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정을 왜에 질로 보내려 하였으나 거절하다 ( 802년 12월(음) )

〔3년(802)〕 겨울 12월에 균정(均貞)001001 균정(均貞): 제38대 원성왕의 셋째 아들 김예영(金禮英)의 아들로, 김헌정(金憲貞)의 동생이다. 김균정의 배우자는 기록상으로 두 명이 확인된다. 우선 그의 큰 아들 김우징(金祐徵), 곧 제45대 신무왕(神武王)의 모친인 박씨 진교부인(眞矯夫人)이 본서 권제10 신라본기 제10 신무왕 즉위년(839)조에 나온다. 『삼국유사』 왕력에는 두 번째 글자가 결락되어 ‘정▨부인(貞▨夫人)’라고 적혀있다. 본서 기사를 고려하면 결락된 글자가 ‘교(矯)’일 가능성도 있다. 신무왕 모친의 아버지에 대한 정보는 없다. 두 번째 배우자는 역시 아들로 왕위에 오른 제47대 헌안왕(憲安王)의 모친 조명부인(照明夫人)이다.
그는 이 기사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내는데, 대아찬(大阿湌) 관등을 수여한 후 왜에 질(質)로 파견하려고 했던 것을 볼 때, 아직 중앙 정계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하지는 않았으며, 애장왕(哀莊王)대 내내 별다른 행보를 확인할 수 없다. 김균정은 헌덕왕 4년(812) 봄에 시중(侍中)에 임명되면서 중앙 정치 무대에 이름을 드러냈다. 812년은 헌덕왕(憲德王) 정권이 안정적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던 시점으로, 그가 헌덕왕과 가까운 관계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헌덕왕 6년(814) 8월 김헌창(金憲昌)이 후임으로 임명되면서 시중직에서 물러났는데, 그 이후 그의 관력은 확인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흥덕왕 10년(835)에 상대등(上大等)에 오를 때까지 아무 직책을 맡지 않았다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어쨌든 그는 최고 관직인 상대등에 취임할 정도의 정치적 위상이 큰 인물이었다.
그가 가졌던 정치적 위상은 헌덕왕~흥덕왕대에 왕과 가까운 관계를 형성하면서 적극적으로 협력했기 때문으로 여겨지는데, 특히 김충공(金忠恭)의 딸과 결혼하면서 혼인을 통한 인척 관계 형성이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흥덕왕대 상대등이자 유력한 차기 왕위계승권자인 김충공의 사위로서 그의 위상은 확고해졌을 것이고, 이후 장인 김충공이 흥덕왕 말년에 사망하자 상대등의 지위와 함께 왕위계승에 가까운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고 추정된다.
흥덕왕 11년(836) 12월 흥덕왕이 아들 없이 죽자 바로 왕궁으로 들어가 아들 김우징과 조카 김예징(金禮徵) 그리고 김양(金陽) 등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뒤이어 왕궁으로 들어온 조카 김제륭(金悌隆) 지지 세력의 공격을 받았다. 당시 시중이던 김충공의 아들 김명(金明) 등의 지지를 받은 김제륭과 궁궐 안에서 격전을 벌였으나 패배해 살해되었다. 뒤에 아들 김우징이 왕위에 오르자 성덕대왕(成德大王)으로 추봉되었다.
〈참고문헌〉
李基白, 1974, 『新羅政治社會史硏究』, 一潮閣
尹炳喜, 1982, 「新羅 下代 均貞系의 王位繼承과 金陽」 『歷史學報』 96
李基東, 1984, 『新羅骨品制社會와 花郞徒』, 一潮閣
김창겸, 2003, 『신라 하대 왕위계승 연구』, 경인문화사
권영오, 2011, 『신라하대 정치사 연구』, 혜안
李泳鎬, 2011, 「통일신라시대의 王과 王妃」 『新羅史學報』 22
김창겸, 2018, 『신라 하대 국왕과 정치사』, 온샘
이문기, 2015, 『신라 하대 정치와 사회 연구』, 학연문화사
닫기
에게 대아찬(大阿湌)002002 대아찬(大阿湌): 신라 경위(京位) 17관등(官等) 중 제5등에 해당한다. 본서 권제1 신라본기 제1 유리이사금 9년(32)조의 ‘대아찬’에 대한 주석 참조.닫기 관등을 주어 가왕자(假王子)로 삼고 왜국(倭國)003003 왜국(倭國): 당시 공식 국명은 일본(日本)이었는데, 여기에서는 왜국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당시 일본(日本)은 제50대 간무천황(桓武天皇) 21년(802)인데, 794년 헤이안경(平安京)으로 천도하여 헤이안 시대를 열었던 시점이다.닫기에 질(質)로 보내고자 하였으나, 균정이 거절하였다.

註 001
균정(均貞): 제38대 원성왕의 셋째 아들 김예영(金禮英)의 아들로, 김헌정(金憲貞)의 동생이다. 김균정의 배우자는 기록상으로 두 명이 확인된다. 우선 그의 큰 아들 김우징(金祐徵), 곧 제45대 신무왕(神武王)의 모친인 박씨 진교부인(眞矯夫人)이 본서 권제10 신라본기 제10 신무왕 즉위년(839)조에 나온다. 『삼국유사』 왕력에는 두 번째 글자가 결락되어 ‘정▨부인(貞▨夫人)’라고 적혀있다. 본서 기사를 고려하면 결락된 글자가 ‘교(矯)’일 가능성도 있다. 신무왕 모친의 아버지에 대한 정보는 없다. 두 번째 배우자는 역시 아들로 왕위에 오른 제47대 헌안왕(憲安王)의 모친 조명부인(照明夫人)이다.
그는 이 기사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내는데, 대아찬(大阿湌) 관등을 수여한 후 왜에 질(質)로 파견하려고 했던 것을 볼 때, 아직 중앙 정계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하지는 않았으며, 애장왕(哀莊王)대 내내 별다른 행보를 확인할 수 없다. 김균정은 헌덕왕 4년(812) 봄에 시중(侍中)에 임명되면서 중앙 정치 무대에 이름을 드러냈다. 812년은 헌덕왕(憲德王) 정권이 안정적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던 시점으로, 그가 헌덕왕과 가까운 관계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헌덕왕 6년(814) 8월 김헌창(金憲昌)이 후임으로 임명되면서 시중직에서 물러났는데, 그 이후 그의 관력은 확인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흥덕왕 10년(835)에 상대등(上大等)에 오를 때까지 아무 직책을 맡지 않았다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어쨌든 그는 최고 관직인 상대등에 취임할 정도의 정치적 위상이 큰 인물이었다.
그가 가졌던 정치적 위상은 헌덕왕~흥덕왕대에 왕과 가까운 관계를 형성하면서 적극적으로 협력했기 때문으로 여겨지는데, 특히 김충공(金忠恭)의 딸과 결혼하면서 혼인을 통한 인척 관계 형성이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흥덕왕대 상대등이자 유력한 차기 왕위계승권자인 김충공의 사위로서 그의 위상은 확고해졌을 것이고, 이후 장인 김충공이 흥덕왕 말년에 사망하자 상대등의 지위와 함께 왕위계승에 가까운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고 추정된다.
흥덕왕 11년(836) 12월 흥덕왕이 아들 없이 죽자 바로 왕궁으로 들어가 아들 김우징과 조카 김예징(金禮徵) 그리고 김양(金陽) 등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뒤이어 왕궁으로 들어온 조카 김제륭(金悌隆) 지지 세력의 공격을 받았다. 당시 시중이던 김충공의 아들 김명(金明) 등의 지지를 받은 김제륭과 궁궐 안에서 격전을 벌였으나 패배해 살해되었다. 뒤에 아들 김우징이 왕위에 오르자 성덕대왕(成德大王)으로 추봉되었다.
〈참고문헌〉
李基白, 1974, 『新羅政治社會史硏究』, 一潮閣
尹炳喜, 1982, 「新羅 下代 均貞系의 王位繼承과 金陽」 『歷史學報』 96
李基東, 1984, 『新羅骨品制社會와 花郞徒』, 一潮閣
김창겸, 2003, 『신라 하대 왕위계승 연구』, 경인문화사
권영오, 2011, 『신라하대 정치사 연구』, 혜안
李泳鎬, 2011, 「통일신라시대의 王과 王妃」 『新羅史學報』 22
김창겸, 2018, 『신라 하대 국왕과 정치사』, 온샘
이문기, 2015, 『신라 하대 정치와 사회 연구』, 학연문화사
註 002
대아찬(大阿湌): 신라 경위(京位) 17관등(官等) 중 제5등에 해당한다. 본서 권제1 신라본기 제1 유리이사금 9년(32)조의 ‘대아찬’에 대한 주석 참조.
註 003
왜국(倭國): 당시 공식 국명은 일본(日本)이었는데, 여기에서는 왜국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당시 일본(日本)은 제50대 간무천황(桓武天皇) 21년(802)인데, 794년 헤이안경(平安京)으로 천도하여 헤이안 시대를 열었던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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