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韓國民主黨의 조직구조와 그 특징
한국민주당은 미군이 상륙한 직후인 1945년 9월 16일 종로구 경운동 천도교 기념회관에서 결성되었다. 한민당은 하나의 조직적인 구심이나 사상, 또는 정치노선을 가지고 조직된 정당이 아니라 여러 세력이 모여 형성된 정당이었다.
당시 한민당을 구성했던 주요 세력을 보면 다음과 같다.
한국국민당-張德秀, 許政, 白南薰, 尹致暎, 尹潽善
조선민족당-元世勳 金炳魯, 白寬洙, 趙炳玉, 咸尙勳, 金若水, 李仁
국민대회준비회-宋鎭禹, 金性洙, 徐相日, 金俊淵, 張澤相, 薛義植
한민당은 대의원으로 300명을 선출하고 당의 영수로서 李承晚, 金九, 李始榮, 文昌範, 徐載弼, 權東鎭, 吳世昌 등 7인을 추대했다. 그리고 9월 21일에는 당무를 맡아 볼 총무로서 9명을 선출하였는데, 9명을 전국 각도의 대표 형식으로 선임하였다. 출신도별로 보면 송진우(전라남도), 백관수(전라북도), 허정(경상남도), 서상일(경상북도), 조병옥(충청도), 김도연(경기도), 김동원(평안도), 원세훈(함경도), 백남훈(황해도) 등이었다. 출신 당 파별로 보면 국민대회준비회 측의 송진우, 서상일, 김동원, 한국국민당 측의 허정, 김도연, 백남훈, 조선민족당 측의 백관수, 조병옥, 원세훈 등으로 한민당 결성에 참여한 각 파벌에 골고루 안배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당 영수를 뽑기는 했지만, 이승만, 김구, 이시영, 서재필 등이 아직 귀국하지 않은 상태였고 나머지 인사들은 정치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수석총무로 선임되었던 송진우는 실질적인 당의 책임자였다.
9월 22일에는 중앙집행위원회를 개최하여 11개 부서장과 중앙감찰위원 30명을 선출하였다. 11개 부서는 당무부, 외무부, 조직부, 재무부, 선전부, 정보부, 노동부, 문교부, 후생부, 조사부, 연락부 등이었으며, 후에 지방부, 청년부, 훈련부 등 3개 부서가 추가되었다.
한민당의 지방지부 조직은 쉽지 않았다. 당시는 친일파 민족반역자의 처단을 위한 사회적인 목소리가 높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친일파 정당’이라는 비난을 받았던 한민당이 각지역에 광범위한 지부를 만들기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각 지역에는 해방 직후부터 인민위원회가 결성되어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한민당을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있었던 미군정이 아직까지 전국적으로 행정권과 물리력을 장악한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한민당으로서는 당 지부를 설치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한민당이 지방지부를 설치하기 시작한 것은 미군정이 지방행정을 어느 정도 장악하기 시작한 1945년 말에 이르러서였다.
그나마 가장 먼저 도당을 결성한 곳은 전라남도 지역이었다. 전라남도 지역은 한반도에서 가장 광활한 곡창지대였기 때문에 소작인들이 많았고 농지소유구조의 불균형이 극심했기 때문에 일제시대부터 지주에 반대하는 소작쟁의가 활발한 지역이었다. 반면에 이러한 현상은 거대한 농지를 소유한 거대 지주들이 이 지역에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며, 이들을 중심으로 보수적인 풍토가 형성되어 있었다. 따라서 다른 지역에 비해 일찍 한민당 지부가 결성될 수 있었다. 1945년 11월 초 광주에서 한민당 지부가 결성되었으며, 이후 金良秀(순천), 서민호(별교) 등을 중심으로 하여 각 지역에 지부를 설치하였다.
1945년 12월에 이르러 부산시당과 서울지부가 결성되었지만, 한민당은 각 지방에 당세를 확장할 수 없었다. 그러나 미소공위가 결렬되고 좌우합작위원회가 활동하면서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선거가 눈 앞에 닥쳐오자 한민당으로서는 다급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1946년 5월 27일 한민당은 당의 간부들로 지방유세대를 조직하여 남한 각지에 파견하였다. 이는 지방지부를 만들기 위한 공식적인 첫 작업이었다.
이후 미군정 지방 행정기구의 완성과 더불어 한민당의 도당지부의 결성이 본격화되었다. 이후 1946년 6월 16일 경남도당, 동년 7월 31일 충북도당, 동년 10월 15일 전북도당, 동년 11월 2일 경북도당 등이 결성되었다.
1946년 말에는 53개의 당지부가 결성되었고, 결성 중에 있는 지부가 27개였으며, 창당시 5만명이라고 신고한 당원수는 23만명으로 증가되었다. 그러나 당시 대체적인 분위기는 “한민당에 가입해 주는 것만 해도 당지도부로서는 고마워했던” 분위기였기 때문에 실제당원 수보다는 훨씬 과장된 것이었다.
이상과 같은 한민당의 초기 조직의 특징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우선 구심점을 가질 수 없었다는 점이었다. 이승만이나 임정을 봉대하지 않고서 한민당은 당 자체로서 정치활동의 명분을 마련할 수 없었다. 한민당은 이승만이 귀국하자 그가 “경제력을 가진 친척이 전혀 없다는 점”에 유의, 이승만에게 숙소를 마련해주고 매달 15만원씩 정치자금을 지원하는 등 적극 후원했고 한민당의 총재로서 취임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자신의 조직인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개인적인 야심에만 몰두, 한민당의 총재 취임요청을 거절했다.
한민당은 중경의 임시정부(이하 ‘임정’으로 약칭)에 대해서도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창당과정에서 임정봉대를 당론으로 정했던 한민당은 임정이 귀국하기 전에 이미 환국지사후원회를 조직하여 1차로 900만원을 만들어 이를 정치자금으로 사용하도록 임정에 전달했다. 임정으로서는 친일파들의 정당이라고 비난받고 있었던 한민당으로부터의 후원은 썩 내키는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임정 절대지지를 내걸고 임정을 이용하려는 국내정당의 들러리가 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한민당은 당 활동의 구심점을 마련할 수 없었다. 한민당 자체가 뚜렷한 이념과 기반을 가지고 결성된 정당이라기 보다는 조선공산당을 축으로 하여 결성되었던 조선인민공화국에 반대하는 다양한 정파의 연합에 의해 결성되었기 때문에 강력한 지도자를 영입하지 않고서는 구심점을 만들 수 없었다. 후술하겠지만, 한민당에 모였던 인사들은 급진적인 계급투쟁을 추구하는 공산주의 운동에 반대한다는 점에서만 일치할 뿐 일제시대의 정치활동 경험에서도 일정정도의 편차를 가지고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수석총무를 중심으로 하여 一絲不亂하게 움직이는 것 같았지만, 중요한 정치과정에서 커다란 견해차이가 노정되었다.
이 점이 당시 한민당 조직구조의 두번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한민당은 집단지도체제에서 출발하여 1946년 초 단일지도제로 바뀌었지만, 당수를 중심으로 하는 일원적 지배구조를 가지지 못했다. 1945년 12월 30일 수석 총무였던 송진우가 암살되자 김성수가 새롭게 수석총무로 선출되었다. 그는 한민당의 지도체제를 단일지도체제로 바꾸었지만, 이것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이러한 집단지도체제는 한민당 구성원의 다양성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즉, 개인적 출신배경 뿐만 아니라 일제시대의 활동 경험 또한 다양한 것이었다. 한민당의 구성원들은 하나의 정당에 묶여 있을 따름이었지, 하나의 사상이나 정치노선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