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다
(
기원전
37년
)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
註 001은 성이 고씨(高氏)註 002이고 이름은 주몽(朱蒙)
註 003이다.추모(鄒牟) 또는 중해(衆解)라고도 한다. 이에 앞서 부여(扶餘)註 004왕 해부루(解夫婁)
註 005가 늙도록 아들이 없자 산천에 제사를 지내어 대를 이을 자식을 구하였다.註 006 그가 탄 말이 곤연(鯤淵)註 007에 이르러 큰 돌을 보더니 마주 대하며 눈물을 흘렸다. 왕이 이를 괴상히 여겨 사람을 시켜 그 돌을 옮기니 어린아이[小兒]가 있었는데 금색의 개구리註 008 모양이었다.‘와(蛙, 개구리)’를 ‘와(蝸, 달팽이)’로 쓰기도 한다. 왕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는 바로 하늘이 나에게 후사를 내려주신 것이다.”라고 하며 거두어 기르고, 이름을 금와(金蛙)
註 009라 하였다. 그가 장성하자 태자로 삼았다.
동명성왕(東明聖王) : 고구려 시조 주몽(朱蒙)의 왕호(王號)이다. 본문에 따르면 동명성왕의 재위 기간은 B.C. 37~19년에 이른다. 고구려를 건국하였으며 비류국(沸流國)을 병합하고, 행인국(荇人國)과 북옥저(北沃沮)를 정복하는 등 국가의 기틀을 다지는 데 주력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고구려의 시조에 관한 사료는 크게 세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①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碑)」(414년 건립), 「모두루묘지(牟頭婁墓誌)」(5세기 무렵 작성) 및 「집안고구려비(集安高句麗碑)」(4세기 말 이후 건립) 등 당대의 금석문, ② 『위서(魏書)』(554년 편찬), 『양서(梁書)』(629년 편찬), 『주서(周書)』(636년 편찬), 『수서(隋書)』(636년 편찬), 『북사(北史)』(659년 편찬), 『통전(通典)』(801년 편찬) 등 중국 측 문헌, ③ 『삼국사기(三國史記)』(1145년 편찬), 『삼국유사(三國遺事)』(1281년 편찬) 및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실린 「동명왕편(東明王篇)」(1193년 무렵 작성) 등 국내 문헌이 바로 그것이다. 이 가운데 고구려 시조의 왕호를 동명이라 한 것은 ③으로, ①과 ②에서는 시조의 이름을 각기 추모(鄒牟)와 주몽이라 하였을 뿐 별도의 왕호를 내세우고 있지 않다. 특히 고구려가 존재하였던 4~5세기 전후한 시기의 금석문(①)에서는 ‘추모왕(鄒牟王)’ 내지 ‘추모성왕(鄒牟聖王)’이라 하는 등 시조의 이름에 왕호를 덧붙이는 방식을 취하였고, 동명왕(東明王) 내지 동명성왕이라 언급한 국내 문헌(③)이 고려시대에 편찬되었다는 점은 해당 왕호가 고구려 당대에 존재하였는지에 대해 의문을 자아낸다.
주목되는 사실은 중국 측 문헌에서 주몽은 고구려의 시조로 나오고 있음에 비해, 동명(東明)은 부여 시조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찬자들이 고구려와 부여의 시조를 각기 주몽과 동명으로 구분하여 인식하였음을 보여준다. 후한 시기 왕충(王充)(27~?)이 쓴 『논형(論衡)』 권2 길험편(吉驗篇)과 서진(西晉) 시기 진수(陳壽)(233~297)가 편찬한 『삼국지(三國志)』 권30 위서30 동이 부여전(夫餘傳)에 인용된 『위략(魏略)』(3세기 중엽 편찬)에 이미 부여 시조로 동명이 언급되고 있으므로, 관련 전승이 이른 시기부터 중국에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종래 몇 가지 설이 제기되었다. (1) 동명은 본디 고구려 시조로 그를 부여 시조로 본 것은 문헌의 오류라는 견해(金庠基, 1974; 李丙燾, 1976)가 있으나, 중국 측에서 부여 시조를 동명이라 기록한 시점이 고구려 건국 전승을 인지하기 전이기에 따르기 주저된다. (2) 동명왕 전승은 원래 부여에서 전해져 오던 것이었으나 훗날 고구려가 이를 차용하여 자신들의 건국 신화로 삼았다는 견해(池內宏, 1951; 노태돈, 48쪽; 金基興, 15~16쪽)가 있는데, 그렇다면 고구려는 성립 이후 상당 기간 자신들의 시조 전승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되어 재고의 여지가 있다. (3) 부여·고구려·백제는 모두 부여계 종족을 중심으로 한 국가로서 동명형(東明型) 신화를 공유하였으며, 이들이 각기 분열·이동하면서 본래의 신화를 변형·재생성하여 갔다고 본 견해(金哲埈, 1975; 盧明鎬, 84~85쪽; 朱承澤, 198~199쪽; 神崎勝, 268~274쪽; 김선민, 6쪽)이다. 부계(父系)를 하늘로 한 특이한 성혼(聖婚)과 탄생과 시련으로 인한 남천(南遷), 그리고 주력(呪力)에 의한 가교의 성립과 도하(渡河) 및 건국 등에서 보이듯. 부여 동명 전승과 고구려 주몽 신화의 전개 양상은 기본적으로 일치한다. 동일한 서사 구조를 지닌 신화는 동일한 유형의 신화로 간주할 수 있고, 주몽과 동명이 발음상 큰 차이가 없으므로(장재웅, 2006), 양자는 부여계 사회의 전설적 시조를 가리키는 칭호의 발음이나 표기가 지역에 따라 달라진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姜辰垣, 80쪽).
이상을 보건대 고구려에서 시조는 주몽으로 불리었고, 부여 시조 동명과는 구별되었다. 그런데 후대의 국내 문헌(③)에서 주몽은 동명성왕으로 전한다. 그러므로 어느 시기에 주몽에게 그러한 왕호가 부여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구체적인 시점에 관해서는 5세기 이후(노태돈, 65쪽), 장수왕 시기(조경철, 8~9쪽), 5~6세기(강경구, 334~336쪽), 문자명왕 시기(이원배, 22쪽), 7세기 초(600) 『신집(新集)』 편찬 시(임기환, 28쪽)로 설이 엇갈린다.
〈참고문헌〉
池內宏, 1951, 『滿鮮史硏究-上世篇-』, 吉川弘文館
金庠基, 1974, 「國史上에 나타난 建國說話의 檢討」, 『東方史論叢』, 서울大學校出版部
金哲埈, 1975, 『韓國古代社會硏究』, 知識産業社
李丙燾, 1976,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盧明鎬, 1981, 「百濟의 東明神話와 東明廟-東明神話의 再生成 現象과 관련하여」, 『歷史學硏究』 10
朱承澤, 1993, 「北方系 建國神話의 文獻的 再考察-解夫婁神話의 구조를 중심으로-」, 『韓國學報』 7
神崎勝, 1995, 「夫餘・高句麗の建國傳承と百濟王家の始祖傳承」, 『日本古代の傳承と東アジア』, 吉川弘文館
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강경구, 2001, 『고구려의 건국과 시조숭배』, 학연문화사
金基興, 2001, 「高句麗 建國神話의 검토」, 『韓國史硏究』 113
임기환, 2002, 「고구려 王號의 변천과 성격」 『韓國古代史硏究』 28
장재웅, 2006, 「중국어 역사음운론을 통한 고구려신화에 반영된 언어자료 분석-東明·朱蒙 동음설 및 東盟·東明 동음설을 중심으로-」, 『中國言語硏究』 23
김선민, 2006, 「高句麗建國神話에 대한 廣開土王陵碑와 中國正史의 비교 연구」, 『東方學志』 134
조경철, 2006, 「동아시아 불교식 왕호 비교-4~8세기를 중심으로-」, 『韓國古代史硏究』 43
이원배, 2009, 「고구려 시조명 ‘東明’의 성립과정」, 『韓國史硏究』 146
姜辰垣, 2015, 「高句麗 國家祭祀 硏究」,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고구려의 시조에 관한 사료는 크게 세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①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碑)」(414년 건립), 「모두루묘지(牟頭婁墓誌)」(5세기 무렵 작성) 및 「집안고구려비(集安高句麗碑)」(4세기 말 이후 건립) 등 당대의 금석문, ② 『위서(魏書)』(554년 편찬), 『양서(梁書)』(629년 편찬), 『주서(周書)』(636년 편찬), 『수서(隋書)』(636년 편찬), 『북사(北史)』(659년 편찬), 『통전(通典)』(801년 편찬) 등 중국 측 문헌, ③ 『삼국사기(三國史記)』(1145년 편찬), 『삼국유사(三國遺事)』(1281년 편찬) 및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실린 「동명왕편(東明王篇)」(1193년 무렵 작성) 등 국내 문헌이 바로 그것이다. 이 가운데 고구려 시조의 왕호를 동명이라 한 것은 ③으로, ①과 ②에서는 시조의 이름을 각기 추모(鄒牟)와 주몽이라 하였을 뿐 별도의 왕호를 내세우고 있지 않다. 특히 고구려가 존재하였던 4~5세기 전후한 시기의 금석문(①)에서는 ‘추모왕(鄒牟王)’ 내지 ‘추모성왕(鄒牟聖王)’이라 하는 등 시조의 이름에 왕호를 덧붙이는 방식을 취하였고, 동명왕(東明王) 내지 동명성왕이라 언급한 국내 문헌(③)이 고려시대에 편찬되었다는 점은 해당 왕호가 고구려 당대에 존재하였는지에 대해 의문을 자아낸다.
주목되는 사실은 중국 측 문헌에서 주몽은 고구려의 시조로 나오고 있음에 비해, 동명(東明)은 부여 시조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찬자들이 고구려와 부여의 시조를 각기 주몽과 동명으로 구분하여 인식하였음을 보여준다. 후한 시기 왕충(王充)(27~?)이 쓴 『논형(論衡)』 권2 길험편(吉驗篇)과 서진(西晉) 시기 진수(陳壽)(233~297)가 편찬한 『삼국지(三國志)』 권30 위서30 동이 부여전(夫餘傳)에 인용된 『위략(魏略)』(3세기 중엽 편찬)에 이미 부여 시조로 동명이 언급되고 있으므로, 관련 전승이 이른 시기부터 중국에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종래 몇 가지 설이 제기되었다. (1) 동명은 본디 고구려 시조로 그를 부여 시조로 본 것은 문헌의 오류라는 견해(金庠基, 1974; 李丙燾, 1976)가 있으나, 중국 측에서 부여 시조를 동명이라 기록한 시점이 고구려 건국 전승을 인지하기 전이기에 따르기 주저된다. (2) 동명왕 전승은 원래 부여에서 전해져 오던 것이었으나 훗날 고구려가 이를 차용하여 자신들의 건국 신화로 삼았다는 견해(池內宏, 1951; 노태돈, 48쪽; 金基興, 15~16쪽)가 있는데, 그렇다면 고구려는 성립 이후 상당 기간 자신들의 시조 전승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되어 재고의 여지가 있다. (3) 부여·고구려·백제는 모두 부여계 종족을 중심으로 한 국가로서 동명형(東明型) 신화를 공유하였으며, 이들이 각기 분열·이동하면서 본래의 신화를 변형·재생성하여 갔다고 본 견해(金哲埈, 1975; 盧明鎬, 84~85쪽; 朱承澤, 198~199쪽; 神崎勝, 268~274쪽; 김선민, 6쪽)이다. 부계(父系)를 하늘로 한 특이한 성혼(聖婚)과 탄생과 시련으로 인한 남천(南遷), 그리고 주력(呪力)에 의한 가교의 성립과 도하(渡河) 및 건국 등에서 보이듯. 부여 동명 전승과 고구려 주몽 신화의 전개 양상은 기본적으로 일치한다. 동일한 서사 구조를 지닌 신화는 동일한 유형의 신화로 간주할 수 있고, 주몽과 동명이 발음상 큰 차이가 없으므로(장재웅, 2006), 양자는 부여계 사회의 전설적 시조를 가리키는 칭호의 발음이나 표기가 지역에 따라 달라진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姜辰垣, 80쪽).
이상을 보건대 고구려에서 시조는 주몽으로 불리었고, 부여 시조 동명과는 구별되었다. 그런데 후대의 국내 문헌(③)에서 주몽은 동명성왕으로 전한다. 그러므로 어느 시기에 주몽에게 그러한 왕호가 부여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구체적인 시점에 관해서는 5세기 이후(노태돈, 65쪽), 장수왕 시기(조경철, 8~9쪽), 5~6세기(강경구, 334~336쪽), 문자명왕 시기(이원배, 22쪽), 7세기 초(600) 『신집(新集)』 편찬 시(임기환, 28쪽)로 설이 엇갈린다.
〈참고문헌〉
池內宏, 1951, 『滿鮮史硏究-上世篇-』, 吉川弘文館
金庠基, 1974, 「國史上에 나타난 建國說話의 檢討」, 『東方史論叢』, 서울大學校出版部
金哲埈, 1975, 『韓國古代社會硏究』, 知識産業社
李丙燾, 1976,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盧明鎬, 1981, 「百濟의 東明神話와 東明廟-東明神話의 再生成 現象과 관련하여」, 『歷史學硏究』 10
朱承澤, 1993, 「北方系 建國神話의 文獻的 再考察-解夫婁神話의 구조를 중심으로-」, 『韓國學報』 7
神崎勝, 1995, 「夫餘・高句麗の建國傳承と百濟王家の始祖傳承」, 『日本古代の傳承と東アジア』, 吉川弘文館
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강경구, 2001, 『고구려의 건국과 시조숭배』, 학연문화사
金基興, 2001, 「高句麗 建國神話의 검토」, 『韓國史硏究』 113
임기환, 2002, 「고구려 王號의 변천과 성격」 『韓國古代史硏究』 28
장재웅, 2006, 「중국어 역사음운론을 통한 고구려신화에 반영된 언어자료 분석-東明·朱蒙 동음설 및 東盟·東明 동음설을 중심으로-」, 『中國言語硏究』 23
김선민, 2006, 「高句麗建國神話에 대한 廣開土王陵碑와 中國正史의 비교 연구」, 『東方學志』 134
조경철, 2006, 「동아시아 불교식 왕호 비교-4~8세기를 중심으로-」, 『韓國古代史硏究』 43
이원배, 2009, 「고구려 시조명 ‘東明’의 성립과정」, 『韓國史硏究』 146
姜辰垣, 2015, 「高句麗 國家祭祀 硏究」,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고씨(高氏) : 고구려 왕실의 성씨. 본서에서는 국호를 고구려라 한 것에서 주몽이 고씨를 칭하였다고 한다. 이후 고구려의 역대 왕들은 모두 고씨였던 것처럼 나온다. 하지만 그와 다른 기록도 존재한다. 『삼국유사』 권1 왕력편(王歷篇)에 의하면 제1대 동명왕은 고씨였으나, 제2대 유리왕·제3대 대무신왕·제4대 민중왕을 해씨라 명기하고 있으며, 제5대 모본왕도 민중왕과 형제 사이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 권1 기이 제1 고구려조에서도 찬자는 주몽을 본디 해씨로 보았다[“本姓解也, 今自言是天帝子, 承日光而生, 故自以高爲氏”]. 본서의 경우 성씨를 달리 보지는 않았으나, 대무신왕의 별칭을 ‘대해주류왕(大解朱留王)’으로, 민중왕의 휘를 ‘해색주(解色朱)’, 모본왕의 휘를 ‘해우(解憂)’ 혹은 ‘해애루(解愛婁)’라 칭하는 등 왕호나 왕명(王名)에서 ‘해(解)’자가 나타난다. 이는 해당 군주들이 본디 해씨였던 흔적이라는 추정을 가능케 한다. 이처럼 고구려 왕실의 성씨를 두 가지, 즉 고씨와 해씨로 볼 수 있는 여지가 있으므로, 그 이해를 두고 일정한 성과가 축적되었다.
먼저 애초 고구려는 소노부(消奴部) 해씨 왕실이 집권하는 ‘해씨왕(解氏王) 시대’였으나, 태조왕 즉위 이후 계루부(桂婁部)가 왕권을 차지하였다고 보는 견해(金龍善, 54~55쪽, 61~62쪽)가 제기되었다. 다음으로 주몽은 실제로 해씨였고 고주몽의 ‘고(高)’는 형용사의 의미로 모본왕 시기까지는 계루부(桂婁部) 해씨 왕실이 집권하였으며, 태조왕 즉위를 계기로 계루부 내 방계 세력인 고씨가 왕위를 이어가게 되었다고 보기도 하였다(金賢淑, 14~16쪽, 48~49쪽).
그런데 해부루(解夫婁)나 해모수(解慕漱) 등 고구려 건국신화의 부여계 인물들 가운데 ‘해’자를 쓰는 사례가 있고, 『삼국유사』 권2 기이 제2 남부여(南扶餘) 전백제(前百濟) 북부여(北扶餘)조에서는 백제 왕실의 성씨를 해씨라 칭하기도 했거니와[“其世系與高句麗同出扶餘, 故以解爲氏”], 본서 백제본기에 따르면 해씨는 초기부터 유력 성씨 집단으로 나타나고 있다. 백제 왕실이 부여를 자신들의 뿌리로 여기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부여계 사회에서는 지배 집단이 이름 앞에 ‘해’자를 쓰는 경우가 존재하였음을 유추할 수 있다. 이는 일정 부분 훗날의 성씨와 같은 기능을 담당하였을 것이며, 고구려도 다르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이후 국가 체제가 정비됨에 따라 왕실은 국호에 기인하여 고씨를 칭하게 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태조왕 이후 ‘해’자의 흔적을 찾기 어려워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시기적 상한은 대략 태조왕 시기로 볼 수 있다.
金龍善, 1980, 「高句麗 琉璃明王考」, 『歷史學報』 87
金賢淑, 1994, 「高句麗의 解氏王과 高氏王」, 『大邱史學』 47
먼저 애초 고구려는 소노부(消奴部) 해씨 왕실이 집권하는 ‘해씨왕(解氏王) 시대’였으나, 태조왕 즉위 이후 계루부(桂婁部)가 왕권을 차지하였다고 보는 견해(金龍善, 54~55쪽, 61~62쪽)가 제기되었다. 다음으로 주몽은 실제로 해씨였고 고주몽의 ‘고(高)’는 형용사의 의미로 모본왕 시기까지는 계루부(桂婁部) 해씨 왕실이 집권하였으며, 태조왕 즉위를 계기로 계루부 내 방계 세력인 고씨가 왕위를 이어가게 되었다고 보기도 하였다(金賢淑, 14~16쪽, 48~49쪽).
그런데 해부루(解夫婁)나 해모수(解慕漱) 등 고구려 건국신화의 부여계 인물들 가운데 ‘해’자를 쓰는 사례가 있고, 『삼국유사』 권2 기이 제2 남부여(南扶餘) 전백제(前百濟) 북부여(北扶餘)조에서는 백제 왕실의 성씨를 해씨라 칭하기도 했거니와[“其世系與高句麗同出扶餘, 故以解爲氏”], 본서 백제본기에 따르면 해씨는 초기부터 유력 성씨 집단으로 나타나고 있다. 백제 왕실이 부여를 자신들의 뿌리로 여기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부여계 사회에서는 지배 집단이 이름 앞에 ‘해’자를 쓰는 경우가 존재하였음을 유추할 수 있다. 이는 일정 부분 훗날의 성씨와 같은 기능을 담당하였을 것이며, 고구려도 다르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이후 국가 체제가 정비됨에 따라 왕실은 국호에 기인하여 고씨를 칭하게 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태조왕 이후 ‘해’자의 흔적을 찾기 어려워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시기적 상한은 대략 태조왕 시기로 볼 수 있다.
金龍善, 1980, 「高句麗 琉璃明王考」, 『歷史學報』 87
金賢淑, 1994, 「高句麗의 解氏王과 高氏王」, 『大邱史學』 47
주몽(朱蒙) : 고구려의 시조이자 건국자로 전한다. 『위서』를 비롯한 중국 측 문헌에서도 고구려 시조를 주몽으로 표기하였다. 그를 가리키는 표현으로는 주몽 외에 ‘추모’(「광개토왕릉비」, 「모두루묘지」, 본서 백제본기,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 권24 우경제번하(右京諸蕃下) 고려(高麗)), ‘추몽(鄒蒙)’(『삼국유사』 권1 왕력편), ‘중모(中牟)’(본서 권6 신라본기6 문무왕 10년 7월조에 실린 책문(冊文)) 혹은 ‘중모(仲牟)’(『일본서기』 권27 천지(天智) 7년 10월조, 그리고 본문에 바로 이어서 나오는 ‘중해(衆解)’ 등이 있는데, 같은 음을 다르게 표기한[同音異表記] 결과로 여겨진다. 본문에 보이듯 주몽은 ‘활을 잘 쏘는 사람’이란 의미이다.
부여(扶餘) : 본서 고구려본기에서 주몽이 출자한 것으로 나오는 나라. 그에 따르면 이 부여는 해부루가 왕이었을 때 중심지를 옮겨 동부여가 되었으며, 이후 금와와 대소가 왕위를 이어나갔으나, 대무신왕에 의해 큰 타격을 입고 오래지 않아 멸망한 것처럼 나온다. 다만 본문의 부여가 중국 측 문헌에 언급된, 만주 쑹화강[松花江] 유역을 중심으로 자리하였던 부여(夫餘)와 동일한 실체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기 어렵다. 중국 측에서는 이 부여의 역사에 대해 상대적으로 상세히 다루고 있음에도 국도(國都)의의 이동을 포함한 본문에서의 관련 기술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본문의 부여가 고구려 건국신화에 등장하므로, 실제 부여와 구분하여 보기도 한다. 그와 관련하여 부여 내부의 어떤 가(加) 세력(노태돈, 57쪽) 내지 사출도(四出道) 가운데 동쪽 집단을 가리킨다고 보는 설(金基興, 11쪽)이 참조된다.
참고로 중국 측 문헌에서 실체가 확인되는 부여의 경우, 1세기에 편찬된 『논형』 권2 길험편이나 『삼국지』에 인용된 『위략』에 따르면 시조 동명이 북방의 탁리국(橐離國) 내지 고리국(高離國)으로부터 남하하여 건국하였다고 한다. 부여의 원 중심지인 녹산(鹿山)은 현재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린시[吉林市] 일대로 추정된다(日野開三朗, 1946; 노태돈, 505~508쪽). 부여는 후한에 직접 조공하고 한 군현과 교류를 이어가면서 안정적인 대외관계를 유지하였고, 만주 지역에서 상당한 세력을 과시하였다. 『삼국지』 권30 위서30 동이 부여전(夫餘傳)에 따르면 부여의 영역은 사방 2,000리에 달하였고, 호(戶)는 80,000이었다. 그러나 285년 선비족(鮮卑族) 모용외(慕容廆)의 침략으로 왕 의려(依慮)가 자살하고 도읍이 무너져 1만여 명이 잡혀갔다. 그 뒤 부여는 중심지를 지린성 눙안현[農安縣] 일대로 옮겼지만, 종전의 위세를 회복할 수는 없었다. 346년에는 전연 모용황(慕容皝)이 대규모 병력으로 부여를 침공하였고, 결국 왕 현(玄)을 비롯한 5만여 명이 포로로 끌려갔다. 이로써 부여는 사실상 붕괴하였으며, 고구려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 뒤 부여는 물길(勿吉)의 공세를 버티지 못하고, 고구려 문자명왕 4년(494) 왕실이 고구려에 내부하여 완전히 멸망하였다.
〈참고문헌〉
日野開三朗, 1946, 「夫餘國考」, 『史淵』 34
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金基興, 2001, 「高句麗 建國神話의 검토」, 『韓國史硏究』 113
이승호, 2018, 『부여 정치사 연구』, 동국대 박사학위논문
참고로 중국 측 문헌에서 실체가 확인되는 부여의 경우, 1세기에 편찬된 『논형』 권2 길험편이나 『삼국지』에 인용된 『위략』에 따르면 시조 동명이 북방의 탁리국(橐離國) 내지 고리국(高離國)으로부터 남하하여 건국하였다고 한다. 부여의 원 중심지인 녹산(鹿山)은 현재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린시[吉林市] 일대로 추정된다(日野開三朗, 1946; 노태돈, 505~508쪽). 부여는 후한에 직접 조공하고 한 군현과 교류를 이어가면서 안정적인 대외관계를 유지하였고, 만주 지역에서 상당한 세력을 과시하였다. 『삼국지』 권30 위서30 동이 부여전(夫餘傳)에 따르면 부여의 영역은 사방 2,000리에 달하였고, 호(戶)는 80,000이었다. 그러나 285년 선비족(鮮卑族) 모용외(慕容廆)의 침략으로 왕 의려(依慮)가 자살하고 도읍이 무너져 1만여 명이 잡혀갔다. 그 뒤 부여는 중심지를 지린성 눙안현[農安縣] 일대로 옮겼지만, 종전의 위세를 회복할 수는 없었다. 346년에는 전연 모용황(慕容皝)이 대규모 병력으로 부여를 침공하였고, 결국 왕 현(玄)을 비롯한 5만여 명이 포로로 끌려갔다. 이로써 부여는 사실상 붕괴하였으며, 고구려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 뒤 부여는 물길(勿吉)의 공세를 버티지 못하고, 고구려 문자명왕 4년(494) 왕실이 고구려에 내부하여 완전히 멸망하였다.
〈참고문헌〉
日野開三朗, 1946, 「夫餘國考」, 『史淵』 34
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金基興, 2001, 「高句麗 建國神話의 검토」, 『韓國史硏究』 113
이승호, 2018, 『부여 정치사 연구』, 동국대 박사학위논문
해부루(解夫婁) : 본서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본디 [북]부여의 왕이었으나 하늘의 계시로 도읍을 옮겨 동부여(東扶餘)를 세운 것으로 전한다. 『삼국유사』 권1 기이 제1 북부여조에 인용된 『고기(古記)』에서는 해부루가 해모수(解慕漱)의 아들이며 성(姓)을 해씨라 하였다고 나온다. 또 『삼국유사』 권1 기이 제1 고구려조에 인용된 『단군기(檀君記)』에는 단군이 서하 하백의 딸과 관계를 가져 해부루를 낳았다고도 한다. 그래서 『삼국유사』 찬자는 해부루와 주몽을 이복형제 사이로 여겼다. 해부루란 이름은 ‘해[日]’에 ‘부루=불[光]’이 결합한 말로써 하늘의 아들[天帝子]를 의미한다는 설(梁柱東, 1946, 『朝鮮古歌硏究』, 博文書館, 697~698쪽)도 있다.
곤연(鯤淵) : 동부여 금와왕의 탄생지로 전한다. 『제왕운기(帝王韻紀)』 「동명왕편(東明王篇)」과 『삼국유사(三國遺事)』 권1 기이 제1 동부여조에서도 동일한 지명이 확인되는데, 그 외에 다른 사료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구체적인 위치는 알 수 없다. 한편 『삼국유사』 권1 기이 제1 신라시조(新羅始祖) 혁거세왕(赫居世王)조에 따르면 혁거세는 나정(蘿井)에서, 그 부인은 알영정(閼英井)에서 탄생하였고, 「천남생묘지명」에서는 연개소문 일가 역시 조상이 물에서 태어났다는 전승이 있었다. 이를 보면 신이한 인물이 연못이나 우물 등에서 태어난다는 인식은 널리 퍼져 있었던 것 같다.
금색의 개구리 : 금색(金色)은 태양신을 상징하는 성색(聖色)으로 인식되었기에(三品彰英, 520쪽), 금색 개구리는 곧 태양을 상징한다는 견해(鄭璟喜, 23~24쪽)가 제기되었다. 개구리의 상징성에 관한 다른 예로는 본서 권13 고구려본기1 유리명왕 29년 6월조에 검은 개구리와 붉은 개구리가 각각 북부여와 고구려의 운명을 예시하는 상징물로서 나타나고 있음을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고구려에서는 개구리를 일종의 영매로 인식하였을 가능성이 있다(鄭求福·盧重國·申東河·金泰植·權悳永, 402쪽).
〈참고문헌〉
三品彰英, 1971, 『神話と文化史』, 平凡社
鄭璟喜, 1990, 「東明型說話와 古代社會」, 『韓國古代社會文化硏究』, 一志社
鄭求福·盧重國·申東河·金泰植·權悳永, 1997, 『譯註 三國史記 3-주석편(상)-』, 韓國精神文化硏究院
〈참고문헌〉
三品彰英, 1971, 『神話と文化史』, 平凡社
鄭璟喜, 1990, 「東明型說話와 古代社會」, 『韓國古代社會文化硏究』, 一志社
鄭求福·盧重國·申東河·金泰植·權悳永, 1997, 『譯註 三國史記 3-주석편(상)-』, 韓國精神文化硏究院
후에 그 재상 아란불(阿蘭弗)
註 010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일전에 하늘[天]이 저에게 내려와 말하기를, ‘장차 내 자손에게 이곳에 나라를 세우게 할 것이다. 너희는 그곳을 피하라. 동해 물가에 땅이 있으니 이름을 가섭원(迦葉原)註 011이라 하는데, 토양이 기름지고 오곡(五穀)註 012이 자라기 알맞으니 도읍할 만하다’라고 하였습니다.” 아란불이 마침내 왕에게 권하여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고 나라 이름을 동부여(東扶餘)註 013라 하였다. 옛 도읍[舊都]에는 어떤 사람이 있었으니,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으나 스스로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解慕漱)
註 014라 칭하며 와서 도읍하였다.註 015 해부루가 죽자 금와가 왕위를 이었다. 이때 태백산(太白山)註 016 남쪽 우발수(優渤水)註 017에서 여자를 만났다.註 018 〔여자에게〕 물으니 말하기를, “저는 하백(河伯)
註 019의 딸이고 이름은 유화(柳花)
註 020입니다. 여러 동생註 021들과 함께 나가서 놀고 있었는데, 그때 한 남자가 있어 스스로 말하기를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 하고 저를 웅심산(熊心山)註 022 아래 압록강
註 023 인근의 방 안으로 꾀어 사통하고 곧바로 가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부모는 제가 중매도 없이 다른 사람을 따라갔다고 꾸짖어 마침내 우발수에서 귀양살이[謫居]하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註 024
오곡(五穀) : 다섯 가지 곡식을 말한다. 지역과 시대에 따라 그 내용에 약간의 차이가 있으니 다음과 같다. ① 삼[麻]·차기장[黍]·메기장[稷]·보리[麥]·콩[豆](『주례(周禮)』 천관(天官) 질의(疾醫)), ② 차기장·메기장·삼·보리·대두[菽](『대대례(大戴禮)』 증자천원(曾子天圓)), ③ 벼(稻)·메기장·보리·콩·삼(『초사(楚辭)』 권10 대초(大招) 제10), ④ 차기장·메기장·대두·보리·벼(『주례』 하관(夏官) 직방씨(職方氏)), ⑤ 멥쌀[粳米]·팥[小豆]·보리·대두·누런 기장[黃黍](『소문(素問)』 장기법시론(藏氣法時論)), ⑥ 벼[稻穀]·보리[大麥]·밀[小麥]·녹두(菉豆)·백개자(白芥子)(『성취묘법연화경주유가관지의궤(成就妙法蓮華經主瑜伽觀智儀軌)』), ⑦ 보리[大麥]·밀·벼[稻穀]·팥·깨[胡麻](『건립만다라호마의궤(建立曼茶羅護摩儀軌)』).
『삼국지』 권30 위서30 동이 부여전 및 『후한서』 권85 열전75 동이 부여전에 따르면 부여는 땅이 비옥하여 오곡이 잘 되었다고 한다. 그밖에 읍루(邑婁), 동옥저(東沃沮), 한(韓)과 관련된 기록에서도 오곡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변진(弁辰)의 경우 『삼국지』권30 위서30 동이 변진전(弁辰傳)에서 “토지가 비옥하여 오곡과 벼를 심기에 적합하다[土地肥美, 宜種五穀及稻]”고 하였으므로, 한반도 남부 지방에서는 오곡에 쌀을 포함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부여는 상대적으로 한랭한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오곡에 쌀이 들어가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삼국지』 권30 위서30 동이 부여전 및 『후한서』 권85 열전75 동이 부여전에 따르면 부여는 땅이 비옥하여 오곡이 잘 되었다고 한다. 그밖에 읍루(邑婁), 동옥저(東沃沮), 한(韓)과 관련된 기록에서도 오곡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변진(弁辰)의 경우 『삼국지』권30 위서30 동이 변진전(弁辰傳)에서 “토지가 비옥하여 오곡과 벼를 심기에 적합하다[土地肥美, 宜種五穀及稻]”고 하였으므로, 한반도 남부 지방에서는 오곡에 쌀을 포함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부여는 상대적으로 한랭한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오곡에 쌀이 들어가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동부여(東扶餘) : 해부루가 가섭원으로 천도함에 따라 성립된 부여를 말한다. 동부여에 관한 기록은 크게 두 갈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본문에 나온 동부여로 고구려본기 초기기사에서 등장하며, 대무신왕 시기 멸망하였다고 나온다. 다른 하나는 「광개토왕릉비」(414년)에 나타나는 동부여(東扶餘)로 비문에 따르면 본래 추모왕(鄒牟王) 즉 주몽의 속민(屬民)이었으며, 광개토왕 20년(410)에 이르러 재차 복속되었다고 한다. 양자는 사료의 계통이나 시간적 범위를 달리하므로, 동부여의 실상 역시 그에 근거하여 다가가는 편이 좋을 것이다.
전자의 경우 먼저 주몽에 의해 복속된 북옥저를 동부여로 보거나(이도학, 41쪽, 46~47쪽), 대무신왕 시기 부여왕 대소(帶素)의 아우가 세운 갈사국(曷思國)이 곧 동부여라는 설(盧重國, 19~20쪽), 오늘날 지린성[吉林省] 둔화[敦化] 및 옌지[延吉] 일대에 위치한 부여계 세력으로 보는 견해(이승호, 75~76쪽)가 제기되었다. 동부여 관련 일화는 본서 고구려본기 초기기록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일정한 역사적 사실성을 보여주고 있으나, 그것을 전적으로 신뢰하기 어렵다. 그 결과 본문의 동부여를 국초에 존재하였던 부여의 어떤 가(加) 내지 사출도 집단의 하나로 보기도 한다(노태돈, 57쪽; 金基興, 11쪽).
후자의 경우 부여가 285년 선비족 모용외의 침공을 받고 옥저 지역으로 피난한 점에 주목하여, 왕실이 돌아간 뒤에도 그 근방에 남아 있던 잔여 세력이 세운 나라로 보는 견해(노태돈, 523~525쪽)가 대표적이다. 이는 동부여의 실제 성립 시기를 3세기 후반으로 본 것이다. 그밖에 부여가 중심지를 눙안현[農安縣] 일대로 옮긴 뒤 구도(舊都) 지린시 일대에 남아 있던 세력이 동부여로 불리게 되었다고 하거나(李健才, 2000), 북부여는 쑹넌평원[松嫩平原] 일대에 있던 부여 시조 동명의 고향은 고리국(高離國)이고, 동부여는 지린시[吉林市] 일대에 존재한 부여라고 상정한 설(송호정, 95~96쪽)도 제기되었다.
〈참고문헌〉
盧重國, 1983, 「東扶餘에 關한 몇 가지 問題에 대하여」, 『韓國學論集』 10.
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李健才, 2000, 「三论北夫余·东夫余即夫余的问题」, 『社会科学战线』 2000-6.
金基興, 2001, 「高句麗 建國神話의 검토」, 『韓國史硏究』 113
이도학, 2006, 『고구려 광개토왕릉 비문 연구-광개토왕릉 비문을 통한 고구려사-』, 서경문화사
송호정, 2015, 『처음 읽는 부여사 - 한국 고대국가의 원류 부여사 700년』, 사계절
이승호, 2018, 『부여 정치사 연구』, 동국대 박사학위논문
전자의 경우 먼저 주몽에 의해 복속된 북옥저를 동부여로 보거나(이도학, 41쪽, 46~47쪽), 대무신왕 시기 부여왕 대소(帶素)의 아우가 세운 갈사국(曷思國)이 곧 동부여라는 설(盧重國, 19~20쪽), 오늘날 지린성[吉林省] 둔화[敦化] 및 옌지[延吉] 일대에 위치한 부여계 세력으로 보는 견해(이승호, 75~76쪽)가 제기되었다. 동부여 관련 일화는 본서 고구려본기 초기기록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일정한 역사적 사실성을 보여주고 있으나, 그것을 전적으로 신뢰하기 어렵다. 그 결과 본문의 동부여를 국초에 존재하였던 부여의 어떤 가(加) 내지 사출도 집단의 하나로 보기도 한다(노태돈, 57쪽; 金基興, 11쪽).
후자의 경우 부여가 285년 선비족 모용외의 침공을 받고 옥저 지역으로 피난한 점에 주목하여, 왕실이 돌아간 뒤에도 그 근방에 남아 있던 잔여 세력이 세운 나라로 보는 견해(노태돈, 523~525쪽)가 대표적이다. 이는 동부여의 실제 성립 시기를 3세기 후반으로 본 것이다. 그밖에 부여가 중심지를 눙안현[農安縣] 일대로 옮긴 뒤 구도(舊都) 지린시 일대에 남아 있던 세력이 동부여로 불리게 되었다고 하거나(李健才, 2000), 북부여는 쑹넌평원[松嫩平原] 일대에 있던 부여 시조 동명의 고향은 고리국(高離國)이고, 동부여는 지린시[吉林市] 일대에 존재한 부여라고 상정한 설(송호정, 95~96쪽)도 제기되었다.
〈참고문헌〉
盧重國, 1983, 「東扶餘에 關한 몇 가지 問題에 대하여」, 『韓國學論集』 10.
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李健才, 2000, 「三论北夫余·东夫余即夫余的问题」, 『社会科学战线』 2000-6.
金基興, 2001, 「高句麗 建國神話의 검토」, 『韓國史硏究』 113
이도학, 2006, 『고구려 광개토왕릉 비문 연구-광개토왕릉 비문을 통한 고구려사-』, 서경문화사
송호정, 2015, 『처음 읽는 부여사 - 한국 고대국가의 원류 부여사 700년』, 사계절
이승호, 2018, 『부여 정치사 연구』, 동국대 박사학위논문
해모수(解慕漱) : 본문에 따르면 해부루가 가섭원으로 떠난 뒤 부여의 원 근거지[舊都]에 나타난 인물이다. 스스로 천제의 아들이라 칭하였으며, 유화와 사통(私通)하였는데, 이후의 행적을 알려주는 기록은 찾기 어렵다. 해모수와 해부루의 관계에 대해 본서에서는 별다른 기술이 없는 것과 달리, 『삼국유사』 권1 기이1 제1 북부여조에 인용된 『고기』에는 해부루의 부친으로 나온다.
해모수에 대해 상세히 전하고 있는 것은 「동명왕편」에 인용된 『구삼국사(舊三國史)』이다. 여기에는 해모수가 오룡거(五龍擧)를 타고 강림하였음과 아울러 아침이면 정사를 듣고 해가 저물면 승천하여 세간에서 ‘천왕랑(天王郞)’이라 일컬었다고 기록되어 있다[“解慕漱 從天而下 乘五龍車 從者百餘人 … 朝則聽事 暮則升天 世謂之天王郞”]. 이는 해모수가 신들의 세계에서 인간사에 관여하는 인물로 여겨졌음을 보여주는데, 그러한 면은 단군신화에서의 환웅(桓雄)과 상통한다(鄭求福·盧重國·申東河·金泰植·權悳永, 404쪽). 해모수와 결합한 유화를 환웅과 결합한 웅녀에 비정하기도 하나(이병도, 327쪽), 하늘에서 내려온 남성과 지상의 여성이 맺어진다는 모티프는 상당히 보편적인 유형에 속하므로, 지나친 감이 있다.
참고로 해모수란 이름은 ‘해머슴’이란 뜻으로 ‘일월자(日月子)’, 즉 ‘해의 아들’을 의미한다는 설(金庠基, 6~7쪽)이 있다. 아울러 정약용은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에서 해모수를 부여 시조 동명과 동일 인물로 보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金庠基, 1974, 「國史上에 나타난 建國說話의 檢討」, 『東方史論叢』, 서울大學校出版部
이병도, 1996,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鄭求福·盧重國·申東河·金泰植·權悳永, 1997, 『譯註 三國史記 3-주석편(상)-』, 韓國精神文化硏究院
해모수에 대해 상세히 전하고 있는 것은 「동명왕편」에 인용된 『구삼국사(舊三國史)』이다. 여기에는 해모수가 오룡거(五龍擧)를 타고 강림하였음과 아울러 아침이면 정사를 듣고 해가 저물면 승천하여 세간에서 ‘천왕랑(天王郞)’이라 일컬었다고 기록되어 있다[“解慕漱 從天而下 乘五龍車 從者百餘人 … 朝則聽事 暮則升天 世謂之天王郞”]. 이는 해모수가 신들의 세계에서 인간사에 관여하는 인물로 여겨졌음을 보여주는데, 그러한 면은 단군신화에서의 환웅(桓雄)과 상통한다(鄭求福·盧重國·申東河·金泰植·權悳永, 404쪽). 해모수와 결합한 유화를 환웅과 결합한 웅녀에 비정하기도 하나(이병도, 327쪽), 하늘에서 내려온 남성과 지상의 여성이 맺어진다는 모티프는 상당히 보편적인 유형에 속하므로, 지나친 감이 있다.
참고로 해모수란 이름은 ‘해머슴’이란 뜻으로 ‘일월자(日月子)’, 즉 ‘해의 아들’을 의미한다는 설(金庠基, 6~7쪽)이 있다. 아울러 정약용은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에서 해모수를 부여 시조 동명과 동일 인물로 보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金庠基, 1974, 「國史上에 나타난 建國說話의 檢討」, 『東方史論叢』, 서울大學校出版部
이병도, 1996,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鄭求福·盧重國·申東河·金泰植·權悳永, 1997, 『譯註 三國史記 3-주석편(상)-』, 韓國精神文化硏究院
스스로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解慕漱)라 칭하며 와서 도읍하였다 : 『삼국유사』 권1 기이1 제1 북부여조에 인용된 『고기』에는 전한 신작 3년(B.C. 59) 4월 8일에 천제자(天帝子) 해모수가 흘승골성(訖升骨城)에 강림하여 도읍을 정하고 북부여를 건국하였다고 전한다. 그런데 『위서』 권100 열전88 동이 고구려전에 따르면 주몽이 부여에서 남하하여 정착한 곳도 흘승골성(紇升骨城)이라 전한다[“與朱蒙至紇升骨城, 遂居焉”]. 흘승골성은 오늘날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환런현[桓仁縣] 지역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건국신화에 따르면 해모수가 자리한 곳은 천도하기 이전 부여의 중심지이며, 부여의 원 중심지는 지린성[吉林省] 지린시[吉林市] 일대로 환런현이 아니다. 해모수가 주몽의 부친 격으로 언급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고구려 왕실과 해모수로 대표되는 부여의 연계성을 강조하기 위해 나타난 부회가 아닐까 한다. 이는 해모수의 천강(天降) 시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동명왕편」에 인용된 『구삼국사』에 따르면 주몽은 신작 4년(B.C. 58) 4월에 태어났다. 그렇다면 해모수는 주몽의 탄생으로부터 정확히 1년 전에 나라를 세운 셈이다. 물론 이는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있을 것이나, 두 사건 사이의 시간적 격차가 거의 없는 것은 신화적 인물인 해모수와 주몽이 직접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적인 결과로 볼 수 있다.
태백산(太白山) : 태백산(太伯山)이라 쓰기도 한다. 백두산, 묘향산, 또는 강원도 태백산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태백산이라는 명칭은 예부터 북방에 있는 대진산을 의미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어 여러 산에 비정되었다(金庠基, 4쪽). 고려시대에는 묘향산을 태백산으로 여겼다고 한다(『고려사』 권58 지12 지리2 북계, 안북대도호부 청새진. 이 기사의 무대는 오늘날의 훈 강[渾江], 압록강 일원으로 그 근방의 대표적인 거산(巨山)은 백두산이다. 그러므로 이때의 태백산은 백두산으로 보는 편이 좋지 않을까 한다(鄭求福·盧重國·申東河·金泰植·權悳永, 404~405쪽).
〈참고문헌〉
金庠基, 1974, 「國史上에 나타난 建國說話의 檢討」, 『東方史論叢』, 서울大學校出版部
鄭求福·盧重國·申東河·金泰植·權悳永, 1997, 『譯註 三國史記 3-주석편(상)-』, 韓國精神文化硏究院
〈참고문헌〉
金庠基, 1974, 「國史上에 나타난 建國說話의 檢討」, 『東方史論叢』, 서울大學校出版部
鄭求福·盧重國·申東河·金泰植·權悳永, 1997, 『譯註 三國史記 3-주석편(상)-』, 韓國精神文化硏究院
태백산(太白山) 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여자를 만났다 : 「동명왕편」에 인용된 『구삼국사』에서는 어부[漁師] 강력부추(强力扶鄒)가 “요즘 어량(魚梁) 안의 물고기를 도둑질해 가는 것이 있는데, 어떤 짐승인지 모르겠다”고 하자, 왕이 이에 어부로 하여금 그물을 끌어당기게 하니 그 망이 파열되어, 다시 쇠그물[鐵網]을 만들어 당기니 비로소 한 여인을 얻을 수 있었는데, 돌에 앉은 채로 나왔다. 그 여인의 입술이 길어 말하지 못하므로 그 입술을 세 번 잘라낸 뒤에야 말을 하였다고 전한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서도 이와 유사한 설화가 기록되어 있는데, 훗날 혁거세의 부인이 되는 알영(閼英)은 애초 입술이 닭부리 같았으니, 월성(月城) 북천(北川)에 가서 목욕시켰더니 그 부리가 떨어졌다고 한다.
하백(河伯) : 하백은 본디 중국의 황허[黃河] 강을 관장하는 수신(水神)으로 『포박자(抱朴子)』에 따르면 빙이(冰夷) 또는 풍이(馮夷)라고도 불리었으며, 『장자(莊子)』 추수편(秋水篇)이나 『산해경(山海經)』 해내북경(海內北經)에 있는 곽박(郭璞)의 주석에 따르면 사면으로 운거(雲車)를 타며 두 마리의 용을 부린다고 한다. 다만 본문에 나오는 하백이 중국에서 말하는 그 수신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원래는 고구려인들이 따로 부르는 하신(河神)의 이름이 존재하였으나, 중국 문물 수용이 진전됨에 따라 이 하천의 신을 하백이라고 명명하게 되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유화(柳花) : 주몽의 모친으로 전하는 인물인데, 고구려 존속 당시에 편찬된 『위서』, 『주서』, 『북사』 등 중국 측 사서나 「광개토왕릉비」에서는 각기 ‘하백녀(河伯女)’ 내지 ‘하백여랑(河伯女郞)’이라고 언급되어 있을 뿐이며, 그 이름을 유화로 전하는 것은 「동명왕편」에 인용된 『구삼국사』 및 본서와 『삼국유사』 등 고구려 멸망 이후에 만들어진 국내 문헌에 국한된다. 하백녀와 유화를 별개의 신격으로 파악하기도 하나(李志瑛, 23~25쪽), 양자 모두 시조모인 이상 그 실체를 다르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용례를 볼 때 고구려 당대에 시조모(始祖母)를 유화라 불렀는지를 확신할 수는 없다. 그 면에 주목하여 고려시대에 고구려 계승 의식 속에 서경(西京), 즉 평양이 중시된 결과, 시조모에게 유화라는 이름이 부여되었다는 추정(조영광, 273쪽)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만주족의 신화와 민속의례에서 버드나무가 지니는 의의가 크며 유화는 해당 수목이 의인화한 것이라는 견해(李鐘周, 1997)도 제기된 바가 있어 단정하기는 어렵다.
『구삼국사』에 따르면 유화는 훗날 주몽이 금와왕의 아들들에게 쫓기여 남쪽으로 피신할 때 오곡의 종자를 주었고, 다시 비둘기로 하여금 보리씨앗[麥子]을 전해주었다고 한다. 이를 보면 시조모 유화는 곡물 경작과 관련된 농경신(農耕神)으로 여겨졌음을 알 수 있다(金哲埈, 1971). 본문에 따르면 유화는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이후에도 동부여에서 지내다 동명성왕 14년(B.C. 24) 8월 사망하였고, 금와왕은 태후의 예로써 장사지냈다고 한다.
〈참고문헌〉
金哲埈, 1971, 「東明王篇에 보이는 神母의 性格에 대하여」, 『惠庵柳洪烈博士華甲紀念論叢』, 惠庵柳洪烈博士華甲紀念事業委員會
李鐘周, 1997, 「東北아시아의 聖母 柳花」, 『口碑文學硏究』 4
李志瑛, 2006, 「河伯女, 柳花를 둘러싼 고구려 건국신화의 전승 문제」, 『東아시아古代學』 13
조영광, 2006, 「河伯女신화를 통해서 본 고구려 국가형성기의 상황」, 『北方史論叢』 12
『구삼국사』에 따르면 유화는 훗날 주몽이 금와왕의 아들들에게 쫓기여 남쪽으로 피신할 때 오곡의 종자를 주었고, 다시 비둘기로 하여금 보리씨앗[麥子]을 전해주었다고 한다. 이를 보면 시조모 유화는 곡물 경작과 관련된 농경신(農耕神)으로 여겨졌음을 알 수 있다(金哲埈, 1971). 본문에 따르면 유화는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이후에도 동부여에서 지내다 동명성왕 14년(B.C. 24) 8월 사망하였고, 금와왕은 태후의 예로써 장사지냈다고 한다.
〈참고문헌〉
金哲埈, 1971, 「東明王篇에 보이는 神母의 性格에 대하여」, 『惠庵柳洪烈博士華甲紀念論叢』, 惠庵柳洪烈博士華甲紀念事業委員會
李鐘周, 1997, 「東北아시아의 聖母 柳花」, 『口碑文學硏究』 4
李志瑛, 2006, 「河伯女, 柳花를 둘러싼 고구려 건국신화의 전승 문제」, 『東아시아古代學』 13
조영광, 2006, 「河伯女신화를 통해서 본 고구려 국가형성기의 상황」, 『北方史論叢』 12
웅심산(熊心山) : 현재 위치를 알 수 없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제1 고구려조에서는 ‘웅신산(熊神山)’으로 나온다. 본문에서는 “웅심산 아래 압록강”이라고 하여 웅심산과 압록강이 멀지 않은 것처럼 나와 있기에 압록강 중상류 산간지대의 어느 산에 비정할 수도 있다. 다만 「동명왕편」에 인용된 『구삼국사』에서는 웅심연 가[熊心淵上]에서 놀았다고 하므로 ‘웅심’이 연못의 이름일 가능성도 있다(鄭求福·盧重國·申東河·金泰植·權悳永, 1997, 『譯註 三國史記 3-주석편(상)-』, 韓國精神文化硏究院, 406쪽). 양자를 종합하면 웅심산에 자리한 연못으로 보는 편이 어떨까 한다.
압록강[鴨綠] : 오늘날의 압록강이다. 압록강은 ‘마자수(馬訾水)’라고도 불리었는데, 『통전(通典)』 권186 변방2 동이 하 고구려조에서는 물빛이 오리의 머리 색깔과 같아서 압록이라는 이름을 얻었다[“水色似鴨頭, 故俗名之.”]라고 전한다. 「동명왕편」에서는 각주를 통하여 압록강이 ‘청하(淸河)’로 칭해졌다고 기술하고 있으며[“淸河 今鴨綠江也”], 『고려사』 찬자도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고려사』 권58 지12 지리3 북계 의주조). 그러나 정약용은 『대동수경(大東水經)』에서 이를 부정하였다.
저를 웅심산(熊心山) 아래 … 귀양살이[謫居]하게 되었습니다 : 「동명왕편」에서는 해모수의 강림과 금와·유화의 만남 사이에 해모수가 유화의 사통 에피소드를 상세히 다루고 있다. 해당 부분에 인용된 『구삼국사』에 따르면 해모수는 후사를 둘 목적으로 유화·훤화·위화 자매를 꾀어내어 취하게 하였는데, 훤화·위화는 달아났으나 유화는 사로잡혀 통정하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하백은 분노하며 변신술 대결을 펼쳤는데 결국 해모수가 승리하였고, 하백은 해모수를 천제의 아들로 여겨 해모수와 유화를 함께 하늘로 올려 보내려 하였으나, 해모수가 기지를 발휘하여 홀로 하늘로 떠나갔다. 이에 하백은 크게 노하여 딸의 입을 잡아당겨 입술의 길이를 3자나 되게 하여 우발수로 추방하였다고 한다. 본문에서 보이듯 본서에서는 관련 전승이 상대적으로 간략히 서술되어 있다. 그 원인으로 본서가 『구삼국사』를 약술한 결과로 볼 수도 있다. 다만 해모수와 하백의 도술 경쟁의 경우 중국 고대 동북 지역에서 유례를 찾기 어렵다는 견해(류준경, 38쪽)도 있는 만큼, 후대에 새롭게 들어간 부분도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해모수와 하백의 대결 에피소드가 『삼국유사』 권2 기이2 제2 가락국기(駕洛國記)에 나오는 가야 수로왕과 탈해의 도술 경쟁 전승과 유사한 구석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러하다.
한편 본문에 따르면 유화는 금와왕에게 거두어진 뒤 햇볕이 비추어 임신하게 된다. 따라서 북부여왕 해모수와의 사통 에피소드가 필수적으로 개입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더욱이 고구려 존속 당시의 금석문 및 『위서』 등의 중국 측 사서에 언급된 건국신화에서 해모수가 등장하지 않으며, ‘해부루-금와’로 이어지는 소위 동부여 성립 전승에서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이들과 관련한 에피소드는 『위서』나 「광개토왕릉비」 등에 보이는 고구려 건국신화가 정립한 뒤 추가로 부가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그 시기에 대해 양자 모두 5세기 이후로 보기도 하고(島田好, 91~94쪽), 문자명왕 시기 부여를 완전히 통합하면서 부여의 시조 전승인 해모수 전승이 삽입되었다고 보기도 하며(徐永大, 66~72쪽), 6세기 중엽 이후의 정치적 변동 속에 동부여계 세력이 집권함에 따라 동부여 성립 전승과 시조가 동부여에서 출자했다는 설이 첨가되었다고 여기기도 한다(노태돈, 33~44쪽). 반면 그와는 달리 출자와 관련한 부분이 개변되었을 가능성이 적기에 국초에 현재 전하는 건국신화의 기본적인 틀이 갖춰졌으리라고 보거나(金基興, 13~25쪽), 「광개토왕릉비」에서 시조가 북부여에서 출자하였다거나 동부여가 본디 추모왕(주몽)의 속민이었다는 기술이 있으므로, 5세기 무렵에는 해모수 및 동부여 천도 설화가 고구려 건국신화의 일부를 이루고 있었으리라 여기기도 한다(임기환, 171~180쪽).
〈참고문헌〉
島田好, 1934, 「東扶餘の位置と高句麗の開國傳說」, 『靑丘學叢』 16
徐永大, 1997, 「韓國古代의 宗敎職能者」, 『韓國古代史硏究』 12
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金基興, 2001, 「高句麗 建國神話의 검토」, 『韓國史硏究』 113
류준경, 2005, 「고구려 주몽신화에 관한 비교 연구」, 『漢文古典硏究』 10
임기환, 2016, 「고구려 건국전승의 始祖 出自와 北夫餘, 東夫餘-광개토왕릉비문의 北夫餘, 東夫餘를 중심으로-」, 『高句麗渤海硏究』 54
한편 본문에 따르면 유화는 금와왕에게 거두어진 뒤 햇볕이 비추어 임신하게 된다. 따라서 북부여왕 해모수와의 사통 에피소드가 필수적으로 개입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더욱이 고구려 존속 당시의 금석문 및 『위서』 등의 중국 측 사서에 언급된 건국신화에서 해모수가 등장하지 않으며, ‘해부루-금와’로 이어지는 소위 동부여 성립 전승에서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이들과 관련한 에피소드는 『위서』나 「광개토왕릉비」 등에 보이는 고구려 건국신화가 정립한 뒤 추가로 부가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그 시기에 대해 양자 모두 5세기 이후로 보기도 하고(島田好, 91~94쪽), 문자명왕 시기 부여를 완전히 통합하면서 부여의 시조 전승인 해모수 전승이 삽입되었다고 보기도 하며(徐永大, 66~72쪽), 6세기 중엽 이후의 정치적 변동 속에 동부여계 세력이 집권함에 따라 동부여 성립 전승과 시조가 동부여에서 출자했다는 설이 첨가되었다고 여기기도 한다(노태돈, 33~44쪽). 반면 그와는 달리 출자와 관련한 부분이 개변되었을 가능성이 적기에 국초에 현재 전하는 건국신화의 기본적인 틀이 갖춰졌으리라고 보거나(金基興, 13~25쪽), 「광개토왕릉비」에서 시조가 북부여에서 출자하였다거나 동부여가 본디 추모왕(주몽)의 속민이었다는 기술이 있으므로, 5세기 무렵에는 해모수 및 동부여 천도 설화가 고구려 건국신화의 일부를 이루고 있었으리라 여기기도 한다(임기환, 171~180쪽).
〈참고문헌〉
島田好, 1934, 「東扶餘の位置と高句麗の開國傳說」, 『靑丘學叢』 16
徐永大, 1997, 「韓國古代의 宗敎職能者」, 『韓國古代史硏究』 12
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金基興, 2001, 「高句麗 建國神話의 검토」, 『韓國史硏究』 113
류준경, 2005, 「고구려 주몽신화에 관한 비교 연구」, 『漢文古典硏究』 10
임기환, 2016, 「고구려 건국전승의 始祖 出自와 北夫餘, 東夫餘-광개토왕릉비문의 北夫餘, 東夫餘를 중심으로-」, 『高句麗渤海硏究』 54
금와가 이를 이상하게 여겨서 방 안에 가두었는데, 해[日]가 비추어 〔유화가〕 몸을 끌어당겨 피하였으나 햇빛이 또 따라와 비쳤다. 그로 인하여 임신하여註 025 알 하나를 낳았는데,註 026 크기가 다섯 되[升] 정도 되었다. 왕이 알을 버려 개와 돼지에게 주었으나 모두 먹지 않았다. 〔왕이〕 다시 길 가운데에 버렸으나 소나 말이 피하였다. 나중에는 들판에 버렸더니 새가 날개로 덮어 주었다. 왕이 알을 쪼개려고 하였으나 깨뜨릴 수가 없어 마침내 그 어미에게 돌려주었다. 그 어미가 물건으로 알을 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한 남자아이가 껍질을 부수고 나왔는데 골격과 의표(儀表)가 영특하고 호걸다웠다[英奇]. 나이가 겨우 7살이었음에도 영리함이 범상치 않아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다.註 027
부여의 속어에 활을 잘 쏘는 것[善射]을 ‘주몽(朱蒙)’이라 하는 까닭에註 028 그것으로 이름을 지었다.
해[日]가 비추어 … 그로 인하여 임신하여 : 천체나 기타 자연물에 접촉되어 임신하게 되었다는 내용을 가진 감정전설(感精傳說)은 세계 각지에 분포하고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전승 역시 그 일례라 할 수 있다. 특히 햇빛으로 인해 임신하게 된다는 유형의 전승은 만주·몽골 및 한반도와 일본 열도 등지에 널리 분포하고 있다(三品彰英, 1971). 『논형』 권2 길험편이나 『삼국지』 권30 위서30 동이 부여전에 인용된 『위략』에 따르면 부여 시조 동명은 모친은 달걀만한 크기의 기운에 감응하여 그를 낳았다고 한다. 또 『속일본기(續日本記)』 권40 환무(桓武) 연력(延曆) 8년(789) 12월 임자에는 백제 원조(遠祖) 도모왕(都慕王)은 하백의 딸이 일정(日精)에 감응하여 태어났다고 하며, 같은 책 연력 9년(790) 7월 신사에는 백제 태조 도모대왕(都慕大王)은 일신(日神)이 강령(降靈)한 인물이라 하였는데, 이때의 ‘도모’는 동명이다(盧明鎬, 44쪽; 林起煥, 20쪽; 朴賢淑, 46쪽). 따라서 부여계 지배집단 사이에서는 시조가 기운이나 햇빛, 혹은 그 정기와 닿아 탄생하였다는 모티프가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三品彰英, 1971, 『神話と文化史』, 平凡社
盧明鎬, 1981, 「百濟의 東明神話와 東明廟-東明神話의 再生成 現象과 관련하여-」, 『歷史學硏究』 10
林起煥, 1998, 「百濟 始祖傳承의 형성과 변천에 관한 고찰」, 『百濟硏究』 28
朴賢淑, 2005, 「백제 建國神話의 형성과정과 그 의미」, 『韓國古代史硏究』 39
〈참고문헌〉
三品彰英, 1971, 『神話と文化史』, 平凡社
盧明鎬, 1981, 「百濟의 東明神話와 東明廟-東明神話의 再生成 現象과 관련하여-」, 『歷史學硏究』 10
林起煥, 1998, 「百濟 始祖傳承의 형성과 변천에 관한 고찰」, 『百濟硏究』 28
朴賢淑, 2005, 「백제 建國神話의 형성과정과 그 의미」, 『韓國古代史硏究』 39
알 하나를 낳았는데 : 주몽이 처음에 알로 태어나 그것을 깨고 인간으로 세상에 나왔다는 것은 난생설화(卵生說話)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나는 모티프이다. 난생설화는 만주와 한반도 및 일본 열도, 타이완, 동남아시아, 남태평양 등지에 널리 분포한다(三品彰英, 1971, 『神話と文化史』, 平凡社). 한국에서는 주몽 이외에 신라 시조 혁거세와 탈해, 가야 시조 수로의 탄생담을 예로 들 수 있다. 참고로 「동명왕편」에 인용된 『구삼국사』에서는 주몽이 유화의 왼편 겨드랑이에서 알의 형태로 태어났으며, 출생 시기는 전한 선제 신작 4년(B.C. 58) 4월이라 전하고 있다.
부여의 속어에 활을 잘 쏘는 것[善射]을 ‘주몽(朱蒙)’이라 하는 까닭에 : 주몽의 어의에 대하여 이 기사와 같이 ‘활을 잘 쏜다’는 뜻으로 보아 후대의 만주어에도 같은 계통의 말이 남아 있다고 보기도 한다(이병도, 328쪽), ‘몽(蒙)’자 자체가 만주어로 선사(善射)를 의미하는 ‘mangga’와 유사하다는 지적(李基文, 84쪽)도 있다. 그러나 이를 동명의 다른 표기로 보아 제천이나 태양신 신앙과 연계하여 이해하는 경우(三品彰英, 1971; 金庠基, 1974)도 존재한다.
〈참고문헌〉
李基文, 1967, 「韓國語形性史」, 『民族文化史大系 Ⅴ』.
三品彰英, 1971, 『神話と文化史』, 平凡社
金庠基, 1974, 「國史上에 나타난 建國說話의 檢討」, 『東方史論叢』, 서울大學校出版部
이병도, 1996,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참고문헌〉
李基文, 1967, 「韓國語形性史」, 『民族文化史大系 Ⅴ』.
三品彰英, 1971, 『神話と文化史』, 平凡社
金庠基, 1974, 「國史上에 나타난 建國說話의 檢討」, 『東方史論叢』, 서울大學校出版部
이병도, 1996,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금와에게는 일곱 아들이 있어 늘 주몽과 함께 놀았으나 그 재주와 능력이 모두 주몽에 미치지 못하였다. 그 맏아들 대소(帶素)
註 029가 왕에게 말하기를, “주몽은 사람이 낳은 자가 아니며, 그 사람됨이 용감합니다. 만약 일찍 도모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까 두려우니, 청컨대 그를 제거하시옵소서.”라고 하였다. 〔그러나〕 왕이 듣지 않고 그에게 말을 기르도록 하였다. 주몽이 날랜 말을 알아보고 먹이를 줄여 야위게 하고, 둔한 말은 잘 먹여 살찌게 하였다.註 030 왕은 살찐 말을 자신이 타고, 마른 말을 주몽에게 주었다. 후에 들판에서 사냥하였는데, 주몽이 활을 잘 쏘기 때문에 화살을 적게 주었으나, 주몽이 잡은 짐승이 매우 많았다. 왕자와 여러 신하들이 또 그를 죽이려고 모의하였다. 주몽의 어머니가 은밀히 이를 알아차리고 〔주몽에게〕 알려주며 말하기를, “나라 사람들이 장차 너를 해치려 한다. 너의 재주와 지략으로 어디를 간들 안 되겠느냐? 지체하여 머물다가 욕을 당하는 것보다 멀리 가서 뜻을 이루는 것이 낫겠다.”라고 하였다.
주몽이 이에 오이(烏伊)
註 031·마리(摩離)
註 032·협보(陜父)
註 033 등 세 명과 친구가 되어 가다가 엄사수(淹㴲水)註 034
일명 개사수(蓋斯水)라고도 하는데, 지금[고려]의 압록강 동북쪽에 있다.에 이르러 건너려고 하였으나 다리가 없었다. 추격해오는 병사들이 닥칠까 두려워 물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外孫)이다. 오늘 도망하여 달아나는데 추격자들이 다가오니 어찌하면 좋은가?”註 035라고 하였다. 이에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으므로 주몽이 건널 수 있었다.註 036 〔이후〕 물고기와 자라가 곧 흩어지니 추격해오던 기병들은 건널 수 없었다.
오이(烏伊) : 주몽을 도와 고구려 건국을 도운 인물. 본문에 의하면 마리·협보와 함께 주몽을 따라 남하하였다. 중종(中宗) 임신간본(壬申刊本)에는 ‘조이(鳥伊)’라고 하였으나, 본서 권13 동명성왕 6년(B.C. 32) 10월조나 『삼국유사』 권1 기이 제1 고구려조, 그리고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권1 갑신년조에서 ‘오이(烏伊)’라고 하였다. ‘오(烏)’는 ‘조(鳥)’와 혼동하기 쉬운 자이고, 오이라 칭한 사례가 더 많으므로 오이로 표기하는 편이 좋을 듯하다. 『위서』 권100 열전88 동이 고구려전에서 오인(烏引)·오위(烏違) 등 두 명이 주몽과 함께 남하하였다고 하였는데, 오이와 발음이 비슷하다.
한편 본서 권23 백제본기1 온조왕 즉위조에 따르면 온조(溫祚)가 졸본부여(卒本扶餘)에서 남하할 때 오간(烏干)·마려(馬黎) 등 10명의 신하가 함께하였다고 한다. 이때 오간은 오이와 ‘오(烏)’자를 공유할 뿐 아니라, ‘이(伊)’의 자형을 상세히 보지 않으면 ‘간(干)’으로 혼동할 수 있다. 아울러 마려와 마리 역시 음이 서로 통한다. 그렇다면 이들을 같은 인물의 다른 표기로 볼 수 있다. 다만 오이·마리는 유리명왕 33년(14) 8월 양맥(梁貊)을 멸망시키고 한의 고구려현(高句麗縣)을 공략하였다고 하므로 문제가 생긴다. 오이·마리가 오간·마려라면 이미 온조를 따라 남하하여 백제에 있어야 하는데, 고구려에서 활발한 군사 활동을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주목되는 것은 부여·고구려·백제 등 부여계 종족을 중심으로 건국되었다고 한 국가에서는 동명형 신화가 공유되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는 건국 과정에서 창업주를 도운 인물에 대한 전승도 포함될 터이므로, 그들의 이름에 대한 표기도 상호 일정 정도의 공통성을 지니게 된 것이 아닐까 한다. 즉 이는 고구려와 백제의 건국신화가 애초 같은 뿌리에서 나왔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본서 고구려본기에 따르면 동명성왕 6년(B.C. 32) 10월 오이는 부분노와 함께 행인국을 치고, 유리명왕 33년(14) 8월 마리와 함께 양맥과 한의 군현[高句麗縣]을 공략하는 등 군사 방면에서 큰 업적을 세웠다. 자세한 내용은 본서 권13 고구려본기1 동명성왕 6년 10월조 및 같은 책 유리명왕 33년(14) 8월조 참조.
한편 본서 권23 백제본기1 온조왕 즉위조에 따르면 온조(溫祚)가 졸본부여(卒本扶餘)에서 남하할 때 오간(烏干)·마려(馬黎) 등 10명의 신하가 함께하였다고 한다. 이때 오간은 오이와 ‘오(烏)’자를 공유할 뿐 아니라, ‘이(伊)’의 자형을 상세히 보지 않으면 ‘간(干)’으로 혼동할 수 있다. 아울러 마려와 마리 역시 음이 서로 통한다. 그렇다면 이들을 같은 인물의 다른 표기로 볼 수 있다. 다만 오이·마리는 유리명왕 33년(14) 8월 양맥(梁貊)을 멸망시키고 한의 고구려현(高句麗縣)을 공략하였다고 하므로 문제가 생긴다. 오이·마리가 오간·마려라면 이미 온조를 따라 남하하여 백제에 있어야 하는데, 고구려에서 활발한 군사 활동을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주목되는 것은 부여·고구려·백제 등 부여계 종족을 중심으로 건국되었다고 한 국가에서는 동명형 신화가 공유되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는 건국 과정에서 창업주를 도운 인물에 대한 전승도 포함될 터이므로, 그들의 이름에 대한 표기도 상호 일정 정도의 공통성을 지니게 된 것이 아닐까 한다. 즉 이는 고구려와 백제의 건국신화가 애초 같은 뿌리에서 나왔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본서 고구려본기에 따르면 동명성왕 6년(B.C. 32) 10월 오이는 부분노와 함께 행인국을 치고, 유리명왕 33년(14) 8월 마리와 함께 양맥과 한의 군현[高句麗縣]을 공략하는 등 군사 방면에서 큰 업적을 세웠다. 자세한 내용은 본서 권13 고구려본기1 동명성왕 6년 10월조 및 같은 책 유리명왕 33년(14) 8월조 참조.
엄사수(淹㴲水) : 주몽이 부여를 탈출할 때 건넜다는 강의 이름이다. 본문에서는 ‘엄사수’라 하였으나, 「광개토왕릉비」에서는 ‘엄리대수(奄利大水)’, 「동명왕편」에서는 ‘엄체(淹滯)[수]’, 『삼국유사』 권1 기이1 제1 고구려조에서는 ‘엄수(淹水)’라고 전한다. 본서 권37 잡지6 지리4 삼국유명미상지분(三國有名未詳地分)조에 나오는 엄표수(淹淲水)도 동일한 하천을 말한다고 여겨진다. 표기 면에서는 문헌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기본적으로 ‘엄[奄·淹]’자를 공유하고 있다. 한편 『위서』·『북사』·『수서』 등 중국 측 사서에서는 구체적인 이름을 말하지 않고 ‘하나의 큰 강[一大水]’이라 하였다. 규모가 제법 큰 하천으로 여겨졌음을 엿볼 수 있다.
주목되는 점은 부여 시조 동명 전승에서도 비슷한 이름을 지닌 강이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동명이 건넌 하천에 대해 『논형』 권2 길험편에서는 ‘엄표수(掩淲水)’, 『삼국지』 권30 위서30 동이 부여전에 인용된 『위략』에서는 ‘시엄수(施掩水)’, 『후한서』 권85 열전75 동이 부여전 및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 권174 사이3 동이3 부여국조에서는 ‘엄사수(掩㴲水)’, 『양서』 권54 열전48 동이 고구려전 및 『북사』 권94 열전82 사이 상 백제전에서는 ‘엄체수(淹滯水)’, 『수서』 권81 열전46 동이 백제전에서는 ‘엄수(淹水)’라고 하였다. 이때 『위략』의 ‘시엄수’는 ‘엄시수(掩施水)’를 바꿔 표기한 것으로 보면, ‘엄’자를 공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엄사수’나 ‘엄체수’ 등 명칭이 고구려의 경우와 같은 사례도 존재한다.
종래 주몽이 건넌 엄사수에 대하여 쑹화강[松花江](이병도, 329쪽), 훈허[渾河] 강(白鳥庫吉, 1970), 랴오허[遼河] 강(리지린·강인숙, 1976) 등에 비정하기도 하였으나 주몽이 실재한 강을 건넜다면 부여 시조 동명이 건넌 강과 같을 수 없다. 고구려와 부여의 지리적 위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실존한 특정 하천을 말하는 것이라기보다(神崎勝, 271~272쪽), 부여와 고구려 지배 집단이 동형(同型)의 건국신화를 지니고 있던 데 기인한 현상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굳이 특정 하천으로 볼 필요는 없다. 고구려에서 부여와 경계를 이루는 지점에 위치한 하천을 건국신화에서 말한 엄사수·엄체수 혹은 엄리대수로 여겼다는 정도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참고로 그 의미를 ‘엄니’ 혹은 ‘엄내’로 보아 ‘대수(大水)’와 통한다는 설(이병도, 329쪽)도 있으나, 그렇게 상정할 경우 엄리대수는 같은 표현이 중복되므로 따르기 주저된다. 아울러 본문에서는 주(註)를 통하여 ‘개사수(蓋斯水)’라는 다른 이름을 전하고 있는데, ‘개(蓋)’와 엄사수의 ‘엄(掩)’이 의미상 서로 통하는 데 기인한 결과로 여겨진다.
〈참고문헌〉
白鳥庫吉, 1970, 「朝鮮古代地名考」, 『白鳥庫吉全集 3』, 吉川弘文館
리지린·강인숙, 1976, 『고구려 역사』, 사회과학출판사
神崎勝, 1995, 「夫餘・高句麗の建國傳承と百濟王家の始祖傳承」, 『日本古代の傳承と東アジア』, 吉川弘文館
이병도, 1996,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주목되는 점은 부여 시조 동명 전승에서도 비슷한 이름을 지닌 강이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동명이 건넌 하천에 대해 『논형』 권2 길험편에서는 ‘엄표수(掩淲水)’, 『삼국지』 권30 위서30 동이 부여전에 인용된 『위략』에서는 ‘시엄수(施掩水)’, 『후한서』 권85 열전75 동이 부여전 및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 권174 사이3 동이3 부여국조에서는 ‘엄사수(掩㴲水)’, 『양서』 권54 열전48 동이 고구려전 및 『북사』 권94 열전82 사이 상 백제전에서는 ‘엄체수(淹滯水)’, 『수서』 권81 열전46 동이 백제전에서는 ‘엄수(淹水)’라고 하였다. 이때 『위략』의 ‘시엄수’는 ‘엄시수(掩施水)’를 바꿔 표기한 것으로 보면, ‘엄’자를 공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엄사수’나 ‘엄체수’ 등 명칭이 고구려의 경우와 같은 사례도 존재한다.
종래 주몽이 건넌 엄사수에 대하여 쑹화강[松花江](이병도, 329쪽), 훈허[渾河] 강(白鳥庫吉, 1970), 랴오허[遼河] 강(리지린·강인숙, 1976) 등에 비정하기도 하였으나 주몽이 실재한 강을 건넜다면 부여 시조 동명이 건넌 강과 같을 수 없다. 고구려와 부여의 지리적 위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실존한 특정 하천을 말하는 것이라기보다(神崎勝, 271~272쪽), 부여와 고구려 지배 집단이 동형(同型)의 건국신화를 지니고 있던 데 기인한 현상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굳이 특정 하천으로 볼 필요는 없다. 고구려에서 부여와 경계를 이루는 지점에 위치한 하천을 건국신화에서 말한 엄사수·엄체수 혹은 엄리대수로 여겼다는 정도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참고로 그 의미를 ‘엄니’ 혹은 ‘엄내’로 보아 ‘대수(大水)’와 통한다는 설(이병도, 329쪽)도 있으나, 그렇게 상정할 경우 엄리대수는 같은 표현이 중복되므로 따르기 주저된다. 아울러 본문에서는 주(註)를 통하여 ‘개사수(蓋斯水)’라는 다른 이름을 전하고 있는데, ‘개(蓋)’와 엄사수의 ‘엄(掩)’이 의미상 서로 통하는 데 기인한 결과로 여겨진다.
〈참고문헌〉
白鳥庫吉, 1970, 「朝鮮古代地名考」, 『白鳥庫吉全集 3』, 吉川弘文館
리지린·강인숙, 1976, 『고구려 역사』, 사회과학출판사
神崎勝, 1995, 「夫餘・高句麗の建國傳承と百濟王家の始祖傳承」, 『日本古代の傳承と東アジア』, 吉川弘文館
이병도, 1996,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이요 … 어찌하면 좋은가 : 주몽이 엄사수에 이르러 건널 수 없게 되자 이처럼 외쳤다고 하는 것은 하늘을 부계로 두고 땅 내지 물을 모계로[天父地母] 두는 시조 출자 의식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즉 주몽이 천상과 지상의 신적 존재에게 피를 이어받은 절대자에 버금가는 존재임을 공언함으로써 가호를 빌고 있다. 이와 유사한 전승은 『논형』 권2 길험편이나 『위략』 등에 전하는 부여 건국신화에서도 존재한다.
이 모티프는 다른 사료에서도 나타나는데, 기본적인 내용은 비슷하지만, 약간씩 차이가 있어 검토가 필요하다.
① 『위서』 권100 열전88 동이 고구려전에서는 “나는 해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다. 오늘 도망하여 달아나는데 추격병들이 어찌하면 건널 수 있겠는가?[我是日子, 河伯外孫, 今日逃走, 追兵垂及, 如何得濟]”라고 나와 있는데, 『수서』나 『북사』 등의 중국 측 문헌에 나온 주몽의 도강 전승은 해당 기술을 토대로 하였다. 주목되는 점은 주몽의 부친을 해[日]로 본 것으로, 「광개토왕릉비」에서 천제 내지 황천, 「모두루묘지」에서 일월(日月)이라 언급한 것과는 다르다. 해는 하늘 전체를 포괄하지 못하고 양(陽)만 상징한다(김선민, 24~25쪽). 그에 비해 천(天)은 일(日)·월(月)의 음양을 넘어선 지고의 위치에 있으며(琴章泰, 82쪽), 가시적인 해보다는 추상적인 천이 후대의 사유체계 속에서 나타난다(김석근, 6~8쪽). 따라서 애초 부친을 해로 보던 것이 변화·발전하여 주야로 천공을 지배한다는 의미를 담은 일월이 되고, 또 한 걸음 더 나아가 관념화된 천제가 되었다고 여겨진다(武田幸男, 341~342쪽). 따라서 『위서』에 실린 고구려 건국신화는 본서의 그것보다 시기적으로 이른 형태라 할 수 있다.
② 「광개토왕릉비」에서는 “나는 황천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인 추모왕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연결하고 거북을 띄우라[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郞, 鄒牟王. 爲我連葭浮龜]”고 표현되어 있는데, 주몽이 직접적인 지시를 통하여 자연의 힘을 이용하고 있다. 즉 주몽의 주재자로서의 측면이 강조된 셈이다. 5세기 초 국가권력에 의해 공인된 건국신화였기에 시조의 비범함이 더욱 두드러졌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 점은 주몽의 도주 역시 남쪽으로의 순행[巡幸南下]로 표현하고 있는 데서도 잘 나타난다.
③ 「동명왕편」에 인용된 『구삼국사』에서는 “‘저는 천제의 손자요, 하백의 외손인데, 지금 난을 피하여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황천후토는 저 고자를 불쌍히 여기시어 속히 배와 다리를 보내주소서.’ 말을 끝마치고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다[我天帝之孫, 河伯之甥, 令避難至此. 皇天后土, 憐我孤子, 速致舟橋. 言訖, 以弓打水, 魚鼈浮出成橋]”고 나와 있다. 『구삼국사』는 『논형』 권2 길험편이나 『위략』에 기록된 부여 건국신화에서 동명이 강을 건널 때 했던 활로 물을 치는 행위[以弓擊水]와 고구려 건국신화에 나타나는 언사가 결합된 모양새다. 아울러 주몽이 자신을 천제의 아들이 아니라 손자로 칭하고 있는데, 이는 천제의 아들이라 한 해모수를 부친으로 본 결과로 여겨진다. 즉 이전까지의 건국신화에 비해 일정 부분 변용이 이루어졌다 하겠는데, 『구삼국사』 내지 그 원전 자료의 찬술 태도와 관련하여 염두에 두어야 할 부분이다.
〈참고문헌〉
琴章泰, 1972, 「古代中國의 信仰과 祭祀-그 構造의 宗敎史學的考察-」, 『宗敎硏究』 1.
武田幸男, 1989, 『高句麗史と東アジア-「広開土王碑」研究序説-』, 岩波書店
김석근, 2005, 「고대 국가의 제천의식과 민회-한국정치사상사의 ‘古層’과 ‘執拗低音’을 찾아서-」, 『韓國政治硏究』 14-1
김선민, 2006, 「高句麗建國神話에 대한 廣開土王陵碑와 中國正史의 비교 연구」, 『東方學志』 134
이 모티프는 다른 사료에서도 나타나는데, 기본적인 내용은 비슷하지만, 약간씩 차이가 있어 검토가 필요하다.
① 『위서』 권100 열전88 동이 고구려전에서는 “나는 해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다. 오늘 도망하여 달아나는데 추격병들이 어찌하면 건널 수 있겠는가?[我是日子, 河伯外孫, 今日逃走, 追兵垂及, 如何得濟]”라고 나와 있는데, 『수서』나 『북사』 등의 중국 측 문헌에 나온 주몽의 도강 전승은 해당 기술을 토대로 하였다. 주목되는 점은 주몽의 부친을 해[日]로 본 것으로, 「광개토왕릉비」에서 천제 내지 황천, 「모두루묘지」에서 일월(日月)이라 언급한 것과는 다르다. 해는 하늘 전체를 포괄하지 못하고 양(陽)만 상징한다(김선민, 24~25쪽). 그에 비해 천(天)은 일(日)·월(月)의 음양을 넘어선 지고의 위치에 있으며(琴章泰, 82쪽), 가시적인 해보다는 추상적인 천이 후대의 사유체계 속에서 나타난다(김석근, 6~8쪽). 따라서 애초 부친을 해로 보던 것이 변화·발전하여 주야로 천공을 지배한다는 의미를 담은 일월이 되고, 또 한 걸음 더 나아가 관념화된 천제가 되었다고 여겨진다(武田幸男, 341~342쪽). 따라서 『위서』에 실린 고구려 건국신화는 본서의 그것보다 시기적으로 이른 형태라 할 수 있다.
② 「광개토왕릉비」에서는 “나는 황천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인 추모왕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연결하고 거북을 띄우라[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郞, 鄒牟王. 爲我連葭浮龜]”고 표현되어 있는데, 주몽이 직접적인 지시를 통하여 자연의 힘을 이용하고 있다. 즉 주몽의 주재자로서의 측면이 강조된 셈이다. 5세기 초 국가권력에 의해 공인된 건국신화였기에 시조의 비범함이 더욱 두드러졌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 점은 주몽의 도주 역시 남쪽으로의 순행[巡幸南下]로 표현하고 있는 데서도 잘 나타난다.
③ 「동명왕편」에 인용된 『구삼국사』에서는 “‘저는 천제의 손자요, 하백의 외손인데, 지금 난을 피하여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황천후토는 저 고자를 불쌍히 여기시어 속히 배와 다리를 보내주소서.’ 말을 끝마치고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다[我天帝之孫, 河伯之甥, 令避難至此. 皇天后土, 憐我孤子, 速致舟橋. 言訖, 以弓打水, 魚鼈浮出成橋]”고 나와 있다. 『구삼국사』는 『논형』 권2 길험편이나 『위략』에 기록된 부여 건국신화에서 동명이 강을 건널 때 했던 활로 물을 치는 행위[以弓擊水]와 고구려 건국신화에 나타나는 언사가 결합된 모양새다. 아울러 주몽이 자신을 천제의 아들이 아니라 손자로 칭하고 있는데, 이는 천제의 아들이라 한 해모수를 부친으로 본 결과로 여겨진다. 즉 이전까지의 건국신화에 비해 일정 부분 변용이 이루어졌다 하겠는데, 『구삼국사』 내지 그 원전 자료의 찬술 태도와 관련하여 염두에 두어야 할 부분이다.
〈참고문헌〉
琴章泰, 1972, 「古代中國의 信仰과 祭祀-그 構造의 宗敎史學的考察-」, 『宗敎硏究』 1.
武田幸男, 1989, 『高句麗史と東アジア-「広開土王碑」研究序説-』, 岩波書店
김석근, 2005, 「고대 국가의 제천의식과 민회-한국정치사상사의 ‘古層’과 ‘執拗低音’을 찾아서-」, 『韓國政治硏究』 14-1
김선민, 2006, 「高句麗建國神話에 대한 廣開土王陵碑와 中國正史의 비교 연구」, 『東方學志』 134
물고기와 자라가 … 건널 수 있었다 : 물고기가 떠올라 다리를 만든 결과 강을 건널 수 있었다는 전승은 북아시아 지역에서 연어·송어 등이 산란기에 떼 지어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모습이 마치 다리를 이루는 것처럼 보이는 데 있었다는 설(三上次男, 1966)이 있다. 다만 이는 물고기에 국한된 것이기에 자라도 설명이 필요한데, 중국식으로 수식된 결과 본문과 같은 서술이 나타났다고 보기도 한다(鄭求福·盧重國·申東河·金泰植·權悳永, 411쪽). 다만 『안자춘추(晏子春秋)』 내편(內篇) 간상(諫上) 제1의 15에서 하백이 어별을 민으로 삼았다[“河伯以水爲國, 以魚鱉爲民”]고 언급한 것이나 주몽이 하백의 관장 영역인 물에 어려움을 알린 것을 고려하면, 중국의 하백 관념을 수용하여 적절히 활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三上次男, 1966, 『古代東北アジア史硏究』, 吉川弘文館
鄭求福·盧重國·申東河·金泰植·權悳永, 1997, 『譯註 三國史記 3-주석편(상)-』, 韓國精神文化硏究院
〈참고문헌〉
三上次男, 1966, 『古代東北アジア史硏究』, 吉川弘文館
鄭求福·盧重國·申東河·金泰植·權悳永, 1997, 『譯註 三國史記 3-주석편(상)-』, 韓國精神文化硏究院
주몽이 가다가 모둔곡(毛屯谷)註 037에 이르러『위서(魏書)』에는 “음술수(音述水)에 이르렀다.”라고 하였다.註 038 세 명을 만났다. 그 가운데 한 명은 삼베옷[麻衣]를 입었고, 한 명은 기운 옷[衲衣]를 입었으며, 한 명은 수초로 엮은 옷[水藻衣]을 입고 있었다. 주몽이 묻기를, “그대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성(姓)은 무엇이고 이름은 무엇인가?”라고 하였다. 삼베옷을 입은 사람이 말하기를, “이름은 재사(再思)
註 039입니다.”라고 하였고, 기운 옷을 입은 사람이 말하기를, “이름은 무골(武骨)
註 040입니다.”라고 하였으며, 수초로 엮은 옷을 입은 사람이 말하기를, “이름은 묵거(默居)
註 041입니다.”라고 하였으나, 성씨는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주몽이 재사에게 극씨(克氏), 무골에게 중실씨(仲室氏), 묵거에게 소실씨(少室氏)라는 성씨를 주고,註 042 무리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바야흐로 〔하늘의〕 크나큰 명령[景命]을 받아 나라의 기틀을 열려고 하는데 마침 이 세 명의 현명한 사람을 만났으니, 어찌 하늘께서 주신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마침내 그 능력을 살펴 각기 일을 맡기고 그들과 함께 졸본천
(卒本川)註 043에 이르렀다.『위서』에는 “흘승골성(紇升骨城)註 044에 이르렀다.”라고 하였다.
모둔곡(毛屯谷) : 본서 권37 잡지6 지리4 삼국유명미상지분(三國有名未詳地分)조에도 기재된 것으로 보아 본서의 찬자도 그 위치를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가 발흥한 압록강 중류 유역 일대에는 애초 나국(那國)이라 일컫는 소국들이 존재하였으며, 이들 공동체는 다수의 곡(谷) 내지 천(川) 집단이 결속하여 성립하였던 것으로 보인다(임기환, 80~81쪽; 여호규, 176~179쪽). 본문에 따르면 주몽은 모둔곡에서 재사·무골·묵거를 만났는데, 위 견해에 근거한다면 이들은 곡 집단의 수장 세력으로 볼 수 있다.
〈참고문헌〉
임기환, 2004, 『고구려 정치사 연구』, 한나래
여호규, 2014, 『고구려 초기 정치사 연구』, 신서원
〈참고문헌〉
임기환, 2004, 『고구려 정치사 연구』, 한나래
여호규, 2014, 『고구려 초기 정치사 연구』, 신서원
『위서(魏書)』에는 “음술수(音述水)에 이르렀다.”라고 하였다 : 『위서』 권100 열전88 동이 고구려전에는 주몽이 보술수(普述水)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이 기사의 ‘음(音)’은 ‘보(普)’를 잘못 옮겨 적은 것으로 여겨진다. 고구려는 중국 지린성[吉林省]의 훈 강[渾江] 유역을 기반으로 성립하였다. 따라서 보술수는 훈장 강이나 그 지류 하천 중 하나를 말할 것이며, 모둔곡도 그 근방에 소재하였다고 추정된다.
재사(再思) : 주몽이 남하한 뒤 만난 인물. 고구려 개국을 도왔고, ‘극(克)’이라는 성씨를 하사받았다. 이후 행적은 알 수 없다. 주몽은 이때 재사 외에 무골·묵거와도 만났는데, 『위서』 권100 열전88 동이 고구려전에서도 이를 언급하고 있으나, 여기서는 세 명이 입은 옷을 말하고 있을 뿐 이름이나 사성(賜姓)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는다. 같은 기록에서 오인·오위 등 주몽과 함께 남하한 인물들의 이름은 전하고 있으므로, 애초에는 세 명의 현자를 만났다는 정도의 모티프였다가 이후 이름이 확정되고 사성 전승이 부가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 점은 그들의 이름에서 잘 드러나는데, ‘재차 생각하고[再思]’, ‘강건한 체격을 지녔으며[武骨]’, ‘묵묵히 거처하는 것[默居]’은 지배층에게 요구되는 덕목이기 때문이다.
주몽이 재사에게 극씨(克氏), … 성씨를 주고 : 본서 고구려본기의 사성(賜姓) 기사는 이 기사의 3건을 포함하여 총 8차례에 걸쳐 등장하고 있다. 남은 5건은 ①유리명왕 21년(2) 9월 사물택(沙勿澤)에서 만난 장부에게 위씨(位氏)란 성과 사물(沙勿)이란 이름 사여, ②유리명왕 24년(5) 9월 기산(箕山)에서 만난 이인(異人)에게 우씨(羽氏)란 성씨를 사여하고, 사위로 삼음, ③대무신왕 4년(21) 12월 부여 진군 시 종군을 청한 장부에게 부정씨(負鼎氏) 사여, ④대무신왕 5년(22) 7월 투항한 부여왕 종제(從弟)에게 낙씨(絡氏) 사여, ⑤대무신왕 15년(32) 탐학을 일삼은 비류부장(沸流部長)을 선도(善導)한 추발소(鄒勃素)에게 대실씨(大室氏) 사여 등이다.
왕의 사성은 동아시아 전통 사회에서 드물지 않게 벌어지는 일이었다. 이에 고구려의 사성은 영역 내 수장층을 편제·통솔하여 중앙 집권화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설(金光洙, 961~968쪽)이 제기되었다. 다만 당시 실제로 이러한 조치가 이루어졌는지는 검토가 필요하다. 사성 기사는 건국기라 할 동명성왕~대무신왕 시기에 국한되어 등장할 뿐, 이후에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사성이 실제로 정치적인 의미를 지닌 채 당대에 시행되었다면, 이는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그 면에서 대략 4세기 후반 즈음 초기 왕들에 대한 전승을 취합하며 건국기의 전승을 체계화하면서 당시까지 함께 전해지던 일부 귀족들의 가계 전승을 왕실 가계 전승의 하위 부분으로 흡수하였고, 이때 사성은 양자가 결합하는 매개고리 역할을 하였다는 견해(노태돈, 90쪽)가 주목된다. 본서 권1 신라본기1에 따르면 신라도 이미 유리이사금 9년(32)에 6부 세력집단에게 각기 성씨를 사여한 것처럼 나오지만, 실제로 성씨를 사용한 흔적은 한참 뒤에 발견되고 있다.
사성 기사를 포함한 귀족들의 족조(族祖) 전승은 시조 주몽의 신성성과 신비성을 강조함과 아울러, 자신들의 선조가 고구려 건국 및 발전에 기여한 존재임을 강조하고 있다는 특징이다. 귀족들은 이를 토대로 귀족으로서 자신들의 위치를 정당화하였다(徐永大, 169~171쪽). 「광개토왕릉비」에서 역대 왕들 가운데 초기 3왕을 특정하여 그 훈적을 기리고 있는 것에서 보이듯 이미 4세기 후반이면 이들은 다른 왕들과 구별되는 입지를 확보하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귀족들의 족조 전승 역시 귀족에 의해서든 왕권에 의해서든 초기 3왕의 전승 안에 자리하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유의할 점은 고구려본기에서 이러한 사성 관련 인물들은 단지 일회성으로 나오고, 후손의 활동상도 거의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2~3세기를 대상으로 한 고구려본기에서 명림(明臨)이나 우(于) 등의 성씨를 가진 인물들이 복수로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과 대조적이다. 바꿔 말하면 기사의 신뢰도가 상대적으로 확보된 해당 시기에 실제로 고구려 정계에서 활약했던 인물들의 족조 전승이라 할 사례는 찾을 수 없다. 따라서 대략 4세기 이후 주요 귀족 집단이 교체되어 초기 3왕의 전승을 편년 기사로 체계화할 때 이들 신진 세력의 족조 전승이 편입되었거나, 혹은 왕권이 기존에 가문들을 대상으로 새로운 성씨를 사여하였고 그것이 초기 기사에 전승 형태로 남게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참고문헌〉
金光洙, 1983, 「高句麗 建國期의 姓氏賜與」, 『金哲埈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知識産業社
徐永大, 1995, 「高句麗 貴族家門의 族祖傳承」, 『韓國古代史硏究』 8
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왕의 사성은 동아시아 전통 사회에서 드물지 않게 벌어지는 일이었다. 이에 고구려의 사성은 영역 내 수장층을 편제·통솔하여 중앙 집권화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설(金光洙, 961~968쪽)이 제기되었다. 다만 당시 실제로 이러한 조치가 이루어졌는지는 검토가 필요하다. 사성 기사는 건국기라 할 동명성왕~대무신왕 시기에 국한되어 등장할 뿐, 이후에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사성이 실제로 정치적인 의미를 지닌 채 당대에 시행되었다면, 이는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그 면에서 대략 4세기 후반 즈음 초기 왕들에 대한 전승을 취합하며 건국기의 전승을 체계화하면서 당시까지 함께 전해지던 일부 귀족들의 가계 전승을 왕실 가계 전승의 하위 부분으로 흡수하였고, 이때 사성은 양자가 결합하는 매개고리 역할을 하였다는 견해(노태돈, 90쪽)가 주목된다. 본서 권1 신라본기1에 따르면 신라도 이미 유리이사금 9년(32)에 6부 세력집단에게 각기 성씨를 사여한 것처럼 나오지만, 실제로 성씨를 사용한 흔적은 한참 뒤에 발견되고 있다.
사성 기사를 포함한 귀족들의 족조(族祖) 전승은 시조 주몽의 신성성과 신비성을 강조함과 아울러, 자신들의 선조가 고구려 건국 및 발전에 기여한 존재임을 강조하고 있다는 특징이다. 귀족들은 이를 토대로 귀족으로서 자신들의 위치를 정당화하였다(徐永大, 169~171쪽). 「광개토왕릉비」에서 역대 왕들 가운데 초기 3왕을 특정하여 그 훈적을 기리고 있는 것에서 보이듯 이미 4세기 후반이면 이들은 다른 왕들과 구별되는 입지를 확보하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귀족들의 족조 전승 역시 귀족에 의해서든 왕권에 의해서든 초기 3왕의 전승 안에 자리하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유의할 점은 고구려본기에서 이러한 사성 관련 인물들은 단지 일회성으로 나오고, 후손의 활동상도 거의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2~3세기를 대상으로 한 고구려본기에서 명림(明臨)이나 우(于) 등의 성씨를 가진 인물들이 복수로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과 대조적이다. 바꿔 말하면 기사의 신뢰도가 상대적으로 확보된 해당 시기에 실제로 고구려 정계에서 활약했던 인물들의 족조 전승이라 할 사례는 찾을 수 없다. 따라서 대략 4세기 이후 주요 귀족 집단이 교체되어 초기 3왕의 전승을 편년 기사로 체계화할 때 이들 신진 세력의 족조 전승이 편입되었거나, 혹은 왕권이 기존에 가문들을 대상으로 새로운 성씨를 사여하였고 그것이 초기 기사에 전승 형태로 남게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참고문헌〉
金光洙, 1983, 「高句麗 建國期의 姓氏賜與」, 『金哲埈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知識産業社
徐永大, 1995, 「高句麗 貴族家門의 族祖傳承」, 『韓國古代史硏究』 8
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흘승골성(紇升骨城) ; 흘승골성(紇升骨城)은 『위서』 권100 열전88 동이 고구려전에서 고구려가 처음 도읍한 곳으로 나오며, 이후의 중국 측 사서 역시 그러한 기술을 답습하고 있다. 「광개토왕릉비」에서는 비류곡(沸流谷) 홀본(忽本) 서쪽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於沸流谷, 忽本西, 城山上而建都焉”]고 하였는데, 홀본이 곧 졸본(卒本)이므로 여기서 언급한 성채가 바로 중국 측에서 말한 흘승골성으로 여겨진다. 이에 대해 ‘흘승골’을 ‘승흘골(升紇骨)’이 전도된 것으로 여겨 ‘승흘골=솔골[卒忽]=졸본’으로 파악하기도 하나(李丙燾, 367~368쪽), 자순(字順)을 뒤바꾸는 등 자의적인 측면이 없지 않다. 또 ‘흘승골성’을 ‘흘본골성(紇本骨城)’의 오사(誤寫)로 보기도 한다(白鳥庫吉, 25쪽). 글을 옮겨 적는 과정에서 ‘본(本)’이 ‘승(升)’으로 잘못 베껴졌을 가능성도 충분하고, ‘흘본(紇本)’은 홀본과 음이 통하기 때문에 일견 타당하다. 그렇다면 ‘흘본골성=홀본(졸본)의 골성’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奇庚良, 135~136쪽). 「동명왕편」에 인용된 『구삼국사』에서는 검은 구름이 골령(鶻嶺)에 일어나더니 성곽이 만들어져 주몽이 그곳에서 거처하였다는 전승을 전한다. 이는 「광개토왕릉비」에서 홀본 서쪽 산 위에 세웠다는, 『위서』 고구려전에서 말한 흘승골성과 다르지 않다고 여겨지는데, 그 면에서 보자면 흘승골성이란 이름에 골령이라는 지명이 함께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홀’과 ‘골’의 음이 유사하다는 점에서 보자면 골령 자체가 ‘홀본의 산봉우리[山嶺]’를 의미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姜辰垣, 76쪽). 한편 오녀산의 지정학적 특징에 주목하여 흘승골성을 ‘성 같은 산 위의 성’이란 의미로 이해하기도 한다(권순홍, 28~30쪽).
오늘날 연구자들 대부분은 흘승골성을 랴오닝성[遼寧省] 환런[桓仁] 지역에 있는 오녀산성(五女山城)으로 본다. 이 산성은 환런 일대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을 주는 장소에 자리하고 있어 지배자의 권력을 드러내기에는 좋은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실제 오녀산은 해발 820m 높이에 서·남·북쪽 삼면이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정상은 남북 1,000m, 동서 300m, 총 2,440m에 이르는 넓은 평탄지이다. 현재 동쪽과 동남쪽 산허리에는 자연 지세를 이용하여 쌓은 고구려 때의 성벽이 남아 있고, 산 정상부에서는 고구려시기의 여러 건물 유지와 저수 시설 등이 확인되었다(辽宁省文物考古硏究所, 2004).
〈참고문헌〉
白鳥庫吉, 1914, 「丸都城及國內城考」, 『史學雜誌』 25-4·5
李丙燾, 1976,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辽宁省文物考古硏究所, 2004, 『五女山城: 1996~1999, 2003年桓仁五女山城调查发掘报告』, 文物出版社
姜辰垣, 2015, 「高句麗 國家祭祀 硏究」,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奇庚良, 2017, 「高句麗 王都 硏究」,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권순홍, 2019, 「고구려 도성 연구」, 성균관대 박사학위논문
오늘날 연구자들 대부분은 흘승골성을 랴오닝성[遼寧省] 환런[桓仁] 지역에 있는 오녀산성(五女山城)으로 본다. 이 산성은 환런 일대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을 주는 장소에 자리하고 있어 지배자의 권력을 드러내기에는 좋은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실제 오녀산은 해발 820m 높이에 서·남·북쪽 삼면이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정상은 남북 1,000m, 동서 300m, 총 2,440m에 이르는 넓은 평탄지이다. 현재 동쪽과 동남쪽 산허리에는 자연 지세를 이용하여 쌓은 고구려 때의 성벽이 남아 있고, 산 정상부에서는 고구려시기의 여러 건물 유지와 저수 시설 등이 확인되었다(辽宁省文物考古硏究所, 2004).
〈참고문헌〉
白鳥庫吉, 1914, 「丸都城及國內城考」, 『史學雜誌』 25-4·5
李丙燾, 1976,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辽宁省文物考古硏究所, 2004, 『五女山城: 1996~1999, 2003年桓仁五女山城调查发掘报告』, 文物出版社
姜辰垣, 2015, 「高句麗 國家祭祀 硏究」,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奇庚良, 2017, 「高句麗 王都 硏究」,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권순홍, 2019, 「고구려 도성 연구」, 성균관대 박사학위논문
〔주몽은〕 그 토양이 기름지고 아름다우며, 자연 지세[山河]가 험하고 단단한 것을 보고 드디어 도읍하려고 하였으나,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었기에 단지 비류수(沸流水)註 045 가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나라 이름을 고구려(高句麗)註 046라 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고(高)를 성씨[氏]로 삼았다.註 047
혹 말하기를, “주몽이 졸본부여(卒本扶餘)註 048에 이르렀는데, 왕이 아들이 없었다. 주몽을 보고는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라고 하였다.註 049 이때 주몽의 나이가 22세로, 한(漢) 효원제(孝元帝)
註 050 건소(建昭)註 051 2년(B.C. 37), 신라 시조 혁거세(赫居世) 21년 갑신년(甲申年)이었다. 사방에서 듣고 와서 따르는 자가 많았다. 그 땅이 말갈
註 052 부락에 잇닿아 있기에 침입과 도적질의 피해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그들을 물리치니, 말갈이 두려워 굴복하고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비류수(沸流水) : 고구려 초기 중심지를 흐르는 하천. 본서 권14 고구려본기 제2 대무신왕 4년(21) 12월조에서는 부여 정벌 시 고구려군의 이동 경로 중에 언급되고 있으며, 『삼국지』 권30 위서30 동이 고구려전에 따르면 이이모(伊夷模)와의 왕위 계승 전쟁에서 패배한 발기(拔奇)와 연노부(涓奴部) 세력이 거주한 곳이기도 하며[“拔奇怨爲兄而不得立, 與涓奴加各將下戶三萬餘口詣康降, 還住沸流水”], 같은 책 권28 위서28 관구검전에서는 조위(曹魏)의 침공에 대한 고구려군의 진군 경로 상에서 등장한다[“正始中, … 句驪王宮將步騎二萬人, 進軍沸流水上, 大戰梁口”]. 본서 권37 잡지6 지리4 삼국유명미상지분(三國有名未詳地分)조에도 기재된 것으로 보아 본서의 찬자도 그 위치를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의 훈장[渾江] 강에 비정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나, 그 지류인 푸얼강[富爾江]으로 보기도 한다(노태돈, 2012, 「고구려초기 천도에 관한 약간의 논의」, 『한국고대사연구』 68, 29쪽).
고구려(高句麗) : 상대적으로 이른 시기를 다룬 중국 측 사서, 즉 『한서』·『후한서』에서는 고구려(高句驪)라 쓰기도 하였다. ‘려(麗)’ 대신에 ‘마(馬)’ 부수의 ‘려(驪)’를 쓴 것은 중국 측에서 이질적인 공동체를 가리킬 때 종종 쓰던 비칭(卑稱)의 일환이다. 다만 『삼국지』 단계에서부터는 ‘마(馬)’자 부수를 뺀 명칭이 사용되었다. 물론 『송서』나 『양서』 등의 남조계 사서에서는 여전히 이전의 표기를 유지하기도 하였으나, 『위서』 등 북조계 사서에서는 『삼국지』의 흐름을 이어받았다.
고구려는 ‘고(高)’를 뺀 채 ‘구려(句麗)’ 내지 ‘구려(句驪)’라 칭해지기도 하였다. 이때의 구려는 ‘구루(溝樓)’와 마찬가지로 성읍(城邑)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고’는 크다는 뜻이므로, 결국 고구려는 ‘대성(大城)’·‘수읍(首邑)’·‘상읍(上邑)’과 같은 의미라고 보기도 한다(李丙燾, 353~369쪽).
한편 『주서』 단계 이후로는 고구려를 고려(高麗)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이전에는 고구려와 고려가 상통하여 사용된 것으로 보아왔으나, 고구려가 광개토왕 혹은 장수왕 시기에 고구려에서 고려로 국명을 바꾼 것으로 파악한 설(鄭求福, 1992)이 제기되어 공감대를 얻고 있다. 사실 백제국(佰濟國)이 백제(百濟)가 되고, 사로국(斯盧國)이 신라(新羅)가 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국가 체제가 정비됨에 따라 국호를 원래의 의미나 발음에서 동떨어지지 않는 선에서 개정하는 사례는 드물지 않다. 고구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고려는 글자의 의미에서 고구려보다 세련된 인상을 주므로, 5세기 이후에는 ‘고려’가 정식 국호로 사용되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참고문헌〉
李丙燾, 1976,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鄭求福, 1992, 「高句麗의 ‘高麗’ 國號에 대한 一考-三國史記의 기록과 관련하여-」, 『湖西史學』 19·20.
고구려는 ‘고(高)’를 뺀 채 ‘구려(句麗)’ 내지 ‘구려(句驪)’라 칭해지기도 하였다. 이때의 구려는 ‘구루(溝樓)’와 마찬가지로 성읍(城邑)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고’는 크다는 뜻이므로, 결국 고구려는 ‘대성(大城)’·‘수읍(首邑)’·‘상읍(上邑)’과 같은 의미라고 보기도 한다(李丙燾, 353~369쪽).
한편 『주서』 단계 이후로는 고구려를 고려(高麗)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이전에는 고구려와 고려가 상통하여 사용된 것으로 보아왔으나, 고구려가 광개토왕 혹은 장수왕 시기에 고구려에서 고려로 국명을 바꾼 것으로 파악한 설(鄭求福, 1992)이 제기되어 공감대를 얻고 있다. 사실 백제국(佰濟國)이 백제(百濟)가 되고, 사로국(斯盧國)이 신라(新羅)가 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국가 체제가 정비됨에 따라 국호를 원래의 의미나 발음에서 동떨어지지 않는 선에서 개정하는 사례는 드물지 않다. 고구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고려는 글자의 의미에서 고구려보다 세련된 인상을 주므로, 5세기 이후에는 ‘고려’가 정식 국호로 사용되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참고문헌〉
李丙燾, 1976,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鄭求福, 1992, 「高句麗의 ‘高麗’ 國號에 대한 一考-三國史記의 기록과 관련하여-」, 『湖西史學』 19·20.
이로 인하여 고(高)를 성씨[氏]로 삼았다 : 원문을 그대로 번역하면 “고(高)로써 씨(氏)를 삼았다”가 된다. 사실 성(姓)과 씨는 그 뜻이 조금 다른 개념이다. 본디 성이 혈족(血族)을 나타낸다면, 씨는 그 성(姓)의 계통을 보여준다. 예컨대 춘추전국시대 노(魯)의 군주는 주(周) 왕실과 같은 희성(姬姓)을 지녔는데, 당시 군국의 실권을 쥐었던 삼환씨(三桓氏)는 노 환공(桓公)의 자손들로서 성은 공실(公室)과 같으나 분봉된 지역에 따라 각기 다른 씨를 칭하게 되었다. 즉 종족(宗族)의 인구가 늘고 거주 지역이 확산되자, 하나의 성에서 갈라진 지파(支派)가 새운 거주지나 조상의 이름 등을 따서 갈라진 계통을 나타낸 칭호가 씨이다. 다만 중국에서도 시일이 지남에 따라 성과 씨의 구분은 모호해졌고, 진한시대 이후에는 점차 하나의 의미로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한국의 경우도 성과 씨를 구분해서 사용하지 않았는데, 아마도 진한시대 이후의 성씨 관념을 수용한 결과일 것이다. 그러므로 번역문에서도 통상적인 예에 따라 위와 같이 해 둔다.
참고로 『삼국유사』 권1 기이 제1 고구려조에서는 분주(分註)를 통하여 주몽이 천제의 아들로 햇빛에 감응되어 태어났던 것에 기인하여 고씨 성을 칭하게 되었다고 전한다[“本姓解也, 今自言是天帝子, 承日光而生, 故自以高爲氏”].
참고로 『삼국유사』 권1 기이 제1 고구려조에서는 분주(分註)를 통하여 주몽이 천제의 아들로 햇빛에 감응되어 태어났던 것에 기인하여 고씨 성을 칭하게 되었다고 전한다[“本姓解也, 今自言是天帝子, 承日光而生, 故自以高爲氏”].
졸본부여(卒本扶餘) : 분주를 통하여 본문의 고구려 건국신화와 색채를 달리하는 전승을 소개하는 가운데 나오는 지명이다. 그런데 졸본부여는 본서 고구려본기 분주에서만 언급될 뿐 본문에 등장한 적은 없다. 따라서 그 실체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먼저 『삼국유사』 권1 기이 제1 고구려조에서 찬자는 고구려를 졸본부여로 이해함과 아울러, 부여 동명신화를 고구려 건국신화로 간주하며 분주를 통하여 졸본부여가 북부여의 별도였기에 주몽을 부여왕이라 하였다는 견해를 밝혔다. 이는 졸본부여를 고구려로 본 것이다. 그런데 본문 분주의 내용은 주몽이 도착하기 전에 그 지역에는 졸본부여라는 나라가 있었다는 것이므로, 따르기 주저된다. 이밖에 졸본부여가 실재하였다고 보는 견해(金映遂, 17쪽; 박노석, 13쪽; 김미경, 222~223쪽; 조법종, 135쪽)도 있다.
그런데 졸본부여가 분주가 아니라 본문에 언급된 것은 오히려 본서의 백제본기다. 이로 보아 고구려본기 분주에서 다룬 내용은 백제본기의 내용을 간략히 언급한 것으로 여겨진다. 주목되는 점은 백제본기에 의거할 경우 주몽은 사위로 졸본부여의 왕위를 이었을 따름이고, 온조와 비류의 남하 당시 오간·마려 등 졸본부여의 신하들이 동행하는 것에서 볼 때, 주몽의 역할은 제한적이고 백제는 졸본부여의 후계 국가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따라서 졸본부여라는 개념은 백제 관련 전승의 범주에서 이해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한다. 이에 졸본부여는 백제인들이 북부여·남부여(백제)와 구분되는 또 다른 부여로서 고구려를 개념화한 것이거나(임기환, 11쪽), 백제와 부여의 계통을 직접 연결짓고자 하는 목적에서 설정된 가상의 존재로 보는 설(奇庚良, 133~134쪽)이 제기되었다.
〈참고문헌〉
金映遂, 1958, 「高句麗 國都考」, 『全南大學校論文集』 2
박노석, 2003, 「졸본부여와 고구려의 관계에 대한 고찰」, 『全北史學』 26
김미경, 2005, 「高句麗 琉璃王代 政治勢力의 再編과 對外政策」, 『北方史論叢』 4
조법종, 2007, 「고구려 초기도읍과 비류국성 연구」, 『白山學報』 77
임기환, 2008,「高句麗 初期 建國說話 관련 자료의 계통과 성격-卒本扶餘를 중심으로-」, 『(2008년 한중 고구려역사 연구 학술회의)졸본 시기의 고구려 역사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奇庚良, 2017, 「高句麗 王都 硏究」,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그런데 졸본부여가 분주가 아니라 본문에 언급된 것은 오히려 본서의 백제본기다. 이로 보아 고구려본기 분주에서 다룬 내용은 백제본기의 내용을 간략히 언급한 것으로 여겨진다. 주목되는 점은 백제본기에 의거할 경우 주몽은 사위로 졸본부여의 왕위를 이었을 따름이고, 온조와 비류의 남하 당시 오간·마려 등 졸본부여의 신하들이 동행하는 것에서 볼 때, 주몽의 역할은 제한적이고 백제는 졸본부여의 후계 국가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따라서 졸본부여라는 개념은 백제 관련 전승의 범주에서 이해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한다. 이에 졸본부여는 백제인들이 북부여·남부여(백제)와 구분되는 또 다른 부여로서 고구려를 개념화한 것이거나(임기환, 11쪽), 백제와 부여의 계통을 직접 연결짓고자 하는 목적에서 설정된 가상의 존재로 보는 설(奇庚良, 133~134쪽)이 제기되었다.
〈참고문헌〉
金映遂, 1958, 「高句麗 國都考」, 『全南大學校論文集』 2
박노석, 2003, 「졸본부여와 고구려의 관계에 대한 고찰」, 『全北史學』 26
김미경, 2005, 「高句麗 琉璃王代 政治勢力의 再編과 對外政策」, 『北方史論叢』 4
조법종, 2007, 「고구려 초기도읍과 비류국성 연구」, 『白山學報』 77
임기환, 2008,「高句麗 初期 建國說話 관련 자료의 계통과 성격-卒本扶餘를 중심으로-」, 『(2008년 한중 고구려역사 연구 학술회의)졸본 시기의 고구려 역사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奇庚良, 2017, 「高句麗 王都 硏究」,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말갈(靺鞨) ; 한반도 동북부 및 만주 동부 지역, 즉 오늘날의 쑹화강[松花江]·무단강[牡丹江]·헤이룽강[黑龍江] 강 및 두만강 유역에 거주하였던 종족이다. 그런데 말갈이라는 이름은 『북제서』 권7 본기7 무성제(武成帝) 하청(河淸) 2년(563) 시세조(是歲條)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 다시 말해 본문이 대상으로 한 시기에 말갈이라는 집단의 존재를 상정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당시 만주 동부 및 한반도 동북부에 거주하였던 집단으로 나타나는 것은 숙신(肅愼) 내지 읍루(挹婁)이다. 따라서 이는 본디 숙신이나 읍루를 말한 것이며, 후대에 사료를 정리·보완하는 과정에서 말갈로 개칭된 것 같다. 여러 상황을 고려할 때 국초 고구려의 말갈 복속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보기는 어렵다.
『구당서』 권199하 열전149하 북적 말갈전에 따르면 말갈 일부 세력은 고구려에 복속되어 있었고, 실제 수·당과의 전쟁 과정에서 말갈인들이 동원되기도 하였다. 또 「광개토왕릉비」에서 광개토왕 영락 8년(398) 굴복시킨 백신(帛愼)이 숙신이라면, 영향력을 행사한 시기적 상한은 더욱 올려볼 수 있다. 이 기사에 일정한 역사적 사실이 자리하고 있다고 볼 경우, 국가 성립기에 숙신이나 읍루의 침공을 받았던 경험이 말갈이라는 용어가 등장한 6세기 후반 이후 윤색·정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통설에 따르자면 말갈은 진한시대에 숙신(肅愼), 위진시대에 읍루(挹婁), 북위시기에 물길(勿吉)이라 불리었던 집단이 그 전신이며, 송대 이후의 여진(女眞)이 그 후신이다. 즉 「숙신-읍루-물길-말갈-여진」의 선후 관계가 이루어진다. 다만 그와는 달리 이들 사이의 연관성에 대해 부정하는 견해도 제기되었으며(韓圭哲, 41~44쪽),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 살던 반농반렵(半農半獵) 종족들 가운데 각 시기에 두드러진 활동을 한 집단이 기록에 남겨진 결과로 파악하기도 하였다(김현숙, 444~445쪽). 『수서』 권81 열전46 동이 말갈전에 따르면 당시 말갈에는 백산부(白山部)·속말부(粟末部)·백돌부(伯咄部)·안거골부(安車骨部)·불녈부(拂涅部)·호실부(號室部)·흑수부(黑水部)의 7개 집단이 존재하였으며, 단일한 국가 공동체를 성립하지 못한 채 부락 내지 집단별로 중국 왕조와 고구려에 복속되어 지냈다.
〈참고문헌〉
池內宏, 1951, 『滿鮮史硏究-上世篇-』, 吉川弘文館
韓圭哲, 1994, 『渤海의 對外關係史』, 新書院
김현숙, 2005, 『고구려의 영역지배방식 연구』, 모시는사람들
『구당서』 권199하 열전149하 북적 말갈전에 따르면 말갈 일부 세력은 고구려에 복속되어 있었고, 실제 수·당과의 전쟁 과정에서 말갈인들이 동원되기도 하였다. 또 「광개토왕릉비」에서 광개토왕 영락 8년(398) 굴복시킨 백신(帛愼)이 숙신이라면, 영향력을 행사한 시기적 상한은 더욱 올려볼 수 있다. 이 기사에 일정한 역사적 사실이 자리하고 있다고 볼 경우, 국가 성립기에 숙신이나 읍루의 침공을 받았던 경험이 말갈이라는 용어가 등장한 6세기 후반 이후 윤색·정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통설에 따르자면 말갈은 진한시대에 숙신(肅愼), 위진시대에 읍루(挹婁), 북위시기에 물길(勿吉)이라 불리었던 집단이 그 전신이며, 송대 이후의 여진(女眞)이 그 후신이다. 즉 「숙신-읍루-물길-말갈-여진」의 선후 관계가 이루어진다. 다만 그와는 달리 이들 사이의 연관성에 대해 부정하는 견해도 제기되었으며(韓圭哲, 41~44쪽),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 살던 반농반렵(半農半獵) 종족들 가운데 각 시기에 두드러진 활동을 한 집단이 기록에 남겨진 결과로 파악하기도 하였다(김현숙, 444~445쪽). 『수서』 권81 열전46 동이 말갈전에 따르면 당시 말갈에는 백산부(白山部)·속말부(粟末部)·백돌부(伯咄部)·안거골부(安車骨部)·불녈부(拂涅部)·호실부(號室部)·흑수부(黑水部)의 7개 집단이 존재하였으며, 단일한 국가 공동체를 성립하지 못한 채 부락 내지 집단별로 중국 왕조와 고구려에 복속되어 지냈다.
〈참고문헌〉
池內宏, 1951, 『滿鮮史硏究-上世篇-』, 吉川弘文館
韓圭哲, 1994, 『渤海의 對外關係史』, 新書院
김현숙, 2005, 『고구려의 영역지배방식 연구』, 모시는사람들
왕이 비류수 가운데로 채소잎이 떠내려오는 것을 보고 상류에 사람이 있는 것을 알았기에, 사냥을 하며 찾아서 비류국(沸流國)註 053에 도착하였다. 그 나라의 왕 송양(松讓)
註 054이 나와서 보고 말하기를, “과인(寡人)이 바다 깊숙한 곳에 치우쳐 있어서 일찍이 군자를 보지 못하였는데, 오늘 서로 만나니 또한 다행이 아닌가? 그러나 나는 그대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겠다.”라고 하였다. 〔왕이〕 답하여 말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로서 모처에 와서 도읍하였다”라고 하였다. 송양이 말하기를, “우리는 여러 대에 걸쳐 왕 노릇을 하였다. 땅이 작아 두 주인을 받아들이기에는 부족하다. 그대는 도읍을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나에게 빌붙는 것[附庸]이 어떠한가?”라고 하였다. 왕이 그 말을 분하게 여겨 그와 더불어 말다툼을 하고, 또 서로 활을 쏘아 기예를 겨루었는데[校藝], 송양이 당해낼 수 없었다.註 055
비류국(沸流國) : 주몽 집단에 앞서 졸본 일대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공동체. 이 기사에 따르면 비류국은 주몽이 졸본에 오기 전에 누대에 걸쳐 이 일대에 지배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그 왕 송양은 주몽과의 대결에서 패배한 끝에 결국 투항하였고, 주몽은 그를 다물도(多勿都)의 우두머리[國主]로 삼았다. 이는 선주(先住) 세력이 계루부가 주도하는 고구려의 일원으로 편제되었음을 반영한다. 본서 고구려본기에서는 이후 비류부(沸流部) 혹은 비류나부(沸流那部)라 일컫는 부(部) 집단이 나오는데, 이들이 바로 비류국의 후신이다. 즉 훈 강[渾江] 유역의 소국[那國]들이 계루부 중심의 정치 공동체에 편입되어 나부(那部)가 된 구체적인 사례로(임기환, 67~76쪽; 여호규, 174~188쪽), 이후 중국 측 사료에 보이는 소노부(消奴部) 내지 연노부(涓奴部)가 바로 비류나부이다(李丙燾, 359~360쪽).
〈참고문헌〉
李丙燾, 1976,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임기환, 2004, 『고구려 정치사 연구』, 한나래
여호규, 2014, 『고구려 초기 정치사 연구』, 신서원
〈참고문헌〉
李丙燾, 1976,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임기환, 2004, 『고구려 정치사 연구』, 한나래
여호규, 2014, 『고구려 초기 정치사 연구』, 신서원
왕이 그 말을 분하게 여겨 … 송양이 당해낼 수 없었다 : 주몽과 송양의 대결에 대해서는 「동명왕편」에 인용된 『구삼국사』에서 보다 상세히 전하는데, 처음 송양은 사슴을 100보(步) 안에 놓고 쏘았는데 애를 먹었음에 비해, 주몽은 옥가락지를 100보 바깥에 달아매고 쏘았으나 명중하였다. 이 기록에는 그 뒤에도 주몽과 송양이 신경전을 벌였음을 전하니, 부분노 등이 비류국의 북을 훔쳐오는 데 성공하고, 썩은 나무로 궁실을 지어 고구려가 유구한 내력을 가진 나라처럼 보이게 하였다. 또한 사슴을 통하여 하늘에 요청하여 비류국을 장마로 잠기게 하여 결국 송양의 항복을 받아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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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01
동명성왕(東明聖王) : 고구려 시조 주몽(朱蒙)의 왕호(王號)이다. 본문에 따르면 동명성왕의 재위 기간은 B.C. 37~19년에 이른다. 고구려를 건국하였으며 비류국(沸流國)을 병합하고, 행인국(荇人國)과 북옥저(北沃沮)를 정복하는 등 국가의 기틀을 다지는 데 주력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고구려의 시조에 관한 사료는 크게 세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①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碑)」(414년 건립), 「모두루묘지(牟頭婁墓誌)」(5세기 무렵 작성) 및 「집안고구려비(集安高句麗碑)」(4세기 말 이후 건립) 등 당대의 금석문, ② 『위서(魏書)』(554년 편찬), 『양서(梁書)』(629년 편찬), 『주서(周書)』(636년 편찬), 『수서(隋書)』(636년 편찬), 『북사(北史)』(659년 편찬), 『통전(通典)』(801년 편찬) 등 중국 측 문헌, ③ 『삼국사기(三國史記)』(1145년 편찬), 『삼국유사(三國遺事)』(1281년 편찬) 및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실린 「동명왕편(東明王篇)」(1193년 무렵 작성) 등 국내 문헌이 바로 그것이다. 이 가운데 고구려 시조의 왕호를 동명이라 한 것은 ③으로, ①과 ②에서는 시조의 이름을 각기 추모(鄒牟)와 주몽이라 하였을 뿐 별도의 왕호를 내세우고 있지 않다. 특히 고구려가 존재하였던 4~5세기 전후한 시기의 금석문(①)에서는 ‘추모왕(鄒牟王)’ 내지 ‘추모성왕(鄒牟聖王)’이라 하는 등 시조의 이름에 왕호를 덧붙이는 방식을 취하였고, 동명왕(東明王) 내지 동명성왕이라 언급한 국내 문헌(③)이 고려시대에 편찬되었다는 점은 해당 왕호가 고구려 당대에 존재하였는지에 대해 의문을 자아낸다.
주목되는 사실은 중국 측 문헌에서 주몽은 고구려의 시조로 나오고 있음에 비해, 동명(東明)은 부여 시조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찬자들이 고구려와 부여의 시조를 각기 주몽과 동명으로 구분하여 인식하였음을 보여준다. 후한 시기 왕충(王充)(27~?)이 쓴 『논형(論衡)』 권2 길험편(吉驗篇)과 서진(西晉) 시기 진수(陳壽)(233~297)가 편찬한 『삼국지(三國志)』 권30 위서30 동이 부여전(夫餘傳)에 인용된 『위략(魏略)』(3세기 중엽 편찬)에 이미 부여 시조로 동명이 언급되고 있으므로, 관련 전승이 이른 시기부터 중국에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종래 몇 가지 설이 제기되었다. (1) 동명은 본디 고구려 시조로 그를 부여 시조로 본 것은 문헌의 오류라는 견해(金庠基, 1974; 李丙燾, 1976)가 있으나, 중국 측에서 부여 시조를 동명이라 기록한 시점이 고구려 건국 전승을 인지하기 전이기에 따르기 주저된다. (2) 동명왕 전승은 원래 부여에서 전해져 오던 것이었으나 훗날 고구려가 이를 차용하여 자신들의 건국 신화로 삼았다는 견해(池內宏, 1951; 노태돈, 48쪽; 金基興, 15~16쪽)가 있는데, 그렇다면 고구려는 성립 이후 상당 기간 자신들의 시조 전승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되어 재고의 여지가 있다. (3) 부여·고구려·백제는 모두 부여계 종족을 중심으로 한 국가로서 동명형(東明型) 신화를 공유하였으며, 이들이 각기 분열·이동하면서 본래의 신화를 변형·재생성하여 갔다고 본 견해(金哲埈, 1975; 盧明鎬, 84~85쪽; 朱承澤, 198~199쪽; 神崎勝, 268~274쪽; 김선민, 6쪽)이다. 부계(父系)를 하늘로 한 특이한 성혼(聖婚)과 탄생과 시련으로 인한 남천(南遷), 그리고 주력(呪力)에 의한 가교의 성립과 도하(渡河) 및 건국 등에서 보이듯. 부여 동명 전승과 고구려 주몽 신화의 전개 양상은 기본적으로 일치한다. 동일한 서사 구조를 지닌 신화는 동일한 유형의 신화로 간주할 수 있고, 주몽과 동명이 발음상 큰 차이가 없으므로(장재웅, 2006), 양자는 부여계 사회의 전설적 시조를 가리키는 칭호의 발음이나 표기가 지역에 따라 달라진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姜辰垣, 80쪽).
이상을 보건대 고구려에서 시조는 주몽으로 불리었고, 부여 시조 동명과는 구별되었다. 그런데 후대의 국내 문헌(③)에서 주몽은 동명성왕으로 전한다. 그러므로 어느 시기에 주몽에게 그러한 왕호가 부여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구체적인 시점에 관해서는 5세기 이후(노태돈, 65쪽), 장수왕 시기(조경철, 8~9쪽), 5~6세기(강경구, 334~336쪽), 문자명왕 시기(이원배, 22쪽), 7세기 초(600) 『신집(新集)』 편찬 시(임기환, 28쪽)로 설이 엇갈린다.
〈참고문헌〉
池內宏, 1951, 『滿鮮史硏究-上世篇-』, 吉川弘文館
金庠基, 1974, 「國史上에 나타난 建國說話의 檢討」, 『東方史論叢』, 서울大學校出版部
金哲埈, 1975, 『韓國古代社會硏究』, 知識産業社
李丙燾, 1976,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盧明鎬, 1981, 「百濟의 東明神話와 東明廟-東明神話의 再生成 現象과 관련하여」, 『歷史學硏究』 10
朱承澤, 1993, 「北方系 建國神話의 文獻的 再考察-解夫婁神話의 구조를 중심으로-」, 『韓國學報』 7
神崎勝, 1995, 「夫餘・高句麗の建國傳承と百濟王家の始祖傳承」, 『日本古代の傳承と東アジア』, 吉川弘文館
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강경구, 2001, 『고구려의 건국과 시조숭배』, 학연문화사
金基興, 2001, 「高句麗 建國神話의 검토」, 『韓國史硏究』 113
임기환, 2002, 「고구려 王號의 변천과 성격」 『韓國古代史硏究』 28
장재웅, 2006, 「중국어 역사음운론을 통한 고구려신화에 반영된 언어자료 분석-東明·朱蒙 동음설 및 東盟·東明 동음설을 중심으로-」, 『中國言語硏究』 23
김선민, 2006, 「高句麗建國神話에 대한 廣開土王陵碑와 中國正史의 비교 연구」, 『東方學志』 134
조경철, 2006, 「동아시아 불교식 왕호 비교-4~8세기를 중심으로-」, 『韓國古代史硏究』 43
이원배, 2009, 「고구려 시조명 ‘東明’의 성립과정」, 『韓國史硏究』 146
姜辰垣, 2015, 「高句麗 國家祭祀 硏究」,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고구려의 시조에 관한 사료는 크게 세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①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碑)」(414년 건립), 「모두루묘지(牟頭婁墓誌)」(5세기 무렵 작성) 및 「집안고구려비(集安高句麗碑)」(4세기 말 이후 건립) 등 당대의 금석문, ② 『위서(魏書)』(554년 편찬), 『양서(梁書)』(629년 편찬), 『주서(周書)』(636년 편찬), 『수서(隋書)』(636년 편찬), 『북사(北史)』(659년 편찬), 『통전(通典)』(801년 편찬) 등 중국 측 문헌, ③ 『삼국사기(三國史記)』(1145년 편찬), 『삼국유사(三國遺事)』(1281년 편찬) 및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실린 「동명왕편(東明王篇)」(1193년 무렵 작성) 등 국내 문헌이 바로 그것이다. 이 가운데 고구려 시조의 왕호를 동명이라 한 것은 ③으로, ①과 ②에서는 시조의 이름을 각기 추모(鄒牟)와 주몽이라 하였을 뿐 별도의 왕호를 내세우고 있지 않다. 특히 고구려가 존재하였던 4~5세기 전후한 시기의 금석문(①)에서는 ‘추모왕(鄒牟王)’ 내지 ‘추모성왕(鄒牟聖王)’이라 하는 등 시조의 이름에 왕호를 덧붙이는 방식을 취하였고, 동명왕(東明王) 내지 동명성왕이라 언급한 국내 문헌(③)이 고려시대에 편찬되었다는 점은 해당 왕호가 고구려 당대에 존재하였는지에 대해 의문을 자아낸다.
주목되는 사실은 중국 측 문헌에서 주몽은 고구려의 시조로 나오고 있음에 비해, 동명(東明)은 부여 시조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찬자들이 고구려와 부여의 시조를 각기 주몽과 동명으로 구분하여 인식하였음을 보여준다. 후한 시기 왕충(王充)(27~?)이 쓴 『논형(論衡)』 권2 길험편(吉驗篇)과 서진(西晉) 시기 진수(陳壽)(233~297)가 편찬한 『삼국지(三國志)』 권30 위서30 동이 부여전(夫餘傳)에 인용된 『위략(魏略)』(3세기 중엽 편찬)에 이미 부여 시조로 동명이 언급되고 있으므로, 관련 전승이 이른 시기부터 중국에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종래 몇 가지 설이 제기되었다. (1) 동명은 본디 고구려 시조로 그를 부여 시조로 본 것은 문헌의 오류라는 견해(金庠基, 1974; 李丙燾, 1976)가 있으나, 중국 측에서 부여 시조를 동명이라 기록한 시점이 고구려 건국 전승을 인지하기 전이기에 따르기 주저된다. (2) 동명왕 전승은 원래 부여에서 전해져 오던 것이었으나 훗날 고구려가 이를 차용하여 자신들의 건국 신화로 삼았다는 견해(池內宏, 1951; 노태돈, 48쪽; 金基興, 15~16쪽)가 있는데, 그렇다면 고구려는 성립 이후 상당 기간 자신들의 시조 전승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되어 재고의 여지가 있다. (3) 부여·고구려·백제는 모두 부여계 종족을 중심으로 한 국가로서 동명형(東明型) 신화를 공유하였으며, 이들이 각기 분열·이동하면서 본래의 신화를 변형·재생성하여 갔다고 본 견해(金哲埈, 1975; 盧明鎬, 84~85쪽; 朱承澤, 198~199쪽; 神崎勝, 268~274쪽; 김선민, 6쪽)이다. 부계(父系)를 하늘로 한 특이한 성혼(聖婚)과 탄생과 시련으로 인한 남천(南遷), 그리고 주력(呪力)에 의한 가교의 성립과 도하(渡河) 및 건국 등에서 보이듯. 부여 동명 전승과 고구려 주몽 신화의 전개 양상은 기본적으로 일치한다. 동일한 서사 구조를 지닌 신화는 동일한 유형의 신화로 간주할 수 있고, 주몽과 동명이 발음상 큰 차이가 없으므로(장재웅, 2006), 양자는 부여계 사회의 전설적 시조를 가리키는 칭호의 발음이나 표기가 지역에 따라 달라진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姜辰垣, 80쪽).
이상을 보건대 고구려에서 시조는 주몽으로 불리었고, 부여 시조 동명과는 구별되었다. 그런데 후대의 국내 문헌(③)에서 주몽은 동명성왕으로 전한다. 그러므로 어느 시기에 주몽에게 그러한 왕호가 부여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구체적인 시점에 관해서는 5세기 이후(노태돈, 65쪽), 장수왕 시기(조경철, 8~9쪽), 5~6세기(강경구, 334~336쪽), 문자명왕 시기(이원배, 22쪽), 7세기 초(600) 『신집(新集)』 편찬 시(임기환, 28쪽)로 설이 엇갈린다.
〈참고문헌〉
池內宏, 1951, 『滿鮮史硏究-上世篇-』, 吉川弘文館
金庠基, 1974, 「國史上에 나타난 建國說話의 檢討」, 『東方史論叢』, 서울大學校出版部
金哲埈, 1975, 『韓國古代社會硏究』, 知識産業社
李丙燾, 1976,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盧明鎬, 1981, 「百濟의 東明神話와 東明廟-東明神話의 再生成 現象과 관련하여」, 『歷史學硏究』 10
朱承澤, 1993, 「北方系 建國神話의 文獻的 再考察-解夫婁神話의 구조를 중심으로-」, 『韓國學報』 7
神崎勝, 1995, 「夫餘・高句麗の建國傳承と百濟王家の始祖傳承」, 『日本古代の傳承と東アジア』, 吉川弘文館
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강경구, 2001, 『고구려의 건국과 시조숭배』, 학연문화사
金基興, 2001, 「高句麗 建國神話의 검토」, 『韓國史硏究』 113
임기환, 2002, 「고구려 王號의 변천과 성격」 『韓國古代史硏究』 28
장재웅, 2006, 「중국어 역사음운론을 통한 고구려신화에 반영된 언어자료 분석-東明·朱蒙 동음설 및 東盟·東明 동음설을 중심으로-」, 『中國言語硏究』 23
김선민, 2006, 「高句麗建國神話에 대한 廣開土王陵碑와 中國正史의 비교 연구」, 『東方學志』 134
조경철, 2006, 「동아시아 불교식 왕호 비교-4~8세기를 중심으로-」, 『韓國古代史硏究』 43
이원배, 2009, 「고구려 시조명 ‘東明’의 성립과정」, 『韓國史硏究』 146
姜辰垣, 2015, 「高句麗 國家祭祀 硏究」,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註) 002
고씨(高氏) : 고구려 왕실의 성씨. 본서에서는 국호를 고구려라 한 것에서 주몽이 고씨를 칭하였다고 한다. 이후 고구려의 역대 왕들은 모두 고씨였던 것처럼 나온다. 하지만 그와 다른 기록도 존재한다. 『삼국유사』 권1 왕력편(王歷篇)에 의하면 제1대 동명왕은 고씨였으나, 제2대 유리왕·제3대 대무신왕·제4대 민중왕을 해씨라 명기하고 있으며, 제5대 모본왕도 민중왕과 형제 사이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 권1 기이 제1 고구려조에서도 찬자는 주몽을 본디 해씨로 보았다[“本姓解也, 今自言是天帝子, 承日光而生, 故自以高爲氏”]. 본서의 경우 성씨를 달리 보지는 않았으나, 대무신왕의 별칭을 ‘대해주류왕(大解朱留王)’으로, 민중왕의 휘를 ‘해색주(解色朱)’, 모본왕의 휘를 ‘해우(解憂)’ 혹은 ‘해애루(解愛婁)’라 칭하는 등 왕호나 왕명(王名)에서 ‘해(解)’자가 나타난다. 이는 해당 군주들이 본디 해씨였던 흔적이라는 추정을 가능케 한다. 이처럼 고구려 왕실의 성씨를 두 가지, 즉 고씨와 해씨로 볼 수 있는 여지가 있으므로, 그 이해를 두고 일정한 성과가 축적되었다.
먼저 애초 고구려는 소노부(消奴部) 해씨 왕실이 집권하는 ‘해씨왕(解氏王) 시대’였으나, 태조왕 즉위 이후 계루부(桂婁部)가 왕권을 차지하였다고 보는 견해(金龍善, 54~55쪽, 61~62쪽)가 제기되었다. 다음으로 주몽은 실제로 해씨였고 고주몽의 ‘고(高)’는 형용사의 의미로 모본왕 시기까지는 계루부(桂婁部) 해씨 왕실이 집권하였으며, 태조왕 즉위를 계기로 계루부 내 방계 세력인 고씨가 왕위를 이어가게 되었다고 보기도 하였다(金賢淑, 14~16쪽, 48~49쪽).
그런데 해부루(解夫婁)나 해모수(解慕漱) 등 고구려 건국신화의 부여계 인물들 가운데 ‘해’자를 쓰는 사례가 있고, 『삼국유사』 권2 기이 제2 남부여(南扶餘) 전백제(前百濟) 북부여(北扶餘)조에서는 백제 왕실의 성씨를 해씨라 칭하기도 했거니와[“其世系與高句麗同出扶餘, 故以解爲氏”], 본서 백제본기에 따르면 해씨는 초기부터 유력 성씨 집단으로 나타나고 있다. 백제 왕실이 부여를 자신들의 뿌리로 여기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부여계 사회에서는 지배 집단이 이름 앞에 ‘해’자를 쓰는 경우가 존재하였음을 유추할 수 있다. 이는 일정 부분 훗날의 성씨와 같은 기능을 담당하였을 것이며, 고구려도 다르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이후 국가 체제가 정비됨에 따라 왕실은 국호에 기인하여 고씨를 칭하게 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태조왕 이후 ‘해’자의 흔적을 찾기 어려워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시기적 상한은 대략 태조왕 시기로 볼 수 있다.
金龍善, 1980, 「高句麗 琉璃明王考」, 『歷史學報』 87
金賢淑, 1994, 「高句麗의 解氏王과 高氏王」, 『大邱史學』 47
먼저 애초 고구려는 소노부(消奴部) 해씨 왕실이 집권하는 ‘해씨왕(解氏王) 시대’였으나, 태조왕 즉위 이후 계루부(桂婁部)가 왕권을 차지하였다고 보는 견해(金龍善, 54~55쪽, 61~62쪽)가 제기되었다. 다음으로 주몽은 실제로 해씨였고 고주몽의 ‘고(高)’는 형용사의 의미로 모본왕 시기까지는 계루부(桂婁部) 해씨 왕실이 집권하였으며, 태조왕 즉위를 계기로 계루부 내 방계 세력인 고씨가 왕위를 이어가게 되었다고 보기도 하였다(金賢淑, 14~16쪽, 48~49쪽).
그런데 해부루(解夫婁)나 해모수(解慕漱) 등 고구려 건국신화의 부여계 인물들 가운데 ‘해’자를 쓰는 사례가 있고, 『삼국유사』 권2 기이 제2 남부여(南扶餘) 전백제(前百濟) 북부여(北扶餘)조에서는 백제 왕실의 성씨를 해씨라 칭하기도 했거니와[“其世系與高句麗同出扶餘, 故以解爲氏”], 본서 백제본기에 따르면 해씨는 초기부터 유력 성씨 집단으로 나타나고 있다. 백제 왕실이 부여를 자신들의 뿌리로 여기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부여계 사회에서는 지배 집단이 이름 앞에 ‘해’자를 쓰는 경우가 존재하였음을 유추할 수 있다. 이는 일정 부분 훗날의 성씨와 같은 기능을 담당하였을 것이며, 고구려도 다르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이후 국가 체제가 정비됨에 따라 왕실은 국호에 기인하여 고씨를 칭하게 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태조왕 이후 ‘해’자의 흔적을 찾기 어려워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시기적 상한은 대략 태조왕 시기로 볼 수 있다.
金龍善, 1980, 「高句麗 琉璃明王考」, 『歷史學報』 87
金賢淑, 1994, 「高句麗의 解氏王과 高氏王」, 『大邱史學』 47
註) 003
주몽(朱蒙) : 고구려의 시조이자 건국자로 전한다. 『위서』를 비롯한 중국 측 문헌에서도 고구려 시조를 주몽으로 표기하였다. 그를 가리키는 표현으로는 주몽 외에 ‘추모’(「광개토왕릉비」, 「모두루묘지」, 본서 백제본기,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 권24 우경제번하(右京諸蕃下) 고려(高麗)), ‘추몽(鄒蒙)’(『삼국유사』 권1 왕력편), ‘중모(中牟)’(본서 권6 신라본기6 문무왕 10년 7월조에 실린 책문(冊文)) 혹은 ‘중모(仲牟)’(『일본서기』 권27 천지(天智) 7년 10월조, 그리고 본문에 바로 이어서 나오는 ‘중해(衆解)’ 등이 있는데, 같은 음을 다르게 표기한[同音異表記] 결과로 여겨진다. 본문에 보이듯 주몽은 ‘활을 잘 쏘는 사람’이란 의미이다.
註) 004
부여(扶餘) : 본서 고구려본기에서 주몽이 출자한 것으로 나오는 나라. 그에 따르면 이 부여는 해부루가 왕이었을 때 중심지를 옮겨 동부여가 되었으며, 이후 금와와 대소가 왕위를 이어나갔으나, 대무신왕에 의해 큰 타격을 입고 오래지 않아 멸망한 것처럼 나온다. 다만 본문의 부여가 중국 측 문헌에 언급된, 만주 쑹화강[松花江] 유역을 중심으로 자리하였던 부여(夫餘)와 동일한 실체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기 어렵다. 중국 측에서는 이 부여의 역사에 대해 상대적으로 상세히 다루고 있음에도 국도(國都)의의 이동을 포함한 본문에서의 관련 기술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본문의 부여가 고구려 건국신화에 등장하므로, 실제 부여와 구분하여 보기도 한다. 그와 관련하여 부여 내부의 어떤 가(加) 세력(노태돈, 57쪽) 내지 사출도(四出道) 가운데 동쪽 집단을 가리킨다고 보는 설(金基興, 11쪽)이 참조된다.
참고로 중국 측 문헌에서 실체가 확인되는 부여의 경우, 1세기에 편찬된 『논형』 권2 길험편이나 『삼국지』에 인용된 『위략』에 따르면 시조 동명이 북방의 탁리국(橐離國) 내지 고리국(高離國)으로부터 남하하여 건국하였다고 한다. 부여의 원 중심지인 녹산(鹿山)은 현재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린시[吉林市] 일대로 추정된다(日野開三朗, 1946; 노태돈, 505~508쪽). 부여는 후한에 직접 조공하고 한 군현과 교류를 이어가면서 안정적인 대외관계를 유지하였고, 만주 지역에서 상당한 세력을 과시하였다. 『삼국지』 권30 위서30 동이 부여전(夫餘傳)에 따르면 부여의 영역은 사방 2,000리에 달하였고, 호(戶)는 80,000이었다. 그러나 285년 선비족(鮮卑族) 모용외(慕容廆)의 침략으로 왕 의려(依慮)가 자살하고 도읍이 무너져 1만여 명이 잡혀갔다. 그 뒤 부여는 중심지를 지린성 눙안현[農安縣] 일대로 옮겼지만, 종전의 위세를 회복할 수는 없었다. 346년에는 전연 모용황(慕容皝)이 대규모 병력으로 부여를 침공하였고, 결국 왕 현(玄)을 비롯한 5만여 명이 포로로 끌려갔다. 이로써 부여는 사실상 붕괴하였으며, 고구려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 뒤 부여는 물길(勿吉)의 공세를 버티지 못하고, 고구려 문자명왕 4년(494) 왕실이 고구려에 내부하여 완전히 멸망하였다.
〈참고문헌〉
日野開三朗, 1946, 「夫餘國考」, 『史淵』 34
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金基興, 2001, 「高句麗 建國神話의 검토」, 『韓國史硏究』 113
이승호, 2018, 『부여 정치사 연구』, 동국대 박사학위논문
참고로 중국 측 문헌에서 실체가 확인되는 부여의 경우, 1세기에 편찬된 『논형』 권2 길험편이나 『삼국지』에 인용된 『위략』에 따르면 시조 동명이 북방의 탁리국(橐離國) 내지 고리국(高離國)으로부터 남하하여 건국하였다고 한다. 부여의 원 중심지인 녹산(鹿山)은 현재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린시[吉林市] 일대로 추정된다(日野開三朗, 1946; 노태돈, 505~508쪽). 부여는 후한에 직접 조공하고 한 군현과 교류를 이어가면서 안정적인 대외관계를 유지하였고, 만주 지역에서 상당한 세력을 과시하였다. 『삼국지』 권30 위서30 동이 부여전(夫餘傳)에 따르면 부여의 영역은 사방 2,000리에 달하였고, 호(戶)는 80,000이었다. 그러나 285년 선비족(鮮卑族) 모용외(慕容廆)의 침략으로 왕 의려(依慮)가 자살하고 도읍이 무너져 1만여 명이 잡혀갔다. 그 뒤 부여는 중심지를 지린성 눙안현[農安縣] 일대로 옮겼지만, 종전의 위세를 회복할 수는 없었다. 346년에는 전연 모용황(慕容皝)이 대규모 병력으로 부여를 침공하였고, 결국 왕 현(玄)을 비롯한 5만여 명이 포로로 끌려갔다. 이로써 부여는 사실상 붕괴하였으며, 고구려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 뒤 부여는 물길(勿吉)의 공세를 버티지 못하고, 고구려 문자명왕 4년(494) 왕실이 고구려에 내부하여 완전히 멸망하였다.
〈참고문헌〉
日野開三朗, 1946, 「夫餘國考」, 『史淵』 34
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金基興, 2001, 「高句麗 建國神話의 검토」, 『韓國史硏究』 113
이승호, 2018, 『부여 정치사 연구』, 동국대 박사학위논문
註) 005
해부루(解夫婁) : 본서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본디 [북]부여의 왕이었으나 하늘의 계시로 도읍을 옮겨 동부여(東扶餘)를 세운 것으로 전한다. 『삼국유사』 권1 기이 제1 북부여조에 인용된 『고기(古記)』에서는 해부루가 해모수(解慕漱)의 아들이며 성(姓)을 해씨라 하였다고 나온다. 또 『삼국유사』 권1 기이 제1 고구려조에 인용된 『단군기(檀君記)』에는 단군이 서하 하백의 딸과 관계를 가져 해부루를 낳았다고도 한다. 그래서 『삼국유사』 찬자는 해부루와 주몽을 이복형제 사이로 여겼다. 해부루란 이름은 ‘해[日]’에 ‘부루=불[光]’이 결합한 말로써 하늘의 아들[天帝子]를 의미한다는 설(梁柱東, 1946, 『朝鮮古歌硏究』, 博文書館, 697~698쪽)도 있다.
註) 006
註) 007
곤연(鯤淵) : 동부여 금와왕의 탄생지로 전한다. 『제왕운기(帝王韻紀)』 「동명왕편(東明王篇)」과 『삼국유사(三國遺事)』 권1 기이 제1 동부여조에서도 동일한 지명이 확인되는데, 그 외에 다른 사료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구체적인 위치는 알 수 없다. 한편 『삼국유사』 권1 기이 제1 신라시조(新羅始祖) 혁거세왕(赫居世王)조에 따르면 혁거세는 나정(蘿井)에서, 그 부인은 알영정(閼英井)에서 탄생하였고, 「천남생묘지명」에서는 연개소문 일가 역시 조상이 물에서 태어났다는 전승이 있었다. 이를 보면 신이한 인물이 연못이나 우물 등에서 태어난다는 인식은 널리 퍼져 있었던 것 같다.
註) 008
금색의 개구리 : 금색(金色)은 태양신을 상징하는 성색(聖色)으로 인식되었기에(三品彰英, 520쪽), 금색 개구리는 곧 태양을 상징한다는 견해(鄭璟喜, 23~24쪽)가 제기되었다. 개구리의 상징성에 관한 다른 예로는 본서 권13 고구려본기1 유리명왕 29년 6월조에 검은 개구리와 붉은 개구리가 각각 북부여와 고구려의 운명을 예시하는 상징물로서 나타나고 있음을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고구려에서는 개구리를 일종의 영매로 인식하였을 가능성이 있다(鄭求福·盧重國·申東河·金泰植·權悳永, 402쪽).
〈참고문헌〉
三品彰英, 1971, 『神話と文化史』, 平凡社
鄭璟喜, 1990, 「東明型說話와 古代社會」, 『韓國古代社會文化硏究』, 一志社
鄭求福·盧重國·申東河·金泰植·權悳永, 1997, 『譯註 三國史記 3-주석편(상)-』, 韓國精神文化硏究院
〈참고문헌〉
三品彰英, 1971, 『神話と文化史』, 平凡社
鄭璟喜, 1990, 「東明型說話와 古代社會」, 『韓國古代社會文化硏究』, 一志社
鄭求福·盧重國·申東河·金泰植·權悳永, 1997, 『譯註 三國史記 3-주석편(상)-』, 韓國精神文化硏究院
註) 009
註) 010
註) 011
註) 012
오곡(五穀) : 다섯 가지 곡식을 말한다. 지역과 시대에 따라 그 내용에 약간의 차이가 있으니 다음과 같다. ① 삼[麻]·차기장[黍]·메기장[稷]·보리[麥]·콩[豆](『주례(周禮)』 천관(天官) 질의(疾醫)), ② 차기장·메기장·삼·보리·대두[菽](『대대례(大戴禮)』 증자천원(曾子天圓)), ③ 벼(稻)·메기장·보리·콩·삼(『초사(楚辭)』 권10 대초(大招) 제10), ④ 차기장·메기장·대두·보리·벼(『주례』 하관(夏官) 직방씨(職方氏)), ⑤ 멥쌀[粳米]·팥[小豆]·보리·대두·누런 기장[黃黍](『소문(素問)』 장기법시론(藏氣法時論)), ⑥ 벼[稻穀]·보리[大麥]·밀[小麥]·녹두(菉豆)·백개자(白芥子)(『성취묘법연화경주유가관지의궤(成就妙法蓮華經主瑜伽觀智儀軌)』), ⑦ 보리[大麥]·밀·벼[稻穀]·팥·깨[胡麻](『건립만다라호마의궤(建立曼茶羅護摩儀軌)』).
『삼국지』 권30 위서30 동이 부여전 및 『후한서』 권85 열전75 동이 부여전에 따르면 부여는 땅이 비옥하여 오곡이 잘 되었다고 한다. 그밖에 읍루(邑婁), 동옥저(東沃沮), 한(韓)과 관련된 기록에서도 오곡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변진(弁辰)의 경우 『삼국지』권30 위서30 동이 변진전(弁辰傳)에서 “토지가 비옥하여 오곡과 벼를 심기에 적합하다[土地肥美, 宜種五穀及稻]”고 하였으므로, 한반도 남부 지방에서는 오곡에 쌀을 포함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부여는 상대적으로 한랭한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오곡에 쌀이 들어가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삼국지』 권30 위서30 동이 부여전 및 『후한서』 권85 열전75 동이 부여전에 따르면 부여는 땅이 비옥하여 오곡이 잘 되었다고 한다. 그밖에 읍루(邑婁), 동옥저(東沃沮), 한(韓)과 관련된 기록에서도 오곡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변진(弁辰)의 경우 『삼국지』권30 위서30 동이 변진전(弁辰傳)에서 “토지가 비옥하여 오곡과 벼를 심기에 적합하다[土地肥美, 宜種五穀及稻]”고 하였으므로, 한반도 남부 지방에서는 오곡에 쌀을 포함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부여는 상대적으로 한랭한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오곡에 쌀이 들어가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註) 013
동부여(東扶餘) : 해부루가 가섭원으로 천도함에 따라 성립된 부여를 말한다. 동부여에 관한 기록은 크게 두 갈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본문에 나온 동부여로 고구려본기 초기기사에서 등장하며, 대무신왕 시기 멸망하였다고 나온다. 다른 하나는 「광개토왕릉비」(414년)에 나타나는 동부여(東扶餘)로 비문에 따르면 본래 추모왕(鄒牟王) 즉 주몽의 속민(屬民)이었으며, 광개토왕 20년(410)에 이르러 재차 복속되었다고 한다. 양자는 사료의 계통이나 시간적 범위를 달리하므로, 동부여의 실상 역시 그에 근거하여 다가가는 편이 좋을 것이다.
전자의 경우 먼저 주몽에 의해 복속된 북옥저를 동부여로 보거나(이도학, 41쪽, 46~47쪽), 대무신왕 시기 부여왕 대소(帶素)의 아우가 세운 갈사국(曷思國)이 곧 동부여라는 설(盧重國, 19~20쪽), 오늘날 지린성[吉林省] 둔화[敦化] 및 옌지[延吉] 일대에 위치한 부여계 세력으로 보는 견해(이승호, 75~76쪽)가 제기되었다. 동부여 관련 일화는 본서 고구려본기 초기기록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일정한 역사적 사실성을 보여주고 있으나, 그것을 전적으로 신뢰하기 어렵다. 그 결과 본문의 동부여를 국초에 존재하였던 부여의 어떤 가(加) 내지 사출도 집단의 하나로 보기도 한다(노태돈, 57쪽; 金基興, 11쪽).
후자의 경우 부여가 285년 선비족 모용외의 침공을 받고 옥저 지역으로 피난한 점에 주목하여, 왕실이 돌아간 뒤에도 그 근방에 남아 있던 잔여 세력이 세운 나라로 보는 견해(노태돈, 523~525쪽)가 대표적이다. 이는 동부여의 실제 성립 시기를 3세기 후반으로 본 것이다. 그밖에 부여가 중심지를 눙안현[農安縣] 일대로 옮긴 뒤 구도(舊都) 지린시 일대에 남아 있던 세력이 동부여로 불리게 되었다고 하거나(李健才, 2000), 북부여는 쑹넌평원[松嫩平原] 일대에 있던 부여 시조 동명의 고향은 고리국(高離國)이고, 동부여는 지린시[吉林市] 일대에 존재한 부여라고 상정한 설(송호정, 95~96쪽)도 제기되었다.
〈참고문헌〉
盧重國, 1983, 「東扶餘에 關한 몇 가지 問題에 대하여」, 『韓國學論集』 10.
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李健才, 2000, 「三论北夫余·东夫余即夫余的问题」, 『社会科学战线』 2000-6.
金基興, 2001, 「高句麗 建國神話의 검토」, 『韓國史硏究』 113
이도학, 2006, 『고구려 광개토왕릉 비문 연구-광개토왕릉 비문을 통한 고구려사-』, 서경문화사
송호정, 2015, 『처음 읽는 부여사 - 한국 고대국가의 원류 부여사 700년』, 사계절
이승호, 2018, 『부여 정치사 연구』, 동국대 박사학위논문
전자의 경우 먼저 주몽에 의해 복속된 북옥저를 동부여로 보거나(이도학, 41쪽, 46~47쪽), 대무신왕 시기 부여왕 대소(帶素)의 아우가 세운 갈사국(曷思國)이 곧 동부여라는 설(盧重國, 19~20쪽), 오늘날 지린성[吉林省] 둔화[敦化] 및 옌지[延吉] 일대에 위치한 부여계 세력으로 보는 견해(이승호, 75~76쪽)가 제기되었다. 동부여 관련 일화는 본서 고구려본기 초기기록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일정한 역사적 사실성을 보여주고 있으나, 그것을 전적으로 신뢰하기 어렵다. 그 결과 본문의 동부여를 국초에 존재하였던 부여의 어떤 가(加) 내지 사출도 집단의 하나로 보기도 한다(노태돈, 57쪽; 金基興, 11쪽).
후자의 경우 부여가 285년 선비족 모용외의 침공을 받고 옥저 지역으로 피난한 점에 주목하여, 왕실이 돌아간 뒤에도 그 근방에 남아 있던 잔여 세력이 세운 나라로 보는 견해(노태돈, 523~525쪽)가 대표적이다. 이는 동부여의 실제 성립 시기를 3세기 후반으로 본 것이다. 그밖에 부여가 중심지를 눙안현[農安縣] 일대로 옮긴 뒤 구도(舊都) 지린시 일대에 남아 있던 세력이 동부여로 불리게 되었다고 하거나(李健才, 2000), 북부여는 쑹넌평원[松嫩平原] 일대에 있던 부여 시조 동명의 고향은 고리국(高離國)이고, 동부여는 지린시[吉林市] 일대에 존재한 부여라고 상정한 설(송호정, 95~96쪽)도 제기되었다.
〈참고문헌〉
盧重國, 1983, 「東扶餘에 關한 몇 가지 問題에 대하여」, 『韓國學論集』 10.
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李健才, 2000, 「三论北夫余·东夫余即夫余的问题」, 『社会科学战线』 2000-6.
金基興, 2001, 「高句麗 建國神話의 검토」, 『韓國史硏究』 113
이도학, 2006, 『고구려 광개토왕릉 비문 연구-광개토왕릉 비문을 통한 고구려사-』, 서경문화사
송호정, 2015, 『처음 읽는 부여사 - 한국 고대국가의 원류 부여사 700년』, 사계절
이승호, 2018, 『부여 정치사 연구』, 동국대 박사학위논문
註) 014
해모수(解慕漱) : 본문에 따르면 해부루가 가섭원으로 떠난 뒤 부여의 원 근거지[舊都]에 나타난 인물이다. 스스로 천제의 아들이라 칭하였으며, 유화와 사통(私通)하였는데, 이후의 행적을 알려주는 기록은 찾기 어렵다. 해모수와 해부루의 관계에 대해 본서에서는 별다른 기술이 없는 것과 달리, 『삼국유사』 권1 기이1 제1 북부여조에 인용된 『고기』에는 해부루의 부친으로 나온다.
해모수에 대해 상세히 전하고 있는 것은 「동명왕편」에 인용된 『구삼국사(舊三國史)』이다. 여기에는 해모수가 오룡거(五龍擧)를 타고 강림하였음과 아울러 아침이면 정사를 듣고 해가 저물면 승천하여 세간에서 ‘천왕랑(天王郞)’이라 일컬었다고 기록되어 있다[“解慕漱 從天而下 乘五龍車 從者百餘人 … 朝則聽事 暮則升天 世謂之天王郞”]. 이는 해모수가 신들의 세계에서 인간사에 관여하는 인물로 여겨졌음을 보여주는데, 그러한 면은 단군신화에서의 환웅(桓雄)과 상통한다(鄭求福·盧重國·申東河·金泰植·權悳永, 404쪽). 해모수와 결합한 유화를 환웅과 결합한 웅녀에 비정하기도 하나(이병도, 327쪽), 하늘에서 내려온 남성과 지상의 여성이 맺어진다는 모티프는 상당히 보편적인 유형에 속하므로, 지나친 감이 있다.
참고로 해모수란 이름은 ‘해머슴’이란 뜻으로 ‘일월자(日月子)’, 즉 ‘해의 아들’을 의미한다는 설(金庠基, 6~7쪽)이 있다. 아울러 정약용은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에서 해모수를 부여 시조 동명과 동일 인물로 보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金庠基, 1974, 「國史上에 나타난 建國說話의 檢討」, 『東方史論叢』, 서울大學校出版部
이병도, 1996,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鄭求福·盧重國·申東河·金泰植·權悳永, 1997, 『譯註 三國史記 3-주석편(상)-』, 韓國精神文化硏究院
해모수에 대해 상세히 전하고 있는 것은 「동명왕편」에 인용된 『구삼국사(舊三國史)』이다. 여기에는 해모수가 오룡거(五龍擧)를 타고 강림하였음과 아울러 아침이면 정사를 듣고 해가 저물면 승천하여 세간에서 ‘천왕랑(天王郞)’이라 일컬었다고 기록되어 있다[“解慕漱 從天而下 乘五龍車 從者百餘人 … 朝則聽事 暮則升天 世謂之天王郞”]. 이는 해모수가 신들의 세계에서 인간사에 관여하는 인물로 여겨졌음을 보여주는데, 그러한 면은 단군신화에서의 환웅(桓雄)과 상통한다(鄭求福·盧重國·申東河·金泰植·權悳永, 404쪽). 해모수와 결합한 유화를 환웅과 결합한 웅녀에 비정하기도 하나(이병도, 327쪽), 하늘에서 내려온 남성과 지상의 여성이 맺어진다는 모티프는 상당히 보편적인 유형에 속하므로, 지나친 감이 있다.
참고로 해모수란 이름은 ‘해머슴’이란 뜻으로 ‘일월자(日月子)’, 즉 ‘해의 아들’을 의미한다는 설(金庠基, 6~7쪽)이 있다. 아울러 정약용은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에서 해모수를 부여 시조 동명과 동일 인물로 보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金庠基, 1974, 「國史上에 나타난 建國說話의 檢討」, 『東方史論叢』, 서울大學校出版部
이병도, 1996,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鄭求福·盧重國·申東河·金泰植·權悳永, 1997, 『譯註 三國史記 3-주석편(상)-』, 韓國精神文化硏究院
註) 015
스스로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解慕漱)라 칭하며 와서 도읍하였다 : 『삼국유사』 권1 기이1 제1 북부여조에 인용된 『고기』에는 전한 신작 3년(B.C. 59) 4월 8일에 천제자(天帝子) 해모수가 흘승골성(訖升骨城)에 강림하여 도읍을 정하고 북부여를 건국하였다고 전한다. 그런데 『위서』 권100 열전88 동이 고구려전에 따르면 주몽이 부여에서 남하하여 정착한 곳도 흘승골성(紇升骨城)이라 전한다[“與朱蒙至紇升骨城, 遂居焉”]. 흘승골성은 오늘날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환런현[桓仁縣] 지역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건국신화에 따르면 해모수가 자리한 곳은 천도하기 이전 부여의 중심지이며, 부여의 원 중심지는 지린성[吉林省] 지린시[吉林市] 일대로 환런현이 아니다. 해모수가 주몽의 부친 격으로 언급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고구려 왕실과 해모수로 대표되는 부여의 연계성을 강조하기 위해 나타난 부회가 아닐까 한다. 이는 해모수의 천강(天降) 시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동명왕편」에 인용된 『구삼국사』에 따르면 주몽은 신작 4년(B.C. 58) 4월에 태어났다. 그렇다면 해모수는 주몽의 탄생으로부터 정확히 1년 전에 나라를 세운 셈이다. 물론 이는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있을 것이나, 두 사건 사이의 시간적 격차가 거의 없는 것은 신화적 인물인 해모수와 주몽이 직접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적인 결과로 볼 수 있다.
註) 016
태백산(太白山) : 태백산(太伯山)이라 쓰기도 한다. 백두산, 묘향산, 또는 강원도 태백산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태백산이라는 명칭은 예부터 북방에 있는 대진산을 의미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어 여러 산에 비정되었다(金庠基, 4쪽). 고려시대에는 묘향산을 태백산으로 여겼다고 한다(『고려사』 권58 지12 지리2 북계, 안북대도호부 청새진. 이 기사의 무대는 오늘날의 훈 강[渾江], 압록강 일원으로 그 근방의 대표적인 거산(巨山)은 백두산이다. 그러므로 이때의 태백산은 백두산으로 보는 편이 좋지 않을까 한다(鄭求福·盧重國·申東河·金泰植·權悳永, 404~405쪽).
〈참고문헌〉
金庠基, 1974, 「國史上에 나타난 建國說話의 檢討」, 『東方史論叢』, 서울大學校出版部
鄭求福·盧重國·申東河·金泰植·權悳永, 1997, 『譯註 三國史記 3-주석편(상)-』, 韓國精神文化硏究院
〈참고문헌〉
金庠基, 1974, 「國史上에 나타난 建國說話의 檢討」, 『東方史論叢』, 서울大學校出版部
鄭求福·盧重國·申東河·金泰植·權悳永, 1997, 『譯註 三國史記 3-주석편(상)-』, 韓國精神文化硏究院
註) 017
註) 018
태백산(太白山) 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여자를 만났다 : 「동명왕편」에 인용된 『구삼국사』에서는 어부[漁師] 강력부추(强力扶鄒)가 “요즘 어량(魚梁) 안의 물고기를 도둑질해 가는 것이 있는데, 어떤 짐승인지 모르겠다”고 하자, 왕이 이에 어부로 하여금 그물을 끌어당기게 하니 그 망이 파열되어, 다시 쇠그물[鐵網]을 만들어 당기니 비로소 한 여인을 얻을 수 있었는데, 돌에 앉은 채로 나왔다. 그 여인의 입술이 길어 말하지 못하므로 그 입술을 세 번 잘라낸 뒤에야 말을 하였다고 전한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서도 이와 유사한 설화가 기록되어 있는데, 훗날 혁거세의 부인이 되는 알영(閼英)은 애초 입술이 닭부리 같았으니, 월성(月城) 북천(北川)에 가서 목욕시켰더니 그 부리가 떨어졌다고 한다.
註) 019
하백(河伯) : 하백은 본디 중국의 황허[黃河] 강을 관장하는 수신(水神)으로 『포박자(抱朴子)』에 따르면 빙이(冰夷) 또는 풍이(馮夷)라고도 불리었으며, 『장자(莊子)』 추수편(秋水篇)이나 『산해경(山海經)』 해내북경(海內北經)에 있는 곽박(郭璞)의 주석에 따르면 사면으로 운거(雲車)를 타며 두 마리의 용을 부린다고 한다. 다만 본문에 나오는 하백이 중국에서 말하는 그 수신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원래는 고구려인들이 따로 부르는 하신(河神)의 이름이 존재하였으나, 중국 문물 수용이 진전됨에 따라 이 하천의 신을 하백이라고 명명하게 되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註) 020
유화(柳花) : 주몽의 모친으로 전하는 인물인데, 고구려 존속 당시에 편찬된 『위서』, 『주서』, 『북사』 등 중국 측 사서나 「광개토왕릉비」에서는 각기 ‘하백녀(河伯女)’ 내지 ‘하백여랑(河伯女郞)’이라고 언급되어 있을 뿐이며, 그 이름을 유화로 전하는 것은 「동명왕편」에 인용된 『구삼국사』 및 본서와 『삼국유사』 등 고구려 멸망 이후에 만들어진 국내 문헌에 국한된다. 하백녀와 유화를 별개의 신격으로 파악하기도 하나(李志瑛, 23~25쪽), 양자 모두 시조모인 이상 그 실체를 다르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용례를 볼 때 고구려 당대에 시조모(始祖母)를 유화라 불렀는지를 확신할 수는 없다. 그 면에 주목하여 고려시대에 고구려 계승 의식 속에 서경(西京), 즉 평양이 중시된 결과, 시조모에게 유화라는 이름이 부여되었다는 추정(조영광, 273쪽)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만주족의 신화와 민속의례에서 버드나무가 지니는 의의가 크며 유화는 해당 수목이 의인화한 것이라는 견해(李鐘周, 1997)도 제기된 바가 있어 단정하기는 어렵다.
『구삼국사』에 따르면 유화는 훗날 주몽이 금와왕의 아들들에게 쫓기여 남쪽으로 피신할 때 오곡의 종자를 주었고, 다시 비둘기로 하여금 보리씨앗[麥子]을 전해주었다고 한다. 이를 보면 시조모 유화는 곡물 경작과 관련된 농경신(農耕神)으로 여겨졌음을 알 수 있다(金哲埈, 1971). 본문에 따르면 유화는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이후에도 동부여에서 지내다 동명성왕 14년(B.C. 24) 8월 사망하였고, 금와왕은 태후의 예로써 장사지냈다고 한다.
〈참고문헌〉
金哲埈, 1971, 「東明王篇에 보이는 神母의 性格에 대하여」, 『惠庵柳洪烈博士華甲紀念論叢』, 惠庵柳洪烈博士華甲紀念事業委員會
李鐘周, 1997, 「東北아시아의 聖母 柳花」, 『口碑文學硏究』 4
李志瑛, 2006, 「河伯女, 柳花를 둘러싼 고구려 건국신화의 전승 문제」, 『東아시아古代學』 13
조영광, 2006, 「河伯女신화를 통해서 본 고구려 국가형성기의 상황」, 『北方史論叢』 12
『구삼국사』에 따르면 유화는 훗날 주몽이 금와왕의 아들들에게 쫓기여 남쪽으로 피신할 때 오곡의 종자를 주었고, 다시 비둘기로 하여금 보리씨앗[麥子]을 전해주었다고 한다. 이를 보면 시조모 유화는 곡물 경작과 관련된 농경신(農耕神)으로 여겨졌음을 알 수 있다(金哲埈, 1971). 본문에 따르면 유화는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이후에도 동부여에서 지내다 동명성왕 14년(B.C. 24) 8월 사망하였고, 금와왕은 태후의 예로써 장사지냈다고 한다.
〈참고문헌〉
金哲埈, 1971, 「東明王篇에 보이는 神母의 性格에 대하여」, 『惠庵柳洪烈博士華甲紀念論叢』, 惠庵柳洪烈博士華甲紀念事業委員會
李鐘周, 1997, 「東北아시아의 聖母 柳花」, 『口碑文學硏究』 4
李志瑛, 2006, 「河伯女, 柳花를 둘러싼 고구려 건국신화의 전승 문제」, 『東아시아古代學』 13
조영광, 2006, 「河伯女신화를 통해서 본 고구려 국가형성기의 상황」, 『北方史論叢』 12
註) 021
註) 022
웅심산(熊心山) : 현재 위치를 알 수 없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제1 고구려조에서는 ‘웅신산(熊神山)’으로 나온다. 본문에서는 “웅심산 아래 압록강”이라고 하여 웅심산과 압록강이 멀지 않은 것처럼 나와 있기에 압록강 중상류 산간지대의 어느 산에 비정할 수도 있다. 다만 「동명왕편」에 인용된 『구삼국사』에서는 웅심연 가[熊心淵上]에서 놀았다고 하므로 ‘웅심’이 연못의 이름일 가능성도 있다(鄭求福·盧重國·申東河·金泰植·權悳永, 1997, 『譯註 三國史記 3-주석편(상)-』, 韓國精神文化硏究院, 406쪽). 양자를 종합하면 웅심산에 자리한 연못으로 보는 편이 어떨까 한다.
註) 023
압록강[鴨綠] : 오늘날의 압록강이다. 압록강은 ‘마자수(馬訾水)’라고도 불리었는데, 『통전(通典)』 권186 변방2 동이 하 고구려조에서는 물빛이 오리의 머리 색깔과 같아서 압록이라는 이름을 얻었다[“水色似鴨頭, 故俗名之.”]라고 전한다. 「동명왕편」에서는 각주를 통하여 압록강이 ‘청하(淸河)’로 칭해졌다고 기술하고 있으며[“淸河 今鴨綠江也”], 『고려사』 찬자도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고려사』 권58 지12 지리3 북계 의주조). 그러나 정약용은 『대동수경(大東水經)』에서 이를 부정하였다.
註) 024
저를 웅심산(熊心山) 아래 … 귀양살이[謫居]하게 되었습니다 : 「동명왕편」에서는 해모수의 강림과 금와·유화의 만남 사이에 해모수가 유화의 사통 에피소드를 상세히 다루고 있다. 해당 부분에 인용된 『구삼국사』에 따르면 해모수는 후사를 둘 목적으로 유화·훤화·위화 자매를 꾀어내어 취하게 하였는데, 훤화·위화는 달아났으나 유화는 사로잡혀 통정하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하백은 분노하며 변신술 대결을 펼쳤는데 결국 해모수가 승리하였고, 하백은 해모수를 천제의 아들로 여겨 해모수와 유화를 함께 하늘로 올려 보내려 하였으나, 해모수가 기지를 발휘하여 홀로 하늘로 떠나갔다. 이에 하백은 크게 노하여 딸의 입을 잡아당겨 입술의 길이를 3자나 되게 하여 우발수로 추방하였다고 한다. 본문에서 보이듯 본서에서는 관련 전승이 상대적으로 간략히 서술되어 있다. 그 원인으로 본서가 『구삼국사』를 약술한 결과로 볼 수도 있다. 다만 해모수와 하백의 도술 경쟁의 경우 중국 고대 동북 지역에서 유례를 찾기 어렵다는 견해(류준경, 38쪽)도 있는 만큼, 후대에 새롭게 들어간 부분도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해모수와 하백의 대결 에피소드가 『삼국유사』 권2 기이2 제2 가락국기(駕洛國記)에 나오는 가야 수로왕과 탈해의 도술 경쟁 전승과 유사한 구석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러하다.
한편 본문에 따르면 유화는 금와왕에게 거두어진 뒤 햇볕이 비추어 임신하게 된다. 따라서 북부여왕 해모수와의 사통 에피소드가 필수적으로 개입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더욱이 고구려 존속 당시의 금석문 및 『위서』 등의 중국 측 사서에 언급된 건국신화에서 해모수가 등장하지 않으며, ‘해부루-금와’로 이어지는 소위 동부여 성립 전승에서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이들과 관련한 에피소드는 『위서』나 「광개토왕릉비」 등에 보이는 고구려 건국신화가 정립한 뒤 추가로 부가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그 시기에 대해 양자 모두 5세기 이후로 보기도 하고(島田好, 91~94쪽), 문자명왕 시기 부여를 완전히 통합하면서 부여의 시조 전승인 해모수 전승이 삽입되었다고 보기도 하며(徐永大, 66~72쪽), 6세기 중엽 이후의 정치적 변동 속에 동부여계 세력이 집권함에 따라 동부여 성립 전승과 시조가 동부여에서 출자했다는 설이 첨가되었다고 여기기도 한다(노태돈, 33~44쪽). 반면 그와는 달리 출자와 관련한 부분이 개변되었을 가능성이 적기에 국초에 현재 전하는 건국신화의 기본적인 틀이 갖춰졌으리라고 보거나(金基興, 13~25쪽), 「광개토왕릉비」에서 시조가 북부여에서 출자하였다거나 동부여가 본디 추모왕(주몽)의 속민이었다는 기술이 있으므로, 5세기 무렵에는 해모수 및 동부여 천도 설화가 고구려 건국신화의 일부를 이루고 있었으리라 여기기도 한다(임기환, 171~180쪽).
〈참고문헌〉
島田好, 1934, 「東扶餘の位置と高句麗の開國傳說」, 『靑丘學叢』 16
徐永大, 1997, 「韓國古代의 宗敎職能者」, 『韓國古代史硏究』 12
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金基興, 2001, 「高句麗 建國神話의 검토」, 『韓國史硏究』 113
류준경, 2005, 「고구려 주몽신화에 관한 비교 연구」, 『漢文古典硏究』 10
임기환, 2016, 「고구려 건국전승의 始祖 出自와 北夫餘, 東夫餘-광개토왕릉비문의 北夫餘, 東夫餘를 중심으로-」, 『高句麗渤海硏究』 54
한편 본문에 따르면 유화는 금와왕에게 거두어진 뒤 햇볕이 비추어 임신하게 된다. 따라서 북부여왕 해모수와의 사통 에피소드가 필수적으로 개입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더욱이 고구려 존속 당시의 금석문 및 『위서』 등의 중국 측 사서에 언급된 건국신화에서 해모수가 등장하지 않으며, ‘해부루-금와’로 이어지는 소위 동부여 성립 전승에서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이들과 관련한 에피소드는 『위서』나 「광개토왕릉비」 등에 보이는 고구려 건국신화가 정립한 뒤 추가로 부가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그 시기에 대해 양자 모두 5세기 이후로 보기도 하고(島田好, 91~94쪽), 문자명왕 시기 부여를 완전히 통합하면서 부여의 시조 전승인 해모수 전승이 삽입되었다고 보기도 하며(徐永大, 66~72쪽), 6세기 중엽 이후의 정치적 변동 속에 동부여계 세력이 집권함에 따라 동부여 성립 전승과 시조가 동부여에서 출자했다는 설이 첨가되었다고 여기기도 한다(노태돈, 33~44쪽). 반면 그와는 달리 출자와 관련한 부분이 개변되었을 가능성이 적기에 국초에 현재 전하는 건국신화의 기본적인 틀이 갖춰졌으리라고 보거나(金基興, 13~25쪽), 「광개토왕릉비」에서 시조가 북부여에서 출자하였다거나 동부여가 본디 추모왕(주몽)의 속민이었다는 기술이 있으므로, 5세기 무렵에는 해모수 및 동부여 천도 설화가 고구려 건국신화의 일부를 이루고 있었으리라 여기기도 한다(임기환, 171~180쪽).
〈참고문헌〉
島田好, 1934, 「東扶餘の位置と高句麗の開國傳說」, 『靑丘學叢』 16
徐永大, 1997, 「韓國古代의 宗敎職能者」, 『韓國古代史硏究』 12
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金基興, 2001, 「高句麗 建國神話의 검토」, 『韓國史硏究』 113
류준경, 2005, 「고구려 주몽신화에 관한 비교 연구」, 『漢文古典硏究』 10
임기환, 2016, 「고구려 건국전승의 始祖 出自와 北夫餘, 東夫餘-광개토왕릉비문의 北夫餘, 東夫餘를 중심으로-」, 『高句麗渤海硏究』 54
註) 025
해[日]가 비추어 … 그로 인하여 임신하여 : 천체나 기타 자연물에 접촉되어 임신하게 되었다는 내용을 가진 감정전설(感精傳說)은 세계 각지에 분포하고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전승 역시 그 일례라 할 수 있다. 특히 햇빛으로 인해 임신하게 된다는 유형의 전승은 만주·몽골 및 한반도와 일본 열도 등지에 널리 분포하고 있다(三品彰英, 1971). 『논형』 권2 길험편이나 『삼국지』 권30 위서30 동이 부여전에 인용된 『위략』에 따르면 부여 시조 동명은 모친은 달걀만한 크기의 기운에 감응하여 그를 낳았다고 한다. 또 『속일본기(續日本記)』 권40 환무(桓武) 연력(延曆) 8년(789) 12월 임자에는 백제 원조(遠祖) 도모왕(都慕王)은 하백의 딸이 일정(日精)에 감응하여 태어났다고 하며, 같은 책 연력 9년(790) 7월 신사에는 백제 태조 도모대왕(都慕大王)은 일신(日神)이 강령(降靈)한 인물이라 하였는데, 이때의 ‘도모’는 동명이다(盧明鎬, 44쪽; 林起煥, 20쪽; 朴賢淑, 46쪽). 따라서 부여계 지배집단 사이에서는 시조가 기운이나 햇빛, 혹은 그 정기와 닿아 탄생하였다는 모티프가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三品彰英, 1971, 『神話と文化史』, 平凡社
盧明鎬, 1981, 「百濟의 東明神話와 東明廟-東明神話의 再生成 現象과 관련하여-」, 『歷史學硏究』 10
林起煥, 1998, 「百濟 始祖傳承의 형성과 변천에 관한 고찰」, 『百濟硏究』 28
朴賢淑, 2005, 「백제 建國神話의 형성과정과 그 의미」, 『韓國古代史硏究』 39
〈참고문헌〉
三品彰英, 1971, 『神話と文化史』, 平凡社
盧明鎬, 1981, 「百濟의 東明神話와 東明廟-東明神話의 再生成 現象과 관련하여-」, 『歷史學硏究』 10
林起煥, 1998, 「百濟 始祖傳承의 형성과 변천에 관한 고찰」, 『百濟硏究』 28
朴賢淑, 2005, 「백제 建國神話의 형성과정과 그 의미」, 『韓國古代史硏究』 39
註) 026
알 하나를 낳았는데 : 주몽이 처음에 알로 태어나 그것을 깨고 인간으로 세상에 나왔다는 것은 난생설화(卵生說話)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나는 모티프이다. 난생설화는 만주와 한반도 및 일본 열도, 타이완, 동남아시아, 남태평양 등지에 널리 분포한다(三品彰英, 1971, 『神話と文化史』, 平凡社). 한국에서는 주몽 이외에 신라 시조 혁거세와 탈해, 가야 시조 수로의 탄생담을 예로 들 수 있다. 참고로 「동명왕편」에 인용된 『구삼국사』에서는 주몽이 유화의 왼편 겨드랑이에서 알의 형태로 태어났으며, 출생 시기는 전한 선제 신작 4년(B.C. 58) 4월이라 전하고 있다.
註) 027
註) 028
부여의 속어에 활을 잘 쏘는 것[善射]을 ‘주몽(朱蒙)’이라 하는 까닭에 : 주몽의 어의에 대하여 이 기사와 같이 ‘활을 잘 쏜다’는 뜻으로 보아 후대의 만주어에도 같은 계통의 말이 남아 있다고 보기도 한다(이병도, 328쪽), ‘몽(蒙)’자 자체가 만주어로 선사(善射)를 의미하는 ‘mangga’와 유사하다는 지적(李基文, 84쪽)도 있다. 그러나 이를 동명의 다른 표기로 보아 제천이나 태양신 신앙과 연계하여 이해하는 경우(三品彰英, 1971; 金庠基, 1974)도 존재한다.
〈참고문헌〉
李基文, 1967, 「韓國語形性史」, 『民族文化史大系 Ⅴ』.
三品彰英, 1971, 『神話と文化史』, 平凡社
金庠基, 1974, 「國史上에 나타난 建國說話의 檢討」, 『東方史論叢』, 서울大學校出版部
이병도, 1996,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참고문헌〉
李基文, 1967, 「韓國語形性史」, 『民族文化史大系 Ⅴ』.
三品彰英, 1971, 『神話と文化史』, 平凡社
金庠基, 1974, 「國史上에 나타난 建國說話의 檢討」, 『東方史論叢』, 서울大學校出版部
이병도, 1996,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註) 030
註) 031
오이(烏伊) : 주몽을 도와 고구려 건국을 도운 인물. 본문에 의하면 마리·협보와 함께 주몽을 따라 남하하였다. 중종(中宗) 임신간본(壬申刊本)에는 ‘조이(鳥伊)’라고 하였으나, 본서 권13 동명성왕 6년(B.C. 32) 10월조나 『삼국유사』 권1 기이 제1 고구려조, 그리고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권1 갑신년조에서 ‘오이(烏伊)’라고 하였다. ‘오(烏)’는 ‘조(鳥)’와 혼동하기 쉬운 자이고, 오이라 칭한 사례가 더 많으므로 오이로 표기하는 편이 좋을 듯하다. 『위서』 권100 열전88 동이 고구려전에서 오인(烏引)·오위(烏違) 등 두 명이 주몽과 함께 남하하였다고 하였는데, 오이와 발음이 비슷하다.
한편 본서 권23 백제본기1 온조왕 즉위조에 따르면 온조(溫祚)가 졸본부여(卒本扶餘)에서 남하할 때 오간(烏干)·마려(馬黎) 등 10명의 신하가 함께하였다고 한다. 이때 오간은 오이와 ‘오(烏)’자를 공유할 뿐 아니라, ‘이(伊)’의 자형을 상세히 보지 않으면 ‘간(干)’으로 혼동할 수 있다. 아울러 마려와 마리 역시 음이 서로 통한다. 그렇다면 이들을 같은 인물의 다른 표기로 볼 수 있다. 다만 오이·마리는 유리명왕 33년(14) 8월 양맥(梁貊)을 멸망시키고 한의 고구려현(高句麗縣)을 공략하였다고 하므로 문제가 생긴다. 오이·마리가 오간·마려라면 이미 온조를 따라 남하하여 백제에 있어야 하는데, 고구려에서 활발한 군사 활동을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주목되는 것은 부여·고구려·백제 등 부여계 종족을 중심으로 건국되었다고 한 국가에서는 동명형 신화가 공유되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는 건국 과정에서 창업주를 도운 인물에 대한 전승도 포함될 터이므로, 그들의 이름에 대한 표기도 상호 일정 정도의 공통성을 지니게 된 것이 아닐까 한다. 즉 이는 고구려와 백제의 건국신화가 애초 같은 뿌리에서 나왔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본서 고구려본기에 따르면 동명성왕 6년(B.C. 32) 10월 오이는 부분노와 함께 행인국을 치고, 유리명왕 33년(14) 8월 마리와 함께 양맥과 한의 군현[高句麗縣]을 공략하는 등 군사 방면에서 큰 업적을 세웠다. 자세한 내용은 본서 권13 고구려본기1 동명성왕 6년 10월조 및 같은 책 유리명왕 33년(14) 8월조 참조.
한편 본서 권23 백제본기1 온조왕 즉위조에 따르면 온조(溫祚)가 졸본부여(卒本扶餘)에서 남하할 때 오간(烏干)·마려(馬黎) 등 10명의 신하가 함께하였다고 한다. 이때 오간은 오이와 ‘오(烏)’자를 공유할 뿐 아니라, ‘이(伊)’의 자형을 상세히 보지 않으면 ‘간(干)’으로 혼동할 수 있다. 아울러 마려와 마리 역시 음이 서로 통한다. 그렇다면 이들을 같은 인물의 다른 표기로 볼 수 있다. 다만 오이·마리는 유리명왕 33년(14) 8월 양맥(梁貊)을 멸망시키고 한의 고구려현(高句麗縣)을 공략하였다고 하므로 문제가 생긴다. 오이·마리가 오간·마려라면 이미 온조를 따라 남하하여 백제에 있어야 하는데, 고구려에서 활발한 군사 활동을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주목되는 것은 부여·고구려·백제 등 부여계 종족을 중심으로 건국되었다고 한 국가에서는 동명형 신화가 공유되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는 건국 과정에서 창업주를 도운 인물에 대한 전승도 포함될 터이므로, 그들의 이름에 대한 표기도 상호 일정 정도의 공통성을 지니게 된 것이 아닐까 한다. 즉 이는 고구려와 백제의 건국신화가 애초 같은 뿌리에서 나왔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본서 고구려본기에 따르면 동명성왕 6년(B.C. 32) 10월 오이는 부분노와 함께 행인국을 치고, 유리명왕 33년(14) 8월 마리와 함께 양맥과 한의 군현[高句麗縣]을 공략하는 등 군사 방면에서 큰 업적을 세웠다. 자세한 내용은 본서 권13 고구려본기1 동명성왕 6년 10월조 및 같은 책 유리명왕 33년(14) 8월조 참조.
註) 032
註) 033
註) 034
엄사수(淹㴲水) : 주몽이 부여를 탈출할 때 건넜다는 강의 이름이다. 본문에서는 ‘엄사수’라 하였으나, 「광개토왕릉비」에서는 ‘엄리대수(奄利大水)’, 「동명왕편」에서는 ‘엄체(淹滯)[수]’, 『삼국유사』 권1 기이1 제1 고구려조에서는 ‘엄수(淹水)’라고 전한다. 본서 권37 잡지6 지리4 삼국유명미상지분(三國有名未詳地分)조에 나오는 엄표수(淹淲水)도 동일한 하천을 말한다고 여겨진다. 표기 면에서는 문헌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기본적으로 ‘엄[奄·淹]’자를 공유하고 있다. 한편 『위서』·『북사』·『수서』 등 중국 측 사서에서는 구체적인 이름을 말하지 않고 ‘하나의 큰 강[一大水]’이라 하였다. 규모가 제법 큰 하천으로 여겨졌음을 엿볼 수 있다.
주목되는 점은 부여 시조 동명 전승에서도 비슷한 이름을 지닌 강이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동명이 건넌 하천에 대해 『논형』 권2 길험편에서는 ‘엄표수(掩淲水)’, 『삼국지』 권30 위서30 동이 부여전에 인용된 『위략』에서는 ‘시엄수(施掩水)’, 『후한서』 권85 열전75 동이 부여전 및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 권174 사이3 동이3 부여국조에서는 ‘엄사수(掩㴲水)’, 『양서』 권54 열전48 동이 고구려전 및 『북사』 권94 열전82 사이 상 백제전에서는 ‘엄체수(淹滯水)’, 『수서』 권81 열전46 동이 백제전에서는 ‘엄수(淹水)’라고 하였다. 이때 『위략』의 ‘시엄수’는 ‘엄시수(掩施水)’를 바꿔 표기한 것으로 보면, ‘엄’자를 공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엄사수’나 ‘엄체수’ 등 명칭이 고구려의 경우와 같은 사례도 존재한다.
종래 주몽이 건넌 엄사수에 대하여 쑹화강[松花江](이병도, 329쪽), 훈허[渾河] 강(白鳥庫吉, 1970), 랴오허[遼河] 강(리지린·강인숙, 1976) 등에 비정하기도 하였으나 주몽이 실재한 강을 건넜다면 부여 시조 동명이 건넌 강과 같을 수 없다. 고구려와 부여의 지리적 위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실존한 특정 하천을 말하는 것이라기보다(神崎勝, 271~272쪽), 부여와 고구려 지배 집단이 동형(同型)의 건국신화를 지니고 있던 데 기인한 현상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굳이 특정 하천으로 볼 필요는 없다. 고구려에서 부여와 경계를 이루는 지점에 위치한 하천을 건국신화에서 말한 엄사수·엄체수 혹은 엄리대수로 여겼다는 정도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참고로 그 의미를 ‘엄니’ 혹은 ‘엄내’로 보아 ‘대수(大水)’와 통한다는 설(이병도, 329쪽)도 있으나, 그렇게 상정할 경우 엄리대수는 같은 표현이 중복되므로 따르기 주저된다. 아울러 본문에서는 주(註)를 통하여 ‘개사수(蓋斯水)’라는 다른 이름을 전하고 있는데, ‘개(蓋)’와 엄사수의 ‘엄(掩)’이 의미상 서로 통하는 데 기인한 결과로 여겨진다.
〈참고문헌〉
白鳥庫吉, 1970, 「朝鮮古代地名考」, 『白鳥庫吉全集 3』, 吉川弘文館
리지린·강인숙, 1976, 『고구려 역사』, 사회과학출판사
神崎勝, 1995, 「夫餘・高句麗の建國傳承と百濟王家の始祖傳承」, 『日本古代の傳承と東アジア』, 吉川弘文館
이병도, 1996,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주목되는 점은 부여 시조 동명 전승에서도 비슷한 이름을 지닌 강이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동명이 건넌 하천에 대해 『논형』 권2 길험편에서는 ‘엄표수(掩淲水)’, 『삼국지』 권30 위서30 동이 부여전에 인용된 『위략』에서는 ‘시엄수(施掩水)’, 『후한서』 권85 열전75 동이 부여전 및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 권174 사이3 동이3 부여국조에서는 ‘엄사수(掩㴲水)’, 『양서』 권54 열전48 동이 고구려전 및 『북사』 권94 열전82 사이 상 백제전에서는 ‘엄체수(淹滯水)’, 『수서』 권81 열전46 동이 백제전에서는 ‘엄수(淹水)’라고 하였다. 이때 『위략』의 ‘시엄수’는 ‘엄시수(掩施水)’를 바꿔 표기한 것으로 보면, ‘엄’자를 공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엄사수’나 ‘엄체수’ 등 명칭이 고구려의 경우와 같은 사례도 존재한다.
종래 주몽이 건넌 엄사수에 대하여 쑹화강[松花江](이병도, 329쪽), 훈허[渾河] 강(白鳥庫吉, 1970), 랴오허[遼河] 강(리지린·강인숙, 1976) 등에 비정하기도 하였으나 주몽이 실재한 강을 건넜다면 부여 시조 동명이 건넌 강과 같을 수 없다. 고구려와 부여의 지리적 위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실존한 특정 하천을 말하는 것이라기보다(神崎勝, 271~272쪽), 부여와 고구려 지배 집단이 동형(同型)의 건국신화를 지니고 있던 데 기인한 현상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굳이 특정 하천으로 볼 필요는 없다. 고구려에서 부여와 경계를 이루는 지점에 위치한 하천을 건국신화에서 말한 엄사수·엄체수 혹은 엄리대수로 여겼다는 정도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참고로 그 의미를 ‘엄니’ 혹은 ‘엄내’로 보아 ‘대수(大水)’와 통한다는 설(이병도, 329쪽)도 있으나, 그렇게 상정할 경우 엄리대수는 같은 표현이 중복되므로 따르기 주저된다. 아울러 본문에서는 주(註)를 통하여 ‘개사수(蓋斯水)’라는 다른 이름을 전하고 있는데, ‘개(蓋)’와 엄사수의 ‘엄(掩)’이 의미상 서로 통하는 데 기인한 결과로 여겨진다.
〈참고문헌〉
白鳥庫吉, 1970, 「朝鮮古代地名考」, 『白鳥庫吉全集 3』, 吉川弘文館
리지린·강인숙, 1976, 『고구려 역사』, 사회과학출판사
神崎勝, 1995, 「夫餘・高句麗の建國傳承と百濟王家の始祖傳承」, 『日本古代の傳承と東アジア』, 吉川弘文館
이병도, 1996,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註) 035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이요 … 어찌하면 좋은가 : 주몽이 엄사수에 이르러 건널 수 없게 되자 이처럼 외쳤다고 하는 것은 하늘을 부계로 두고 땅 내지 물을 모계로[天父地母] 두는 시조 출자 의식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즉 주몽이 천상과 지상의 신적 존재에게 피를 이어받은 절대자에 버금가는 존재임을 공언함으로써 가호를 빌고 있다. 이와 유사한 전승은 『논형』 권2 길험편이나 『위략』 등에 전하는 부여 건국신화에서도 존재한다.
이 모티프는 다른 사료에서도 나타나는데, 기본적인 내용은 비슷하지만, 약간씩 차이가 있어 검토가 필요하다.
① 『위서』 권100 열전88 동이 고구려전에서는 “나는 해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다. 오늘 도망하여 달아나는데 추격병들이 어찌하면 건널 수 있겠는가?[我是日子, 河伯外孫, 今日逃走, 追兵垂及, 如何得濟]”라고 나와 있는데, 『수서』나 『북사』 등의 중국 측 문헌에 나온 주몽의 도강 전승은 해당 기술을 토대로 하였다. 주목되는 점은 주몽의 부친을 해[日]로 본 것으로, 「광개토왕릉비」에서 천제 내지 황천, 「모두루묘지」에서 일월(日月)이라 언급한 것과는 다르다. 해는 하늘 전체를 포괄하지 못하고 양(陽)만 상징한다(김선민, 24~25쪽). 그에 비해 천(天)은 일(日)·월(月)의 음양을 넘어선 지고의 위치에 있으며(琴章泰, 82쪽), 가시적인 해보다는 추상적인 천이 후대의 사유체계 속에서 나타난다(김석근, 6~8쪽). 따라서 애초 부친을 해로 보던 것이 변화·발전하여 주야로 천공을 지배한다는 의미를 담은 일월이 되고, 또 한 걸음 더 나아가 관념화된 천제가 되었다고 여겨진다(武田幸男, 341~342쪽). 따라서 『위서』에 실린 고구려 건국신화는 본서의 그것보다 시기적으로 이른 형태라 할 수 있다.
② 「광개토왕릉비」에서는 “나는 황천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인 추모왕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연결하고 거북을 띄우라[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郞, 鄒牟王. 爲我連葭浮龜]”고 표현되어 있는데, 주몽이 직접적인 지시를 통하여 자연의 힘을 이용하고 있다. 즉 주몽의 주재자로서의 측면이 강조된 셈이다. 5세기 초 국가권력에 의해 공인된 건국신화였기에 시조의 비범함이 더욱 두드러졌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 점은 주몽의 도주 역시 남쪽으로의 순행[巡幸南下]로 표현하고 있는 데서도 잘 나타난다.
③ 「동명왕편」에 인용된 『구삼국사』에서는 “‘저는 천제의 손자요, 하백의 외손인데, 지금 난을 피하여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황천후토는 저 고자를 불쌍히 여기시어 속히 배와 다리를 보내주소서.’ 말을 끝마치고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다[我天帝之孫, 河伯之甥, 令避難至此. 皇天后土, 憐我孤子, 速致舟橋. 言訖, 以弓打水, 魚鼈浮出成橋]”고 나와 있다. 『구삼국사』는 『논형』 권2 길험편이나 『위략』에 기록된 부여 건국신화에서 동명이 강을 건널 때 했던 활로 물을 치는 행위[以弓擊水]와 고구려 건국신화에 나타나는 언사가 결합된 모양새다. 아울러 주몽이 자신을 천제의 아들이 아니라 손자로 칭하고 있는데, 이는 천제의 아들이라 한 해모수를 부친으로 본 결과로 여겨진다. 즉 이전까지의 건국신화에 비해 일정 부분 변용이 이루어졌다 하겠는데, 『구삼국사』 내지 그 원전 자료의 찬술 태도와 관련하여 염두에 두어야 할 부분이다.
〈참고문헌〉
琴章泰, 1972, 「古代中國의 信仰과 祭祀-그 構造의 宗敎史學的考察-」, 『宗敎硏究』 1.
武田幸男, 1989, 『高句麗史と東アジア-「広開土王碑」研究序説-』, 岩波書店
김석근, 2005, 「고대 국가의 제천의식과 민회-한국정치사상사의 ‘古層’과 ‘執拗低音’을 찾아서-」, 『韓國政治硏究』 14-1
김선민, 2006, 「高句麗建國神話에 대한 廣開土王陵碑와 中國正史의 비교 연구」, 『東方學志』 134
이 모티프는 다른 사료에서도 나타나는데, 기본적인 내용은 비슷하지만, 약간씩 차이가 있어 검토가 필요하다.
① 『위서』 권100 열전88 동이 고구려전에서는 “나는 해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다. 오늘 도망하여 달아나는데 추격병들이 어찌하면 건널 수 있겠는가?[我是日子, 河伯外孫, 今日逃走, 追兵垂及, 如何得濟]”라고 나와 있는데, 『수서』나 『북사』 등의 중국 측 문헌에 나온 주몽의 도강 전승은 해당 기술을 토대로 하였다. 주목되는 점은 주몽의 부친을 해[日]로 본 것으로, 「광개토왕릉비」에서 천제 내지 황천, 「모두루묘지」에서 일월(日月)이라 언급한 것과는 다르다. 해는 하늘 전체를 포괄하지 못하고 양(陽)만 상징한다(김선민, 24~25쪽). 그에 비해 천(天)은 일(日)·월(月)의 음양을 넘어선 지고의 위치에 있으며(琴章泰, 82쪽), 가시적인 해보다는 추상적인 천이 후대의 사유체계 속에서 나타난다(김석근, 6~8쪽). 따라서 애초 부친을 해로 보던 것이 변화·발전하여 주야로 천공을 지배한다는 의미를 담은 일월이 되고, 또 한 걸음 더 나아가 관념화된 천제가 되었다고 여겨진다(武田幸男, 341~342쪽). 따라서 『위서』에 실린 고구려 건국신화는 본서의 그것보다 시기적으로 이른 형태라 할 수 있다.
② 「광개토왕릉비」에서는 “나는 황천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인 추모왕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연결하고 거북을 띄우라[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郞, 鄒牟王. 爲我連葭浮龜]”고 표현되어 있는데, 주몽이 직접적인 지시를 통하여 자연의 힘을 이용하고 있다. 즉 주몽의 주재자로서의 측면이 강조된 셈이다. 5세기 초 국가권력에 의해 공인된 건국신화였기에 시조의 비범함이 더욱 두드러졌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 점은 주몽의 도주 역시 남쪽으로의 순행[巡幸南下]로 표현하고 있는 데서도 잘 나타난다.
③ 「동명왕편」에 인용된 『구삼국사』에서는 “‘저는 천제의 손자요, 하백의 외손인데, 지금 난을 피하여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황천후토는 저 고자를 불쌍히 여기시어 속히 배와 다리를 보내주소서.’ 말을 끝마치고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다[我天帝之孫, 河伯之甥, 令避難至此. 皇天后土, 憐我孤子, 速致舟橋. 言訖, 以弓打水, 魚鼈浮出成橋]”고 나와 있다. 『구삼국사』는 『논형』 권2 길험편이나 『위략』에 기록된 부여 건국신화에서 동명이 강을 건널 때 했던 활로 물을 치는 행위[以弓擊水]와 고구려 건국신화에 나타나는 언사가 결합된 모양새다. 아울러 주몽이 자신을 천제의 아들이 아니라 손자로 칭하고 있는데, 이는 천제의 아들이라 한 해모수를 부친으로 본 결과로 여겨진다. 즉 이전까지의 건국신화에 비해 일정 부분 변용이 이루어졌다 하겠는데, 『구삼국사』 내지 그 원전 자료의 찬술 태도와 관련하여 염두에 두어야 할 부분이다.
〈참고문헌〉
琴章泰, 1972, 「古代中國의 信仰과 祭祀-그 構造의 宗敎史學的考察-」, 『宗敎硏究』 1.
武田幸男, 1989, 『高句麗史と東アジア-「広開土王碑」研究序説-』, 岩波書店
김석근, 2005, 「고대 국가의 제천의식과 민회-한국정치사상사의 ‘古層’과 ‘執拗低音’을 찾아서-」, 『韓國政治硏究』 14-1
김선민, 2006, 「高句麗建國神話에 대한 廣開土王陵碑와 中國正史의 비교 연구」, 『東方學志』 134
註) 036
물고기와 자라가 … 건널 수 있었다 : 물고기가 떠올라 다리를 만든 결과 강을 건널 수 있었다는 전승은 북아시아 지역에서 연어·송어 등이 산란기에 떼 지어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모습이 마치 다리를 이루는 것처럼 보이는 데 있었다는 설(三上次男, 1966)이 있다. 다만 이는 물고기에 국한된 것이기에 자라도 설명이 필요한데, 중국식으로 수식된 결과 본문과 같은 서술이 나타났다고 보기도 한다(鄭求福·盧重國·申東河·金泰植·權悳永, 411쪽). 다만 『안자춘추(晏子春秋)』 내편(內篇) 간상(諫上) 제1의 15에서 하백이 어별을 민으로 삼았다[“河伯以水爲國, 以魚鱉爲民”]고 언급한 것이나 주몽이 하백의 관장 영역인 물에 어려움을 알린 것을 고려하면, 중국의 하백 관념을 수용하여 적절히 활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三上次男, 1966, 『古代東北アジア史硏究』, 吉川弘文館
鄭求福·盧重國·申東河·金泰植·權悳永, 1997, 『譯註 三國史記 3-주석편(상)-』, 韓國精神文化硏究院
〈참고문헌〉
三上次男, 1966, 『古代東北アジア史硏究』, 吉川弘文館
鄭求福·盧重國·申東河·金泰植·權悳永, 1997, 『譯註 三國史記 3-주석편(상)-』, 韓國精神文化硏究院
註) 037
모둔곡(毛屯谷) : 본서 권37 잡지6 지리4 삼국유명미상지분(三國有名未詳地分)조에도 기재된 것으로 보아 본서의 찬자도 그 위치를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가 발흥한 압록강 중류 유역 일대에는 애초 나국(那國)이라 일컫는 소국들이 존재하였으며, 이들 공동체는 다수의 곡(谷) 내지 천(川) 집단이 결속하여 성립하였던 것으로 보인다(임기환, 80~81쪽; 여호규, 176~179쪽). 본문에 따르면 주몽은 모둔곡에서 재사·무골·묵거를 만났는데, 위 견해에 근거한다면 이들은 곡 집단의 수장 세력으로 볼 수 있다.
〈참고문헌〉
임기환, 2004, 『고구려 정치사 연구』, 한나래
여호규, 2014, 『고구려 초기 정치사 연구』, 신서원
〈참고문헌〉
임기환, 2004, 『고구려 정치사 연구』, 한나래
여호규, 2014, 『고구려 초기 정치사 연구』, 신서원
註) 038
『위서(魏書)』에는 “음술수(音述水)에 이르렀다.”라고 하였다 : 『위서』 권100 열전88 동이 고구려전에는 주몽이 보술수(普述水)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이 기사의 ‘음(音)’은 ‘보(普)’를 잘못 옮겨 적은 것으로 여겨진다. 고구려는 중국 지린성[吉林省]의 훈 강[渾江] 유역을 기반으로 성립하였다. 따라서 보술수는 훈장 강이나 그 지류 하천 중 하나를 말할 것이며, 모둔곡도 그 근방에 소재하였다고 추정된다.
註) 039
재사(再思) : 주몽이 남하한 뒤 만난 인물. 고구려 개국을 도왔고, ‘극(克)’이라는 성씨를 하사받았다. 이후 행적은 알 수 없다. 주몽은 이때 재사 외에 무골·묵거와도 만났는데, 『위서』 권100 열전88 동이 고구려전에서도 이를 언급하고 있으나, 여기서는 세 명이 입은 옷을 말하고 있을 뿐 이름이나 사성(賜姓)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는다. 같은 기록에서 오인·오위 등 주몽과 함께 남하한 인물들의 이름은 전하고 있으므로, 애초에는 세 명의 현자를 만났다는 정도의 모티프였다가 이후 이름이 확정되고 사성 전승이 부가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 점은 그들의 이름에서 잘 드러나는데, ‘재차 생각하고[再思]’, ‘강건한 체격을 지녔으며[武骨]’, ‘묵묵히 거처하는 것[默居]’은 지배층에게 요구되는 덕목이기 때문이다.
註) 040
註) 042
주몽이 재사에게 극씨(克氏), … 성씨를 주고 : 본서 고구려본기의 사성(賜姓) 기사는 이 기사의 3건을 포함하여 총 8차례에 걸쳐 등장하고 있다. 남은 5건은 ①유리명왕 21년(2) 9월 사물택(沙勿澤)에서 만난 장부에게 위씨(位氏)란 성과 사물(沙勿)이란 이름 사여, ②유리명왕 24년(5) 9월 기산(箕山)에서 만난 이인(異人)에게 우씨(羽氏)란 성씨를 사여하고, 사위로 삼음, ③대무신왕 4년(21) 12월 부여 진군 시 종군을 청한 장부에게 부정씨(負鼎氏) 사여, ④대무신왕 5년(22) 7월 투항한 부여왕 종제(從弟)에게 낙씨(絡氏) 사여, ⑤대무신왕 15년(32) 탐학을 일삼은 비류부장(沸流部長)을 선도(善導)한 추발소(鄒勃素)에게 대실씨(大室氏) 사여 등이다.
왕의 사성은 동아시아 전통 사회에서 드물지 않게 벌어지는 일이었다. 이에 고구려의 사성은 영역 내 수장층을 편제·통솔하여 중앙 집권화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설(金光洙, 961~968쪽)이 제기되었다. 다만 당시 실제로 이러한 조치가 이루어졌는지는 검토가 필요하다. 사성 기사는 건국기라 할 동명성왕~대무신왕 시기에 국한되어 등장할 뿐, 이후에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사성이 실제로 정치적인 의미를 지닌 채 당대에 시행되었다면, 이는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그 면에서 대략 4세기 후반 즈음 초기 왕들에 대한 전승을 취합하며 건국기의 전승을 체계화하면서 당시까지 함께 전해지던 일부 귀족들의 가계 전승을 왕실 가계 전승의 하위 부분으로 흡수하였고, 이때 사성은 양자가 결합하는 매개고리 역할을 하였다는 견해(노태돈, 90쪽)가 주목된다. 본서 권1 신라본기1에 따르면 신라도 이미 유리이사금 9년(32)에 6부 세력집단에게 각기 성씨를 사여한 것처럼 나오지만, 실제로 성씨를 사용한 흔적은 한참 뒤에 발견되고 있다.
사성 기사를 포함한 귀족들의 족조(族祖) 전승은 시조 주몽의 신성성과 신비성을 강조함과 아울러, 자신들의 선조가 고구려 건국 및 발전에 기여한 존재임을 강조하고 있다는 특징이다. 귀족들은 이를 토대로 귀족으로서 자신들의 위치를 정당화하였다(徐永大, 169~171쪽). 「광개토왕릉비」에서 역대 왕들 가운데 초기 3왕을 특정하여 그 훈적을 기리고 있는 것에서 보이듯 이미 4세기 후반이면 이들은 다른 왕들과 구별되는 입지를 확보하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귀족들의 족조 전승 역시 귀족에 의해서든 왕권에 의해서든 초기 3왕의 전승 안에 자리하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유의할 점은 고구려본기에서 이러한 사성 관련 인물들은 단지 일회성으로 나오고, 후손의 활동상도 거의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2~3세기를 대상으로 한 고구려본기에서 명림(明臨)이나 우(于) 등의 성씨를 가진 인물들이 복수로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과 대조적이다. 바꿔 말하면 기사의 신뢰도가 상대적으로 확보된 해당 시기에 실제로 고구려 정계에서 활약했던 인물들의 족조 전승이라 할 사례는 찾을 수 없다. 따라서 대략 4세기 이후 주요 귀족 집단이 교체되어 초기 3왕의 전승을 편년 기사로 체계화할 때 이들 신진 세력의 족조 전승이 편입되었거나, 혹은 왕권이 기존에 가문들을 대상으로 새로운 성씨를 사여하였고 그것이 초기 기사에 전승 형태로 남게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참고문헌〉
金光洙, 1983, 「高句麗 建國期의 姓氏賜與」, 『金哲埈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知識産業社
徐永大, 1995, 「高句麗 貴族家門의 族祖傳承」, 『韓國古代史硏究』 8
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왕의 사성은 동아시아 전통 사회에서 드물지 않게 벌어지는 일이었다. 이에 고구려의 사성은 영역 내 수장층을 편제·통솔하여 중앙 집권화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설(金光洙, 961~968쪽)이 제기되었다. 다만 당시 실제로 이러한 조치가 이루어졌는지는 검토가 필요하다. 사성 기사는 건국기라 할 동명성왕~대무신왕 시기에 국한되어 등장할 뿐, 이후에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사성이 실제로 정치적인 의미를 지닌 채 당대에 시행되었다면, 이는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그 면에서 대략 4세기 후반 즈음 초기 왕들에 대한 전승을 취합하며 건국기의 전승을 체계화하면서 당시까지 함께 전해지던 일부 귀족들의 가계 전승을 왕실 가계 전승의 하위 부분으로 흡수하였고, 이때 사성은 양자가 결합하는 매개고리 역할을 하였다는 견해(노태돈, 90쪽)가 주목된다. 본서 권1 신라본기1에 따르면 신라도 이미 유리이사금 9년(32)에 6부 세력집단에게 각기 성씨를 사여한 것처럼 나오지만, 실제로 성씨를 사용한 흔적은 한참 뒤에 발견되고 있다.
사성 기사를 포함한 귀족들의 족조(族祖) 전승은 시조 주몽의 신성성과 신비성을 강조함과 아울러, 자신들의 선조가 고구려 건국 및 발전에 기여한 존재임을 강조하고 있다는 특징이다. 귀족들은 이를 토대로 귀족으로서 자신들의 위치를 정당화하였다(徐永大, 169~171쪽). 「광개토왕릉비」에서 역대 왕들 가운데 초기 3왕을 특정하여 그 훈적을 기리고 있는 것에서 보이듯 이미 4세기 후반이면 이들은 다른 왕들과 구별되는 입지를 확보하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귀족들의 족조 전승 역시 귀족에 의해서든 왕권에 의해서든 초기 3왕의 전승 안에 자리하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유의할 점은 고구려본기에서 이러한 사성 관련 인물들은 단지 일회성으로 나오고, 후손의 활동상도 거의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2~3세기를 대상으로 한 고구려본기에서 명림(明臨)이나 우(于) 등의 성씨를 가진 인물들이 복수로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과 대조적이다. 바꿔 말하면 기사의 신뢰도가 상대적으로 확보된 해당 시기에 실제로 고구려 정계에서 활약했던 인물들의 족조 전승이라 할 사례는 찾을 수 없다. 따라서 대략 4세기 이후 주요 귀족 집단이 교체되어 초기 3왕의 전승을 편년 기사로 체계화할 때 이들 신진 세력의 족조 전승이 편입되었거나, 혹은 왕권이 기존에 가문들을 대상으로 새로운 성씨를 사여하였고 그것이 초기 기사에 전승 형태로 남게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참고문헌〉
金光洙, 1983, 「高句麗 建國期의 姓氏賜與」, 『金哲埈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知識産業社
徐永大, 1995, 「高句麗 貴族家門의 族祖傳承」, 『韓國古代史硏究』 8
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註) 043
註) 044
흘승골성(紇升骨城) ; 흘승골성(紇升骨城)은 『위서』 권100 열전88 동이 고구려전에서 고구려가 처음 도읍한 곳으로 나오며, 이후의 중국 측 사서 역시 그러한 기술을 답습하고 있다. 「광개토왕릉비」에서는 비류곡(沸流谷) 홀본(忽本) 서쪽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於沸流谷, 忽本西, 城山上而建都焉”]고 하였는데, 홀본이 곧 졸본(卒本)이므로 여기서 언급한 성채가 바로 중국 측에서 말한 흘승골성으로 여겨진다. 이에 대해 ‘흘승골’을 ‘승흘골(升紇骨)’이 전도된 것으로 여겨 ‘승흘골=솔골[卒忽]=졸본’으로 파악하기도 하나(李丙燾, 367~368쪽), 자순(字順)을 뒤바꾸는 등 자의적인 측면이 없지 않다. 또 ‘흘승골성’을 ‘흘본골성(紇本骨城)’의 오사(誤寫)로 보기도 한다(白鳥庫吉, 25쪽). 글을 옮겨 적는 과정에서 ‘본(本)’이 ‘승(升)’으로 잘못 베껴졌을 가능성도 충분하고, ‘흘본(紇本)’은 홀본과 음이 통하기 때문에 일견 타당하다. 그렇다면 ‘흘본골성=홀본(졸본)의 골성’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奇庚良, 135~136쪽). 「동명왕편」에 인용된 『구삼국사』에서는 검은 구름이 골령(鶻嶺)에 일어나더니 성곽이 만들어져 주몽이 그곳에서 거처하였다는 전승을 전한다. 이는 「광개토왕릉비」에서 홀본 서쪽 산 위에 세웠다는, 『위서』 고구려전에서 말한 흘승골성과 다르지 않다고 여겨지는데, 그 면에서 보자면 흘승골성이란 이름에 골령이라는 지명이 함께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홀’과 ‘골’의 음이 유사하다는 점에서 보자면 골령 자체가 ‘홀본의 산봉우리[山嶺]’를 의미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姜辰垣, 76쪽). 한편 오녀산의 지정학적 특징에 주목하여 흘승골성을 ‘성 같은 산 위의 성’이란 의미로 이해하기도 한다(권순홍, 28~30쪽).
오늘날 연구자들 대부분은 흘승골성을 랴오닝성[遼寧省] 환런[桓仁] 지역에 있는 오녀산성(五女山城)으로 본다. 이 산성은 환런 일대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을 주는 장소에 자리하고 있어 지배자의 권력을 드러내기에는 좋은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실제 오녀산은 해발 820m 높이에 서·남·북쪽 삼면이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정상은 남북 1,000m, 동서 300m, 총 2,440m에 이르는 넓은 평탄지이다. 현재 동쪽과 동남쪽 산허리에는 자연 지세를 이용하여 쌓은 고구려 때의 성벽이 남아 있고, 산 정상부에서는 고구려시기의 여러 건물 유지와 저수 시설 등이 확인되었다(辽宁省文物考古硏究所, 2004).
〈참고문헌〉
白鳥庫吉, 1914, 「丸都城及國內城考」, 『史學雜誌』 25-4·5
李丙燾, 1976,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辽宁省文物考古硏究所, 2004, 『五女山城: 1996~1999, 2003年桓仁五女山城调查发掘报告』, 文物出版社
姜辰垣, 2015, 「高句麗 國家祭祀 硏究」,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奇庚良, 2017, 「高句麗 王都 硏究」,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권순홍, 2019, 「고구려 도성 연구」, 성균관대 박사학위논문
오늘날 연구자들 대부분은 흘승골성을 랴오닝성[遼寧省] 환런[桓仁] 지역에 있는 오녀산성(五女山城)으로 본다. 이 산성은 환런 일대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을 주는 장소에 자리하고 있어 지배자의 권력을 드러내기에는 좋은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실제 오녀산은 해발 820m 높이에 서·남·북쪽 삼면이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정상은 남북 1,000m, 동서 300m, 총 2,440m에 이르는 넓은 평탄지이다. 현재 동쪽과 동남쪽 산허리에는 자연 지세를 이용하여 쌓은 고구려 때의 성벽이 남아 있고, 산 정상부에서는 고구려시기의 여러 건물 유지와 저수 시설 등이 확인되었다(辽宁省文物考古硏究所, 2004).
〈참고문헌〉
白鳥庫吉, 1914, 「丸都城及國內城考」, 『史學雜誌』 25-4·5
李丙燾, 1976,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辽宁省文物考古硏究所, 2004, 『五女山城: 1996~1999, 2003年桓仁五女山城调查发掘报告』, 文物出版社
姜辰垣, 2015, 「高句麗 國家祭祀 硏究」,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奇庚良, 2017, 「高句麗 王都 硏究」,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권순홍, 2019, 「고구려 도성 연구」, 성균관대 박사학위논문
註) 045
비류수(沸流水) : 고구려 초기 중심지를 흐르는 하천. 본서 권14 고구려본기 제2 대무신왕 4년(21) 12월조에서는 부여 정벌 시 고구려군의 이동 경로 중에 언급되고 있으며, 『삼국지』 권30 위서30 동이 고구려전에 따르면 이이모(伊夷模)와의 왕위 계승 전쟁에서 패배한 발기(拔奇)와 연노부(涓奴部) 세력이 거주한 곳이기도 하며[“拔奇怨爲兄而不得立, 與涓奴加各將下戶三萬餘口詣康降, 還住沸流水”], 같은 책 권28 위서28 관구검전에서는 조위(曹魏)의 침공에 대한 고구려군의 진군 경로 상에서 등장한다[“正始中, … 句驪王宮將步騎二萬人, 進軍沸流水上, 大戰梁口”]. 본서 권37 잡지6 지리4 삼국유명미상지분(三國有名未詳地分)조에도 기재된 것으로 보아 본서의 찬자도 그 위치를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의 훈장[渾江] 강에 비정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나, 그 지류인 푸얼강[富爾江]으로 보기도 한다(노태돈, 2012, 「고구려초기 천도에 관한 약간의 논의」, 『한국고대사연구』 68, 29쪽).
註) 046
고구려(高句麗) : 상대적으로 이른 시기를 다룬 중국 측 사서, 즉 『한서』·『후한서』에서는 고구려(高句驪)라 쓰기도 하였다. ‘려(麗)’ 대신에 ‘마(馬)’ 부수의 ‘려(驪)’를 쓴 것은 중국 측에서 이질적인 공동체를 가리킬 때 종종 쓰던 비칭(卑稱)의 일환이다. 다만 『삼국지』 단계에서부터는 ‘마(馬)’자 부수를 뺀 명칭이 사용되었다. 물론 『송서』나 『양서』 등의 남조계 사서에서는 여전히 이전의 표기를 유지하기도 하였으나, 『위서』 등 북조계 사서에서는 『삼국지』의 흐름을 이어받았다.
고구려는 ‘고(高)’를 뺀 채 ‘구려(句麗)’ 내지 ‘구려(句驪)’라 칭해지기도 하였다. 이때의 구려는 ‘구루(溝樓)’와 마찬가지로 성읍(城邑)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고’는 크다는 뜻이므로, 결국 고구려는 ‘대성(大城)’·‘수읍(首邑)’·‘상읍(上邑)’과 같은 의미라고 보기도 한다(李丙燾, 353~369쪽).
한편 『주서』 단계 이후로는 고구려를 고려(高麗)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이전에는 고구려와 고려가 상통하여 사용된 것으로 보아왔으나, 고구려가 광개토왕 혹은 장수왕 시기에 고구려에서 고려로 국명을 바꾼 것으로 파악한 설(鄭求福, 1992)이 제기되어 공감대를 얻고 있다. 사실 백제국(佰濟國)이 백제(百濟)가 되고, 사로국(斯盧國)이 신라(新羅)가 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국가 체제가 정비됨에 따라 국호를 원래의 의미나 발음에서 동떨어지지 않는 선에서 개정하는 사례는 드물지 않다. 고구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고려는 글자의 의미에서 고구려보다 세련된 인상을 주므로, 5세기 이후에는 ‘고려’가 정식 국호로 사용되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참고문헌〉
李丙燾, 1976,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鄭求福, 1992, 「高句麗의 ‘高麗’ 國號에 대한 一考-三國史記의 기록과 관련하여-」, 『湖西史學』 19·20.
고구려는 ‘고(高)’를 뺀 채 ‘구려(句麗)’ 내지 ‘구려(句驪)’라 칭해지기도 하였다. 이때의 구려는 ‘구루(溝樓)’와 마찬가지로 성읍(城邑)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고’는 크다는 뜻이므로, 결국 고구려는 ‘대성(大城)’·‘수읍(首邑)’·‘상읍(上邑)’과 같은 의미라고 보기도 한다(李丙燾, 353~369쪽).
한편 『주서』 단계 이후로는 고구려를 고려(高麗)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이전에는 고구려와 고려가 상통하여 사용된 것으로 보아왔으나, 고구려가 광개토왕 혹은 장수왕 시기에 고구려에서 고려로 국명을 바꾼 것으로 파악한 설(鄭求福, 1992)이 제기되어 공감대를 얻고 있다. 사실 백제국(佰濟國)이 백제(百濟)가 되고, 사로국(斯盧國)이 신라(新羅)가 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국가 체제가 정비됨에 따라 국호를 원래의 의미나 발음에서 동떨어지지 않는 선에서 개정하는 사례는 드물지 않다. 고구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고려는 글자의 의미에서 고구려보다 세련된 인상을 주므로, 5세기 이후에는 ‘고려’가 정식 국호로 사용되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참고문헌〉
李丙燾, 1976,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鄭求福, 1992, 「高句麗의 ‘高麗’ 國號에 대한 一考-三國史記의 기록과 관련하여-」, 『湖西史學』 19·20.
註) 047
이로 인하여 고(高)를 성씨[氏]로 삼았다 : 원문을 그대로 번역하면 “고(高)로써 씨(氏)를 삼았다”가 된다. 사실 성(姓)과 씨는 그 뜻이 조금 다른 개념이다. 본디 성이 혈족(血族)을 나타낸다면, 씨는 그 성(姓)의 계통을 보여준다. 예컨대 춘추전국시대 노(魯)의 군주는 주(周) 왕실과 같은 희성(姬姓)을 지녔는데, 당시 군국의 실권을 쥐었던 삼환씨(三桓氏)는 노 환공(桓公)의 자손들로서 성은 공실(公室)과 같으나 분봉된 지역에 따라 각기 다른 씨를 칭하게 되었다. 즉 종족(宗族)의 인구가 늘고 거주 지역이 확산되자, 하나의 성에서 갈라진 지파(支派)가 새운 거주지나 조상의 이름 등을 따서 갈라진 계통을 나타낸 칭호가 씨이다. 다만 중국에서도 시일이 지남에 따라 성과 씨의 구분은 모호해졌고, 진한시대 이후에는 점차 하나의 의미로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한국의 경우도 성과 씨를 구분해서 사용하지 않았는데, 아마도 진한시대 이후의 성씨 관념을 수용한 결과일 것이다. 그러므로 번역문에서도 통상적인 예에 따라 위와 같이 해 둔다.
참고로 『삼국유사』 권1 기이 제1 고구려조에서는 분주(分註)를 통하여 주몽이 천제의 아들로 햇빛에 감응되어 태어났던 것에 기인하여 고씨 성을 칭하게 되었다고 전한다[“本姓解也, 今自言是天帝子, 承日光而生, 故自以高爲氏”].
참고로 『삼국유사』 권1 기이 제1 고구려조에서는 분주(分註)를 통하여 주몽이 천제의 아들로 햇빛에 감응되어 태어났던 것에 기인하여 고씨 성을 칭하게 되었다고 전한다[“本姓解也, 今自言是天帝子, 承日光而生, 故自以高爲氏”].
註) 048
졸본부여(卒本扶餘) : 분주를 통하여 본문의 고구려 건국신화와 색채를 달리하는 전승을 소개하는 가운데 나오는 지명이다. 그런데 졸본부여는 본서 고구려본기 분주에서만 언급될 뿐 본문에 등장한 적은 없다. 따라서 그 실체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먼저 『삼국유사』 권1 기이 제1 고구려조에서 찬자는 고구려를 졸본부여로 이해함과 아울러, 부여 동명신화를 고구려 건국신화로 간주하며 분주를 통하여 졸본부여가 북부여의 별도였기에 주몽을 부여왕이라 하였다는 견해를 밝혔다. 이는 졸본부여를 고구려로 본 것이다. 그런데 본문 분주의 내용은 주몽이 도착하기 전에 그 지역에는 졸본부여라는 나라가 있었다는 것이므로, 따르기 주저된다. 이밖에 졸본부여가 실재하였다고 보는 견해(金映遂, 17쪽; 박노석, 13쪽; 김미경, 222~223쪽; 조법종, 135쪽)도 있다.
그런데 졸본부여가 분주가 아니라 본문에 언급된 것은 오히려 본서의 백제본기다. 이로 보아 고구려본기 분주에서 다룬 내용은 백제본기의 내용을 간략히 언급한 것으로 여겨진다. 주목되는 점은 백제본기에 의거할 경우 주몽은 사위로 졸본부여의 왕위를 이었을 따름이고, 온조와 비류의 남하 당시 오간·마려 등 졸본부여의 신하들이 동행하는 것에서 볼 때, 주몽의 역할은 제한적이고 백제는 졸본부여의 후계 국가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따라서 졸본부여라는 개념은 백제 관련 전승의 범주에서 이해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한다. 이에 졸본부여는 백제인들이 북부여·남부여(백제)와 구분되는 또 다른 부여로서 고구려를 개념화한 것이거나(임기환, 11쪽), 백제와 부여의 계통을 직접 연결짓고자 하는 목적에서 설정된 가상의 존재로 보는 설(奇庚良, 133~134쪽)이 제기되었다.
〈참고문헌〉
金映遂, 1958, 「高句麗 國都考」, 『全南大學校論文集』 2
박노석, 2003, 「졸본부여와 고구려의 관계에 대한 고찰」, 『全北史學』 26
김미경, 2005, 「高句麗 琉璃王代 政治勢力의 再編과 對外政策」, 『北方史論叢』 4
조법종, 2007, 「고구려 초기도읍과 비류국성 연구」, 『白山學報』 77
임기환, 2008,「高句麗 初期 建國說話 관련 자료의 계통과 성격-卒本扶餘를 중심으로-」, 『(2008년 한중 고구려역사 연구 학술회의)졸본 시기의 고구려 역사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奇庚良, 2017, 「高句麗 王都 硏究」,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그런데 졸본부여가 분주가 아니라 본문에 언급된 것은 오히려 본서의 백제본기다. 이로 보아 고구려본기 분주에서 다룬 내용은 백제본기의 내용을 간략히 언급한 것으로 여겨진다. 주목되는 점은 백제본기에 의거할 경우 주몽은 사위로 졸본부여의 왕위를 이었을 따름이고, 온조와 비류의 남하 당시 오간·마려 등 졸본부여의 신하들이 동행하는 것에서 볼 때, 주몽의 역할은 제한적이고 백제는 졸본부여의 후계 국가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따라서 졸본부여라는 개념은 백제 관련 전승의 범주에서 이해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한다. 이에 졸본부여는 백제인들이 북부여·남부여(백제)와 구분되는 또 다른 부여로서 고구려를 개념화한 것이거나(임기환, 11쪽), 백제와 부여의 계통을 직접 연결짓고자 하는 목적에서 설정된 가상의 존재로 보는 설(奇庚良, 133~134쪽)이 제기되었다.
〈참고문헌〉
金映遂, 1958, 「高句麗 國都考」, 『全南大學校論文集』 2
박노석, 2003, 「졸본부여와 고구려의 관계에 대한 고찰」, 『全北史學』 26
김미경, 2005, 「高句麗 琉璃王代 政治勢力의 再編과 對外政策」, 『北方史論叢』 4
조법종, 2007, 「고구려 초기도읍과 비류국성 연구」, 『白山學報』 77
임기환, 2008,「高句麗 初期 建國說話 관련 자료의 계통과 성격-卒本扶餘를 중심으로-」, 『(2008년 한중 고구려역사 연구 학술회의)졸본 시기의 고구려 역사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奇庚良, 2017, 「高句麗 王都 硏究」,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註) 049
註) 050
註) 052
말갈(靺鞨) ; 한반도 동북부 및 만주 동부 지역, 즉 오늘날의 쑹화강[松花江]·무단강[牡丹江]·헤이룽강[黑龍江] 강 및 두만강 유역에 거주하였던 종족이다. 그런데 말갈이라는 이름은 『북제서』 권7 본기7 무성제(武成帝) 하청(河淸) 2년(563) 시세조(是歲條)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 다시 말해 본문이 대상으로 한 시기에 말갈이라는 집단의 존재를 상정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당시 만주 동부 및 한반도 동북부에 거주하였던 집단으로 나타나는 것은 숙신(肅愼) 내지 읍루(挹婁)이다. 따라서 이는 본디 숙신이나 읍루를 말한 것이며, 후대에 사료를 정리·보완하는 과정에서 말갈로 개칭된 것 같다. 여러 상황을 고려할 때 국초 고구려의 말갈 복속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보기는 어렵다.
『구당서』 권199하 열전149하 북적 말갈전에 따르면 말갈 일부 세력은 고구려에 복속되어 있었고, 실제 수·당과의 전쟁 과정에서 말갈인들이 동원되기도 하였다. 또 「광개토왕릉비」에서 광개토왕 영락 8년(398) 굴복시킨 백신(帛愼)이 숙신이라면, 영향력을 행사한 시기적 상한은 더욱 올려볼 수 있다. 이 기사에 일정한 역사적 사실이 자리하고 있다고 볼 경우, 국가 성립기에 숙신이나 읍루의 침공을 받았던 경험이 말갈이라는 용어가 등장한 6세기 후반 이후 윤색·정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통설에 따르자면 말갈은 진한시대에 숙신(肅愼), 위진시대에 읍루(挹婁), 북위시기에 물길(勿吉)이라 불리었던 집단이 그 전신이며, 송대 이후의 여진(女眞)이 그 후신이다. 즉 「숙신-읍루-물길-말갈-여진」의 선후 관계가 이루어진다. 다만 그와는 달리 이들 사이의 연관성에 대해 부정하는 견해도 제기되었으며(韓圭哲, 41~44쪽),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 살던 반농반렵(半農半獵) 종족들 가운데 각 시기에 두드러진 활동을 한 집단이 기록에 남겨진 결과로 파악하기도 하였다(김현숙, 444~445쪽). 『수서』 권81 열전46 동이 말갈전에 따르면 당시 말갈에는 백산부(白山部)·속말부(粟末部)·백돌부(伯咄部)·안거골부(安車骨部)·불녈부(拂涅部)·호실부(號室部)·흑수부(黑水部)의 7개 집단이 존재하였으며, 단일한 국가 공동체를 성립하지 못한 채 부락 내지 집단별로 중국 왕조와 고구려에 복속되어 지냈다.
〈참고문헌〉
池內宏, 1951, 『滿鮮史硏究-上世篇-』, 吉川弘文館
韓圭哲, 1994, 『渤海의 對外關係史』, 新書院
김현숙, 2005, 『고구려의 영역지배방식 연구』, 모시는사람들
『구당서』 권199하 열전149하 북적 말갈전에 따르면 말갈 일부 세력은 고구려에 복속되어 있었고, 실제 수·당과의 전쟁 과정에서 말갈인들이 동원되기도 하였다. 또 「광개토왕릉비」에서 광개토왕 영락 8년(398) 굴복시킨 백신(帛愼)이 숙신이라면, 영향력을 행사한 시기적 상한은 더욱 올려볼 수 있다. 이 기사에 일정한 역사적 사실이 자리하고 있다고 볼 경우, 국가 성립기에 숙신이나 읍루의 침공을 받았던 경험이 말갈이라는 용어가 등장한 6세기 후반 이후 윤색·정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통설에 따르자면 말갈은 진한시대에 숙신(肅愼), 위진시대에 읍루(挹婁), 북위시기에 물길(勿吉)이라 불리었던 집단이 그 전신이며, 송대 이후의 여진(女眞)이 그 후신이다. 즉 「숙신-읍루-물길-말갈-여진」의 선후 관계가 이루어진다. 다만 그와는 달리 이들 사이의 연관성에 대해 부정하는 견해도 제기되었으며(韓圭哲, 41~44쪽),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 살던 반농반렵(半農半獵) 종족들 가운데 각 시기에 두드러진 활동을 한 집단이 기록에 남겨진 결과로 파악하기도 하였다(김현숙, 444~445쪽). 『수서』 권81 열전46 동이 말갈전에 따르면 당시 말갈에는 백산부(白山部)·속말부(粟末部)·백돌부(伯咄部)·안거골부(安車骨部)·불녈부(拂涅部)·호실부(號室部)·흑수부(黑水部)의 7개 집단이 존재하였으며, 단일한 국가 공동체를 성립하지 못한 채 부락 내지 집단별로 중국 왕조와 고구려에 복속되어 지냈다.
〈참고문헌〉
池內宏, 1951, 『滿鮮史硏究-上世篇-』, 吉川弘文館
韓圭哲, 1994, 『渤海의 對外關係史』, 新書院
김현숙, 2005, 『고구려의 영역지배방식 연구』, 모시는사람들
註) 053
비류국(沸流國) : 주몽 집단에 앞서 졸본 일대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공동체. 이 기사에 따르면 비류국은 주몽이 졸본에 오기 전에 누대에 걸쳐 이 일대에 지배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그 왕 송양은 주몽과의 대결에서 패배한 끝에 결국 투항하였고, 주몽은 그를 다물도(多勿都)의 우두머리[國主]로 삼았다. 이는 선주(先住) 세력이 계루부가 주도하는 고구려의 일원으로 편제되었음을 반영한다. 본서 고구려본기에서는 이후 비류부(沸流部) 혹은 비류나부(沸流那部)라 일컫는 부(部) 집단이 나오는데, 이들이 바로 비류국의 후신이다. 즉 훈 강[渾江] 유역의 소국[那國]들이 계루부 중심의 정치 공동체에 편입되어 나부(那部)가 된 구체적인 사례로(임기환, 67~76쪽; 여호규, 174~188쪽), 이후 중국 측 사료에 보이는 소노부(消奴部) 내지 연노부(涓奴部)가 바로 비류나부이다(李丙燾, 359~360쪽).
〈참고문헌〉
李丙燾, 1976,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임기환, 2004, 『고구려 정치사 연구』, 한나래
여호규, 2014, 『고구려 초기 정치사 연구』, 신서원
〈참고문헌〉
李丙燾, 1976,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임기환, 2004, 『고구려 정치사 연구』, 한나래
여호규, 2014, 『고구려 초기 정치사 연구』, 신서원
註) 054
註) 055
왕이 그 말을 분하게 여겨 … 송양이 당해낼 수 없었다 : 주몽과 송양의 대결에 대해서는 「동명왕편」에 인용된 『구삼국사』에서 보다 상세히 전하는데, 처음 송양은 사슴을 100보(步) 안에 놓고 쏘았는데 애를 먹었음에 비해, 주몽은 옥가락지를 100보 바깥에 달아매고 쏘았으나 명중하였다. 이 기록에는 그 뒤에도 주몽과 송양이 신경전을 벌였음을 전하니, 부분노 등이 비류국의 북을 훔쳐오는 데 성공하고, 썩은 나무로 궁실을 지어 고구려가 유구한 내력을 가진 나라처럼 보이게 하였다. 또한 사슴을 통하여 하늘에 요청하여 비류국을 장마로 잠기게 하여 결국 송양의 항복을 받아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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