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지가 천도를 건의하다 ( 2년 03월(음) )

21년(2) 봄 3월에 교사에 쓸 돼지가 달아나자 왕이 장생(掌牲)001001 장생(掌牲) : 제사에 쓸 희생(犧牲)을 담당하는 직책이다. 유리명왕 19년(B.C. 1) 8월에 죽은 탁리와 사비 역시 제사에 쓸 돼지를 쫓았던 것을 보면 장생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닫기 설지(薛支)002002 설지(薛支) : 유리명왕 시기의 장생으로 전한다. 본문에 나오듯 왕의 명령에 따라 달아난 제사용 돼지를 국내 지역에서 붙잡았고, 돌아와 왕에게 그곳으로의 천도를 건의하였다. 이후 행적은 알 수 없다. 본서 권2 신라본기2 벌휴이사금 7년(190) 8월조에 나오는 좌군주(左軍主) 설지와는 동명이인이다.닫기에게 명하여 이를 뒤쫓게 하였다. 〔설지가〕 국내(國內) 위나암(尉那巖)003003 국내(國內) 위나암(尉那巖) : 고구려에서 지역명으로 나타나는 ‘국내’가 오늘날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시(集安市) 집안평야(集安平野) 일대를 가리킨다고 보는 데 큰 이견은 없다. 다만 그러한 이해와 달리 고국원왕 12년(342) 2월에 나타나는 국내성은 집안평야에 위치한 집안현성(集安縣城)을 가리키나, 유리명왕 시기 기사에 나타나는 국내는 지안 일대가 아니라 다른 지역을 가리킨다고 보기도 한다(노태돈, 23~25쪽; 권순홍, 200~206쪽). 해당 논의에서는 국내가 수도를 의미하는 일반명사라고 전제한 뒤, 위나암[성]을 오녀산성에 비정하여 유리명왕 22년(3) 천도하였다는 국내를 환런[桓仁] 지역 내 오녀산성으로의 이거(移居)라고 파악하였다. 그런데 국내라는 표현은 유리명왕 시기 천도 관련 전승에서 나타난 뒤, 4세기 중엽 고국원왕 시기에 이르러 다시금 등장한다. 즉 용어 면에서 단절성이 두드러지므로 국내는 일반명사로 보기보다는 지안 지역을 가리킨다고 이해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奇庚良, 72쪽). 물론 국내가 일반명사일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고구려의 제천의례가 국동대혈(國東大穴)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 국(國)은 도읍(國都)의 의미도 지니고 있기에, 국내 역시 ‘왕도(王都)’ 내지 ‘도성 안’을 뜻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구려본기의 전거 자료가 특정 시기에 편찬된 사서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기사들도 ‘국내’가 도성이라는 특정 지명으로 사용되고 있을 때 만들어진 문헌에서 유래하였을 것이기에 현 지안 일대 외에 다른 지역을 상정하기 어렵다(임기환, 20~21쪽).
한편 국내에 이어 연달아 나오는 위나암의 경우, 유리명왕 22년(3) 10월 ‘위나암성’ 주석에서 서술하였듯이 환런의 오녀산성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국내 위나암’이라는 표현은 지역을 달리하는 지명이 합쳐져 기술된 셈이다. 실제 국내 즉 지안 지역으로 천도한 것은 유리명왕 시기보다 후대의 일로 생각된다. 그런데 훗날 사료를 정리하면서 국내 천도가 유리명왕 시기의 사건으로 조정되고, 그 결과 본디 환런 지역에 소재하였던 위나암[성] 역시 자연스럽게 국내 지역에 있었다고 믿어지기에 이르렀다고 추정된다(강진원, 18~25쪽).
 〈참고문헌〉
노태돈, 2012, 「고구려 초기의 천도에 관한 약간의 논의」, 『韓國古代史硏究』 68
권순홍, 2015, 「고구려 초기의 都城과 改都-태조왕대의 왕실교체를 중심으로-」, 『韓國古代史硏究』 78
奇庚良, 2017, 「高句麗 王都 硏究」,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임기환, 2018, 「고구려 전기 都城 관련 기사의 재검토-기사의 原典 계통을 중심으로-」, 『역사문화연구』 65
강진원, 2020, 「고구려 졸본도읍기 王城의 추이와 전승의 정비」, 『史林』 73
닫기
에 이르러 찾아내어 국내 사람의 집에 가두어 기르게 하고는 돌아와 왕을 뵙고 말하기를, “신이 돼지를 쫓아 국내 위나암에 이르렀는데, 그 산수가 깊고 험하며 땅이 오곡을 키우기에 알맞고, 또 큰 사슴·사슴·물고기·자라가 많이 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왕께서 만약 도읍을 옮기시면 백성의 이익이 무궁할 뿐 아니라, 전쟁[兵革]의 걱정도 면할 만합니다.”라고 하였다.

註 001
장생(掌牲) : 제사에 쓸 희생(犧牲)을 담당하는 직책이다. 유리명왕 19년(B.C. 1) 8월에 죽은 탁리와 사비 역시 제사에 쓸 돼지를 쫓았던 것을 보면 장생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註 002
설지(薛支) : 유리명왕 시기의 장생으로 전한다. 본문에 나오듯 왕의 명령에 따라 달아난 제사용 돼지를 국내 지역에서 붙잡았고, 돌아와 왕에게 그곳으로의 천도를 건의하였다. 이후 행적은 알 수 없다. 본서 권2 신라본기2 벌휴이사금 7년(190) 8월조에 나오는 좌군주(左軍主) 설지와는 동명이인이다.
註 003
국내(國內) 위나암(尉那巖) : 고구려에서 지역명으로 나타나는 ‘국내’가 오늘날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시(集安市) 집안평야(集安平野) 일대를 가리킨다고 보는 데 큰 이견은 없다. 다만 그러한 이해와 달리 고국원왕 12년(342) 2월에 나타나는 국내성은 집안평야에 위치한 집안현성(集安縣城)을 가리키나, 유리명왕 시기 기사에 나타나는 국내는 지안 일대가 아니라 다른 지역을 가리킨다고 보기도 한다(노태돈, 23~25쪽; 권순홍, 200~206쪽). 해당 논의에서는 국내가 수도를 의미하는 일반명사라고 전제한 뒤, 위나암[성]을 오녀산성에 비정하여 유리명왕 22년(3) 천도하였다는 국내를 환런[桓仁] 지역 내 오녀산성으로의 이거(移居)라고 파악하였다. 그런데 국내라는 표현은 유리명왕 시기 천도 관련 전승에서 나타난 뒤, 4세기 중엽 고국원왕 시기에 이르러 다시금 등장한다. 즉 용어 면에서 단절성이 두드러지므로 국내는 일반명사로 보기보다는 지안 지역을 가리킨다고 이해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奇庚良, 72쪽). 물론 국내가 일반명사일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고구려의 제천의례가 국동대혈(國東大穴)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 국(國)은 도읍(國都)의 의미도 지니고 있기에, 국내 역시 ‘왕도(王都)’ 내지 ‘도성 안’을 뜻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구려본기의 전거 자료가 특정 시기에 편찬된 사서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기사들도 ‘국내’가 도성이라는 특정 지명으로 사용되고 있을 때 만들어진 문헌에서 유래하였을 것이기에 현 지안 일대 외에 다른 지역을 상정하기 어렵다(임기환, 20~21쪽).
한편 국내에 이어 연달아 나오는 위나암의 경우, 유리명왕 22년(3) 10월 ‘위나암성’ 주석에서 서술하였듯이 환런의 오녀산성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국내 위나암’이라는 표현은 지역을 달리하는 지명이 합쳐져 기술된 셈이다. 실제 국내 즉 지안 지역으로 천도한 것은 유리명왕 시기보다 후대의 일로 생각된다. 그런데 훗날 사료를 정리하면서 국내 천도가 유리명왕 시기의 사건으로 조정되고, 그 결과 본디 환런 지역에 소재하였던 위나암[성] 역시 자연스럽게 국내 지역에 있었다고 믿어지기에 이르렀다고 추정된다(강진원, 18~25쪽).
 〈참고문헌〉
노태돈, 2012, 「고구려 초기의 천도에 관한 약간의 논의」, 『韓國古代史硏究』 68
권순홍, 2015, 「고구려 초기의 都城과 改都-태조왕대의 왕실교체를 중심으로-」, 『韓國古代史硏究』 78
奇庚良, 2017, 「高句麗 王都 硏究」,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임기환, 2018, 「고구려 전기 都城 관련 기사의 재검토-기사의 原典 계통을 중심으로-」, 『역사문화연구』 65
강진원, 2020, 「고구려 졸본도읍기 王城의 추이와 전승의 정비」, 『史林』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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