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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건국, 왕도, 국호 ( 기원전 57년 )
지금 살펴보면 신라(新羅) 시조(始祖) 혁거세(赫居世)註 027는 전한(前漢) 오봉(五鳳) 원년 갑자(甲子)(기원전 57)에 나라를 세웠다.
왕도(王都)는 길이가 3,075보(步), 너비는 3,018보이며,註 028 35리(里)註 029 6부(部)註 030로 되어 있었다.
국호는 서야벌(徐耶伐)이라 하였는데 혹은 사라(斯羅) 혹은 사로(斯盧) 혹은 신라(新羅)라고 하였다. 탈해왕(脫解王)註 031 9년(65)에 시림(始林)註 032에서 닭과 관련된 괴이한 일[鷄怪]註 033이 있어 계림(鷄林)으로 이름을 고쳤다. 이로 인하여 〔계림을〕 국호(國號)로 삼았다. 기림왕(基臨王)註 034 10년(307)에 다시 신라(新羅)라고 불렀다.
註) 027
혁거세(赫居世): 혁거세(赫居世)는 신라의 건국 시조로, 박씨의 시조이기도 하다. 본서 신라본기에 따르면 기원전 69년에 탄생하여, 13세가 되던 기원전 57년에 신라의 왕위에 올랐고, 그로부터 만 60년이 지난 서기 4년에 승하하였다. 경주 지역의 선주 세력인 6촌장의 추대를 받아 즉위하였으며, 알영(閼英)을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죽어서 오릉(五陵)에 묻혔는데, 그의 뒤를 이어 아들인 남해(南解)가 신라의 왕이 되었다.바로가기
註) 028
왕도(王都)는 …… 3,018보이며: 왕도(王都)의 공간적 범위가 제시되어 있다. 여기에서 1보(步)는 5척(尺) 또는 6척을 말하는 것으로 당(唐) 이전에는 주척(周尺, 약 24cm)을 기준으로 6척을 1보로 하였으나, 당 이후에는 당척(唐尺, 약 30cm)을 기준으로 5척을 1보로 하였다. 신라에서는 삼국 통일 후 당척을 수용하였지만, 여전히 6척 1보제를 시행한 것으로 보인다(李宇泰, 1987, 「韓國古代의 尺度」, 『泰東古典硏究』 창간호, 15~16쪽). 이를 대입하면 남북 길이가 5,535m, 동서 너비가 5,432.4m로 대략 현재 경주의 시내 구역 범위와 유사하다. 즉 지리지의 왕도는 6부(六部) 구역 전체가 아닌 시가지 부분을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으며, 지리지 신라조의 다른 부분과 함께 대체로 경덕왕대의 사정을 전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바로가기
註) 029
35리(里): 리(里)는 신라 왕도(王都)의 행정구역으로 부(部)보다 하위의 단위이다. 신라의 왕도(王都)는 1차적으로 6부로 구분되었으며, 각 부는 다시 리로 나뉘었다. 이 기사에서 알 수 있듯이 중대에 35리, 그리고 『삼국유사』 권1 기이2 진한조에 보이는 것과 같이 하대에 55리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본서 권3 신라본기3 자비마립간 12년(469) 정월조에 경도(京都)의 방(坊)·리(里) 이름을 정했다고 하였는데, 대체로 이 무렵 리의 제도를 도입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전덕재, 2009, 158쪽). 즉 6부 아래 리의 행정구역을 두었다는 것이다. 이때 리제 도입의 의미에 대해서는 몇 가지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다. 6부 아래의 기존 취락을 리로 편제했을 가능성, 새로 구획을 해서 리로 편제했을 가능성 등이 있다. 월성 해자에서 출토된 목간 중에서 부별로 리와 리가 아닌 하위 행정구역을 나열한 문서가 확인되었다. 여기에는 모량부에 소속된 신리, 상리, 중리, 하리 등의 명칭이 나타나 있다. 이것은 기존의 취락에 이름을 붙인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우며, 새로운 도시 구획을 의미할 가능성이 있다(박성현, 2018, 266~268쪽). 리제의 도입, 리명의 부여는 이처럼 도시 구획의 시작을 의미할 가능성이 크지만, 이 시점에 본격적인 도시 구획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참고문헌〉
전덕재, 2009, 『신라 왕경의 역사』, 새문사
박성현, 2018, 「월성 해자 목간으로 본 신라의 왕경」, 『목간과 문자』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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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30
6부(部): 양부(梁部), 사량부(沙梁部), 점량부(漸梁部), 본피부(本彼部), 한기부(韓祇部), 습비부(習比部)의 여섯 부를 가리킨다. 신라 6부(六部)는 기본적으로 사로국 내지 왕경의 지역 구분 형태로 존재한 것이었다고 여겨진다. 중고기 초까지 6부는 단위정치체로서 각각이 자치체인 동시에 신라 국가 및 정치 운영의 구성 단위였으며, 중고기까지도 지역 구분에 따른 인민, 공동체의 편제라는 성격이 강했다. 그렇지만 통일을 전후한 시기에는 그 성격이 많이 탈각되어 단순한 지역 구분, 즉 행정구역으로 존재하게 되었다(박성현, 2018). 신라 왕경 6부의 범위에 대해서는 현재의 통합 경주시에 걸쳐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견해(이마니시, 이종욱, 이기봉), 주로 경주 시내에 위치한 것으로 보는 견해(스에마츠, 이병도, 김원룡), 시기에 따라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견해(전덕재) 등이 있다. 이것은 고려 경주 6부 소속 지명을 중시할 것인지, 6촌명을 중시할 것인지, 그리고 6부 구역의 변화를 어떻게 파악할 것인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 것이라고 판단된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신라 중대(中代)에 왕도(王都) 내부가 6부로 나뉘었다는 것이고, 그것이 다시 35리(里)로 편제되었다는 것이다.
〈참고문헌〉
전덕재, 2009, 『신라 왕경의 역사』, 새문사
박성현, 2018, 「신라 6부의 시기적 변천과 기본 성격 –연구사에 대한 검토를 중심으로-」, 『한국고대사연구』 89
박성현, 2019, 「신라 왕경 6부의 경계에 대한 연구」, 『대구사학』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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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31
탈해왕(脫解王):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 신라 제4대 왕이자, 석(昔)씨의 시조. 본서에 따르면 서기 57년에 즉위하여 80년에 사망하였다. 남해차차웅의 사위가 되었다가, 처남인 유리이사금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바로가기
註) 032
시림(始林): 계림(鷄林)의 원래 이름. 시림(始林)에서 닭이 울고 김알지가 나왔다고 해서 숲의 이름을 계림으로 고치고 (계림을) 국호로 삼았다고 한다. 본서 권1 신라본기1 탈해이사금 9년(65) 3월조 참조.바로가기
註) 033
닭과 관련된 괴이한[鷄怪]: 본서 신라본기 탈해왕(脫解王) 9년조의 김알지(金閼智) 설화에 나오는 이야기로 나뭇가지에 걸린 금궤(金櫃) 아래에서 흰 닭이 울고 있었고, 금궤로부터 김알지를 얻게 된 일을 말한다.바로가기
註) 034
기림왕(基臨王): 기림이사금(基臨尼師今). 신라 제15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298~310년. 본서 권2 신라본기2 기림이사금 원년(298) 기사 참조.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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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http://db.history.go.kr/id/sa_001_0030_0020 (accessed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http://db.history.go.kr/id/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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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sa_001_0030_0020,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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