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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령군
개령군(開寧郡)註 127은 옛날 감문소국(甘文小國)註 128이다. 진흥왕(眞興王) 18년 진(陳)註 129의 영정(永定)註 130 원년(557)에 군주(軍主)註 131를 두고 청주(靑州)註 132로 삼았다.註 133 진평왕(眞平王) 때 주(州)를 폐하였다.註 134 문무왕(文武王) 원년(661)에 감문군(甘文郡)註 135을 두었다. 경덕왕(景德王) 때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거느리는 현[領縣]은 넷이다.
어모현(禦侮縣)註 136은 본래 금물현(今勿縣)註 137음달(陰達)이라고도 한다.인데 경덕왕(景德王) 때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김산현(金山縣)註 138은 경덕왕(景德王)이 주·현의 이름을 고칠 때 및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지례현(知禮縣)註 139은 본래 지품천현(知品川縣)註 140인데 경덕왕(景德王) 때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무풍현(茂豐縣)註 141은 본래 무산현(茂山縣)註 142인데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註) 127
개령군(開寧郡): 현재의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開寧面).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감문군(甘文郡)을 개령군으로 개명하였다. 고려 이후에도 그대로 불렀으며, 현종 9년(1018)의 주현(主縣)-속현(屬縣) 체제에서 상주목(尙州牧)의 속현이 되었다. 명종 2년(1172)에 감무(監務)를 두었는데, 조선 태종 때 규례에 따라 현감(縣監)으로 고쳤다(『고려사』 권57 지11 지리2 경상도 상주목 개령군;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9 경상도 개령현). 그 중심지는 현재의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 동부리·서부리에 해당하며, 여기에는 감문산성이 있다.바로가기
註) 128
감문소국(甘文小國): 신라 개령군(開寧郡)의 경덕왕 때 고치기 전 이름이 감문군(甘文郡)이다. 감문소국은 그 자리에 있었던 ‘소국(小國)’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9 경상도 개령현 고적조에 궁궐 유기(遺基), 금효왕릉(金孝王陵), 장릉(獐陵) 등에 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삼국지』 동이전 한조의 변진 소국 중에 감로국(甘路國)을 여기에 비정하기도 한다. 본서 권2 신라본기2 조분이사금 2년 7월조에 “이찬(伊湌) 우로(于老)를 대장군(大將軍)에 임명하여 감문국(甘文國)을 공격해 격파하고, 그 땅을 〔신라의〕 군(郡)으로 만들었다”고 하였다.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561)에는 사방군주(四方軍主)의 하나로 ‘감문군주(甘文軍主) 사훼(沙喙) 심맥부지(心麥夫智) 급척간(及尺干)’이 나타나 있으며, 함안 성산산성 출토 목간에는 ‘감문성(甘文城)’이 몇 차례 등장한다. 대체로 이른 시기에 신라가 복속시켜 성·촌으로 편제하고, 또 전략적 요충지로서 정(停)을 설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바로가기
註) 129
진(陳): 정덕본(正德本)에서는 양(梁)으로 되어있으나, 『연표(年表)』에는 진(陳)으로 나와 이를 따라 교감하였다.바로가기
註) 130
영정(永定): 남조 진(陣) 무제(武帝)의 연호(557~559).바로가기
註) 131
군주(軍主): 신라 중고기(中古期) 중앙 및 지방 주둔 군단의 지휘관이자 광역 주(州)의 장관. 본서 본권 상주조 참조.바로가기
註) 132
청주(靑州): 감문주(甘文州)의 잘못으로 보이지만, 무엇을 말하는지 분명하지 않다.바로가기
註) 133
진흥왕(眞興王) 18년 …… 청주(靑州)로 삼았다: 본서 권4 신라본기4 진흥왕 18년(557)조에는 “사벌주(沙伐州)를 폐하고 감문주(甘文州)를 설치하여 사찬(沙飡) 기종(起宗)을 군주(軍主)로 삼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경우 사벌에 있던 정(停), 즉 군주(軍主)가 이끄는 군단의 영(營)을 감문으로 옮겨 설치한 것이다.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561)에는 사방군주(四方軍主)의 하나로 ‘감문군주(甘文軍主) 사훼(沙喙) 심맥부지(心麥夫智) 급척간(及尺干)’이 나타나 있다.바로가기
註) 134
진평왕(眞平王) 때 주(州)를 폐하였다: 본서 권4 신라본기4 진평왕 36년(614) 봄 2월조에는 “사벌주(沙伐州)를 폐하고 일선주(一善州)를 설치하여 일길찬(一吉飡) 일부(日夫)를 군주(軍主)로 삼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사벌주는 감문주(甘文州)의 오류로 보인다. 본서 권4 신라본기4 진흥왕 18년(557)조에 “사벌주(沙伐州)를 폐하고 감문주(甘文州)를 설치하여 사찬(沙飡) 기종(起宗)을 군주(軍主)로 삼았다”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감문주를 폐하고 일선주를 설치했다고 하는 것은 감문에 있던 정(停), 즉 군주(軍主)가 이끄는 군단의 영(營)을 일선으로 옮겨 설치한 사실을 말한 것이다.바로가기
註) 135
감문군(甘文郡): 신라 개령군(開寧郡, 현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의 경덕왕 때 고치기 전 이름. 문무왕(文武王) 원년(661)에 감문군(甘文郡)을 두었다는 것의 의미는 분명하지 않다.바로가기
註) 136
어모현(禦侮縣): 현재의 경상북도 김천시 어모면(禦侮面).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금물현(今勿縣)을 어모현으로 개명하였다. 고려 이후에도 그대로 불렀으며, 현종 9년(1018)의 주현(主縣)-속현(屬縣) 체제에서 상주목(尙州牧)의 속현이 되었다(『고려사』 권57 지11 지리2 경상도 상주목 어모현). 조선 태조 2년(1393)에 김산군(金山郡)의 속현이 되었다가 곧 폐지되어 직촌(直村)이 되었다(『세종실록』 권150 지리지 경상도 상주목 김산군;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9 경상도 김산군). 『신증동국여지승람』 김산군 고적조에 어모폐현(禦侮廢縣)이 나오지만 그 위치가 나타나 있지 않다. 현재의 경상북도 김천시 어모면에 해당한다. 『대동지지』 권9 김산 고읍조에는 “어모가 북쪽 35리에 있다”고 하였다. 어모면 방면이라고 한다면 그 중에서도 북쪽에 해당한다. 현재의 어모면은 1934년 아천면과 구소요면을 통합하여 만든 것으로 이름이 계승된 것은 아니다.바로가기
註) 137
금물현(今勿縣): 신라 어모현(禦侮縣, 현재의 경상북도 김천시 어모면)의 경덕왕 때 고치기 전 이름. 음달(陰達)이라고도 하였다.바로가기
註) 138
김산현(金山縣): 현재의 경상북도 김천시 삼락동(三樂洞) 일대. 신라 경덕왕 16년(757) 군현명을 개정할 때 이름이 바뀌지 않았다. 고려 이후에도 그대로 불렀으며, 현종 9년(1018)의 주현(主縣)-속현(屬縣) 체제에서 경산부(京山府, 현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의 속현이 되었고, 공양왕 2년(1390)에 감무(監務)를 두었다(『고려사』 권57 지11 지리2 경상도 경산부 김산현). 조선 정종 원년(1399)에 어태(御胎)를 현(縣) 서쪽 10리 되는 황악산(黃岳山)에 안치하고 지군사(知郡事)로 승격시켰다(『세종실록』 권150 지리지 경상도 상주목 김산군;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9 경상도 김산군). 조선시대 중심지가 군내면(郡內面)이었고, 이것이 1914년에 금릉면(金陵面) 신음동, 삼락동, 교동, 문당동으로 개편되었다. 신라 때 중심지도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여기에는 뚜렷한 고분군이나 산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바로가기
註) 139
지례현(知禮縣): 현재의 경상북도 김천시 지례면(知禮面).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지품천현(知品川縣)을 지례현으로 개명하였다. 고려 이후에도 그대로 불렀으며, 현종 9년(1018)의 주현(主縣)-속현(屬縣) 체제에서 경산부(京山府, 현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의 속현이 되었고, 공양왕 2년(1390)에 감무(監務)를 두었다(『고려사』 권57 지11 지리2 경상도 경산부 지례현). 조선 태종 13년(1413)에 감무를 현감(縣監)으로 고쳤다(『세종실록』 권150 지리지 경상도 상주목 지례현;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9 경상도 지례현). 중심지는 경상북도 김천시 지례면 상부리 일대로 추정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지례현 고적조에 보이는 귀산성(龜山城)이 중심적인 산성으로 판단된다.바로가기
註) 140
지품천현(知品川縣): 신라 지례현(知禮縣, 현재의 경상북도 김천시 지례면)의 경덕왕 때 고치기 전 이름.바로가기
註) 141
무풍현(茂豐縣): 현재의 전라북도 무주시 무풍면(茂豊面).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무산현(茂山縣)을 무풍현으로 개명하였다. 고려 이후에도 그대로 불렀으며, 현종 9년(1018)의 주현(主縣)-속현(屬縣) 체제에서 진례현(進禮縣, 현 충청남도 금산군 금산읍)의 속현이 되었다. 명종 6년(1176)에 감무(監務)를 두어 주계(朱溪, 현 전라북도 무주군 무주읍)를 겸하여 맡도록 하였고, 공양왕 3년(1391)에 주계현(朱溪縣)을 합쳐서 무풍감무(茂豊監務)라고 했다가, 조선 태종 14년(1414)에 무주현(茂朱縣)으로 고치고 치소를 주계에 두었다(『고려사』 권57 지11 지리2 전라도 진례현 무풍현; 『세종실록』 권150 지리지 전라도 남원도호부 무주현;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9 전라도 무주현). 『신증동국여지승람』 무주현 고적조에 고무풍(古茂豐)이 당시의 치소, 즉 주계의 동쪽 60리에 있다고 되어 있다. 현재의 전라북도 무주시 무풍면에 해당한다. 여기에 무풍고성이 위치하고 있다.바로가기
註) 142
무산현(茂山縣): 신라 무풍현(茂豐縣, 현재의 전라북도 무주시 무풍면)의 경덕왕 때 고치기 전 이름. 본서 권5 신라본기5 진덕왕 원년(747) 10월조에 백제의 군사가 무산성(茂山城) 등 3성을 포위하자 김유신이 나가서 물리쳤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 사실은 본서 김유신전에도 나타나 있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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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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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http://db.history.go.kr/id/sa_001_0030_0020 (accessed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http://db.history.go.kr/id/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2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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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sa_001_0030_0020,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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