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王位가 金眞平에 이른 開皇 14년(A.D.594; 新羅 眞平王 16)에 遣使하여 方物을 바쳤다.168168 遣使貢方物 고대중국과 그 주변국가간에는 朝貢이라는 外交關係가 성립되어 있었다. 中華思想의 대외표시인 朝貢은 주변국가들에게 있어서 정치·문화·사회 개발을 위한 公的 채널이 될 수 있었다.
朝는 天子를 배알하는 것이며, 그때 方物을 進貢하는 것으로서 外交와 貿易이 동시에 이루어졌다(金庠基,「古代의 貿易形態와 羅末의 海上發展에 대하여」p.4; 李春植,「朝貢의 起源과 意味」p.6).
그러나 주변국가가 天子에 入貢하는 것 그 자체가 朝貢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年例的으로 恒續的 關係가 이루어질 때 조공관계가 성립되는 것이다(全海宗,「韓中朝貢關係考」p.11).
그리고 조공은 곧 國力과 一致하는 것으로서 三國時代는 고구려의 對中關係가 중심이었으며, 신라는 가장 부진한 상태에 있었다(申瀅植,「羅唐間의 朝貢에 대하여」pp.60~118).
특히 三國時代는 중국의 南北朝時代와 같이 統一王朝를 지향하는 시대였으므로 각기 政治的 補完關係에 있었음도 주목할 일이다(徐榮洙,「三國과 南北朝交涉의 性格」p.149).
따라서 고구려는 長壽王과 後魏, 백제는 宋과 梁과의 交涉, 신라는 眞興王代에 陳과 조공관계가 성립되었다고 생각된다.
이와 같이 朝貢關係가 성립되면 중국으로부터 册封을 받게 되는 바, 고구려는 遼東郡公, 백제는 帶方郡公, 신라는 樂浪郡公 등의 칭호를 받게 된다(申瀅植,『三國史記 硏究』pp.218~219).
넓은 의미의 朝貢에는 주로 皇帝가 바뀌거나 王이 바뀌었을 때 중국으로부터의 정치적 승인을 꾀하는 좁은 의미의 朝貢을 위시하여 進貢·謝恩·人質·進賀·請兵 등이 있었다.
入朝時에 가져가는 方物에는 金·頭髮·人蔘 등이 있으며, 回謝品으로는 책·비단 등이 중심이었다.
≪參考文獻≫
金庠基,「古代의 貿易形態와 羅末의 海上發展에 대하여」『東方文化交流史論攷』1948, 乙酉文化社.
全海宗,「韓中朝貢關係考-韓中關係史의 鳥瞰을 위한 導論-」『東洋史學硏究』1, 1966(『韓中關係史硏究』1970, 一潮閣)
申瀅植,「羅唐間의 朝貢에 대하여」『歷史敎育』10, 1967; 『三國史記 硏究』1981.
李春植,「朝貢의 起源과 意味」『中國學報』10, 1969.
徐榮洙,「三國과 南北朝交涉의 性格」『東洋學』11, 1981.
닫기
高祖는 眞平을 上開府 樂浪郡公 新羅王으로 삼았다. 그의 先代는 백제에 附庸하였는데, 뒤에 백제의 高[句]麗 정벌로 말미암아 高[句]麗人이 軍役을 견디지 못하고 무리를 지어와 新羅에 귀화하니, [신라는] 마침내 강성하여져 百濟를 습격하고, 迦羅國169169 迦羅國 迦羅國은 加耶(加洛)를 뜻한다. 百濟와 新羅 사이에서 정치적 위협을 항상 받아온 가야국은 일찍부터 鐵器文化를 바탕으로 크게 발전한 바 있다.
가야는 6개의 연맹체로서 주로 북방의 內陸的인 大加耶(高靈)와 남방의 海洋的인 金官加耶(金海)로 대별되는 바, 일찍부터 일본에 진출했지만 정치적 구심체가 없어 中央集權的인 古代國家로 성장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金官加耶는 法興王 19년(532)에, 大加耶는 眞興王 23년(562)에 각각 신라에 投降하였다.
비록 中央集權的인 古代國家로 성장하지는 못하였지만 加耶는 신라의 정치와 문화 개발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 중에서도 金庾信系의 정치적 역할과 于勒의 예가 대표적이다.
<참조>
1.『南齊書』加羅傳 註 1)
加羅傳
加耶는 중국문헌에는 加羅 또는 加邏로 표기되어 있으며, 韓國·日本側 기록에는 加羅·加良·加耶·伽倻·狗邪·駕洛 등으로 다양하게 표기되어 있다. 加耶는 ‘갓나라(邊國)’를 뜻하는 말로 보기도 하며, (李丙燾, 「加羅史上의 諸問題」p.306) 一族·同族을 뜻하는 滿洲語의 hala, 혹은 퉁구스어의 kala, Xala와 관련이 있으리라는 說도 있다.(崔鶴根,『國語方言硏究』)
중국정사중 加耶에 대하여 立傳하고 있는 것은 『南齊書』가 유일한데, 이는 5C 末 加耶의 해상발전이 활발하였음을 반영한 것으로 주목된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南齊書』加羅傳은 國王 荷知가 479年 南齊와 교섭하여 册封을 받았다는 사실만 기록되어 있을 뿐, 加耶에 관한 보다 상세한 상태서술은 없다.
≪參考文獻≫
廣開土大王陵碑.
新羅眞鏡大師寶月淩空塔碑.
『三國史記』卷34「地理志」1 康州 高靈郡條.
『三國遺事』卷2「紀異」2 所錄 『駕洛國記』
『日本書紀』卷19 欽明天皇 23年條.
丁仲煥, 「辰國三韓及加羅名稱考」『釜山大開校10周年記念論文集』1956; 『加羅史草』1962, 釜山大韓日文化硏究所.
崔鶴根, 『國語方言硏究』1968, 서울大出版部.
千寬宇, 「三韓의 成立過程」『史學硏究』26, 1975; 「復元 加耶史」『文學과 知性』28·29·31, 1977~78.
李丙燾, 「加羅史上의 諸問題」『韓國古代史硏究』1976, 博英社.
文定昌, 『伽倻史』1978, 柏文堂.
李基白·李基東 共著, 『韓國史講座』(古代篇), 1982, 一潮閣.
金泰植, 「5세기후반 大加耶의 발전에 대한 硏究」『韓國史論』12, 1985.
2.『南齊書』加羅傳 註 2)
加羅國 三韓種也
加羅가 三韓의 한 種族이라는 것은 弁辰을 두고 말한 것으로 이해된다. 즉, 『後漢書』·『三國志』등의 史料上에는 三韓에 加羅가 들어있지 않았으나, 弁辰지역에서 加羅가 뒤에 등장하여 弁辰지역과 加羅가 차지한 지역이 대체로 같게 되었기 때문에 加羅가 三韓의 한 種族이라고 말하게 된 것 같다.
『三國志』「東夷傳」弁辰條에 3C 중엽 洛東江 중·하류지역의 弁韓 12國이 있었다고 하였으나, 이들 나라 중 狗邪國·彌烏邪馬國·安邪國을 제외하고는 그 위치를 알 수 없다. 그런데 『三國遺事』에 인용된 『駕洛國記』에서는 本加耶를 비롯한 大加耶·古寧加耶·星山加耶·小加耶 등 6加耶의 이름이 보이며, 같은 책에 인용된 『本朝史略』에서는 本加耶 대신 非火加耶의 이름이 보인다. 12國이나 加耶 6國은 개별로 볼 수 없다고 생각되며, 대개 4C初를 경계로 하여 弁韓에서 加耶로 그 명칭이 바뀌는 것으로 보인다.
≪參考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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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金廷鶴, 「金海地方의 先史文化」『金海地區綜合學術調査報告書』1973; 「加耶境域新攷-加耶史硏究(Ⅰ)-」『釜山大學校論文集』21, 1976; 「任那と日本」『日本の歷史』別卷 1, 1977; 「金海禮安里古墳群發掘調査報告」『韓國考古學報』2, 1979; 「古代國家의 發達(伽耶)」『韓國考古學報』12, 1982; 「加耶史의 硏究」『史學硏究』37,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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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寬宇, 「任那問題について」『韓』14, 1973; 「任那問題」『韓』18·19·23·25, 1973~1974; 「辰·弁韓諸國의 位置試論」『白山學報』20, 1976; 「復元 加耶史」『文學과 知性』28·29·31, 1977년 여름·가을호, 1978년 봄호; 「任那日本府管見」『韓』78,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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芳●(加/良)登, 「日本에 있어서의 百濟史硏究의 意義」『馬韓·百濟文化』7,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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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鉉球, 『任那の對外關係と任那日本府の實體-大和政權の對外關係硏究-』1985, 吉川弘文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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津田左右吉, 「韓史に見える廣義の加羅及び駕洛國記の六伽耶に就いて」『朝鮮歷史地理』1, 1911; 「任那疆域考」『朝鮮歷史地理』3, 1913.
關野貞, 「伽耶時代の遺蹟」『考古學雜誌』1卷 7號, 1911.
今西龍, 「加羅疆域考(上·下)」『史林』4卷 3·4號, 1914.
三品彰英, 『日本書紀日鮮關係記事考證(上)』, 1923, 吉川弘文館; 「日本書紀日韓關係記事考證」『朝鮮學報』14輯,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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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原利武, 「任那加耶考」『小田先生頌壽記念朝鮮論集』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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鬼頭淸明, 「加耶諸國の史的發展について」·「任那日本府の問題」『日本古代國家の形成と東アヅア』1976.
平野邦雄, 「繼體·欽明紀の對外關係記事」『古代東アヅア史論集』(下), 1978.
山尾幸久, 「任那に關する-試論」『古代東アヅア史論集』(下), 1978.
닫기
을 附庸國으로 삼았다.

註 168
遣使貢方物 : 고대중국과 그 주변국가간에는 朝貢이라는 外交關係가 성립되어 있었다. 中華思想의 대외표시인 朝貢은 주변국가들에게 있어서 정치·문화·사회 개발을 위한 公的 채널이 될 수 있었다.
朝는 天子를 배알하는 것이며, 그때 方物을 進貢하는 것으로서 外交와 貿易이 동시에 이루어졌다(金庠基,「古代의 貿易形態와 羅末의 海上發展에 대하여」p.4; 李春植,「朝貢의 起源과 意味」p.6).
그러나 주변국가가 天子에 入貢하는 것 그 자체가 朝貢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年例的으로 恒續的 關係가 이루어질 때 조공관계가 성립되는 것이다(全海宗,「韓中朝貢關係考」p.11).
그리고 조공은 곧 國力과 一致하는 것으로서 三國時代는 고구려의 對中關係가 중심이었으며, 신라는 가장 부진한 상태에 있었다(申瀅植,「羅唐間의 朝貢에 대하여」pp.60~118).
특히 三國時代는 중국의 南北朝時代와 같이 統一王朝를 지향하는 시대였으므로 각기 政治的 補完關係에 있었음도 주목할 일이다(徐榮洙,「三國과 南北朝交涉의 性格」p.149).
따라서 고구려는 長壽王과 後魏, 백제는 宋과 梁과의 交涉, 신라는 眞興王代에 陳과 조공관계가 성립되었다고 생각된다.
이와 같이 朝貢關係가 성립되면 중국으로부터 册封을 받게 되는 바, 고구려는 遼東郡公, 백제는 帶方郡公, 신라는 樂浪郡公 등의 칭호를 받게 된다(申瀅植,『三國史記 硏究』pp.218~219).
넓은 의미의 朝貢에는 주로 皇帝가 바뀌거나 王이 바뀌었을 때 중국으로부터의 정치적 승인을 꾀하는 좁은 의미의 朝貢을 위시하여 進貢·謝恩·人質·進賀·請兵 등이 있었다.
入朝時에 가져가는 方物에는 金·頭髮·人蔘 등이 있으며, 回謝品으로는 책·비단 등이 중심이었다.
≪參考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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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春植,「朝貢의 起源과 意味」『中國學報』10, 1969.
徐榮洙,「三國과 南北朝交涉의 性格」『東洋學』11, 1981.
註 169
迦羅國 : 迦羅國은 加耶(加洛)를 뜻한다. 百濟와 新羅 사이에서 정치적 위협을 항상 받아온 가야국은 일찍부터 鐵器文化를 바탕으로 크게 발전한 바 있다.
가야는 6개의 연맹체로서 주로 북방의 內陸的인 大加耶(高靈)와 남방의 海洋的인 金官加耶(金海)로 대별되는 바, 일찍부터 일본에 진출했지만 정치적 구심체가 없어 中央集權的인 古代國家로 성장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金官加耶는 法興王 19년(532)에, 大加耶는 眞興王 23년(562)에 각각 신라에 投降하였다.
비록 中央集權的인 古代國家로 성장하지는 못하였지만 加耶는 신라의 정치와 문화 개발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 중에서도 金庾信系의 정치적 역할과 于勒의 예가 대표적이다.
<참조>
1.『南齊書』加羅傳 註 1)
加羅傳
加耶는 중국문헌에는 加羅 또는 加邏로 표기되어 있으며, 韓國·日本側 기록에는 加羅·加良·加耶·伽倻·狗邪·駕洛 등으로 다양하게 표기되어 있다. 加耶는 ‘갓나라(邊國)’를 뜻하는 말로 보기도 하며, (李丙燾, 「加羅史上의 諸問題」p.306) 一族·同族을 뜻하는 滿洲語의 hala, 혹은 퉁구스어의 kala, Xala와 관련이 있으리라는 說도 있다.(崔鶴根,『國語方言硏究』)
중국정사중 加耶에 대하여 立傳하고 있는 것은 『南齊書』가 유일한데, 이는 5C 末 加耶의 해상발전이 활발하였음을 반영한 것으로 주목된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南齊書』加羅傳은 國王 荷知가 479年 南齊와 교섭하여 册封을 받았다는 사실만 기록되어 있을 뿐, 加耶에 관한 보다 상세한 상태서술은 없다.
≪參考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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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眞鏡大師寶月淩空塔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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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寬宇, 「三韓의 成立過程」『史學硏究』26, 1975; 「復元 加耶史」『文學과 知性』28·29·31, 197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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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泰植, 「5세기후반 大加耶의 발전에 대한 硏究」『韓國史論』12, 1985.
2.『南齊書』加羅傳 註 2)
加羅國 三韓種也
加羅가 三韓의 한 種族이라는 것은 弁辰을 두고 말한 것으로 이해된다. 즉, 『後漢書』·『三國志』등의 史料上에는 三韓에 加羅가 들어있지 않았으나, 弁辰지역에서 加羅가 뒤에 등장하여 弁辰지역과 加羅가 차지한 지역이 대체로 같게 되었기 때문에 加羅가 三韓의 한 種族이라고 말하게 된 것 같다.
『三國志』「東夷傳」弁辰條에 3C 중엽 洛東江 중·하류지역의 弁韓 12國이 있었다고 하였으나, 이들 나라 중 狗邪國·彌烏邪馬國·安邪國을 제외하고는 그 위치를 알 수 없다. 그런데 『三國遺事』에 인용된 『駕洛國記』에서는 本加耶를 비롯한 大加耶·古寧加耶·星山加耶·小加耶 등 6加耶의 이름이 보이며, 같은 책에 인용된 『本朝史略』에서는 本加耶 대신 非火加耶의 이름이 보인다. 12國이나 加耶 6國은 개별로 볼 수 없다고 생각되며, 대개 4C初를 경계로 하여 弁韓에서 加耶로 그 명칭이 바뀌는 것으로 보인다.
≪參考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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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寬宇, 「任那問題について」『韓』14, 1973; 「任那問題」『韓』18·19·23·25, 1973~1974; 「辰·弁韓諸國의 位置試論」『白山學報』20, 1976; 「復元 加耶史」『文學과 知性』28·29·31, 1977년 여름·가을호, 1978년 봄호; 「任那日本府管見」『韓』78,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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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丙燾, 『韓國古代史硏究』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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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哲埈, 「能步戰과 便鞍馬」『韓㳓劤博士停年紀念史學論叢』1981, 知識産業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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