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관미성을 빼앗다 ( 392년 10월(음) )

〔즉위년(392)〕 겨울 10월에 백제의 관미성(關彌城)001001 관미성(關彌城) : 광개토왕이 공취한 백제 성곽인데, 「광개토왕릉비」 영락6년(396)조에는 각미성(閣彌城)으로 나온다(이병도, 379쪽; 武田幸男, 171쪽). 이 기사에서 보듯이 “4면이 가파른 절벽이며 해수(海水)로 둘러싸인” 전략적 요충지로 지형상 해안이나 섬에 위치하였다고 추정된다. 이에 종래 예성강 하구(酒井改藏, 51쪽; 박시형, 174-176쪽; 손영종, 1986, 26쪽; 이도학, 1990: 2006, 361-362쪽; 서영일, 52-53쪽), 개풍 백마산고성(손영종, 1990, 297쪽; 문안식, 178쪽), 강화도의 교동도(이병도, 379쪽; 공석구, 213쪽)나 하음산성(윤명철, 174쪽), 임진강~한강 하구의 오두산성(김정호, 『大東地志』 권3 交河 城池조; 津田左右吉, 70-71쪽; 佐伯有淸, 68쪽; 김윤우, 234-240쪽; 윤일녕, 126-131쪽) 등으로 비정하였다. 다만 본서 권25 백제본기3 진사왕 3년(387)조에 관미령(關彌嶺)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섬보다는 육지와 이어진 해안가로 비정된다. 또한 고구려가 이해 7월에 석현성(石峴城)을 점령한 다음 관미성을 공취하였는데, 석현성은 파주군 파평면 일대로 비정되므로 관미성도 임진강 유역일 가능성이 높다. 이에 관미성의 ‘관(關)’은 교하군(交河郡)의 본래 지명인 어을매곶의 ‘어을(於乙)’에 상응하는 훈차(訓借) 표기로 임진강과 한강이 교차하는 모습을 뜻하며, ‘미(彌)’는 ‘매(買)’에 상응하는 음차(音借) 표기로 강을 뜻한다고 보아 신라 교하군(고구려의 어을매곶)에 속한 임진강~한강 하구의 오두산성설을 보완하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하였다(여호규, 182-186쪽).
〈참고문헌〉
이병도, 1976, 『韓國古代史硏究』, 박영사
윤명철, 2003, 『고구려 해양사 연구』, 사계절
문안식, 2006, 『백제의 흥망과 전쟁』, 혜안
이도학, 2006, 『고구려 광개토왕릉비문 연구』, 서경문화사
박시형, 1966, 『광개토왕릉비』, 사회과학원출판사
손영종, 1990, 『고구려사』 (1),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津田左右吉, 1913, 『朝鮮歷史地理』 제1권, 南滿洲鉄道株式会社
佐伯有淸, 1977, 『廣開土王碑と七支刀』, 吉川弘文館
武田幸男, 1989, 『高句麗史と東アジア-「廣開土王碑」硏究序說-』, 岩波書店
尹日寧, 1990, 「關彌城位置考: 廣開土王碑文·三國史記·大東地志를 바탕으로」, 『북악사론』 2
이도학, 1990, 「백제 관미성에 관한 일고」, 『가야통신』 19·20합집
김윤우, 1995, 「광개토왕의 南下征服地에 대한 一考」, 『고구려 남진경영사 연구』, 백산자료원
서영일, 2006, 「고구려의 백제공격로 고찰」, 『史學志』 38
여호규, 2012, 「4세기 후반~5세기 초엽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 변천」, 『역사와 현실』 84
손영종, 1986, 「광개토왕릉비를 통하여본 고구려의 영역」, 『력사과학』 1986-2
酒井改藏, 1955, 「好太王碑面の地名について」, 『朝鮮学報』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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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그 성은 사면이 가파른 절벽이며 바닷물로 둘러싸여 있다. 왕이 군대를 일곱 길로 나누어 20일을 공격하여 빼앗았다.002002 백제의 관미성을 …… 빼앗았다 : 같은 내용의 기사가 본서 권25 진사왕 8년 10월조에도 보인다. 광개토왕대 기사는 일반적으로 고구려본기보다 백제본기가 더 상세하다. 이에 백제측 사료가 이 기사의 원전이라는 견해도 있지만(이강래, 87-91쪽; 임기환, 42쪽; 전덕재, 250-253쪽), 이 기사만큼은 고구려본기가 보다 상세하다. 이러한 점에서 본서 찬자가 해당국인 고구려 기사를 의도적으로 자세하게 서술하였거나(임기환, 41-42쪽) 고구려측 사료가 원전이었을(정호섭, 39-40쪽) 가능성도 있다.
〈참고문헌〉
이강래, 1996, 『三國史記典據論』, 민족사
전덕재, 2018, 『삼국사기 본기의 원전과 편찬』, 주류성
임기환, 2006, 「고구려본기 전거 자료의 계통과 성격」, 『韓國古代史硏究』 42
정호섭, 2011,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4-5세기의 기록에 대한 검토」, 『신라문화』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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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01
관미성(關彌城) : 광개토왕이 공취한 백제 성곽인데, 「광개토왕릉비」 영락6년(396)조에는 각미성(閣彌城)으로 나온다(이병도, 379쪽; 武田幸男, 171쪽). 이 기사에서 보듯이 “4면이 가파른 절벽이며 해수(海水)로 둘러싸인” 전략적 요충지로 지형상 해안이나 섬에 위치하였다고 추정된다. 이에 종래 예성강 하구(酒井改藏, 51쪽; 박시형, 174-176쪽; 손영종, 1986, 26쪽; 이도학, 1990: 2006, 361-362쪽; 서영일, 52-53쪽), 개풍 백마산고성(손영종, 1990, 297쪽; 문안식, 178쪽), 강화도의 교동도(이병도, 379쪽; 공석구, 213쪽)나 하음산성(윤명철, 174쪽), 임진강~한강 하구의 오두산성(김정호, 『大東地志』 권3 交河 城池조; 津田左右吉, 70-71쪽; 佐伯有淸, 68쪽; 김윤우, 234-240쪽; 윤일녕, 126-131쪽) 등으로 비정하였다. 다만 본서 권25 백제본기3 진사왕 3년(387)조에 관미령(關彌嶺)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섬보다는 육지와 이어진 해안가로 비정된다. 또한 고구려가 이해 7월에 석현성(石峴城)을 점령한 다음 관미성을 공취하였는데, 석현성은 파주군 파평면 일대로 비정되므로 관미성도 임진강 유역일 가능성이 높다. 이에 관미성의 ‘관(關)’은 교하군(交河郡)의 본래 지명인 어을매곶의 ‘어을(於乙)’에 상응하는 훈차(訓借) 표기로 임진강과 한강이 교차하는 모습을 뜻하며, ‘미(彌)’는 ‘매(買)’에 상응하는 음차(音借) 표기로 강을 뜻한다고 보아 신라 교하군(고구려의 어을매곶)에 속한 임진강~한강 하구의 오두산성설을 보완하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하였다(여호규, 182-186쪽).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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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형, 1966, 『광개토왕릉비』, 사회과학원출판사
손영종, 1990, 『고구려사』 (1),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津田左右吉, 1913, 『朝鮮歷史地理』 제1권, 南滿洲鉄道株式会社
佐伯有淸, 1977, 『廣開土王碑と七支刀』, 吉川弘文館
武田幸男, 1989, 『高句麗史と東アジア-「廣開土王碑」硏究序說-』, 岩波書店
尹日寧, 1990, 「關彌城位置考: 廣開土王碑文·三國史記·大東地志를 바탕으로」, 『북악사론』 2
이도학, 1990, 「백제 관미성에 관한 일고」, 『가야통신』 19·20합집
김윤우, 1995, 「광개토왕의 南下征服地에 대한 一考」, 『고구려 남진경영사 연구』, 백산자료원
서영일, 2006, 「고구려의 백제공격로 고찰」, 『史學志』 38
여호규, 2012, 「4세기 후반~5세기 초엽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 변천」, 『역사와 현실』 84
손영종, 1986, 「광개토왕릉비를 통하여본 고구려의 영역」, 『력사과학』 1986-2
酒井改藏, 1955, 「好太王碑面の地名について」, 『朝鮮学報』 8
註 002
백제의 관미성을 …… 빼앗았다 : 같은 내용의 기사가 본서 권25 진사왕 8년 10월조에도 보인다. 광개토왕대 기사는 일반적으로 고구려본기보다 백제본기가 더 상세하다. 이에 백제측 사료가 이 기사의 원전이라는 견해도 있지만(이강래, 87-91쪽; 임기환, 42쪽; 전덕재, 250-253쪽), 이 기사만큼은 고구려본기가 보다 상세하다. 이러한 점에서 본서 찬자가 해당국인 고구려 기사를 의도적으로 자세하게 서술하였거나(임기환, 41-42쪽) 고구려측 사료가 원전이었을(정호섭, 39-40쪽) 가능성도 있다.
〈참고문헌〉
이강래, 1996, 『三國史記典據論』, 민족사
전덕재, 2018, 『삼국사기 본기의 원전과 편찬』, 주류성
임기환, 2006, 「고구려본기 전거 자료의 계통과 성격」, 『韓國古代史硏究』 42
정호섭, 2011,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4-5세기의 기록에 대한 검토」, 『신라문화』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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