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진으로 도읍을 옮기다 ( 475년 10월(음) )

겨울 10월에 도읍을 웅진(熊津)001001 웅진(熊津) : 현재의 충남 공주 일대이다. 『梁書』 권54 百濟傳에는 고마(固麻)라고 하였으며, 『日本書紀』 권14 雄略紀 21년(477)조에는 구마나리(久麻那利)라고 하였다. 이는 웅진의 뜻을 발음대로 표기한 것이다. 본서 권37 지리4 백제 熊川州條에 의하면 ‘웅천주는 일설에 웅진이라고 이른다’라고 한 기록을 통해 웅진은 웅천으로도 불렸음을 알 수 있다. 최근 중국 뤄양[洛陽]에서 발견된 백제 유민인 「예식진 묘지명(禰寔進墓誌銘)」에 의하면 예식진은 백제 웅천인으로 나온다. 웅진은 문주왕 때부터 성왕이 사비로 천도할 때까지 백제의 도읍이 되었다. 사비 천도 후에는 북방성으로 여전히 중심지 역할을 하였고, 백제 멸망 후에는 한 때 웅진도독부가 설치되는 등 수도에 준하는 역할을 하였다(정재윤, 2018, 13~24쪽). 이에 주목하여 『舊唐書』 권199 百濟傳에 나오는 왕이 거하는 동서 양성(兩城) 중의 하나로 보기도 한다(今西龍, 1934, 298쪽; 申瀅植, 1992, 172쪽; 金壽泰, 2001, 153~154쪽). 신문왕 6년(668)에 웅천주, 경덕왕 16년(757) 9주의 이름을 모두 고칠 때 웅주로 되었다. 『三國遺事』 권1 王曆에는 문주왕이 웅주로 도읍을 옮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今西龍, 1934, 『百濟史硏究』, 近澤書店.
申瀅植, 1992, 『百濟史』,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문화원.
金壽泰, 2001, 「熊津城의 變遷」, 『百濟文化』 30.
정재윤, 2018, 「熊津城의 역사적 가치와 의미」, 『百濟文化』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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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옮겼다.002002 도읍을 웅진으로 옮겼다 : 본서와 달리 『日本書紀』 권14 雄略紀 21년(477)조에 등장하나 인용된 『日本舊記』와 혼선을 빚고 있기 때문에 재건의 시점을 말한 것으로 이해된다. 웅진으로 천도를 결정한 것은 도읍인 한성이 폐허화 되었고, 고구려의 재침입 가능성이 높은 등 국가의 위기 상황에서 비롯되었다. 이 때문에 새로운 천도지를 정하는 데 가장 결정적 요인으로는 방어적 요소가 고려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차령산맥과 금강이 이중의 방어망이 되면서 동쪽으로도 험준한 계룡산이 막고 있어 천혜의 요지이기 때문이다(兪元載, 1997, 18쪽). 더불어 웅진은 오늘날의 경기 지역과 호남 지역으로 가는 교통로의 결절점이었다. 나아가 웅진은 금강 중류의 거점으로 대전・청주 등 상류로 가는 길과 부여・익산 등 하류로 가는 길을 통제할 수 있다. 금강을 통한 조운과 생활 용수 등의 확보는 도읍으로서 입지 조건을 충족시킨다(정재윤, 2018, 43~44쪽). 끝으로 정치적 요인도 고려되었다(김수태, 2004, 31~38쪽). 웅진은 천도 이전 유력한 지방세력가가 있는 천안과 세종, 청주, 논산 등에 둘러싸여 균형을 유지하면서 위급한 순간에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는 견해(이남석, 2007, 173쪽)도 있다. 이러한 요소가 복합적으로 고려되어 웅진으로 천도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兪元載, 1997, 『熊津百濟史硏究』, 주류성.
김수태, 2004, 「백제의 천도」, 『韓國古代史硏究』36.
이남석, 2007, 『百濟文化의 理解』, 서경문화사.
정재윤, 2018, 「사비 천도의 배경과 시행 과정에 대한 고찰」, 『先史와 古代』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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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01
웅진(熊津) : 현재의 충남 공주 일대이다. 『梁書』 권54 百濟傳에는 고마(固麻)라고 하였으며, 『日本書紀』 권14 雄略紀 21년(477)조에는 구마나리(久麻那利)라고 하였다. 이는 웅진의 뜻을 발음대로 표기한 것이다. 본서 권37 지리4 백제 熊川州條에 의하면 ‘웅천주는 일설에 웅진이라고 이른다’라고 한 기록을 통해 웅진은 웅천으로도 불렸음을 알 수 있다. 최근 중국 뤄양[洛陽]에서 발견된 백제 유민인 「예식진 묘지명(禰寔進墓誌銘)」에 의하면 예식진은 백제 웅천인으로 나온다. 웅진은 문주왕 때부터 성왕이 사비로 천도할 때까지 백제의 도읍이 되었다. 사비 천도 후에는 북방성으로 여전히 중심지 역할을 하였고, 백제 멸망 후에는 한 때 웅진도독부가 설치되는 등 수도에 준하는 역할을 하였다(정재윤, 2018, 13~24쪽). 이에 주목하여 『舊唐書』 권199 百濟傳에 나오는 왕이 거하는 동서 양성(兩城) 중의 하나로 보기도 한다(今西龍, 1934, 298쪽; 申瀅植, 1992, 172쪽; 金壽泰, 2001, 153~154쪽). 신문왕 6년(668)에 웅천주, 경덕왕 16년(757) 9주의 이름을 모두 고칠 때 웅주로 되었다. 『三國遺事』 권1 王曆에는 문주왕이 웅주로 도읍을 옮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今西龍, 1934, 『百濟史硏究』, 近澤書店.
申瀅植, 1992, 『百濟史』,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문화원.
金壽泰, 2001, 「熊津城의 變遷」, 『百濟文化』 30.
정재윤, 2018, 「熊津城의 역사적 가치와 의미」, 『百濟文化』 59.
註 002
도읍을 웅진으로 옮겼다 : 본서와 달리 『日本書紀』 권14 雄略紀 21년(477)조에 등장하나 인용된 『日本舊記』와 혼선을 빚고 있기 때문에 재건의 시점을 말한 것으로 이해된다. 웅진으로 천도를 결정한 것은 도읍인 한성이 폐허화 되었고, 고구려의 재침입 가능성이 높은 등 국가의 위기 상황에서 비롯되었다. 이 때문에 새로운 천도지를 정하는 데 가장 결정적 요인으로는 방어적 요소가 고려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차령산맥과 금강이 이중의 방어망이 되면서 동쪽으로도 험준한 계룡산이 막고 있어 천혜의 요지이기 때문이다(兪元載, 1997, 18쪽). 더불어 웅진은 오늘날의 경기 지역과 호남 지역으로 가는 교통로의 결절점이었다. 나아가 웅진은 금강 중류의 거점으로 대전・청주 등 상류로 가는 길과 부여・익산 등 하류로 가는 길을 통제할 수 있다. 금강을 통한 조운과 생활 용수 등의 확보는 도읍으로서 입지 조건을 충족시킨다(정재윤, 2018, 43~44쪽). 끝으로 정치적 요인도 고려되었다(김수태, 2004, 31~38쪽). 웅진은 천도 이전 유력한 지방세력가가 있는 천안과 세종, 청주, 논산 등에 둘러싸여 균형을 유지하면서 위급한 순간에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는 견해(이남석, 2007, 173쪽)도 있다. 이러한 요소가 복합적으로 고려되어 웅진으로 천도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兪元載, 1997, 『熊津百濟史硏究』, 주류성.
김수태, 2004, 「백제의 천도」, 『韓國古代史硏究』36.
이남석, 2007, 『百濟文化의 理解』, 서경문화사.
정재윤, 2018, 「사비 천도의 배경과 시행 과정에 대한 고찰」, 『先史와 古代』 55.
주제분류
정치>왕실>국왕>활동(결혼·통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