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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開皇] 17년(A.D.597; 高句麗 嬰陽王 8)에 文帝가
○ [開皇] 17년(A.D.597; 高句麗 嬰陽王 8) 註 079에 文帝가 湯에게 璽書를 내려 말하였다.
“朕이 天命을 받아 온 세상을 사랑으로 다스리매, 王에게 바다 한구석을 맡겨서 조정의 교화를 선양하여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저마다의 뜻을 이루게 하고자 하였오. 王은 해마다 使臣을 보내어 매년 朝貢을 바치며 藩附라고 일컫기는 하지만, 誠節을 다하지 않고 있소. 王이 남의 신하가 되었으면 모름지기 朕과 德을 같이 베풀어야 할터인데, 오히려 靺鞨을 못견디게 괴롭히고註 080 契丹을 禁錮시켰소.註 081 여러 藩國이 머리를 조아려 나에게 臣妾 노릇을 하는게 [무엇이 나쁘다고 그처럼] 착한 사람이 의리를 사모하는 것을 분개하여 끝까지 방해하려 하오?
太府의 工人은 그 수가 적지 않으니, 王이 반드시 써야 한다면 [나에게] 奏聞하는 것이 당연한 데도, 여러해 전에는 몰래 재물은 뿌려 小人을 움직여 사사로이 弩手를 그대 나라로 빼어 갔소. 이 어찌 兵器를 수리하는 목적이 나쁜 생각에서 나온 까닭에 남이 알까 봐 두려워서 [사람을] 훔쳐 간 것이 아니겠소?
그때 使者를 보내어 그대 藩國을 위무한 것은 본래 그대들의 人情을 살펴보고, 정치하는 법을 가르쳐 주고자 함이었소. 그런데 王은 使者를 빈 客館에 앉혀 놓고 삼엄한 경계를 펴며, 눈과 귀를 막아 영영 듣고 보지도 못하게 하였소. 무슨 음흉한 계획이 있기에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서 관원을 禁制하면서까지 訪察을 두려워하오? 또 종종 騎馬兵을 보내어 변경 사람을 살해하고, 여러 차례 간계를 부려 邪說을 지어 내었으니, 신하로서의 마음가짐이 아니었소.
朕은 蒼生을 모두 赤子와 같이 여겨 王에게 땅을 내리고 벼슬을 주어 깊은 사랑과 남다른 혜택을 遠近에 드러내려 하였지만, 王은 오로지 不信感에 젖어 언제나 猜疑하여 使人을 보낼 때마다 消息을 밀탐하여 가니, 순수한 신하의 도리가 어찌 이와 같을 수 있소? 이는 모두 朕의 訓導가 밝지 못한 연유이므로, 王의 잘못을 모두 너그러이 용서하겠으니, 오늘 이후로는 반드시 고치기 바라오. 藩臣의 예절을 지키고 조정의 正典을 받들어, 스스로 그대 나라를 교화시키고 남의 나라를 거스리지 않는다면, 길이 부귀를 누릴 것이며 진실로 朕의 마음에 드는 일이오.
그곳은 비록 땅이 협소하고 사람은 적지만, 넓은 하늘 밑은 다 朕의 신하가 되는 것이니, 이제 만약 王을 내쫓는다면 [王의 자리를] 비워둘 수는 없으므로, 결국은 조정 관원을 다시 가려 보내 그곳을 安撫하게 될 것이오. 王이 만약 마음을 씻고 행동을 바꾸어 憲章을 그대로 따른다면 [王은] 곧 朕의 良臣이 되는 것이니, 무엇 때문에 수고롭게 따로 훌륭한 관원을 보내겠소. 예전에 帝王은 法을 마련할 적에 仁과 信을 우선으로 하여, 善이 있으면 반드시 상을 내리고 惡이 있으면 반드시 벌을 주니, 四海의 안이 함께 朕의 뜻을 따랐소. 만약 王이 죄가 없는 데도 朕이 갑자기 병력을 가한다면, 나머지의 藩國들이 나를 어떻게 말하겠소! 王은 반드시 허심탄회하게 朕의 이 뜻을 받아 들여 의혹을 갖지 말고 다시 생각을 돌리기 바라오.
지난 날 陳叔寶註 082는 여러 대에 걸쳐 江[南]註 083에 있으면서 人民을 殘害하고 우리의 烽候를 놀라게 하며 우리의 변경을 약탈하였었소. 朕이 타이르고 훈계하기를 10년이나 하였으나, 그는 長江의 바깥이라는 것만 믿고 한 구석의 무리를 모아 미친듯이 거들먹거리며 朕의 말을 좇지 않았소. 때문에 장수에게 명하여 군사를 출동시켜 凶逆을 제거토록 하였는데, 오가는 날짜는 한달이 못되었고 군사도 수천명에 지나지 않았었소. 역대의 逋寇를 하루 아침에 말끔히 소탕하니, 원근이 안녕을 누리고 사람과 귀신이 모두 기뻐하였소. 그런데 王만이 이를 한탄하고 마음 아파한다는 말이 들리고 있소. [관리를] 물리치거나 박탈하고 지우거나 드러내는 것은 朕의 직권이니만치, 王에게 죄를 준다 하여도 陳이 멸망되어서가 아니고, 王에게 상을 내린다 하여도 陳이 존재하여서가 아닌데, 어찌하여 그처럼 禍를 즐기고 亂을 좋아하고 있소?
王은 遼水註 084의 폭이 長江과 어떠하며, 高[句]麗의 人衆이 陳國과 어떠하다고 보고 있소? 朕이 만약 포용하여 길러 주려는 생각을 버리고 王의 지난날의 허물을 문책하고자 하면 한명의 장수로도 족하지 무슨 많은 힘이 필요하겠소! 간절히 깨우쳐 주어 改過遷善할 기회를 허락하노니, 마땅히 朕의 뜻을 알아서 스스로 많은 복을 구하기 바라오.”
湯은 이 글을 받고 황공하여 表文을 올려 사죄하러 하였으나, 마침 병으로 卒하였다.註 085
註) 079
이 기년은 10년이어야 한다.『三國史記』및『隋書』 「高祖紀」에 의하면 平原王은 開皇 10년에 서거한 것으로 전하며, 『三國史記』平原王 32年條의 分註에도 이 기년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참조>
『隋書』高句麗傳 註 24)

璉 즉, 長壽王의 6世孫 湯은 第25代 平原王이다.『三國史記』에서는 그의 諱를 陽成이라 하였는데, 『隋書』 「高祖紀」에는 陽으로 되어 있어 걸맞는 면이 있다.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9 「高句麗本紀」7 平原王條.
『隋書』卷1 「高祖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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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80
이는 靺鞨이 오랜동안 高句麗의 지배하에 있었음을 뜻하는 것으로 다음에 나오는 本傳의 내용 중에도 嬰陽王이 靺鞨兵 一萬을 이끌고 遼西를 침공하였음이 보인다.『三國史記』 「高句麗本紀」寶臧王 3年條에 의하면 후의 對唐戰에서도 다수의 靺鞨兵이 동원되고 있다.
<참조>
『隋書』靺鞨傳 註 2)
靺鞨
靺鞨이란 原音이 Moxo, 또는 Moho로서 滿洲의 女眞語의 물(水)을 뜻하는 Muke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된다.
Grebenščikov에 의하면 靺鞨(Moxo)이라는 명칭은 물(水)을 나타내는 滿洲語의 Muke에서 나오고, 挹婁(Yelou)라는 명칭은 巢窟·洞穴을 뜻하는 滿洲語의 Jeru에서 나왔다고 하였다(『Contuibution to the Problem of the History of the Amurland』).
이로 보아 靺鞨이란 말은 “물가에서 생활하던 사람들”을 가리키는 용어임에 틀림없다. 이것은 勿吉(Wu-tsi)이란 말이 “森林에서 生活하던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과 서로 對比된다. 다시 말하면 滿洲의 自然環境과 氣候區分에 따른다면, 북쪽 寒冷帶 濕潤氣候(Dwb)의 森林地域(Taiga)에서 狩獵을 爲主로 생활하던 사람들을 勿吉(Wu-tsi)이라고 한 데 비하여, 남쪽 寒冷帶 亞濕潤氣候(Dwa)의 강가·평야지역에서 農耕生活을 하거나 狩獵生活에서 農耕生活로 移行하는 과정에 있었던 사람들을 靺鞨(Moxo)이라고 한 듯하다. 靺鞨의 7部가 散在한 地域은 대체로 북쪽으로 黑龍江에서 남쪽으로는 豆滿江 一帶까지 광범위하게 걸쳐 있었는데, 그 남쪽에 있었던 諸部는 상당히 農耕生活로 移行하였으나 그 북쪽에 있었던 諸部는 古代의 肅愼·挹婁와 마찬가지로 未開한 原始的 狩獵·漁撈生活을 하였으리라 추측된다. 왜냐하면 滿洲에 있어서의 生活樣式과 그 文化 정도는 바로 이 自然環環과 밀접한 관계를 갖기 때문이다. 黑龍江 流域에 있었던 黑水靺鞨이 가장 肅愼·挹婁·勿吉과 유사하였기 때문에 三上次男은 이들을 한 單位로 묶어 古Asia族으로 보고, 그 나머지 6部는 Tungus系로 보고 있다(『古代東北アジア史硏究』pp.223~244).
S.M. Shirokogoroff에 의하면 勿吉(Wu-tsi)을 靺鞨(Moxo)에 직접 관련시키는 것은 곤란하니 靺鞨이 勿吉에 대하여 그 政治的 支配를 마쳤는지를 알지 못하며, 또한 이러한 名稱이 하나의 독립된 呼稱으로서는 滿洲族에 吸收되었던 몇 개의 種族單位 가운데 우연히 나타나는 바와 같이 政治關係의 用語에서는 그 모습이 사라졌을는지도 알 수 없다고 하고, 이미 논한 바와 같이 勿吉(Wu-tsi)후예들의 언어는 靺鞨(Moxo)의 言語와는 다르므로(靺鞨의 지도적 단위의 언어라고 이해해야 할는지 모르겠다) 靺鞨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를 알지 못하지만 그들이 광대한 지역을 지배하였고, 하나의 종족단위는 아니었으나 渤海나 女眞 등과 같이 하나의 政治組織이었다고 하여, 勿吉과 靺鞨은 언어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직접 연관관계가 없으며, 靺鞨이란 種族의 名稱이 아니라 정치세력을 형성한 집단에 대하여 붙여진 호칭이었다고 하였다(『Social Organization of the Northern Tungus』). 그는『金史』에 의하여 7C 隋의 皇帝가 栗末靺鞨 등의 7部 名稱을 붙인 것을 예로 들면서, 靺鞨(Moxo)이라는 名稱은 中國人들이 그렇게 불렀던 주민들에 의하여(우연히 滿洲라는 이름이 나타났던 것처럼) 새로 채택한 이름이거나, 혹은 이러한 주민들에 의하여 이미 사용되었던 것을 中國人들에 의하여 채택되었던 이름이었음이 분명하며, 하여튼 그것은 極東地方에서 보통 흔한 바와 같이 하나의 政治組織의 이름이었다고 하여, 靺鞨이라는 名稱은 中國과 靺鞨사이에 있었던 南方 Tungus집단들에 의하여 中國에 전하여졌던 것이 틀림없다고 보았다(앞의 책, pp.362~364). 다시 말하면 中國人은 이러한 南方 Tungus집단에 의하여 勿吉·靺鞨세력과 격리되어 있었다고 추측된다. 挹婁·勿吉·靺鞨 자신들이 스스로를 일컬어 “물(河川)에 사는 사람”·“숲(森林)에 사는 사람” 또는 “洞窟에 사는 사람”이라고 부르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며, 南方 Tungus族 즉, 滿洲族의 조상들이 이러한 명칭을 붙였던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靺鞨과 勿吉의 名稱은 특수한 어떤 종족을 일컫던 것이 아니라, 그 自然環境에 따라 다른 生活樣式을 가진 사람들을 일컫던 南方 Tungus집단의 명칭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時代에 따라 비록 그 名稱은 달랐으나, 17C 淸나라 Nurhaci(努兒哈赤)가 滿洲族을 統一할 때까지 寒冷帶 濕潤氣侯(Dwb)에서 狩獵生活하던 사람들과 寒冷帶 亞濕潤氣候(Dwa)에서 農耕生活을 하던 사람을 대비하여 일컬어 온 사실을 알 수 있다.
隋·唐時代: 勿吉-靺鞨
遼時代: 生女眞-熟女眞
明時代: 兀狄哈-兀良哈
明末淸初: 新滿洲族(ice mandu)-舊滿洲族(fe mandu)
이처럼 滿洲의 歷史에 있어서 種族系統은 복잡하고 다양한 요소를 가진 데 비하여, 그 自然環境에 따른 生活樣式에 의한 區分은 時代마다 일정한 對比현상을 보여주고 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勿吉과 靺鞨이 中國과 關係를 가졌던 사실을『魏書』·『北齊書』·『册府元龜』등을 통해 조사해 보면, 勿吉은 北魏의 延興 5年(475)부터 中國에 國貢을 시작하여 東魏의 武定 5年(547)에 이르기까지 北魏·東魏時代 5C 후반에서 6C 중엽까지 약 1세기 가량 朝貢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北齊時代에는 勿吉은 사라지고 그 대신 靺鞨이 등장한다. 北齊시대의 그 朝貢關孫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天保 5年(554) 肅愼朝貢
河淸 2年(563) 靺鞨朝貢
河淸 3年(564) 靺鞨朝貢
天統 元年(565) 靺鞨朝貢
天統 2年(566) 靺鞨朝貢
天統 3年(567) 大莫婁·靺鞨朝貢
天統 4年(568) 靺鞨朝貢
天統 5年(569) 大莫婁朝貢
武平 元年(570) 靺鞨朝貢
武平 3年(572) 勿吉朝貢
武平 4年(573) 靺鞨朝貢
武平 6年(575) 靺鞨朝貢
이상에서 보면 靺鞨의 朝貢은 北齊의 河淸 2年(563)에 시작하여 武平 6年(575)까지 여러차례 행하여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北魏·東魏時代와는 달리, 北齊시대에는 肅愼도 天保 5年(554)에 朝貢하고, 또 勿吉도 武平 3年(572)에 朝貢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肅愼·勿吉·靺鞨이 동일한 系統의 種族이라고 가정한다면, 그 史書의 편찬자가 그 名稱을 바꾸어 記錄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처럼 勿吉·靺鞨 이전의 肅愼까지 함부로 바꾸어 쓸 수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勿吉을 Muki로 본다면, 勿吉의 轉音으로 靺鞨을 볼 수 있기 때문에 勿吉·靺鞨을 混用하였을 可能性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津田左右吉이나 池內宏에 의하면 이러한 勿吉·靺鞨과 肅愼의 種族 갈래를 同一한 系統으로 보지 않고, 서로 다른 政治세력으로 해석하였다(津田左右吉, 「勿吉考」pp.1~37, 池內宏, 「勿吉考」pp.1~70).
즉, 魏代에는 勿吉部落 아래에 하나의 政治세력을 형성하였으나 隋代에 와서 이러한 諸部落이 분열하여 그 사이에 아무런 統制를 받지 않게 되자 그 세력에 큰 變化를 가져와 勿吉部落은 그 세력이 쇠퇴하고, 그 대신에 새로운 靺鞨세력이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 大莫婁 같은 이웃 種族이 中國에 朝貢할 수 있었던 것도 勿吉이 세력을 잃자 그 壓制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말하자면 朝貢의 中斷은 勢力의 실추를 뜻한다고 보아야 하므로, 5C中葉에서 6C中葉까지 약 1세기 가량은 勿吉의 세력이 강성하였으나, 北魏·東魏時代가 끝나자 北齊時代에는 勿吉이 쇠퇴하고 그 대신에 靺鞨의 7部가 등장하여 그 세력을 떨쳤던 것으로 간주된다.
≪參考文獻≫
『魏書』卷100 「列傳」勿吉國條.
『北齊書』卷4 「文宣帝紀」; 卷7 「武成帝紀」; 卷8 「後主帝紀」
『册府元龜』卷969 「外臣部」朝貢條.
津田左右吉, 「勿吉考」『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卷1, 1915.
池內宏, 「勿吉考」『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卷15, 1937(『滿鮮史硏究』上世篇 第1册, 1951)
三上次男, 『古代東北アジア史硏究』1966.
S. M. Sirokogoroff, 『Social Organization of the Northern Tungus』1929.
A. V. Grebenščikov, 『Contribution to the problem of the History of the Amur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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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81
이는 당시 契丹이 高句麗의 영역에 있었음을 전하는 것으로『遼史』 「世表」에 의하면 北齊의 天寶 4년 이후 高句麗의 경내에 있었음을 전하고 있으며, 『隋書』 「煬帝紀」및『三國史記』 「高句麗本紀」嬰陽王 23年條에 전하는 煬帝 大業 8년의 出師의 詔에서도 高句麗가 契丹을 兼倂하고 있음을 전한다.
<참조>
『舊唐書』渤海靺鞨傳 註 7)
契丹
東部 蒙古에서 일어난 部族名이다. 西紀 907年에서 1,124年까지의 遼帝國을 세운 部族이며, 東은 滿洲의 渤海故地, 西로는 內外蒙古의 全域과 一時는 中央亞細亞까지, 南은 北京·天津을 包含하는 長城內의 漢民族地域에 걸치는 大帝國을 建設하였다.
(가) 唐 以前의 契丹族
‘契丹’의 이름이 中國史書에 처음 보이는 것은 『魏書』契丹傳이다. 文獻은 아니지만 더 오래 되는 것은 現在 熱河省 朝陽縣의 東인 義縣 附近의 萬佛洞에 있는 北魏 ‘景明三年(502)五月九日造’라는 銘이 있는 刻文 中의 ‘尉喩契丹員使員 外散騎常侍韓貞 …… ’이라는 文字이다.
즉, 北魏의 使者 韓貞이 契丹으로 가는 途中에 이곳에 들려 새겼던 것이다.
『魏書』契丹傳을 비롯한 中國史書가 전하는 것을 종합하여 보면 北魏 初의 契丹族은 Siramuren(西刺木倫)이라는 大河의 南方에서 遊牧生活을 하던 騎馬民族이었다. Siramuren은 그 南에서 東北流하여 Siramuren과 合流後 遼河를 이루는 老哈河(遼代의 土河)와 더불어 東蒙古의 兩大河이다. 또한 唐代 以前에는 作樂水·饒樂水·弱洛水·如洛瓌水라 칭해지고 唐 以後에는 漢水·梟羅箇沒里·世里沒里로 칭해진 河水이며, 契丹族 成長의 젖줄이었다.
이 部族은 5世紀 後半에는 廣開土王의 膨脹政策을 繼承推進한 高句麗의 遼河서쪽 進出과 西方의 柔然의 侵軼을 두려워하여 北魏에 內附를 칭하고, 그 保護下에 白狼水(大凌河)의 東方 一帶에 南移하게 되었다. 契丹別部인 出伏部 등의 契丹族이 高句麗에 臣屬한 것도 契丹의 이 南遷의 混動期인 것으로 보인다(『遼史』 「營衛志」 部族條).
그 후 北齊의 무렵에는 다시 더 南下한 것 같으며 文宣帝가 天保 4年에 契丹을 親征하였을 때는 平州(河北城 盧龍縣)에서 軍을 나누어 北上하여 이를 大破하고, 營州에 이르러 班師하였던 것이다(松井等, 「契丹勃興史」pp.140~145; 李龍範, 「高句麗의 遼西進出企圖와 突厥」).
(나) 唐初의 契丹
中國의 統一國家를 이룩한 隋代에 이르러서도 契丹에 대한 高句麗의 危脅이 사라지지 않았던 것은 『隋書』 「煬帝本紀」大業 8年 正月 壬午條에 보이는 煬帝의 高句麗에 대한 宣戰의 詔書에 ‘ …… 曾不懷思 翻爲長惡 乃兼契丹之黨 …… ’이라고 高句麗의 契丹包攝을 비난하였던 것에서도 알 수 있다.(李龍範, 앞의 논문).
隋가 滅亡하고 唐이 건국되자 唐 太宗은 契丹西에 隣接하여 契丹과 겨루어 오던 遊牧民族인 庫莫奚를 支配하기 위하여 지금의 Siramuren 上流 巴林石橋 附近에 饒樂都護府(松井等, 「渤海國の疆域」p.437)를 설치하고, 아울러 契丹을 지배하기 위하여 營州 附近에 松漠都護府 (松井等, 앞의 논문, pp.155~156)를 設置하였다.
唐初의 契丹은 『遼史』에서의 소위 大賀氏 八部時代이었으며, 唐 太宗이 總首인 窟哥를 都督으로 任命하여 國姓 李氏를 賜하고, 그 麾下의 諸酋를 各各 刺使의 官職에 任命하여 懷柔하였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들의 中樞部는 營州 附近에서 살면서 唐帝國의 保護를 받는 熟蕃的 生活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則天武后의 萬歲通天 年間에 叛한 松漠都督 李盡忠이 營州 城傍에서 일어나 곧 營州城을 陷落시키고 長官 趙文翽를 殺害했다는 것은 그 主力이 營州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던 것을 말하여주는 것으로 보아야 하겠다.
≪參考文獻≫
『隋書』卷4 「煬帝本紀」大業 8年條.
李龍範, 「高句麗의 遼西進出企圖와 突厥」『史學硏究』4, 1959.
松井等, 「渤海國の疆域」『滿洲歷史地理』1卷 1913; 「契丹勃興史」『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1, 1915.
≪參考文獻≫
『三國史記』卷20 「高句麗本紀」8 嬰陽王 23年條.
『隋書』卷4 「煬帝紀」第4下.
『遼史』卷63 「世表」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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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82
南朝 陳의 後主로 陳 禎明 3년 즉, 隋 開皇 9년에 隋軍의 침공으로 포로가 되고 그로 인하여 陳은 멸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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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83
여기서 江은 곧 다음에 나오는 長江으로 楊子江이며, 담시 隋와 陳의 경계였다.
<참조>
『周書』百濟傳 註 41)
江左(江東)
原文에는 ‘江左’로 되어 있는데, 江은 揚子江을 가르킨다. 諸橋轍次의 『大漢和辭典』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江]: ① 揚子江을 稱한다. 예전에는 오직 江 혹은 江水라고만 稱했고, 後世에는 大江·長江이라 하였다.
② 中國 南方의 水流를 汎稱하는 말이다.
[長江]: 川名. 揚子江·江·大江이라고도 한다. 아시아 제일의 大川이다. 水源은 靑海省 西南境의 巴薩通拉木山 東麓으로 江蘇省 東端을 거쳐 東支那海로 들어간다. 全長은 約 2,500km이다.
[江左·江東]: 揚子江 下流 南岸의 地方을 가르킨다.
[江右·江西]: 揚子江 中流 南岸의 地方으로 지금의 江西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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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84
遼水는 곧 遼河로 당시 高句麗와 隋간의 국경이다.
<참조>
『新唐書』渤海傳 註 11)
奧婁河
이 江에 대하여 丁若鏞은 『我邦疆域考』 「渤海考」에서
奧屢河者 今之額敦山 出二河西入混同江 査其緯度 正在營州東二千里 仲象立國之初 本據白山之東 其子祚榮 暫遁旋還 不離白山之東 ……
라고 하여 白頭山의 東北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額敦山을 河源으로 하는 水系인 것 같이 說明하고 있으나, 그 江名을 뚜렷이 比定하지는 못하였다.
그 후 松井等은 이 江이 어떤 江을 指稱하였는지 분명치 않다고 그 比定을 단념하였던 바 있었다( 「渤海國の疆域」p.109).
이에 대하여 津田左右吉은 渤海 五京 中에서 中京顯德府가 大祚榮이 建國의 터전을 마련한 最初의 據點이며 그 位置를 敦化城 附近으로 比定하고, 『舊唐書』에 建國地로 되어 있는 ‘東牟山’도 같은 地點으로 比定한 바 있다( 「渤海考」p.124).
이와 같이 『舊唐書』에 보이는 東牟山의 位置가 敦化縣으로 比定될 경우 『新唐書』渤海傳에서 乞乞仲象이 東走하여 建國의 터전을 마련한 즉, ‘保太白山之東北 阻奧婁河 樹壁自固’하였다는 奧婁河는 마땅히 敦化 附近의 瑚爾喀河 上流로 比定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 比定은 遺蹟의 發掘이 활발히 진행되어 渤海國의 中京顯德府가 敦化縣이 아니라 豆滿江 下流로 流入하는 海蘭河 流域의 西古城子인 것이 분명하여짐에 따라 바뀌어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和田淸이 奧婁河를 海蘭河로 비정하여 『舊唐書』渤海靺鞨傳에 보이는 東牟山을 지금의 老嶺山脈 中의 北甑山으로 비정하였던 것도 ( 「渤海國地理考」pp.62~74) 渤海國 最初의 首都가 지금의 西古城子인 中京顯德府이며, 이곳이 建國의 터전을 잡았던 地點인 東牟山 또는 奧婁河畔인 것이 전제가 되어서였다.
그러나 최근 中國學者들에 의한 渤海遺蹟發掘이 續行됨에 따라 奧婁河를 海蘭河에 비정하는 學說도 다시 수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渤海建國者가 東走하여 最初로 터전을 잡았던 東牟山 또는『新唐書』渤海傳에 보이는 上京龍泉府에서 南으로 三百里 地點의 ‘舊國’이 敦化城 附近인 敷東山城임이 밝혀짐에 따라 奧婁河畔 또는 東牟山에서 建國한 渤海王國이 일시 海蘭河畔인 中京顯德府로 遷都하였다가 다시 上京龍泉府로 遷都하였다는 설명이 나오게 된 까닭이다(王承禮, 「吉林敦化牧丹江上流渤海遺址調査記」pp,575~584).
이와 같이 渤海王國의 建國地인 ‘東牟山’·‘舊國’ 등이 中京顯德府와는 다른 地點인 敦化城 附近임이 밝혀짐에 따라 ‘東牟山’·‘舊國’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는 奧婁河도 다시 瑚爾喀河 上流로 比定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參考文獻≫
丁若鏞, 『我邦疆域考』卷5下 「渤海考」.
王承禮, 「吉林敦化牧丹江上流渤海遺址調査記」『考古』 1962年 11期.
松井等, 「渤海國の疆域」『滿洲歷史地理』 1卷, 1913.
津田左右吉, 「渤海考」『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1, 1915.
和田淸, 「渤海國地理考」『東亞史硏究』 (滿洲篇),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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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85
이 기사에 대응되는 기사는『三國史記』 「高句麗本紀」平原王 32年條에서 찾아볼수 있다. 그러나 隋 文帝의 詔文 내용은 그 중 극히 일부만 발췌하여 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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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기사명, 자료명. URL (검색날짜)
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http://db.history.go.kr/id/sa_001_0030_0020 (accessed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http://db.history.go.kr/id/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2안
저자, 기사명, 자료명.(사이트명, URL, ID, 검색날짜)
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sa_001_0030_0020,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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