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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무군
양무군(陽武郡)註 363註 364은 본래 백제(百濟)의 도무군(道武郡)註 365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 도강군(道康郡)註 366이다. 거느리는 현[領縣]은 넷이다.
또는 동(同)이라고도 썼다.안현(固安縣)註 367은 본래 백제(百濟)의 고서이현(古西伊縣)註 368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죽산현(竹山縣)註 369이다.
탐진현(耽津縣)註 370은 본래 백제(百濟)의 동음현(冬音縣)註 371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침명현(浸溟縣)註 372은 본래 백제(百濟)의 새금현(塞琴縣)註 373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해남현(海南縣)註 374이다.
황원현(黃原縣)註 375은 본래 백제(百濟)의 황술현(黃述縣)註 376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註) 363
정덕본에는 “陽□郡”으로 한 글자의 판독이 불분명하다. 하지만, 이미 “文武王”의 경우에서의 “武”와 모양이 비슷하므로 여기에서는 “陽武郡”으로 교감 주해한다.바로가기
註) 364
양무군(陽武郡): 현재의 전라남도 강진군 병영면(정구복 외, 1997,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44쪽).바로가기
註) 365
도무군(道武郡): 신라 무주 양무군(陽武郡, 강진군 병영면)의 백제 때 이름.바로가기
註) 366
도강군(道康郡): 신라 무주 양무군(陽武郡, 강진군 병영면)의 고려 때 이름. 양무군(陽武郡)을 고려가 도강군(道康郡)으로 이름을 고쳐서 영암군(靈巖郡)의 속군으로 삼았다가, 명종 2년(1172)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별호는 금릉(金陵)이다(『고려사』 권57 지11 지리2 전라도 영암군 도강군). 조선 태종 17년에 병마절도사영(兵馬節度使營)을 도강현(道康縣)의 옛 치소로 옮기면서 이를 탐진현(耽津縣)과 합쳐서 강진현(康津縣)으로 이름을 고치고 탐진(耽津)을 치소로 삼았다. 세종 11년에 도강(道康)의 송계(松溪)로 옮겼다가 성종 6년에 다시 탐진(耽津)의 옛 치소로 옮겼는데, 도강폐현(道康廢縣)은 강진(康津) 북쪽 20리에 있었다(『신증동국여지승람』 권37 전라도 강진현).바로가기
註) 367
고안현(固安縣): 현재의 전라남도 해남군 마산면(정구복 외, 1997,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45쪽). 다른 기록에는 동안현(同安縣)이라고도 나온다.바로가기
註) 368
고서이현(古西伊縣): 신라 무주 양무군(陽武郡) 고안현(固安縣, 해남군 마산면)의 백제 때 이름.바로가기
註) 369
죽산현(竹山縣): 신라 무주 양무군(陽武郡) 고안현(固安縣, 해남군 마산면)의 고려 때 이름. 고안현(固安縣)을 고려에 와서 죽산현(竹山縣)으로 이름을 고쳐 영암군(靈巖郡)의 속현으로 삼았다(『고려사』 권57 지11 지리2 전라도 영암군 죽산현). 조선 때 해남현(海南縣)에 속하게 하였는데, 죽산폐현(竹山廢縣)은 해남현(海南縣) 북쪽 10리에 있었다(『신증동국여지승람』 권37 전라도 해남현 고적 죽산폐현).바로가기
註) 370
탐진현(耽津縣): 현재의 전라남도 강진군 강진읍(정구복 외, 1997,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45쪽). 고려가 영암군(靈巖郡)의 속현으로 삼았다가 뒤에 장흥부(長興府)에 속하게 하였다. 별호는 오산(鼇山)이다(『고려사』 권57 지11 지리2 전라도 장흥부 탐진현). 조선 태종 때 병마절도사영(兵馬節度使營)을 도강현(道康縣)의 옛 치소로 옮기면서 이를 탐진현(耽津縣)에 합쳐서 도강현(康津縣)으로 이름을 고치고 탐진(耽津)을 치소로 삼았다. 세종 때 도강(道康)의 송계(松溪)로 옮겼으며, 성종 때 다시 탐진(耽津)의 옛 치소로 옮겼다. 고종 때 군(郡)으로 개편되었다.바로가기
註) 371
동음현(冬音縣): 신라 무주 양무군(陽武郡) 탐진현(耽津縣, 강진군 강진읍)의 백제 때 이름.바로가기
註) 372
침명현(浸溟縣): 현재의 전라남도 해남군 현산면 고현리(정구복 외, 1997,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45쪽). 다른 기록에는 투빈(投濱)이라고도 나온다.바로가기
註) 373
새금현(塞琴縣): 신라 무주 양무군(陽武郡) 침명현(浸溟縣, 해남군 현산면)의 백제 때 이름. 『일본서기』 신공 49년조에 나오는 ‘침미다례(忱彌多禮)’를 ‘침명현’과 연결시켜 해남군 현산면 일대로 비정하는 견해가 많다(김영심, 2013, 74~78쪽). 최근 해남군 현산면 읍호리에서 대규모 사비기 석실 고분군이 조사되었다. 읍호리 고분군 중 고담고분군에서는 14기가 확인되었는데, 5세기 중·후엽에 해당하는 석곽 위주이다. 읍호고분군에서는 98기가 확인되었는데, 대체로 6세기 후반부터 7세기 전반의 석실 중심이다(정일, 2022, 101~114쪽). 읍호리 고분군 일대에는 고분군과 바로 인접한 읍호리 성지와 백포만 초입의 양쪽 산 정상부에 입지한 고다산성과 백방산성, 북쪽에 일평리성지(죽금성)가 있다. 백방산성과 고다산성은 읍호리와 백포만 일원을 살펴보기에 용이한 지점이므로 삼국시대 관방유적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양시은, 2022, 134~148쪽). 현산면 일대가 새금현이라는 백제 5방제 하의 지방행정단위의 중심지였음을 보여주는 고고자료가 확인되고 있다.
〈참고문헌〉
김영심, 2013, 「문헌자료로 본 침미다례의 위치」, 『백제학보』 9
정일, 2022, 「해남 읍호리 고담·읍호 고분 실체」, 『해남 현산에 깃든 마한소국 -新彌·忱彌·塞琴·浸溟-』, 해남 읍호리고분군 국가지정문화재 추진 국제학술대회 발표자료집, (재) 대한문화재연구원
양시은, 2022, 「읍호리 일대 성곽의 분포 양상과 학술적 가치」, 『해남 현산에 깃든 마한소국 -新彌·忱彌·塞琴·浸溟-』, 해남 읍호리고분군 국가지정문화재 추진 국제학술대회 발표자료집, (재) 대한문화재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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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374
해남현(海南縣): 신라 무주 양무군(陽武郡) 침명현(浸溟縣, 해남군 현산면)의 고려 때 이름. 침명현(浸溟縣)을 고려에 와서 해남현(海南縣)으로 이름을 고쳐서 영암군(靈巖郡)의 속현으로 삼았다(『고려사』 권57 지11 지리2 전라도 영암군 해남현). 조선 태종 9년에 진도현(珍島縣)에 합쳐서 해진현(海珍縣)으로 이름을 고치고 12년에 읍치(邑治)를 영암(靈巖) 속현 옥산(玉山, 해남군 삼산면) 지역(해남읍)으로 옮겼다가, 세종 19년에 다시 이를 나누어 현감(縣監)으로 삼았다. 옛 해남(海南)은 두륜산(頭輪山) 남쪽 해안가에 있었다(『신증동국여지승람』 권37 전라도 해남현). 고려의 해남현(海南縣)은 현재 두륜산(頭輪山) 서남쪽의 현산면 고현리에 해당한다. 둘레가 913척에 이르는 고다산성(高多山城)이 있었다고 하는데, 해남 현산면에 있는 고다산성은 둘레 450m의 테뫼식 산성으로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까지의 토기편이 많이 확인되었다(양시은, 2020, 「해남지역 관방유적의 역사적 의미와 활용방안」, 『호남고고학보』 66, 86쪽).바로가기
註) 375
황원현(黃原縣): 현재의 전라남도 해남군 황산면(이병도 역주, 1996, 『삼국사기』 하, 을유문화사, 249쪽). 신라 경덕왕 때 고친 이름을 고려에서 그대로 쓰고 영암군(靈巖郡)의 속군으로 삼았다(『고려사』 권57 지11 지리2 전라도 영암군 황원군). 뒤에 해남현(海南縣)에 속하게 하였는데, 황원폐현(黃原廢縣)은 현(縣) 서쪽 15리에 있었다(『신증동국여지승람』 권37 전라도 해남현 고적 황원폐현).바로가기
註) 376
황술현(黃述縣): 신라 무주 양무군(陽武郡) 황원현(黃原縣, 해남군 황산면)의 백제 때 이름.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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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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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http://db.history.go.kr/id/sa_001_0030_0020 (accessed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http://db.history.go.kr/id/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2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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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sa_001_0030_0020,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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