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를 침공하여 10군을 빼앗다
(
551년
)
〔12년(551)〕 왕이 거칠부(居柒夫)註 001 등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침공하게 하였는데,註 002 승리한 기세를 타서 10군(郡)註 003을 빼앗았다.註 004
왕이 거칠부(居柒夫) 등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침입하여: 544년 12월 고구려 안원왕이 위독하였을 때, 중부인측(둘째부인: 추군(麤群))과 소부인측(셋째부인: 세군(細群))이 서로 자기의 아들을 왕으로 삼으려고 평양에서 시가전을 벌였다. 여기서 중부인측이 승리하여, 그녀의 아들인 양원왕이 545년 1월에 안원왕의 뒤를 이어 8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551년에 신라로 망명한 법사 혜량이 ‘고구려는 정란(政亂)으로 언제 망할지 모른다’고 언급한 것에서 544년 이후에도 귀족들의 내분이 지속되었음을 살필 수 있다(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397~401쪽). 신라와 백제는 고구려의 내분을 틈 타 서로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한 것으로 이해된다.
10군(郡): 본서 권제19 고구려본기제7 양원왕 7년(551)조에는 신라가 공격해 와서 10성(城)을 빼앗아갔다고 전한다. 이때 백제는 한강 하류지역을, 신라는 한강 상류지역을 차지한 것으로 이해한다. 종래에 10군을 나토군(奈吐郡: 충북 제천시)·평원군(平原郡: 강원도 원주시)·근평군(斤平郡: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양구군(楊口郡: 강원도 양구군 양구읍)·모성군(母城郡: 강원도 김화군 금성면; 북한 강원도 김화군 김화읍)·객연군(客連郡: 강원도 회양군 회양면; 북한 강원도 회양군 회양읍)·우수주(牛首州: 강원도 춘천시)·생천군(狌川郡: 강원도 화천군 화천읍)·대양관군(大陽管郡: 강원도 회양군 내금강면; 북한 강원도 금강군 금강읍)·나생군(奈生郡: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등 우수주 관할의 군으로 비정한 견해가 있었다(이인철, 1997; 2003, 108쪽; 張彰恩).
한편 본서 권제45 열전제5 온달조에 온달이 “신라가 한강 이북의 땅을 군현으로 빼앗았다. … 떠날 때 맹세하기를, ‘계립현(鷄立峴)과 죽령(竹嶺) 이서(以西)의 땅을 우리에게 귀속시키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하였다.”라는 기록이 전하고, 또한 본서 권제44 열전제4 거칠부조에 551년에 신라가 죽령(竹嶺) 바깥, 고현(高峴) 이내의 10군을 차지하였다고 전한다. 그리고 『일본서기(日本書紀)』 권19 흠명천황(欽明天皇) 13년조에 “이 해에 백제가 한성(漢城)과 평양(平壤)을 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신라가 한성에 들어가 살았으니, 현재 신라의 우두방(牛頭方)이다.”라고 전한다(여기서 우두방은 강원도 춘천시로 비정된다). 두 기록을 참조하건대, 신라가 551년에 자치한 10군에는 계립령과 죽령 이서지역의 충북지방과 강원도 춘천시를 비롯한 영서지역이 망라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종래에 이러한 사실에 주목하여, 10군을 우두군(牛頭郡)·근평군·양구군·성천군·평원군·나토군·잉근내군(仍斤內郡: 충북 괴산군 괴산읍)·술천군(述川郡: 경기도 여주시 흥천면)·금물내군(今勿內郡: 충북 진천군 진천읍)·개차산군(皆次山郡: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으로 비정한 견해가 제기되었다(전덕재).
〈참고문헌〉
이인철, 1997, 「신라의 한강유역진출과정에 대한 고찰」, 『鄕土서울』 57
이인철, 2003 『신라 정치경제사 연구』, 일지사
전덕재, 2009,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과 지배방식」, 『鄕土서울』 73
張彰恩, 2011, 「6세기 중반 한강 유역 쟁탈전과 管山城 戰鬪」, 『震檀學報』 111
한편 본서 권제45 열전제5 온달조에 온달이 “신라가 한강 이북의 땅을 군현으로 빼앗았다. … 떠날 때 맹세하기를, ‘계립현(鷄立峴)과 죽령(竹嶺) 이서(以西)의 땅을 우리에게 귀속시키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하였다.”라는 기록이 전하고, 또한 본서 권제44 열전제4 거칠부조에 551년에 신라가 죽령(竹嶺) 바깥, 고현(高峴) 이내의 10군을 차지하였다고 전한다. 그리고 『일본서기(日本書紀)』 권19 흠명천황(欽明天皇) 13년조에 “이 해에 백제가 한성(漢城)과 평양(平壤)을 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신라가 한성에 들어가 살았으니, 현재 신라의 우두방(牛頭方)이다.”라고 전한다(여기서 우두방은 강원도 춘천시로 비정된다). 두 기록을 참조하건대, 신라가 551년에 자치한 10군에는 계립령과 죽령 이서지역의 충북지방과 강원도 춘천시를 비롯한 영서지역이 망라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종래에 이러한 사실에 주목하여, 10군을 우두군(牛頭郡)·근평군·양구군·성천군·평원군·나토군·잉근내군(仍斤內郡: 충북 괴산군 괴산읍)·술천군(述川郡: 경기도 여주시 흥천면)·금물내군(今勿內郡: 충북 진천군 진천읍)·개차산군(皆次山郡: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으로 비정한 견해가 제기되었다(전덕재).
〈참고문헌〉
이인철, 1997, 「신라의 한강유역진출과정에 대한 고찰」, 『鄕土서울』 57
이인철, 2003 『신라 정치경제사 연구』, 일지사
전덕재, 2009,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과 지배방식」, 『鄕土서울』 73
張彰恩, 2011, 「6세기 중반 한강 유역 쟁탈전과 管山城 戰鬪」, 『震檀學報』 111
註) 002
왕이 거칠부(居柒夫) 등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침입하여: 544년 12월 고구려 안원왕이 위독하였을 때, 중부인측(둘째부인: 추군(麤群))과 소부인측(셋째부인: 세군(細群))이 서로 자기의 아들을 왕으로 삼으려고 평양에서 시가전을 벌였다. 여기서 중부인측이 승리하여, 그녀의 아들인 양원왕이 545년 1월에 안원왕의 뒤를 이어 8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551년에 신라로 망명한 법사 혜량이 ‘고구려는 정란(政亂)으로 언제 망할지 모른다’고 언급한 것에서 544년 이후에도 귀족들의 내분이 지속되었음을 살필 수 있다(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397~401쪽). 신라와 백제는 고구려의 내분을 틈 타 서로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한 것으로 이해된다.
註) 003
10군(郡): 본서 권제19 고구려본기제7 양원왕 7년(551)조에는 신라가 공격해 와서 10성(城)을 빼앗아갔다고 전한다. 이때 백제는 한강 하류지역을, 신라는 한강 상류지역을 차지한 것으로 이해한다. 종래에 10군을 나토군(奈吐郡: 충북 제천시)·평원군(平原郡: 강원도 원주시)·근평군(斤平郡: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양구군(楊口郡: 강원도 양구군 양구읍)·모성군(母城郡: 강원도 김화군 금성면; 북한 강원도 김화군 김화읍)·객연군(客連郡: 강원도 회양군 회양면; 북한 강원도 회양군 회양읍)·우수주(牛首州: 강원도 춘천시)·생천군(狌川郡: 강원도 화천군 화천읍)·대양관군(大陽管郡: 강원도 회양군 내금강면; 북한 강원도 금강군 금강읍)·나생군(奈生郡: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등 우수주 관할의 군으로 비정한 견해가 있었다(이인철, 1997; 2003, 108쪽; 張彰恩).
한편 본서 권제45 열전제5 온달조에 온달이 “신라가 한강 이북의 땅을 군현으로 빼앗았다. … 떠날 때 맹세하기를, ‘계립현(鷄立峴)과 죽령(竹嶺) 이서(以西)의 땅을 우리에게 귀속시키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하였다.”라는 기록이 전하고, 또한 본서 권제44 열전제4 거칠부조에 551년에 신라가 죽령(竹嶺) 바깥, 고현(高峴) 이내의 10군을 차지하였다고 전한다. 그리고 『일본서기(日本書紀)』 권19 흠명천황(欽明天皇) 13년조에 “이 해에 백제가 한성(漢城)과 평양(平壤)을 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신라가 한성에 들어가 살았으니, 현재 신라의 우두방(牛頭方)이다.”라고 전한다(여기서 우두방은 강원도 춘천시로 비정된다). 두 기록을 참조하건대, 신라가 551년에 자치한 10군에는 계립령과 죽령 이서지역의 충북지방과 강원도 춘천시를 비롯한 영서지역이 망라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종래에 이러한 사실에 주목하여, 10군을 우두군(牛頭郡)·근평군·양구군·성천군·평원군·나토군·잉근내군(仍斤內郡: 충북 괴산군 괴산읍)·술천군(述川郡: 경기도 여주시 흥천면)·금물내군(今勿內郡: 충북 진천군 진천읍)·개차산군(皆次山郡: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으로 비정한 견해가 제기되었다(전덕재).
〈참고문헌〉
이인철, 1997, 「신라의 한강유역진출과정에 대한 고찰」, 『鄕土서울』 57
이인철, 2003 『신라 정치경제사 연구』, 일지사
전덕재, 2009,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과 지배방식」, 『鄕土서울』 73
張彰恩, 2011, 「6세기 중반 한강 유역 쟁탈전과 管山城 戰鬪」, 『震檀學報』 111
한편 본서 권제45 열전제5 온달조에 온달이 “신라가 한강 이북의 땅을 군현으로 빼앗았다. … 떠날 때 맹세하기를, ‘계립현(鷄立峴)과 죽령(竹嶺) 이서(以西)의 땅을 우리에게 귀속시키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하였다.”라는 기록이 전하고, 또한 본서 권제44 열전제4 거칠부조에 551년에 신라가 죽령(竹嶺) 바깥, 고현(高峴) 이내의 10군을 차지하였다고 전한다. 그리고 『일본서기(日本書紀)』 권19 흠명천황(欽明天皇) 13년조에 “이 해에 백제가 한성(漢城)과 평양(平壤)을 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신라가 한성에 들어가 살았으니, 현재 신라의 우두방(牛頭方)이다.”라고 전한다(여기서 우두방은 강원도 춘천시로 비정된다). 두 기록을 참조하건대, 신라가 551년에 자치한 10군에는 계립령과 죽령 이서지역의 충북지방과 강원도 춘천시를 비롯한 영서지역이 망라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종래에 이러한 사실에 주목하여, 10군을 우두군(牛頭郡)·근평군·양구군·성천군·평원군·나토군·잉근내군(仍斤內郡: 충북 괴산군 괴산읍)·술천군(述川郡: 경기도 여주시 흥천면)·금물내군(今勿內郡: 충북 진천군 진천읍)·개차산군(皆次山郡: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으로 비정한 견해가 제기되었다(전덕재).
〈참고문헌〉
이인철, 1997, 「신라의 한강유역진출과정에 대한 고찰」, 『鄕土서울』 57
이인철, 2003 『신라 정치경제사 연구』, 일지사
전덕재, 2009,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과 지배방식」, 『鄕土서울』 73
張彰恩, 2011, 「6세기 중반 한강 유역 쟁탈전과 管山城 戰鬪」, 『震檀學報』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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