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왕이 항복하다
(
668년
09월
21일
)
〔8년(668)〕 9월 21일에 대군(大軍)[당나라 군대]과 합하여 평양(平壤)을 포위하였다. 고구려왕이 먼저 천남산(泉男産)註 001 등을 보내어 영공(英公)에게 나아가 항복을 청하였다. 이에 영공은 왕 보장(寳臧)註 002과 왕자 복남(福男)註 003·덕남(德男)註 004 및 대신 등 20여 만 명을 데리고 당나라로 돌아갔다.註 005 각간 김인문과 대아찬 조주(助州)註 006는 영공을 따라 돌아갔으며, 인태(仁泰)·의복(義福)·수세(藪世)·천광(天光)·흥원(興元)도 따라 갔다. 애초에 대군이 고구려를 평정하자 왕은 한성(漢城)을 나서 평양을 향하였는데, 힐차양(肹次壤)註 008에 다다라서 당나라의 여러 장수들이 이미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와 한성(漢城)에 이르렀다.
복남(福男): 고구려의 마지막 왕 보장왕의 아들이다. 666년에 당나라 고종의 태산(泰山) 봉선(封禪) 의식에 참석한 바 있다. (『신당서(新唐書)』 권220 고려전)에는 ‘남복(男福)’으로 표기되었다. 복남이 봉선에 참석하기 위해 입조한 시점에 대해서는 『신당서』 권220 고려전에는 건봉(乾封) 원년(666)으로 전하지만, 『구당서(舊唐書)』 고종본기4에는 인덕(麟德) 2년(665) 10월로, 『자치통감(資治通鑑)』 당기17에는 인덕 2년 8월로 기록되어 있어 차이를 보이고 있다.
영공은 … 20여 만 명을 데리고 당나라로 돌아갔다: 20여 만 명이라는 숫자는 667년 9월 신성 함락부터 668년 9월 평양성 함락에 이르는 1년 간 발생한 포로의 규모를 모두 합한 것으로, 그들의 이동도 한 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순차적으로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들의 행방은 기록에 남아 있지 않지만, 645년 고구려 포로의 안치나 660년 백제 유민의 안치 방식을 참고할 때, 회군 도중 징발지를 중심으로 여러 주에 분산하여 안치시켰을 것으로 추정된다(金秀鎭, 2017, 「唐京 高句麗 遺民 硏究」,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58~59쪽).
註) 001
註) 002
註) 003
복남(福男): 고구려의 마지막 왕 보장왕의 아들이다. 666년에 당나라 고종의 태산(泰山) 봉선(封禪) 의식에 참석한 바 있다. (『신당서(新唐書)』 권220 고려전)에는 ‘남복(男福)’으로 표기되었다. 복남이 봉선에 참석하기 위해 입조한 시점에 대해서는 『신당서』 권220 고려전에는 건봉(乾封) 원년(666)으로 전하지만, 『구당서(舊唐書)』 고종본기4에는 인덕(麟德) 2년(665) 10월로, 『자치통감(資治通鑑)』 당기17에는 인덕 2년 8월로 기록되어 있어 차이를 보이고 있다.
註) 005
영공은 … 20여 만 명을 데리고 당나라로 돌아갔다: 20여 만 명이라는 숫자는 667년 9월 신성 함락부터 668년 9월 평양성 함락에 이르는 1년 간 발생한 포로의 규모를 모두 합한 것으로, 그들의 이동도 한 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순차적으로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들의 행방은 기록에 남아 있지 않지만, 645년 고구려 포로의 안치나 660년 백제 유민의 안치 방식을 참고할 때, 회군 도중 징발지를 중심으로 여러 주에 분산하여 안치시켰을 것으로 추정된다(金秀鎭, 2017, 「唐京 高句麗 遺民 硏究」,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58~59쪽).
註) 006
주제분류
- 정치>군사>전쟁>전쟁결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