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무열왕이 죽다 ( 661년 06월(음) )

〔8년(661) 6월〕 왕이 돌아가셨다. 시호(諡號)를 무열(武烈)이라 하고, 영경사(永敬寺)001001 영경사(永敬寺): 종래에 애공사(哀公寺)와 영경사를 동일한 사찰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한 다음, 서악동고분군 가운데 4호분 남쪽 50m 지점에서 발견된 폐사지를 애공사의 터로 보는 견해가 제기되었다(이근직, 231~239쪽). 반면에 서악동고군의 4호분 남쪽에서 발견된 폐사지는 애공사의 터, 태종무열왕릉 남쪽의 폐사지는 영경사의 터로 보는 견해가 최근에 새로 재기되었다(최민희). 종래에 태종무열왕릉에서 발견된 유적은 폐사지로 볼 수 없다는 견해가 제기되어(이근직, 237~238쪽), 그곳이 영경사의 터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되고 있다.
〈참고문헌〉
이근직, 2013, 『신라왕릉연구』, 학연문화사
최민희, 2017, 「경주 서악동고분군에 대한 새로운 왕릉 명칭 비정」, 『신라사학보』 40
닫기
의 북쪽에 장사를 지냈으며,002002 영경사(永敬寺)의 북쪽에 장사를 지냈으며:『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조에는 애공사(哀公寺) 동쪽에 장사지내고, 비(碑)를 세웠다고 기록되었다.닫기 태종(太宗)이라는 묘호(廟號)003003 묘호(廟號): 묘호는 황제나 왕이 죽은 뒤 종묘에 신위를 모실 때 붙이는 호를 가리킨다. 신라에서 김춘추에게만 ‘태종(太宗)’이란 묘호를 올렸다. 신문왕(神文王) 12년(692) 당(唐) 중종(中宗)이 사신을 보내 태종무열왕의 묘호가 당 태종의 것과 같다고 항의하였다. 신라 조정은 태종무열왕이 김유신과 같은 어진 신하를 얻어 삼한을 일통하였으므로 당 태종의 업적과 비견할 수 있다고 하여 당의 요청을 거절하고 태종 묘호를 유지하였다. 한편 ‘태종무열왕’ 전체를 시호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윤경진, 2013, 「新羅 中代 太宗(武烈王) 諡號의 追上과 재해석」, 『한국사학보』 53).닫기를 올렸다. 〔당나라의〕 고종(高宗)이 〔무열왕의〕 부고를 듣고 낙성문(洛城門)004004 낙성문(洛城門): 당나라의 도성인 장안성에 모두 12개의 성문이 있었다. 그 중 북쪽 3개 문 가운데 하나가 낙성문(洛城門)이다. 한(漢)나라 때 장안성의 북쪽 성벽의 동단(東端)에 있었으며, 낙수(洛水)로 통하기 때문에 낙성문이라고 이름하였다. 왕망(王莽)이 서한(西漢)의 3묘(廟)를 이곳에 옮겨 제사처로 삼았다.닫기에서 애도식을 거행하였다.005005 〔당나라의〕 고종(高宗)이 … 애도식을 거행하였다. : 『책부원귀(冊府元龜)』 권964 외신부 봉책제2에 따르면,용삭(龍朔) 원년(661) 9월에 당나라 고종이 사절을 보내 조문하고 후사인 김법민(金法敏)에게 책서를 내려 신라왕(新羅王)으로 삼았다고 전한다.닫기

註 001
영경사(永敬寺): 종래에 애공사(哀公寺)와 영경사를 동일한 사찰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한 다음, 서악동고분군 가운데 4호분 남쪽 50m 지점에서 발견된 폐사지를 애공사의 터로 보는 견해가 제기되었다(이근직, 231~239쪽). 반면에 서악동고군의 4호분 남쪽에서 발견된 폐사지는 애공사의 터, 태종무열왕릉 남쪽의 폐사지는 영경사의 터로 보는 견해가 최근에 새로 재기되었다(최민희). 종래에 태종무열왕릉에서 발견된 유적은 폐사지로 볼 수 없다는 견해가 제기되어(이근직, 237~238쪽), 그곳이 영경사의 터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되고 있다.
〈참고문헌〉
이근직, 2013, 『신라왕릉연구』, 학연문화사
최민희, 2017, 「경주 서악동고분군에 대한 새로운 왕릉 명칭 비정」, 『신라사학보』 40
註 002
영경사(永敬寺)의 북쪽에 장사를 지냈으며:『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조에는 애공사(哀公寺) 동쪽에 장사지내고, 비(碑)를 세웠다고 기록되었다.
註 003
묘호(廟號): 묘호는 황제나 왕이 죽은 뒤 종묘에 신위를 모실 때 붙이는 호를 가리킨다. 신라에서 김춘추에게만 ‘태종(太宗)’이란 묘호를 올렸다. 신문왕(神文王) 12년(692) 당(唐) 중종(中宗)이 사신을 보내 태종무열왕의 묘호가 당 태종의 것과 같다고 항의하였다. 신라 조정은 태종무열왕이 김유신과 같은 어진 신하를 얻어 삼한을 일통하였으므로 당 태종의 업적과 비견할 수 있다고 하여 당의 요청을 거절하고 태종 묘호를 유지하였다. 한편 ‘태종무열왕’ 전체를 시호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윤경진, 2013, 「新羅 中代 太宗(武烈王) 諡號의 追上과 재해석」, 『한국사학보』 53).
註 004
낙성문(洛城門): 당나라의 도성인 장안성에 모두 12개의 성문이 있었다. 그 중 북쪽 3개 문 가운데 하나가 낙성문(洛城門)이다. 한(漢)나라 때 장안성의 북쪽 성벽의 동단(東端)에 있었으며, 낙수(洛水)로 통하기 때문에 낙성문이라고 이름하였다. 왕망(王莽)이 서한(西漢)의 3묘(廟)를 이곳에 옮겨 제사처로 삼았다.
註 005
〔당나라의〕 고종(高宗)이 … 애도식을 거행하였다. : 『책부원귀(冊府元龜)』 권964 외신부 봉책제2에 따르면,용삭(龍朔) 원년(661) 9월에 당나라 고종이 사절을 보내 조문하고 후사인 김법민(金法敏)에게 책서를 내려 신라왕(新羅王)으로 삼았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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