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주왕이 즉위하다
(
475년
09월
)
문주왕(文周王)註 001
혹은 문주(汶州)라고 한다.은 개로왕의 아들이다.註 002 처음에 비유왕이 돌아가시고 개로가 왕위를 잇자 문주가 그를 보좌하여 지위가 상좌평註 003에 이르렀다. 개로가 재위한지 21년에 고구려가 쳐들어 와서 한성을 포위하였다. 개로가 성을 닫고 스스로 굳게 지키면서 문주를 보내 신라에 구원을 요청하게 하였다.註 004 〔문주가〕 군사 1만 명을 얻어 돌아왔다. 고구려군은 비록 물러갔으나註 005 성이 파괴되고註 006 〔개로〕왕이 죽어서註 007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註 008 〔문주왕의〕 성품은 부드럽고 결단력이 없었으나 또한 백성을 사랑하였으므로 백성들도 그를 사랑하였다.
문주왕(文周王) : 백제 제22대 왕으로서 재위 기간은 475~477년이다. 이름은 문주(文洲(본 기사의 細注; 『日本書紀』 권14 雄略紀 21년(477)) 혹은 ‘문명(文明’(『三國遺事』 권1 王曆))이라고도 한다. 『宋書』 권97 百濟傳에 보이는 ‘보국장군(輔國將軍) 여도(餘都)’와 『南齊書』 권58 百濟傳에 보이는 ‘모도(牟都)’를 문주왕으로 파악하는 견해(李基東, 1974, 「中國 史書에 보이는 百濟王 牟都에 대하여」, 『歷史學報』 62, 30~33쪽)가 있다. 웅진 천도를 단행하였으나 권신인 해구의 전횡을 억제하지 못하고 시해되었다.
개로왕의 아들 : 문주왕의 출자(出自)에 대해서는 본서와 『三國遺事』 권1 王曆에는 개로왕의 아들로 나온다. 반면 『日本書紀』 권14 雄略紀 21년(477)조의 세주에는 개로왕의 동생으로 표기하고 있다. 두 설 가운데 한성 함락 때 개로왕의 직계가 몰살당했다는 기록((『日本書紀』 권14 雄略紀 20년(476)조)을 중시하면 아들로 보는 것은 상호 배치된다. 따라서 문주가 개로왕대에 상좌평(上佐平)으로 활약하였고, 보국장군의 관작을 가진 점을 고려하면 개로왕의 동생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李基白, 1959, 26쪽; 千寬宇, 1976, 141쪽). 『三國史記』에는 유교적 계승 관념에 의해 선왕을 잇는 왕이라는 의미에서 개로왕의 아들로 표기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李基白, 1959, 「百濟王位繼承考」, 『歷史學報』 11.
千寬宇, 1976, 「韓國의 國家形成(下)」, 『韓國學報』 3, 一志社.
〈참고문헌〉
李基白, 1959, 「百濟王位繼承考」, 『歷史學報』 11.
千寬宇, 1976, 「韓國의 國家形成(下)」, 『韓國學報』 3, 一志社.
고구려군은 비록 물러갔으나 : 고구려군이 물러난 것은 당시 북위의 동향이 염려스럽고, 신라와 왜의 구원으로 전쟁이 장기화되는 상황을 피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물러간 장소는 본서 권18 고구려본기6 장수왕 63년(475)조에 보이는 ‘귀환하였다(歸)’에 주목하여 고구려는 싸움이 끝난 직후 군대를 모두 귀환한 것으로 보는 견해(김병남, 2007, 33~34쪽)가 있다. 그러나 고구려군은 바로 귀환한 것이 아니라 대체로 한강 유역 일대에 주둔한 것으로 본다. 실제 최근 몽촌토성 북문지에서 고구려 도로가 발견되어(한성백제박물관, 2019, 21쪽), 한 동안 고구려가 몽촌토성을 거점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김병남, 2007, 「문주왕의 웅진천도」, 『웅진도읍기의 백제』 百濟文化史大系 硏究叢書 4,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한성백제박물관, 2019, 「2019 몽촌토성 북문지 일원 발굴조사[3차] 학술자문회의 자료집」.
〈참고문헌〉
김병남, 2007, 「문주왕의 웅진천도」, 『웅진도읍기의 백제』 百濟文化史大系 硏究叢書 4,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한성백제박물관, 2019, 「2019 몽촌토성 북문지 일원 발굴조사[3차] 학술자문회의 자료집」.
성이 파괴되고 : 실제 1997년 현대리버빌지구 발굴조사에서 19개 건물터가 화재로 일시에 폐기된 현장이 드러났으며(이형구, 1997), 2004년 조사된 미래마을지구에서도 역시 불탄 자국들의 흔적이 확인되어(국립문화재연구소, 2009) 백제의 왕성은 고구려의 화공책으로 기반시설이 대부분 파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 본서 권25 백제본기3 개로왕 21년(475)조에도 불은 놓아 성문을 불태웠다는 기사가 확인된다.
〈참고문헌〉
국립문화재연구소, 2009, 『풍납토성』 Ⅺ.
이형구, 1997, 『서울 풍납토성[백제왕성]실측조사연구』, 백제문화개발연구원.
〈참고문헌〉
국립문화재연구소, 2009, 『풍납토성』 Ⅺ.
이형구, 1997, 『서울 풍납토성[백제왕성]실측조사연구』, 백제문화개발연구원.
왕이 죽어서 : 개로왕이 죽은 것은 본서 권25 백제본기3 개로왕 21년(475)조와 본서 권18 고구려본기6 장수왕 63년(475)조에 보인다. 또한 『日本書紀』 권14 雄略紀 20년(476)조에 인용된 백제기에 의하면 태후와 왕자 등 개로왕의 직계들도 죽은 것으로 나온다.
왕위에 올랐다 : 문주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먼저, 한성 함락 때 개로왕과 그의 직계가 몰살당하였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경쟁자인 동생 곤지가 왜에 있었고, 왕이 죽은 비상상황이기 때문에 빨리 다음 왕을 옹립해야 할 시급성을 들 수 있다. 문주는 다행히도 신라에 구원병을 요청하러 갔기 때문에 온전할 수 있었고, 신라 구원병 1만 명 또한 즉위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鄭載潤, 2000, 47쪽). 상좌평을 지내는 등 국내 기반이 있었던 점도 작용하였다. 왕위에 오른 장소로는 폐허가 된 왕성은 적당하지 않고, 한성 이남의 군영과 같은 임시 장소에서 즉위했을 것으로 보는 견해(최종택, 2007, 401쪽)도 있다.
〈참고문헌〉
鄭載潤, 1999, 「熊津時代 百濟 政治史의 展開와 그 特性」, 서강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최종택, 2007, 「웅진도읍기 한강유역의 상황」, 『웅진도읍기의 백제』 百濟文化史大系 硏究叢書 4,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참고문헌〉
鄭載潤, 1999, 「熊津時代 百濟 政治史의 展開와 그 特性」, 서강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최종택, 2007, 「웅진도읍기 한강유역의 상황」, 『웅진도읍기의 백제』 百濟文化史大系 硏究叢書 4,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註) 001
문주왕(文周王) : 백제 제22대 왕으로서 재위 기간은 475~477년이다. 이름은 문주(文洲(본 기사의 細注; 『日本書紀』 권14 雄略紀 21년(477)) 혹은 ‘문명(文明’(『三國遺事』 권1 王曆))이라고도 한다. 『宋書』 권97 百濟傳에 보이는 ‘보국장군(輔國將軍) 여도(餘都)’와 『南齊書』 권58 百濟傳에 보이는 ‘모도(牟都)’를 문주왕으로 파악하는 견해(李基東, 1974, 「中國 史書에 보이는 百濟王 牟都에 대하여」, 『歷史學報』 62, 30~33쪽)가 있다. 웅진 천도를 단행하였으나 권신인 해구의 전횡을 억제하지 못하고 시해되었다.
註) 002
개로왕의 아들 : 문주왕의 출자(出自)에 대해서는 본서와 『三國遺事』 권1 王曆에는 개로왕의 아들로 나온다. 반면 『日本書紀』 권14 雄略紀 21년(477)조의 세주에는 개로왕의 동생으로 표기하고 있다. 두 설 가운데 한성 함락 때 개로왕의 직계가 몰살당했다는 기록((『日本書紀』 권14 雄略紀 20년(476)조)을 중시하면 아들로 보는 것은 상호 배치된다. 따라서 문주가 개로왕대에 상좌평(上佐平)으로 활약하였고, 보국장군의 관작을 가진 점을 고려하면 개로왕의 동생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李基白, 1959, 26쪽; 千寬宇, 1976, 141쪽). 『三國史記』에는 유교적 계승 관념에 의해 선왕을 잇는 왕이라는 의미에서 개로왕의 아들로 표기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李基白, 1959, 「百濟王位繼承考」, 『歷史學報』 11.
千寬宇, 1976, 「韓國의 國家形成(下)」, 『韓國學報』 3, 一志社.
〈참고문헌〉
李基白, 1959, 「百濟王位繼承考」, 『歷史學報』 11.
千寬宇, 1976, 「韓國의 國家形成(下)」, 『韓國學報』 3, 一志社.
註) 004
註) 005
고구려군은 비록 물러갔으나 : 고구려군이 물러난 것은 당시 북위의 동향이 염려스럽고, 신라와 왜의 구원으로 전쟁이 장기화되는 상황을 피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물러간 장소는 본서 권18 고구려본기6 장수왕 63년(475)조에 보이는 ‘귀환하였다(歸)’에 주목하여 고구려는 싸움이 끝난 직후 군대를 모두 귀환한 것으로 보는 견해(김병남, 2007, 33~34쪽)가 있다. 그러나 고구려군은 바로 귀환한 것이 아니라 대체로 한강 유역 일대에 주둔한 것으로 본다. 실제 최근 몽촌토성 북문지에서 고구려 도로가 발견되어(한성백제박물관, 2019, 21쪽), 한 동안 고구려가 몽촌토성을 거점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김병남, 2007, 「문주왕의 웅진천도」, 『웅진도읍기의 백제』 百濟文化史大系 硏究叢書 4,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한성백제박물관, 2019, 「2019 몽촌토성 북문지 일원 발굴조사[3차] 학술자문회의 자료집」.
〈참고문헌〉
김병남, 2007, 「문주왕의 웅진천도」, 『웅진도읍기의 백제』 百濟文化史大系 硏究叢書 4,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한성백제박물관, 2019, 「2019 몽촌토성 북문지 일원 발굴조사[3차] 학술자문회의 자료집」.
註) 006
성이 파괴되고 : 실제 1997년 현대리버빌지구 발굴조사에서 19개 건물터가 화재로 일시에 폐기된 현장이 드러났으며(이형구, 1997), 2004년 조사된 미래마을지구에서도 역시 불탄 자국들의 흔적이 확인되어(국립문화재연구소, 2009) 백제의 왕성은 고구려의 화공책으로 기반시설이 대부분 파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 본서 권25 백제본기3 개로왕 21년(475)조에도 불은 놓아 성문을 불태웠다는 기사가 확인된다.
〈참고문헌〉
국립문화재연구소, 2009, 『풍납토성』 Ⅺ.
이형구, 1997, 『서울 풍납토성[백제왕성]실측조사연구』, 백제문화개발연구원.
〈참고문헌〉
국립문화재연구소, 2009, 『풍납토성』 Ⅺ.
이형구, 1997, 『서울 풍납토성[백제왕성]실측조사연구』, 백제문화개발연구원.
註) 007
왕이 죽어서 : 개로왕이 죽은 것은 본서 권25 백제본기3 개로왕 21년(475)조와 본서 권18 고구려본기6 장수왕 63년(475)조에 보인다. 또한 『日本書紀』 권14 雄略紀 20년(476)조에 인용된 백제기에 의하면 태후와 왕자 등 개로왕의 직계들도 죽은 것으로 나온다.
註) 008
왕위에 올랐다 : 문주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먼저, 한성 함락 때 개로왕과 그의 직계가 몰살당하였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경쟁자인 동생 곤지가 왜에 있었고, 왕이 죽은 비상상황이기 때문에 빨리 다음 왕을 옹립해야 할 시급성을 들 수 있다. 문주는 다행히도 신라에 구원병을 요청하러 갔기 때문에 온전할 수 있었고, 신라 구원병 1만 명 또한 즉위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鄭載潤, 2000, 47쪽). 상좌평을 지내는 등 국내 기반이 있었던 점도 작용하였다. 왕위에 오른 장소로는 폐허가 된 왕성은 적당하지 않고, 한성 이남의 군영과 같은 임시 장소에서 즉위했을 것으로 보는 견해(최종택, 2007, 401쪽)도 있다.
〈참고문헌〉
鄭載潤, 1999, 「熊津時代 百濟 政治史의 展開와 그 特性」, 서강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최종택, 2007, 「웅진도읍기 한강유역의 상황」, 『웅진도읍기의 백제』 百濟文化史大系 硏究叢書 4,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참고문헌〉
鄭載潤, 1999, 「熊津時代 百濟 政治史의 展開와 그 特性」, 서강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최종택, 2007, 「웅진도읍기 한강유역의 상황」, 『웅진도읍기의 백제』 百濟文化史大系 硏究叢書 4,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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