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부의 이름을 바꾸고 성씨를 내리다
(
3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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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32) 봄에 6부(六部)註 001의 이름을 바꾸고, 성씨(姓氏)를 사여하였다.註 002 양산부(楊山部)는 양부(梁部)註 003라고 하고 성(姓)은 이(李)註 004로 하였으며, 고허부(高墟部)는 사량부(沙梁部)註 005라고 하고 성은 최(崔)로註 006 하였다. 대수부(大樹部)는 점량부(漸梁部)註 007
일설에는 모량부(牟梁部)註 008라고도 한다.라고 하고 성은 손(孫)註 009으로 하였으며, 간진부(干珍部)는 본피부(本彼部)註 010라고 하고 성은 정(鄭)註 011으로 하였다. 가리부(加利部)는 한기부(漢祇部)註 012라고 하고 성은 배(裵)註 013로 하였으며, 명활부(明活部)는 습비부(習比部)註 014라고 하고 성을 설(薛)註 015로 하였다.
6부(六部)의 … 사여하였다: 6부의 ‘이름을 바꾸었다’는 것은 혁거세 등장 이전에 경주 지역에 선주해 있던 6촌이 그대로 6부로 이어졌다는 인식이 반영된 것이다. 그렇지만, 6촌과 6부는 ‘6’이라는 숫자의 공통성이 있을 뿐 실체와 성격은 다르다고 보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인식이다(朱甫暾, 1992). 양부를 비롯한 6개의 부가 모두 성립한 것은 김씨 족단의 주도권이 확립된 5세기 이후의 일로 파악되며, 양부와 사량부는 김씨 족단이, 모량부는 박씨 족단이, 한기부는 석씨 족단이, 나머지 본피부와 습비부는 그 외의 중소 정치 세력이 중핵을 이룬 부로 여겨진다(강종훈, 2000). 6부에 관해서는 본서 권1 신라본기1 시조 혁거세거서간 17년(B.C. 41)조의 주석 참조. 아울러 본 기사에서 6부에 ‘성씨’를 사여했다고 하는 것 역시 사실로 보기 어려운데, 이에 관해서는 본서 권1 신라본기1 시조 혁거세거서간 즉위조의 주석 참조.
〈참고문헌〉
朱甫暾, 1992, 「三國時代의 貴族과 身分制 –新羅를 中心으로-」, 『韓國社會發展史論』, 一潮閣
강종훈, 2000, 『신라상고사연구』, 서울대출판부
〈참고문헌〉
朱甫暾, 1992, 「三國時代의 貴族과 身分制 –新羅를 中心으로-」, 『韓國社會發展史論』, 一潮閣
강종훈, 2000, 『신라상고사연구』, 서울대출판부
양부(梁部): 신라 6부의 하나로, 「포항 냉수리 신라비」(503)를 비롯한 6세기 대의 여러 금석문에는 ‘喙部’로 나온다.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는 ‘及梁部’라고도 표기하였다.
사량부(沙梁部): 신라 6부의 하나로서, 「포항 냉수리 신라비」(503)를 비롯한 6세기 대의 여러 금석문에는 ‘沙喙部’로 나온다. 6세기 당시 양부와 함께 신라 김씨 왕실의 구성원들이 속했던 부로 파악되고 있다.
최(崔) : 본 기사에서는 사량부에 내린 성씨로 되어 있으나,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는 ‘정(鄭)씨’로 나와 차이를 보인다. 이는 본피부에 최치원의 고택이 있다는 전승에 맞춰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一然)이 사량부와 본피부의 성씨를 서로 바꾼 데서 기인한다. 이 시기에 ‘최(崔)’라는 성씨가 사용되었다고 보기 어려움은 본서 권1 신라본기1 시조 혁거세거서간 즉위조의 주석 참조. 7세기 이후 통일신라 시대에는 6두품 신분 가운데 최씨 성을 사용한 사례가 확인되는데, 신라 말의 문장가 ‘최치원(崔致遠)’이 대표적이다.
점량부(漸梁部): 신라 6부의 하나로, 6세기 초의 금석문인 「울진 봉평리 신라비」(524)에는 ‘岑喙部’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모량부(牟梁部): 점량부의 이칭. 금석문상에서는 6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경주 남산신성비 제2비」(591)에 ‘牟喙’으로 판독되는 글자가 있고, 월성 해자에서 출토된 목간에서도 ‘牟喙’이라는 지명이 확인된다. 문헌상에서는 일반적으로 ‘牟梁部’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구체적으로 어느 시기부터 ‘岑’ 대신 ‘牟’가 사용되기 시작했는지, 그리고 ‘牟’와 ‘岑(또는 漸)’이 어떻게 호응이 되는지는 아직 확실하게 규명된 바 없다. 한편 모량부는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지철로왕조에 지증왕비의 출신 부로 나오는데, 이를 본서 권4 신라본기4 지증마립간 즉위조에 지증왕비 연제부인이 ‘박씨’로 기록된 것과 연관시켜, 박, 석, 김 3성 족단 가운데 박씨 족단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부로 파악하기도 한다(강종훈, 2000, 『신라상고사연구』, 서울대출판부). 참고로 2009년에 발견된 「포항 중성리 신라비」(501 또는 441)에 ‘牟旦伐喙’이라는 문구가 나오는바, 이를 모량부의 원래 명칭으로 추정하기도 하나, ‘牟旦伐’을 부명(部名)이 아닌 인명으로 보는 견해도 있어 단정하기 어렵다.
손(孫) : 이 시기에 ‘손(孫)’이라는 성씨가 사용되었다고 보기 어려움은 본서 권1 신라본기1 시조 혁거세거서간 즉위조의 주석 참조. 7세기 이후 통일신라 시대 손씨 성이 사용된 사례로는 『삼국유사』 권제5 효선 제9에 나오는 ‘손순(孫順)’ 정도가 있다.
본피부(本彼部): 신라 6부의 하나로, 6세기 초의 금석문인 「포항 냉수리 신라비」(503)와 「울진 봉평 신라비」(524)에는 ‘본파부(本波部)’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정(鄭) : 본 기사에서는 본피부에 내린 성씨로 되어 있으나,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는 ‘최(崔)씨’로 나와 차이를 보인다. 이는 본피부에 최치원의 고택이 있다는 전승에 맞춰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一然)이 사량부와 본피부의 성씨를 바꾼 데서 기인한다. 이 시기에 ‘정(鄭)’이라는 성씨가 사용되었다고 보기 어려움은 본서 권1 신라본기1 시조 혁거세거서간 즉위조의 주석 참조. 7세기 이후 통일신라 시대에 정씨 성이 사용된 사례로는 청해진대사 장보고와 함께 활동한 ‘정년(鄭年)’이 대표적이다.
한기부(漢祇部): 신라 6부의 하나로, 본서 권1 신라본기1 지마이사금 즉위조에는 ‘한기부(韓岐部)’로 나오며,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는 ‘한기부(漢岐部)’로도 나온다. 금석문에서는 ‘한지(漢只)○○’(「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한지벌부(漢只伐部)’(「경주 월지 출토 「조로2년」명 전」) 등의 이름으로 확인된다.
습비부(習比部): 신라 6부의 하나로, 6세기 초의 금석문인 「포항 냉수리 신라비」(503)에는 ‘사피부(斯彼部)’로 나온다.
설(薛) : 이 시기에 ‘설(薛)’이라는 성씨가 사용되었다고 보기 어려움은 본서 권1 신라본기1 시조 혁거세거서간 즉위조의 주석 참조. 설씨는 6부 성 가운데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나오는데, 7세기 전반에 당으로 건너가 당 태종의 고구려 정벌에 참여한 ‘설계두(薛罽頭)’가 대표적이다. 당나라 시인 진자앙(陳子昂)이 지은 「설요묘지명(薛瑤墓誌銘)」의 내용을 토대로, 원래 김씨 왕족의 일원이 ‘설(薛)’ 땅을 식읍으로 받으면서 설씨 성을 사용하게 되었다고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盧重國, 1999, 「新羅時代 姓氏의 分枝化와 食邑制의 實施」, 『韓國古代史硏究』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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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01
註) 002
6부(六部)의 … 사여하였다: 6부의 ‘이름을 바꾸었다’는 것은 혁거세 등장 이전에 경주 지역에 선주해 있던 6촌이 그대로 6부로 이어졌다는 인식이 반영된 것이다. 그렇지만, 6촌과 6부는 ‘6’이라는 숫자의 공통성이 있을 뿐 실체와 성격은 다르다고 보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인식이다(朱甫暾, 1992). 양부를 비롯한 6개의 부가 모두 성립한 것은 김씨 족단의 주도권이 확립된 5세기 이후의 일로 파악되며, 양부와 사량부는 김씨 족단이, 모량부는 박씨 족단이, 한기부는 석씨 족단이, 나머지 본피부와 습비부는 그 외의 중소 정치 세력이 중핵을 이룬 부로 여겨진다(강종훈, 2000). 6부에 관해서는 본서 권1 신라본기1 시조 혁거세거서간 17년(B.C. 41)조의 주석 참조. 아울러 본 기사에서 6부에 ‘성씨’를 사여했다고 하는 것 역시 사실로 보기 어려운데, 이에 관해서는 본서 권1 신라본기1 시조 혁거세거서간 즉위조의 주석 참조.
〈참고문헌〉
朱甫暾, 1992, 「三國時代의 貴族과 身分制 –新羅를 中心으로-」, 『韓國社會發展史論』, 一潮閣
강종훈, 2000, 『신라상고사연구』, 서울대출판부
〈참고문헌〉
朱甫暾, 1992, 「三國時代의 貴族과 身分制 –新羅를 中心으로-」, 『韓國社會發展史論』, 一潮閣
강종훈, 2000, 『신라상고사연구』, 서울대출판부
註) 003
양부(梁部): 신라 6부의 하나로, 「포항 냉수리 신라비」(503)를 비롯한 6세기 대의 여러 금석문에는 ‘喙部’로 나온다.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는 ‘及梁部’라고도 표기하였다.
註) 004
註) 005
사량부(沙梁部): 신라 6부의 하나로서, 「포항 냉수리 신라비」(503)를 비롯한 6세기 대의 여러 금석문에는 ‘沙喙部’로 나온다. 6세기 당시 양부와 함께 신라 김씨 왕실의 구성원들이 속했던 부로 파악되고 있다.
註) 006
최(崔) : 본 기사에서는 사량부에 내린 성씨로 되어 있으나,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는 ‘정(鄭)씨’로 나와 차이를 보인다. 이는 본피부에 최치원의 고택이 있다는 전승에 맞춰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一然)이 사량부와 본피부의 성씨를 서로 바꾼 데서 기인한다. 이 시기에 ‘최(崔)’라는 성씨가 사용되었다고 보기 어려움은 본서 권1 신라본기1 시조 혁거세거서간 즉위조의 주석 참조. 7세기 이후 통일신라 시대에는 6두품 신분 가운데 최씨 성을 사용한 사례가 확인되는데, 신라 말의 문장가 ‘최치원(崔致遠)’이 대표적이다.
註) 007
점량부(漸梁部): 신라 6부의 하나로, 6세기 초의 금석문인 「울진 봉평리 신라비」(524)에는 ‘岑喙部’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註) 008
모량부(牟梁部): 점량부의 이칭. 금석문상에서는 6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경주 남산신성비 제2비」(591)에 ‘牟喙’으로 판독되는 글자가 있고, 월성 해자에서 출토된 목간에서도 ‘牟喙’이라는 지명이 확인된다. 문헌상에서는 일반적으로 ‘牟梁部’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구체적으로 어느 시기부터 ‘岑’ 대신 ‘牟’가 사용되기 시작했는지, 그리고 ‘牟’와 ‘岑(또는 漸)’이 어떻게 호응이 되는지는 아직 확실하게 규명된 바 없다. 한편 모량부는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지철로왕조에 지증왕비의 출신 부로 나오는데, 이를 본서 권4 신라본기4 지증마립간 즉위조에 지증왕비 연제부인이 ‘박씨’로 기록된 것과 연관시켜, 박, 석, 김 3성 족단 가운데 박씨 족단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부로 파악하기도 한다(강종훈, 2000, 『신라상고사연구』, 서울대출판부). 참고로 2009년에 발견된 「포항 중성리 신라비」(501 또는 441)에 ‘牟旦伐喙’이라는 문구가 나오는바, 이를 모량부의 원래 명칭으로 추정하기도 하나, ‘牟旦伐’을 부명(部名)이 아닌 인명으로 보는 견해도 있어 단정하기 어렵다.
註) 009
손(孫) : 이 시기에 ‘손(孫)’이라는 성씨가 사용되었다고 보기 어려움은 본서 권1 신라본기1 시조 혁거세거서간 즉위조의 주석 참조. 7세기 이후 통일신라 시대 손씨 성이 사용된 사례로는 『삼국유사』 권제5 효선 제9에 나오는 ‘손순(孫順)’ 정도가 있다.
註) 010
본피부(本彼部): 신라 6부의 하나로, 6세기 초의 금석문인 「포항 냉수리 신라비」(503)와 「울진 봉평 신라비」(524)에는 ‘본파부(本波部)’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註) 011
정(鄭) : 본 기사에서는 본피부에 내린 성씨로 되어 있으나,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는 ‘최(崔)씨’로 나와 차이를 보인다. 이는 본피부에 최치원의 고택이 있다는 전승에 맞춰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一然)이 사량부와 본피부의 성씨를 바꾼 데서 기인한다. 이 시기에 ‘정(鄭)’이라는 성씨가 사용되었다고 보기 어려움은 본서 권1 신라본기1 시조 혁거세거서간 즉위조의 주석 참조. 7세기 이후 통일신라 시대에 정씨 성이 사용된 사례로는 청해진대사 장보고와 함께 활동한 ‘정년(鄭年)’이 대표적이다.
註) 012
한기부(漢祇部): 신라 6부의 하나로, 본서 권1 신라본기1 지마이사금 즉위조에는 ‘한기부(韓岐部)’로 나오며,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는 ‘한기부(漢岐部)’로도 나온다. 금석문에서는 ‘한지(漢只)○○’(「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한지벌부(漢只伐部)’(「경주 월지 출토 「조로2년」명 전」) 등의 이름으로 확인된다.
註) 013
註) 014
습비부(習比部): 신라 6부의 하나로, 6세기 초의 금석문인 「포항 냉수리 신라비」(503)에는 ‘사피부(斯彼部)’로 나온다.
註) 015
설(薛) : 이 시기에 ‘설(薛)’이라는 성씨가 사용되었다고 보기 어려움은 본서 권1 신라본기1 시조 혁거세거서간 즉위조의 주석 참조. 설씨는 6부 성 가운데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나오는데, 7세기 전반에 당으로 건너가 당 태종의 고구려 정벌에 참여한 ‘설계두(薛罽頭)’가 대표적이다. 당나라 시인 진자앙(陳子昂)이 지은 「설요묘지명(薛瑤墓誌銘)」의 내용을 토대로, 원래 김씨 왕족의 일원이 ‘설(薛)’ 땅을 식읍으로 받으면서 설씨 성을 사용하게 되었다고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盧重國, 1999, 「新羅時代 姓氏의 分枝化와 食邑制의 實施」, 『韓國古代史硏究』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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