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건이 태조를 낳다
원창왕후(元昌王后)는 아들 넷을 낳았는데 맏아들을 부르길 용건(龍建)이라 하였다가 뒤에 융(隆)으로 고쳤으며 자(字)는 문명(文明)이니 이 사람이 세조(世祖)이다. 체격이 우뚝하고 수염이 아름다우며 도량이 넓고 커서 삼한(三韓)을 아울러 삼키려는 뜻이 있었다. 일찍이 꿈에서 한 미인을 보고 부인[室家]으로 삼겠다고 다짐하였다. 뒤에 송악(松嶽)에서 영안성(永安城)으로 가다가 길에서 한 여인을 만났는데 용모가 매우 닮아 드디어 〈그녀와〉 더불어 혼인하였다.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지 못하였으므로 그런 까닭에 세상 사람들이 몽부인(夢夫人)이라 불렀다. 누군가는 말하기를, ‘그녀가 삼한의 어머니가 되셨기에 드디어 성을 한씨(韓氏)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는데 이 사람이 바로 위숙왕후(威肅王后)이다. 세조가 송악의 옛집에서 살다가 몇 년 후 또 그 남쪽에다 새 집을 지으려 하니 곧 연경궁(延慶宮)의 봉원전(奉元殿) 터이다.
그 때 동리산파(桐裏山派)의 조사(祖師) 도선(道詵)이 당(唐)에 들어가 일행(一行)의 지리법(地理法)을 얻고 돌아왔다. 백두산(白頭山)에 올랐다가 곡령(鵠嶺)에 이르러 세조가 새로 지은 집을 보고 말하기를, ‘기장[穄]을 심을 땅에다 어찌하여 마(麻)를 심었는가?’라 하고 말을 마치자 가버렸다. 부인이 〈이 말을〉 듣고 알리자 세조가 급히 쫓아갔는데, 만나보니 마치 오래 전부터 알던 사이 같았다. 드디어 함께 곡령에 올라가 산수의 맥을 살펴보고 위로 천문을 바라보며 아래로 운수를 자세히 살펴보고서 말하기를, ‘이 지맥은 임방(壬方)의 백두산에서 수모목간(水母木幹)으로 와서 마두명당(馬頭明堂)까지 떨어지고 있소. 그대는 또한 수명(水命)이니 마땅히 수(水)의 대수(大數)를 따라 집을 육육(六六)으로 지어 36구(區)로 만들면 천지의 대수와 맞아 떨어져 내년에는 반드시 성스러운 아들을 낳을 것이니, 마땅히 이름을 왕건(王建)이라 지으시오.’라고 하였다. 그리고 봉투를 만들어 그 겉에 기록하기를, ‘백 번 절하고 미래에 삼한을 통합할 임금이신 대원군자(大原君子) 족하(足下)께 삼가 글월을 바칩니다.’라고 하였다.
그 때가 당 희종(僖宗) 건부(乾符) 3년(876) 4월이었다. 세조가 그의 말을 따라 집을 짓고 살았는데 이 달 위숙왕후(威肅王后)가 임신하여 태조(太祖)를 낳았다.” 【민지(閔漬)의 『편년강목(編年綱目)』에는, “태조의 나이 17세 때 도선(道詵)이 다시 와서 뵙기를 요청하고 말하기를, ‘족하(足下)께서는 백육(百六)의 운에 응하여 천부(天府)의 명허(名墟)에서 탄생하셨으니 3계(三季)의 창생이 그대의 홍제(弘濟)를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전쟁에 나가 진을 칠 때 유리한 지형과 적합한 때를 고르는 법, 그리고 산천을 차례대로 제사지내어 신과 통하고 도움을 받는 이치를 알려주었다. 건녕(乾寧) 4년(897) 5월에 세조께서 금성군(金城郡)에서 돌아가시니 영안성(永安城) 강변의 석굴에다 장사하고 이름을 창릉(昌陵)이라 하였으며 위숙왕후를 합장하였다.”라 하였다. 『실록(實錄)』에는, “현종(顯宗) 18년(1027)에 세조의 시호에 원렬(元烈)을, 왕후에게는 혜사(惠思)를 더하여 올렸으며, 고종(高宗) 40년(1253)에는 세조에게 민혜(敏惠)를, 왕후에게는 인평(仁平)을 더하였다.”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그 때 동리산파(桐裏山派)의 조사(祖師) 도선(道詵)이 당(唐)에 들어가 일행(一行)의 지리법(地理法)을 얻고 돌아왔다. 백두산(白頭山)에 올랐다가 곡령(鵠嶺)에 이르러 세조가 새로 지은 집을 보고 말하기를, ‘기장[穄]을 심을 땅에다 어찌하여 마(麻)를 심었는가?’라 하고 말을 마치자 가버렸다. 부인이 〈이 말을〉 듣고 알리자 세조가 급히 쫓아갔는데, 만나보니 마치 오래 전부터 알던 사이 같았다. 드디어 함께 곡령에 올라가 산수의 맥을 살펴보고 위로 천문을 바라보며 아래로 운수를 자세히 살펴보고서 말하기를, ‘이 지맥은 임방(壬方)의 백두산에서 수모목간(水母木幹)으로 와서 마두명당(馬頭明堂)까지 떨어지고 있소. 그대는 또한 수명(水命)이니 마땅히 수(水)의 대수(大數)를 따라 집을 육육(六六)으로 지어 36구(區)로 만들면 천지의 대수와 맞아 떨어져 내년에는 반드시 성스러운 아들을 낳을 것이니, 마땅히 이름을 왕건(王建)이라 지으시오.’라고 하였다. 그리고 봉투를 만들어 그 겉에 기록하기를, ‘백 번 절하고 미래에 삼한을 통합할 임금이신 대원군자(大原君子) 족하(足下)께 삼가 글월을 바칩니다.’라고 하였다.
그 때가 당 희종(僖宗) 건부(乾符) 3년(876) 4월이었다. 세조가 그의 말을 따라 집을 짓고 살았는데 이 달 위숙왕후(威肅王后)가 임신하여 태조(太祖)를 낳았다.” 【민지(閔漬)의 『편년강목(編年綱目)』에는, “태조의 나이 17세 때 도선(道詵)이 다시 와서 뵙기를 요청하고 말하기를, ‘족하(足下)께서는 백육(百六)의 운에 응하여 천부(天府)의 명허(名墟)에서 탄생하셨으니 3계(三季)의 창생이 그대의 홍제(弘濟)를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전쟁에 나가 진을 칠 때 유리한 지형과 적합한 때를 고르는 법, 그리고 산천을 차례대로 제사지내어 신과 통하고 도움을 받는 이치를 알려주었다. 건녕(乾寧) 4년(897) 5월에 세조께서 금성군(金城郡)에서 돌아가시니 영안성(永安城) 강변의 석굴에다 장사하고 이름을 창릉(昌陵)이라 하였으며 위숙왕후를 합장하였다.”라 하였다. 『실록(實錄)』에는, “현종(顯宗) 18년(1027)에 세조의 시호에 원렬(元烈)을, 왕후에게는 혜사(惠思)를 더하여 올렸으며, 고종(高宗) 40년(1253)에는 세조에게 민혜(敏惠)를, 왕후에게는 인평(仁平)을 더하였다.”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