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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국왕 김구해가 항복하다 ( 532년 )
19년(532)에 금관국(金官國)註 001의 왕 김구해(金仇亥)註 002가 왕비 및 세 아들, 즉 맏아들 노종(奴宗),註 003 둘째 아들 무덕(武德),註 004 막내아들 무력(武力)註 005과 함께 나라의 창고에 있던 보물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 왕은 예로써 대우하고, 상등(上等)의 관등[位]을 주었으며,註 006 본국을 식읍(食邑)註 007으로 삼게 하였다.註 008 아들 무력은 벼슬이 각간(角干)註 009까지 이르렀다.
註) 001
금관국(金官國): 경상남도 김해시에 있었던 가야의 한 나라이다. 본서에는 가야(加耶 또는 伽耶), 가락국(伽落國 또는 駕洛國), 남가야(南加耶), 임나가량(任那加良)이라고 전하고, 『삼국유사』에는 가락국(駕洛國), 가야(伽耶), 금관가야(金官伽耶)라고 전한다. 그밖에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남가라(南加羅 또는 南迦羅), 금관(金官), 수나라(須奈羅 또는 須那羅), 소나라(素奈羅)라고 전하고,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에는 임나가라(任那加羅)로 전하며, 『삼국지(三國志)』 권30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는 구야국(狗邪國 또는 拘邪國)이라고 전한다.
『삼국유사』 권제2 기이제2 가락국기조에 따르면, 하늘에서 내려온 알에서 태어난 수로(首露)가 42년에 9간(干)의 추대를 받아 가락국(금관국)을 건국하였다고 한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진왕(辰王)을 더 우대하여 부른 칭호 가운데 ‘구야진지렴(狗邪秦支廉)’과 ‘안야축지(安邪踧支)’라는 표현이 보이는데, 구야국이 건국된 정확한 시점을 알기 어렵지만, 이를 통해 3세기 중반에 경남 김해에 위치한 구야국(금관가야)이 변한을 대표하는 나라로 부상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본서기』에서 보이는 수나라 또는 소나라라는 국명은 ‘쇠나라’라는 뜻으로 해석되며, 금관국(金官國)이란 국호 역시 철과 관련되어 유래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구야국은 낙랑, 대방과 일본 열도, 변·진한지역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였다는 지리적 이점과 우수하고 풍부한 철을 바탕으로 하는 중계무역을 통해 경제력을 키워 변한, 즉 가야의 대표 세력으로 부상한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이 구야국(금관국) 중심의 가야연맹체를 전기가야연맹체라고 부른다. 금관국은 400년에 고구려 광개토왕이 파견한 5만 군대의 공격을 받아 쇠퇴하기 시작하였으며, 5세기에 이르러 금관국을 대신하여 고령의 대가야가 가야의 대표적인 세력으로 부상하여 가야연맹을 주도하였다. 금관국은 이후에도 한동안 명맥을 유지하다가 법흥왕 19년(532)에 신라에 병합되었다(김태식, 2002, 『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 1권』, 푸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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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02
김구해(金仇亥): 금관국(金官國)의 마지막 왕이다. 본서 권제41 열전제1 김유신상(上)조에서 구차휴(仇次休)라고도 썼다고 하였다. 『삼국유사』 권제1 왕력에는 구충왕(仇衝王), 권제2 기이제2 가락국기조에 구형왕(仇衡王)이라고 전한다. 금관국의 시조 수로왕(首露王)의 9세손(世孫)이며, 『삼국유사』 가락국기조에 아버지는 감지왕(鉗知王)이고, 어머니는 출충(出忠) 각간(角干)의 딸 숙(淑)이라고 전하나, 각간은 신라의 관등이기 때문에 출충이 금관국에서 각간이었다고 전하는 기록은 그대로 믿기 어렵다.
김구해의 후손들은 신라에서 김씨(金氏) 성을 하사받고 진골에 편입되었으며, 그의 증손자인 김유신은 무열왕계와 결합하여 위세를 떨쳤을 뿐만 아니라 삼국통일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하대에 이르러 전통적인 김씨 진골과 구분하여 김구해의 후손들을 ‘신김씨(新金氏)’라고 불리면서 냉대를 받았다(선석열, 2001; 李文基, 2004; 이현태, 2006). 한편, 현재의 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의 왕산 기슭에 김구해의 무덤, 즉 구형왕릉(仇衡王陵)으로 전해지는 방형(方形)의 석축(石築)이 있으나, 현재 사실 여부를 정확하게 고증하기 어렵다(권덕영).
〈참고문헌〉
선석열, 2001, 「신라사 속의 가야인들-김해김씨와 경주김씨-」, 『한국고대사 속의 가야』, 혜안
李文基, 2004, 「金官加耶系의 始祖 出自傳承과 稱姓의 變化」, 『新羅文化祭學術論文集』 25, 경주시·신라문화선양회·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이현태, 2006, 「新羅 中代 新金氏의 登場과 그 背景」, 『韓國古代史硏究』 42
권덕영, 2007, 「금관가야 '仇衡王陵' 전승과 역사화 과정」, 『大丘史學』 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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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03
노종(奴宗): 금관국의 마지막 왕 김구해(金仇亥)의 맏아들이다. 『삼국유사』 권제2 기이제2 가락국기조에는 세종각간(世宗角干)이라고 전한다. 아버지는 김구해(김구형)이고, 어머니는 분질수(分叱水) 이질(尒叱)의 딸 계화(桂花)이다. 이질은 금관국에서 설치한 관직 또는 관등의 하나로 추정된다. 540년대 후반 진흥왕 때에 건립된 「단양 신라 적성비(丹陽 新羅 赤城碑)」에 대중(大衆)의 한 사람으로 나오는 내례부지(內礼夫智) 대아간지(大阿干支: 대아찬), 진흥왕 29년(568)에 건립된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서울 北漢山 新羅 眞興王 巡狩碑)」에 보이는 내부지(內夫智) 일척간(一尺干: 이찬), 「황초령 신라 진흥왕 순수비(黃草嶺 新羅 眞興王 巡狩碑)」「마운령 신라 진흥왕 순수비(磨雲嶺 新羅 眞興王 巡狩碑)」에 대등(大等)의 한 사람으로 나오는 내부지 이간(伊干), 본서 권제4 신라본기제4 진평왕 원년(579) 8월조에 상대등(上大等)에 임명되었다고 전하는 노리부(弩里夫), 본서 권제44 열전제4 거칠부조에 나오는 노부(奴夫) 파진찬(波珍飡) 등이 모두 노종과 동일인이라고 이해하고 있다(金泰植, 1996, 「大加耶의 世系와 道設智」, 『震檀學報』 81; 2002, 『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 1권』, 푸른역사, 261~263쪽).
노종은 법흥왕 19년(532)에 아버지 구해왕과 함께 신라에 항복하였고, 540년대 후반 진흥왕 때에 대중(大衆)으로서 관등이 대아찬이었으며, 진흥왕 12년(551)에 고구려의 한강유역을 공격할 때에 파진찬으로서 장군으로 참여하였다. 그리고 진흥왕 29년(568)에 진흥왕이 북한산과 황초령, 마운령 등을 순행할 때에 이찬이자 대등으로서 시종(侍從)하였고, 진지왕 2년(577) 10월에 이찬으로서 일선군(一善郡: 경북 구미시 선산읍)을 침략한 백제군을 물리쳤으며, 진평왕 원년(579) 8월에 상대등에 임명되어 국정을 총괄하였다가 진평왕 10년(588) 12월에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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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04
무덕(武德): 『삼국유사』 권제2 기이제2 가락국기조에는 가락국(駕洛國) 마지막왕 구형왕(仇衡王)과 분질수(分叱水) 이질(尒叱)의 딸 계화(桂花) 사이의 셋째 아들 무득각간(茂得角干)이라고 전한다. 이외에 다른 기록에 전하지 않아 더 이상의 행적은 알 수 없다.바로가기
註) 005
무력(武力): 금관국의 왕 김구해의 셋째 아들로서 신라에서 최고 관등인 각간(角干)을 수여받고 군주(軍主)를 역임한 인물이다. 『삼국유사』 권제2 기이제2 가락국기조에는 구형왕(仇衡王: 구해왕)과 분질수(分叱水) 이질(尒叱)의 딸 계화(桂花) 사이의 둘째 아들 무도각간(茂刀角干)이라고 전하는데, 무도(茂刀)는 무력(茂力)의 오기(誤記)로 보이며, 본서의 기록처럼 무력은 김구해의 셋째 아들이라고 봄이 옳을 것이다. 신라의 비문에는 ‘무력지(另力智)’라고 전하기도 한다.
540년대 후반 진흥왕 때에 건립된 「단양 신라 적성비(丹陽 新羅 赤城碑)」에 무력이 아간지(阿干支: 아찬)로서 고두림성(高頭林城)에 머문 두 명의 군주 가운데 한 사람으로 전하여, 그가 신라가 고구려의 단양 적성을 공략하여 차지할 때에 군주로서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본서 권제4 신라본기제4 진흥왕 14년(553) 7월조에 신라가 백제의 동북 변방을 차지하고, 신주(新州)를 설치한 다음, 아찬(阿飡) 무력을 군주로 삼았다고 전하고, 진흥왕 15년(554) 7월조에 무력이 신주군주(新州軍主)로서 관산성전투(管山城戰鬪)에 주병(州兵)을 거느리고 참전하였다고 전한다. 또한 본서 권제41 열전제1 김유신상(上)조에 무력이 신주도행군총관(新州道行軍摠管)을 역임하였고, 관산성전투에서 백제 성왕과 장군 4명을 사로잡고, 1만여 명의 목을 베었다고 하였다.
553년 설치된 신주는 경기도와 충북 북부, 강원도 영서지역을 망라하는 광역의 지방통치조직이었고, 당시 신주의 주치(州治)는 남천(南川: 경기도 이천시)이었다. 따라서 553년과 554년에 무력의 정확한 직책은 남천군주(南川軍主)였다고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姜鳳龍, 94~100쪽 및 105쪽). 이에 따른다면, 후대에 남천군주인 무력을 신주군주 또는 신주도행군총관이라고 부회하였다고 이해할 수 있다.
진흥왕 22년(561)에 건립된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昌寧 新羅 眞興王 拓境碑)」에 진흥왕이 경남 창녕을 순행(巡幸)할 때에 무력지(另力智)가 잡간(迊干: 잡찬)으로서 시종(侍從)하였다고 전하고, 진흥왕 29년(568)에 건립된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北漢山 新羅 眞興王 巡狩碑)」에는 무력지 잡간, 「황초령 신라 진흥왕 순수비(黃草嶺 新羅 眞興王 巡狩碑)」「마운령 신라 진흥왕 순수비(磨雲嶺 新羅 眞興王 巡狩碑)」에는 무력지가 대등(大等)이자 잡간이라고 전한다. 이를 종합하면 568년에 진흥왕이 북한산과 황초령, 마운령을 순행할 때에 대등이자 잡간으로서 시종하였다고 볼 수 있다. 568년 이후 무력은 각간(이벌찬)의 관등까지 승진한 것으로 보인다.
무력의 아들이 서현(舒玄)인데, 그는 진흥왕의 동생인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萬明)과 결혼하여 김씨 왕가와의 연결을 모색하였다. 두 사람의 아들이 유신(庾信)과 흠순(欽順)이고, 둘째 딸이 김춘추(金春秋: 태종무열왕)의 부인이자 문무왕의 어머니인 문희(文姬: 문명왕후)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문명왕후의 아버지 서운잡간(庶云匝干: 서현)이 세종(世宗)의 손자요, 솔우공(率友公)의 아들이라고 전하는데, 이것은 고려시대에 김해지방 수로왕릉의 제사권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김유신의 가계(家系)를 김구해의 맏아들인 세종과 연결시키고자 하는 욕망에서 조작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김태식, 263~265쪽).
〈참고문헌〉
姜鳳龍, 1994, 「新羅 地方統治體制 硏究」,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김태식, 2002, 『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 1권』, 푸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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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06
상등(上等)의 관등[位]을 주었으며: 신라에 항복한 김구해(金仇亥)에게 고위의 관등을 수여하였음을 전하는 것으로 보이나, 정확한 관등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바로가기
註) 007
식읍(食邑): 신라에서 왕족이나 특별한 공을 세운 고위 관리에게 일정한 지역이나 일정한 수의 봉호(封戶)에게서 조용조(租庸調)를 수취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 경제제도이다. 고구려 초기에 전쟁에서 공을 세운 전공자(戰功者)에게 정복지나 그와 연고가 깊은 지역을 식읍으로 지급하였고, 백제 의자왕은 그의 아들 41명을 좌평으로 삼고 식읍을 주었다. 법흥왕 19년(532)에 금관국왕(金官國)의 구해왕(仇亥王)이 신라에 항복하자, 법흥왕은 본국을 그의 식읍으로 삼았다.
한편 중대에 왕자인 김인문(金仁問)에게 300호를 식읍으로 사여하였고, 백제와 고구려 정벌에 큰 공을 세운 김유신(金庾信)에게 500호를, 박유(朴紐)에게 500호를 식읍으로 주었으며, 하대에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 장보고(張保皐)에게 식실봉(食實封) 2,000호를 사여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4 강원도 강릉대도호부 인물조에 원성왕과의 왕위쟁탈전에서 패배한 김주원(金周元)을 명주군왕(溟州郡王)으로 봉하고 명주 예하의 익령(翼嶺)·삼척(三陟)·근을어(斤乙於)·울진(蔚珍) 등을 식읍으로 삼게 하였다고 전한다. 대체로 7세기 전반까지 지역을 단위로 식읍을 사여하다가 그 이후에 봉호 단위로 식읍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고 이해하고 있다.
국가에서는 식읍주에게 조용조를 수취할 수 있는 권리를 지급하였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며, 고려와 조선에서도 왕족 등에게 계속해서 식읍을 지급하였다(李景植; 전덕재, 320~322쪽). 한편 일부 학자는 작위와 식읍을 받고 개부(開府)를 허여 받은 진골들은 자신들의 식읍을 봉지(封地)로 여기고 독자적인 사병을 거느리는 등 마치 독립적인 열후(列侯)와 같은 존재였다고 이해하거나(徐毅植, 1996; 2010, 511~519쪽), 왕실 또는 공훈자(功勳者)에게 봉작(封爵)과 함께 식읍을 내림으로써 그들을 왕실의 번병(藩屛)으로 삼고 우대한다는 취지에서 운영한 제도가 바로 식읍제였다고 이해한 다음, 식읍은 태수․현령이 관장하는 군현과 독립된 상태로 병존하였고, 중앙 역역이 있을 때에 식읍주는 독립된 단위인 식읍에서 역부(役賦)를 낼 의무를 지고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河日植).
〈참고문헌〉
李景植, 1988, 「古代·中世의 食邑制의 構造와 展開, 『孫寶基博士 停年紀念 韓國史學論叢』
徐毅植, 1996, 「統一新羅期의 開府와 眞骨의 受封」, 『歷史敎育』 59
河日植, 2003, 「新羅 統一期의 貴族私領과 郡縣制-關門城 築城時의 力役編成 事例 分析-」, 『東方學志』 122
전덕재, 2006, 『한국고대사회경제사』, 태학사
서의식, 2010, 『신라의 정치구조와 신분편제』, 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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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08
본국을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였다: 『삼국유사』 권제2 기이제2 가락국기조에 가락국(駕洛國)의 마지막왕인 구형왕(仇衡王)이 동기(同氣: 인척(姻戚)) 탈지(脫知) 이질금(尼叱今))을 본국에 머물게 하였다고 전하는데, 신라 법흥왕이 금관국을 금관군(金官郡)으로 삼고, 구형왕(구해왕)에게 금관군을 식읍으로 사여하자, 구형왕이 탈지 이질금에게 식읍의 관리를 맡겼던 것으로 이해된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사실을 주목하여 지방 소국의 지배자가 신라에 항복하면, 소국지역을 그들의 식읍으로 지급하여 옛날의 지배권을 그대로 보장해주었다고 보고 있다(姜晋哲, 1980, 『高麗土地制度史硏究』, 高麗大學校出版部, 14쪽).바로가기
註) 009
각간(角干):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1등급인 이벌찬(伊伐飡)의 다른 이름이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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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http://db.history.go.kr/id/sa_001_0030_0020 (accessed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http://db.history.go.kr/id/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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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sa_001_0030_0020,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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