록에는 募泰(『南史』·『册府元龜』)라고 되어 있다. 智證王의 元子로서 母는 延帝夫人, 妃는 保刀夫人이었다.
王位에 27년간 있으면서 佛敎公認, 律令, 公服制定, 上大等·兵部令始置 등 新羅를 급진적으로 성장시켜 眞興王代의 극성기를 유도하였다. 그러나 後嗣가 없어 동생(立宗)의 아들(眞興王)이 王位를 계승케 되었으니 그 家系는 다음과 같다.
奈勿王(『三國史記』의거)

≪參考文獻≫
『三國史記』卷3·4「新羅本紀」3·4.
『三國遺事』卷1「王曆」1.
『册府元龜』「外臣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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