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위가 대대로 전하여져 30世인 眞平134134 眞平 신라 제 26代 王으로서 재위 54년(579~632)간에 陳·隋·唐과의 외교적 관문을 확장시켰다.
그는 眞智王에게 넘어갔던 王位를 다시 銅輪系로 되찾아 聖骨로서의 지위를 확립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으며(李基東,「新羅奈勿王系의 血緣意識」pp.1~36), 善德·眞德의 두 女王으로 왕위를 계승케 하였다(丁仲煥,「新羅聖骨考」pp.33~52).
이어 그는 眞智系의 반발을 회유코자 眞智王의 아들인 龍春(龍樹, 武烈王의 父)을 內省의 私臣으로 임명하여 王權의 專制化를 꾀한 바 있다(申瀅植,「新羅의 國家的 成長과 兵部令」p.157).
우선 왕의 전제화를 위한 수단으로 제도적 정비를 단행하였으니, 그 대표적인 것이 位和府 ·船府·調府·禮部·領客府 등 중앙관청의 설치이다. 그리하여 어느 정도 官僚制的인 체제정비를 단행한 후, 內省을 두어 강력한 왕권을 수호하였다.
이어 親隋·親唐政策을 추구하여 신라의 국제적 지위를 높였으며, 특히 眞平王 43년(621)에 入朝한 후에는 12년간 8次의 遣唐使를 보내 적극적으로 당에 접근하여 羅唐親善의 길을 열어 놓았다. 또한 龍春·舒玄(金庾信의 父)·金庾信 등의 도움으로 전열을 가다듬고 國力을 길러 統一을 가능케 하였다.
≪參考文獻≫
丁仲煥,「新羅聖骨考」『李弘稙博士回甲紀念韓國史學論叢』1969.
李基東,「新羅奈勿王系의 血緣意識」『歷史學報』53·54合輯, 1972(『新羅骨品制社會와 花郞徒』1984, 一潮閣)
申瀅植,「新羅의 國家的 成長과 兵部令」『韓國古代史의 新硏究』1984, 一潮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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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이르렀는데, 隋나라 開皇 14년 (A.D.594; 新羅 眞平王 16)에 遣使하여 方物을 바쳤다. 文帝는 眞平을 上開府 樂浪郡公 新羅王에 拜授하였다.
그 나라의 관직은 17등급이 있다.135135 其官有十七等 新羅의 官等에 대해서 『梁書』에는 子賁旱支·齊旱支·謁旱支·壹告支·奇貝旱支의 5등급으로 되어 있고, 『南史』에는 壹旱支가 더 추가된 6등급으로 되어 있으나, 나머지 史書에는 전부 17등급으로 되어 있다.
<참조>
『隋書』新羅傳 註 6)
其官有十七等
新羅의 官等은 17官階로 되어 있다.『梁書』에는 5등급,『南史』에는 6등급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나머지 史書에는 전부 17등급으로 되어 있다.
① 伊伐飡(角干·舒發翰·舒弗邯) ② 伊飡 ③ 迊飡 ④ 波珍飡 ⑤ 大阿飡 ⑥ 阿飡 ⑦ 一吉飡 ⑧ 沙飡 ⑨ 級飡 ⑩ 大奈麻 ⑪ 奈麻 ⑫ 大舍 ⑬ 小舍 ⑭ 吉士 ⑮ 大烏 ⑯ 小烏 ⑰ 造位 등으로 계층은 확인할 수 있으나, 그 속에는 몇 개의 그룹이 있었다.
<新羅의 官階·服色 및 進出表>
  官 階 服 色 系 列 官 階 進 出 表
1 伊 伐 飡 紫 衣 飡 類      
2 伊 飡
3 迊 飡
4 波 珍 飡
5 大 阿 飡
6 阿 飡 緋 衣      
7 一 吉 飡
8 沙 飡
9 級 飡
10 大 奈 麻 靑 衣 奈麻類          
11 奈 麻
12 大 舍 黃 衣 舍 類            
13 小 舍
14 吉 士(稽知) 知 類
15 大烏(大烏知)
16 小烏(小烏知)
17 造位(先沮知)
  眞骨 6 頭品 5 頭品 4 頭品
즉, <表>에서 볼 수 있듯이 17관등이 있어서 크게 4계열(飡·奈麻·舍·知類)이 있으며, 服色도 약간 다르게 구분되어 4가지로 되어 있었다.
따라서 계열과 복색간에는 어떤 연관이 있는 듯 하다.
그리고 官階進出에 있어서 上限線만 있고 下限線이 없기 때문에(金哲埈,「高句麗·新羅의 官階組織의 成立過程」p.147) 각 신분간에 불만이 있기 마련이다. 여기서 고려된 것이 重位制로서 각 신분간에 있어서의 정치적 완화를 꾀한 것도 사실이다(邊太燮,「新羅官等의 性格」).
그러나 軍主·仕臣 및 將軍의 하한선이 級飡이었으며, 6두품계통의 인물에게 追贈된 관등이 역시 級飡이어서 진골출신자들이 최초로 받는 관등이 級飡일 가능성이 있다(申瀅植,「新羅骨品制의 一考察」p.239).
왜냐하면 級飡 이상만 牙笏을 지닐 수 있으며, 金仁問이 23세에 波珍飡이 되었다는 사실은 그가 17위 造位로부터 관직을 시작하였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엄격한 신분사회에 있어서 각 신분층이 동일하게 최하위로부터 출발하였다는 假設은 당시 여러 가지 제약이 있던 新羅로서는 납득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學界의 通說은 각 신분간에 있어서는 下限線이 없이 똑같이 출발한다는 것으로 집약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官階制度의 成立年代에 있어서 曾野壽彦은 568년에 대부분 성립되었다고 하였고(「新羅の十七等の官位成立の年代についての一考察」pp.127~128), 三池賢一은 眞平王代로 추정하였다(「新羅官位制度(上)」pp.21~27).
그러나 1978년 丹陽赤城碑의 發見으로 즉, 伊干·彼珍干·大阿干·阿干·及干·大舍·大烏 등의 확인을 통해서 신라관등의 성립연대는 眞興王 12년(551) 이전으로 소급되어졌다(李基東,「新羅官等制度의 成立年代問題와 赤城碑의 發見」p.389).
그리하여 우리는 신라관등의 성립이 法興王 7년(520)에 반포된 律令 속에 포함된 듯 하다는 示晙을 받게 된다(李基白,『韓國史新論』p.58).
또한 이 시기에 骨品制(특히 頭品制) 成立과 연결시킨 木村誠의 견해를 부연하여 6세기 초엽에 신라의 17관등제가 마련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6世紀新羅における骨品制の成立」pp.19~32).
왜냐하면 17관등제는 骨品制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參考文獻≫
『梁書』卷54「東夷列傳」新羅條.
『南史』卷79下「東夷列傳」新羅條.
邊太燮,「新羅官等의 性格」『歷史敎育』1, 1956.
李基白,『韓國史新論』1967, 一潮閣.
金哲埈,「高句麗·新羅의 官階組織의 成立過程」『韓國古代社會硏究』1975, 知識産業社.
李基東,「新羅官等制度의 成立年代問題와 赤城碑의 發見」『史學志』12, 1978(『新羅骨品制社會와 花郞徒』1980, 韓國硏究院)
申瀅植,「新羅骨品制의 一考察」『韓國古代史의 新硏究』1984.
曾野壽彦,「新羅の十七等の官位成立の年代についての一考察」『人文科學紀要(古代硏究)』5, 1955.
三池賢一,「新羅官位制度」(上)『法政史學』22, 1970.
木村誠,「6世紀新羅における骨品制の成立」『歷史學硏究』428號, 1976.
≪參考文獻≫
『梁書』卷54「東夷列傳」新羅條.
『南史』卷79「東夷列傳」新羅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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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등급은 伊罰干이니 존귀하기가[중국의] 相國136136 相國 우리나라는 相國이라는 말 대신 國相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通例였다.
三國에는 國初에 大輔 또는 左·右輔가 있었다. 新羅에서는 脫解가 南解王 때 大輔가 되었고, 瓠公이 脫解王 때 역시 大輔가 된 바 있다. 高句麗에서는 陜父가 琉璃王 때 역시 大輔가 된 이후, 左輔(乙豆智, 穆度婁)·右輔(乙豆智, 高福章) 등이 보인다.
大輔는 첫해, 部族長 또는 部族長會義의 대표로 왕을 견제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둘째, 兼知內外兵馬事를 맡는 大臣으로서 宰相의 뜻을 지닌다(申瀅植,「新羅의 國家的 成長과 兵部令」pp.148~150)
그러나 이러한 초기의 명칭은 신라의 경우 法興王 때 上大等·兵部令의 성립으로 소멸되었으며(申瀅植, 앞의 논문, p.152), 고구려의 경우에도 新大王 때 國相의 성립으로 없어졌으니, 『三國史記』新大王 2年의 ‘拜荅夫爲國相 加爵爲沛者 令知內外兵馬 兼領梁貊部落 改左右輔爲國相 始於此’에서와 같이 大輔, 左·右輔制는 國相制로 바뀌었다(李鍾旭,「高句麗初期의 左·右輔와 國相」p.485) 그리고 明臨荅夫 이후 乙巴素·高優婁·創助利 등이 國相을 역임하였다.
우리나라는 중국과 반대로 쓰는 경우가 많으니, 一統은 統一로, 相國은 國相으로 쓰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伊罰干의 존귀함이 相國과 같다는 뜻이지 그것이 곤 相國이라는 것은 아니다. 伊罰干에 있는 인물이 주로 相國이 된다는 것으로 생각해도 무방하다.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6「高句麗本紀」4 新大王 2年條.
李鍾旭,「高句麗初期의 左·右輔와 國相」『全海宗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1979.
申瀅植,「新羅의 國家的 成長과 兵部令」『韓國古代史의 新硏究』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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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같다. 다음은 伊尺干·迎干·破彌干137137 破彌干 破彌千은 新羅 官等의 제 4 위인 ‘波珍飡’을 말한다.
<참조>
『隋書』新羅傳 註 7)
破彌干
破彌干은 신라 제4위의 관등인 破珍飡을 말한다.
『隋書』와『通典』의 이러한 표기와는 달리 破𤪙干이라고도 기록되어 있는데, 아마도 彌는 𤪙의 잘못된 표기로 생각된다. 한편, 海干이라고도 부른 것을 보면 처음 海官 즉, 水軍司令官의 직능을 수행했을지도 모른다는 풀이가 가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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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阿尺干138138 大阿尺干 大阿尺干은 新羅 官等의 제 5 위인 ‘大阿飡’의 별칭이다.
<참조>
『隋書』新羅傳 註 8)
大阿尺干
大阿尺干은 신라 제5위의 관등인 大阿飡의 별칭이다.
大阿干·大阿尺干 등으로도 불리워지는 이것은 眞骨과 六頭品 계열과를 구별짓는 관등으로서, 大阿飡 이상의 관등은 진골만이 될 수 있다.
服色에 있어서도 紫色을 입으며, 대개의 장관(令)이나 將軍 등도 大阿飡 이상이 임명되는 것이 원칙이다.
다만 阿飡의 관등으로서도 上大等·侍中이 된 인물이 있기도 하지만, 그들도 진골 출신임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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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阿尺干·乙吉干139139 乙吉干 乙吉干은 新羅 官等의 제 7 위인 ‘一吉飡’의 별칭이다.
<참조>
『梁書』新羅傳 註 15)
壹告支
壹告支는 新羅官等의 제 7위인 一吉飡의 별칭이다. 그외 乙吉干(『隋書』·『通典』)·一吉干 등이라 칭하고 있으며,『南史』는 壹吉支라 하고 있다. 告는 吉의 잘못인 듯 싶다. 대개의 경우『梁書』와『南史』는 같은 계통의 文獻에 따른 것이라 생각되며,『隋書』와『通典』은 또 다른 같은 자료를 인용한 것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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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沙咄干140140 沙咄干 沙咄干은 新羅 官等의 제 8 위인 ‘沙飡’의 별칭이다.
<참조>
『隋書』新羅傳 註 10)
沙咄干
沙咄干은 신라 관등 제8위인 沙飡을 말한다.「昌寧碑」에는 沙尺干으로 되어 있고,「黃草嶺碑」에는 沙干으로 되어 있다.「磨雲嶺碑」또한 沙干으로 되어 있다. 그 외 隆飡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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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及伏干141141 及伏干 及伏干은 新羅 官等의 제 9 위인 ‘級飡’의 별칭이다.
<참조>
1.『梁書』新羅傳 註 16)
奇貝旱支
奇貝旱支는 新羅官等의 제 9위인 級飡의 별칭이다. 그외 及伏干(『隋書』)·級伐干(『通典』)·及尺干(眞興王巡狩碑)으로 되어 있다. 級飡 이상은 최상의 伊伐飡까지 飡字(干·汗 등의 뜻)를 쓰고 있으며, 眞骨出身들이 주로 처음으로 받은 官等이어서 眞骨이 받는 최초 관등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된다.(申瀅植,「新羅骨品制의 一考察」p.243)
≪參考文獻≫
申瀅植,「新羅骨品制의 一考察」『韓國古代史의 新硏究』1984.
2.『隋書』新羅傳 註 11)
及伏干
及伏干은 신라 관등 제9위인 級飡의 별칭이다.
及伐干·及尺干(「昌寧碑」)·及干(「黃草嶺碑」)·級伐飡 등으로 불리워지는 것으로 飡字를 쓰는 관등의 최하위의 명칭이다.
級飡은 緋衣를 입을 수 있는 한계선에 있으면서 眞骨 신분인 경우에는 牙笏을 가질 수 있으니, 진골 신분과 어떤 연관을 시킬 수 있다.
즉, 급찬은 6두품 계열의 追贈官階로 사용되었고 진골출신의 無子나 初仕時에 부여된 관등일 가능성이 크다(申瀅植,「新羅骨品制의 一考察」p.239).
다만 5·4두품은 級飡의 位에 오를 수 없다.
≪參考文獻≫
申瀅植,「新羅骨品制의 一考察」『韓國古代史의 新硏究』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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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奈摩干142142 大奈摩干 大奈摩干은 新羅 官等의 제10위인 ‘大奈麻’의 별칭이다.
<참조>
『隋書』新羅傳 註 12)
大奈摩干·奈摩
大奈摩干은 신라 관등 제10위인 大奈麻를 말한다. 大奈末(「昌寧碑」)·韓那末·大那末로 별칭되기도 한다.
이 관등은 5두품이 될 수 있는 최상의 官等으로서 奈麻와 같이 靑衣를 입었다.
특히 6·5두품의 신분상의 차이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 重奈麻制(重大奈麻~9重大奈麻)가 있었다(邊太燮,「新羅官等의 性格」).
奈麻와 大奈麻는 같은 靑衣와 공통의 奈麻語彙를 갖고 있어 주로 5두품 계열이 받았을 것으로 믿어진다. 그러나 다른 신분의 인물에게 주어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參考文獻≫
邊太燮,「新羅官等의 性格」『歷史敎育』1,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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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奈摩·大舍·小舍143143 大舍·小舍 大舍와 小舍는 舍類로서, 新羅 官等의 제 12·13위이며, 大舍는 4頭品의 上限線이다.
<참조>
『隋書』新羅傳 註 13)
大舍·小舍
大舍와 小舍는 舍類로서 4두품의 上限線이 大舍이다.
屋舍規定에서 살펴보면 4두품과 평민은 거의 같이 長廣이 15尺을 넘지 못하고 있어 羅末에 오면 4두품은 平民과 구별되지 못했으리라 여겨진다. 특히 大舍와 小舍는 官職名에 있어서도 같은 이름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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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吉士·大烏·小烏·造位144144 吉士·大烏·小烏·造位 吉士·大烏·小烏·造位는 新羅 官等의 제 14·15·16·17위로서, 吉士는 ‘稽知’·大烏는 ‘大烏知’·小烏는 ‘小烏知’·造位는 ‘先沮知’의 별칭이다.
<참조>
『隋書』新羅傳 註 14)
吉土·大烏·小烏·造位
吉土(『三國史記』권38에는 吉士로 나온다) 이하는 知字의 共同 語尾를 갖고 있다. 즉, 吉土는 稽知, 大烏는 大烏知, 小烏는 小烏知, 그리고 造位는 先沮知라고 한다.
이는 그 그룹이 갖고 있는 身分的 共通性을 반영한 것으로, 執事部·兵部의 史가 갖는 관직상의 下限線이었다. 즉, 執事部·兵部의 大舍(官職-弟監·郞中)는 小舍(13위)를 하한선으로 하였으며, 史(末端官職)는 造位부터였으니 주로 4두품 계열에게 준 官等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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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차례이다. 지방에는 郡과 縣이 있다.145145 外有郡縣 新羅에서 처음으로 郡縣制가 실시된 것은 『三國史記』에 의하면 智證王 6年(505)의 일이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초기적인 내용이었고 보다 뚜렷한 郡縣制는 法興·眞興王代에 이르러 발달했으리라 여겨진다.
<참조>
『隋書』新羅傳 註 15)
外有郡縣
新羅에서 처음으로 郡縣制가 실시된 것은 기록상으로는 智證王 6년(505)이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초기적인 내용이었고 보다 뚜렷한 郡縣制는 法興·眞興王代에 이르러 발달했으리라 여겨진다.
그러나「南山新城碑」에 나타난 州(軍主)·郡(太守-幢主)·村(道使-村主)의 계층적인 관계를 고려하여 보면(李鍾旭,「南山新城碑를 통하여 본 新羅의 地方統治體制」pp.1~69) 아직도 중국적인 郡縣制가 실시된 것은 아니다(朱甫暾,「新羅中古의 地方統治組織에 대하여」pp.1~39).
따라서 신라에 있어서 제도적으로 郡縣制가 완성된 것은 統一 以後라 생각된다.
『三國史記』에 나타난 郡縣의 數를 도해하면 아래와 같다.

統一新羅의 郡縣(『三國史記』)
州 名 領 郡 領 縣 小 京
尙 州 10 31 
良 州 12 35 金海小京
康 州 11 30 
漢 州 28 49 中 原 京
朔 州 12 26
北 原 京
溟 州 9 25 
熊 州 13 29 西 原 京
全 州 10 31 南 原 京
武 州 15 43 
120 299 
≪參考文獻≫
『三國史記』卷34·卷35·卷36「地理志」1·2·3 新羅條.
李鍾旭,「南山新城碑를 통하여 본 新羅의 地方統治體制」『歷史學報』64, 1974.
朱甫暾,「新羅中古의 地方統治組織에 대하여」『韓國史硏究』23,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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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34
眞平 : 신라 제 26代 王으로서 재위 54년(579~632)간에 陳·隋·唐과의 외교적 관문을 확장시켰다.
그는 眞智王에게 넘어갔던 王位를 다시 銅輪系로 되찾아 聖骨로서의 지위를 확립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으며(李基東,「新羅奈勿王系의 血緣意識」pp.1~36), 善德·眞德의 두 女王으로 왕위를 계승케 하였다(丁仲煥,「新羅聖骨考」pp.33~52).
이어 그는 眞智系의 반발을 회유코자 眞智王의 아들인 龍春(龍樹, 武烈王의 父)을 內省의 私臣으로 임명하여 王權의 專制化를 꾀한 바 있다(申瀅植,「新羅의 國家的 成長과 兵部令」p.157).
우선 왕의 전제화를 위한 수단으로 제도적 정비를 단행하였으니, 그 대표적인 것이 位和府 ·船府·調府·禮部·領客府 등 중앙관청의 설치이다. 그리하여 어느 정도 官僚制的인 체제정비를 단행한 후, 內省을 두어 강력한 왕권을 수호하였다.
이어 親隋·親唐政策을 추구하여 신라의 국제적 지위를 높였으며, 특히 眞平王 43년(621)에 入朝한 후에는 12년간 8次의 遣唐使를 보내 적극적으로 당에 접근하여 羅唐親善의 길을 열어 놓았다. 또한 龍春·舒玄(金庾信의 父)·金庾信 등의 도움으로 전열을 가다듬고 國力을 길러 統一을 가능케 하였다.
≪參考文獻≫
丁仲煥,「新羅聖骨考」『李弘稙博士回甲紀念韓國史學論叢』1969.
李基東,「新羅奈勿王系의 血緣意識」『歷史學報』53·54合輯, 1972(『新羅骨品制社會와 花郞徒』1984, 一潮閣)
申瀅植,「新羅의 國家的 成長과 兵部令」『韓國古代史의 新硏究』1984, 一潮閣.
註 135
其官有十七等 : 新羅의 官等에 대해서 『梁書』에는 子賁旱支·齊旱支·謁旱支·壹告支·奇貝旱支의 5등급으로 되어 있고, 『南史』에는 壹旱支가 더 추가된 6등급으로 되어 있으나, 나머지 史書에는 전부 17등급으로 되어 있다.
<참조>
『隋書』新羅傳 註 6)
其官有十七等
新羅의 官等은 17官階로 되어 있다.『梁書』에는 5등급,『南史』에는 6등급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나머지 史書에는 전부 17등급으로 되어 있다.
① 伊伐飡(角干·舒發翰·舒弗邯) ② 伊飡 ③ 迊飡 ④ 波珍飡 ⑤ 大阿飡 ⑥ 阿飡 ⑦ 一吉飡 ⑧ 沙飡 ⑨ 級飡 ⑩ 大奈麻 ⑪ 奈麻 ⑫ 大舍 ⑬ 小舍 ⑭ 吉士 ⑮ 大烏 ⑯ 小烏 ⑰ 造位 등으로 계층은 확인할 수 있으나, 그 속에는 몇 개의 그룹이 있었다.
<新羅의 官階·服色 및 進出表>
  官 階 服 色 系 列 官 階 進 出 表
1 伊 伐 飡 紫 衣 飡 類      
2 伊 飡
3 迊 飡
4 波 珍 飡
5 大 阿 飡
6 阿 飡 緋 衣      
7 一 吉 飡
8 沙 飡
9 級 飡
10 大 奈 麻 靑 衣 奈麻類          
11 奈 麻
12 大 舍 黃 衣 舍 類            
13 小 舍
14 吉 士(稽知) 知 類
15 大烏(大烏知)
16 小烏(小烏知)
17 造位(先沮知)
  眞骨 6 頭品 5 頭品 4 頭品
즉, <表>에서 볼 수 있듯이 17관등이 있어서 크게 4계열(飡·奈麻·舍·知類)이 있으며, 服色도 약간 다르게 구분되어 4가지로 되어 있었다.
따라서 계열과 복색간에는 어떤 연관이 있는 듯 하다.
그리고 官階進出에 있어서 上限線만 있고 下限線이 없기 때문에(金哲埈,「高句麗·新羅의 官階組織의 成立過程」p.147) 각 신분간에 불만이 있기 마련이다. 여기서 고려된 것이 重位制로서 각 신분간에 있어서의 정치적 완화를 꾀한 것도 사실이다(邊太燮,「新羅官等의 性格」).
그러나 軍主·仕臣 및 將軍의 하한선이 級飡이었으며, 6두품계통의 인물에게 追贈된 관등이 역시 級飡이어서 진골출신자들이 최초로 받는 관등이 級飡일 가능성이 있다(申瀅植,「新羅骨品制의 一考察」p.239).
왜냐하면 級飡 이상만 牙笏을 지닐 수 있으며, 金仁問이 23세에 波珍飡이 되었다는 사실은 그가 17위 造位로부터 관직을 시작하였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엄격한 신분사회에 있어서 각 신분층이 동일하게 최하위로부터 출발하였다는 假設은 당시 여러 가지 제약이 있던 新羅로서는 납득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學界의 通說은 각 신분간에 있어서는 下限線이 없이 똑같이 출발한다는 것으로 집약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官階制度의 成立年代에 있어서 曾野壽彦은 568년에 대부분 성립되었다고 하였고(「新羅の十七等の官位成立の年代についての一考察」pp.127~128), 三池賢一은 眞平王代로 추정하였다(「新羅官位制度(上)」pp.21~27).
그러나 1978년 丹陽赤城碑의 發見으로 즉, 伊干·彼珍干·大阿干·阿干·及干·大舍·大烏 등의 확인을 통해서 신라관등의 성립연대는 眞興王 12년(551) 이전으로 소급되어졌다(李基東,「新羅官等制度의 成立年代問題와 赤城碑의 發見」p.389).
그리하여 우리는 신라관등의 성립이 法興王 7년(520)에 반포된 律令 속에 포함된 듯 하다는 示晙을 받게 된다(李基白,『韓國史新論』p.58).
또한 이 시기에 骨品制(특히 頭品制) 成立과 연결시킨 木村誠의 견해를 부연하여 6세기 초엽에 신라의 17관등제가 마련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6世紀新羅における骨品制の成立」pp.19~32).
왜냐하면 17관등제는 骨品制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參考文獻≫
『梁書』卷54「東夷列傳」新羅條.
『南史』卷79下「東夷列傳」新羅條.
邊太燮,「新羅官等의 性格」『歷史敎育』1, 1956.
李基白,『韓國史新論』1967, 一潮閣.
金哲埈,「高句麗·新羅의 官階組織의 成立過程」『韓國古代社會硏究』1975, 知識産業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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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瀅植,「新羅骨品制의 一考察」『韓國古代史의 新硏究』1984.
曾野壽彦,「新羅の十七等の官位成立の年代についての一考察」『人文科學紀要(古代硏究)』5, 1955.
三池賢一,「新羅官位制度」(上)『法政史學』22, 1970.
木村誠,「6世紀新羅における骨品制の成立」『歷史學硏究』428號, 1976.
≪參考文獻≫
『梁書』卷54「東夷列傳」新羅條.
『南史』卷79「東夷列傳」新羅條.
註 136
相國 : 우리나라는 相國이라는 말 대신 國相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通例였다.
三國에는 國初에 大輔 또는 左·右輔가 있었다. 新羅에서는 脫解가 南解王 때 大輔가 되었고, 瓠公이 脫解王 때 역시 大輔가 된 바 있다. 高句麗에서는 陜父가 琉璃王 때 역시 大輔가 된 이후, 左輔(乙豆智, 穆度婁)·右輔(乙豆智, 高福章) 등이 보인다.
大輔는 첫해, 部族長 또는 部族長會義의 대표로 왕을 견제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둘째, 兼知內外兵馬事를 맡는 大臣으로서 宰相의 뜻을 지닌다(申瀅植,「新羅의 國家的 成長과 兵部令」pp.148~150)
그러나 이러한 초기의 명칭은 신라의 경우 法興王 때 上大等·兵部令의 성립으로 소멸되었으며(申瀅植, 앞의 논문, p.152), 고구려의 경우에도 新大王 때 國相의 성립으로 없어졌으니, 『三國史記』新大王 2年의 ‘拜荅夫爲國相 加爵爲沛者 令知內外兵馬 兼領梁貊部落 改左右輔爲國相 始於此’에서와 같이 大輔, 左·右輔制는 國相制로 바뀌었다(李鍾旭,「高句麗初期의 左·右輔와 國相」p.485) 그리고 明臨荅夫 이후 乙巴素·高優婁·創助利 등이 國相을 역임하였다.
우리나라는 중국과 반대로 쓰는 경우가 많으니, 一統은 統一로, 相國은 國相으로 쓰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伊罰干의 존귀함이 相國과 같다는 뜻이지 그것이 곤 相國이라는 것은 아니다. 伊罰干에 있는 인물이 주로 相國이 된다는 것으로 생각해도 무방하다.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6「高句麗本紀」4 新大王 2年條.
李鍾旭,「高句麗初期의 左·右輔와 國相」『全海宗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1979.
申瀅植,「新羅의 國家的 成長과 兵部令」『韓國古代史의 新硏究』1984.
註 137
破彌干 : 破彌千은 新羅 官等의 제 4 위인 ‘波珍飡’을 말한다.
<참조>
『隋書』新羅傳 註 7)
破彌干
破彌干은 신라 제4위의 관등인 破珍飡을 말한다.
『隋書』와『通典』의 이러한 표기와는 달리 破𤪙干이라고도 기록되어 있는데, 아마도 彌는 𤪙의 잘못된 표기로 생각된다. 한편, 海干이라고도 부른 것을 보면 처음 海官 즉, 水軍司令官의 직능을 수행했을지도 모른다는 풀이가 가능하게 된다.
註 138
大阿尺干 : 大阿尺干은 新羅 官等의 제 5 위인 ‘大阿飡’의 별칭이다.
<참조>
『隋書』新羅傳 註 8)
大阿尺干
大阿尺干은 신라 제5위의 관등인 大阿飡의 별칭이다.
大阿干·大阿尺干 등으로도 불리워지는 이것은 眞骨과 六頭品 계열과를 구별짓는 관등으로서, 大阿飡 이상의 관등은 진골만이 될 수 있다.
服色에 있어서도 紫色을 입으며, 대개의 장관(令)이나 將軍 등도 大阿飡 이상이 임명되는 것이 원칙이다.
다만 阿飡의 관등으로서도 上大等·侍中이 된 인물이 있기도 하지만, 그들도 진골 출신임이 확실하다.
註 139
乙吉干 : 乙吉干은 新羅 官等의 제 7 위인 ‘一吉飡’의 별칭이다.
<참조>
『梁書』新羅傳 註 15)
壹告支
壹告支는 新羅官等의 제 7위인 一吉飡의 별칭이다. 그외 乙吉干(『隋書』·『通典』)·一吉干 등이라 칭하고 있으며,『南史』는 壹吉支라 하고 있다. 告는 吉의 잘못인 듯 싶다. 대개의 경우『梁書』와『南史』는 같은 계통의 文獻에 따른 것이라 생각되며,『隋書』와『通典』은 또 다른 같은 자료를 인용한 것이라 생각된다.
註 140
沙咄干 : 沙咄干은 新羅 官等의 제 8 위인 ‘沙飡’의 별칭이다.
<참조>
『隋書』新羅傳 註 10)
沙咄干
沙咄干은 신라 관등 제8위인 沙飡을 말한다.「昌寧碑」에는 沙尺干으로 되어 있고,「黃草嶺碑」에는 沙干으로 되어 있다.「磨雲嶺碑」또한 沙干으로 되어 있다. 그 외 隆飡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註 141
及伏干 : 及伏干은 新羅 官等의 제 9 위인 ‘級飡’의 별칭이다.
<참조>
1.『梁書』新羅傳 註 16)
奇貝旱支
奇貝旱支는 新羅官等의 제 9위인 級飡의 별칭이다. 그외 及伏干(『隋書』)·級伐干(『通典』)·及尺干(眞興王巡狩碑)으로 되어 있다. 級飡 이상은 최상의 伊伐飡까지 飡字(干·汗 등의 뜻)를 쓰고 있으며, 眞骨出身들이 주로 처음으로 받은 官等이어서 眞骨이 받는 최초 관등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된다.(申瀅植,「新羅骨品制의 一考察」p.243)
≪參考文獻≫
申瀅植,「新羅骨品制의 一考察」『韓國古代史의 新硏究』1984.
2.『隋書』新羅傳 註 11)
及伏干
及伏干은 신라 관등 제9위인 級飡의 별칭이다.
及伐干·及尺干(「昌寧碑」)·及干(「黃草嶺碑」)·級伐飡 등으로 불리워지는 것으로 飡字를 쓰는 관등의 최하위의 명칭이다.
級飡은 緋衣를 입을 수 있는 한계선에 있으면서 眞骨 신분인 경우에는 牙笏을 가질 수 있으니, 진골 신분과 어떤 연관을 시킬 수 있다.
즉, 급찬은 6두품 계열의 追贈官階로 사용되었고 진골출신의 無子나 初仕時에 부여된 관등일 가능성이 크다(申瀅植,「新羅骨品制의 一考察」p.239).
다만 5·4두품은 級飡의 位에 오를 수 없다.
≪參考文獻≫
申瀅植,「新羅骨品制의 一考察」『韓國古代史의 新硏究』1984.
註 142
大奈摩干 : 大奈摩干은 新羅 官等의 제10위인 ‘大奈麻’의 별칭이다.
<참조>
『隋書』新羅傳 註 12)
大奈摩干·奈摩
大奈摩干은 신라 관등 제10위인 大奈麻를 말한다. 大奈末(「昌寧碑」)·韓那末·大那末로 별칭되기도 한다.
이 관등은 5두품이 될 수 있는 최상의 官等으로서 奈麻와 같이 靑衣를 입었다.
특히 6·5두품의 신분상의 차이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 重奈麻制(重大奈麻~9重大奈麻)가 있었다(邊太燮,「新羅官等의 性格」).
奈麻와 大奈麻는 같은 靑衣와 공통의 奈麻語彙를 갖고 있어 주로 5두품 계열이 받았을 것으로 믿어진다. 그러나 다른 신분의 인물에게 주어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參考文獻≫
邊太燮,「新羅官等의 性格」『歷史敎育』1, 1956.
註 143
大舍·小舍 : 大舍와 小舍는 舍類로서, 新羅 官等의 제 12·13위이며, 大舍는 4頭品의 上限線이다.
<참조>
『隋書』新羅傳 註 13)
大舍·小舍
大舍와 小舍는 舍類로서 4두품의 上限線이 大舍이다.
屋舍規定에서 살펴보면 4두품과 평민은 거의 같이 長廣이 15尺을 넘지 못하고 있어 羅末에 오면 4두품은 平民과 구별되지 못했으리라 여겨진다. 특히 大舍와 小舍는 官職名에 있어서도 같은 이름을 보이고 있다.
註 144
吉士·大烏·小烏·造位 : 吉士·大烏·小烏·造位는 新羅 官等의 제 14·15·16·17위로서, 吉士는 ‘稽知’·大烏는 ‘大烏知’·小烏는 ‘小烏知’·造位는 ‘先沮知’의 별칭이다.
<참조>
『隋書』新羅傳 註 14)
吉土·大烏·小烏·造位
吉土(『三國史記』권38에는 吉士로 나온다) 이하는 知字의 共同 語尾를 갖고 있다. 즉, 吉土는 稽知, 大烏는 大烏知, 小烏는 小烏知, 그리고 造位는 先沮知라고 한다.
이는 그 그룹이 갖고 있는 身分的 共通性을 반영한 것으로, 執事部·兵部의 史가 갖는 관직상의 下限線이었다. 즉, 執事部·兵部의 大舍(官職-弟監·郞中)는 小舍(13위)를 하한선으로 하였으며, 史(末端官職)는 造位부터였으니 주로 4두품 계열에게 준 官等일 가능성이 높다.
註 145
外有郡縣 : 新羅에서 처음으로 郡縣制가 실시된 것은 『三國史記』에 의하면 智證王 6年(505)의 일이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초기적인 내용이었고 보다 뚜렷한 郡縣制는 法興·眞興王代에 이르러 발달했으리라 여겨진다.
<참조>
『隋書』新羅傳 註 15)
外有郡縣
新羅에서 처음으로 郡縣制가 실시된 것은 기록상으로는 智證王 6년(505)이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초기적인 내용이었고 보다 뚜렷한 郡縣制는 法興·眞興王代에 이르러 발달했으리라 여겨진다.
그러나「南山新城碑」에 나타난 州(軍主)·郡(太守-幢主)·村(道使-村主)의 계층적인 관계를 고려하여 보면(李鍾旭,「南山新城碑를 통하여 본 新羅의 地方統治體制」pp.1~69) 아직도 중국적인 郡縣制가 실시된 것은 아니다(朱甫暾,「新羅中古의 地方統治組織에 대하여」pp.1~39).
따라서 신라에 있어서 제도적으로 郡縣制가 완성된 것은 統一 以後라 생각된다.
『三國史記』에 나타난 郡縣의 數를 도해하면 아래와 같다.

統一新羅의 郡縣(『三國史記』)
州 名 領 郡 領 縣 小 京
尙 州 10 31 
良 州 12 35 金海小京
康 州 11 30 
漢 州 28 49 中 原 京
朔 州 12 26
北 原 京
溟 州 9 25 
熊 州 13 29 西 原 京
全 州 10 31 南 原 京
武 州 15 43 
120 299 
≪參考文獻≫
『三國史記』卷34·卷35·卷36「地理志」1·2·3 新羅條.
李鍾旭,「南山新城碑를 통하여 본 新羅의 地方統治體制」『歷史學報』64, 1974.
朱甫暾,「新羅中古의 地方統治組織에 대하여」『韓國史硏究』23, 1979.
주제분류
정치>왕실>국왕>즉위·책봉
정치>행정>관등>중앙관등
정치>법률>행정>군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