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호를 개국으로 바꾸다
(
551년
01월
)
12년(551) 봄 정월에 연호를 개국(開國)으로 바꾸었다.註 001
연호를 개국(開國)으로 바꾸었다: 개국(開國)은 ‘나라를 열다’는 뜻인데, 연호를 개국으로 바꾼 것을 통해 진흥왕이 다시 나라를 열었다고 천명할 정도로 무엇인가 정국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꾀하였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종래에 진흥왕이 7세에 즉위하였다고 이해한 다음, 18세인 진흥왕 12년(551) 정월에 지소태후(只召太后)의 섭정으로부터 벗어나 친정(親政)을 하면서 연호를 개국으로 바꾸었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李丙燾, 669쪽). 반면에 진흥왕이 15세에 즉위하였다고 이해한 경우는 진흥왕 6년(545)에 편찬한 『국사』를 왕통의 정통성을 천명하고 유교 정치이념에 입각하여 왕자(王者)의 존엄을 과시하는 성격의 사서로 규정한 다음, 15세에 즉위한 진흥왕이 친정체제로 들어갔음을 기념하는 의미를 지녔다고 평가하기도 하였다(李晶淑, 1994; 2012, 33쪽). 한편 진흥왕이 15세에 즉위하였다고 이해한 전제 아래, 친정체제를 한층 더 강화하고 정국운영을 주도하면서 대외팽창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의도에서 연호를 개국으로 바꾸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전덕재).
〈참고문헌〉
李丙燾, 1976, 「眞興大王의 偉業」,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李晶淑, 1994, 「眞興王의 卽位에 대한 몇 가지 문제」, 『釜山女大史學』 12; 2012, 『신라 중고기 정치사회 연구』, 혜안
전덕재, 2014, 「異斯夫의 家系와 政治的 位相」, 『史學硏究』 115
〈참고문헌〉
李丙燾, 1976, 「眞興大王의 偉業」,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李晶淑, 1994, 「眞興王의 卽位에 대한 몇 가지 문제」, 『釜山女大史學』 12; 2012, 『신라 중고기 정치사회 연구』, 혜안
전덕재, 2014, 「異斯夫의 家系와 政治的 位相」, 『史學硏究』 115
註) 001
연호를 개국(開國)으로 바꾸었다: 개국(開國)은 ‘나라를 열다’는 뜻인데, 연호를 개국으로 바꾼 것을 통해 진흥왕이 다시 나라를 열었다고 천명할 정도로 무엇인가 정국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꾀하였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종래에 진흥왕이 7세에 즉위하였다고 이해한 다음, 18세인 진흥왕 12년(551) 정월에 지소태후(只召太后)의 섭정으로부터 벗어나 친정(親政)을 하면서 연호를 개국으로 바꾸었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李丙燾, 669쪽). 반면에 진흥왕이 15세에 즉위하였다고 이해한 경우는 진흥왕 6년(545)에 편찬한 『국사』를 왕통의 정통성을 천명하고 유교 정치이념에 입각하여 왕자(王者)의 존엄을 과시하는 성격의 사서로 규정한 다음, 15세에 즉위한 진흥왕이 친정체제로 들어갔음을 기념하는 의미를 지녔다고 평가하기도 하였다(李晶淑, 1994; 2012, 33쪽). 한편 진흥왕이 15세에 즉위하였다고 이해한 전제 아래, 친정체제를 한층 더 강화하고 정국운영을 주도하면서 대외팽창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의도에서 연호를 개국으로 바꾸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전덕재).
〈참고문헌〉
李丙燾, 1976, 「眞興大王의 偉業」,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李晶淑, 1994, 「眞興王의 卽位에 대한 몇 가지 문제」, 『釜山女大史學』 12; 2012, 『신라 중고기 정치사회 연구』, 혜안
전덕재, 2014, 「異斯夫의 家系와 政治的 位相」, 『史學硏究』 115
〈참고문헌〉
李丙燾, 1976, 「眞興大王의 偉業」,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李晶淑, 1994, 「眞興王의 卽位에 대한 몇 가지 문제」, 『釜山女大史學』 12; 2012, 『신라 중고기 정치사회 연구』, 혜안
전덕재, 2014, 「異斯夫의 家系와 政治的 位相」, 『史學硏究』 115
주제분류
- 정치>왕실>국왕>국명·연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