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蓋蘇文이라는 者가 있는데, 혹은 蓋金이라고도 한다.
○ 蓋蘇文이라는 者가 있는데, 혹은 蓋金註 216이라고도 한다. 姓은 泉氏註 217이며, 자신이 물 속에서 태어 났다고 하여 사람을 현혹시켰다. 성질이 잔인하고 난폭하다. 아버지는 東部註 218大人註 219 大對盧註 220이다. [그가] 죽자, 蓋蘇文이 位를 이어 받아야 했지만, 나라 사람들이 미워하여서 이어 받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머리를 조아려 많은 사람들에게 사죄하고, 攝職을 청하면서 [시켜보아] 합당하지 않으면 그 때는 폐하여도 후회가 없다고 하였다. 뭇사람들이 불쌍히 여겨서 드디어 위를 잇게 하였다. 그러나 너무 난폭하고 나쁜 짓을 하므로, 여러 大臣이 建武와 상의하여 죽이기로 하였다. 蓋蘇文이 [이를] 알아차리고 諸部의 [兵을] 불러 모아 거짓으로 크게 閱兵을 한다고 말하고, 잔치를 베풀어 大臣들의 臨席을 청하였다. 손님이 이르자, 다 죽여버리니 무려 백여명이나 되었다. 또 王宮으로 달려 들어가 建武를 죽여서 시체를 찢어 도랑에 던져 버렸다. 이어 建武 아우의 아들인 藏註 221을 세워 王으로 삼고, 자신은 莫離支註 222가 되어 國政을 마음대로 하였다. [莫離支란] 唐의 兵部尙書 中書令에 해당하는 직위라고 한다.
용모가 걸출하고 준수하며, 수염이 아름다웠다. 冠服은 모두 금으로 장식하였다. 다섯자루의 칼을 차고 다니는데, 주위 사람들이 감히 쳐다볼 수 없었다. 貴人을 시켜 땅에 엎드리게 한 다음에 밟고 말을 타며, 出入할 때는 군사를 벌려 놓고, 큰 소리로 [行人을] 엄격히 금하므로, 길가는 사람들이 두려워 도망하여 坑谷에 뛰어들기까지 한다.
註) 216
『三國遺事』 「興法」寶藏奉老 普德移庵條에는 ‘自稱姓蓋 名金 位至蘇文’이라 하였는데, 단 ‘蘇文’을 官職名으로 본 것은 撰者의 오류이다.
<참조>
『舊唐書』高句麗傳 註 63)
蓋蘇文
『新唐書』高句麗傳에 ‘有蓋蘇文者 或號蓋金 姓泉氏 自云生水中以惑衆’이라 하여 姓은 泉氏로 一名 蓋金이라 하였다 한편『三國史記』文武王 6年(666) 및 10年(670)條에 보이는 高句麗 大臣 淵淨土가 蘇文의 아우임은 보면 泉氏는 본래 淵氏였던 것이 후에 唐 高祖 李淵의 諱를 피하여 蘇文의 子 男生이 投唐한 후 泉으로 개칭하였다는 說이 通說이다(『東史綱目』 「考異」). 그리고『日本書紀』皇極天皇 元年(642)條에 高句麗 使者의 말 가운데 蘇文을 ‘伊梨柯須彌’라 하였는데, 李丙燾는 伊梨는 泉 또는 淵의 方訓인 ‘於乙(얼)’의 傳音이고, 柯는 蓋에 해당한 것으로 邊의 語인 ‘가(혹은 갓)’·蘇文은 ‘쇰(金)’의 뜻으로 해석하여 淵(泉)蓋蘇文을 ‘井邊쇠’란 뜻으로 보고, 淵(泉)蓋는 본래는 姓氏요 蘇文은 이름인데 姓氏를 中國式으로 略하여 泉 또는 淵 또는 蓋라고 하였다고 추측하였다( 「韓國古代社會의 井泉信仰」pp.785~786). 蓋蘇支·蓋金·淵淨土·泉男生이 모두 그러한 例이며 또 蓋金을『三國遺事』寶藏奉老 普德移庵條에 ‘自稱姓蓋名金 位至蘇文 乃侍中職也’라 하여 姓을 蓋라 한 것도 그러한 例이다. 단, 위의 기록 중 蘇文을 관직명으로 본 것은 오류이다. 한편 「泉南生墓誌銘」에 ‘原夫遠系 本出於泉 旣託神以潰祉 遂因生以命族’이라 한 것을 보면, 그 先代로부터 井泉信仰에 의해서 井泉을 一種의 토템 혹은 姓氏의 기호로 삼은 것이라는 說도 있다(李丙燾, 앞의 논문, pp.781~795).
≪參考文獻≫
『三國遺事』卷3 「興法」寶藏奉老 普德移庵條.
『新唐書』卷220 「東夷列傳」高句麗條.
『日本書紀』卷24 皇極天皇 元年條.
安鼎福, 『東史綱目』 「考異」泉蓋蘇文條.
李丙燾, 「韓國古代社會의 井泉信仰」『韓國古代史硏究』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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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217
蓋蘇文의 長子인 男生의 「泉男生墓誌銘」에도 ‘公姓泉 … (中略) … 原夫遠系 本出於泉 旣託神以潰社 遂因生 以命族’이라 하였다.
<참조>
『舊唐書』高句麗傳 註 63)
蓋蘇文
『新唐書』高句麗傳에 ‘有蓋蘇文者 或號蓋金 姓泉氏 自云生水中以惑衆’이라 하여 姓은 泉氏로 一名 蓋金이라 하였다 한편『三國史記』文武王 6年(666) 및 10年(670)條에 보이는 高句麗 大臣 淵淨土가 蘇文의 아우임은 보면 泉氏는 본래 淵氏였던 것이 후에 唐 高祖 李淵의 諱를 피하여 蘇文의 子 男生이 投唐한 후 泉으로 개칭하였다는 說이 通說이다(『東史綱目』 「考異」). 그리고『日本書紀』皇極天皇 元年(642)條에 高句麗 使者의 말 가운데 蘇文을 ‘伊梨柯須彌’라 하였는데, 李丙燾는 伊梨는 泉 또는 淵의 方訓인 ‘於乙(얼)’의 傳音이고, 柯는 蓋에 해당한 것으로 邊의 語인 ‘가(혹은 갓)’·蘇文은 ‘쇰(金)’의 뜻으로 해석하여 淵(泉)蓋蘇文을 ‘井邊쇠’란 뜻으로 보고, 淵(泉)蓋는 본래는 姓氏요 蘇文은 이름인데 姓氏를 中國式으로 略하여 泉 또는 淵 또는 蓋라고 하였다고 추측하였다( 「韓國古代社會의 井泉信仰」pp.785~786). 蓋蘇支·蓋金·淵淨土·泉男生이 모두 그러한 例이며 또 蓋金을『三國遺事』寶藏奉老 普德移庵條에 ‘自稱姓蓋名金 位至蘇文 乃侍中職也’라 하여 姓을 蓋라 한 것도 그러한 例이다. 단, 위의 기록 중 蘇文을 관직명으로 본 것은 오류이다. 한편 「泉南生墓誌銘」에 ‘原夫遠系 本出於泉 旣託神以潰祉 遂因生以命族’이라 한 것을 보면, 그 先代로부터 井泉信仰에 의해서 井泉을 一種의 토템 혹은 姓氏의 기호로 삼은 것이라는 說도 있다(李丙燾, 앞의 논문, pp.781~795).
≪參考文獻≫
『三國遺事』卷3 「興法」寶藏奉老 普德移庵條.
『新唐書』卷220 「東夷列傳」高句麗條.
『日本書紀』卷24 皇極天皇 元年條.
安鼎福, 『東史綱目』 「考異」泉蓋蘇文條.
李丙燾, 「韓國古代社會의 井泉信仰」『韓國古代史硏究』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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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218
『舊唐書』高句麗傳과『三國史記』榮留王 25年(642)條에는 淵蓋蘇文이 ‘西部’ 출신이라 하였다.
<참조>
『舊唐書』高句麗傳 註 61)
西部
『三國史記』榮留王 25年條에도 ‘西部’로 되어 있으나, 『三國史記』 「蓋蘇文列傳」및『新唐書』高句麗傳과『資治通鑑』에는 ‘東部’로 되거 있다.『翰苑』所引『魏略』에
其國大有五族 …… 三曰東部 卽順奴部 一名左部 一名上部 一名靑部 …… 五曰西部 卽消奴部也 一名右部
라 하여 東部·西部의 기록이 보이는데, 이 東部·西部 등의 五部가 3세기 무렵의 5族과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대립되어 있다. 今西龍은 5族이라고 불린 部族名으로부터 王都內의 행정구역인 五部(貴人部)로의 移名이라 보았고( 「高句麗五族五部考」pp.407~445), 여기에 대하여 池內宏은 지방에도 五部의 행정구역 이 존재하였음을 인정하였다( 「高句麗の五族及び五部」pp.325~387). 또 三品彰英은 5族의 部族說을 보강하면서 5族에서 5部로의 변화를 원시사회적인 것에서 古代 王權國家로의 전환이라고 이해하였다( 「高句麗の五族について」pp.1~57). 더욱이 최근에는 山尾幸久가 후대(6~7세기)의 5部의 기록을 氏族團體·공동단체로서의 고을이었다고 생각하고, 都內·都外는 5部로서 5구분되어 褥薩에 의하여 각각 통솔되는 軍區 조직이었다고 주장하였다( 「朝鮮三國の軍區組織」). 이렇게 볼 때 5部가 단순히 사회 조직이 아니라는 點은 대개 일치하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적어도 王都에 5部가 있고, 이것이 王權을 지탱하는 지배 계층의 政治的 軍事的인 독특한 결집체라고 생각하는 點은 공통적이다.
그리고 5族에서 5部로의 전환에 대해 살펴보면, 東·西·南·北·中의 方位로서 표시된 5部名이 나타나는 시기는 故國川王代부터이다. 아울러 이때부터 族名이 적게 보이고 있는 바, 이 시기가 族制的 性格의 5族이 행정구획적 성격을 띠는 5部로 개편되는 과도기로 보는 주장과(盧泰敦, 「三國時代의 ‘部’에 관한 硏究」) 대개 4~5세기 무렵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武田幸男, 「朝鮮の國家形成と三國」).
≪參考文獻≫
『三國史記』卷20 「高句麗本紀」8 榮留王 25年條; 卷49 「蓋蘇文列傳」
『新唐書』卷220 「東夷列傳」高句麗條.
『資治通鑑』卷196 「唐紀」12 太宗 貞觀 16年條.
『翰苑』高麗條 所引『魏略』
盧泰敦, 「三國時代의 ‘部’에 관한 硏究-成立과 構造를 中心으로-」『韓國史論』2, 1975, 서울大學校 國史學科.
今西龍, 「高句麗五族五部考」『史林』6卷 3號, 1921(『朝鮮古史の硏究』1937, 近澤書店)
池內宏, 「高句麗の五族及び五部」『東洋學報』16卷 1號, 1926(『滿鮮史硏究』上世篇, 1951, 祖國社)
三品彰英, 「高句麗の五族について」『朝鮮學報』6輯. 1954.
失澤利彦, 「高句麗の五部について」『崎玉大學紀要』3, 1954.
山尾幸久, 「朝鮮三國の軍區組織」『古代朝鮮と日本』1974, 龍溪書舍.
武田幸男, 「朝鮮の國家形成と三國」『新朝鮮史入門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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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219
大人은 高句麗를 형성한 5部族의 후예로서 초기에는 大加로 불리었고, 古代國家 형성 이후에는 大人으로 불리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참조>
『舊唐書』高句麗傳 註 62)
大人
大人은 高句麗 聯盟王國을 형성한 5部族 族長의 후예들이었을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初期에는 그들을 大加라고 부르고, 古代國家형성 이후에는 흔히 大人이라 불렀던 것 같다. 高句麗가 聯盟國家的인 性格을 띠고 있던 초기에는 各部의 우두머리인 大加들은 각기 王과 마찬가지로 使者 이하 皀衣·先人의 家臣을 거느리고 있는 政治的 實權의 소유자였을 뿐만 아니라 村落의 農民들로부터 豪民을 통하여 거둬들인 財物이 그들에게 우선적으로 분배되었을 것임이 확실하여 경제적인 富의 소유자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王權이 강화되면서 大加는 더 이상 城邑國家의 지배자일 수는 없었다. 이들은 國王의 영도력을 인정하는 조건 밑에서 새로이 部라고 하는 행정구역으로 편제되어 百姓을 지배하는 신분으로 변하였다. 즉, 이들은 중앙의 귀족적 통치세력으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大加라는 명칭은 소멸되고 大人이라 불리워졌던 것 같다(盧泰敦, 「三國時代의 '部'에 관한 硏究」).
≪參考文獻≫
盧泰敦, 「三國時代의 ‘部’에 관한 硏究」『韓國史論』2,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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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220
『三國史記』 「蓋蘇文列傳」에도 蘇文의 父의 職이 大對盧라 하였으나, 「泉男生墓誌銘」에는 蘇文의 父는 太祚, 祖는 子遊로서 대대로 莫離支의 職에 있어 國權을 전단하였다고 한다.
<참조>
『舊唐書』高句麗傳 註 13)
大對盧
『翰苑』高麗條 所引『高麗記』에는 ‘共一曰吐捽 比一品 舊名大對慮’라 하였으며, 『新唐書』高句麗傳에도 ‘大對慮 或曰吐捽’이라 하였으니, 大對盧의 別稱이 ‘吐捽’임을 알 수 있다.
『三國志』高句麗傳에는 對盧가 보이는데, 아마도 族長的 身分層에 속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그 후 國家體制 정비기에 이르러 王權이 확립되었을 때에는 前日의 部族聯盟長的 기능을 최고 族長 身分層에서 나온 大對盧가 맡아 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本文 중에 보이는 任期 3年의 選擧에 의한 交代法도 前日의 部族聯盟長的 選擧 遺風이라고 보여진다(金哲埈, 「高句麗·新羅의 官階組織의 成立過程」pp.115~156).
≪參考文獻≫
『新唐書』卷220 「東夷列傳」高句麗條.
『翰苑』高麗條 所引『高麗記』
金哲埈, 「高句麗·新羅의 官階組織의 成立過程」『李丙燾博士華甲記念史學論叢』1956(『韓國古代社會硏究』1975, 知識産業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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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221
高句麗 제28대 寶藏王으로 재위기간은 642~668年이다. 『三國史記』 「高句麗本紀」寶臧王條에는 ‘王諱藏 或云寶藏’으로 되어 있다.
<참조>
『舊唐書』高句麗傳 註 66)

高句麗 제28대 寶藏王을 말한다.『三國史記』 「高句麗本紀」寶臧王條에 ‘王諱臧或云寶臧 以失國故 無諡 建武王弟大陽王之子也’라 하여 ‘臧’으로 되어 있으나, 『三國遺事』·『舊唐書』·『新唐書』에는 모두 ‘藏’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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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222
「泉男生墓誌銘」에는 淵蓋蘇文이 ‘太大對盧’를 역임하였다고 하였다.
<참조>
『舊唐書』高句麗傳 註 67)
莫難支
「泉男生墓誌銘」에 의하면 蘇文이 쿠테타를 일으켜 莫難支가 되기 이전에 그의 祖·父가 모두 莫離支를 역임한 것으로 되어 있는 바 末松保和는 莫離支를 大人·大對盧 또는 大臣이라 稱하는 官職과 同一官職의 異稱이라 보았다( 「新羅建國考」pp.155~162). 또 위 「泉男生墓誌銘」에는 淵蓋蘇文이 太大對盧를 역임한 것으로 되어 있어 이를 太莫離支로 보고, 淸田正幸은 淵蓋蘇文이 맡은 莫難支는 곧 太莫離支라 하였다. 그에 의하면 莫離支와 太莫離支와의 직무상의 相異點은 莫離支가 國事만을 총괄하는 관직임에 반하여 太莫離支는 軍事·國事를 모두 총괄하는 관직이라고 하였다( 「高句麗莫離支考」). 또 그에 의하면 莫離支는 數名 또는 그 이상이 동시에 존재하지만 太莫離支는 1人으로서 강대한 권한을 보유하고 그 권력은 종신 보유하며, 그 취임 방식에 있어서도 세습이 원칙이라 하였다. 莫離支가 史料上으로 그 존재가 확인되는 것은 6세기 후반부터이나, 『周書』· 「泉男生莫離支誌銘」· 「高慈墓誌銘」등에 의해서 그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으니, 결국은 6세기 후반 또는 그 이전에 莫離支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參考文獻≫
末松保和, 「新羅建國考」『新羅史の諸問題』1954 東洋文庫.
淸田正幸, 「高句麗莫離支考」『旗田巍古稀紀念朝鮮歷史論集』上卷,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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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http://db.history.go.kr/id/sa_001_0030_0020 (accessed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http://db.history.go.kr/id/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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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sa_001_0030_0020,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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