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소경
(
532년
)
김해소경(金海小京)註 192은 옛 금관국(金官國)註 193가락국(伽落國)이라고도 하고 가야(伽耶)라고도 한다.이다. 시조 수로왕(首露王)註 194으로부터 10대 구해왕(仇亥王)註 195에 이르러 양(梁)의 중대통(中大通)註 196 4년 신라(新羅) 법흥왕(法興王) 19년(532)에 백성을 거느리고 와서 항복하여 그 땅을 금관군(金官郡)으로 삼았다.註 197 문무왕(文武王) 20년, 영륭(永隆)註 198 원년(680)에 소경(小京)으로 삼았다.註 199 경덕왕(景德王) 때 이름을 김해경(金海京)으로 고쳤다. 지금[고려]의 김주(金州)註 200이다.
김해소경(金海小京): 현재의 경상남도 김해시(金海市).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금관소경(金官小京)을 김해소경 혹은 김해경(金海京)으로 개명하였다. 다른 소경이 모두 3글자로 개명된 것으로 보아 전자보다 후자가 맞을 가능성이 크다. 고려 태조 23년(940)에 김해부(金海府)로 고쳤고, 뒤에 임해현(臨海縣)으로 낮췄다가 다시 승격시켜 군(郡)이 되었다. 성종 14년(995)에 김주(金州)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로 고쳤으며, 현종 3년(1012)에 낮추어 김주 방어사(金州防禦使)로 삼았다. 원종 11년(1270)에 방어사(防禦使) 김훤(金晅)이 밀성(密城, 현 경상남도 밀양시)의 반란을 진압하고, 또 삼별초(三別抄)를 막는 데 공이 있었으므로, 승격시켜 김녕도호부(金寧都護府)가 되었다. 충렬왕 19년(1293)에 현(縣)으로 강등되었다가 동 34년(1308)에 승격시켜 김주목(金州牧)이 되었다. 충선왕 2년(1310)에 여러 목(牧)을 도태(淘汰)시키면서, 다시 김해부가 되었다. 조선 태종 13년(1413)에 도호부로 고쳤다(『고려사』 권57 지11 지리2 경상도 김주; 『세종실록』 권150 지리지 경상도 진주목 김해도호부;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2 경상도 김해도호부). 그 중심지는 현재의 김해시 동상동, 서상동 일대로 추정된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통일신라시대 금관소경, 김해경에도 격자형 방(坊)이 구획되어 있었는데, 대체로 현재 김해 시내에 해당한다(山田隆文, 2008, 「新羅の九州五小京城郭の構造と實態について -統一新羅による計劃都市の復元硏究-」 『考古學論攷』 31, 奈良縣立橿原考古學硏究所, 32~35쪽).
금관국(金官國): 현재의 경상남도 김해시(金海市)에 있었던 소국(小國). 가락국(伽落國) 혹은 가야(伽耶 혹은 加耶)라고도 하였다. 본서 김유신전에서는 남가야(南加耶)라고도 하였고, 강수전에 보이는 임나가량(任那加良)을 김해의 가야로 보기도 한다. 그밖에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남가라(南加羅 또는 南迦羅), 금관(金官), 수나라(須奈羅 또는 須那羅), 소나라(素奈羅)라고 전하고,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에는 임나가라(任那加羅)로 전하며, 『삼국지(三國志)』 권30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는 구야국(狗邪國 또는 拘邪國)이라고 전한다. 본서 권4 신라본기4 법흥왕 19년(532)조에는 금관국의 왕 김구해(金仇亥)가 왕비 및 세 아들, 즉 맏아들 노종(奴宗), 둘째 아들 무덕(武德), 막내아들 무력(武力)과 함께 나라의 창고에 있던 보물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고 한다. 이때 금관국은 금관군(金官郡)으로 편제되었으며, 문무왕 20년(680)에 금관소경(金官小京)으로 삼았다. 본서 권7 신라본기7 문무왕 20년(680)조에는 “가야군(加耶郡)에 금관소경(金官小京)을 두었다”라고 하여, 금관군을 가야군이라고도 했음을 알 수 있다.
수로왕(首露王): 금관국(가락국)의 건국 시조. 『삼국유사』 권2 기이2 가락국기조에 그 탄생부터 즉위, 혼인, 사망에 이르는 과정이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그에 의하면, 서기 42년에 해당하는 후한 광무제 건무 18년 임인년(壬寅年)에 하늘로부터 구지봉(龜旨峯)에 내려온 여섯 개의 황금알 가운데 가장 먼저 깨어났다고 하며, 9간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오른 후 아유타국에서 건너온 허황옥(許黃玉)을 왕비로 맞이들이고 158년 간 나라를 다스리다가 후한 헌제 건안 4년(199)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수로(首露)’라는 이름의 뜻에 대해, 가락국기에서는 여섯 개의 알 가운데 가장 먼저[首] 모습을 드러냈기에[露] ‘수로’라고 하였다고 했지만, 이는 후대인들이 한자의 의미를 빌려 윤색한 것이며, 실제로는 고유어를 음차한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한편 가락국기에는 본서에는 전하지 않는 설화로, 탈해가 신라의 왕이 되기 전에 수로왕의 왕위를 빼앗기 위해 가락국을 찾아왔다가 수로왕과의 둔갑술 겨룸에서 패해 신라로 달아났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구해왕(仇亥王): 금관국(金官國)의 마지막 왕이다. 본서 권제41 열전제1 김유신상(上)조에서 구차휴(仇次休)라고도 썼다고 하였다. 『삼국유사』 권제1 왕력에는 구충왕(仇衝王), 권제2 기이제2 가락국기조에 구형왕(仇衡王)이라고 전한다. 금관국의 시조 수로왕(首露王)의 9세손(世孫)이며, 『삼국유사』 가락국기조에 아버지는 감지왕(鉗知王)이고, 어머니는 출충(出忠) 각간(角干)의 딸 숙(淑)이라고 전하나, 각간은 신라의 관등이기 때문에 출충이 금관국에서 각간이었다고 전하는 기록은 그대로 믿기 어렵다.
김구해의 후손들은 신라에서 김씨(金氏) 성을 하사받고 진골에 편입되었으며, 그의 증손자인 김유신은 무열왕계와 결합하여 위세를 떨쳤을 뿐만 아니라 삼국통일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하대에 이르러 전통적인 김씨 진골과 구분하여 김구해의 후손들을 ‘신김씨(新金氏)’라고 불리면서 냉대를 받았다(선석열, 2001; 李文基, 2004; 이현태, 2006). 한편, 현재의 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의 왕산 기슭에 김구해의 무덤, 즉 구형왕릉(仇衡王陵)으로 전해지는 방형(方形)의 석축(石築)이 있으나, 현재 사실 여부를 정확하게 고증하기 어렵다(권덕영, 2007).
〈참고문헌〉
선석열, 2001, 「신라사 속의 가야인들 -김해김씨와 경주김씨-」, 『한국고대사 속의 가야』, 혜안
李文基, 2004, 「金官加耶系의 始祖 出自傳承과 稱姓의 變化」, 『新羅文化祭學術論文集』 25, 경주시·신라문화선양회·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이현태, 2006, 「新羅 中代 新金氏의 登場과 그 背景」, 『韓國古代史硏究』 42
권덕영, 2007, 「금관가야 '仇衡王陵' 전승과 역사화 과정」, 『大丘史學』 86
김구해의 후손들은 신라에서 김씨(金氏) 성을 하사받고 진골에 편입되었으며, 그의 증손자인 김유신은 무열왕계와 결합하여 위세를 떨쳤을 뿐만 아니라 삼국통일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하대에 이르러 전통적인 김씨 진골과 구분하여 김구해의 후손들을 ‘신김씨(新金氏)’라고 불리면서 냉대를 받았다(선석열, 2001; 李文基, 2004; 이현태, 2006). 한편, 현재의 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의 왕산 기슭에 김구해의 무덤, 즉 구형왕릉(仇衡王陵)으로 전해지는 방형(方形)의 석축(石築)이 있으나, 현재 사실 여부를 정확하게 고증하기 어렵다(권덕영, 2007).
〈참고문헌〉
선석열, 2001, 「신라사 속의 가야인들 -김해김씨와 경주김씨-」, 『한국고대사 속의 가야』, 혜안
李文基, 2004, 「金官加耶系의 始祖 出自傳承과 稱姓의 變化」, 『新羅文化祭學術論文集』 25, 경주시·신라문화선양회·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이현태, 2006, 「新羅 中代 新金氏의 登場과 그 背景」, 『韓國古代史硏究』 42
권덕영, 2007, 「금관가야 '仇衡王陵' 전승과 역사화 과정」, 『大丘史學』 86
양(梁)의 …… 금관군(金官郡)으로 삼았다: 본서 권4 신라본기4 법흥왕 19년(532)조에는 금관국의 왕 김구해(金仇亥)가 왕비 및 세 아들, 즉 맏아들 노종(奴宗), 둘째 아들 무덕(武德), 막내아들 무력(武力)과 함께 나라의 창고에 있던 보물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고 한다.
문무왕(文武王) …… 소경(小京)으로 삼았다: 본서 권7 신라본기7 문무왕 20년(680)조에는 “가야군(加耶郡)에 금관소경(金官小京)을 두었다”라고 하였다.
註) 192
김해소경(金海小京): 현재의 경상남도 김해시(金海市).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금관소경(金官小京)을 김해소경 혹은 김해경(金海京)으로 개명하였다. 다른 소경이 모두 3글자로 개명된 것으로 보아 전자보다 후자가 맞을 가능성이 크다. 고려 태조 23년(940)에 김해부(金海府)로 고쳤고, 뒤에 임해현(臨海縣)으로 낮췄다가 다시 승격시켜 군(郡)이 되었다. 성종 14년(995)에 김주(金州)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로 고쳤으며, 현종 3년(1012)에 낮추어 김주 방어사(金州防禦使)로 삼았다. 원종 11년(1270)에 방어사(防禦使) 김훤(金晅)이 밀성(密城, 현 경상남도 밀양시)의 반란을 진압하고, 또 삼별초(三別抄)를 막는 데 공이 있었으므로, 승격시켜 김녕도호부(金寧都護府)가 되었다. 충렬왕 19년(1293)에 현(縣)으로 강등되었다가 동 34년(1308)에 승격시켜 김주목(金州牧)이 되었다. 충선왕 2년(1310)에 여러 목(牧)을 도태(淘汰)시키면서, 다시 김해부가 되었다. 조선 태종 13년(1413)에 도호부로 고쳤다(『고려사』 권57 지11 지리2 경상도 김주; 『세종실록』 권150 지리지 경상도 진주목 김해도호부;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2 경상도 김해도호부). 그 중심지는 현재의 김해시 동상동, 서상동 일대로 추정된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통일신라시대 금관소경, 김해경에도 격자형 방(坊)이 구획되어 있었는데, 대체로 현재 김해 시내에 해당한다(山田隆文, 2008, 「新羅の九州五小京城郭の構造と實態について -統一新羅による計劃都市の復元硏究-」 『考古學論攷』 31, 奈良縣立橿原考古學硏究所, 32~35쪽).
註) 193
금관국(金官國): 현재의 경상남도 김해시(金海市)에 있었던 소국(小國). 가락국(伽落國) 혹은 가야(伽耶 혹은 加耶)라고도 하였다. 본서 김유신전에서는 남가야(南加耶)라고도 하였고, 강수전에 보이는 임나가량(任那加良)을 김해의 가야로 보기도 한다. 그밖에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남가라(南加羅 또는 南迦羅), 금관(金官), 수나라(須奈羅 또는 須那羅), 소나라(素奈羅)라고 전하고,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에는 임나가라(任那加羅)로 전하며, 『삼국지(三國志)』 권30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는 구야국(狗邪國 또는 拘邪國)이라고 전한다. 본서 권4 신라본기4 법흥왕 19년(532)조에는 금관국의 왕 김구해(金仇亥)가 왕비 및 세 아들, 즉 맏아들 노종(奴宗), 둘째 아들 무덕(武德), 막내아들 무력(武力)과 함께 나라의 창고에 있던 보물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고 한다. 이때 금관국은 금관군(金官郡)으로 편제되었으며, 문무왕 20년(680)에 금관소경(金官小京)으로 삼았다. 본서 권7 신라본기7 문무왕 20년(680)조에는 “가야군(加耶郡)에 금관소경(金官小京)을 두었다”라고 하여, 금관군을 가야군이라고도 했음을 알 수 있다.
註) 194
수로왕(首露王): 금관국(가락국)의 건국 시조. 『삼국유사』 권2 기이2 가락국기조에 그 탄생부터 즉위, 혼인, 사망에 이르는 과정이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그에 의하면, 서기 42년에 해당하는 후한 광무제 건무 18년 임인년(壬寅年)에 하늘로부터 구지봉(龜旨峯)에 내려온 여섯 개의 황금알 가운데 가장 먼저 깨어났다고 하며, 9간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오른 후 아유타국에서 건너온 허황옥(許黃玉)을 왕비로 맞이들이고 158년 간 나라를 다스리다가 후한 헌제 건안 4년(199)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수로(首露)’라는 이름의 뜻에 대해, 가락국기에서는 여섯 개의 알 가운데 가장 먼저[首] 모습을 드러냈기에[露] ‘수로’라고 하였다고 했지만, 이는 후대인들이 한자의 의미를 빌려 윤색한 것이며, 실제로는 고유어를 음차한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한편 가락국기에는 본서에는 전하지 않는 설화로, 탈해가 신라의 왕이 되기 전에 수로왕의 왕위를 빼앗기 위해 가락국을 찾아왔다가 수로왕과의 둔갑술 겨룸에서 패해 신라로 달아났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註) 195
구해왕(仇亥王): 금관국(金官國)의 마지막 왕이다. 본서 권제41 열전제1 김유신상(上)조에서 구차휴(仇次休)라고도 썼다고 하였다. 『삼국유사』 권제1 왕력에는 구충왕(仇衝王), 권제2 기이제2 가락국기조에 구형왕(仇衡王)이라고 전한다. 금관국의 시조 수로왕(首露王)의 9세손(世孫)이며, 『삼국유사』 가락국기조에 아버지는 감지왕(鉗知王)이고, 어머니는 출충(出忠) 각간(角干)의 딸 숙(淑)이라고 전하나, 각간은 신라의 관등이기 때문에 출충이 금관국에서 각간이었다고 전하는 기록은 그대로 믿기 어렵다.
김구해의 후손들은 신라에서 김씨(金氏) 성을 하사받고 진골에 편입되었으며, 그의 증손자인 김유신은 무열왕계와 결합하여 위세를 떨쳤을 뿐만 아니라 삼국통일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하대에 이르러 전통적인 김씨 진골과 구분하여 김구해의 후손들을 ‘신김씨(新金氏)’라고 불리면서 냉대를 받았다(선석열, 2001; 李文基, 2004; 이현태, 2006). 한편, 현재의 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의 왕산 기슭에 김구해의 무덤, 즉 구형왕릉(仇衡王陵)으로 전해지는 방형(方形)의 석축(石築)이 있으나, 현재 사실 여부를 정확하게 고증하기 어렵다(권덕영, 2007).
〈참고문헌〉
선석열, 2001, 「신라사 속의 가야인들 -김해김씨와 경주김씨-」, 『한국고대사 속의 가야』, 혜안
李文基, 2004, 「金官加耶系의 始祖 出自傳承과 稱姓의 變化」, 『新羅文化祭學術論文集』 25, 경주시·신라문화선양회·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이현태, 2006, 「新羅 中代 新金氏의 登場과 그 背景」, 『韓國古代史硏究』 42
권덕영, 2007, 「금관가야 '仇衡王陵' 전승과 역사화 과정」, 『大丘史學』 86
김구해의 후손들은 신라에서 김씨(金氏) 성을 하사받고 진골에 편입되었으며, 그의 증손자인 김유신은 무열왕계와 결합하여 위세를 떨쳤을 뿐만 아니라 삼국통일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하대에 이르러 전통적인 김씨 진골과 구분하여 김구해의 후손들을 ‘신김씨(新金氏)’라고 불리면서 냉대를 받았다(선석열, 2001; 李文基, 2004; 이현태, 2006). 한편, 현재의 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의 왕산 기슭에 김구해의 무덤, 즉 구형왕릉(仇衡王陵)으로 전해지는 방형(方形)의 석축(石築)이 있으나, 현재 사실 여부를 정확하게 고증하기 어렵다(권덕영, 2007).
〈참고문헌〉
선석열, 2001, 「신라사 속의 가야인들 -김해김씨와 경주김씨-」, 『한국고대사 속의 가야』, 혜안
李文基, 2004, 「金官加耶系의 始祖 出自傳承과 稱姓의 變化」, 『新羅文化祭學術論文集』 25, 경주시·신라문화선양회·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이현태, 2006, 「新羅 中代 新金氏의 登場과 그 背景」, 『韓國古代史硏究』 42
권덕영, 2007, 「금관가야 '仇衡王陵' 전승과 역사화 과정」, 『大丘史學』 86
註) 197
양(梁)의 …… 금관군(金官郡)으로 삼았다: 본서 권4 신라본기4 법흥왕 19년(532)조에는 금관국의 왕 김구해(金仇亥)가 왕비 및 세 아들, 즉 맏아들 노종(奴宗), 둘째 아들 무덕(武德), 막내아들 무력(武力)과 함께 나라의 창고에 있던 보물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고 한다.
註) 199
문무왕(文武王) …… 소경(小京)으로 삼았다: 본서 권7 신라본기7 문무왕 20년(680)조에는 “가야군(加耶郡)에 금관소경(金官小京)을 두었다”라고 하였다.
주제분류
- 정치>행정>군현>군
- 정치>왕실>국왕>국명·연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