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왕 답서: 신라와 당이 고구려 원정에 나서다
(
671년
07월
26일
)
“건봉(乾封)註 001 2년(667)에 이르러서는 대총관註 002 영국공(英國公)註 003이 요동을 정벌한다는 말을 듣고서 〔나는〕 한성주(漢城州)註 004에 가서 군사를 보내 국경 가까이에 모이게 하였습니다.註 005 신라 병마가 홀로 쳐들어가서는 안 되었으므로 먼저 간자(間者)를 세 번이나 보내고 배를 계속해서 띄워 대군의 동정을 살펴보게 하였습니다.註 006 간자가 돌아와서 모두 ‘대군이 아직 평양에 도착하지 않았다.’고 하였으므로, 우선 고구려의 칠중성(七重城)註 007을 쳐서註 008 길을 뚫고 대군이 이르기를 기다리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성을 막 깨뜨리려고 할 때 영공이 보낸 강심(江深)註 009이 와서 ‘대총관의 처분을 받들어 신라 병마는 성을 공격할 필요 없이 빨리 평양으로 와서 군량을 공급하고 모이라’고 말하였습니다.註 010 행렬이 수곡성(水谷城)註 011에 이르렀을 때 대군이 이미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신라 병마도 마침내 곧 빠져나왔습니다.”註 012
영국공(英國公): 당나라 장수 이적(李勣)을 말한다. 『구당서(舊唐書)』 권제67 이적전에 따르면, 이적은 정관 11년(637)에 영국공(英國公)에 봉해졌으므로 그를 영공(英公) 혹은 영국공(英國公)이라 칭하였다고 한다(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33쪽).
건봉(乾封) 2년(667)에 …… 모이게 하였습니다: 본서 권제6 신라본기제6 문무왕 7년(667)조에는 당 고종이 유인원·김인태에게 명하여 비열도(卑列道)로, 신라군은 다곡도(多谷道)와 해곡도(海谷道)로 하여 모두 평양에 모이게 하였다고 전한다. 이에 8월에 문무왕은 대각간 김유신 등 30명의 장군을 거느리고 경주를 출발하여 9월에 한성정(漢城停)에 도착해, 당군의 이적(李勣)이 오기를 기다렸다고 되어 있다. 평산의 옛 지명은 대곡(大谷)이고 신계에는 수곡성(水谷城)이 위치하고 있는데, 대곡을 경유하는 행군로는 다곡도로, 수곡을 경유하는 행군로는 해곡도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池內宏, 1928, 「唐の高宗の高句麗討滅の役と卑列道·多谷道·海谷道の稱」, 『東洋學報』 17-1). 그리고 비열도는 크게 우회해 비열홀(북한의 안변군 안변읍)을 경유하여 평양으로 가는 행군로인데, 청일전쟁기 원산에 상륙한 일본군 분견대가 이 길을 이용해 평양으로 이동한 적이 있다. 한성정에 대해서는 본서 권제6 신라본기제6 문무왕 7년 9월조 참조.
먼저 간자(間者)를 …… 살펴보게 하였습니다: 신라는 당군의 움직임을 파악하기 위해 세 차례 세작(細作)을 파견하였다. 이를 위해 세 척의 작은 배가 동원되었는데, 시간 순서대로 차례차례 파견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이들이 동시에 파견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여러 차례 혹은 동시에 여러 팀을 보냄으로써, 이들의 귀환 가능성을 높이고자 했던 것 같다. 이들이 가져온 첩보를 교차 검증함으로써 정보의 신뢰성도 높일 수 있었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나라의 존망을 두고 치열한 전투를 벌였기 때문에, 첩보 활동 역시 성행할 수밖에 없었다(김영수, 1993).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에도 우수한 정보망을 이용해, 당나라와의 전쟁에 활용하였다. 671년 1월에는 당군이 웅진도독부에 구원군을 파견한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서해의 옹포(甕浦)에 부대를 배치하였고, 673년 9월에 당군이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입하기 전에 미리 병선 100척을 파견해 서해를 방어하기도 하였다. 또 675년 2월에는 당군이 말갈과 거란을 거느리고 공격한다는 보고를 받고, 사전에 부대를 배치하여 북변을 방어하였다. 신라는 당에 비해 군사력이 약세였기 때문에, 단 한 번의 패배로도 결정적 타격을 입을 수 있었기 때문에, 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군사를 신중히 운용했던 것으로 여겨진다(이상훈, 2015, 155~163쪽).
〈참고문헌〉
이상훈, 2015, 『신라는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푸른역사
김영수, 1993, 「고대 첩자고」, 『군사』 27
〈참고문헌〉
이상훈, 2015, 『신라는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푸른역사
김영수, 1993, 「고대 첩자고」, 『군사』 27
칠중성(七重城): 지금의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중성산(重城山)에 위치한 성으로 비정되고 있다. 중성산은 해발 147m로 정상부의 8~9부 능선에 칠중성이 위치하고 있다. 칠중성의 전체 둘레는 600m이고, 평면 형태는 남북 198m, 동서 168m로 남북이 긴 장방형 형태로 삼국시대에 축조된 산성이다(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1994, 38쪽; 경기도박물관, 2001, 275쪽; 단국대 매장문화연구소·파주시, 2001, 253쪽). 이 일대는 감악산(紺岳山)에서 파평산(坡平山)으로 이어지는 감악산지에서 북쪽의 임진강을 향하여 발달한 북사면에 해당되는 곳이다. 그리고 칠중성은 감악산에서 북쪽의 임진강 방향으로 뻗어 있는 지맥 말단부의 급경사면 위에 축조되어 있다(이준선, 2005, 151쪽; 김덕원, 2019, 336쪽). 칠중성이 위치한 적성지역은 삼국시대부터 지금까지 임진강 유역을 방어하는 핵심지역이다(서영일, 2017, 203~204쪽). 칠중성과 관련된 기록이 처음 보이는 것은 온조왕 18년(기원전 1)에 백제가 북쪽 변경을 침입한 말갈과 칠중하(七重河)에서 싸웠다는 것이다. 그리고 4세기대까지는 적성지역이 백제의 영향력 아래에 놓여 있다가, 삼국이 고대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한강유역과 임진강유역에서 치열한 각축을 벌이게 되었다. 이후 7세기 초기에 신라가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을 함락시킨 것을 계기로 임진강과 한탄강까지 영역을 확장하면서 칠중성을 확보하였다. 그러다가 667년 무렵에 고구려가 일시적으로 차지하였지만,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에는 신라가 다시 영유하였다. 나당전쟁 시기에 이르러 신라와 당 사이의 주 전선이 임진강 일대가 되면서 칠중성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게 되었다(김덕원, 2019, 366쪽).
〈참고문헌〉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1994, 『경기도 파주군 군사유적 지표조사 보고서』
경기도박물관, 2001, 『임진강 vol.2』
단국대 매장문화연구소·파주시, 2001, 『파주 칠중성 지표조사 보고서』
이준선, 2005, 「칠중성과 고랑포의 역사지리적 고찰」, 『애산학보』 31
서영일, 2017, 「삼국시대 임진강 유역 관방체계와 덕진산성」, 『백제문화』 56
김덕원, 2019, 「칠중성의 영유권 변천과 전략적 역할」, 『한국고대사탐구』 33
〈참고문헌〉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1994, 『경기도 파주군 군사유적 지표조사 보고서』
경기도박물관, 2001, 『임진강 vol.2』
단국대 매장문화연구소·파주시, 2001, 『파주 칠중성 지표조사 보고서』
이준선, 2005, 「칠중성과 고랑포의 역사지리적 고찰」, 『애산학보』 31
서영일, 2017, 「삼국시대 임진강 유역 관방체계와 덕진산성」, 『백제문화』 56
김덕원, 2019, 「칠중성의 영유권 변천과 전략적 역할」, 『한국고대사탐구』 33
고구려의 칠중성(七重城)을 쳐서: 본서 권제42 열전제2 김유신중(中)조에는 662년 정월에 김유신이 신라군을 이끌고 평양성을 포위하고 있던 소정방(蘇定方)의 당군에게 군량을 전달했던 상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김유신은 정월 23일 칠중하(七重河)에 이르러 강을 건너 고구려 영역으로 들어가고자 하였다. 이때 칠중하 남안 즉 칠중성이 위치한 곳은 신라 영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667년에 신라는 고구려의 칠중성을 쳐서 길을 뚫었다고 되어 있다. 고구려가 어느 시점에 칠중성을 장악한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660년에 백제가 멸망한 이후 부흥운동이 거세게 지속되던 663년을 전후하여 점령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고구려는 667년까지 칠중성을 그대로 차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성을 …… 모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본서 권제6 신라본기제6 문무왕 7년 10월 2일조에는 당군 이적이 평양성 북쪽 200리 되는 곳에 이르러, 이동혜(尒同兮) 촌주 대나마 강심(江深)을 시켜 거란 기병 80여 명을 인솔하고 아진함성(阿珍含城)을 지나 한성(漢城)에 이르러 편지로 출병일을 독촉하였다고 전한다. 당군의 이적(李勣)은 요동을 지나 압록강을 건넌 후 남하하여 평양성으로 접근해왔다. 이적의 행군 경로는 대행성-압록책-평양성 순이었다. 구체적인 행로는 전하지 않지만 대체로 신성(新城)-요동성(遼東城)-오골성(烏骨城)-대행성(大行城) 루트였던 것으로 짐작된다(노태돈, 2009, 215쪽). 이적은 압록책을 깨뜨리고 200여 리를 남하하여 욕이성(辱夷城)을 점령하였는데, 욕이성은 지금의 안주(安州) 지역으로 추정되고 있다(池內宏, 1928). 안주성은 고구려 시기부터 줄곧 청천강 일대를 수비하는 서북지역 중심성의 하나로 기능해 왔다. 북쪽으로 의주를 거쳐 요동으로 통하고, 동쪽으로 개천·순천을 거쳐 함경남도와 강원도로 통하며, 남쪽으로 평양을 거쳐 황해도로 통하고, 서쪽으로 청천강을 거쳐 서해로 통하는 교통 요충지였다(서일범, 1999, 125~126쪽).
〈참고문헌〉
노태돈, 2009, 『삼국통일전쟁사』, 서울대학교출판부
서일범, 1999, 「북한 내의 고구려 성 분포와 연구현황」, 『고구려발해연구』 8
池內宏, 1928, 「唐の高宗の高句麗討滅の役と卑列道·多谷道·海谷道の稱」, 『東洋學報』 17-1
〈참고문헌〉
노태돈, 2009, 『삼국통일전쟁사』, 서울대학교출판부
서일범, 1999, 「북한 내의 고구려 성 분포와 연구현황」, 『고구려발해연구』 8
池內宏, 1928, 「唐の高宗の高句麗討滅の役と卑列道·多谷道·海谷道の稱」, 『東洋學報』 17-1
수곡성(水谷城): 본서 권제35 잡지제4 지리2 신라 영풍군조에는 “단계현(檀溪縣)은 원래 고구려의 수곡성현으로 경덕왕이 개명하였으며, 지금의 협계현(俠溪縣)이다.”라고 전한다. 또 본서 권제37 잡지제6 지리4 고구려 한산주조에는 수곡성현은 매단홀(買旦忽)이라고도 한다고도 되어 있다. 수곡성은 황해도 신계 지역에 있던 고구려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본서 권제24 백제본기제2 근초고왕 30년 7월조에 고구려가 북변의 수곡성을 함락시켰다고 전하고, 본서 권제25 백제본기제3 아신왕 3년 7월조에 고구려와 수곡성 아래에서 싸웠으나 패하였다고 되어 있다. 또 본서 권제26 백제본기제4 무녕왕 원년 11월조에 달솔 우영으로 하여금 군사 5,000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수곡성을 치게 하였다고 전한다. 수곡성은 고구려와 백제 사이의 주요 전장이 되었고, 이후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북상함에 따라 고구려와 신라 사이에 주요한 전장으로 등장하게 된다.
행렬이 수곡성(水谷城)에 …… 곧 빠져나왔습니다: 본서 권제6 신라본기제6 문무왕 7년(667) 11월 11일조에는 문무왕이 장새(獐塞)이 이르렀을 때 거기서 이적(李勣)이 귀환하였다는 말을 듣고 신라군도 돌아오게 되었고, 곧 강심에게 급찬의 벼슬을 주고 곡식 500석을 주었다고 전한다. 앞서 당군은 강심을 보내 군사 동원 기일을 독려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일방적으로 귀환해 버린 것이다. 본서 권제6 신라본기제6 문무왕 원년조(661)에 당은 황제의 명으로 신라에게 평양으로 군량을 수송하라고 하였다고 전한다. 또 본서 권제6 신라본기제6 문무왕 2년조(662)에 군량을 전달받은 당군이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신라군도 철수를 시작하였다. 당은 자신들에게 필요한 신라군의 군량 수송이나 행군 독려 시에는 철저히 조서나 서신을 보내 명령을 전달하였다. 하지만 본 기록에서 보듯이 나당연합군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정보 공유가 되지 않고 있었다. 신라 국왕이 직접 참전했음에도 불구하고 당나라가 정보 전달을 제대로 해주지 않았으며, 군사작전권은 오로지 당군에게 있었던 것이다. 이외에도 장수 임명이나 병력 징발도 당군이 임의대로 하였고, 이러한 현실적인 문제들은 이후 나당전쟁의 군사적 원인 중 하나로 작동하게 된다(이상훈, 2012, 『나당전쟁 연구』, 주류성, 72쪽).
註) 002
註) 003
영국공(英國公): 당나라 장수 이적(李勣)을 말한다. 『구당서(舊唐書)』 권제67 이적전에 따르면, 이적은 정관 11년(637)에 영국공(英國公)에 봉해졌으므로 그를 영공(英公) 혹은 영국공(英國公)이라 칭하였다고 한다(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33쪽).
註) 005
건봉(乾封) 2년(667)에 …… 모이게 하였습니다: 본서 권제6 신라본기제6 문무왕 7년(667)조에는 당 고종이 유인원·김인태에게 명하여 비열도(卑列道)로, 신라군은 다곡도(多谷道)와 해곡도(海谷道)로 하여 모두 평양에 모이게 하였다고 전한다. 이에 8월에 문무왕은 대각간 김유신 등 30명의 장군을 거느리고 경주를 출발하여 9월에 한성정(漢城停)에 도착해, 당군의 이적(李勣)이 오기를 기다렸다고 되어 있다. 평산의 옛 지명은 대곡(大谷)이고 신계에는 수곡성(水谷城)이 위치하고 있는데, 대곡을 경유하는 행군로는 다곡도로, 수곡을 경유하는 행군로는 해곡도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池內宏, 1928, 「唐の高宗の高句麗討滅の役と卑列道·多谷道·海谷道の稱」, 『東洋學報』 17-1). 그리고 비열도는 크게 우회해 비열홀(북한의 안변군 안변읍)을 경유하여 평양으로 가는 행군로인데, 청일전쟁기 원산에 상륙한 일본군 분견대가 이 길을 이용해 평양으로 이동한 적이 있다. 한성정에 대해서는 본서 권제6 신라본기제6 문무왕 7년 9월조 참조.
註) 006
먼저 간자(間者)를 …… 살펴보게 하였습니다: 신라는 당군의 움직임을 파악하기 위해 세 차례 세작(細作)을 파견하였다. 이를 위해 세 척의 작은 배가 동원되었는데, 시간 순서대로 차례차례 파견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이들이 동시에 파견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여러 차례 혹은 동시에 여러 팀을 보냄으로써, 이들의 귀환 가능성을 높이고자 했던 것 같다. 이들이 가져온 첩보를 교차 검증함으로써 정보의 신뢰성도 높일 수 있었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나라의 존망을 두고 치열한 전투를 벌였기 때문에, 첩보 활동 역시 성행할 수밖에 없었다(김영수, 1993).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에도 우수한 정보망을 이용해, 당나라와의 전쟁에 활용하였다. 671년 1월에는 당군이 웅진도독부에 구원군을 파견한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서해의 옹포(甕浦)에 부대를 배치하였고, 673년 9월에 당군이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입하기 전에 미리 병선 100척을 파견해 서해를 방어하기도 하였다. 또 675년 2월에는 당군이 말갈과 거란을 거느리고 공격한다는 보고를 받고, 사전에 부대를 배치하여 북변을 방어하였다. 신라는 당에 비해 군사력이 약세였기 때문에, 단 한 번의 패배로도 결정적 타격을 입을 수 있었기 때문에, 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군사를 신중히 운용했던 것으로 여겨진다(이상훈, 2015, 155~163쪽).
〈참고문헌〉
이상훈, 2015, 『신라는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푸른역사
김영수, 1993, 「고대 첩자고」, 『군사』 27
〈참고문헌〉
이상훈, 2015, 『신라는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푸른역사
김영수, 1993, 「고대 첩자고」, 『군사』 27
註) 007
칠중성(七重城): 지금의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중성산(重城山)에 위치한 성으로 비정되고 있다. 중성산은 해발 147m로 정상부의 8~9부 능선에 칠중성이 위치하고 있다. 칠중성의 전체 둘레는 600m이고, 평면 형태는 남북 198m, 동서 168m로 남북이 긴 장방형 형태로 삼국시대에 축조된 산성이다(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1994, 38쪽; 경기도박물관, 2001, 275쪽; 단국대 매장문화연구소·파주시, 2001, 253쪽). 이 일대는 감악산(紺岳山)에서 파평산(坡平山)으로 이어지는 감악산지에서 북쪽의 임진강을 향하여 발달한 북사면에 해당되는 곳이다. 그리고 칠중성은 감악산에서 북쪽의 임진강 방향으로 뻗어 있는 지맥 말단부의 급경사면 위에 축조되어 있다(이준선, 2005, 151쪽; 김덕원, 2019, 336쪽). 칠중성이 위치한 적성지역은 삼국시대부터 지금까지 임진강 유역을 방어하는 핵심지역이다(서영일, 2017, 203~204쪽). 칠중성과 관련된 기록이 처음 보이는 것은 온조왕 18년(기원전 1)에 백제가 북쪽 변경을 침입한 말갈과 칠중하(七重河)에서 싸웠다는 것이다. 그리고 4세기대까지는 적성지역이 백제의 영향력 아래에 놓여 있다가, 삼국이 고대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한강유역과 임진강유역에서 치열한 각축을 벌이게 되었다. 이후 7세기 초기에 신라가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을 함락시킨 것을 계기로 임진강과 한탄강까지 영역을 확장하면서 칠중성을 확보하였다. 그러다가 667년 무렵에 고구려가 일시적으로 차지하였지만,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에는 신라가 다시 영유하였다. 나당전쟁 시기에 이르러 신라와 당 사이의 주 전선이 임진강 일대가 되면서 칠중성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게 되었다(김덕원, 2019, 366쪽).
〈참고문헌〉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1994, 『경기도 파주군 군사유적 지표조사 보고서』
경기도박물관, 2001, 『임진강 vol.2』
단국대 매장문화연구소·파주시, 2001, 『파주 칠중성 지표조사 보고서』
이준선, 2005, 「칠중성과 고랑포의 역사지리적 고찰」, 『애산학보』 31
서영일, 2017, 「삼국시대 임진강 유역 관방체계와 덕진산성」, 『백제문화』 56
김덕원, 2019, 「칠중성의 영유권 변천과 전략적 역할」, 『한국고대사탐구』 33
〈참고문헌〉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1994, 『경기도 파주군 군사유적 지표조사 보고서』
경기도박물관, 2001, 『임진강 vol.2』
단국대 매장문화연구소·파주시, 2001, 『파주 칠중성 지표조사 보고서』
이준선, 2005, 「칠중성과 고랑포의 역사지리적 고찰」, 『애산학보』 31
서영일, 2017, 「삼국시대 임진강 유역 관방체계와 덕진산성」, 『백제문화』 56
김덕원, 2019, 「칠중성의 영유권 변천과 전략적 역할」, 『한국고대사탐구』 33
註) 008
고구려의 칠중성(七重城)을 쳐서: 본서 권제42 열전제2 김유신중(中)조에는 662년 정월에 김유신이 신라군을 이끌고 평양성을 포위하고 있던 소정방(蘇定方)의 당군에게 군량을 전달했던 상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김유신은 정월 23일 칠중하(七重河)에 이르러 강을 건너 고구려 영역으로 들어가고자 하였다. 이때 칠중하 남안 즉 칠중성이 위치한 곳은 신라 영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667년에 신라는 고구려의 칠중성을 쳐서 길을 뚫었다고 되어 있다. 고구려가 어느 시점에 칠중성을 장악한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660년에 백제가 멸망한 이후 부흥운동이 거세게 지속되던 663년을 전후하여 점령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고구려는 667년까지 칠중성을 그대로 차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註) 010
그래서 성을 …… 모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본서 권제6 신라본기제6 문무왕 7년 10월 2일조에는 당군 이적이 평양성 북쪽 200리 되는 곳에 이르러, 이동혜(尒同兮) 촌주 대나마 강심(江深)을 시켜 거란 기병 80여 명을 인솔하고 아진함성(阿珍含城)을 지나 한성(漢城)에 이르러 편지로 출병일을 독촉하였다고 전한다. 당군의 이적(李勣)은 요동을 지나 압록강을 건넌 후 남하하여 평양성으로 접근해왔다. 이적의 행군 경로는 대행성-압록책-평양성 순이었다. 구체적인 행로는 전하지 않지만 대체로 신성(新城)-요동성(遼東城)-오골성(烏骨城)-대행성(大行城) 루트였던 것으로 짐작된다(노태돈, 2009, 215쪽). 이적은 압록책을 깨뜨리고 200여 리를 남하하여 욕이성(辱夷城)을 점령하였는데, 욕이성은 지금의 안주(安州) 지역으로 추정되고 있다(池內宏, 1928). 안주성은 고구려 시기부터 줄곧 청천강 일대를 수비하는 서북지역 중심성의 하나로 기능해 왔다. 북쪽으로 의주를 거쳐 요동으로 통하고, 동쪽으로 개천·순천을 거쳐 함경남도와 강원도로 통하며, 남쪽으로 평양을 거쳐 황해도로 통하고, 서쪽으로 청천강을 거쳐 서해로 통하는 교통 요충지였다(서일범, 1999, 125~126쪽).
〈참고문헌〉
노태돈, 2009, 『삼국통일전쟁사』, 서울대학교출판부
서일범, 1999, 「북한 내의 고구려 성 분포와 연구현황」, 『고구려발해연구』 8
池內宏, 1928, 「唐の高宗の高句麗討滅の役と卑列道·多谷道·海谷道の稱」, 『東洋學報』 17-1
〈참고문헌〉
노태돈, 2009, 『삼국통일전쟁사』, 서울대학교출판부
서일범, 1999, 「북한 내의 고구려 성 분포와 연구현황」, 『고구려발해연구』 8
池內宏, 1928, 「唐の高宗の高句麗討滅の役と卑列道·多谷道·海谷道の稱」, 『東洋學報』 17-1
註) 011
수곡성(水谷城): 본서 권제35 잡지제4 지리2 신라 영풍군조에는 “단계현(檀溪縣)은 원래 고구려의 수곡성현으로 경덕왕이 개명하였으며, 지금의 협계현(俠溪縣)이다.”라고 전한다. 또 본서 권제37 잡지제6 지리4 고구려 한산주조에는 수곡성현은 매단홀(買旦忽)이라고도 한다고도 되어 있다. 수곡성은 황해도 신계 지역에 있던 고구려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본서 권제24 백제본기제2 근초고왕 30년 7월조에 고구려가 북변의 수곡성을 함락시켰다고 전하고, 본서 권제25 백제본기제3 아신왕 3년 7월조에 고구려와 수곡성 아래에서 싸웠으나 패하였다고 되어 있다. 또 본서 권제26 백제본기제4 무녕왕 원년 11월조에 달솔 우영으로 하여금 군사 5,000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수곡성을 치게 하였다고 전한다. 수곡성은 고구려와 백제 사이의 주요 전장이 되었고, 이후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북상함에 따라 고구려와 신라 사이에 주요한 전장으로 등장하게 된다.
註) 012
행렬이 수곡성(水谷城)에 …… 곧 빠져나왔습니다: 본서 권제6 신라본기제6 문무왕 7년(667) 11월 11일조에는 문무왕이 장새(獐塞)이 이르렀을 때 거기서 이적(李勣)이 귀환하였다는 말을 듣고 신라군도 돌아오게 되었고, 곧 강심에게 급찬의 벼슬을 주고 곡식 500석을 주었다고 전한다. 앞서 당군은 강심을 보내 군사 동원 기일을 독려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일방적으로 귀환해 버린 것이다. 본서 권제6 신라본기제6 문무왕 원년조(661)에 당은 황제의 명으로 신라에게 평양으로 군량을 수송하라고 하였다고 전한다. 또 본서 권제6 신라본기제6 문무왕 2년조(662)에 군량을 전달받은 당군이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신라군도 철수를 시작하였다. 당은 자신들에게 필요한 신라군의 군량 수송이나 행군 독려 시에는 철저히 조서나 서신을 보내 명령을 전달하였다. 하지만 본 기록에서 보듯이 나당연합군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정보 공유가 되지 않고 있었다. 신라 국왕이 직접 참전했음에도 불구하고 당나라가 정보 전달을 제대로 해주지 않았으며, 군사작전권은 오로지 당군에게 있었던 것이다. 이외에도 장수 임명이나 병력 징발도 당군이 임의대로 하였고, 이러한 현실적인 문제들은 이후 나당전쟁의 군사적 원인 중 하나로 작동하게 된다(이상훈, 2012, 『나당전쟁 연구』, 주류성, 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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