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라국에서 토산물을 바치다
(
476년
04월
)
여름 4월에 탐라국(耽羅國)註 001에서 토산물을 바치니 왕이 기뻐하여 사신을 은솔(恩率)로 삼았다.註 002
탐라국(耽羅國) : 대체로 현재의 제주를 말한다. 본서 권26 백제본기4 동성왕 20년(498)조에는 ‘탐모라(耽牟羅)’로, 『後漢書』 권85 東夷傳 韓條와 『三國志』 권30 東夷傳 韓傳條에는 ‘주호(州湖胡)’로, 『三國遺事』 권1 紀異1 馬韓條에 인용된 『海東安弘記』에는 ‘탁라(乇羅)’로 표기되었다. 『隋書』백제조에는 ‘身冉牟羅國’, 『北史』백제조에는 ‘ 牟羅國’으로, 『新唐書』 劉仁軌조에는 ‘儋羅’로 표기되었다(장창은, 2018, 89쪽), 본 기사는 백제에 탐라가 통교한 최초의 기록이다. 물론 『日本書紀』 권9 神功紀 49년(249; 수정연대 369)조에 보이는 침미다례(忱彌多禮)를 탐라에 비정하는 견해(末松保和, 1956, 47~49쪽)도 있지만, 당시의 침미다례는 강진(李丙燾, 1976, 512쪽; 노중국, 2011, 13쪽)이나 해남 일대(李道學, 1995, 349~352쪽)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본 내용의 탐라 역시 제주도로 보는 견해(이근우, 1997, 53쪽)도 있다. 『日本書紀』 권17 繼體紀 2년(508) 12월조에는 “남해 가운데 탐라인이 처음으로 백제국과 통하였다”라 하여 본 기사와 통교 시기에서 차이가 난다는 점에 주목하여 이때의 탐라를 제주로 비정하기도 한다(정동준, 2019, 19~20쪽).
〈참고문헌〉
末松保和, 1956, 『任那興亡史』, 吉川弘文館.
李丙燾, 1976,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李道學, 1995, 『百濟古代國家硏究』, 一志社.
李根雨, 1997,「웅진시대 백제의 남방경역에 대하여」,『백제연구』27.
노중국, 2011, 「문헌기록 속의 영산강유역-4~5세기를 중심으로-」, 『百濟學報』 6.
장창은, 2018, 「古代 耽羅國 연구의 쟁점과 이해방향」, 『耽羅文化』 57,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정동준, 2019, 「문헌사료로 본 백제의 마한 통합과정」, 『百濟學報』 29.
〈참고문헌〉
末松保和, 1956, 『任那興亡史』, 吉川弘文館.
李丙燾, 1976,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李道學, 1995, 『百濟古代國家硏究』, 一志社.
李根雨, 1997,「웅진시대 백제의 남방경역에 대하여」,『백제연구』27.
노중국, 2011, 「문헌기록 속의 영산강유역-4~5세기를 중심으로-」, 『百濟學報』 6.
장창은, 2018, 「古代 耽羅國 연구의 쟁점과 이해방향」, 『耽羅文化』 57,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정동준, 2019, 「문헌사료로 본 백제의 마한 통합과정」, 『百濟學報』 29.
탐라국에서 ~ 은솔로 삼았다 : 탐라는 이 무렵 백제에 복속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탐라가 백제에 위로의 사신을 보냈고, 점차 예속도가 강화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정운용, 2020, 166쪽). 웅진 천도 이후 남방 경략과 해로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자연스럽게 접촉이 이루어진 것이다. 탐라와 백제의 관계는 본서 권26 백제본기4 동성왕 20년조에 ‘탐라가 공물과 부세를 바치지 않는다’는 구절을 참조하면 공물과 부세를 내는 형태였을 것으로 보인다. 본서 권6 신라본기6 문무왕 2년(662) 2월조에는 무덕(武徳) 연간(618~626) 이래로 백제에 신속해 왔다고 하여 본 내용과 차이가 난다.
〈참고문헌〉
鄭雲龍, 2020, 「三國時代의 耽羅 關聯 史料」, 『新羅史學報』 49.
〈참고문헌〉
鄭雲龍, 2020, 「三國時代의 耽羅 關聯 史料」, 『新羅史學報』 49.
註) 001
탐라국(耽羅國) : 대체로 현재의 제주를 말한다. 본서 권26 백제본기4 동성왕 20년(498)조에는 ‘탐모라(耽牟羅)’로, 『後漢書』 권85 東夷傳 韓條와 『三國志』 권30 東夷傳 韓傳條에는 ‘주호(州湖胡)’로, 『三國遺事』 권1 紀異1 馬韓條에 인용된 『海東安弘記』에는 ‘탁라(乇羅)’로 표기되었다. 『隋書』백제조에는 ‘身冉牟羅國’, 『北史』백제조에는 ‘ 牟羅國’으로, 『新唐書』 劉仁軌조에는 ‘儋羅’로 표기되었다(장창은, 2018, 89쪽), 본 기사는 백제에 탐라가 통교한 최초의 기록이다. 물론 『日本書紀』 권9 神功紀 49년(249; 수정연대 369)조에 보이는 침미다례(忱彌多禮)를 탐라에 비정하는 견해(末松保和, 1956, 47~49쪽)도 있지만, 당시의 침미다례는 강진(李丙燾, 1976, 512쪽; 노중국, 2011, 13쪽)이나 해남 일대(李道學, 1995, 349~352쪽)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본 내용의 탐라 역시 제주도로 보는 견해(이근우, 1997, 53쪽)도 있다. 『日本書紀』 권17 繼體紀 2년(508) 12월조에는 “남해 가운데 탐라인이 처음으로 백제국과 통하였다”라 하여 본 기사와 통교 시기에서 차이가 난다는 점에 주목하여 이때의 탐라를 제주로 비정하기도 한다(정동준, 2019, 19~20쪽).
〈참고문헌〉
末松保和, 1956, 『任那興亡史』, 吉川弘文館.
李丙燾, 1976,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李道學, 1995, 『百濟古代國家硏究』, 一志社.
李根雨, 1997,「웅진시대 백제의 남방경역에 대하여」,『백제연구』27.
노중국, 2011, 「문헌기록 속의 영산강유역-4~5세기를 중심으로-」, 『百濟學報』 6.
장창은, 2018, 「古代 耽羅國 연구의 쟁점과 이해방향」, 『耽羅文化』 57,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정동준, 2019, 「문헌사료로 본 백제의 마한 통합과정」, 『百濟學報』 29.
〈참고문헌〉
末松保和, 1956, 『任那興亡史』, 吉川弘文館.
李丙燾, 1976,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李道學, 1995, 『百濟古代國家硏究』, 一志社.
李根雨, 1997,「웅진시대 백제의 남방경역에 대하여」,『백제연구』27.
노중국, 2011, 「문헌기록 속의 영산강유역-4~5세기를 중심으로-」, 『百濟學報』 6.
장창은, 2018, 「古代 耽羅國 연구의 쟁점과 이해방향」, 『耽羅文化』 57,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정동준, 2019, 「문헌사료로 본 백제의 마한 통합과정」, 『百濟學報』 29.
註) 002
탐라국에서 ~ 은솔로 삼았다 : 탐라는 이 무렵 백제에 복속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탐라가 백제에 위로의 사신을 보냈고, 점차 예속도가 강화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정운용, 2020, 166쪽). 웅진 천도 이후 남방 경략과 해로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자연스럽게 접촉이 이루어진 것이다. 탐라와 백제의 관계는 본서 권26 백제본기4 동성왕 20년조에 ‘탐라가 공물과 부세를 바치지 않는다’는 구절을 참조하면 공물과 부세를 내는 형태였을 것으로 보인다. 본서 권6 신라본기6 문무왕 2년(662) 2월조에는 무덕(武徳) 연간(618~626) 이래로 백제에 신속해 왔다고 하여 본 내용과 차이가 난다.
〈참고문헌〉
鄭雲龍, 2020, 「三國時代의 耽羅 關聯 史料」, 『新羅史學報』 49.
〈참고문헌〉
鄭雲龍, 2020, 「三國時代의 耽羅 關聯 史料」, 『新羅史學報』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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