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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죽이다 ( 371년 )
〔26년(371)〕 겨울에 왕이 태자와 정예 군사 30,000명을 이끌고 고구려를 쳤다. 평양성(平壤城)註 001을 공격하니 고구려 왕 사유(斯由)가 힘껏 싸우며 막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註 002 왕이 군사를 이끌고 물러났다.
註) 001
평양성(平壤城) : 이때의 평양성 위치에 대해 북한에서는 황해도 재령군의 장수산성 인근이라는 견해(채희국, 47쪽; 손영종, 174~187쪽)가 주류이다. 패하를 예성강에 비정하는 입장에서 장수산성 남쪽의 도시유적에 주목한 것인데, 이곳에는 석실분 1천여기가 분포한 것으로 알려진다. 대동강 하류지역에 위치한 황주 토성리의 주거지에서 다량의 백제계 토기가 출토된 것(崔鍾澤, 1990)을 근거로 근초고왕 때 백제가 공격한 평양성을 지금의 평양시에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김기섭, 156~158쪽). 4세기 후반경의 평양성은 고구려가 6세기 말엽에 축조한 장안성(長安城; 조선시대의 평양성)과 다른 곳이며, 장안성과 대성산성 사이에 위치한 청암리토성에 비정하기도 한다.
〈참고문헌〉
채희국, 1982, 『高句麗歷史硏究』, 김일성종합대학출판사
손영종, 1990, 『고구려사 1』,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崔鍾澤, 1990, 「黃州出土百濟土器例」, 『韓國上古史學報』 4
김기섭, 2000, 『백제와 근초고왕』, 학연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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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02
고구려왕 사유(斯由)가 … 화살에 맞아 죽었다 : 같은 내용이 본서 권18 고구려본기6 고국원왕 41년(371)조에 나오는데 겨울 10월의 일이라고 전한다. 한편 본서 권25 백제본기3 개로왕 18년(472)조에는 “신의 할아버지 수(須)가 군사를 정비하여 번개같이 달려가 기회를 타서 잽싸게 공격하며 화살과 돌로 잠시 싸운 끝에 쇠(釗)의 목을 베어 달았습니다.”라고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표문이 있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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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치>군사>전쟁>전쟁결과
  • 정치>군사>전쟁>전투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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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기사명, 자료명. URL (검색날짜)
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http://db.history.go.kr/id/sa_001_0030_0020 (accessed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http://db.history.go.kr/id/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2안
저자, 기사명, 자료명.(사이트명, URL, ID, 검색날짜)
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sa_001_0030_0020,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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