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住居는 대개 山水에 의지하며, 우두머리를 大莫弗瞞咄197197 大莫弗瞞咄 肅愼語로서 酋長을 부르던 稱號인데, 漢語로 “大人”이라고 한다 大는 肅愼語의 Da로서 수령, 두목을 뜻한다. 魏晉南北朝時代에 勿吉人과 靺鞨人은 그 酋長을 大莫弗瞞이라고 불렀는데,『北史』·『舊唐書』·『册府元龜』에서는 이를 漢譯하여 酋帥·君長·首帥라고 表記하였으나, 이것은 각 部의 酋長을 漢譯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莫弗은 肅愼語 Mafa를 나타내고 瞞咄은 Mandu를 나타내는데, 모두 酋長을 의미하는 말이다. 滿洲라는 地名도 이 瞞咄과 關係가 있는 것이 틀림없으며, 渤海의 姓인 大氏도 이와 關係가 있는 것이라 추측된다.
『新唐書』黑水靺鞨傳에 보면 ‘그 酋長을 大莫拂瞞咄이라 하며, 代를 이어 君長이 되었다(其酋曰大莫拂瞞咄 世相承爲長)’라고 하여 그 酋長이 대대로 계승되었음을 알 수 있다.『舊唐書』靺鞨傳에 보면 ‘서로 계승하여 대대로 君長이 되었다(父子相承 世爲君長)’라고 하여 父子가 대대로 王位를 세습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로 보아 大莫佛瞞咄은 이미 家父長的 社會에 있어서 상당한 權力을 가진 政治的 君長이었음을 알 수 있다.
≪參考文獻≫
『舊唐書』卷199下「北狄列傳」靺鞨條.
『新唐書』卷219「北狄列傳」黑水靺鞨條.
馮繼欽,「靺鞨族共同體類型及其特征初探」『北方文物』1986.
童萬崙,「白山靺鞨族考」『北方文物』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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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 하는데, 東夷 가운데에서는 强國이다.
徒太山198198 徒太出 徒太는 太白의 異音으로서 一名 太皇이라고도 한다. 퉁구스계의 民族들이 山을 숭배하여 徒太라고 불렀는데,『北史』勿吉傳과『文獻通考』「漠考」勿吉條에 보면, ‘나라의 남쪽에 徒太山이 있는데 中國에서는 太皇이라고 한다(國南有從太山者 華言太皇)’고 하여 勿吉의 남쪽에 徒太山이 있었다고 한다.『新唐書』黑水靺鞨傳을 보면 ‘太白山을 또한 徒太山이라고 한다(太白山亦曰徒太山)’이라 하고 있어 太白山을 徒太山이라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이른바『新唐書』高句麗傳이나『通典』高句麗條에 나오는 白山으로서 오늘날 白頭山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高麗朝 以後로 白頭山이라고 불렀으나, 中國에서는 遼·金 以後로 長白山이라고 불렀다. 白山이나 또는 太白山은 그 산이 높고 눈이 쌓여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므로 徒太라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지 않나 추측된다.
<참조>
『魏書』勿吉傳 註 21)
徒太山
徒太山은 오늘날의 白頭山을 말한다. 北魏에서는 ‘太白山’이라 불렀으나 『北史』勿吉傳에는 ‘有徒太山者 華言太皇’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徒太山은 ‘太白’이라 부르기도 하였는데, 그 뜻은 ‘太皇’이었음을 알 수 있다.
『新唐書』靺鞨傳에는 ‘太白山 亦曰徒太山’이라 되어 있는데, 이것은 『魏書』勿吉傳을 따른 것이다. 『新唐書』高麗傳에는 ‘白山’의 기록이 보이는데, 이 산이야말로 白頭山을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滿洲에서는 遼·金 以來 淸代를 거쳐 오늘날까지 ‘長白山’이라 일컬으며 우리나라에서는 高麗이래 朝鮮을 거쳐 오늘날까지 ‘白頭山’이라 일컫고 있다.
≪參考文獻≫
『北史』卷94「列傳」勿吉國條.
『新唐書』卷219「北狄列傳」黑水靺鞨條; 卷220 「東夷列傳」高麗條.
≪參考文獻≫
『文獻通考』卷216「漢考」勿吉條.
『北史』卷94「列傳」勿吉條.
『新唐書』卷219「北狄列傳」黑水靺鞨條; 卷220「東夷列傳」高句麗條.
『通典』卷186「邊防」高句麗條.
池內宏,「勿吉考」『滿鮮史硏究』(上世篇) 第1册,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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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는 산이 있어 풍속에 매우 숭상하고 두려워한다. 산 위에는 熊·羆·豹·狠이 있으나 모두 사람을 해치지 않으며 사람도 이들을 함부로 죽이지 않는다.199199 上有熊羆豹狼 皆不害人 人亦不敢殺 滿洲地域의 山嶽地帶나 草原地帶에서 살던 가장 무서운 짐승이 바로 이러한 熊羆類의 곰과 豹狼類의 이리떼였다. 물론 호랑이도 이 時代에 살던 사람에게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靺鞨族은 곰과 이리를 그들의 토템으로 섬겨 이들을 죽이지 않고 숭배하였으며, 또 이들 짐승도 사람을 해치지 않았던 사실을 알 수가 있다. Shirokogoroff에 의하면 인간은 가장 두려워하는 짐승인 곰과 호랑이가 사는 Taiga 地域에 들어가서 사냥하지 아니하며, 또 이러한 짐승들도 人間이 사는 地域에는 출몰하지 아니하였던 데에서 이것을 人間과 動物과의 共存하는 關係라고 하였다(『Social Organization of the Northern Tungus』pp.42~46). 바로『隋書』靺鞨傳에 나오는 熊羆와 시랑(豹狼)은 당시의 靺鞨과 相互共存하는 形態를 취했음을 알 수가 있다.
≪參考文獻≫
S. M. Shirokogoroff,『Social Organization of the Northern Tungus』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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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대가 낮고 습하여200200 地卑濕 滿洲地域의 地形을 보면 內興安嶺의 남쪽 地域에는 松花江의 北方과 牧丹江의 東部 一帶가 山嶽地帶이고, 黑龍江의 下流와 松花江의 中下流 一帶는 平原과 丘陵地帶로 이루어져 있다. 靺鞨人이 주로 살았던 地域이 ‘地帶가 낮고 습하였다’는 것은 黑龍江과 松花江 및 牧丹江 一帶의 습한 江邊地帶에서 居住하였음을 알 수 있다. 本文에서도 ‘住居는 대개 山水에 의지한다’라고 한 것으로 보더라도 그들이 주로 居住한 地域이 江을 따라서 生活하면서 강가에서 漁撈生活을 하고 또 가까운 山에서 짐승을 사냥하는 狩獵生活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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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을 둑과 같이 쌓고 구덩이를 파서 거처하는데, 출입구를 위로 향하게 내어 사다리를 놓고 드나든다.201201 築土如堤 鑿穴以居 開口向上 以梯出入 滿洲地域에 살던 肅愼·挹婁·勿吉·靺鞨의 住居形態가 穴居였음을 보여주는 史料이다.『三國志』「東夷傳」挹婁條를 보면,
항상 山林속에서 살며 穴居生活을 한다. 大家는 그 깊이가 9階段이나 되며, 계단이 많을수록 좋게 여겼다(處山林之間 常穴居 大家深九梯 以多爲好)
라고 하였으며,『後漢書』「東夷列傳」挹婁條에도,
山林속에서 거주하는데, 그 지방 기후가 매우 추워서 항상 굴속에서 산다. 굴의 깊이가 깊은 것을 귀하게 어겨서 大家는 아홉 계단을 내려가야 닿을 수 있을 정도로 깊다(處於山林之間 土氣極寒 常爲穴居 以深爲貴 大家至接九梯)
라고 하여, 古代의 肅愼·挹婁人들이 氣候가 몹시 추웠기 때문에 땅에 구멍을 파고 穴居生活을 하였음을 보여 준다.『大明一統志』外夷 女眞條를 보면 野人 女眞의 住居를 說明하기를 ‘山谷間이 의지하여 나무로 걸쳐 집을 만드는데 그 위에 흙을 덮어 움집처럼 만든다’라고 하여, 明代의 黑龍江 下流에 살았던 野人 女眞들이 겨울철에 추위를 막기 위하여 이러한 穴居生活을 하였던 遺制를 보여 준다.
원래 古代의 肅愼·挹婁·勿吉·靺鞨族은 農耕生活로 들어가기 전에 狩獵·採取生活을 하거나, 또는 狩獵·漁撈生活을 하였기 때문에, 일정한 장소에 居住하지 못하고 移動하였으므로 住居生活도 간편한 Tent로 構成되는 Camp生活을 하였다. 이러한 Tent를 女眞族들은 Tatan이라 불렀다. 그러나 겨울철에 狩獵으로 生活을 하지 못할 정도로 날씨가 추워지면, 永久家屋에 해당하는 穴居生活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면 겨울철에 일정한 장소에서 穴居生活을 하다가 다시 여름철에는 移住하면서 Tent生活을 하였는데, 이처럼 겨울철에만 머물던 穴居村落을 冬村(Winter Village)이라고 한다. 그러나 農耕生活로 들어가면서 이러한 穴居生活을 하고 移住하지 않았던 것 같다. 穴居生活은 겨울철에 추위를 막기 위한 것으로써 여름철 住居生活에는 알맞지 아니하였다. 이리하여「土宇」또는「土幕」을 짓고 生活을 하는 住居形態가 나타났는데 겨울철에 추위를 피하기 위하여 고안한 장치가 바로 온돌이었다. 온돌을 사용하는 種族은 오늘날 滿洲族과 우리 민족 뿐이다. 아뭏튼 이러한 穴居에서 土幕이나 土宇生活로, 다시 이것이 草家生活로 發展하였다고 볼 수가 있다
<참조>
1.『晉書』肅愼傳 註 10)
夏則巢居
여름철에 나무 위에서 산다는 것은 山林에서 狩獵生活을 하면서 일시적으로 寓居하였음을 말한다. 『三國志』나 『後漢書』의 ‘處山林之間’이란 기록을 『晋書』에서는 ‘여름철에 나무 위에서 산다(夏則巢居)’라고 고쳤다.
원래 Taiga지대의 山林지역에서는 봄철부터 겨울철까지 森林사이를 옮겨다니면서 사냥을 한다. 오늘날 이 지역에 살고 있는 Goldi族의 狩獵生活을 보면 古代肅愼의 狩獵生活을 짐작할 수 있다. 凌純聲에 의하면 1년에 4차례의 사냥을 행하여 봄철 사냥은 正月에 出發하여 2月 15日 전후에 돌아오는데 火狐·獾·黃鼠·麅 등의 짐승을 잡고, 여름철 사냥은 4月 初에서 6月 末까지 행하는데 茸角·黑熊·野猪 등의 짐승을 잡으며, 가을철 사냥은 8月 보름부터 9月 15日까지 행하는데 麅·鹿·熊·野猪 등의 짐승을 잡고, 겨울철 사냥은 10月 初旬 또는 中旬에서 12月 中旬까지 또는 늦으면 年末까지 행하는데 貂·獺·火狐·獾·黃鼠狼·麅子·灰鼠·熊·虎·豹 등의 짐승을 잡는다고 한다.(『松花江下游的赫哲族』p.87)
이처럼 옮겨다니면서 사냥하는 까닭은 철에 따라 잡히는 짐승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짐승들이 서식하는 장소를 따라 사냥터를 옮겼던 것이다. 滿洲 璦琿縣에 살고 있는 Orochon族의 『竹枝詞』를 보면 9月에는 여우 사냥, 10月에는 이리 사냥이 最適期라고 한다.(秋葉隆, 『滿蒙の民族と宗敎』p.72)
이러한 狩獵生活이나 또는 放牧生活을 하는 사람들은 그 住居를 계속 옮겨야 하기 때문에 農耕生活에서 나타나는 定着生活의 住居形態가 있을 수가 없었다. 대개 狩獵生活이나 遊牧生活을 하던 北方의 遊牧民族들은 Tent生活을 하였다. 오늘날 黑龍江 流域에 살고 있는 Orochon族은 이러한 Tent를 ‘仙人柱(Urien)’ 또는 ‘斜仁柱’라고 부른다.(呂光天, 『北方民族原始社會形態硏究』p.3 ; 『鄂倫春族簡史』p.188) 그러나 古代 肅愼氏는 아직 이러한 Tent生活을 하지 못하고 나무잎과 줄기를 얽어 생활하였던 것 같다.
≪參考文獻≫
『後漢書』卷85「東夷列傳」挹婁條.
『三國志』卷30「東夷傳」挹婁條.
凌純聲, 『松花江下游的赫哲族』(上), 1935.
秋葉隆, 『滿蒙の民族と宗敎』1941.
呂光天, 『北方民族原始社會形態硏究』1980, 北京 ; 『鄂倫春族簡史』1980.
2.『晉書』肅愼傳 註 11)
冬則穴處
겨울철에 굴에서 산다는 것은 여름철에 나무 위에서 사는 생활과는 반대가 되는 것으로서, 추위를 막기 위한 생활이었다고 볼 수 있다. 『後漢書』에서는 ‘土氣極寒常爲穴居 以深爲貴 大家至中接九梯’라고 하였으며, 『三國志』에서도 ‘常穴居 大家深九梯 以多爲好 土氣寒 劇於夫餘’라고 하였다.
이처럼 肅愼은 여름철에는 山林에서 巢居하면서 移動生活을 하다가 겨울철에는 穴居로 돌아오는데, 이러한 肅愼의 穴居는 일종의 冬村(Winter Village)이라 생각된다. 다시 말하면 여름철에 사냥할 짐승이 많을 때에는 짐승을 쫓아 가까운 血族끼리 떼를 지어 移動하지만, 겨울철에는 사냥한 짐승을 가지고 冬村에 돌아와 半定住生活을 하면서 추운 겨울을 보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공동 무덤도 대개 이 冬村 부근에 있었으므로, 죽을 때에는 반드시 그 氏族의 冬村으로 돌아오는 것이 그들의 習俗이라고 한다.
≪參考文獻≫
『後漢書』卷85「東夷列傳」挹婁條.
『三國志』卷30「東夷傳」挹婁條.
≪參考文獻≫
『後漠書』卷85「東夷列傳」挹婁條.
『三國志』卷30「東夷傳」挹婁條.
『大明一統志』卷89「外夷」女直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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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사람이 짝을 지어 밭을 간다.202202 相與偶耕 農事를 짓는데 牛馬를 使用하지 않고, 사람의 힘을 利用하여 밭을 갈았다는 뜻이다. 이와같은 偶耕法은 原始農耕의 初步的인 形態로써, 動物을 利用하는 深耕法보다 훨씬 未開한 農耕方法이었다. 滿洲에서 소를 利用한 牛耕法이 일반화되는 것은 金·明代에 들어와서 女眞社會에서 遠東地方의 소를 대량으로 輸入하면서부터였다.
<참조>
『魏書』勿吉傳 註 15)
佃則偶耕
勿吉은 肅愼·挹婁와 마찬가지로 원시 농경을 하였는데, 소나 말을 이용하여 쟁기를 끄는 방법은 알지 못하고, 사람의 힘을 이용하여 밭을 가는 偶耕을 하였다.
당시 勿吉사회에 소가 없었기 때문에 牛耕法을 알지 못한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으나, 말이 있는 데도 이를 이용하지 않은 것은 유목사회의 성격이 강하여 말을 사냥하는 데만 이용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사람이 밭을 가는 偶耕의 방법은 지극히 원시적인 농경 방법으로서 이미 당시의 중국에서는 없어진지 오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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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식으로는 조·보리·검은 기장이 많이 난다. 물 맛은 소금기가 배어 있으며, 나무 껍질 위에도 소금이 엉긴다.203203 水氣鹹 生鹽於木皮之上 『魏書』勿吉國傳에는 ‘勿吉國 …… 水氣醎凝 鹽生樹上 亦有鹽池’라고 되어 있고,『北史』勿吉傳에는 ‘勿吉國 …… 水氣鹹 生鹽於木皮之上 赤有鹽池’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晉書』肅愼氏傳의 ‘土無鹽鐵 燒木作灰 灌取汁而食之’란 내용을 敷衍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또『新唐書』黑水靺鞨傳에는 ‘有鹽泉 氣蒸薄 鹽凝水顚’이라 되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나무에서 나오는 木鹽이다.
<참조>
1.『晉書』肅愼傳 註 20)
土無鹽鐵
肅愼族은 鹽鐵을 제조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였다는 뜻이다. 그러나 소금은 生活必須品이었기 때문에 반드시 구하지 않으면 아니되었다. 나무를 태워서 재를 만들고 물을 부어서 汁을 받는 것은 잿물을 만드는 방법인데, 과연 이것을 소금 대신에 먹었는지는 의문이다.
『北史』勿吉傳에 보면, ‘勿吉國 水氣鹹 生鹽於木皮之上 亦有鹽池’라 하고 있는데, 水氣가 짜서 木皮 위에서 소금을 얻었다는 것은 『晋書』의 내용을 敷衍한 듯 하다. 肅愼地에는 鹽池가 많았고, 또 오츠크沿海 지역에는 海鹽이 많았다. 『金史』「食貨志」를 보면,
初 遼·金故地濱海多産鹽 上京·東北二路食肇州鹽 速頻路食海鹽 臨潢之北有大鹽濼 烏古里石壘部有鹽池 皆足以食境內之民 嘗征其稅
라 하여 遼·金의 옛 땅으로서 바닷가 연안에는 海鹽이 많았고, 또 그 內陸지방에는 鹽地가 많아서 境內의 사람들이 먹기에 풍족하였다고 한다.
鐵의 경우에도 그 製鍊法을 몰랐기 때문에 中國이나 韓半島에서 輸入해다가 쓸 수 밖에 없었다. 高句麗·渤海 등의 國家를 세운 種族들은 砂鐵 등의 製鍊法을 알고 있었으나,(李龍範, 「高句麗의 成長과 鐵」) 肅愼·挹婁·勿吉·靺鞨·女眞 계통은 鐵을 生産하는 方法을 알지 못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滿洲實錄』을 보면 ‘始炒鐵 開金銀礦’이라 하여, 1599년에 비로소 鐵을 製鍊하게 되었다고 하나, 이미 그 이전에도 鐵匠이 있어서 鐵을 製鍊하였던 흔적이 記錄 가운데 엿보인다.
鹽鐵 문제는 自給自足이 어려웠기 때문에 주변의 中國이나 韓半島에서 수입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하여 滿洲지역과 中國·韓半島와의 국경선에는 馬市와 같은 貿易所가 設置되어 鹽鐵과 馬匹 등이 交易되었다. 中國이나 우리 나라에서는 이러한 사정을 이용하여 鹽鐵의 공급을 통한 경제적인 方法으로 滿洲族을 통제하려 하였다. 대개 中國이나 우리 나라에서는 水鐵만을 交易하게 하고 正鐵은 交易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水鐵은 農機具의 제작에만 쓰여졌으나, 正鐵은 武器를 만들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제한된 交易에 불만을 품은 滿洲族은 수시로 中國이나 우리 나라의 변경을 침입하여 鹽·鐵 등의 生必品을 약탈해 갔다.
≪參考文獻≫
『北史』卷94「列傳」勿吉條.
『金史』卷49「食貨志」4 鹽條.
『滿洲實錄』卷3.
李龍範, 「高句麗의 成長과 鐵」『白山學報』1, 1966.
2.『魏書』勿吉傳 註 16)
水氣醎凝 鹽生樹上 亦有鹽池
소금은 수렵 및 유목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별로 필요가 없으니, 이는 짐승의 고기를 肉食하면 염분이 이미 거기에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금은 농경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필요한 필수품의 하나였다.
『柳邊紀略』에 의하면 ‘鹽南北朝時 有産於樹者 有産於池者 金時 速頻以東食海鹽 上京胡里改等路 食肇州鹽’이라 하여, 농경이 어느 정도 보금된 金나라 때에는 綏芬江 이동의 바닷가에서는 海鹽을 이용하였고, 渤海 때부터 조주의 염이 유명하였는데, 上京路와 胡里改路의 사람들이 이 조주염을 먹었음을 알 수 있다. 『黑龍江志稿』에는 ‘소금의 종류가 그 색깔에 따라 黑鹽·白鹽·五色鹽 등이 있었다’고 되어 있다. 黑鹽은 맛이 쓰고 색깔이 검은데 刺麻寺라는 곳에서 생산되었으며, 白鹽은 奉天 등지에서 생산되었고, 五色鹽은 呼倫, 倫爾의 兩地에서 생산되었다. 『新唐書』黑水靺鞨傳에는 ‘有鹽泉 氣蒸薄 鹽凝樹顚’이라 되어 있는데, 이것이 이른바 나무에서 나오는 木鹽이다.
≪參考文獻≫
『新唐書』卷220「北狄列傳」黑水靺鞨條.
『柳邊紀略』第3卷.
『遼海叢書』第2卷.
『黑龍江志稿』第6卷 地理風俗.
≪參考文獻≫
『晉書』卷97「東夷列傳」肅愼氏條.
『魏書』卷100「列傳」勿吉國條.
『北史』卷94「列傳」勿吉條.
『新唐書』卷220「東夷列傳」黑水靺鞨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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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축으로는 돼지가 많다.204204 其畜多猪 滿洲地域에서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기르던 家畜은 돼지였으니, 古代社會에서부터 돼지를 家畜으로 많이 길렀던 것 같다. 특히 ‘滿洲에서 활동하던 諸民族 가운데 오로지 肅愼·挹婁·勿吉·靺鞨만이 돼지기르기를 좋아했다’ 또는 ‘돼지를 많이 길렀다’라는 記錄을 가진 것을 보면 이러한 種族이 同一한 系統 族屬이거나 혹은 同一한 自然條件을 가진 地域에서 前後에 각각 살았던 族類라고 생각할 수 있다.
<참조>
『晉書』肅愼傳 註 16)
多畜猪
滿洲 지방에서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기르던 家畜은 돼지였으니, 古代 社會에서부터 돼지를 家畜으로 많이 길렀던 것이다. 『三國志』를 보면, ‘挹婁 …… 其俗好養豬食其肉 衣其皮 冬以豬膏塗身 厚數分 以禦風寒’이라 하였고, 『後漢書』에도 똑같은 內容의 記事가 나온다.
『皇明四夷考』에서는 ‘野有野豬’라고 하여 滿洲지방에는 들판에 멧돼지가 있었다고 하였는데, 이러한 野生의 멧돼지를 잡아서 길들여 家畜으로 만들었다고 생각된다. Shirokogoroff는 滿洲族이 돼지를 키우는 법을 다른 民族 즉, 漢族으로부터 배웠다고 생각하였으나,(『Social Organization of the Manchus』p.131) 滿洲지방에서 발견되는 遺蹟에서 돼지의 뼈가 發掘되는 點이나, 『三國志』·『後漢書』에 ‘好養豬’ 또는 ‘好養豕’이라는 記錄이 있는 點 등으로 미루어 보아 滿洲의 肅愼·挹婁는 일찍부터 스스로 돼지를 家畜으로 飼養하는 방법을 터득하였던 것 같다.
특히 滿洲에서 활동하였던 諸民族 가운데 오로지 肅愼·挹婁·勿吉·靺鞨 만이 ‘돼지 기르기를 좋아했다’ 또는 ‘돼지를 많이 길렀다(多畜猪)’라는 記錄을 가진 것을 보면 이러한 種族이 同一한 系統의 族屬이거나, 혹은 同一한 자연 조건을 가진 지역에서 前後에 각각 살았던 族類라고 생각할 수 있다.
蒙古族이 羊을 위주로 遊牧生活을 한 데 비하여 滿洲族의 肅愼·挹婁 계통은 돼지를 위주로 生活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집집마다 돼지를 많이 길러 그 고기를 食用으로 하고, 그 털가죽은 벗겨서 衣服이나 毛皮를 만들었던 것이다.
Shirokogoroff의 조사에 의하면 돼지고기는 漢族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滿洲族의 주요한 肉食이라고 한다.(앞의 책, p.131) 아마 農耕民族인 漢族이 淸代에 滿洲族의 統治를 받는 동안 滿洲族의 돼지고기를 먹는 습관과 돼지를 키우는 法을 배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오늘날 滿洲族은 작은 돼지우리를 정원에 만들어 놓고 가난한 집에서는 4·5頭, 부유한 집에서는 수십 頭씩 키운다고 한다.(Shirokogoroff, 앞의 책, p.132) Lattimore도 Goldi族의 주된 家畜은 돼지와 개라고 지적하였다.(『Studies in Frontier History』p.361)
돼지가 滿洲社會에서 가장 주된 家畜이 된 이유에 대해서는 滿洲의 자연 환경과 기후 조건에서 찾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滿洲의 松花江 下流, 우수리江 일대, 黑龍江 일대는 갈대 늪지대로 모기와 파리 등의 毒虫 때문에 소·말·羊 등의 家畜을 거의 기를 수 없는 지역이다. 그러나 돼지는 비교적 나쁜 자연조건에 잘 견디므로 일찍부터 돼지를 주된 家畜으로 기른 듯 하다. Lattimore는 돼지는 Goldi族 生活의 여러 조건 아래 쉽게 키울 수 있는데, 돼지는 그 기후를 잘 견디면서 비교적 손질이 적게 들고 또 충분한 양의 고기를 제공해 준다고 하였다.(앞의 책, p.361) 滿洲에서 돼지를 일찍부터 많이 키운 또 다른 이유는 『三國志』·『後漢書』에 기록된 바와 같이 겨울이 길고 추위가 몹시 심하기 때문에 돼지기름을 몸에 두껍게 발라 바람과 추위를 막는데 돼지를 이용하였던 것이다.
아무튼 滿洲의 生活이 돼지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던 것은 분명하다. J.Klaproth에 의하면 Tungus라는 말은 Yakut語로 돼지를 나타낸다고 한다. Tungus系統에 속하는 滿洲族이 돼지를 그 생활의 주된 家畜으로 키운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라 할 수 있다.
≪參考文獻≫
『後漢書』卷85「東夷列傳」挹婁條.
『三國志』卷30「東夷傳」挹婁條.
『皇明四夷考』
Shirokogoroff, 『Social Organization of the Manchus』1924.
Lattimore Owen, 『Studies in Frontier History』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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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을 씹어 술을 만드는데, 마시기만 하면 취한다.205205 嚼米爲酒 飮之亦醉 이 記事는 술을 만드는 데에는 누룩이 필요한데, 靺鞨人은 이러한 효소제를 만들지 못하였기 때문에 곡식 낟알을 씹어서 침의 효소를 이용하여 술을 담그었음을 보여주며, 또 그 술이 毒하여 마시면 몹시 취하여 인사불성이 되었다고 한다.『松漠紀聞』에 의하면 ‘술에 취하면 깨어날 때까지 나무에 매달아 둔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으로 이 地方의 술이 毒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凌純聲은 赫哲人이 술을 마시는 方法은 여러 사람들이 온돌 위에 빙 둘러 앉고 가운데에 술상이 있어 그 위에 술항아리를 두는데, 항아리 주둥이에 술잔 하나를 덮어두어 마실 때 甲이 항아리에서 한잔을 떠서 다 마시고 乙에게 전해 주면, 乙이 丙에게 전해주는 식으로 차례대로 돌아가며 전하여 한순배가 다 끝나면 다시 시작한다고 하여 그 방법이 매우 흥미롭다고 하면서 Goldi족이 술을 마시는 방법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松花江下游的赫哲族』p.71). 이러한 飮酒의 方法은 古代의 勿吉·靺鞨族으로부터 전해진 것이라 추측된다.
또한 그에 의하면 술에는 3種類가 있는데, 農耕社會에는 穀酒와 果實酒가 있고, 遊牧社會에서는 牛乳로 만든 乳酪이 있다고 한다. 穀酒는 發效하는 효소로써 細菌類·唾液·溫熱·發牙하는 種子 등을 利用하여 술을 담그며, 果實酒와 乳酪은 그 자체에 있는 天然의 효소를 利用하여 술을 담근다고 한다. 이로 보아 당시 靺鞨人은 唾液을 利用하여 穀酒를 만들었음을 알 수가 있다.
<참조>
『魏書』勿吉傳 註 17)
嚼米醞酒
술을 빚는 데는 누룩이 필요한데, 당시 勿吉사회에서는 이러한 효소가 없었기 때문에 쌀을 씹어서 침의 효소를 이용하여 술을 빚었던 것 같다.
淩純聲에 의하면 赫哲人은 성질이 술을 마시기를 매우 좋아하는데, 심지어는 목숨과 같이 술을 좋아하여 하루종일 술을 마시고 이로 인하여 생명을 잃는 자도 매우 많다고 하며, 종전의 술은 모두 그들 스스로 만들어 빚었는데, 山梨酒·포도주 등이 있었다고 한다. 술을 빚는 것은 간단하여 原料를 솥안에 푹 익힌 뒤 발로 짓밟고, 다시 무거운 물건을 사용하여 그것을 눌러서 짜 그 汁이 흘러나오면 곧 술이 된다고 한다.(『松花江下游的赫哲族』) 현재 赫哲人들은 술을 빚지 아니하고 모두 중국인의 伯酒와 러시아인의 소주를 마시는데, 술을 ark'i라 부른다. 이로 보아 남방 퉁구스의 Goldi족(赫哲族)이 술을 마시기를 좋아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종전에 술을 만들었던 방법은 쌀을 씹어서 빚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山梨酒, 포도주 등이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과일을 솥에 익혀 발로 밟아서 술을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쌀로서 술을 만드는 穀酒와 나무 열매로 술을 만드는 과실주 등이 있었다. 그 밖에도 수렵생활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짐승의 고기로서 담그는 술도 있었다.
≪參考文獻≫
淩純聲, 『松花江下游的赫哲族』(上), 1935.
≪參考文獻≫
洪 皓,『松漠紀聞』
凌純聲,『松花江下遊的赫哲族』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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婦人은 베옷을 입고 남자는 돼지가죽으로 옷을 해 입는다. 오줌으로 세수를 하는데, 모든 오랑캐 가운데서도 가장 불결하다.206206 俗以溺洗手面 於諸夷最爲不潔 3~4世紀 挹婁에서 4~6세기의 勿吉·靺鞨, 그리고 7~8세기 黑水靺鞨에 이르기까지 東部地域에 살던 여러 民族은 人尿를 使用하는 傳統的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三上次男은『三國志』「東夷傳」과『後漢書』「東夷列傳」의 挹婁條에서 ‘挹婁人들이 穴居生活을 하면서 칙간(溷)을 그 가운데 만들고 그 주위에서 生活하였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대단히 不潔하였다’라고 記錄하였고, 뒤이어『魏書』勿吉國傳과『隋書』靺鞨傳에서 ‘그 風習에 사람의 오줌으로써 손과 얼굴을 씻는데 오랑캐 가운데서 가장 不潔하다’고 기록하였으므로, 前後 記事로 몸에 묻은 때와 脂肪을 除去하기 위한 특수한 方法으로서 오줌으로 손과 얼굴을 씻었다고 主張하였다(『古代東北 アジア史硏究』pp.268~288).
그러나『三國志』와『後漢書』「東夷傳」挹婁條를 보면 ‘挹婁人들은 돼지 기르기를 좋아하여 그 고기를 먹고 그 껍질로써 옷을 만들어 입으며, 돼지기름을 가지고 몸에 발라서 그 두께가 몇겹이 되게하여 추위와 바람을 막았다’고 하는데, 이것으로 보아 손과 얼굴이 튼 것을 치료하기 위하여 오줌으로 씻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다시 말하면 오줌의 藥理的인 性質을 利用하여 손과 얼굴이 튼 것을 치료하였던 것 같다.
이러한 人尿를 사용하는 風習은 3세기에서 8세기까지 沿海州 地方에서 黑龍江·松花江 下流에 이르기까지 挹婁·勿吉·黑水靺鞨의 諸種族에게 남아 있었으나, 그 뒤에는 Tungus系의 諸種族에게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明代에 편찬된『遼東志』「外夷志」에 의하면,
乞列迷에는 4種類가 있는데, 性質이 간악하고 草舍에서 居住하며 물고기를 잡아서 먹고 산다. 빗질도 하지 않고 목욕도 하지 않으며, 直筒衣를 입는데 여름에는 魚皮를 着用하고 겨울에는 狗皮를 使用한다. 비린내가 나고 더러워서 가까이 할 수가 없는데 오줌으로써 세수한다.
라고 하여 乞列迷 種族이 14~15세기까지 이러한 人尿의 風習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乞列迷는 오늘날 그 種族이 거의 사라진 古아시아族 系統에 해당하는 Gilyak族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人尿의 風習은 古아시아族 系統의 諸種族이 갖는 가장 特徵的인 風習의 하나로서 毒矢를 使用하는 風習과 아울러 勿吉·挹婁·靺鞨의 重要한 特徵이었다.
<참조>
『魏書』勿吉傳 註 19)
俗以人溺洗手面
오줌을 사용하여 身體를 세척하는 습관은 3~8세기에 걸쳐 挹婁·勿吉·黑水靺鞨의 여러 종족 사이에 널리 유행하였다. 人尿를 사용하는 풍속은 오늘날도 Gilyak族과 관계가 깊은 北極 沿岸의 住民들 사이에서 널리 행해지고 있다.
『三國志』및『後漢書』挹婁傳의 기록에 의하면, 挹婁人들은 불결하여 칙간(溷)을 주거지 중앙에 만들고 사람들이 그 주위를 빙둘러 산다고 하였다. 이로 보아 挹婁人이나 勿吉人들은 칙간(溷)의 人尿를 사용하여 세수를 하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칙간은 곧 人尿를 담그는 요통을 말하는데, 그 가운데 항상 인뇨를 채워놓고 있다.
오늘날 Green Land에 사는 에스키모인들도 공동의 세수대야 가운데 소변을 보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세수대야는 상당히 큰 그릇으로서 挹婁·勿吉人들은 오줌을 사용하여 손을 씻었던 것이다. 元·明代의 Gilyak人들도 이와 같은 생활을 하였다고 하는데, 人尿를 사용하던 풍속은 地下式 穴居生活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인체에서 나오는 오줌에 어떤 精靈이 있다고 생각하는 미개 사회에서는 오줌을 단순한 물질 이상으로 생각하여 이것을 가지고 人體를 洗滌하거나 혹은 容器, 衣服 경우에 따라서는 病者의 衣服을 세척할 때 사용하였던 것이다. (三上次男, 『古代東北アジア史硏究』pp.300~301)
≪參考文獻≫
『後漢書』卷85「東夷列傳」挹婁條.
『三國志』卷30 「東夷傳」挹婁條.
三上次男,『古代東北アジア史硏究』1966.
≪參考文獻≫
『後漢書』卷85「東夷列傳」挹婁條.
『三國志』卷30「東夷傳」挹婁條.
『魏書』卷100「列傳」勿吉國條.
『遼東志』卷9「外夷志」
三上次男,『古代東北アジア史硏究』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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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속이 음탕하고 투기가 많다. 남의 아내가 외간 남자와 간통한 것을 어떤 사람이 그 남펀에게 알려 주면 남편은 즉시 아내를 죽이는데, 죽이고는 후회를 하여 반드시 알려 준 자를 죽이곤 한다. 이로 말미암아 姦淫에 대한 일은 끝내 폭로되지 않는다.207207 其妻外婬 …… 由是姦婬之事終不發揚 靺鞨의 社會는 狩獵·漁撈生活과 原始農耕生活을 병행하고 있었는데, 女子의 貞節을 중요하게 생각지 않던 社會였던 것 같다. 오늘날도 黑龍江과 松花江 下流에 살고 있는 Tungus系의 諸種族들의 社會에서는 남편이 사냥을 나가있는 동안에 아내가 외간 남자와 姦婬하는 것을 거의 묵인하고 있으며 또 結婚하기 전의 처녀들의 성관계는 상당히 자유스럽다고 한다(Shirokogoroff,『Social Organization of the Northern Tungus』pp.206~210).
이로 보아 당시 靺鞨人의 社會는 비록 族外婚에 의하여 夫婦關係가 成立하더라도 性的 拘束力은 매우 약한 對偶婚 段階에 머물러 있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姦婬에 대한 일은 夫婦 이외의 제3者가 관여하지 않는한 묵인 내지 용인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外婬한 아내를 그 남편이 죽였다고 하는 것은 家父長的 性格이 강한 일면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참조>
『晉書』肅愼傳 註 25)
婦貞而女淫
결혼하기 전에 있는 未婚의 여자는 남자와 자유롭게 교제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性的으로도 문란하였던 것 같다. 그후 결혼을 하면 처녀시절에 비하여 비교적 정숙하였던 것 같으나, 남편에 대하여 절대적인 貞操를 지키는 中國式의 夫婦倫理 관계는 확립되지 못하였던 것 같다.
『北史』勿吉傳에서 ‘其妻外淫 人有告其夫 夫輒殺妻而後悔 必殺告者 由是姦淫事終不發’이라 하고, 『隋書』靺鞨傳에서도 ‘其俗淫而妬 其妻外淫 人有告其夫者 夫輒殺妻 殺而後悔 必殺告者 由是姦淫之事終不發揚’이라 한 데에서 비록 결혼한 여자라도 貞操를 지키지 않고 외간 남자와 간통을 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또 이것을 사회 문제로 삼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凌純聲은 Goldi人의 性關係는 매우 자유스러워 혼인을 하기 이전의 여자는 이른바 貞操라는 것이 없으며, 혼인을 한 이후에도 남편이 집안에 있지 않으면 자유롭게 남과 性關係하는 등 淫亂한 風俗이 매우 심한데 그 연유는 民族이 도덕적으로 墮落한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生活方式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하였다. 즉, 漁獵生活을 하는 사회에서 남자는 1년 중에 3분의 2이상을 집을 비우고 外地에 나가서 漁獵하는지라, 단지 富貴한 집안의 사람이나 늙은 남자만이 집안에 있어 여자는 남편이 외지에 나가 있는 동안 공개적으로 남과 同居하는데, 남자는 돌아와서 이 사실을 알고도 깊이 캐어묻지 않는다고 하였다.(『松花江下游的赫哲族』p.216) 또한 그는 Goldi人의 음란한 풍속은 온돌과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고 하였다. 즉, 대다수 사람들의 집은 內外의 區別이 없어, 온 식구가 단지 좌우로 나누어 각각 온돌의 한쪽 끝을 차지하여 눕는데, 그 중간에는 하나의 온돌장막이 있어 이것으로 막혀 있을 뿐 어떠한 칸막이도 없고, 게다가 온돌을 뜨겁게 하면 육체적으로 강력한 온도의 暖氣를 받아 性的 衝動이 쉽게 일어나기 때문에 父女, 母子, 시아버지와 며느리, 삼촌과 형수, 형과 누이 사이에 倫常을 어지럽히는 일이 쉽게 발생한다고 하면서 온돌은 곧 음란한 풍속을 발생케 하는 媒介體가 된다고 하였다.(앞의 책, p.216)
滿洲의 馴鹿 Tungus사이에서는 新婦의 貞操가 요구되지 않으므로, 성숙한 나이에 이른 처녀들이 외간 남자와 性關係를 가지는 것은 결혼하는데 아무런 제약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처녀가 나이 20세를 넘어 貞操를 지키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이러한 관계는 비교적 비밀의 성격을 띄기 때문에 처녀가 관계한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지는 않고, 만약 처녀가 임신을 하게 되더라도 그 여자의 가치가 저하되기는커녕 도리어 新婦로서의 가치를 인정받는데, 그 이유는 그 여자가 多産할 수 있는 건강한 신체를 가졌음이 증명되어지기 때문이다. Udehe(兀狄哈)族 사이에서는 처녀의 임신이 그 여자에게 임신케 한 남자와 그 여자를 결혼하도록 강요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사용되어질 수도 있다. 滿洲의 馴鹿 Tungus 사이에서는 처녀의 임신은 부끄러운 사실로 간주되지만 그 처녀는 언제나 용서를 받게 되는데, 그 이유는 이들이 일정한 나이가 든 이후의 性關係를 하나의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滿洲人에게 있어 Birarčen族과 Kumarčen族 사이에는 자유로운 性的 生活이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으나, 이러한 Tungus 사이에서의 처녀의 지위는 馴鹿 Tungus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Khingan Tungus 사이에서는 처녀가 15·6세가 된 뒤에는 자유로운 性關係를 가지는 것을 허락하고 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여러명의 戀人을 두고 하루밤 사이에 여러 남자를 잇달아 받아들일 정도로 심한 경우도 있다. 이와 같은 性關係는 Goldi族과 Udehe族 사이에는 보통이지만 滿洲族 사이에는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Shirokogoroff, 『Social Organization of the Northern Tungus』pp.208~209)
이로 보아 오늘날 中國의 영향을 받은 南方의 滿洲族을 제외한 대다수의 Tungus에서 未婚의 處女는 性的 生活이 몹시 문란한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古代 肅愼의 처녀들이 몹시 음란하였다는 기록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參考文獻≫
『北史』卷94「列傳」勿吉條.
『隋書』卷81 靺鞨條.
凌純聲, 『松花江下游的赫哲族』1935.
Shirokogoroff, 『Social Organization of the Northern Tungus』1929.
≪參考文獻≫
S. M. Shirokogoroff,『Social Organization of the Northern Tungus』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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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모두 사냥으로 業을 삼는데 角弓208208 角弓 뿔로 만든 활을 말하는데, 靺鞨人들은 짐승의 뿔을 녹여서 활을 만든 것 같다. 明代의 女眞人들도 이러한 遺制를 본받았는데, 점차 狩獵生活에서 農耕生活로 移行하여 사냥해서 얻은 짐승들의 뿔의 수획량이 줄어 들자, 明을 통하여 水牛角을 貿易하여 활을 만들었다고 한다.『朝鮮王朝實錄』「叡宗實錄」을 보면,
野人들이 中國의 牛角과 本土의 牛角으로써 활을 만드는데, 그 體制가 우리나라 활과 비교하여 조금 크다. 줄은 가죽을 使用하며, 화살촉은 明의 鐵을 貿易하여 스스로 만드는데, 그 제도가 우리나라의 西甫子箭과 같다.
고 하고 있어 明代 女眞社會에서 사용하던 활은 牛角으로 만들었던 角弓이었는데 화살줄은 가죽을 使用하였음을 알 수 있다 明代에는 女眞族이 明의 鐵을 貿易하여 鐵鏃을 썼으나, 靺鞨族은 그 대신에 石鏃을 使用하였던 것이다. 角弓의 길이가 3尺이었는데, 朝鮮의 활과 비교하여 길이가 길었던 것 같으며, 화살의 길이도 1尺 2寸인 것을 보면, 古代의『三國志』·『後漢書』등에 나오는 楛矢의 길이 1尺 8寸보다는 짧았던 것 같다.
<참조>
『晉書』肅愼傳 註 32)
檀弓
肅愼이 사용한 활을 말하는데 그 크기가 4尺 가까이 되는 큰 활이었기 때문에 아주 强弓이었다. 張守節의 『史記正義』를 보면, ‘肅愼國記云 肅愼 其地在夫餘國東北河(可)六十日行 其弓四尺强勁弩 射四百步 今之靺鞈(鞨)國方有此矢’라 하여 그 활이 강하고 굳세어 4百步를 쏘는데, 靺鞨族이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晋書』에서는 활의 길이가 3尺 5寸이라고 하였으나, 『三國志』挹婁傳에서는 ‘그 활의 길이는 4寸이고 힘세기가 弩와 같다’고 하였다. 또한 『山海經』肅愼氏之國條에서도 보면 ‘其人皆工射 弓長四尺 勁彊 箭以楛爲之 長尺五寸’이라 하여 활의 길이가 4寸이고 힘이 세다고 하였다. 이로 보아 檀弓은 큰 활을 가리키는 말임에 틀림없다.
『隋書』靺鞨傳과 『北史』勿吉傳에서 檀弓은 角弓 3尺으로 바뀌는데, 이는 肅愼·挹婁 시대에 사용하던 檀弓이 勿吉·靺鞨 시대에 角弓으로 발달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參考文獻≫
『史記正議』
『三國志』卷30「東夷傳」挹婁條.
『隋書』卷81「東夷列傳」靺鞨條.
『北史』卷94「列傳」勿吉國條.
『山海經』卷17「大荒北經」肅愼氏之國條, 郭璞 注.
≪參考文獻≫
『朝鮮王朝實錄』「叡宗實錄」卷2 卽位年 11月 癸亥條.
『後漢書』卷85「東夷列傳」挹婁條.
『三國志』卷30「東夷傳」挹婁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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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길이가 3尺이고 그 화살은 1尺 2寸이다. 해마다 7∼8월에 독약을 만들어 화살에 발라 새나 짐승을 쏘는데, 맞는대로 그 자리에서 죽는다.209209 常以七八月造毒藥 傅矢以射禽獸 中者立死 靺鞨人이 사냥을 할 때 毒矢를 사용한 것은 古代의 肅愼·挹婁·勿吉族과 마찬가지였다. 毒矢를 사용하였다는 記事는『三國志』挹婁傳의 記事가 가장 오래된 史類이다. 오늘날 毒矢를 사용하는 방법은 北方의 여러 民族에게 일반화되고 있는데, 古Asia族에 속하는 Ainu族·Kamchadal人·Eskimo人·Aleuts族·Gilyak族 등이 毒矢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毒矢가 발달하였던 원인은 사냥을 위주로 하는 狩獵生活을 하였던 데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참조>
『魏書』勿吉傳 註 20)
造毒藥傳箭鏃
勿吉人이 사냥을 할 때 毒失를 사용한 것은 古代의 肅愼·挹婁族과 마찬가지였다. 오늘날 毒失을 사용하는 방법은 북방 지역의 여러 민족에게 일반화되고 있으나, 『三國志』挹婁傳의 기사가 가장 오래된 史料인데, 挹婁는 원래 森林地域에서 사냥을 위주로 하는 수렵생활을 하였으므로 이러한 毒失가 발달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勿吉이 毒失를 사용한 것은 挹婁人이 毒失를 사용하던 풍습을 그대로 이어받았던 것이다. 勿吉人이 石鏃과 毒失를 사용하고 또 人尿를 사용한 풍습은 모두 古代 肅愼·挹婁와 연관성을 갖기 때문에 勿吉族은 고대의 肅愼·挹婁의 후예일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毒失의 사용으로 보아 挹婁와 勿吉이 民族的·文化的으로 불가분의 관계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毒失는『本草綱目』에 의하면 毒草類 가운데 烏頭라는 풀에서 줄기의 즙(汁)을 짜서 햇빛에 말려 사냥할 때에 이것을 화살에 발라서 쏘는데, 사람이 맞으면 모두 죽는다고 한다. 鳥頭는 滿洲와 沿海州 일대에 많이 자라는데, 勿吉人들은 이것을 사용하여 독시를 만들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三上次男, 『古代東北アジア史硏究』p.253)
오늘날 古Asia族에 속하는 Ainu族, Kamchadal人, Eskimo人, Aleuts族, Gilyak族 등이 毒失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이로 보아 挹婁·勿吉族과 이러한 沿海州 일대에 흩어져 사는 古Asia族과 어떤 관계가 있으리라 추측된다.
≪參考文獻≫
『三國志』卷30「東夷傳」挹婁條.
『本草綱目』卷17下.
三上次男,『古代東北アジア史硏究』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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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97
大莫弗瞞咄 : 肅愼語로서 酋長을 부르던 稱號인데, 漢語로 “大人”이라고 한다 大는 肅愼語의 Da로서 수령, 두목을 뜻한다. 魏晉南北朝時代에 勿吉人과 靺鞨人은 그 酋長을 大莫弗瞞이라고 불렀는데,『北史』·『舊唐書』·『册府元龜』에서는 이를 漢譯하여 酋帥·君長·首帥라고 表記하였으나, 이것은 각 部의 酋長을 漢譯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莫弗은 肅愼語 Mafa를 나타내고 瞞咄은 Mandu를 나타내는데, 모두 酋長을 의미하는 말이다. 滿洲라는 地名도 이 瞞咄과 關係가 있는 것이 틀림없으며, 渤海의 姓인 大氏도 이와 關係가 있는 것이라 추측된다.
『新唐書』黑水靺鞨傳에 보면 ‘그 酋長을 大莫拂瞞咄이라 하며, 代를 이어 君長이 되었다(其酋曰大莫拂瞞咄 世相承爲長)’라고 하여 그 酋長이 대대로 계승되었음을 알 수 있다.『舊唐書』靺鞨傳에 보면 ‘서로 계승하여 대대로 君長이 되었다(父子相承 世爲君長)’라고 하여 父子가 대대로 王位를 세습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로 보아 大莫佛瞞咄은 이미 家父長的 社會에 있어서 상당한 權力을 가진 政治的 君長이었음을 알 수 있다.
≪參考文獻≫
『舊唐書』卷199下「北狄列傳」靺鞨條.
『新唐書』卷219「北狄列傳」黑水靺鞨條.
馮繼欽,「靺鞨族共同體類型及其特征初探」『北方文物』1986.
童萬崙,「白山靺鞨族考」『北方文物』1986.
註 198
徒太出 : 徒太는 太白의 異音으로서 一名 太皇이라고도 한다. 퉁구스계의 民族들이 山을 숭배하여 徒太라고 불렀는데,『北史』勿吉傳과『文獻通考』「漠考」勿吉條에 보면, ‘나라의 남쪽에 徒太山이 있는데 中國에서는 太皇이라고 한다(國南有從太山者 華言太皇)’고 하여 勿吉의 남쪽에 徒太山이 있었다고 한다.『新唐書』黑水靺鞨傳을 보면 ‘太白山을 또한 徒太山이라고 한다(太白山亦曰徒太山)’이라 하고 있어 太白山을 徒太山이라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이른바『新唐書』高句麗傳이나『通典』高句麗條에 나오는 白山으로서 오늘날 白頭山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高麗朝 以後로 白頭山이라고 불렀으나, 中國에서는 遼·金 以後로 長白山이라고 불렀다. 白山이나 또는 太白山은 그 산이 높고 눈이 쌓여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므로 徒太라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지 않나 추측된다.
<참조>
『魏書』勿吉傳 註 21)
徒太山
徒太山은 오늘날의 白頭山을 말한다. 北魏에서는 ‘太白山’이라 불렀으나 『北史』勿吉傳에는 ‘有徒太山者 華言太皇’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徒太山은 ‘太白’이라 부르기도 하였는데, 그 뜻은 ‘太皇’이었음을 알 수 있다.
『新唐書』靺鞨傳에는 ‘太白山 亦曰徒太山’이라 되어 있는데, 이것은 『魏書』勿吉傳을 따른 것이다. 『新唐書』高麗傳에는 ‘白山’의 기록이 보이는데, 이 산이야말로 白頭山을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滿洲에서는 遼·金 以來 淸代를 거쳐 오늘날까지 ‘長白山’이라 일컬으며 우리나라에서는 高麗이래 朝鮮을 거쳐 오늘날까지 ‘白頭山’이라 일컫고 있다.
≪參考文獻≫
『北史』卷94「列傳」勿吉國條.
『新唐書』卷219「北狄列傳」黑水靺鞨條; 卷220 「東夷列傳」高麗條.
≪參考文獻≫
『文獻通考』卷216「漢考」勿吉條.
『北史』卷94「列傳」勿吉條.
『新唐書』卷219「北狄列傳」黑水靺鞨條; 卷220「東夷列傳」高句麗條.
『通典』卷186「邊防」高句麗條.
池內宏,「勿吉考」『滿鮮史硏究』(上世篇) 第1册, 1951.
註 199
上有熊羆豹狼 皆不害人 人亦不敢殺 : 滿洲地域의 山嶽地帶나 草原地帶에서 살던 가장 무서운 짐승이 바로 이러한 熊羆類의 곰과 豹狼類의 이리떼였다. 물론 호랑이도 이 時代에 살던 사람에게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靺鞨族은 곰과 이리를 그들의 토템으로 섬겨 이들을 죽이지 않고 숭배하였으며, 또 이들 짐승도 사람을 해치지 않았던 사실을 알 수가 있다. Shirokogoroff에 의하면 인간은 가장 두려워하는 짐승인 곰과 호랑이가 사는 Taiga 地域에 들어가서 사냥하지 아니하며, 또 이러한 짐승들도 人間이 사는 地域에는 출몰하지 아니하였던 데에서 이것을 人間과 動物과의 共存하는 關係라고 하였다(『Social Organization of the Northern Tungus』pp.42~46). 바로『隋書』靺鞨傳에 나오는 熊羆와 시랑(豹狼)은 당시의 靺鞨과 相互共存하는 形態를 취했음을 알 수가 있다.
≪參考文獻≫
S. M. Shirokogoroff,『Social Organization of the Northern Tungus』1929.
註 200
地卑濕 : 滿洲地域의 地形을 보면 內興安嶺의 남쪽 地域에는 松花江의 北方과 牧丹江의 東部 一帶가 山嶽地帶이고, 黑龍江의 下流와 松花江의 中下流 一帶는 平原과 丘陵地帶로 이루어져 있다. 靺鞨人이 주로 살았던 地域이 ‘地帶가 낮고 습하였다’는 것은 黑龍江과 松花江 및 牧丹江 一帶의 습한 江邊地帶에서 居住하였음을 알 수 있다. 本文에서도 ‘住居는 대개 山水에 의지한다’라고 한 것으로 보더라도 그들이 주로 居住한 地域이 江을 따라서 生活하면서 강가에서 漁撈生活을 하고 또 가까운 山에서 짐승을 사냥하는 狩獵生活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註 201
築土如堤 鑿穴以居 開口向上 以梯出入 : 滿洲地域에 살던 肅愼·挹婁·勿吉·靺鞨의 住居形態가 穴居였음을 보여주는 史料이다.『三國志』「東夷傳」挹婁條를 보면,
항상 山林속에서 살며 穴居生活을 한다. 大家는 그 깊이가 9階段이나 되며, 계단이 많을수록 좋게 여겼다(處山林之間 常穴居 大家深九梯 以多爲好)
라고 하였으며,『後漢書』「東夷列傳」挹婁條에도,
山林속에서 거주하는데, 그 지방 기후가 매우 추워서 항상 굴속에서 산다. 굴의 깊이가 깊은 것을 귀하게 어겨서 大家는 아홉 계단을 내려가야 닿을 수 있을 정도로 깊다(處於山林之間 土氣極寒 常爲穴居 以深爲貴 大家至接九梯)
라고 하여, 古代의 肅愼·挹婁人들이 氣候가 몹시 추웠기 때문에 땅에 구멍을 파고 穴居生活을 하였음을 보여 준다.『大明一統志』外夷 女眞條를 보면 野人 女眞의 住居를 說明하기를 ‘山谷間이 의지하여 나무로 걸쳐 집을 만드는데 그 위에 흙을 덮어 움집처럼 만든다’라고 하여, 明代의 黑龍江 下流에 살았던 野人 女眞들이 겨울철에 추위를 막기 위하여 이러한 穴居生活을 하였던 遺制를 보여 준다.
원래 古代의 肅愼·挹婁·勿吉·靺鞨族은 農耕生活로 들어가기 전에 狩獵·採取生活을 하거나, 또는 狩獵·漁撈生活을 하였기 때문에, 일정한 장소에 居住하지 못하고 移動하였으므로 住居生活도 간편한 Tent로 構成되는 Camp生活을 하였다. 이러한 Tent를 女眞族들은 Tatan이라 불렀다. 그러나 겨울철에 狩獵으로 生活을 하지 못할 정도로 날씨가 추워지면, 永久家屋에 해당하는 穴居生活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면 겨울철에 일정한 장소에서 穴居生活을 하다가 다시 여름철에는 移住하면서 Tent生活을 하였는데, 이처럼 겨울철에만 머물던 穴居村落을 冬村(Winter Village)이라고 한다. 그러나 農耕生活로 들어가면서 이러한 穴居生活을 하고 移住하지 않았던 것 같다. 穴居生活은 겨울철에 추위를 막기 위한 것으로써 여름철 住居生活에는 알맞지 아니하였다. 이리하여「土宇」또는「土幕」을 짓고 生活을 하는 住居形態가 나타났는데 겨울철에 추위를 피하기 위하여 고안한 장치가 바로 온돌이었다. 온돌을 사용하는 種族은 오늘날 滿洲族과 우리 민족 뿐이다. 아뭏튼 이러한 穴居에서 土幕이나 土宇生活로, 다시 이것이 草家生活로 發展하였다고 볼 수가 있다
<참조>
1.『晉書』肅愼傳 註 10)
夏則巢居
여름철에 나무 위에서 산다는 것은 山林에서 狩獵生活을 하면서 일시적으로 寓居하였음을 말한다. 『三國志』나 『後漢書』의 ‘處山林之間’이란 기록을 『晋書』에서는 ‘여름철에 나무 위에서 산다(夏則巢居)’라고 고쳤다.
원래 Taiga지대의 山林지역에서는 봄철부터 겨울철까지 森林사이를 옮겨다니면서 사냥을 한다. 오늘날 이 지역에 살고 있는 Goldi族의 狩獵生活을 보면 古代肅愼의 狩獵生活을 짐작할 수 있다. 凌純聲에 의하면 1년에 4차례의 사냥을 행하여 봄철 사냥은 正月에 出發하여 2月 15日 전후에 돌아오는데 火狐·獾·黃鼠·麅 등의 짐승을 잡고, 여름철 사냥은 4月 初에서 6月 末까지 행하는데 茸角·黑熊·野猪 등의 짐승을 잡으며, 가을철 사냥은 8月 보름부터 9月 15日까지 행하는데 麅·鹿·熊·野猪 등의 짐승을 잡고, 겨울철 사냥은 10月 初旬 또는 中旬에서 12月 中旬까지 또는 늦으면 年末까지 행하는데 貂·獺·火狐·獾·黃鼠狼·麅子·灰鼠·熊·虎·豹 등의 짐승을 잡는다고 한다.(『松花江下游的赫哲族』p.87)
이처럼 옮겨다니면서 사냥하는 까닭은 철에 따라 잡히는 짐승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짐승들이 서식하는 장소를 따라 사냥터를 옮겼던 것이다. 滿洲 璦琿縣에 살고 있는 Orochon族의 『竹枝詞』를 보면 9月에는 여우 사냥, 10月에는 이리 사냥이 最適期라고 한다.(秋葉隆, 『滿蒙の民族と宗敎』p.72)
이러한 狩獵生活이나 또는 放牧生活을 하는 사람들은 그 住居를 계속 옮겨야 하기 때문에 農耕生活에서 나타나는 定着生活의 住居形態가 있을 수가 없었다. 대개 狩獵生活이나 遊牧生活을 하던 北方의 遊牧民族들은 Tent生活을 하였다. 오늘날 黑龍江 流域에 살고 있는 Orochon族은 이러한 Tent를 ‘仙人柱(Urien)’ 또는 ‘斜仁柱’라고 부른다.(呂光天, 『北方民族原始社會形態硏究』p.3 ; 『鄂倫春族簡史』p.188) 그러나 古代 肅愼氏는 아직 이러한 Tent生活을 하지 못하고 나무잎과 줄기를 얽어 생활하였던 것 같다.
≪參考文獻≫
『後漢書』卷85「東夷列傳」挹婁條.
『三國志』卷30「東夷傳」挹婁條.
凌純聲, 『松花江下游的赫哲族』(上), 1935.
秋葉隆, 『滿蒙の民族と宗敎』1941.
呂光天, 『北方民族原始社會形態硏究』1980, 北京 ; 『鄂倫春族簡史』1980.
2.『晉書』肅愼傳 註 11)
冬則穴處
겨울철에 굴에서 산다는 것은 여름철에 나무 위에서 사는 생활과는 반대가 되는 것으로서, 추위를 막기 위한 생활이었다고 볼 수 있다. 『後漢書』에서는 ‘土氣極寒常爲穴居 以深爲貴 大家至中接九梯’라고 하였으며, 『三國志』에서도 ‘常穴居 大家深九梯 以多爲好 土氣寒 劇於夫餘’라고 하였다.
이처럼 肅愼은 여름철에는 山林에서 巢居하면서 移動生活을 하다가 겨울철에는 穴居로 돌아오는데, 이러한 肅愼의 穴居는 일종의 冬村(Winter Village)이라 생각된다. 다시 말하면 여름철에 사냥할 짐승이 많을 때에는 짐승을 쫓아 가까운 血族끼리 떼를 지어 移動하지만, 겨울철에는 사냥한 짐승을 가지고 冬村에 돌아와 半定住生活을 하면서 추운 겨울을 보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공동 무덤도 대개 이 冬村 부근에 있었으므로, 죽을 때에는 반드시 그 氏族의 冬村으로 돌아오는 것이 그들의 習俗이라고 한다.
≪參考文獻≫
『後漢書』卷85「東夷列傳」挹婁條.
『三國志』卷30「東夷傳」挹婁條.
≪參考文獻≫
『後漠書』卷85「東夷列傳」挹婁條.
『三國志』卷30「東夷傳」挹婁條.
『大明一統志』卷89「外夷」女直條.
註 202
相與偶耕 : 農事를 짓는데 牛馬를 使用하지 않고, 사람의 힘을 利用하여 밭을 갈았다는 뜻이다. 이와같은 偶耕法은 原始農耕의 初步的인 形態로써, 動物을 利用하는 深耕法보다 훨씬 未開한 農耕方法이었다. 滿洲에서 소를 利用한 牛耕法이 일반화되는 것은 金·明代에 들어와서 女眞社會에서 遠東地方의 소를 대량으로 輸入하면서부터였다.
<참조>
『魏書』勿吉傳 註 15)
佃則偶耕
勿吉은 肅愼·挹婁와 마찬가지로 원시 농경을 하였는데, 소나 말을 이용하여 쟁기를 끄는 방법은 알지 못하고, 사람의 힘을 이용하여 밭을 가는 偶耕을 하였다.
당시 勿吉사회에 소가 없었기 때문에 牛耕法을 알지 못한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으나, 말이 있는 데도 이를 이용하지 않은 것은 유목사회의 성격이 강하여 말을 사냥하는 데만 이용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사람이 밭을 가는 偶耕의 방법은 지극히 원시적인 농경 방법으로서 이미 당시의 중국에서는 없어진지 오래되었다.
註 203
水氣鹹 生鹽於木皮之上 : 『魏書』勿吉國傳에는 ‘勿吉國 …… 水氣醎凝 鹽生樹上 亦有鹽池’라고 되어 있고,『北史』勿吉傳에는 ‘勿吉國 …… 水氣鹹 生鹽於木皮之上 赤有鹽池’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晉書』肅愼氏傳의 ‘土無鹽鐵 燒木作灰 灌取汁而食之’란 내용을 敷衍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또『新唐書』黑水靺鞨傳에는 ‘有鹽泉 氣蒸薄 鹽凝水顚’이라 되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나무에서 나오는 木鹽이다.
<참조>
1.『晉書』肅愼傳 註 20)
土無鹽鐵
肅愼族은 鹽鐵을 제조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였다는 뜻이다. 그러나 소금은 生活必須品이었기 때문에 반드시 구하지 않으면 아니되었다. 나무를 태워서 재를 만들고 물을 부어서 汁을 받는 것은 잿물을 만드는 방법인데, 과연 이것을 소금 대신에 먹었는지는 의문이다.
『北史』勿吉傳에 보면, ‘勿吉國 水氣鹹 生鹽於木皮之上 亦有鹽池’라 하고 있는데, 水氣가 짜서 木皮 위에서 소금을 얻었다는 것은 『晋書』의 내용을 敷衍한 듯 하다. 肅愼地에는 鹽池가 많았고, 또 오츠크沿海 지역에는 海鹽이 많았다. 『金史』「食貨志」를 보면,
初 遼·金故地濱海多産鹽 上京·東北二路食肇州鹽 速頻路食海鹽 臨潢之北有大鹽濼 烏古里石壘部有鹽池 皆足以食境內之民 嘗征其稅
라 하여 遼·金의 옛 땅으로서 바닷가 연안에는 海鹽이 많았고, 또 그 內陸지방에는 鹽地가 많아서 境內의 사람들이 먹기에 풍족하였다고 한다.
鐵의 경우에도 그 製鍊法을 몰랐기 때문에 中國이나 韓半島에서 輸入해다가 쓸 수 밖에 없었다. 高句麗·渤海 등의 國家를 세운 種族들은 砂鐵 등의 製鍊法을 알고 있었으나,(李龍範, 「高句麗의 成長과 鐵」) 肅愼·挹婁·勿吉·靺鞨·女眞 계통은 鐵을 生産하는 方法을 알지 못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滿洲實錄』을 보면 ‘始炒鐵 開金銀礦’이라 하여, 1599년에 비로소 鐵을 製鍊하게 되었다고 하나, 이미 그 이전에도 鐵匠이 있어서 鐵을 製鍊하였던 흔적이 記錄 가운데 엿보인다.
鹽鐵 문제는 自給自足이 어려웠기 때문에 주변의 中國이나 韓半島에서 수입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하여 滿洲지역과 中國·韓半島와의 국경선에는 馬市와 같은 貿易所가 設置되어 鹽鐵과 馬匹 등이 交易되었다. 中國이나 우리 나라에서는 이러한 사정을 이용하여 鹽鐵의 공급을 통한 경제적인 方法으로 滿洲族을 통제하려 하였다. 대개 中國이나 우리 나라에서는 水鐵만을 交易하게 하고 正鐵은 交易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水鐵은 農機具의 제작에만 쓰여졌으나, 正鐵은 武器를 만들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제한된 交易에 불만을 품은 滿洲族은 수시로 中國이나 우리 나라의 변경을 침입하여 鹽·鐵 등의 生必品을 약탈해 갔다.
≪參考文獻≫
『北史』卷94「列傳」勿吉條.
『金史』卷49「食貨志」4 鹽條.
『滿洲實錄』卷3.
李龍範, 「高句麗의 成長과 鐵」『白山學報』1, 1966.
2.『魏書』勿吉傳 註 16)
水氣醎凝 鹽生樹上 亦有鹽池
소금은 수렵 및 유목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별로 필요가 없으니, 이는 짐승의 고기를 肉食하면 염분이 이미 거기에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금은 농경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필요한 필수품의 하나였다.
『柳邊紀略』에 의하면 ‘鹽南北朝時 有産於樹者 有産於池者 金時 速頻以東食海鹽 上京胡里改等路 食肇州鹽’이라 하여, 농경이 어느 정도 보금된 金나라 때에는 綏芬江 이동의 바닷가에서는 海鹽을 이용하였고, 渤海 때부터 조주의 염이 유명하였는데, 上京路와 胡里改路의 사람들이 이 조주염을 먹었음을 알 수 있다. 『黑龍江志稿』에는 ‘소금의 종류가 그 색깔에 따라 黑鹽·白鹽·五色鹽 등이 있었다’고 되어 있다. 黑鹽은 맛이 쓰고 색깔이 검은데 刺麻寺라는 곳에서 생산되었으며, 白鹽은 奉天 등지에서 생산되었고, 五色鹽은 呼倫, 倫爾의 兩地에서 생산되었다. 『新唐書』黑水靺鞨傳에는 ‘有鹽泉 氣蒸薄 鹽凝樹顚’이라 되어 있는데, 이것이 이른바 나무에서 나오는 木鹽이다.
≪參考文獻≫
『新唐書』卷220「北狄列傳」黑水靺鞨條.
『柳邊紀略』第3卷.
『遼海叢書』第2卷.
『黑龍江志稿』第6卷 地理風俗.
≪參考文獻≫
『晉書』卷97「東夷列傳」肅愼氏條.
『魏書』卷100「列傳」勿吉國條.
『北史』卷94「列傳」勿吉條.
『新唐書』卷220「東夷列傳」黑水靺鞨條.
註 204
其畜多猪 : 滿洲地域에서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기르던 家畜은 돼지였으니, 古代社會에서부터 돼지를 家畜으로 많이 길렀던 것 같다. 특히 ‘滿洲에서 활동하던 諸民族 가운데 오로지 肅愼·挹婁·勿吉·靺鞨만이 돼지기르기를 좋아했다’ 또는 ‘돼지를 많이 길렀다’라는 記錄을 가진 것을 보면 이러한 種族이 同一한 系統 族屬이거나 혹은 同一한 自然條件을 가진 地域에서 前後에 각각 살았던 族類라고 생각할 수 있다.
<참조>
『晉書』肅愼傳 註 16)
多畜猪
滿洲 지방에서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기르던 家畜은 돼지였으니, 古代 社會에서부터 돼지를 家畜으로 많이 길렀던 것이다. 『三國志』를 보면, ‘挹婁 …… 其俗好養豬食其肉 衣其皮 冬以豬膏塗身 厚數分 以禦風寒’이라 하였고, 『後漢書』에도 똑같은 內容의 記事가 나온다.
『皇明四夷考』에서는 ‘野有野豬’라고 하여 滿洲지방에는 들판에 멧돼지가 있었다고 하였는데, 이러한 野生의 멧돼지를 잡아서 길들여 家畜으로 만들었다고 생각된다. Shirokogoroff는 滿洲族이 돼지를 키우는 법을 다른 民族 즉, 漢族으로부터 배웠다고 생각하였으나,(『Social Organization of the Manchus』p.131) 滿洲지방에서 발견되는 遺蹟에서 돼지의 뼈가 發掘되는 點이나, 『三國志』·『後漢書』에 ‘好養豬’ 또는 ‘好養豕’이라는 記錄이 있는 點 등으로 미루어 보아 滿洲의 肅愼·挹婁는 일찍부터 스스로 돼지를 家畜으로 飼養하는 방법을 터득하였던 것 같다.
특히 滿洲에서 활동하였던 諸民族 가운데 오로지 肅愼·挹婁·勿吉·靺鞨 만이 ‘돼지 기르기를 좋아했다’ 또는 ‘돼지를 많이 길렀다(多畜猪)’라는 記錄을 가진 것을 보면 이러한 種族이 同一한 系統의 族屬이거나, 혹은 同一한 자연 조건을 가진 지역에서 前後에 각각 살았던 族類라고 생각할 수 있다.
蒙古族이 羊을 위주로 遊牧生活을 한 데 비하여 滿洲族의 肅愼·挹婁 계통은 돼지를 위주로 生活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집집마다 돼지를 많이 길러 그 고기를 食用으로 하고, 그 털가죽은 벗겨서 衣服이나 毛皮를 만들었던 것이다.
Shirokogoroff의 조사에 의하면 돼지고기는 漢族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滿洲族의 주요한 肉食이라고 한다.(앞의 책, p.131) 아마 農耕民族인 漢族이 淸代에 滿洲族의 統治를 받는 동안 滿洲族의 돼지고기를 먹는 습관과 돼지를 키우는 法을 배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오늘날 滿洲族은 작은 돼지우리를 정원에 만들어 놓고 가난한 집에서는 4·5頭, 부유한 집에서는 수십 頭씩 키운다고 한다.(Shirokogoroff, 앞의 책, p.132) Lattimore도 Goldi族의 주된 家畜은 돼지와 개라고 지적하였다.(『Studies in Frontier History』p.361)
돼지가 滿洲社會에서 가장 주된 家畜이 된 이유에 대해서는 滿洲의 자연 환경과 기후 조건에서 찾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滿洲의 松花江 下流, 우수리江 일대, 黑龍江 일대는 갈대 늪지대로 모기와 파리 등의 毒虫 때문에 소·말·羊 등의 家畜을 거의 기를 수 없는 지역이다. 그러나 돼지는 비교적 나쁜 자연조건에 잘 견디므로 일찍부터 돼지를 주된 家畜으로 기른 듯 하다. Lattimore는 돼지는 Goldi族 生活의 여러 조건 아래 쉽게 키울 수 있는데, 돼지는 그 기후를 잘 견디면서 비교적 손질이 적게 들고 또 충분한 양의 고기를 제공해 준다고 하였다.(앞의 책, p.361) 滿洲에서 돼지를 일찍부터 많이 키운 또 다른 이유는 『三國志』·『後漢書』에 기록된 바와 같이 겨울이 길고 추위가 몹시 심하기 때문에 돼지기름을 몸에 두껍게 발라 바람과 추위를 막는데 돼지를 이용하였던 것이다.
아무튼 滿洲의 生活이 돼지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던 것은 분명하다. J.Klaproth에 의하면 Tungus라는 말은 Yakut語로 돼지를 나타낸다고 한다. Tungus系統에 속하는 滿洲族이 돼지를 그 생활의 주된 家畜으로 키운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라 할 수 있다.
≪參考文獻≫
『後漢書』卷85「東夷列傳」挹婁條.
『三國志』卷30「東夷傳」挹婁條.
『皇明四夷考』
Shirokogoroff, 『Social Organization of the Manchus』1924.
Lattimore Owen, 『Studies in Frontier History』1940.
註 205
嚼米爲酒 飮之亦醉 : 이 記事는 술을 만드는 데에는 누룩이 필요한데, 靺鞨人은 이러한 효소제를 만들지 못하였기 때문에 곡식 낟알을 씹어서 침의 효소를 이용하여 술을 담그었음을 보여주며, 또 그 술이 毒하여 마시면 몹시 취하여 인사불성이 되었다고 한다.『松漠紀聞』에 의하면 ‘술에 취하면 깨어날 때까지 나무에 매달아 둔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으로 이 地方의 술이 毒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凌純聲은 赫哲人이 술을 마시는 方法은 여러 사람들이 온돌 위에 빙 둘러 앉고 가운데에 술상이 있어 그 위에 술항아리를 두는데, 항아리 주둥이에 술잔 하나를 덮어두어 마실 때 甲이 항아리에서 한잔을 떠서 다 마시고 乙에게 전해 주면, 乙이 丙에게 전해주는 식으로 차례대로 돌아가며 전하여 한순배가 다 끝나면 다시 시작한다고 하여 그 방법이 매우 흥미롭다고 하면서 Goldi족이 술을 마시는 방법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松花江下游的赫哲族』p.71). 이러한 飮酒의 方法은 古代의 勿吉·靺鞨族으로부터 전해진 것이라 추측된다.
또한 그에 의하면 술에는 3種類가 있는데, 農耕社會에는 穀酒와 果實酒가 있고, 遊牧社會에서는 牛乳로 만든 乳酪이 있다고 한다. 穀酒는 發效하는 효소로써 細菌類·唾液·溫熱·發牙하는 種子 등을 利用하여 술을 담그며, 果實酒와 乳酪은 그 자체에 있는 天然의 효소를 利用하여 술을 담근다고 한다. 이로 보아 당시 靺鞨人은 唾液을 利用하여 穀酒를 만들었음을 알 수가 있다.
<참조>
『魏書』勿吉傳 註 17)
嚼米醞酒
술을 빚는 데는 누룩이 필요한데, 당시 勿吉사회에서는 이러한 효소가 없었기 때문에 쌀을 씹어서 침의 효소를 이용하여 술을 빚었던 것 같다.
淩純聲에 의하면 赫哲人은 성질이 술을 마시기를 매우 좋아하는데, 심지어는 목숨과 같이 술을 좋아하여 하루종일 술을 마시고 이로 인하여 생명을 잃는 자도 매우 많다고 하며, 종전의 술은 모두 그들 스스로 만들어 빚었는데, 山梨酒·포도주 등이 있었다고 한다. 술을 빚는 것은 간단하여 原料를 솥안에 푹 익힌 뒤 발로 짓밟고, 다시 무거운 물건을 사용하여 그것을 눌러서 짜 그 汁이 흘러나오면 곧 술이 된다고 한다.(『松花江下游的赫哲族』) 현재 赫哲人들은 술을 빚지 아니하고 모두 중국인의 伯酒와 러시아인의 소주를 마시는데, 술을 ark'i라 부른다. 이로 보아 남방 퉁구스의 Goldi족(赫哲族)이 술을 마시기를 좋아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종전에 술을 만들었던 방법은 쌀을 씹어서 빚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山梨酒, 포도주 등이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과일을 솥에 익혀 발로 밟아서 술을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쌀로서 술을 만드는 穀酒와 나무 열매로 술을 만드는 과실주 등이 있었다. 그 밖에도 수렵생활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짐승의 고기로서 담그는 술도 있었다.
≪參考文獻≫
淩純聲, 『松花江下游的赫哲族』(上), 1935.
≪參考文獻≫
洪 皓,『松漠紀聞』
凌純聲,『松花江下遊的赫哲族』1935.
註 206
俗以溺洗手面 於諸夷最爲不潔 : 3~4世紀 挹婁에서 4~6세기의 勿吉·靺鞨, 그리고 7~8세기 黑水靺鞨에 이르기까지 東部地域에 살던 여러 民族은 人尿를 使用하는 傳統的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三上次男은『三國志』「東夷傳」과『後漢書』「東夷列傳」의 挹婁條에서 ‘挹婁人들이 穴居生活을 하면서 칙간(溷)을 그 가운데 만들고 그 주위에서 生活하였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대단히 不潔하였다’라고 記錄하였고, 뒤이어『魏書』勿吉國傳과『隋書』靺鞨傳에서 ‘그 風習에 사람의 오줌으로써 손과 얼굴을 씻는데 오랑캐 가운데서 가장 不潔하다’고 기록하였으므로, 前後 記事로 몸에 묻은 때와 脂肪을 除去하기 위한 특수한 方法으로서 오줌으로 손과 얼굴을 씻었다고 主張하였다(『古代東北 アジア史硏究』pp.268~288).
그러나『三國志』와『後漢書』「東夷傳」挹婁條를 보면 ‘挹婁人들은 돼지 기르기를 좋아하여 그 고기를 먹고 그 껍질로써 옷을 만들어 입으며, 돼지기름을 가지고 몸에 발라서 그 두께가 몇겹이 되게하여 추위와 바람을 막았다’고 하는데, 이것으로 보아 손과 얼굴이 튼 것을 치료하기 위하여 오줌으로 씻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다시 말하면 오줌의 藥理的인 性質을 利用하여 손과 얼굴이 튼 것을 치료하였던 것 같다.
이러한 人尿를 사용하는 風習은 3세기에서 8세기까지 沿海州 地方에서 黑龍江·松花江 下流에 이르기까지 挹婁·勿吉·黑水靺鞨의 諸種族에게 남아 있었으나, 그 뒤에는 Tungus系의 諸種族에게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明代에 편찬된『遼東志』「外夷志」에 의하면,
乞列迷에는 4種類가 있는데, 性質이 간악하고 草舍에서 居住하며 물고기를 잡아서 먹고 산다. 빗질도 하지 않고 목욕도 하지 않으며, 直筒衣를 입는데 여름에는 魚皮를 着用하고 겨울에는 狗皮를 使用한다. 비린내가 나고 더러워서 가까이 할 수가 없는데 오줌으로써 세수한다.
라고 하여 乞列迷 種族이 14~15세기까지 이러한 人尿의 風習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乞列迷는 오늘날 그 種族이 거의 사라진 古아시아族 系統에 해당하는 Gilyak族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人尿의 風習은 古아시아族 系統의 諸種族이 갖는 가장 特徵的인 風習의 하나로서 毒矢를 使用하는 風習과 아울러 勿吉·挹婁·靺鞨의 重要한 特徵이었다.
<참조>
『魏書』勿吉傳 註 19)
俗以人溺洗手面
오줌을 사용하여 身體를 세척하는 습관은 3~8세기에 걸쳐 挹婁·勿吉·黑水靺鞨의 여러 종족 사이에 널리 유행하였다. 人尿를 사용하는 풍속은 오늘날도 Gilyak族과 관계가 깊은 北極 沿岸의 住民들 사이에서 널리 행해지고 있다.
『三國志』및『後漢書』挹婁傳의 기록에 의하면, 挹婁人들은 불결하여 칙간(溷)을 주거지 중앙에 만들고 사람들이 그 주위를 빙둘러 산다고 하였다. 이로 보아 挹婁人이나 勿吉人들은 칙간(溷)의 人尿를 사용하여 세수를 하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칙간은 곧 人尿를 담그는 요통을 말하는데, 그 가운데 항상 인뇨를 채워놓고 있다.
오늘날 Green Land에 사는 에스키모인들도 공동의 세수대야 가운데 소변을 보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세수대야는 상당히 큰 그릇으로서 挹婁·勿吉人들은 오줌을 사용하여 손을 씻었던 것이다. 元·明代의 Gilyak人들도 이와 같은 생활을 하였다고 하는데, 人尿를 사용하던 풍속은 地下式 穴居生活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인체에서 나오는 오줌에 어떤 精靈이 있다고 생각하는 미개 사회에서는 오줌을 단순한 물질 이상으로 생각하여 이것을 가지고 人體를 洗滌하거나 혹은 容器, 衣服 경우에 따라서는 病者의 衣服을 세척할 때 사용하였던 것이다. (三上次男, 『古代東北アジア史硏究』pp.300~301)
≪參考文獻≫
『後漢書』卷85「東夷列傳」挹婁條.
『三國志』卷30 「東夷傳」挹婁條.
三上次男,『古代東北アジア史硏究』1966.
≪參考文獻≫
『後漢書』卷85「東夷列傳」挹婁條.
『三國志』卷30「東夷傳」挹婁條.
『魏書』卷100「列傳」勿吉國條.
『遼東志』卷9「外夷志」
三上次男,『古代東北アジア史硏究』1966.
註 207
其妻外婬 …… 由是姦婬之事終不發揚 : 靺鞨의 社會는 狩獵·漁撈生活과 原始農耕生活을 병행하고 있었는데, 女子의 貞節을 중요하게 생각지 않던 社會였던 것 같다. 오늘날도 黑龍江과 松花江 下流에 살고 있는 Tungus系의 諸種族들의 社會에서는 남편이 사냥을 나가있는 동안에 아내가 외간 남자와 姦婬하는 것을 거의 묵인하고 있으며 또 結婚하기 전의 처녀들의 성관계는 상당히 자유스럽다고 한다(Shirokogoroff,『Social Organization of the Northern Tungus』pp.206~210).
이로 보아 당시 靺鞨人의 社會는 비록 族外婚에 의하여 夫婦關係가 成立하더라도 性的 拘束力은 매우 약한 對偶婚 段階에 머물러 있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姦婬에 대한 일은 夫婦 이외의 제3者가 관여하지 않는한 묵인 내지 용인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外婬한 아내를 그 남편이 죽였다고 하는 것은 家父長的 性格이 강한 일면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참조>
『晉書』肅愼傳 註 25)
婦貞而女淫
결혼하기 전에 있는 未婚의 여자는 남자와 자유롭게 교제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性的으로도 문란하였던 것 같다. 그후 결혼을 하면 처녀시절에 비하여 비교적 정숙하였던 것 같으나, 남편에 대하여 절대적인 貞操를 지키는 中國式의 夫婦倫理 관계는 확립되지 못하였던 것 같다.
『北史』勿吉傳에서 ‘其妻外淫 人有告其夫 夫輒殺妻而後悔 必殺告者 由是姦淫事終不發’이라 하고, 『隋書』靺鞨傳에서도 ‘其俗淫而妬 其妻外淫 人有告其夫者 夫輒殺妻 殺而後悔 必殺告者 由是姦淫之事終不發揚’이라 한 데에서 비록 결혼한 여자라도 貞操를 지키지 않고 외간 남자와 간통을 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또 이것을 사회 문제로 삼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凌純聲은 Goldi人의 性關係는 매우 자유스러워 혼인을 하기 이전의 여자는 이른바 貞操라는 것이 없으며, 혼인을 한 이후에도 남편이 집안에 있지 않으면 자유롭게 남과 性關係하는 등 淫亂한 風俗이 매우 심한데 그 연유는 民族이 도덕적으로 墮落한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生活方式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하였다. 즉, 漁獵生活을 하는 사회에서 남자는 1년 중에 3분의 2이상을 집을 비우고 外地에 나가서 漁獵하는지라, 단지 富貴한 집안의 사람이나 늙은 남자만이 집안에 있어 여자는 남편이 외지에 나가 있는 동안 공개적으로 남과 同居하는데, 남자는 돌아와서 이 사실을 알고도 깊이 캐어묻지 않는다고 하였다.(『松花江下游的赫哲族』p.216) 또한 그는 Goldi人의 음란한 풍속은 온돌과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고 하였다. 즉, 대다수 사람들의 집은 內外의 區別이 없어, 온 식구가 단지 좌우로 나누어 각각 온돌의 한쪽 끝을 차지하여 눕는데, 그 중간에는 하나의 온돌장막이 있어 이것으로 막혀 있을 뿐 어떠한 칸막이도 없고, 게다가 온돌을 뜨겁게 하면 육체적으로 강력한 온도의 暖氣를 받아 性的 衝動이 쉽게 일어나기 때문에 父女, 母子, 시아버지와 며느리, 삼촌과 형수, 형과 누이 사이에 倫常을 어지럽히는 일이 쉽게 발생한다고 하면서 온돌은 곧 음란한 풍속을 발생케 하는 媒介體가 된다고 하였다.(앞의 책, p.216)
滿洲의 馴鹿 Tungus사이에서는 新婦의 貞操가 요구되지 않으므로, 성숙한 나이에 이른 처녀들이 외간 남자와 性關係를 가지는 것은 결혼하는데 아무런 제약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처녀가 나이 20세를 넘어 貞操를 지키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이러한 관계는 비교적 비밀의 성격을 띄기 때문에 처녀가 관계한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지는 않고, 만약 처녀가 임신을 하게 되더라도 그 여자의 가치가 저하되기는커녕 도리어 新婦로서의 가치를 인정받는데, 그 이유는 그 여자가 多産할 수 있는 건강한 신체를 가졌음이 증명되어지기 때문이다. Udehe(兀狄哈)族 사이에서는 처녀의 임신이 그 여자에게 임신케 한 남자와 그 여자를 결혼하도록 강요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사용되어질 수도 있다. 滿洲의 馴鹿 Tungus 사이에서는 처녀의 임신은 부끄러운 사실로 간주되지만 그 처녀는 언제나 용서를 받게 되는데, 그 이유는 이들이 일정한 나이가 든 이후의 性關係를 하나의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滿洲人에게 있어 Birarčen族과 Kumarčen族 사이에는 자유로운 性的 生活이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으나, 이러한 Tungus 사이에서의 처녀의 지위는 馴鹿 Tungus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Khingan Tungus 사이에서는 처녀가 15·6세가 된 뒤에는 자유로운 性關係를 가지는 것을 허락하고 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여러명의 戀人을 두고 하루밤 사이에 여러 남자를 잇달아 받아들일 정도로 심한 경우도 있다. 이와 같은 性關係는 Goldi族과 Udehe族 사이에는 보통이지만 滿洲族 사이에는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Shirokogoroff, 『Social Organization of the Northern Tungus』pp.208~209)
이로 보아 오늘날 中國의 영향을 받은 南方의 滿洲族을 제외한 대다수의 Tungus에서 未婚의 處女는 性的 生活이 몹시 문란한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古代 肅愼의 처녀들이 몹시 음란하였다는 기록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參考文獻≫
『北史』卷94「列傳」勿吉條.
『隋書』卷81 靺鞨條.
凌純聲, 『松花江下游的赫哲族』1935.
Shirokogoroff, 『Social Organization of the Northern Tungus』1929.
≪參考文獻≫
S. M. Shirokogoroff,『Social Organization of the Northern Tungus』1929.
註 208
角弓 : 뿔로 만든 활을 말하는데, 靺鞨人들은 짐승의 뿔을 녹여서 활을 만든 것 같다. 明代의 女眞人들도 이러한 遺制를 본받았는데, 점차 狩獵生活에서 農耕生活로 移行하여 사냥해서 얻은 짐승들의 뿔의 수획량이 줄어 들자, 明을 통하여 水牛角을 貿易하여 활을 만들었다고 한다.『朝鮮王朝實錄』「叡宗實錄」을 보면,
野人들이 中國의 牛角과 本土의 牛角으로써 활을 만드는데, 그 體制가 우리나라 활과 비교하여 조금 크다. 줄은 가죽을 使用하며, 화살촉은 明의 鐵을 貿易하여 스스로 만드는데, 그 제도가 우리나라의 西甫子箭과 같다.
고 하고 있어 明代 女眞社會에서 사용하던 활은 牛角으로 만들었던 角弓이었는데 화살줄은 가죽을 使用하였음을 알 수 있다 明代에는 女眞族이 明의 鐵을 貿易하여 鐵鏃을 썼으나, 靺鞨族은 그 대신에 石鏃을 使用하였던 것이다. 角弓의 길이가 3尺이었는데, 朝鮮의 활과 비교하여 길이가 길었던 것 같으며, 화살의 길이도 1尺 2寸인 것을 보면, 古代의『三國志』·『後漢書』등에 나오는 楛矢의 길이 1尺 8寸보다는 짧았던 것 같다.
<참조>
『晉書』肅愼傳 註 32)
檀弓
肅愼이 사용한 활을 말하는데 그 크기가 4尺 가까이 되는 큰 활이었기 때문에 아주 强弓이었다. 張守節의 『史記正義』를 보면, ‘肅愼國記云 肅愼 其地在夫餘國東北河(可)六十日行 其弓四尺强勁弩 射四百步 今之靺鞈(鞨)國方有此矢’라 하여 그 활이 강하고 굳세어 4百步를 쏘는데, 靺鞨族이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晋書』에서는 활의 길이가 3尺 5寸이라고 하였으나, 『三國志』挹婁傳에서는 ‘그 활의 길이는 4寸이고 힘세기가 弩와 같다’고 하였다. 또한 『山海經』肅愼氏之國條에서도 보면 ‘其人皆工射 弓長四尺 勁彊 箭以楛爲之 長尺五寸’이라 하여 활의 길이가 4寸이고 힘이 세다고 하였다. 이로 보아 檀弓은 큰 활을 가리키는 말임에 틀림없다.
『隋書』靺鞨傳과 『北史』勿吉傳에서 檀弓은 角弓 3尺으로 바뀌는데, 이는 肅愼·挹婁 시대에 사용하던 檀弓이 勿吉·靺鞨 시대에 角弓으로 발달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參考文獻≫
『史記正議』
『三國志』卷30「東夷傳」挹婁條.
『隋書』卷81「東夷列傳」靺鞨條.
『北史』卷94「列傳」勿吉國條.
『山海經』卷17「大荒北經」肅愼氏之國條, 郭璞 注.
≪參考文獻≫
『朝鮮王朝實錄』「叡宗實錄」卷2 卽位年 11月 癸亥條.
『後漢書』卷85「東夷列傳」挹婁條.
『三國志』卷30「東夷傳」挹婁條.
註 209
常以七八月造毒藥 傅矢以射禽獸 中者立死 : 靺鞨人이 사냥을 할 때 毒矢를 사용한 것은 古代의 肅愼·挹婁·勿吉族과 마찬가지였다. 毒矢를 사용하였다는 記事는『三國志』挹婁傳의 記事가 가장 오래된 史類이다. 오늘날 毒矢를 사용하는 방법은 北方의 여러 民族에게 일반화되고 있는데, 古Asia族에 속하는 Ainu族·Kamchadal人·Eskimo人·Aleuts族·Gilyak族 등이 毒矢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毒矢가 발달하였던 원인은 사냥을 위주로 하는 狩獵生活을 하였던 데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참조>
『魏書』勿吉傳 註 20)
造毒藥傳箭鏃
勿吉人이 사냥을 할 때 毒失를 사용한 것은 古代의 肅愼·挹婁族과 마찬가지였다. 오늘날 毒失을 사용하는 방법은 북방 지역의 여러 민족에게 일반화되고 있으나, 『三國志』挹婁傳의 기사가 가장 오래된 史料인데, 挹婁는 원래 森林地域에서 사냥을 위주로 하는 수렵생활을 하였으므로 이러한 毒失가 발달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勿吉이 毒失를 사용한 것은 挹婁人이 毒失를 사용하던 풍습을 그대로 이어받았던 것이다. 勿吉人이 石鏃과 毒失를 사용하고 또 人尿를 사용한 풍습은 모두 古代 肅愼·挹婁와 연관성을 갖기 때문에 勿吉族은 고대의 肅愼·挹婁의 후예일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毒失의 사용으로 보아 挹婁와 勿吉이 民族的·文化的으로 불가분의 관계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毒失는『本草綱目』에 의하면 毒草類 가운데 烏頭라는 풀에서 줄기의 즙(汁)을 짜서 햇빛에 말려 사냥할 때에 이것을 화살에 발라서 쏘는데, 사람이 맞으면 모두 죽는다고 한다. 鳥頭는 滿洲와 沿海州 일대에 많이 자라는데, 勿吉人들은 이것을 사용하여 독시를 만들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三上次男, 『古代東北アジア史硏究』p.253)
오늘날 古Asia族에 속하는 Ainu族, Kamchadal人, Eskimo人, Aleuts族, Gilyak族 등이 毒失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이로 보아 挹婁·勿吉族과 이러한 沿海州 일대에 흩어져 사는 古Asia族과 어떤 관계가 있으리라 추측된다.
≪參考文獻≫
『三國志』卷30「東夷傳」挹婁條.
『本草綱目』卷17下.
三上次男,『古代東北アジア史硏究』1966.
주제분류
문화>풍속·놀이>풍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