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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제건의 탄생
당 숙종(肅宗) 황제가 왕위에 오르기 전 산천을 두루 유람하고자 하여 명황(明皇, 당 현종) 천보(天寶) 12년 계사년(753) 봄에 바다를 건너 패강(浿江)의 서쪽 나루터에 이르렀다. 바야흐로 썰물이 되어 강가 개펄에 따라온 신하들이 배 안에서 돈을 꺼내어 뿌리고 이에 언덕으로 올라갔다. 뒤에 그 나루터의 이름을 전포(錢浦)라 하였다.
【민지(閔漬)의 『편년강목(編年綱目)』에서 『벽암록(碧巖錄)』 등의 선록(禪錄)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당 선종(宣宗)의 나이 13세 때 목종(穆宗)이 황제였었는데, 그가 장난삼아 황제의 자리에 올라가 신하들에게 읍(揖)하는 시늉을 하니 목종의 아들인 무종(武宗)이 내심 꺼렸다. 무종이 즉위한 후 선종이 궁중에서 해를 입고 숨이 끊어지려다 살아나, 몰래 궁중을 빠져나와 멀리 달아나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며 온갖 풍상을 다 맛보았다. 염관현(鹽官縣)의 안선사(安禪師)가 용안(龍顔)을 속으로 알아보고 대우하는 것이 특히 후해 염관현에 가장 오래 머물렀다. 또 선종은 일찍이 광왕(光王)이 되었는데 광군(光郡)은 곧 양주(楊州)의 속군(屬郡)이고 염관현은 항주(杭州)의 속현(屬縣)인데 모두 황해[東海]에 연접하여 상선이 오가는 지방이었다. 〈선종은〉 화를 당할까 두렵고 완전히 몸을 숨기지 못한 것을 걱정한 까닭에 산수를 유람한다는 핑계로 상선을 따라 바다를 건넜다. 이때는 당의 역사가 찬술되지 않아서 당 황실의 일을 자세하게 알 수 없었다. 다만 숙종 선황제(肅宗 宣皇帝) 때 안록산(安祿山)의 난이 있었음은 들었으나 선종이 난리를 만나 달아났다는 일은 듣지 못하였으니 〈앞의 기록에서는〉 선종 황제를 숙종 선황제라 잘못 적은 것이다.”라고 하였고, 또 세상에 전하기를, “충선왕(忠宣王)이 원(元)에 있을 때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왕과 교유하였던 어떤 사람이 왕에게 일러 말하기를, ‘일찍이 듣기를 왕의 선조께서 당 숙종에게서 나왔다고 하던데 어디에 근거한 바입니까? 숙종은 어려서부터 일찍이 대궐 문을 나오지 않았고 안록산의 난 때 영무(靈武)에서 즉위하였으니 어느 때에 동쪽으로 와서 아들을 두기에 이르렀겠습니까?’라고 하니 왕이 크게 부끄러워하며 답하지 못하였는데 민지가 곁에 있으면서 대답하여 말하기를, ‘그것은 우리나라 역사에 잘못 쓰였을 뿐입니다. 숙종이 아니고 선종입니다.’라고 하였다. 학사가 말하기를 ‘선종이라면 오랫동안 외지에서 고생하였으니 아마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드디어 송악군(松嶽郡)에 이르러 곡령(鵠嶺)에 올라가 남쪽을 바라보고, ‘이 땅은 반드시 도읍이 될 것이다.’라고 하자, 따르던 자가 말하기를, ‘이곳이 팔진선(八眞仙)이 사는 곳입니다.’라고 하였다. 마하갑(摩訶岬)의 양자동(養子洞)에 이르러 보육(寶育)의 집에 묵었는데 〈숙종이〉 두 딸을 보고 기뻐하며 옷이 터진 것을 꿰매 달라고 요청하였다. 보육은 그가 중화(中華)의 귀인임을 알고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과연 술사(術士)의 말에 들어맞는구나.’라고 하고 곧 큰 딸을 시켜 부탁을 들어주도록 하였다. 그러나 겨우 문지방을 넘자마자 코에서 피가 쏟아지는 바람에 진의(辰義)로 대신하였고, 결국 〈진의가〉 잠자리를 같이하게 되었다. 〈숙종이〉 한 달을 머무르다가 【민지(閔漬)의 『편년강목(編年綱目)』에는 혹 1년이라고 하였다.】 임신하였다는 것을 깨닫고 헤어지면서 말하길, ‘나는 대당(大唐)의 귀한 가문 사람[貴姓]이오.’라 하고 활과 화살을 주며 말하길, ‘아들을 낳거든 이것을 주시오.’라고 하였다. 과연 아들을 낳아 작제건(作帝建)이라 불렀다. 뒤에 보육을 추존하여 국조 원덕대왕(國祖 元德大王)이라 하고 그의 딸 진의를 정화왕후(貞和王后)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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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기사명, 자료명. URL (검색날짜)
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http://db.history.go.kr/id/sa_001_0030_0020 (accessed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http://db.history.go.kr/id/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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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기사명, 자료명.(사이트명, URL, ID, 검색날짜)
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sa_001_0030_0020,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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