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백제가 건국되고 온조왕이 즉위하다 ( 기원전 18년 )
백제(百濟)註 001의 시조 온조왕(溫祚王)註 002은 그 아버지가 추모(鄒牟)註 003인데 혹은 주몽(朱蒙)이라고도 한다. 〔주몽은〕 북부여(北扶餘)註 004에서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卒本扶餘)註 005에 이르렀다. 부여왕은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 있었는데, 주몽을 보고는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둘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註 006 얼마 지나지 않아 부여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주몽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은 비류(沸流), 둘째 아들은 온조(溫祚)라고 하였다.註 007 혹은 주몽이 졸본에 이르러서 월군(越郡)註 008의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여 두 아들을 낳았다고도 한다.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이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오간(烏干)·마려(馬黎) 등 10명의 신하註 009와 더불어 남쪽으로 갔는데 백성들이 따르는 자가 많았다. 〔그들은〕 드디어 한산(漢山)註 010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註 011에 올라가 살 만한 곳을 바라보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살고자 하니 10명의 신하가 간언하기를, “생각건대 이곳 강 남쪽의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漢水)註 012를 띠처럼 두르고 있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을 의지하였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벌판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혀 있습니다. 이렇게 하늘이 내려 준 험준함과 지세의 이점은 얻기 어려운 형세이니, 이곳에 도읍을 세우는 것이 〔또한〕 좋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러나〕 비류는 듣지 않고 그 백성들을 나누어 미추홀(彌鄒忽)註 013로 돌아가 살았다. 온조는 강 남쪽의 위례성(慰禮城)註 014에 도읍을 정하고, 10명의 신하를 보좌로 삼아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註 015라 하였다. 이때가 전한(前漢)註 016 성제(成帝)註 017 홍가(鴻嘉)註 018 3년(B.C.18)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 수가 없었다. 위례성으로 돌아와서 보니, 도읍은 안정되고 백성들은 편안하고 태평하므로 마침내 부끄러워하고 후회하다가 죽었다. 그의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위례에 귀부(歸附)하였다.註 019 그 후 올 때 백성(百姓)들이 즐거이 따랐다고 하여 국호를 백제(百濟)로 고쳤다. 그 계통은 고구려(高句麗)註 020와 더불어 부여(扶餘)註 021에서 함께 나왔기 때문에註 022 부여를 씨(氏)로 삼았다.註 023
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시조 비류왕(沸流王)註 024은 그 아버지가 우태(優台)註 025이니 북부여왕(北扶餘王) `해부루(解扶婁)註 026의 서손(庶孫)이다. 어머니는 소서노(召西奴)註 027이니 졸본(卒本) 사람 연타발(延陀勃)註 028의 딸이다. 〔소서노가〕 처음 우태에게 시집가서 두 아들을 낳았으니, 맏이는 비류라 하고, 둘째는 온조라 하였다. 우태가 죽자 졸본에서 과부로 지냈다. 그 후 주몽이 부여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자 전한(前漢) 건소(建昭)註 029 2년(B.C. 37) 봄 2월에 남쪽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高句麗)라고 하였으며, 소서노를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나라의 기틀을 다지고 왕업을 세우는 데 자못 내조가 있었기 때문에 주몽은 소서노를 총애하고 대접하는 것이 특히 후하였고, 비류 등을 자기 자식처럼 대하였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禮氏)註 030에게서 낳은 아들 유류(孺留)註 031가 오자 그를 태자로 삼았고, 왕위를 잇기에 이르렀다. 이에 비류가 동생 온조에게 말하기를, ‘처음 대왕께서 부여의 난을 피해서 이곳으로 도망하여 왔을 때, 우리 어머니가 가산을 쏟아 나라의 위업을 세우는 것을 도와 애쓰고 노력함이 많았다. 〔그런데〕 대왕께서 돌아가시자, 나라가 유류에게 돌아가게 되었으니 우리가 공연히 여기에 있으면서 쓸모없는 사람같이 답답하고 우울하게 지내는 것보다는, 차라리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살만한 곳을 택하여 따로 나라의 도읍을 세우는 것이 낫겠다.’라고 하고, 마침내 그의 동생과 함께 무리를 거느리고 패수(浿水)註 032와 대수(帶水)註 033를 건너 미추홀에 와서 살았다.” 『북사(北史)』註 034와 『수서(隋書)』註 035에는 모두 “동명(東明)註 036의 후손 중에 구태(仇台)註 037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질고 신의가 있었다. 처음에 대방(帶方)의 옛 땅註 038에서 나라를 세웠는데, 한(漢)의 요동태수 공손도(公孫度)註 039가 자기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으며,註 040 마침내 동이(東夷)註 041의 강국이 되었다”라고 하였으나,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註 042
연관콘텐츠
註) 001
백제(百濟) : 고대 삼국 중 하나로 본서 백제본기에 따르면 B.C. 18년에 성립되어 660년에 멸망하였으며, 최초의 국호는 십제(十濟)였으나, 뒤에 백제(百濟)로 바꾸었다고 한다. 백제라는 국호가 나오게 된 배경은 ‘백성들이 즐거이 따랐다[百姓樂從]’고 하여서라고 하나, 『수서(隋書)』 권81 백제전에는 “백가가 바다를 건넜다[百家濟海]”는 데서 백제라는 국호가 유래했다는 것을 전해주고 있다. 538년 성왕이 사비로 천도하면서 일시적으로 남부여(南夫餘)로 고친 적이 있다. 『제왕운기(帝王韻紀)』 권하 백제기에서는 사비로 천도한 이후의 국호를 응준(鷹準)으로도 표기하고 있다. 응준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오는 응유(鷹遊)와도 연결되는데 모두 매와 관련된 명칭이다(趙法鍾, 1989). ‘백가제해(百家濟海)’가 백제 왕실이 부여 인근에서 한반도 서남부로 이동했다는 후대의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최근의 연구도 있다(강진원, 77~78쪽).
중국 사서에서는 『삼국지(三國志)』 권30 동이전 한전의 경우 마한(馬韓)을 구성한 54 소국의 하나로 백제국(伯濟國)이 나오고, 『송서(宋書)』 권97 백제전 단계부터는 백제로 표기하고 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는 백제를 ‘구다라(クダラ)’로 훈독하고 있다.
3세기경의 상황을 전하는 『삼국지』 권30 동이전에 본서 백제본기와 달리 백제국으로 기록되어 있어 십제와 백제, 백제국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가 백제사 이해의 중요한 관건이 된다. 십제에서 백제로의 발전과정을 상정하는 견해와(盧重國, 1988) 백제국에서 백제로의 발전과정을 상정하는 견해가 있으며(권오영, 31쪽), 십제 → 백제국 → 백제로의 변화과정을 상정하기도 한다(양기석, 73~75쪽).
〈참고문헌〉
盧重國, 1988, 『百濟政治史硏究』, 一潮閣
趙法鍾, 1989, 「百濟 別稱 鷹隼考」, 『韓國史硏究』 66
권오영, 2001, 「伯濟國에서 百濟로의 전환」, 『역사와 현실』 40
양기석, 2013, 「백제, 언제 세웠나 –문헌학적 측면」, 『백제, 누가 언제 세웠나』, 한성백제박물관
강진원, 2020, 「중국 문헌 소재 백제 건국 전승의 실체와 배경 : 仇台의 사적과 國號 기원을 중심으로」, 『동서인문학』 58, 계명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바로가기
註) 002
온조왕(溫祚王) : 백제의 시조로서 재위 기간은 B.C. 18년~기원후 28년이다. 『제왕운기(帝王韻紀)』 권하 백제기에는 ‘은조(殷祚)’로 나온다. 온조의 출계에 대해서는 본서 권23 백제본기1 온조왕 즉위년조 기사 내에서도 차이가 있다. 즉위년조의 본문에서는 주몽과 졸본왕녀 사이에서 출생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세주(細注)에는 주몽과 졸본인 연타발(延陀勃) 의 딸 소서노(召西奴) 사이에서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세주에는 또 비류와 온조가 주몽과 월군(越郡) 여자 사이의 소생이라는 전승도 언급하고 있다.
중국식 왕호 외에 고유 칭호로서 지배층에서는 ‘어라하(於羅瑕)’, 일반 백성들은 ‘건길지(鞬吉支)’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주서(周書)』 권49 백제전). 건길지의 ‘건’은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나오는 백제왕의 칭호인 ‘コニキシ 코니키시’ 및 ‘コキシ 코키시’의 ‘コ 코’ 및 ‘コニ 코니’와 통하며, 우리말의 ‘큰[大]을 음사(音寫)한 것이다.
바로가기
註) 003
추모(鄒牟) :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의 다른 이름이다. 주몽(朱蒙)이라고도 하는데,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추모’라는 표기는 「지안고구려비」, 「광개토왕릉비」, 「모두루묘지」,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 등에도 나온다. 추몽(鄒蒙), 중모(中牟), 중모(仲牟), 도모(都慕) 등으로 표기되기도 하였다. 중국 측 사서를 보면 『삼국지(三國志)』 권30 동이전 고구려전에는 ‘고구려왕 추(騶)’로 기록되어 있는데, 추모를 지칭하며, 『위서(魏書)』 이후에는 ‘주몽’으로 표기하였다. 본서 권13 고구려본기1 동명성왕 즉위년(B.C. 37)조에서는 고구려 시조의 왕호를 ‘동명(東明)’으로 표기하고 이름은 주몽이라고 하였다.바로가기
註) 004
북부여(北扶餘) : B.C. 3세기 후반 무렵부터 494년까지 북만주 지역에 있었던 국가이다. 『사기(史記)』 화식열전에 따르면 부여가 진시황(B.C. 246~B.C. 210) 때 고조선과 함께 존재한 것으로 나오므로 부여는 B.C. 3세기 후반쯤 성립한 것으로 볼 수 있다(송호정, 50~51쪽). 『삼국지(三國志)』 권30 동이전 부여조에 인용된 『위략(魏略)』에는 시조 동명이 북쪽의 고리국(槀離國)에서 이주해 와서 건국한 것으로 나와 있다. 주몽의 출신지를 북부여로 기록하고 있는 것은 「광개토왕릉비」「모두루묘지」이다. 『삼국지』 권30 동이전 부여조에는 (북)부여의 위치가 서쪽으로는 오환·선비와 접하고, 동쪽으로는 읍루와 잇닿아 있으며, 남쪽으로는 고구려와 이웃하고, 서남쪽으로는 요동의 중국세력과 연결된 것으로 나온다. 부여 지역은 청동기시대에는 서단산문화(西團山文化)가 발달하였는데, 지린성[吉林省] 지린시[吉林市]의 한 지역인 서단산을 중심으로 발달한 서단산문화는 부여의 선주문화로 그 토기가 고조선의 미송리형 토기와 연결된다고 보기도 한다(노태돈, 2014, 54쪽). 부여의 중심지인 왕성의 위치는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기의 왕성에 대해서는 ① 현재 중국 지린성의 눙안[農安]·창춘[長春] 지역설, ② 지린성 하얼빈시[哈爾濱市] 아러추카[阿勒楚喀] 일대설, ③ 지린시 지역설 등이 있는데, 지린시를 중심으로 한 쑹넌[松嫩] 평원 일대로 보는 ③설이 유력하다. 동단산(東團山) 남성자고성(南城子古城)을 부여의 중심성으로 보고 지린시 교외에서 발견된 자오허시[蛟河市]의 신가고성지(新街古城址)와 복래동고성지(福來東古城址)를 그 주변의 읍락지역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자치통감(資治通鑑)』 권97 진기(晉紀)19 효종목황제(孝宗穆皇帝) 上之上에 따르면 부여는 346년 백제로 표현된 세력에 의해 서쪽으로 수도를 옮겼다. 이때의 왕성에 대해서는 ① 현재의 눙안 부근설(노태돈), ② 시펑[西豐] 산성자산성(城山子山城)설 등이 있다. 한편 『삼국유사(三國遺事)』 권1 기이편1 북부여에서는 “동명제가 북부여를 계승하여 일어나 졸본부여에 도읍을 세우고 졸본부여가 되었으니, 곧 고구려의 시조다”고 인식하고 있다. 이와 함께 『삼국유사』 권1 기이편1 동부여에는 북부여왕 해부루가 이끄는 무리 일부가 동해가 가섭원(迦葉原) 지방에 도착하여 동부여를 세웠다고 되어 있다. 부여의 출발로 북부여를 설정하고, 북부여에서 동부여와 고구려와 나온 것으로 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동부여에 대해서는 부여가 285년 모용선비의 공격을 받아 타격을 입자 그 지배집단 일부가 북옥저 방면에 피난을 하였다가 3세기 말~4세기 초에 두만강유역에서 세운 독자적 국가라는 견해도 있다(盧泰敦, 1989, 43~48쪽). 부여, 북부여, 동부여의 관계에 대해서는 동부여는 고구려를 기준으로 하여 그 동쪽에 위치한 국명을 동부여로 보고, 북부여는 길림 방면의 부여를 지칭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부여사 중심으로 해석하여 부여보다 북쪽에 있었기 때문에 북부여, 원부여의 동쪽에 있기 때문에 동부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보기도 한다(송호정, 53~64쪽). 이밖에 부여와 북부여는 동일한 정치체이고 동부여는 (기원전 1세기 초를 기점으로) 부여로부터 남하한 이주민 세력이 두만강 유역 부근의 북옥저 일대에 건국한 부여계 국가인데, 그로부터(동부여에서) 분지한 세력이 고구려를 건국하고 동부여는 부여의 세력권에서 이탈하여 점차 고구려에 복속했다는 최근의 견해도 있다(이승호, 2018).
〈참고문헌〉
盧泰敦, 1989, 「扶餘國의 境域과 그 變遷」, 『國史館論叢』 4
노태돈, 2014, 『한국고대사』, 경세원
송호정, 2015, 『처음 읽는 부여사』, 사계절
이승호, 2018, 「夫餘 政治史 硏究」,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바로가기
註) 005
졸본부여(卒本扶餘) : 부여족의 일파가 졸본 지역, 즉 현재의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환런[桓仁] 지방에 세운 나라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1 기이편1 고구려에서는 고구려를 졸본부여로 보고 있고, 안정복(安鼎福)의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도 졸본부여를 고구려의 다른 이름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본서 권234 백제본기1 온조왕 즉위년(B.C. 18)조 기사에는 주몽이 졸본부여로 도망와서 졸본부여의 왕녀와 결혼했다가, 졸본부여왕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것으로 나오기 때문에 받아들이기 어렵다. 주몽이 난을 피해 정착한 곳에 대해서는 졸본부여, 졸본천(卒本川), 졸본주(卒本州)로 나오며, 「광개토왕릉비」에는 ‘홀본서성산(忽本西城山)’으로 나온다. 졸본의 위치는 현재의 중국 랴오닝성 훈장[渾江] 상류의 환런 지방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 동북쪽에 위치한 오녀산(五女山)에는 남북길이 1000m, 동서길이 300m 규모의 고구려의 산성이 남아 있으며, 부근에 적석총 100여 기가 있었다고 하는 상고성자고분군(上古城子古墳群)이 분포하고 있어 고구려 초기의 도읍지임을 알 수 있다(孫進己·馮永謙 主編, 1989, 「唐代東北已發現的高句麗城址」, 『東北歷史地理 第2卷』, 黑龍江人民出版社).바로가기
註) 006
부여왕이 …… 둘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 본서 권13 고구려본기1 동명성왕 즉위년(B.C. 37)조의 세주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주몽이 졸본부여왕의 둘째 딸과 결혼한 후 졸본부여왕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는 것은 주몽이 북부여에서 이동해 와서 졸본지역 세력을 무력으로 정복한 것이 아니라 그 지역의 토착 세력과 공존하다가 이를 흡수했음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바로가기
註) 007
두 아들을 낳았는데 …… 둘째 아들은 온조(溫祚)라고 하였다 : 『삼국유사(三國遺事)』 권1 왕력편에는 “동명의 셋째 아들인데 혹은 둘째 아들이라고도 한다[東明第三子 一云第二子]”로 나온다. 『삼국유사』에서 제3자라고 한 것은 주몽의 전처의 소생인 유류까지를 넣어서 계산한 것이다. 온조 중심의 건국설화나 비류중심의 건국설화에서 모두 비류와 온조가 형제로 나오는데, 이는 비류를 시조로 하는 집단과 온조를 시조로 하는 집단이 연맹을 형성한 후 이 연맹 관계를 합리화하기 위해 형제설화로 만든 것으로 보기도 한다(盧重國, 1988, 『百濟政治史硏究』, 一潮閣, 62~63쪽).바로가기
註) 008
월군(越郡) : 현재의 위치는 알 수 없다. 이를 지명으로 보지 않고 ‘이웃 고을’ 또는 ‘건너편 고을’이라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바로가기
註) 009
오간(烏干)·마려(馬黎) 등 10명의 신하 : 온조를 수행하며 백제의 건국을 도왔다는 10명의 신하이다. 주몽이 북부여에서 남하할 때 동행했던 (부하) 3명 중 2명인 오이(烏伊)·마리(摩利)가 오간·마려와 동일인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권오영, 17쪽), 이들 인명을 보통명사로 보기도 한다. 10신(十臣)의 실체에 대해서는 ① 온조의 가신으로 보는 견해(李鍾旭, 67쪽), ② 온조를 따라온 10개의 친족집단으로 보는 견해(盧泰敦, 58쪽), ③ 위례지역에 선주한 10개 읍락의 토착집단으로 보는 견해(盧重國, 52~53쪽) 등이 있다. ③의 견해에서는 나중에 내려온 온조집단에 의한 십제의 건국은 선주 토착집단과의 연합이나 흡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본다.
〈참고문헌〉
盧泰敦, 1975, 「三國時代의 部에 關한 硏究」, 『韓國史論』 2, 서울大學校 國史學科
李鍾旭, 1977, 「百濟王國의 成長」, 『大丘史學』 12·13
盧重國, 1988, 『百濟政治史硏究』, 一潮閣
권오영, 1995, 「백제의 성립과 발전」, 『한국사』 6, 국사편찬위원회
바로가기
註) 010
한산(漢山) : 백제의 도읍이 오랫동안 한강유역에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대체로 동의하나, 도읍과 관련하여 나오는 지명의 구체적인 위치비정에서는 차이가 있다. 백제의 최초 도읍지를 어디로 보느냐에 따라 이 기사에 나오는 한산의 위치도 달라진다. 최초의 도읍지를 하북위례성으로 볼 경우 이 기사의 한산은 온조왕 14년(B.C.5) 정월 백제가 하남위례성으로 도읍을 옮기기 전의 기사이므로 삼각산 일대로 비정되는 부아악을 포함한 북한산 일대로 비정할 수 있다. 하남위례성으로 볼 경우 남한산에 비정된다. 그런데 본서 권24 백제본기2 근초고왕 26년(371)조에는 “한산으로 도읍을 옮겼다[移都漢山]”는 기사가 나옴에 따라, ‘이도한산(移都漢山)’이 무슨 의미인지, 또 이때의 한산의 위치는 어디인지에 대한 논란이 일어났다. 근초고왕대 한산으로의 이도에 대해서 당시 백제가 팽창하던 시기이므로 고구려와의 대결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한강 이북으로 천도했다고 보는 견해에서는(李道學, 32~33쪽; 朴淳發, 173쪽) 한산의 위치는 한강북안(북한산)이 된다. 이와 달리 고구려의 침공을 염려하여 산에 있는 성[山城]으로 천도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李丙燾, 495쪽; 成周鐸, 132쪽; 余昊奎, 11쪽). 이 경우 한산의 위치는 자연히 한강 남안이 되는데, 구체적인 위치에 대해서는 경기도 광주시에 위치한 남한산이나 하남시 춘궁리 일대, 송파구 일대로 달리 본다. 한산의 위치는 각각의 기사의 맥락 속에서 비정해야 할 필요가 있기는 하지만, 온조왕 즉위년(B.C. 18)조 기사에 보이는 한산은 북한산에 비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참고문헌〉
李丙燾, 1976,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成周鐸, 1983, 「漢江流域 百濟初期 城址硏究」, 『百濟硏究』 14
李道學, 1992, 「百濟 漢城時期의 都城制에 관한 檢討」, 『韓國上古史學報』 9
朴淳發, 2001, 『漢城百濟의 誕生』, 서경문화사
余昊奎, 2002, 「漢城時代 百濟의 都城制와 防禦體系」, 『百濟硏究』 36
바로가기
註) 011
부아악(負兒嶽) : 현재의 서울 삼각산을 지칭한다. 삼각산의 제일봉인 인수봉의 뒤편에 또 하나의 바위가 붙어 마치 아이를 업고 있는 것과 같은 형태를 하고 있기 때문에 얻은 명칭으로 생각된다.바로가기
註) 012
한수(漢水) : 한강으로도 표기된다. 현재의 한강은 남한강·북한강을 포괄하고 있어 현재의 서울지역을 통과하는 한강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한수 및 한강의 다른 이름으로 「광개토왕릉비」에는 아리수(阿利水), 본서 권25 백제본기3 개로왕 20년(474)조에는 욱리하(郁里河)가 등장한다.바로가기
註) 013
미추홀(彌鄒忽) : 현재의 인천을 말한다. 「광개토왕릉비」에 고구려가 영락 6년(396) 백제를 공격하여 빼앗은 58성 중에 미추성(彌鄒城)이 있고, 본서 권35 지리2의 한주 율진군 소성현조에 “소성현은 본래 고구려의 매소홀현인데 … 지금의 인주이다. 매소는 미추라고도 되어 있다”는 기사가 나오며, 『고려사(高麗史)』 권56 지리1 양광도 인주조에도 “인주는 본래 고구려 매소홀현으로 미추홀이라고도 한다”라고 되어 있다. 인천의 문학산에는 비류성터·성문비판·세류정이 남아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安鼎福, 『東史綱目』 第1 馬韓), 문학동에는 미추왕릉으로 불리는 유적이 전한다고 하여(鄭永鎬, 87쪽) 비류집단의 근거지로 인천 문학산성 일대가 거론되고 있다. 관교동 토성지도 관련 유적으로 거론되고 있다(서울대학교박물관, 28쪽). 미추홀=인천설의 연장선상에서 미추홀을 해안가에 인접한 한강하류유역으로 보고 문학산 일대에서 영종도에 이르는 좀 더 넓은 범위에서 찾아야 한다는 견해(정재윤, 2002)가 있으나, 인천 방면보다는 양주 북방의 파주·연천 인근지역에 비정될 여지가 많다는 견해(金起燮, 99쪽)도 제기되었다.
〈참고문헌〉
鄭永鎬, 1979, 「서울地域의 百濟文化」, 『馬韓·百濟文化』 3, 圓光大學校 馬韓·百濟文化硏究所
서울대학교박물관, 1990, 『인천-소래, 인천-시흥 고속도로 문화유적지표조사보고서』
金起燮, 1998, 「彌鄒忽의 位置에 대하여」, 『韓國古代史硏究』 13
정재윤, 2002, 「彌鄒忽의 位置에 대한 再檢討」, 『博物館誌』 4, 인하대학교 박물관
바로가기
註) 014
강 남쪽의 위례성(慰禮城) : 이곳에서는 첫 도읍지를 하남의 위례성이라 하였는데, 온조왕 13년(B.C. 6)에서는 하북에 있다가 후에 하남으로 옮긴 것으로 나온다. 처음부터 하남에 자리를 잡았다고 보는 하남위례성설(李弘稙, 321~327쪽)과 하북에서 하남으로 이동했다고 보는 설(李丙燾, 1976, 491~797쪽; 노중국, 72~73쪽)이 있다. 후자에 따른다면 이곳에 나오는 위례성은 백제가 한수 북쪽에서 한수 남쪽으로 이도(移都)한 후의 도읍지로서, 고유명사 ‘하남위례성’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위례성 명칭의 의미에 대해서는 ① ‘우리’ 또는 ‘울타리’라는 견해(丁若鏞, 「我邦疆域考-慰禮考-」, 『與猶堂全書』 6輯 3冊), ② 한강의 별칭인 아리수·욱리하의 아리·욱리가 ‘크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므로 여기에서 유래했다는 견해(都守熙, 1991), ③ 왕성 내지 대성을 뜻하며 왕을 의미하는 어라하(於羅瑕)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는 견해(李炳銑, 199쪽) 등이 있다. 한수 남쪽의 위례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그동안 많은 논의가 있었다. 본서 권37 지리4에는 위례성이 ‘삼국의 이름은 있으나 위치를 알 수 없는 지명(三國有名未詳地分)’으로 나오는데, 『삼국유사(三國遺事)』 권1 왕력편에는 “위례성에 도읍하였는데 사천(蛇川)이라고도 한다. 지금의 직산(稷山)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고려·조선시대의 학자들은 충남 천안시 직산으로 비정해왔다. 그러나 정약용은 고증학적인 방법론을 도입하여 위례성=직산설을 부정하고 한강유역설을 주장하였다. 일제강점기의 일본인 학자들은 본서 초기 기사를 부정하고 근초고왕대부터 실질적인 역사가 시작된다고 보아 위례성과 한산을 모두 남한산성에 비정하거나, 광주·남한산성 등으로 비정하였다. 해방 이후에도 하남위례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경기도 하남시 춘궁동 일대설(李丙燾, 1977, 352쪽)이 대세를 이루었다. 그러나 1970, 80년대에 들어 서울지역에 대한 고고학 발굴이 이루어지면서 한강 남쪽의 백제유적들이 주목을 받게 되었고,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하남위례성으로 지목되기도 하였다. 하남위례성을 몽촌토성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많이 나오게 된 것은 1983년 몽촌토성의 발굴이 시작되면서부터였다. 1985년 하남위례성을 몽촌토성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적극 제기되었다(崔夢龍, 1985). 그런데 1997년부터 풍납토성 내부와 성벽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성벽 내부의 제의시설 등이 확인되면서 풍납토성이 하남위례성일 가능성이 높아졌다(權五榮, 2001; 李亨求, 2001). 2011년 동성벽에 대한 발굴조사에서 성벽이 너비 43m, 높이 11m(증축시 13.3m), 둘레 3.5㎞의 거대한 토성이었고, 연 인원 1,380,000명 이상이 투입되었음이 밝혀짐에 따라(국립문화재연구소, 2014) 현재는 하남위례성의 위치에 대해 춘궁동 일대설이나 몽촌토성설보다는 풍납토성설이 주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李弘稙, 1971, 「百濟 建國說話에 대한 再檢討」, 『韓國古代史의 硏究』, 新丘文化社
李丙燾, 1976,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李丙燾, 1977, 『國譯 三國史記』, 乙酉文化社
李炳銑, 1982, 『韓國古代國名地名硏究』, 螢雪出版社
崔夢龍, 1985, 「漢城時代 百濟의 都邑地와 領域」, 『震檀學報』 60
都守熙, 1991, 「百濟의 國號에 관한 몇 問題」, 『百濟硏究』 22
權五榮, 2001, 「풍납토성 경당지구 발굴조사 성과」, 『風納土城의 發掘과 그 成果(한밭大學校 開校 第74週年記念 學術發表大會 論文集)』
李亨求, 2001, 「서울 풍납동 백제왕성의 역사적 인식」, 『風納土城의 發掘과 그 成果(한밭大學校 開校 第74週年記念 學術發表大會 論文集)』
국립문화재연구소, 2014, 『풍납토성 XVI –성벽의 축조공법 및 연대 규명을 위한 학제간 융합연구』
노중국, 2018, 『백제정치사』, 일조각
바로가기
註) 015
십제(十濟) : 백제의 국호인 ‘십제(十濟)’와 ‘백제(百濟)’의 ‘제(濟)’는 ‘건너다’는 의미가 일반적이지만, 이외에도 여러 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① 나루터를 의미하므로 십제는 10개의 포구를 장악하고 있을 무렵의 국호로 보는 견해(趙法鍾, 3~8쪽), ② 십제의 10신은 10개의 친족집단, 백가는 100개의 친족집단이므로 이주단위가 된 친족집단으로 보는 견해(盧泰敦, 58~59쪽), ③ 주변을 아우른 큰 나라로 보는 견해(李基東, 200~201쪽) 등이 있다. 백제의 건국설화에서 온조가 나라를 세울 때 10명의 신하가 보필했다고 하므로, 이들 세력 집단의 연합체적 성격으로 백제가 건국되었다는 것이 십제라는 용어 속에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盧泰敦, 1975, 「三國時代의 部에 關한 硏究」, 『韓國史論』 2, 서울大學校 國史學科
趙法鍾, 1989, 「百濟 別稱 鷹準考」, 『韓國史硏究』 66
李基東, 1996, 『百濟史硏究』, 一潮閣
바로가기
註) 016
전한(前漢) : 중국 왕조의 하나로 서한(西漢)이라고도 한다. 고조 유방(劉邦)이 장안(長安)에서 제위에 오른 후 왕망(王莽)에게 찬탈될 때까지의 한을 말한다. 존속 기간은 B.C. 202~B.C. 8년이다.바로가기
註) 017
성제(成帝) : 중국 전한(前漢)의 제11대 황제로 재위기간은 B.C. 32~B.C. 7년이다.바로가기
註) 018
홍가(鴻嘉) : 전한(前漢) 성제(成帝) 때의 연호로 B.C. 20~17년까지이다. 홍가 3년은 B.C. 18년이다.바로가기
註) 019
비류는 …… 모두 위례에 귀부(歸附)하였다 : 비류가 미추홀에 정착하고 온조가 위례에 정착하였다는 것은 이들이 각각 미추홀과 위례에서 소국을 세운 것이며, 비류와 온조가 형제로 나오는 것은 두 집단이 연맹을 형성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비류가 죽자 그를 따르던 무리들이 모두 위례에 귀부하였다는 것은 위례세력이 미추홀세력을 병합했음을 뜻한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盧重國, 1988, 『百濟政治史硏究』, 一潮閣, 62~65쪽).바로가기
註) 020
고구려(高句麗) : 고대 삼국 중 하나로 본서 고구려본기에 따르면 B.C. 37년 주몽(朱蒙)이 이끄는 부여족의 한 갈래가 압록강 지류인 퉁자장[佟佳江; 渾江] 유역에 건국하여 668년에 멸망했다고 한다. 28대 705년 간 한반도 북부와 현재 중국의 동북(東北) 지방을 무대로 국가를 영위하였다.바로가기
註) 021
부여(扶餘) : 본서 권13 고구려본기1 동명성왕 즉위년조에서 주몽이 출자한 것으로 나오는 나라이다. 이에 따르면 부여는 해부루가 왕이었을 때 중심지를 옮겨 동부여가 되었고, 이후 금와와 대소가 왕위를 이어나갔으나, 대무신왕에 의해 큰 타격을 입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멸망한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이 부여가 중국 측 문헌에 나오는, 만주 쑹화장[松花江] 유역에 있었던 부여(夫餘)와 동일한 실체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바로가기
註) 022
그 계통은 … 부여(扶餘)에서 함께 나왔기 때문에 : 백제 왕실의 출자가 부여계임을 보여주는 기사이다.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국서에서도 “신이 고구려와 더불어 근원이 부여에서 나왔기 때문에[臣與高句麗源出扶餘]”라 하였고(본서 권25 백제본기3 개로왕 18년(472)조 및 『위서(魏書)』 권100 백제전), 성왕의 아들 여창(餘昌, 위덕왕)이 고구려 장수와 대적하여 싸우기 전에 “성은 같은 성이다[姓是同姓]”(『일본서기(日本書紀)』 권19 흠명기(欽明紀) 14년(553))라 하여 백제 왕실이 고구려 왕실과 같이 부여에서 나왔음을 강조하고 있다. 본서 권23 백제본기1 온조왕 즉위년(B.C. 18)조에 나오는 온조설화에 따르면 시조 온조의 아버지가 고구려를 세운 주몽이기 때문에 직접적으로는 고구려와 연결되지만, 그 출자를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다고 한 것은 경쟁관계 속에서 같은 부여계임을 강조하여 고구려와 어깨를 나란히 하려는 의식의 소산으로 보기도 한다. 538년 성왕이 사비로 천도하면서 국호를 일시적으로 남부여로 고친 것도 부여에 기원이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바로가기
註) 023
부여를 씨(氏)로 삼았다 : 백제 왕실의 성(姓)에 대해 본 기사에서는 부여씨라고 하였다. 백제는 부여족 출신이라는 의미에서 부여(扶餘)를 왕의 성(姓)으로 삼았는데, 중국과 교섭할 때에는 ‘여(餘)’라는 단성(單姓)을 사용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중국과 조공 책봉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왕의 성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부여(夫餘)의 옛 영광을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부여(扶餘)를 왕성으로 표방했고, 중국에서는 단성을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중국과의 관계에서는 단성인 ‘여(餘)’로 축약했다는 최근의 정리(오택현, 2019)가 주목된다. 그런데 『삼국유사(三國遺事)』 권2 기이편2 남부여전백제에는 “그 세계(世系)가 고구려와 더불어 부여에서 나왔기 때문에 해(解)를 씨로 삼았다’”라는 내용이 전한다. 이에 대해 비류집단은 해씨를 칭하였고, 온조집단은 부여씨를 칭하였는데, 이 두 집단이 연맹장을 배출하였기 때문에 해씨와 부여씨가 왕성(王姓)이 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盧重國, 66~77쪽). 한편 중국 측 기록에서 부여씨가 왕의 이름으로 처음 확인되는(나오는) 것은 여구(餘句, 근초고왕)이다.
〈참고문헌〉
盧重國, 1988, 『百濟政治史硏究』, 一潮閣
오택현, 2019, 「百濟 王姓 扶餘씨의 성립과 複姓의 수용」, 『木簡과 文字』 23, 한국목간학회
바로가기
註) 024
시조 비류왕(比流王) : 백제의 건국 시조로서 온조 외에 비류, 구태(仇台), 도모(都慕), 동명(東明), 우태(優台) 등이 국내외의 사서에 전한다. 본 기사는 비류 중심의 건국설화로서, 그 조상이 해부루(解夫婁)로 나오고 있기 때문에 비류집단의 성은 해씨(解氏)로 추정된다. 본문과 달리 세주(細注)에는 비류를 시조로 하는 건국설화가 남게 된 것에 대해 처음에 비류가 인천지역에서, 온조는 한강유역에서 각각 나라를 세운 후 두 집단이 중심이 되어 연맹을 형성하고, 연맹장을 배출한 것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비류세력은 압록강유역에서 주몽집단의 계루부세력과 다투던 송양의 비류국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그 출자를 훈장[渾江] 유역의 소노부 세력과 연결시켜 볼 수 있다고 한다(盧重國, 1988, 『百濟政治史硏究』, 一潮閣, 66~77쪽).바로가기
註) 025
우태(優台) : 해부루의 서손(庶孫)으로서, 할아버지 해부루의 이름에서 미루어볼 때 성은 해씨로 추정된다. 우태의 실체에 대해서는 ① 『주서(周書)』 권49 백제전에 나오는 구태와 동일 인물로 보는 견해(千寬宇, 143쪽), ② 존장자를 의미하는 관명(官名)이 인명화(人名化)한 것으로서 고구려의 관명인 우태와 동일한 것으로 보는 견해(金哲埈, 1975) 등이 있다. 본서 권32 제사지 백제사례(百濟祀禮)조에는 『해동고기(海東古記)』를 인용하여 우태가 백제 시조라는 전승을 전하고 있다.
〈참고문헌〉
金哲埈, 1975, 「高句麗·新羅의 官階組織의 成立過程」, 『韓國古代社會硏究』, 知識産業社
千寬宇, 1976, 「三韓의 國家形成(下)」, 『韓國學報』 3, 一志社
바로가기
註) 026
해부루(解夫婁) : 동부여를 건국한 왕이다. 북부여의 국왕이었던 해부루는 천제의 계시를 받은 재상 아란불(阿蘭弗)의 권유에 의해 동해 가의 가섭원(迦葉原)으로 옮겨 동부여를 건국한 것으로 전해진다(『삼국유사(三國遺事)』 권1 기이편1 동부여). 그 출자에 대해서는 북부여의 시조로서 천제지자(天帝之子)라 자칭한 해모수(解慕漱)의 아들이라는 설과(『삼국유사』권1 북부여조), 단군과 하백녀(河伯女)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라는 설(『삼국유사』 권1 고구려조)이 있다.바로가기
註) 027
소서노(召西奴) : 비류와 온조의 어머니이다. 소서노에 대해서는 사람 이름이 아니라 압록강 중류의 지역 집단인 ‘나(那)’ 또는 ‘노(奴)’의 명칭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견해(李丙燾, 359~360쪽)와 샤먼과 관련된 솟을녀에서 유래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소서노의 역할에 대해서는 국가의 호국신이라는 설(강영경, 1982)과 신모(神母)적 존재로 보는 설(全虎兌, 1997; 김남윤, 1999)이 있다. 본서 권23 백제본기1 온조왕 13년(B.C. 6)조에는 왕의 어머니[國母]가 죽었는데 나이가 61세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참고문헌〉
李丙燾, 1976,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강영경, 1982, 「한국 고대사회의 여성 –삼국시대 여성의 사회활동과 그 지위를 중심으로-」, 『淑大史論』 11·12, 숙대사학회
全虎兌, 1997, 「韓國 古代의 女性」, 『韓國古代史硏究』 12
김남윤, 1999, 「고대사회의 여성」, 『우리 여성의 역사』, 청년사
바로가기
註) 028
연타발(延陀勃) : 졸본 지역의 수장으로 추정된다. 주몽이 도망해왔을 때 졸본부여의 왕과 동일한 존재로 보는 견해도 있다(李丙燾, 1976,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490쪽).바로가기
註) 029
건소(建昭) : 전한(前漢)의 제10대 황제인 원제(元帝)의 연호로 B.C. 38년~B.C. 34년까지이다. 건소 2년은 B.C. 37년이다.바로가기
註) 030
예씨(禮氏) :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맞이한 부인으로 고구려 제2대 왕인 유리왕을 낳았다.바로가기
註) 031
유류(孺留) : 고구려 제2대 왕이다. 주몽이 부여에서 고구려로 도망한 이후에 부여에서 태어나, 아버지를 찾아 고구려에 와서 주몽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재위 기간은 B.C. 19~18년이다. 본서에는 유리(琉璃)·유리(類利)로, 『삼국유사(三國遺事)』권1 왕력편에는 유리(琉璃)·누리(累利)로 표기되어 있다. 「광개토왕릉비」에는 ‘유류왕(儒留王)’, 『위서(魏書)』 권100 고구려전에는 ‘여달(閭達)’로 기록되어 있다.바로가기
註) 032
패수(浿水) : 패하(浿河)·패강(浿江)이라고도 하는데, 그 위치는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다. 고조선 시기의 패수에 대해서는 ① 청천강(淸川江)으로 보는 견해(李丙燾, 1976), ② 압록강(鴨綠江)으로 보는 견해(丁若鏞, 「浿水考」, 『我邦疆域考』), ③ 요서지방의 다링허[大凌河]로 보는 견해(리지린, 1963) 등이 있다. 한편 삼국시대의 패수도 여러 기록에 등장하는데, 본서 권23 백제본기1 온조왕 13년(B.C. 6)조의 영역 획정 기사에 나오는 ‘북지패하(北至浿河)’와 온조왕 38년(20)에 왕이 순무했던 북쪽의 경계로 나오는 패하에 대해서도 대동강설, 재령강설, 예성강설이 있지만 대체로 예성강설이 받아들여진다(임기환, 38쪽).
〈참고문헌〉
리지린, 1963, 『고조선연구』, 과학원출판사
李丙燾, 1976, 「眞番郡考」,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임기환, 2014, 「백제의 동북방면 진출 –문헌적 측면」, 『근초고왕때 백제 영토는 어디까지였나』, 한성백제박물관
바로가기
註) 033
대수(帶水) : 임진강으로 추정된다. 온조 집단이 고구려를 떠나 서해안 항로를 타고 남하했거나, 평안도 지역을 관통하여 (패수와 대수를 건너) 한강 유역에 정착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李丙燾, 1976,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470~471쪽).바로가기
註) 034
『북사(北史)』 : 중국 정사(正史)인 25사의 하나로 당 태종 정관(貞觀) 원년(627)~고종 현경(顯慶) 4년(659)에 이연수(李延壽)가 편찬하였다. 기전체(紀傳體)로 북위(北魏), 북제(北齊), 북주(北周), 수(隋) 등 4왕조 242년 동안의 역사를 기술하였다.바로가기
註) 035
『수서(隋書)』 : 수나라의 역사를 정리한 정사(正史)이다. 장손무기(長孫無忌)·위징(魏徵) 등이 당 태종의 명을 받아 태종 10년(636)에 완성하였다. 제기(帝紀) 5권, 열전(列傳) 50권, 지(志) 30권 등 총 85권으로 되어 있다.바로가기
註) 036
동명(東明) : 부여의 시조로도 나오고(『삼국지(三國志)』 권30 동이전 부여조), 고구려의 시조로도 나오고(본서 권13 고구려본기 동명성왕 즉위년(B.C. 37)조), 백제의 시조로도 나오는 인물이다. 동명이 부여·고구려·백제의 시조로 나오고 있는 것은 동명이 부여족의 족조(族祖)이기 때문이라고 한다(盧明鎬, 1981). 또한 『수서(隋書)』 등에 백제의 시조전승의 일부로 부여의 동명설화가 수록된 것은 백제로부터 동명에 관한 전문(傳聞)이 있었기 때문이며, 이는 백제가 스스로 동명의 후예임을 표방했음을 의미한다(林起煥, 10쪽).
〈참고문헌〉
盧明鎬, 1981, 「百濟의 東明神話와 東明廟」, 『歷史學硏究』 10, 全南大學校 史學會
林起煥, 1998, 「百濟 始祖傳承의 형성과 변천에 관한 고찰」, 『百濟硏究』 28
바로가기
註) 037
구태(仇台) : 백제의 시조로 거론되는 사람 중의 하나이다. 백제의 시조를 온조나 비류로 보는 본서 기록과는 달리, 『주서(周書)』와 『수서(隋書)』 등 중국의 역사서에는 구태라는 별도의 인물이 보인다. 구태의 실체에 대해서는 ① 본서 백제본기에 비류의 생부로 전하는 우태와 동일한 인물이라고 보는 견해(韓致奫, 『海東繹史』 권18 제례 묘제조; 千寬宇, 1976), ② ‘구이’로 읽어 고이왕과 동일한 것으로 보는 견해(李丙燾, 476쪽; 노중국, 63쪽), ③ 온조설화와 구태설화는 동일한 계통의 시조전승이므로 구태는 온조라는 견해(林起煥, 15~23쪽), ④ 『주서』 권49 백제전에 나오는 시조 구태묘는 미추홀 집단의 종묘라고 보는 견해(盧明鎬, 1981) 등이 있다. 구태는 국가적 시조이므로 ‘구태=동명’으로 보는 최근 견해(강진원, 2019)도 있다.
〈참고문헌〉
李丙燾, 1976,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千寬宇, 1976, 「三韓의 國家形成(下)」, 『韓國學報』 3, 一志社
盧明鎬, 1981, 「百濟의 東明神話와 東明廟」, 『歷史學硏究』 10, 全南大學校 史學會
林起煥, 1998, 「百濟 始祖傳承의 형성과 변천에 관한 고찰」, 『百濟硏究』 28
노중국, 2018, 『백제정치사』, 일조각
강진원, 2019, 「백제 仇台廟의 성격과 부상 배경」 『동서인문학』56, 계명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바로가기
註) 038
대방(帶方)의 옛 땅 : 대방군이 설치되었던 지역을 말한다. 대방군은 후한 말 중국의 요동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공손강(公孫康)이 204년경에 낙랑군(樂浪郡) 둔유현(屯有縣) 이남의 거친 땅에 설치한 군으로서, 현재의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역(沙里院驛) 부근의 한 고분에서 ‘帶方太守 張撫夷’라는 명문이 새겨진 전(塼)이 발견되어 사리원 지방을 그 치소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李基白·李基東, 72쪽). 그런데 대방군은 백제가 건국될 당시에는 아직 설치되지 않았기 때문에 백제가 대방고지에 나라를 세웠다는 것은 시기가 맞지 않는다. 따라서 본 기사에 나오는 ‘대방의 옛 땅’이라 한 것은 백제가 건국된 곳이 대방군의 전신인 옛 진번군의 일부분이었기 때문으로 보는 견해(李丙燾, 355쪽)도 있다. ‘대방고지’가 강조된 것은 백제를 건국한 집단이 일정 기간 낙랑·대방군과 주거나 문화적 접촉을 가졌을 개연성이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김기섭, 17쪽). 또한 대방군과 밀접한 접촉을 갖던 인접지역을 ‘대방고지’로 확대 표현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보기도 한다(김영심, 151쪽).
〈참고문헌〉
李丙燾, 1977, 『國譯 三國史記』, 乙酉文化社
李基白·李基東, 1982, 『韓國史講座 1-古代編』, 一潮閣
김기섭, 2007, 「백제의 건국시기와 주체세력」, 『先史와 古代』 27, 한국고대학회
김영심, 2013, 「백제, 누가 세웠나 –문헌학적 측면」, 『백제, 누가 언제 세웠나』, 한성백제박물관
바로가기
註) 039
공손도(公孫度) : 중국 후한말의 세력가이다. 후한말 어지러운 틈을 타 요동태수가 되어 190년에 요동군을 요서(遼西)와 중요(中遼)로 나누고 스스로 요동후(遼東侯) 평주목(平州牧)을 칭하였다. 아들인 공손강, 손자인 공손연(公孫淵) 대에 와서는 요동의 패자가 되었으나 위나라장군 사마의(司馬懿)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다(『삼국지(三國志)』 권8 공손도 열전).바로가기
註) 040
공손도(公孫度)가 자기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으며 : 『삼국지(三國志)』 권30 부여조에 “부여왕 위구태가 다시 요동을 복속시켰다. 이때 고구려와 선비가 강성하였는데, 공손도는 부여가 두 오랑캐 사이에 끼어 있다고 생각하여 종녀로 아내를 삼게 하였다[扶餘王尉仇台更屬遼東 時句麗鮮卑强 度以扶餘在二虜之間 妻以宗女]”라 한 것에서 보듯이 부여의 경우에도 보인다. 그런데 공손도는 2세기말 3세기초의 사람이기 때문에 기원 전후한 시기의 백제 시조와 생존한 시기가 다르다. 이 기사는 『북사(北史)』나 『수서(隋書)』의 편찬자가 백제의 구태를 부여의 위구태로 오인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李丙燾, 1976,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472~473쪽).바로가기
註) 041
동이(東夷) : 중국이 주로 동쪽의 이민족을 낮추어 부르던 명칭이다. 중국 정사에서 사방의 이민족을 동이,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으로 편제한 것은 『삼국지(三國志)』부터이다. 동이의 ‘이(夷)’에 대해서는 ‘〔어질고 살리기를 좋아하는〕 뿌리’에서 유래했다고 보기도 하고(『후한서(後漢書)』 권85 동이전 서(序)), 동이의 ‘이(夷)’자를 ‘대궁(大弓)’의 합자(合字)로 보아 중국인이 활을 잘 쏘는 동쪽의 종족을 동이라고 했다는 주장도 있다. ‘동이’란 특정한 종족을 지칭하기보다는 중국의 한문화(漢文化)와 상대적인 문화개념으로 호칭된 것으로 중국 중심의 사고에서 나온 표현이다. 좁은 의미의 동이는 산둥반도에서 회수(淮水) 유역에 거주하였던 우이(嵎夷)·회이(淮夷)·내이(萊夷)·서융(徐戎) 등을 가리키며, 넓은 의미의 동이는 중국 동북부지방과 한국 ·일본에 분포한 종족을 가리킨다(傅斯年, 1932, 『東北史綱』, 國立中央硏究院歷史語言硏究所).바로가기
註) 042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 백제의 시조에 대해서는 5가지의 설이 있다. ① 시조 온조설(본서 권23 백제본기1 온조왕 즉위년(B.C. 18)조 본문), ② 시조 비류설(본서 권23 백제본기1 온조왕 즉위년(B.C. 18)조 세주), ③ 시조 우태설(본서 권32 제사조), ④ 시조 구태설(『주서(周書)』 권49 백제전『수서(隋書)』 권81 백제전), ⑤ 태조 東明=都慕설(본서 권32 제사조 및 『속일본기(續日本紀)』 권40 延曆 9년(790) 가을 7월조) 등이다(李丙燾, 1976,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469~473쪽). 백제본기에서 시조 온조설과 시조 비류설 및 시조 구태설을 기록한 본서의 찬자는 본서 권32 제사 백제사례(百濟祀禮)조에서 시조 동명설을 취신하고 여타는 믿을 수 없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바로가기
주제분류
  • 정치>왕실>국왕>즉위·책봉
  • 정치>왕실>국왕>신상
  • 정치>왕실>왕족>왕자·공주·왕제·왕손
  • 정치>왕실>국왕>국명·연호
  • 사회>사회조직>신분>성씨
색인어
디지털역사자료 인용방법
닫기
1안
저자, 기사명, 자료명. URL (검색날짜)
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http://db.history.go.kr/id/sa_001_0030_0020 (accessed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http://db.history.go.kr/id/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2안
저자, 기사명, 자료명.(사이트명, URL, ID, 검색날짜)
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sa_001_0030_0020,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오류신고
닫기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십시오. 이용자의 참여가 사이트 가치 향상에 큰 도움이 됩니다.
사이트 하단의 ‘오류신고’ 메뉴를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자료명
삼국사기
자료위치
자료상세화면
자료 선택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