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위년(392)〕註 001001 즉위년(392) : 광개토왕 재위기간의 기사는 「광개토왕릉비」에 의거하여 일반적으로 연도를 1년 조정한다. 다만 이 경우 다른 나라와 관련된 대외관계 기사에서 연도가 일치하지 않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에 광개토왕의 즉위년이 391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본서의 백제본기나 신라본기, 중국측 사서 등에 나오는 기사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기년을 조정하지 않고 연대를 표기하였다.닫기 가을 7월에 남쪽으로 백제를 쳐서 10개 성(城)을 빼앗았다.註 002002 남쪽으로 …… 빼앗았다 : 같은 내용의 기사가 본서 권25 진사왕 8년 7월조에도 보인다. 백제본기에는 고구려가 공취한 성곽의 이름[石峴城]이 나오는 등 내용이 훨씬 상세하다는 점에서 백제측 사료가 원전일 가능성이 높다(이강래, 87-91쪽; 임기환, 41-42쪽; 정호섭, 41-42쪽; 전덕재, 250-252쪽). 〈참고문헌〉 이강래, 1996, 『三國史記典據論』, 민족사 전덕재, 2018, 『삼국사기 본기의 원전과 편찬』, 주류성 임기환, 2006, 「고구려본기 전거 자료의 계통과 성격」, 『韓國古代史硏究』 42 정호섭, 2011,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4-5세기의 기록에 대한 검토」, 『신라문화』 38닫기
즉위년(392) : 광개토왕 재위기간의 기사는 「광개토왕릉비」에 의거하여 일반적으로 연도를 1년 조정한다. 다만 이 경우 다른 나라와 관련된 대외관계 기사에서 연도가 일치하지 않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에 광개토왕의 즉위년이 391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본서의 백제본기나 신라본기, 중국측 사서 등에 나오는 기사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기년을 조정하지 않고 연대를 표기하였다.
남쪽으로 …… 빼앗았다 : 같은 내용의 기사가 본서 권25 진사왕 8년 7월조에도 보인다. 백제본기에는 고구려가 공취한 성곽의 이름[石峴城]이 나오는 등 내용이 훨씬 상세하다는 점에서 백제측 사료가 원전일 가능성이 높다(이강래, 87-91쪽; 임기환, 41-42쪽; 정호섭, 41-42쪽; 전덕재, 250-252쪽). 〈참고문헌〉 이강래, 1996, 『三國史記典據論』, 민족사 전덕재, 2018, 『삼국사기 본기의 원전과 편찬』, 주류성 임기환, 2006, 「고구려본기 전거 자료의 계통과 성격」, 『韓國古代史硏究』 42 정호섭, 2011,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4-5세기의 기록에 대한 검토」, 『신라문화』 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