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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三府의 成立과 抗戰
(5) 三府의 成立과 抗戰
日本軍의 滿洲 大討伐作戰으로 일시 침체상태에 빠졌던 獨立軍의 활동은 1921년에 들어서면서부터 점차 만회되어가기 시작하였다. 滿洲에 잔류하여 있던 독립군들은 다시 활동을 개시하였으며 蘇聯으로 越境하였던 독립군들은 自由市慘變 이후 蘇聯을 탈출하여 滿洲로 들어와서는 옛 근거지에서 새로운 활동을 시작하였다.
따라서 西間島지방에는 西路軍政署 光復軍總營이 중심이 되어 활동을 재개하였고 東支沿線에는 大韓獨立團 光韓團이 활동을 계속하였고 長白縣지방에는 韓僑公會가 수립되었으며 懷德縣지방에는 義成團이 결성되어 抗日遊擊戰을 전개하였다.
이 당시 在滿獨立軍 사이에는 효과적인 抗日鬪爭을 전개하기 위하여 각 단체 통합운동이 일어났다. 따라서 각 단체는 통합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는데 이것이 결실을 맺어 1923년 6월경에 西路軍政署·大韓獨立團·碧昌義勇隊·光復軍總營·平北督辦府·普合團·光韓團 등의 여러 군단이 통합하여 大韓統軍府를 결성하였다.
8월에는 더많은 단체들이 이에 참가하여 統軍府를 다시 統義府로 개편하고는 소속 독립군을 大韓統義府 義勇軍이라 하고 司令長으로 金昌焕을 선임하여 7개 中隊를 편성하였다.
그러나 그 뒤 統義府 내의 의견차이로 일부가 이탈하여 義軍府를 결성함으로써 독립운동계는 양분되어 이후 서로 대립항쟁이 일어나 효과적인 항일투쟁을 지향한다는 통합목적에 배치되는 상태에 이르렀다. 이렇게 되자 統義府의 제 1,2,3,5中隊는 1924년 統義府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새로운 軍團 설립에 착수하였다. 이들은 上海에 있는 大韓民國 臨時政府에 대표를 파견하여 臨時政府 직속의 軍團설립의 인가를 요청하였다.
이에 臨時政府는 陸軍駐滿參議府를 결성하도록 인가하고 輯安·撫松·長白·安圖·通化·柳化 등 각 縣을 관할구역으로 하여 民政과 軍政을 맡도록 하였다. 이 參議府는 參議長 白狂雲 밑에 5개 中隊의 독립군을 편성하였다.
이와 같이 參議府가 성립된 지 얼마되지 않아 8월에는 大韓統義府·軍政署·義成團·光正團·吉林住民會 등 여러 단체가 또 다른 통합운동을 전개하여 正義府를 결성하였는데 이 正義府는 소속 독립군 8개 中隊를 편성하여 항전을 하였다.
參議·正義府가 南滿洲에서 결성된 것에 반하여 北滿洲에서도 새로운 통합운동이 일어나 大韓軍政署·大韓獨立軍團 등이 新民府를 결성하였다.
이와 같이 되어 滿洲의 우리 독립 운동계는 正義·參議·新民府의 三府로 정리되어 잡다하게 산재하였던 독립운동단체들이 일단 三府鼎立의 상태로 되었다.
그리하여 1925년을 전후한 시기에는 奉天省의 輯安·寬甸지역을 중심으로 한 韓滿 국경지대에는 參議府가, 하얼삔 이남 興京이북 지역은 正義府가, 北滿洲 寧安을 중심으로 하여 中東線 일대에 걸치는 지대는 新民府가 담당하여 抗日戰을 계속하여 나갔다.

1) 參議府의 抗戰

參議府는 5개 中隊와 독립 1개 小隊의 독립군 600명 이상을 편성하여 拳銃 또는 小銃으로 무장시켜 항전하였다. 同府는 관할지역 내의 모든 韓人청년에게 兵役義務制를 실시하여 독립군에 편입시켰다. 그리고는 中國 또는 蘇聯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일이 있는 韓人靑年將校들을 초빙하여 군사훈련을 시키도록 하였다.
이 參議府는 正義 新民의 兩府보다 국경지방에 가깝게 위치하였던 관계로 국내 진입 작전을 三府 중에서 가장 활발히 전개하였다. 그 반면 日軍의 공격도 다른 府보다 심하게 받아 많은 희생자가 속출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參議府의 수많은 활동 중 간과할 수 없는 것이 齋藤總督狙擊 작전이다. 註 016 1924년 5월 總督 齋藤이 國境地方을 巡視키 위하여 鴨綠江邊에 도착하였다. 그리고는 경비선에 승선하여 강하류로 내려오면서 국경방면의 경비상황을 살피려 하였다.
이와 같은 정보를 사전에 탐지한 參議府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總督射殺作戰을 전개하였다. 參議府는 張昌憲 지휘로 제2中隊 제1小隊長 韓雄權을 비롯하여 李春和·金昌均·玄成熙·李明根·金呂河·田昌植 외 8명에게 이 重任을 맡겼다.
5월 19일 平北 渭原郡 馬사灘 강변에 잠복하고 있던 이들 독립군은 오전 9시 總督이 승선한 경비선이 통과할 때 일제히 사격을 가하였다. 그러나 놀란 경비선이 전속력으로 도주함으로써 總督 사살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비록 이 작전이 실패는 하였을망정 독립군의 활동상황을 국내외에 선전하는데 큰 효과를 보았던 것이며 總督은 이 해 6월에 개회된 日本 國會에서 이 사건의 경위를 변명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국내 진입작전도 활발히 전개하였다. 1924년부터 시작된 이들의 활동은 주로 平安北道 지방에서 중점적으로 행하여졌다. 日警駐在所와 日本人 경영 鑛山을 습격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24년 1년간의 활동상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 註 017
出動隊別出動人員 姓名戰鬪地戰果參議府側被害
卥穫 其他
1924123     坪江洞 駐在所 襲擊 
22 全員 7人江原 文玉面 魚雷洞1   
218 全員 23人碧滝泰平洞43 4人 被愴
2291中 碧滝掌下里1  1人 戰死
46 李鴻來 姜基成吟爾濱道 外 17道溝1 敵刑事 國吉精 保射殺李鴻來 姜基成 被擒
49 金萬秀 崔炳浩 柳基東吟爾濱道 外 南18道溝   中警數百名에게 3人이 共히 戰死
中國 保甲隊에게 姜京根 桂東化 被殺
510 3個分隊輯安縣玉石洞    
519 全員 10餘人渭原郡 馬嘶漢 對岸  倭總督襲擊 
5275中小隊長 金蒼天 外 4人開原縣淸河溝 王菓城   中國兵에게 金寶賢 重傷
5292中2分隊長 金昌河 張炳益 姜豪傑 金尙勳 朴得連 權能道 金鳳洙厚昌 牛項嶺1 長銃 1, 短銃 1, 彈丸 30 
68 全員 10餘人江界城干面外仲洞11  
6122中李京勳 李炳伍 趙正賢 鄭元國 朴應道泰川 江西面3 長銃 1, 彈丸 224, 時計 2, 短銃 1, 萬年筆 2, 現金 844圓 
89 1隊龜城 造岳洞1 金鑛事務所 襲擊 
89 1隊昌城 德洞3 金鑛事務所 襲擊 
7 2中崔碩淳 趙應建 金萬成 朴永鎭 金鳳瑞楚山1 密偵 李甲廷의 家屋燒却 
8252中姜玉成 車京勳 李瑞興 權永植 文華俊 李明龍國內6 長銃 4, 彈丸 70, 軍服多數 
  2中車京勳 姜玉成 權永植
司令部 李龍潭 外 4人
龜城南市
義州古寧朔面
1   
  2中2小隊 1分隊長 安廷吉 朴濟煥 朴技淑 殷明憲 崔永澤 金善鎬 趙明雲江界2 鉛鑛事務所 燒却, 木材廠 燒毁金善鎬 戰死
  出征隊聯絡隊長 韓權雄 許永官 金麗河 朴奉浩 張雲成 申龍涉 裴相大南洞11  
  2中2小隊 宋善鎬 李賛涉 洪成玉 金奉興 金信浩 吳俊賢 金光燁渭原  敵狗를 多數討伐 
이상과 같은 參議府의 활동은 자연 日警의 주목의 대상이 되게 되었으며 따라서 日警으로부터 집요한 공격을 받게 되었다. 1925년 3월 제2中隊가 輯安縣 古馬嶺 산골짜기에서 국내 진입에 대한 작전회의가 개최되었는데 이것이 日本의 밀정에게 탐지되어 버렸다. 3월 16일 楚山警察署 65명과 日警이 포위, 기습공격을 가하자 방심하고 있던 中隊員은 中隊長 崔碩淳의 지휘로 곧 반격을 가하였다. 1시간 동안 교전하는 가운데 독립군의 피해자가 속출하였고 끝내는 中隊長을 비롯하여 22명이 전사하고 3명이 피체되어 버렸다. 註 018 이것이 古馬嶺事變이라고 불리워지는 일이었으며 이는 在滿 獨立運動史上 가장 큰 참변이었다.
불의의 피해를 받은 參議府에서는 곧 雪辱作戰을 전개하였다. 3월 18일 全軍이 三陵隊로 나누어 楚山방면으로 출동하였다. 註 019
제1대는 同郡 城面의 楸洞駐在所를, 제2대는 同面 下端洞駐在所를, 제3대는 碧潼郡 梧北面 如海洞駐在所를 공격하기로 작전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이날 밤 渡江하던 제2대가 國境守備隊에게 발각되어 교전 끝에 퇴각함으로써 제1, 3대만이 계획된 대로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楸洞駐在所 공격을 맡은 제1대는 19일 오전 5시에 공격을 개시하여 日巡查部長 이하 2명의 日警을 사살하고 駐在所 건물을 소각하였다. 그리고는 응원차 당도한 日警察隊와 또다시 교전하여 敵 4-5명을 중상입힌 뒤에 무사히 本隊로 귀환하였다.
如海洞駐在所의 공격을 담당한 제3대 역시 日警部 1명을 사살하고 駐在所 監視幕 등을 소각한 뒤에 다수의 무기를 노획하고 日警의 추격을 피하여 무사히 본대로 귀환하였다. 이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일경 3명은 그 뒤 병원에서 가료 중 사망하였다.

2) 正義府의 抗戰

正義府 소속 독립군은 8개 中隊와 憲兵隊·民警隊로 편성되었다. 이 독립군의 總司令官은 金昌焕·李靑天·吳東振이 계승하여 1929년 正義府가 해체될 때까지 항전을 계속하였다.
正義府의 活動 중 가장 유명한 것이 平北 鐵山郡 車輦館 습격작전이다. 註 020 즉 正義府 제5中隊長 金錫河로부터 작전명령을 받은 李振武 이하 6명의 대원이 車輦館에 잠입하였다. 이날 이 곳은 장날인 관계로 人海를 이루고 있었는데 이들 결사대원들은 백주에 그 곳 警察官柱在所를 공격하여 집무 중이던 日警 4명을 모조리 사살하고는 무기를 거두어 개선하였다. 이 기습작전은 전국을 진동시킨 쾌거로써 日帝가 자랑하는 국경수비태세가 독립군 앞에는 얼마나 무력하였던가를 잘 나타내었던 것이다.
1927년에는 正義府의 洪學淳·張基千·李根秀·金奉秀는 각자 권총으로 무장한 후 平北지방으로 잠입하여 日警의 삼엄한 감시망을 뚫으면서 2개월간 계속 활동을 하여 일경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당시 東亞日報는 이 4인 拳銃隊의 활동기사를 연일 게재함으로써 韓人의 가슴을 시원하도록 하였다.
이들은 각지에 출몰하여 밀정을 사살하고 군자금을 모금하면서 때때로 日警들과 교전하였다. 이들의 활동 중 가장 유명한 것이 義州邑內의 殖產銀行과 龍灣金融組合 습격사건으로써 世人을 놀라게 하였던 쾌사이었다.

3) 新民府의 抗戰

新民府의 獨立軍은 500여 명의 무장군을 別動隊와 保安隊로 편성하여 軍事部委員長 金佐鎭의 통솔 하에 다음과 같은 편제와 부서를 두고 활동을 개시하였다. 註 021
軍事委員長 兼 總司令 金 佐 鎭
總司令部 副官 朱 赫
保安隊 總指揮 朴 斗 熙
保安 第1大隊長 文 宇 天
保安 第2大隊長 白 鍾 烈(宗悅)
保安 第3大隊長 吳 祥 世
保安 第4大隊長 朱 赫
保安 第5大隊長 張 宗 哲
別動隊長 文 宇 天  
그리고 軍事力 향상과 독립군 양성을 위하여 穆陵縣 小秋風에 城東士官學校를 설립하여 年2期의 速成敎育을 실시하였다. 이 士官學校는 500여명의 독립군을 길러내어 독립군의 간부로 활동하게 하였다. 新民府에서는 각지 청년에게 屯田制를 실시하여 관할 지역내의 18세 이상 40세 이하의 모든 壯丁에게 군사훈련을 행하여 혈전을 준비하고 상비군을 보충하였다.
獨立軍 편성을 완료한 新民府는 日帝의 밀정과 친일파를 숙청하였으며 在滿 韓人의 안전보호에 주력하는 한편 항일전을 감행하였다.
1924년 9월 別動隊는 친일파 숙청을 위하여 행동을 개시하였다. 먼저 中東線 海林에서 親日 團體 朝鮮人民會를 조직하여 활동하던 회장 裵斗山을 체포하여 死刑執行을 하였으며 하얼삔의 朝鮮人民會를 급습하여 이 조직을 분쇄하였다. 그리고는 대규모의 국내 진입작전을 전개하기 위한 기초작업으로써 국내의 日帝 경비상황을 조사키 위하여 3방면으로 특수공작대를 편성하여 1925년 8월 국내에 파견하였다. 自願將校로 편성된 제1路는 鴨綠江을 건너 江界를 경유하여 平壤까지, 제2路는 白頭山麓으로부터 咸鏡, 江原, 慶尙의 산맥을 타고 全羅道의 智異山까지, 제3路는 豆滿江을 건너 鏡城을 경유 北靑까지 조사키로 목표를 세우고 파견하였다. 이들 공작대는 온갖 고초와 위험을 무릅쓰고 작전지도의 작성, 민중공작, 日軍警配置狀況調查 등 임무를 완성하고 무사히 귀대하였다.
또 新民府에서는 대규모의 抗日戰을 위하여 中國軍과의 연합을 기도하였다. 그리하여 1927년 8월 汪淸縣 石頭河子에서 韓中合作 會議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는 貢沛誠, 岳維峻, 史可軒 등 중국군의 요인과 新民府의 金佐鎭 外 2명의 韓人이 참석하였다. 이 회의 결과 韓中聯合軍의 성립에 합의를 보아 표면으로 中央軍 第八路軍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로 하고 군자금 및 무기의 조달에 노력하기로 되었다. 그러나 不幸히도 이 소식을 들은 張作霖이 貢沛誠, 史可軒, 岳維峻 등을 체포함으로써 동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註) 016
: 韓國獨立運動史 3 pp. 120-123·독립신문(상해판) 1924.5. 31 175호 朝鮮 總督府 警務局記錄 제799호바로가기
註) 017
: 韓國獨立運動史 4 pp.127-129바로가기
註) 018
: 蔡根植 武装獨立運動秘史 p.133바로가기
註) 019
: 독립신문(상해판) 1925.4.13 185호바로가기
註) 020
: 朝鮮總督府紀錄 제78호 死刑關係書類바로가기
註) 021
: 國史編纂委員會編 韓國獨立運動史 4 p.140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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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기사명, 자료명. URL (검색날짜)
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http://db.history.go.kr/id/sa_001_0030_0020 (accessed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http://db.history.go.kr/id/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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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기사명, 자료명.(사이트명, URL, ID, 검색날짜)
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sa_001_0030_0020,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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