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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하다 ( 512년 06월 )
13년(512) 여름 6월에 우산국(于山國)註 001이 항복하여 복속하고 해마다 토산물[土宜]을 공물로 바쳤다.註 002 우산국은 명주(溟州)註 003의 정동쪽 바다에 있는 섬으로, 혹은 울릉도(鬱陵島)라고도 부른다. 땅은 사방 100리인데,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복종하지 않았다. 이찬(伊飡) 이사부(異斯夫)가 하슬라주(何瑟羅州) 군주(軍主)註 004가 되어 이르기를, “우산국 사람들은 어리석고도 사나워서 위력(威力)으로는 오게 하기 어렵지만, 꾀를 쓰면 굴복시킬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이에 나무로 사자(師子) 모형을 많이 만들어註 005 전선(戰船)에 나누어 싣고 그 나라 해안에 이르러 거짓으로 알리기를, “너희들이 만약 항복하지 않는다면, 곧 이 맹수를 풀어서 밟아 죽이겠다.”라고 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몹시 두려워 곧바로 항복하였다.註 006
註) 001
우산국(于山國):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2 지철로왕조에 우릉도(于陵島)를 우릉(羽陵)이라고 쓴다고 전하며. 『고려사』에서는 무릉(武陵), 우릉(羽陵), 우릉도(芋陵島)라고도 부른다고 하였다.바로가기
註) 002
해마다 토산물[土宜]을 공물로 바쳤다: 우산국이 해마다 토산물을 공물로 바쳤던 사실을 통해 6세기 이전에 주변의 복속 소국이나 읍락집단이 사로국(신라)에 매년 정기적으로 공물을 바치는 것이 관행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바로가기
註) 003
명주(溟州): 오늘날 강원도 강릉시로 비정된다. 본서 권제35 잡지제4 지리2에서 “명주(溟州)는 본래 고구려의 하서량(河西良)또는 하슬라(何瑟羅)라고도 썼다이었는데, 후에 신라에 속하였다. … 경덕왕 16년(757)에 명주로 고쳤다.”라고 전한다. 이에 따른다면, ‘우산국은 명주의 정동쪽 바다에 있는 섬으로, 혹은 울릉도라고도 부른다[于山國在溟州正東海島 或名鬱陵島].’라는 위 기록은 경덕왕 16년 이후의 통일신라 또는 고려 전기에 개서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바로가기
註) 004
하슬라주(何瑟羅州) 군주(軍主): 진흥왕 22년(561)에 건립된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에 상주(上州), 하주(下州)가 보인다. 본서 권제4 신라본기제4 진흥왕 14년(553) 7월조에 “백제의 동북쪽 변두리를 빼앗아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다.”라고 전하는데, 이를 통해 553년 이전에 신라 영토에 상주와 하주를 설치하였다고 추론할 수 있다. 결국 553년까지 신라에 상주와 하주, 신주만이 존재하였으므로, 지증왕 13년(512)에 하슬라주를 설치하였다고 보기 어렵다. 지증왕 6년(505) 2월에서 513년 사이에 실직지역에 주둔하였던 정군단이 하슬라지역으로 옮겨왔고, 이에 따라 이사부의 직함도 실직군주에서 하슬라군주로 바뀌었다고 볼 수 있다. 아마도 중대에 군주(軍州)를 주(州)의 장관으로 이해하고, 군주가 머문 하슬라지역을 마치 중대의 주치(州治)처럼 파악한 다음, 지증왕 13년(512) 이전 어느 시기에 하슬라주를 설치하였다고 판단하고, 하슬라군주를 하슬라주군주로 개서한 것으로 짐작된다(전덕재, 2018, 『三國史記 본기의 원전과 편찬』, 주류성, 69~73쪽).바로가기
註) 005
나무로 사자(師子) 모형을 많이 만들어: 본래 중국의 중원지방에서는 사자(獅子)가 살지 않는다. 한나라 때 장건(張騫) 일행이 서역과 통한 이후에 서역의 여러 나라에서 사자를 바쳤고, 그 후에 비로소 중국에 사자의 존재가 널리 알려졌다. 중국에서 사자는 악귀(惡鬼)를 쫓는 영수(靈獸)로 인식되었고, 이 때문에 사자가 능묘(陵墓)의 석수(石獸)나 진묘수(鎭墓獸)로 널리 제작되었으며, 나아가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영수로도 인식되어 불상이나 불탑 앞에 세워두는 경우가 많았다(林玲愛). 이 같은 전통은 고구려와 신라에도 그대로 전해졌는데, 신라의 분황사탑에 사자상을 안치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고, 고구려의 장천1호분 벽화에서 사자좌 위에 앉아 있는 부처 앞에 좌우에 혀를 내밀고 꼬리는 위로 들어 올린 사자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국립경주박물관). 512년 당시에 울릉도 사람들이 사자를 직접 보았을 가능성은 적다고 보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사자가 맹수(猛獸)로서 사람들에게 위협적인 존재라고 인식한 사실을 통해 6세기 무렵에 신라사회에서 사자가 모든 악귀를 물리칠 수 있는 벽사(辟邪)의 영수로서 널리 받아들여졌음을 추론할 수 있다.
〈참고문헌〉
국립경주박물관, 2006 『신라의 사자』
林玲愛, 2007, 「중국 고분 속 鎭墓獸의 양상과 불교적 변형」, 『美術史論壇』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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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06
나라 사람들이 … 항복하였다: 신라가 우산국을 정복함으로써 고구려가 동해안지역으로 진출하는 것을 저지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동해안을 통한 고구려와 일본과의 교섭을 강력하게 견제할 수 있는 효과가 있다고 보기도 한다(金昌錫, 2009, 「新羅의 于山國 복속과 異斯夫」, 『歷史敎育』 111). 한편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왜구의 준동을 우려하여 울릉도를 일시 공도(空島)로 두기도 하였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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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기사명, 자료명. URL (검색날짜)
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http://db.history.go.kr/id/sa_001_0030_0020 (accessed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http://db.history.go.kr/id/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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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sa_001_0030_0020,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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