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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군
영동군(永同郡)註 143은 본래 길동군(吉同郡)註 144인데 경덕왕(景德王) 때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거느리는 현[領縣]은 둘이다.
양산현(陽山縣)註 145은 본래 조비천현(助比川縣)註 146인데 경덕왕(景德王) 때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황간현(黃澗縣)註 147은 본래 소라현(召羅縣)註 148인데 경덕왕(景德王) 때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註) 143
영동군(永同郡): 현재의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읍(永同邑).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길동군(吉同郡)을 영동군으로 개명하였다. 고려 이후에도 그대로 불렀으며, 현종 9년(1018)의 주현(主縣)-속현(屬縣) 체제에서 상주목(尙州牧, 현 경상북도 상주시)의 속현이 되었다. 명종 2년(1172)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동 6년(1176)에 현령(縣令)으로 승격시켰다가 다시 감무로 하였으며 얼마 안 있어 폐지하였다(『고려사』 권57 지11 지리2 경상도 상주목 영동군). 조선 태종 13년(1413)에 현감(縣監)을 두고 충청도에 소속시켰다(『신증동국여지승람』 권16 충청도 영동현). 그 중심지는 현재의 영동군 영동읍이며 부용리에 있는 영동읍성이 신라 때부터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바로가기
註) 144
길동군(吉同郡): 신라 영동군(永同郡, 현재의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읍)의 경덕왕 때 고치기 전 이름. 본서 권3 신라본기3 자비마립간 17년(474)조에 보이는 광석성(廣石城)이 길동(吉同)과 통한다는 견해가 있다. 같이 축조된 성들이 주변 지역에 위치하며, 광석은 ‘너른들’, 길동은 ‘긴들’을 의미한다는 것이다(全德在, 2009, 「관산성전투에 대한 새로운 고찰」, 『新羅文化』 34, 37~38쪽).바로가기
註) 145
양산현(陽山縣): 현재의 충청북도 영동군 양산면(陽山面).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조비천현(助比川縣)을 양산현으로 개명하였다. 고려 이후에도 그대로 불렀으며, 현종 9년(1018)의 주현(主縣)-속현(屬縣) 체제에서 경산부(京山府, 현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의 속현이 되었고, 명종 6년(1176)에 현령(縣令)을 파견하였다(『고려사』 권57 지11 지리2 경상도 경산부 양산현). 충선왕 5년(1313)에 옥천(沃川, 현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현령(縣令)을 지옥주사(知沃州事)로 승격하고, 경산부의 임내인 이산(利山)·안읍(安邑)·양산(陽山) 등 3현(縣)을 여기에 소속시켰다(『세종실록』 권149 청주목 옥천군). 『신증동국여지승람』 옥천군 속현조에 양산현(陽山縣)이 옥천군 남쪽 59리에 있다고 되어 있는데, 현재의 영동군 양산면에 해당한다. 여기에는 신라 때 산성으로 대왕산성이 있다. 양산현과 관련된 것으로 양산가(陽山歌)라는 노래가 있는데, 조천성(助川城), 즉 양산현에서 전사한 김흠운(金歆運) 등을 애도하여 읊은 노래이다(본서 권47 열전7 김흠운전). 한편 후삼국시기에 견훤이 양산에 성을 쌓게 하였다는 기록도 있다(본서 권12 신라본기12 경순왕 2년 8월.바로가기
註) 146
조비천현(助比川縣): 신라 양산현(陽山縣, 현 충청북도 영동군 양산면)의 경덕왕 때 고치기 전 이름. 도비천성(刀比川城), 조천성(助川城)이라고도 하였다. 도비천성은 본서 김유신전에 나오는데 태종무열왕 2년(655) 가을 9월에 [김]유신이 백제에 들어가 도비천성(刀比川城)을 공격하여 이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천성은 취도(驟徒)전김흠운(金歆運)전에 나온다. 취도와 김흠운은 조천성 공격에 참여하여 전사하였고, 특히 김흠운의 죽음을 애도하여 양산가(陽山歌)라는 노래가 지어졌다.바로가기
註) 147
황간현(黃澗縣): 현재의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黃澗面).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소라현(召羅縣)을 황간현으로 개명하였다. 고려 이후에도 그대로 불렀으며, 현종 9년(1018)의 주현(主縣)-속현(屬縣) 체제에서 경산부(京山府, 현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의 속현이 되었고, 공양왕 2년(1390)에 감무(監務)를 두었다(『고려사』 권57 지11 지리2 경상도 경산부 황간현). 조선 태종 14년(1414)에 청산(靑山)과 합쳐 황청(黃靑)이라고 했다가, 동 16년(1416)에 다시 갈라서 황간현감(黃澗縣監)이라고 하였다(『세종실록』 권149 지리지 충청도 청주목 황간현;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6 충청도 황간현). 조선시대 황간현의 중심지는 현재의 영동군 황간면, 그 중에서도 남성리의 황간읍성이라고 할 수 있다. 황간읍성은 고려 말 축조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지표조사에서 일부 신라 토기편이 채집되었으며, 성 내부 남성리유적에서 신라 주거지가 확인되었다. 한편 『호서읍지(湖西邑誌)』 황간현 고적조에는 “소라현(召羅縣, 황간현의 옛 이름) 구기(舊基)가 현 동쪽 8리, 광평리(廣坪里)에 있는데, 신라 때 산에 읍을 두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따른다면 신라 황간현의 중심지는 영동군 황간면 광평리에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중원문화재연구원, 2019, 『영남 남성리 유적』).바로가기
註) 148
소라현(召羅縣): 신라 황간현(黃澗縣, 현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의 경덕왕 때 고치기 전 이름. 본서 권3 신라본기3 자비마립간 17년(474)조에 보이는 좌라성(坐羅城)이 소라현과 동일 지명으로 판단된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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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기사명, 자료명. URL (검색날짜)
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http://db.history.go.kr/id/sa_001_0030_0020 (accessed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http://db.history.go.kr/id/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2안
저자, 기사명, 자료명.(사이트명, URL, ID, 검색날짜)
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sa_001_0030_0020,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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