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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수에서 승리하고 수의 군대가 철군하다 ( 612년 07월 )
〔23년(612)〕 가을 7월에 〔수의〕 살수(薩水)에 이르러 군대가 반쯤 건너자 아군이 뒤에서 그 후군(後軍)을 공격하였는데, 우둔위장군(右屯衛將軍) 신세웅(辛世雄)이 전사하였다. 이 때 여러 군대가 함께 무너져 걷잡을 수 없게 되어 장수와 사졸이 달아나 돌아갔는데, 하루 낮 하룻밤만에 압록수(鴨渌水)에 이르렀으니, 행군한 것이 450리였다. 장군 천수(天水) 사람 왕인공(王仁恭)註 001이 후군[殿]이 되어 아군을 공격하여 물리쳤다. 내호아(來護兒)는 〔우문〕술 등이 패하였다는 것을 듣고 역시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으며, 위문승(衛文昇) 1군만이 홀로 온전하였다. 처음에 아홉 개의 군이 요(遼)에 이르렀으니 모두 305,000명이었는데, 요동성(遼東城)으로 돌아온 이는 오직 2,700명註 002이었다. 셀 수 없이 많은 군수와 기계는 잃어버려 완전히 없어졌다. 황제가 대노하여 〔우문〕술 등을 쇠사슬로 묶고 계묘일에 〔군대를〕 이끌고 돌아갔다. 애초에 백제왕 장(璋)註 003이 〔수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토벌할 것을 청하였다. 황제는 그들에게 우리의 동정을 엿보게 하였는데, 장은 우리와 몰래 내통하였다. 수의 군대가 출병하려 하자, 장은 그 신하 국지모(國智牟)註 004를 보내 수(隋)에 들어가 출병시기를 청하였다.註 005 황제는 크게 기뻐하고 후하게 상을 내리며, 상서기부랑(尙書起部郞)註 006 석률(席律)註 007을 보내 백제로 가서 시일과 모일 날짜를 알려주었다. 수의 군대가 요(遼)를 건너자 백제도 국경 근처에서 군대를 엄하게 하였는데, 말로는 수를 돕는다고 하였지만 실제로는 두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수는〕 이 전쟁에서 오직 요수(遼水) 서쪽의 우리 무려라(武厲邏)註 008를 함락시키고, 요동군(遼東郡)註 009과 통정진(通定鎭)註 010을 설치하였을 뿐이었다.註 011
註) 001
왕인공(王仁恭) : 자(字)는 원실(元實)이다. 양소(楊素)를 따라 돌궐을 토벌하였고, 촉왕(蜀王) 양수(楊秀)의 명으로 산료(山獠)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수(隋) 양제(煬帝) 즉위 후에는 양소를 따라 한왕(漢王) 양량(楊諒)의 반란을 진압하는 공을 세웠다. 고구려-수 전쟁에도 참여하였는데, 612년에는 철군하는 군대의 후미를 맡아 고구려군을 격파하여 안정적인 퇴로를 마련하였다. 613년에는 군장(軍將)으로서 부여도군(扶餘道軍)을 이끌고 고구려의 신성(新城)을 공격하였는데, 조카인 왕중백(王仲伯)이 양현감(楊玄感)의 반란에 참여함에 따라 면직되었다(『수서』 권65 열전 30 왕인공). 이후에는 마읍태수(馬邑太守)로 임명되어 돌궐의 시필가한(始畢可汗)의 침입을 막고, 정양(定襄)으로 침입한 돌궐군을 격퇴하였다. 왕인공은 말년에 뇌물을 받고 백성을 구휼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617년 반란을 일으킨 자신 휘하의 교위(校尉) 유무주(劉武周)에게 살해당했다.바로가기
註) 003
장(璋) : 백제 무왕(武王)의 이름이다. 무왕은 백제 30대 왕으로 600~640년에 재위하였다. 본서 권27 백제본기5 무왕 즉위년조(600) 참조바로가기
註) 004
국지모(國智牟) : 백제 무왕(武王)대의 인물. 성씨가 대성팔족(大姓八族) 가운데 하나인 ‘국(國)’인 것으로 보아 귀족 출신임을 알 수 있다. 611년 2월 수(隋)의 사신으로 파견되어 고구려-수 전쟁 발발시 백제의 출병시기를 청하였고, 이에 수 양제로부터 후한 상을 받았다.바로가기
註) 005
수의 군대가 출병하려 하자 …… 수에 들어가 출병시기를 청하였다 : 본서 권27 백제본기5 무왕 12년(611) 2월조, 『수서』 권81 열전46 동이 백제, 『북사』 권94 열전82 사이상 백제에 따르면 백제가 수에 사신을 보내 출병 시기를 청한 시기는 611년 2월이다.바로가기
註) 006
상서기부랑(尙書起部郞) : 기부(起部)는 남북조(南北朝)시기부터 나오는 부서명으로, 수(隋) 건국 초기인 582년에 ‘공부(工部)’로 개칭되었다가 수(隋) 양제(煬帝)대인 607년에 회귀되었다. 기부랑은 남북조시기의 ‘기부시랑(起部侍郞)으로, 수 건국 초기에 ‘공부시랑(工部侍郎)’으로 개칭되었다가 수 양제대에 회귀할 때 ‘시(侍)’가 빠지면서 그 관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수리·토목 등 전국의 각종 공사[百工], 둔전(屯田), 산림(山林) 및 천택(川澤)과 관련한 정령(政令)을 관장하였다(김택민 주편, 2005, 『譯註 唐六典』 (上), 신서원, 635-638쪽).바로가기
註) 007
석률(席律) : 중국 수(隋) 양제(煬帝)대에 활동하였던 인물. 당시 상서기부랑(尙書起部郞)을 맡았다. 백제의 사신으로 파견되어 고구려-수 전쟁 발발시 백제의 출병시기를 논의하였다.바로가기
註) 008
무려라(武厲邏) : 고구려와 수(隋)의 경계였던 요수(遼水), 즉 랴오허[遼河] 서쪽에 위치한 고구려의 ‘라(邏)’이다. 라에 대해서 『자치통감』의 주(註)를 작성한 호삼성(胡三省)은 당시 요수의 도하를 경계·감찰하던 시설물로 보았는데, 요서(遼西) 일부를 조망·감시하는 역할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이정빈, 23쪽). 무려라의 위치에 대해 이우뤼산[醫巫閭山] 일대로 비정하기도 하나(전준현, 194쪽), 대체로 612년 고구려-수 전쟁 후 수가 설치한 요동군(遼東郡) 및 통정진(通定鎭)과 같은 지역에 있었다고 보면서 신민시[新民市] 일대로 비정하고 있는데(이병도, 358쪽; 이성제, 6쪽; 이정빈, 19-20쪽), 구체적으로는 요빈탑(遼濱塔) 부근(宋井等, 387-388쪽; 金毓黻, 483쪽), 고대산(高臺山) 유적(孫進己·馮永謙, 209쪽; 王綿厚, 1986, 80~81쪽), 공주둔(公主屯) 후산(後山) 유적(王綿厚, 1994, 48쪽), 거류하촌(巨流河村) 동산강(東山崗) 고려성자(高麗城子, 馮永謙, 8-10쪽) 등이 지목되었다.
〈참고문헌〉
여호규, 1999, 『高句麗 城』 Ⅱ, 國防軍史硏究所
金毓黻, 동북아역사재단 역, 2007, 『東北通史』 下, 동북아역사재단
이병도, 2012, 『(두계이병도전집 11) 국역 삼국사기』, 한국학술정보
이정빈, 2018, 『고구려-수 전쟁: 변경 요서에서 시작된 동아시아 大戰』, 주류성
孫進己·馮永謙, 1989, 『東北曆史地理』 2, 黑龍江人民出版社
이성제, 2013, 「高句麗의 西部 國境線과 武厲邏」, 『大丘史學』 113
宋井等, 1913, 「隋唐二朝高句麗遠征の地理」, 『朝鮮歷史地理』 제1권, 南滿洲鉄道株式會社
王綿厚, 1986, 「唐“營州至安東”陸軍交通地理考實」, 『遼海文物學刊』 1986-1
王綿厚, 1994, 「鴨綠江右岸高句麗山城綜合硏究」, 『遼海文物學刊』 1994-2
趙曉剛·沈彤林, 2007, 「隋遼東郡及通定鎮考略」, 『沈陽考古文集』 1, 科學出版社
馮永謙, 2012, 「武厲邏新考」 (上), 『東北史地』 2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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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09
요동군(遼東郡) : 612년 고구려-수 전쟁 당시 수가 차지한 지역에 설치한 군(郡)이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대체로 수가 고구려로부터 빼앗은 무려라(武厲邏) 그리고 무려라에 설치한 통정진(通定鎭)과 같은 지역에 있었다고 보면서 랴오닝성[遼寧省] 신민시[新民市] 일대로 비정하고 있다(宋井等, 387-388쪽; 金毓黻, 461쪽; 이병도, 358쪽). 반면 후연(後燕) 이래 요서(遼西)에 교치(僑置)된 요동군이 양평현(襄平縣) 구성(舊城)에 설치되었다고 보면서 랴오닝성[遼寧省] 푸신시[阜新市] 일대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趙曉剛·沈彤林). 요동군은 전시(戰時)에 설치되었다는 점에서 여타의 군현(郡縣)과 동일한 체제를 구비하면서 운용되었다고 보기 어렵고, 명목상 관할 구역이 설정되어 있는 서류상의 군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이정빈, 24쪽).
〈참고문헌〉
金毓黻, 동북아역사재단 역, 2007, 『東北通史』 下, 동북아역사재단
이병도, 2012, 『(두계이병도전집 11) 국역 삼국사기』, 한국학술정보
이정빈, 2018, 『고구려-수 전쟁: 변경 요서에서 시작된 동아시아 大戰』, 주류성
宋井等, 1913, 「隋唐二朝高句麗遠征の地理」, 『朝鮮歷史地理』 제1권, 南滿洲鉄道株式會社
趙曉剛·沈彤林, 2007, 「隋遼東郡及通定鎮考略」, 『沈陽考古文集』 1, 科學出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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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10
통정진(通定鎭) : 612년 고구려-수 전쟁 때 수가 고구려의 무려라(武厲邏)를 차지하고 설치한 요동군(遼東郡)의 치소로 추정된다(이병도, 358쪽). 그 위치에 대해서는 대체로 645년 고구려-당 전쟁 때 이세적(李世勣)이 통정진에서 랴오허[遼河]를 건너 현도성(玄菟道, 랴오닝성[遼寧省]) 선양[瀋陽] 혹은 푸순[撫順])으로 진군하였다는 기록을 감안하여 랴오닝성[遼寧省] 신민[新民] 일대로 비정하고 있다(宋井等, 387-388쪽 ; 孫進己·馮永謙, 209쪽; 여호규, 239쪽; 金毓黻, 483쪽; 趙曉剛·沈彤林; 이병도, 358쪽; 鄭求福·盧重國·申東河·金泰植·權悳永, 551쪽; 이정빈, 19-20쪽).
〈참고문헌〉
여호규, 1999, 『高句麗 城』 Ⅱ, 國防軍史硏究所
金毓黻, 동북아역사재단 역, 2007, 『東北通史』 下, 동북아역사재단
이병도, 2012, 『(두계이병도전집 11) 국역 삼국사기』, 한국학술정보
鄭求福·盧重國·申東河·金泰植·權悳永, 2014,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이정빈, 2018, 『고구려-수 전쟁: 변경 요서에서 시작된 동아시아 大戰』, 주류성
孫進己·馮永謙, 1989, 『東北曆史地理』 2, 黑龍江人民出版社
宋井等, 1913, 「隋唐二朝高句麗遠征の地理」, 『朝鮮歷史地理』 제1권, 南滿洲鉄道株式會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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馮永謙, 2012, 「武厲邏新考」 (上), 『東北史地』 2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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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http://db.history.go.kr/id/sa_001_0030_0020 (accessed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http://db.history.go.kr/id/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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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sa_001_0030_0020,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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