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주의 주·군·현·성
한산주(漢山州)註 052, 국원성(國原城)註 053[원주: 미을성(未乙省)註 054라고도 하고 탁장성(託長城)註 055이라고도 한다.], 남천현(南川縣)註 056[원주: 남매(南買)註 057라고도 한다.], 구성(駒城)註 058[원주: 멸오(滅烏)註 059라고도 한다.], 잉근내군(仍斤內郡)註 060, 술천군(述川郡)註 061[원주: 성지매(省知買)註 062라고도 한다.], 골내근현(骨乃斤縣)註 063, 양근현(楊根註 064縣)註 065[원주: 거사참(去斯斬)註 066이라고도 한다.], 금물내군(今勿內郡)註 067[원주: 만노(萬弩)註 068라고도 한다.], 도서현(道西縣)註 069[원주: 도분(都盆)註 070이라고도 한다.], 잉홀(仍忽)註 071, 개차산군(皆次山郡)註 072, 노음죽현(奴音竹縣)註 073, 나혜홀(奈兮忽)註 074, 사복홀(沙伏忽)註 075, 사산현(虵山縣)註 076, 매홀(買忽)註 077[원주: 수성(水城)이라고도 한다.], 당성군(唐城郡)註 078, 상홀(上忽)註 079[원주: 차홀(車忽)이라고도 한다.], 부산현(釜山縣)註 080[원주: 송촌활달(松村活達)註 081이라고도 한다.], 율목군(栗木郡)註 082[원주: 동사힐(冬斯肹)註 083, 잉벌노현(仍伐奴縣)註 084, 제차파의현(齊次巴衣縣)註 085, 매소홀현(買召忽縣)註 086[원주: 미추홀(彌鄒忽)註 087이라고도 한다.], 장항구현(獐項口縣)註 088[원주: 고사야홀차(古斯也忽次)註 089라고도 한다.], 주부토군(主夫吐郡)註 090, 수이홀(首尒忽)註 091, 검포현(黔浦縣)註 092, 동자홀현(童子忽縣)註 093[원주: 구사파의(仇斯波衣)註 094라고도 한다.], 평회압현(平淮押縣)註 095[원주: 별사파의(別史波衣)註 096라고도 하며 회(淮)를 유(唯)로도 쓴다.], 북한산군(北漢山郡)註 097[원주: 평양(平襄註 098)註 099이라고도 한다.], 골의내현(骨衣內縣)註 100, 왕봉현(王逢縣)註 101[원주: 개백(皆伯)註 102이라고도 한다. 한씨(漢氏) 미녀가 안장왕(安臧王)註 103을 맞이하였던 곳이다. 고로 왕봉(王逢)으로 이름하였다], 매성군(買省郡)註 104[원주: 마홀(馬忽)註 105이라고도 한다.], 칠중현(七重縣)註 106[원주: 난은별(難隱別)註 107이라고도 한다.], 파해평사현(波害平史縣)註 108[원주:액(頟), 액봉(頟蓬註 109)註 110이라고도 한다.], 천정구현(泉井口縣)註 111[원주: 어을매곶(於乙買串)註 112이라고도 한다.], 술이홀현(述尒忽縣)註 113[원주: 수니홀(首泥忽)註 114이라고도 한다.], 달을성현(達乙省縣)註 115[원주: 한씨(漢氏) 미녀가 높은 산마루에서 봉화를 놓고 안장왕(安臧王)註 116을 맞이하던 곳이다. 고로 후에 고봉(高烽)註 117이라 이름하였다.], 비성군(臂城郡)註 118[원주: 마홀(馬忽)註 119이라고도 한다.], 내을매(內乙買)註 120[원주: 내이미(內尒米)註 121라고도 한다.], 철원군(鐵圓郡)註 122[원주: 모을동비(毛乙冬非)註 123라고도 한다.], 양골현(梁骨縣)註 124, 승량현(僧梁縣)註 125[원주: 비물(非勿)註 126이라고도 한다.], 공목달(功木達)註 127[원주: 웅섬산(熊閃山)註 128이라고도 한다.], 부여군(夫如郡)註 129, 어사내현(於斯內縣)註 130[원주: 부양(斧壤)註 131이라고도 한다.], 오사함달(烏斯含達)註 132, 아진압현(阿珍押縣)註 133[원주: 궁악(窮嶽)註 134이라고도 한다.], 소읍두현(所邑豆縣)註 135, 이진매현(伊珍買縣)註 136, 우잠군(牛岑郡)註 137[원주: 우령(牛嶺)註 138이라고도 하고 또는 수지의(首知衣)註 139라고도 한다.], 장항현(獐項縣)註 140[원주: 고사야홀차(古斯也忽次)註 141라고도 한다.], 장천성현(長淺城縣)註 142[원주: 야야(耶耶)註 143라고도 하고 야아(夜牙)註 144라고도 한다.], 마전천현(麻田淺縣)註 145[원주: 이사파홀(泥沙波忽)註 146이라고도 한다.], 부소갑(扶蘇岬)註 147, 약지두치현(若只頭恥縣)註 148[원주: 삭두(朔頭)註 149라고도 하고 의두(衣頭)註 150라고도 한다.], 굴어압(屈於押)註 151[원주: 홍서(紅註 152西)註 153라고도 한다.], 동비홀(冬比忽)註 154, 덕물현(德勿縣)註 155, 진림성현(津臨城縣)註 156[원주: 오아홀(烏阿忽)註 157이라고도 한다.], 혈구군(穴口郡)註 158[원주: 갑비고차(甲比古次)註 159라고도 한다.], 동음나현(冬音奈縣)註 160[원주: 휴음(休陰)註 161이라고도 한다.], 고목근현(高木根縣)註 162[원주: 달을참(達乙斬)註 163이라고도 한다.], 수지현(首知縣)註 164[원주: 신지(新知)註 165라고도 한다.], 대곡군(大谷郡)註 166[원주: 다지홀(多知忽)註 167이라고도 한다.], 수곡성현(水谷城縣)註 168[원주: 매단홀(買旦註 169忽)註 170이라고도 한다.], 십곡현(十谷縣)註 171[원주: 덕돈홀(德頓忽)註 172이라고도 한다.], 동음홀(冬音忽)註 173[원주: 시염성(豉鹽城)註 174이라고도 한다.], 도랍현(刀臘縣)註 175[원주: 치악성(雉嶽城)註 176이라고도 한다.], 오곡군(五谷郡)註 177[원주: 우차탄홀(于註 178次呑註 179忽)註 180이라고도 한다.], 내미홀(內米忽)註 181[원주: 지성(池城)註 182이라고도 하고 장지(長池)註 183라고도 한다.], 한성군(漢城郡)註 184[원주: 한홀(漢忽)註 185이라고도 하고 식성(息城)註 186이라고도 하고 내홀(乃忽)註 187이라고도 한다.], 휴류성(鵂鶹城)註 188[원주: 조파의(租波衣)註 189라고도 하고 휴암군(鵂巖郡)註 190이라고도 한다.], 장새현(獐塞縣)註 191[원주: 고소어(古所於)註 192라고도 한다.], 동홀(冬忽)註 193[원주: 우동어홀(于冬於忽)註 194이라고도 한다.], 금달(今達)註 195[원주: 신달(薪達)註 196이라고도 하고 식달(息達)註 197이라고도 한다.], 구을현(仇乙峴)註 198[원주: 굴천(屈迁)註 199이라고도 한다.] 지금[고려]의 풍주(豐州)註 200이다. 궐구(闕口)註 201 지금[고려]의 유주(儒州)註 202이다. 율구(栗口)註 203[원주: 율천(栗川)註 204이라고도 한다.] 지금[고려]의 은율현(殷栗縣)註 205이다. 장연(長淵)註 206 지금[고려]까지 그대로 따른다. 마경이(麻耕伊)註 207 지금[고려]의 청송현(靑松縣)註 208이다. 양악(楊岳)註 209 지금[고려]의 안악군(安嶽郡)註 210이다. 판마곶(板麻串)註 211 지금[고려]의 가화현(嘉禾縣)註 212이다. 웅한이(熊閑伊)註 213 지금[고려]의 수녕현(水寧縣)註 214이다. 옹천(甕迁)註 215 지금[고려]의 옹진현(甕津縣)註 216이다. 부진이(付珍伊)註 217 지금[고려]의 영강현(永康縣)註 218이다. 곡도(鵠島)註 219 지금[고려]의 백령진(白嶺鎭)註 220이다. 승산(升山)註 221 지금[고려]의 신주(信州)註 222이다. 가화압(加火押註 223)註 224, 부사파의현(夫斯波衣縣)註 225[원주:구사현(仇史峴)註 226이라고도 한다.]
한산주(漢山州) : 통일신라의 한주(漢州)에 상응하는 고구려 지명이라고 한다.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에는 ‘한산군(漢山郡)으로 나오며,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에는 고구려 시기의 군명으로 북한산군(北漢山郡)이라는 명칭도 나온다. 북한산군은 통일신라의 한양군(漢陽郡)에 상응하는 명칭으로 한강 북쪽의 아차산 일대로 비정된다. 이 기사의 ‘한산주’는 북한산군과는 구별되는 다른 행정구역을 지칭하는 것이다. 한강유역에 설치된 신라의 광역행정구역은 신주(新州: 553~637년), 한산주(漢山州: 637~757년), 한주(漢州: 757년 이후)로 변천하였고, 치소도 한강 북쪽의 아차산(北漢山)과 경기도 이천(南川: 南買)을 오가다가 7세기 중엽에 경기도 하남 이성산성 일대로 정해졌다. 통일신라 초에는 한강 남쪽에는 한산주의 치소가 있고, 북쪽에는 북한산군이 별도로 두어졌다. 이로 보아 이 기사의 ‘한산주’는 통일신라 초의 광역행정구역인 ‘한산주’를 염두에 둔 명칭으로 보인다. 본문의 고구려지 한산주의 저본 자료 성립 시기에 대해 종래 신문왕대(井上秀雄, 1974, 95쪽) 또는 경덕왕~흥덕왕대(김태식, 1997, 35~45쪽)로 보는 견해가 제기된 바 있다. 이에 대해 저본 자체는 신문왕 9년 무렵의 지방제도 정비 자료를 바탕으로 신문왕 9년에서 성덕왕대 전반 사이에 찬술되었고, 그 뒤 본서 지리지 찬자가 신라 경덕왕과 헌덕왕대, 태봉에서 새로 편제한 군·현에 대한 정보 등을 추가해 현전하는 고구려지 한산주조를 최종적으로 완성하였다고 파악하기도 한다(전덕재, 2021, 188~194쪽).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의 ‘한주’, ‘한산군’ 항목 참조.
〈참고문헌〉
井上秀雄, 1974, 「三國史記地理志の史料批判」, 『新羅史基礎硏究』,東出版
김태식, 1997, 「『삼국사기』 지리지 고구려조의 사료적 검토」, 『역사학보』 154
전덕재, 2021, 『三國史記 잡지·열전의 원전과 편찬』, 주류성
〈참고문헌〉
井上秀雄, 1974, 「三國史記地理志の史料批判」, 『新羅史基礎硏究』,東出版
김태식, 1997, 「『삼국사기』 지리지 고구려조의 사료적 검토」, 『역사학보』 154
전덕재, 2021, 『三國史記 잡지·열전의 원전과 편찬』, 주류성
국원성(國原城)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중원경(中原京)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미을성(未乙省)이나 탁장성(託長城)으로도 일컬었다고 한다. 국원성은 충주지역으로 비정되는데, 도성과 평지를 뜻하는 ‘국(國)’자와 ‘원(原)’자를 합친 합성어이다(이도학, 1988, 102~106쪽). 국원성은 명칭상 도성을 모방해 건설한 평지성을 지칭하는데, 남한강 좌안의 탑평리 일대에서 고구려 연화문와당이 출토되었고(장준식, 1998, 23~108쪽), 2010년에는 고구려 주거지가 조사된 바 있다(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 2013, 89~96쪽). 국원성은 남한강변의 탑평리 일대에 조영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1979년에 탑평리 부근에서 〈충주고구려비〉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로 보아 고구려가 남한강 수로를 활용해 남한강 중상류 유역에 대한 지방지배를 도모하고, 소백산맥을 넘어 신라와의 외교교섭을 전개하기 위한 평지거점으로 국원성을 조영한 것으로 파악된다(여호규, 2002; 2021, 54~55쪽).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의 ‘중원경’ 항목 참조.
〈참고문헌〉
장준식, 1998, 『新羅中原京硏究』, 학연문화사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 2013, 『충주 탑평리유적(중원경 추정지) 발굴조사보고서』
이도학, 1988, 「永樂6年 廣開土王의 南征과 國原城」, 『孫寶基博士停年紀念韓國史學論叢』
여호규, 2002, 「한국 고대의 지방도시」, 『강좌 한국고대사(7)』,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여호규, 2021, 「고구려의 남평양 건설과 운영」, 『역사문화연구』 79
〈참고문헌〉
장준식, 1998, 『新羅中原京硏究』, 학연문화사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 2013, 『충주 탑평리유적(중원경 추정지) 발굴조사보고서』
이도학, 1988, 「永樂6年 廣開土王의 南征과 國原城」, 『孫寶基博士停年紀念韓國史學論叢』
여호규, 2002, 「한국 고대의 지방도시」, 『강좌 한국고대사(7)』,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여호규, 2021, 「고구려의 남평양 건설과 운영」, 『역사문화연구』 79
남천현(南川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황무현(黃武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경기도 이천시 일대로 비정된다. 본서 신라본기 등에는 ‘남천(南川)’이 삼국시기 신라의 지명으로 다수 나온다. 본문에서 보듯이 고구려시기에는 국원성(國原城)의 영현(領縣)으로 나오지만, 본서 권35 잡지4 지리2의 한주조에는 한주(漢州) 치소(治所)의 직할현으로 나와 영속 관계에 차이가 있다. 이에 남천현이 본래 국원성의 영현이었을 가능성을 상정하기도 한다(김태식, 1997, 「『삼국사기』 지리지 고구려조의 사료적 검토」, 『역사학보』 154). 본서 권35 잡지4 지리2의 한주 ‘남천현’ 항목 참조.
남매(南買) : 신라 한주 소속 황무현(黃武縣)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는 남천현(南川縣)의 다른 이름이다. 남매의 ‘매(買)’는 남천현의 ‘천(川)’에 상응하는 고구려의 고유어로 강[川]이나 물[水]을 뜻한다(도수희, 2005, 497~498쪽). 『일본서기』 권19 흠명기 13년 시세조에 우두방(牛頭方: 신라의 牛首州)과 함께 ‘니미방(尼彌方)’이 나오는데, ‘니미방’의 ‘‘니미(尼彌)’는 음이 비슷한 ‘南買(南川: 이천)’로서 568~604년경의 신주(新州: 임기환, 2002, 19쪽)나 660~664년경의 남천주(南川州; 여호규, 2021, 41쪽)를 지칭한다고 보기도 한다.
〈참고문헌〉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임기환, 2002, 「고구려·신라의 한강유역 경영과 서울」, 『서울학연구』 18
여호규, 2021, 「고구려의 ‘남평양(南平壤)’ 건설과 운영」, 『역사문화연구』 79
〈참고문헌〉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임기환, 2002, 「고구려·신라의 한강유역 경영과 서울」, 『서울학연구』 18
여호규, 2021, 「고구려의 ‘남평양(南平壤)’ 건설과 운영」, 『역사문화연구』 79
구성(駒城)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거서현(巨黍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지금의 경기도 용인시 일대로 비정된다. 본문에서 보듯이 고구려시기에는 국원성(國原城)의 영현(領縣)으로 나오지만, 본서 권35 잡지4 지리2 한주조에는 한주(漢州) 치소(治所)의 직할현으로 나와 영속 관계에 차이가 있다. 이에 구성이 본래 국원성의 영현이었을 가능성을 상정하기도 한다(김태식, 1997, 「『삼국사기』 지리지 고구려조의 사료적 검토」, 『역사학보』 154). 본서 권35 잡지4 지리2 한주 ‘거서현’ 항목 참조.
골내근현(骨乃斤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황효현(黃驍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경기도 여주시 소재지 일대로 비정된다. 통일신라 시기에 10정 군단의 하나인 골내근정(骨乃斤停)이 두어졌다. 골내근의 ‘골내(骨乃)’를 황효의 ‘황(黃)’에 상응하는 고유어로 보기도 한다(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503쪽). 본서 권35 잡지4 지리2의 한주 ‘황효현’ 항목 참조.
양근현(楊根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빈양현(濱陽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일대로 비정된다. 다만 본서 신라본기10에 원성왕 5년(789)에 도당 유학생 출신인 자옥(子玉)을 양근현 소수(小守)로 삼았다는 기사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경덕왕대 이후에도 ‘양근’이라는 지명이 공식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전덕재, 2021, 『三國史記 잡지·열전의 원전과 편찬』, 주류성, 117~124쪽). 본서 권35 잡지4 지리2의 한주 ‘빈양현’ 및 ‘양근현’ 항목 참조.
금물내군(今勿內郡)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흑양군(黑壤郡)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지금의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일대로 비정된다. 본서 지리2 한주 흑양군조에서는 ‘금물노(今勿奴)’로 나오며, ‘만노(萬弩)로도 일컬었다고 한다. 『고려사』 지리지1 양광도 청주목 진주(鎭州)조에는 ’수지(首知)‘나 ’신지(新知)‘라고도 일컬었다고 한다. 금물내의 ‘내(內)’, 금물노의 ’(奴)’, 만노의 ‘노(弩)’ 등은 흑양의 ‘양(壤)’에 상응하는 고구려의 고유어로 땅[地]을 뜻하며, 금물은 흑양의 ‘흑(黑)’에 상응하는 고유어로 중세 국어의 ‘거믈’에 해당한다(도수희, 2005, 499쪽). 진천 대모산성 및 그 북쪽의 송두리유적에서 고구려 토기가 출토되었는데(최종택, 2016, 4~28쪽), 고구려가 진천 지역을 영유한 사실을 반영한다. 한주의 치소(治所)가 있던 하남 선동[광주 선리]에서 금물노에 상응하는 ‘금만노(今万奴)’명 통일신라 명문기와가 출토되었는데(김규동·성재현, 2011, 564~567쪽; 박성현, 2021, 38~40쪽). 고구려 계통 지명이 통일신라 시기에도 널리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참고문헌〉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김규동·성재현, 2011, 「선리 명문와 고찰」, 『고고학지』 17
최종택, 2016, 「湖西地域 高句麗遺蹟의 調査現況과 歷史的 性格」, 『百濟硏究』 63
박성현, 2021, 「신라 통일기 한주(漢州)의 물자 이동과 조운(漕運)-하남 선동 출토 명문 기와를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121
〈참고문헌〉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김규동·성재현, 2011, 「선리 명문와 고찰」, 『고고학지』 17
최종택, 2016, 「湖西地域 高句麗遺蹟의 調査現況과 歷史的 性格」, 『百濟硏究』 63
박성현, 2021, 「신라 통일기 한주(漢州)의 물자 이동과 조운(漕運)-하남 선동 출토 명문 기와를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121
만노(萬弩) : 신라 한주 소속 흑양군(黑壤郡)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 금물내(今勿內)의 다른 이름이다. 본서 열전1 김유신전에 따르면 서현(舒玄)이 만노군(萬弩郡) 태수로 부임하였으며 그곳에서 유신이 태어났다고 한다.
도서현(道西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도서현(都西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지금의 충청북도 증평군 도안면 일대로 비정된다. 본서 권35 잡지4 지리2의 한주 ‘도서현’ 항목 참조.
잉홀(仍忽)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음성현(陰城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지금의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일대로 비정된다. 잉홀의 잉(仍)은 ‘내(乃)와 같은 발음으로 ‘음(陰)’의 훈을 새긴 ‘그늘’에 상응하는 표현이며, 잉홀의 ‘홀(忽)’은 음성의 ‘성(城)’에 해당하는 고구려의 고유어이다(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499~500쪽 및 503쪽). 본서 권35 잡지4 지리2의 한주 ‘음성현’ 항목 참조.
개차산군(皆次山郡)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개산군(介山郡)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지금의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일대로 비정된다. 한주의 치소(治所)가 있던 하남 선동[광주 선리]에서 통일신라 시기의 ‘개산(皆山)’명 명문기와가 출토되었고(김규동·성재현, 2011, 「선리 명문와 고찰」, 『고고학지』 17, 564~567쪽; 박성현, 2021, 38~40쪽), 안성 죽산의 봉업사지에서 고려 초기의 ‘개차관(皆次官)’명 명문기와가 출토된 바 있다(백종오, 1977, 93쪽; 서영일, 1999, 109쪽), 경덕왕대의 지명 개정 이후에도 그 이전 지명인 ‘개차산(皆次山)’이 널리 사용된 사실을 보여준다(전덕재, 2021, 117~124쪽). 본서 권35 잡지4 지리2의 한주 ‘개산군’ 항목 참조.
〈참고문헌〉
서영일, 1999, 『신라 육상 교통로 연구』, 학연문화사
전덕재, 2021, 『三國史記 잡지·열전의 원전과 편찬』, 주류성
백종오, 1997, 「안성 봉업사지 발굴조사」, 『’97 경기도박물관 발굴조사개보』
김규동·성재현, 2011, 「선리 명문와 고찰」, 『고고학지』 17
박성현, 2021, 「신라 통일기 한주(漢州)의 물자 이동과 조운(漕運)-하남 선동 출토 명문 기와를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121
〈참고문헌〉
서영일, 1999, 『신라 육상 교통로 연구』, 학연문화사
전덕재, 2021, 『三國史記 잡지·열전의 원전과 편찬』, 주류성
백종오, 1997, 「안성 봉업사지 발굴조사」, 『’97 경기도박물관 발굴조사개보』
김규동·성재현, 2011, 「선리 명문와 고찰」, 『고고학지』 17
박성현, 2021, 「신라 통일기 한주(漢州)의 물자 이동과 조운(漕運)-하남 선동 출토 명문 기와를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121
노음죽현(奴音竹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음죽현(陰竹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지금의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 일대로 비정된다. 본서 권35 잡지4 지리2의 한주 ‘음죽현’ 항목 참조.
나혜홀(奈兮忽)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백성군(白城郡)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지금의 경기도 안성시 소재지 일대로 비정된다. 나혜홀의 ‘나혜(奈兮)’는 백성의 ‘백(白)’의 훈에 상응하는 표현이며, ‘홀(忽)’은 백성의 ‘성(城)’에 해당하는 고구려의 고유어이다(도수희, 2005, 499~500쪽 및 503쪽). 안성 도기동산성에서 고구려가 백제 성곽을 재활용하여 성벽을 개축한 사실이 확인되었는데(김진영, 2017), 고구려 내혜홀의 치소일 가능성이 있다. 본서 권35 잡지4 지리2의 한주 ‘백성군’ 항목 참조.
〈참고문헌〉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김진영, 2017, 「안성 도기동산성의 발굴성과와 성벽구조에 대한 소고」, 『고구려발해연구』 58
〈참고문헌〉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김진영, 2017, 「안성 도기동산성의 발굴성과와 성벽구조에 대한 소고」, 『고구려발해연구』 58
매홀(買忽)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수성군(水城郡)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을 중심으로 하는 수원시 일원으로 비정된다. 매홀의 ‘매(買)‘는 수성의 ‘수(水)’에 상응하는 고구려 고유어로 물[水]이나 강[川]을 뜻하며, ‘홀(忽)’은 수성의 ‘성(城)’에 해당하는 고구려의 고유어이다(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497~500쪽).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華城市) 봉담면(峰潭邑) 일대이다(정구복 외, 1997,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40쪽). 본서 권35 잡지4 지리2의 한주 ‘수성군’ 항목 참조.
당성군(唐城郡)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당은군(唐恩郡)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남양면 일대로 비정된다. 본서 신라본기 권5~11에는 선덕왕에서 문무왕 8년(668) 6월 사이에 당항성(黨項城)이나 당항진(黨項津) 관련 기사가 다수 확인된다. 이에 당항성을 당성으로 개칭한 것은 문무왕 8년 6월 이후로 파악한 다음, 지리2 한주조나 지리4 고구려조에 고구려지명으로 전하는 군현명이 모두 고구려에서 사용한 지명이 아님을 보여주는 실례로 보는 견해가 있다(전덕재, 2021, 『三國史記 잡지·열전의 원전과 편찬』, 주류성, 193쪽). 또한 본서 신라본기10에 따르면 흥덕왕 4년(829)에 당은군을 당성진(唐城鎭)으로 삼았다고 하며, 신라본기11 헌안왕 2년(858)조나 열전10 궁예전에는 ‘당성군(唐城郡)’이나 ‘당성(唐城)’ 등의 명칭이 확인된다. 당성군은 당은군으로 고치기 이전의 명칭이 아니라, 흥덕왕대에 진(鎭)을 설치하면서 사용하기 시작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본서 권35 잡지4 지리2의 한주 ‘당은군’ 항목 참조.
상홀현(上忽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차성현(車城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지금의 경기도 평택시 안중면 일대로 비정된다. 본서 지리4 고구려조에서는 ‘차홀(車忽)’로도 일컬었다고 한다. 상홀이나 차홀의 ‘홀(忽)’은 차성의 ‘성(城)’에 해당하는 고구려의 고유어이다. ‘차(車)’의 중세 훈은 ‘술위’인데, ‘상(上)’의 훈인 ‘술이’의 훈음차에 해당한다고 한다(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499~500쪽 및 504쪽).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499~500쪽)(참고문헌 중복). 본서 권35 잡지4 지리2의 한주 ‘차성현’ 항목 참조.
부산현(釜山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진위현(振威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지금의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과 송탄동 일대로 비정된다. 송촌활달(松村活達)이라고도 일컬었다고 하며, 『고려사』 지리지1 양광도 수주(水州) 진위현조에는 옛날 연달부곡(淵達部曲)으로 금산현(金山縣)으로도 일컬었다고 한다. 본서 권35 잡지4 지리2의 한주 ‘진위현’ 항목 참조.
율목군(栗木郡)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율진군(栗津郡)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경기도 과천시 일대로 비정된다. 동사힐(冬斯肹)이라고도 일컬었다고 한다. 한주의 치소(治所)가 있던 하남 선동[광주 선리]에서 통일신라 시기의 ‘율목(栗木)’명 명문기와가 출토된 바 있는데(서울대학교 박물관, 2002, 20쪽; 전덕재, 2002, 27쪽; 김규동·성재현, 2011, 564~567쪽; 박성현, 2021, 38~40쪽), 경덕왕대의 지명 개정 이후에도 그 이전 지명이 널리 사용된 사실을 보여준다(전덕재, 2021, 117~124쪽). 본서 권35 잡지4 지리2의 한주 ‘율진군’ 항목 참조.
〈참고문헌〉
서울대학교 박물관, 2002,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명문기와』
전덕재, 2021, 『三國史記 잡지·열전의 원전과 편찬』, 주류성
전덕재, 2002,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명문기와 고찰」,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명문기와』, 서울대학교 박물관
김규동·성재현, 2011, 「선리 명문와 고찰」, 『고고학지』 17
박성현, 2021, 「신라 통일기 한주(漢州)의 물자 이동과 조운(漕運)-하남 선동 출토 명문 기와를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121
〈참고문헌〉
서울대학교 박물관, 2002,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명문기와』
전덕재, 2021, 『三國史記 잡지·열전의 원전과 편찬』, 주류성
전덕재, 2002,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명문기와 고찰」,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명문기와』, 서울대학교 박물관
김규동·성재현, 2011, 「선리 명문와 고찰」, 『고고학지』 17
박성현, 2021, 「신라 통일기 한주(漢州)의 물자 이동과 조운(漕運)-하남 선동 출토 명문 기와를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121
잉벌노현(仍伐奴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곡양현(穀壤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지금의 서울시 금천구 일대로 비정된다. 잉벌노의 ’(奴)’는 곡양의 ‘양(壤)’에 상응하는 고구려의 고유어로 땅[地]을 뜻하고, 잉벌(仍伐)은 ‘나벌’로 발음되며 곡양의 ‘곡(穀)’에 상응하는 표현으로 중세 국어 이후의 ‘나부래기’에 비교할 수 있다고 한다(도수희, 2005, 499·504쪽). 서울 금천구 시흥동의 호암산성에서 ‘잉벌내(仍伐內)’명 청동숟가락과 함께 ‘잉대내(仍大內)’나 ‘잉대내관(仍大內官)’ 등이 새겨진 통일신라 기와가 다량 출토되었다(서울대학교 박물관, 1990; 박성현, 2008, 107쪽). 잉벌노라는 고구려 계통 지명이 경덕왕의 지명 개칭 이후에도 널리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본서 권35 잡지4 지리2의 한주 ‘곡양현’ 항목 참조.
〈참고문헌〉
서울대학교박물관, 1990, 『한우물 호암산성 및 연지발굴조사보고서』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박성현, 2008, 「신라 성지 출토 문자자료의 현황과 분류」, 『목간과 문자』 2
〈참고문헌〉
서울대학교박물관, 1990, 『한우물 호암산성 및 연지발굴조사보고서』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박성현, 2008, 「신라 성지 출토 문자자료의 현황과 분류」, 『목간과 문자』 2
제차파의현(齊次巴衣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공암현(孔巖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지금의 서울시 강서구 가양동 일대로 비정된다. 제차파의의 ‘파의(巴衣)’는 공암의 ‘암(巖)’에 상응하는 고유어로 바위를 뜻하고, 제차(次)는 ‘공(孔)’에 상응하는 고유어로 추정된다(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500~501쪽 및 504~505쪽).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0 경기 양천현(陽川縣)조에 따르면 “현의 동쪽 10리 거리에 진산(津山)이 있는데 공암(孔巖)이라고도 일컫는다.”고 하며, “공암진(孔巖津)은 바위가 물 복판에 서 있고 구멍이 있어서 일컬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제차파의는 공암진 나루터에 있는 수중 바위를 지칭한다는 것이다. 본서 권35 잡지4 지리2의 한주 ‘공암현’ 항목 참조.
매소홀현(買召忽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소성현(邵城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지금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일대로 비정된다. 미추홀(彌鄒忽)로도 일컬었다고 한다. 매소홀이나 미추홀의 ‘홀(忽)’은 소성의 ‘성(城)’에 해당하는 고구려의 고유어이다(도수희, 2005, 499~500쪽). 한주의 치소(治所)가 있던 하남 선동[광주 선리]에서 통일신라 시기의 ‘매소홀(買召忽)’명 명문기와가 출토되었는데(김규동·성재현, 2011, 564~567쪽; 박성현, 2021, 38~40쪽), 경덕왕 지명 개칭 이후에도 고구려 계통 지명이 널리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본서 권35 잡지4 지리2의 한주 ‘소성현’ 항목 참조.
〈참고문헌〉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김규동·성재현, 2011, 「선리 명문와 고찰」, 『고고학지』 17
박성현, 2021, 「신라 통일기 한주(漢州)의 물자 이동과 조운(漕運)-하남 선동 출토 명문 기와를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121
〈참고문헌〉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김규동·성재현, 2011, 「선리 명문와 고찰」, 『고고학지』 17
박성현, 2021, 「신라 통일기 한주(漢州)의 물자 이동과 조운(漕運)-하남 선동 출토 명문 기와를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121
장항구현(獐項口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장구군(獐口郡)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지금의 경기도 안산시 일대로 비정된다. 고사야홀차(古斯也忽次)로도 일컬었다고 한다. 경덕왕대 지명 개칭 이전에는 ‘현(縣)’이었다는 점에서 본래 율진군(栗津郡: 율목군, 경기도 과천시)의 영현이었을 수도 있다. 장항구의 ‘항구(項口)’는 사람의 목처럼 서해 쪽으로 기다랗게 뻗은 안산 일대의 지형을 지칭한다. 본서 권35 잡지4 지리2의 한주 ‘장구군’ 항목 참조.
고사야홀차(古斯也忽次)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장구군(獐口郡)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지명인 장항구현(獐項口縣)의 다른 이름이다. 고사야홀차의 ‘홀차(忽次)’는 장항구의 ‘구(口)’에 상응하는 고유어로 바다 쪽으로 돌출한 지형인 ‘곶’을 뜻한다. 또 ‘고사(古斯)’는 장항구의 ‘장(獐)’에 상응하는 표현으로 중세 국어에서 노루를 ‘노로’라고 일컬었지만, 그 이전의 옛 새김이 ‘고소’일 수도 있다고 한다. 한주 소속 오관군(五關郡)의 영현인 장새(獐塞)의 다른 이름이 ‘고소어(古所於)’인 것도 이러한 가능성을 시사한다. 노루를 일컫는 일본어 ‘kusa’와도 비교된다고 한다(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501·505쪽).
주부토군(主夫吐郡)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장제군(長堤郡)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지금의 인천광역시 계양구 일대로 비정된다. 주부토의 ‘토(吐)’는 장제의 ‘제(堤)’에 상응하는 고유어로 현대 국어의 ‘둑’을 뜻하는 ‘도’에 해당하며, ‘주부(主夫)’는 ‘장(長)’을 뜻하는 고유어로 추정된다(도수희, 2005, 502·505쪽). 인천 계양산성에서 ‘주부토(主夫吐)’ 명문이 새겨진 통일신라 기와가 다량 출토되었는데(선문대학교 고고연구소, 2005; 서봉수·박종서·박햇님·김우락, 2010; 서봉수, 2020), 경덕왕대 지명 개칭 이후에도 종전 지명이 널리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본서 권35 잡지4 지리2의 한주 ‘장제군’ 항목 참조.
〈참고문헌〉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선문대학교박물관, 2005, 『인천 계양산성 동문지 내 집수정 출토 목간 보존처리 결과 보고』
박성현, 2010, 『신라의 거점성 축조와 지방제도의 정비』,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서봉수·박종서·박햇님·김우락, 2010, 「인천 계양산성 출토 기와와 문자자료에 대하여 - 4차 발굴조사 결과를 중심으로」, 『木簡과 文字』 6
서봉수, 2020, 「계양산성 발굴과 문자자료」, 『木簡과 文字』 25
김진웅, 2021, 「인천 계양산성의 조사현황과 성과」, 『先史와 古代』 65(해당 논문은 인용되지 않았습니다.)
〈참고문헌〉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선문대학교박물관, 2005, 『인천 계양산성 동문지 내 집수정 출토 목간 보존처리 결과 보고』
박성현, 2010, 『신라의 거점성 축조와 지방제도의 정비』,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서봉수·박종서·박햇님·김우락, 2010, 「인천 계양산성 출토 기와와 문자자료에 대하여 - 4차 발굴조사 결과를 중심으로」, 『木簡과 文字』 6
서봉수, 2020, 「계양산성 발굴과 문자자료」, 『木簡과 文字』 25
김진웅, 2021, 「인천 계양산성의 조사현황과 성과」, 『先史와 古代』 65(해당 논문은 인용되지 않았습니다.)
수이홀(首尒忽)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수성현(戍城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지금의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일대로 비정된다. 수이홀의 ‘홀(忽)’은 수성의 ‘성(城)’에 해당하는 고구려의 고유어이며, ‘수이(首尒)’나 ‘수(戍)’는 ‘상(上)’이나 ‘봉(峯)’의 훈인 ‘술이’를 나타낸 음차 표현으로 이해된다(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499~500쪽 및 504쪽). 본서 권35 잡지4 지리2의 한주 장제군 ‘수성현’ 항목 참조.
검포현(黔浦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김포현(金浦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경기도 김포시 소재지 일대로 비정된다. 본서 열전10 궁예전에는 897년(乾寧 4)에 궁예가 공암(孔巖: 서울시 강서구 가양동), 혈구(穴口: 강화도) 등과 함께 검포(黔浦)을 격파하였다고 나온다. 본서 권35 잡지4 지리2의 한주 ‘김포현’ 항목 참조.
동자홀현(童子忽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동성현(童城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지금의 경기도 김포시 하성면 일대로 비정된다. 구사파의(仇斯波衣)라고도 일컬었다고 한다. 동자홀의 ‘홀(忽)’은 동성의 ‘성(城)’에 해당하는 고구려의 고유어이다. 또 구사파의의 ‘구사(仇斯)를 ’동자(童子)‘를 뜻하는 고유어로 상정한 다음 일본어의 ’ko(子)‘에 비교하기도 한다(도수희, 2005, 499~500쪽 및 505쪽). 한편 한주의 치소(治所)가 있던 하남 선동[광주 선리]에서 통일신라 시기의 ‘동자(童子)’명과 ‘동성(童城)’명 명문기와가 동시에 출토되었는데(서울대학교 박물관, 2002, 19쪽; 전덕재, 2002, 27쪽; 김규동·성재현, 2011, 564~567쪽; 박성현, 2021, 38~40쪽), 경덕왕대 지명 개정 이후에 그 이전과 이후 지명이 혼용되던 양상을 보여준다. 본서 권35 잡지4 지리2의 한주 ‘동성현’ 항목 참조.
〈참고문헌〉
서울대학교 박물관, 2002,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명문기와』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전덕재, 2002,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명문기와 고찰」,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명문기와』, 서울대학교 박물관
김규동·성재현, 2011, 「선리 명문와 고찰」, 『고고학지』 17
박성현, 2021, 「신라 통일기 한주(漢州)의 물자 이동과 조운(漕運)-하남 선동 출토 명문 기와를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121
〈참고문헌〉
서울대학교 박물관, 2002,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명문기와』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전덕재, 2002,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명문기와 고찰」,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명문기와』, 서울대학교 박물관
김규동·성재현, 2011, 「선리 명문와 고찰」, 『고고학지』 17
박성현, 2021, 「신라 통일기 한주(漢州)의 물자 이동과 조운(漕運)-하남 선동 출토 명문 기와를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121
구사파의(仇斯波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동성현(童城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지명이라는 동자홀현(童子忽縣)의 다른 이름이다. 구사파의의 ‘구사(仇斯)’를 동자홀의 ’동자(童子)‘를 뜻하는 고유어로 상정한 다음 일본어의 ’ko(子)‘에 비교하기도 한다(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505쪽). 또 구사파의의 ‘파의(波衣)’는 바위나 고개를 뜻하는 ‘암(巖)’이나 ‘현(峴)’에 상응하는 고유어인데(도수희, 2005, 500~501쪽), 성(城)을 뜻하는 동자홀의 ‘홀(忽)’과 상응한 표현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본래 ‘구사파의’로 불리다가 거점 성곽을 축조하면서 ‘동자홀’로 이름이 바뀌었을 가능성이 있다.
평회압현(平淮押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분진현(分津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지금의 경기도 김포시(金浦市) 월곶면(月串面) 일대로 비정된다.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에는 ‘회(淮)’자가 ‘유(唯)’자로 표기되어 있다. ‘별사파의(別史波衣)’라고도 일컬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평회압의 ‘압(押)’은 험준한 산악을 뜻하는 ‘악(岳)’이나 ‘악(嶽)’에 상응하는 고유어, 별사파의의 ‘파의(波衣)’는 바위나 고개를 뜻하는 ‘암(巖)’이나 ‘현(峴)’에 상응하는 고유어로 각기 사용되는데(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500~501쪽), 여기에서는 고유어 ‘압’과 ‘파의’가 상응하는 사례로 나온다. 한편 ‘평회압’을 개정한 ‘분진(分津)’의 ‘진(津)’을 ‘압’이나 ‘파의’에 상응하는 표현으로 보기는 어려우므로 경덕왕대의 지명 개정 과정에서 지명의 의미가 바뀌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본서 권35 잡지4 지리2의 한주 ‘분진현’ 항목 참조.
별사파의(別史波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분진현(分津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지명이라는 평회압현(平淮押縣)의 다른 이름이다.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에는 평회압현의 ‘회(淮)’자가 ‘유(唯)’자로 표기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별사파의의 ‘파의(波衣)’는 바위나 고개를 뜻하는 ‘암(巖)’이나 ‘현(峴)’에 상응하는 고유어, 평회압의 ‘압(押)’은 험준한 산악을 뜻하는 ‘악(岳)’이나 ‘악(嶽)’에 상응하는 고유어로 각기 사용되는데(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500~501쪽), 여기에서는 고유어 ‘파의’와 ‘압’이 상응하는 사례로 나온다. 한편 별사파의의 별사를 ‘별리(別吏)’의 오기로 보아 ‘평(平)’의 훈에 상응하는 ‘벌리’로 새겨 읽기도 한다(도수희, 2005, 505~506쪽).
북한산군(北漢山郡)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한양군(漢陽郡)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군명(郡名)이라고 한다. 평양(平壤)으로도 일컬었다고 하는데, 한강 북쪽의 아차산 일대로 비정된다. 다만 ‘북한산군’은 고구려가 아니라 신라가 설치한 것으로 파악된다(전덕재, 2009, 107~116쪽; 윤성호, 2019, 306~309쪽). 고구려는 475~551년에 중랑천-아차산 일대에 ‘남평양’을 건설해 한강 유역을 경영하는 거점으로 삼았는데, 신라가 553년에 한강 유역을 차지한 다음, 고구려의 남평양이 설치되었던 한강 북쪽의 아차산 일대를 신주(新州)의 치소로 삼았다. 그 뒤 신라는 637년(선덕왕 6)에 신주를 한산주와 우수주로 분리하면서 한산주의 치소를 지금의 경기도 하남시 이성산성 일대로 옮기고, 아차산에는 북한산군의 치소를 둔 것으로 파악된다.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의 ‘한양군’ 항목 참조.
〈참고문헌〉
전덕재, 2009,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과 지배방식」, 『향토서울』 73
윤성호, 2019, 「아차산성 출토 명문기와를 통해 본 신라 하대의 북한산성」, 『한국사학보』 74
〈참고문헌〉
전덕재, 2009,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과 지배방식」, 『향토서울』 73
윤성호, 2019, 「아차산성 출토 명문기와를 통해 본 신라 하대의 북한산성」, 『한국사학보』 74
평양(平襄) : 통일신라 한주 소속 한양군(漢陽郡)의 고구려 시기 명칭이라는 북한산군(北漢山郡)의 다른 이름이다. 『고려사』 지리지1 양광도 남경유수관 양주조나 『세종실록』 권148 지리지 경도 한성부에는 ‘남평양성(南平壤城)’으로 나온다. 다만 ‘평양’의 본명이라는 북한산군은 고구려가 아니라 신라가 설치한 군으로 파악된다(전덕재, 2009, 107~116쪽; 윤성호, 2019, 306~309쪽). 이에 이 기사는 백제의 한성 도성을 ‘고구려의 남평양’으로 비정한 본서 권37 지리4의 백제조를 잘못 인용하였다고 보거나(임기환, 2002, 19~20쪽), 고려 건국 초에 한강 이북을 고구려 땅이라고 주장하는 과정에서 한강유역에 고구려의 남평양을 설정하는 역사인식이 형성되었다고 이해하는(윤경진, 2017) 등 사실성 자체를 부정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본서 권44 거칠부(居柒夫)전에는 551년에 백제는 고구려의 ‘평양(平壤)’, 신라는 ‘죽령(竹嶺)-고현(高峴)’의 10군(郡)을 각각 분할 점령하였다고 나온다. 『일본서기』 권19 흠명기 12·13년조에도 백제가 종전의 도성이 있던 ‘한성의 땅(漢城之地)’과 ‘평양(平壤)’ 등 6군을 공취하였다고 나오는데(노태돈, 2005, 184~185쪽), 이 기사는 660년대에는 이미 성립되어 있었다(여호규, 2021, 35~42쪽). 이 기사의 사실성 자체를 부인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최근 고고조사 현황을 종합하면 고구려가 백제의 한성 도성을 점령한 다음, 구릉성으로 군사적 활용도가 높은 몽촌토성만 재활용하고 평지성인 풍납토성을 폐기하였다. 이로 보아 고구려가 풍납토성에 상응하는 평지거점을 한강 북안에 구축하였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 기사의 ‘평양’은 이를 지칭한다고 추정된다. 이에 아차산 일대에 밀집 분포하는 고구려 보루성을 남평양의 외곽 방어시설로 파악하거나(최장열, 2002, 34~50쪽) 아차산4보루 출토 토기명문의 ‘후부도□형(後阝都□兄)’의 ‘후부’를 한강유역에 설치한 남평양(漢城 別都)의 행정구역으로 추정하기도 한다(최종택, 2008, 154쪽). 최근에는 동대문구 장안동 일대가 본래 중랑천의 하중도(河中島)였다는 사실에 주목해 이곳에 남평양을 건설하여 한강유역을 지배하기 위한 핵심 거점으로 삼았다고 보기도 한다(여호규, 2021, 48~65쪽).
〈참고문헌〉
임기환, 2002, 「고구려·신라의 한강유역 경영과 서울」, 『서울학연구』 18
최장열, 2002, 「한강 북안 고구려보루의 축조시기와 그 성격」, 『한국사론』(서울대 국사학과) 47
노태돈, 2005, 「고구려의 한성 지역 병탄과 그 지배 양태」, 『향토서울』 66
최종택, 2008, 「고고자료를 통해 본 백제 웅진도읍기 한강유역 영유설 재고」, 『백제연구』 47
전덕재, 2009,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과 지배방식」, 『향토서울』 73
윤경진, 2017, 「고구려 ‘南平壤’의 실체와 출현 배경」, 『서울과역사』 95
윤성호, 2019, 「아차산성 출토 명문기와를 통해 본 신라 하대의 북한산성」, 『한국사학보』 74
여호규, 2021, 「고구려의 ‘남평양(南平壤)’ 건설과 운영」, 『역사문화연구』 79
〈참고문헌〉
임기환, 2002, 「고구려·신라의 한강유역 경영과 서울」, 『서울학연구』 18
최장열, 2002, 「한강 북안 고구려보루의 축조시기와 그 성격」, 『한국사론』(서울대 국사학과) 47
노태돈, 2005, 「고구려의 한성 지역 병탄과 그 지배 양태」, 『향토서울』 66
최종택, 2008, 「고고자료를 통해 본 백제 웅진도읍기 한강유역 영유설 재고」, 『백제연구』 47
전덕재, 2009,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과 지배방식」, 『향토서울』 73
윤경진, 2017, 「고구려 ‘南平壤’의 실체와 출현 배경」, 『서울과역사』 95
윤성호, 2019, 「아차산성 출토 명문기와를 통해 본 신라 하대의 북한산성」, 『한국사학보』 74
여호규, 2021, 「고구려의 ‘남평양(南平壤)’ 건설과 운영」, 『역사문화연구』 79
골의내현(骨衣內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황양현(荒壤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지금의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일대로 비정된다. 본서 지리2 한주조에서는 ‘골의노(骨衣奴)’로 나온다. 골의내의 ‘내(內)’나 골의노의 ’(奴)’는 황양의 ‘양(壤)’에 상응하는 고구려의 고유어로 땅[地]을 뜻한다. ‘골의’는 황양의 ‘황(荒)’에 상응하는 고유어인데, 신라의 ‘거칠’부(居柒夫)를 ‘황’종(荒宗)으로 일컬은 사례로 보아 “골의~거질”을 거쳐 중세 국어의 ‘거칠’(거칠뫼=荒山: 『용비어천가』 8)로 이어진 것으로 추정된다(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499·506·514쪽). 본서 권35 잡지4 지리2의 한주 ‘황양현’ 항목 참조.
왕봉현(王逢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우왕현(遇王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지금의 경기도 고양시(高陽市) 행주내동(幸州內洞) 일대로 비정된다. 개백현(皆伯縣)이라고도 일컬었다고 한다. 본서 지리2 한주에는 ‘개백현’을 고구려시기의 본명이라 하여 차이가 있다. 본문에서 보듯이 한씨(漢氏) 미녀가 안장왕을 맞이한 데서 유래한 지명이라고 하는데, 6세기 전반에 한강 하류의 유력가가 왕실과의 통혼을 통해 중앙세력으로 진출한 사실을 전하는 것으로 이해된다(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462~466쪽). 한씨 미녀가 안장왕을 맞이하였다는 설화는 아래의 ‘달을성현(達乙省縣)’에도 나온다. 본서 권35 잡지4 지리2의 한주 ‘우왕현’ 항목 참조.
안장왕(安臧王) : 고구려 22대왕으로 재위 기간은 519~531년이다. 본문 기사를 안장왕이 한강 하류 일대의 유력가와 혼인을 맺어 왕권을 강화하려 한 사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462~466쪽). 본서 권19 고구려본기7 안장왕 즉위년조 참조.
매성군(買省郡)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내소군(來蘇郡)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인데, 지금의 경기도 양주시 고읍동(古邑洞) 일대로 비정된다. 본서 지리2 한주조에서는 매성현(買省縣)으로 나오며, ‘마홀(馬忽)’이라고도 일컬었다고 한다. 본서 신라본기7 문무왕 15년(675) 9월조에는 나당전쟁 최대의 격전지로 매소성(買肖城)이 나온는데, 글자 형태가 매성군(買省郡)과 유사하다는 점을 근거로 매소성을 매성군(내소군)의 치소로 비정되는 양주 대모산성으로 파악하기도 한다(이병도, 1977: 2012, 153쪽; 정구복 외, 1997c, 237쪽; 노태돈, 2009, 266쪽; 김병희, 2014, 197~215쪽). 한주의 치소(治所)가 있던 하남 선동[광주 선리]에서 통일신라 시기의 ‘매성(買省)’명 명문기와가 출토된 바 있는데(서울대학교 박물관, 2002, 20쪽; 전덕재, 2002, 27쪽; 김규동·성재현, 2011, 564~567쪽; 박성현, 2021, 38~40쪽), 경덕왕대의 지명 개정 이후에도 그 이전 지명이 널리 사용된 사실을 보여준다(전덕재, 2021, 117~124쪽). 본서 권35 잡지4 지리2의 한주 ‘내소군’ 항목 참조.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정구복 외, 1997c,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서울대학교 박물관, 2002,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명문기와』
노태돈, 2009, 『삼국통일전쟁사』, 서울대학교 출판부
박성현, 2010, 『신라의 거점성 축조와 지방제도의 정비』,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전덕재, 2021, 『三國史記 잡지·열전의 원전과 편찬』, 주류성
전덕재, 2002,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명문기와 고찰」,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명문기와』, 서울대학교 박물관
김규동·성재현, 2011, 「선리 명문와 고찰」, 『고고학지』 17
김병희, 2018, 「나당전쟁의 종료 시점에 대한 재검토 및 매소성 전역의 과정 연구」, 『한국고대사탐구』 30
박성현, 2021, 「신라 통일기 한주(漢州)의 물자 이동과 조운(漕運)-하남 선동 출토 명문 기와를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121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정구복 외, 1997c,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서울대학교 박물관, 2002,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명문기와』
노태돈, 2009, 『삼국통일전쟁사』, 서울대학교 출판부
박성현, 2010, 『신라의 거점성 축조와 지방제도의 정비』,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전덕재, 2021, 『三國史記 잡지·열전의 원전과 편찬』, 주류성
전덕재, 2002,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명문기와 고찰」,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명문기와』, 서울대학교 박물관
김규동·성재현, 2011, 「선리 명문와 고찰」, 『고고학지』 17
김병희, 2018, 「나당전쟁의 종료 시점에 대한 재검토 및 매소성 전역의 과정 연구」, 『한국고대사탐구』 30
박성현, 2021, 「신라 통일기 한주(漢州)의 물자 이동과 조운(漕運)-하남 선동 출토 명문 기와를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121
마홀(馬忽) : 신라 한주 내소군(來蘇郡)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는 매성군(買省郡)의 다른 이름이다. 견성군(堅城郡)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 비성군(臂城郡)의 이칭도 ‘마홀(馬忽)’이라고 하는데, 견성군=비성군의 치소로 비정되는 포천 반월산성에서 통일신라 시기의 ‘마홀(馬忽)’명 명문 기와가 출토된 바 있다. 매성군으로 비정되는 양주시와 견성군으로 비정되는 포천시는 인접하였다는 점에서 양자 모두 고구려 시기에는 마홀(馬忽)이라는 같은 행정구역의 관내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지 않다면 매성군을 마홀로 일컬었다는 본 기사가 두찬일 가능성이 있다.
칠중현(七重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중성현(重城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지명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일대로 비정된다. ‘난은별(難隱別)’이라고도 일컬었다고 하는데, ‘난은(難隱)’은 ‘7’을 뜻하는 순우리말 ‘나나’에 해당하며, ‘별(別)’은 ‘중(重)’에 상응하는 고유어로 중세국어 ‘ᄇᆞᆯ’에 해당한다(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502·512쪽). 본서 백제본기1 온조왕 18년조에 따르면 백제가 칠중하(七重河)에서 말갈을 격퇴하였다고 하는데, 칠중하는 칠중성(七重城: 파주 적성) 맞은편의 연천군 미산면-장남면 구간에서 일곱 차례나 곡류(曲流)하며 흐르는 임진강을 지칭한다. 칠중성은 ‘칠중하’라는 하천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칠중성은 7세기 중반에 신라 북방의 요충지로 고구려나 당과의 격전지로 자주 나온다. 본서 권35 잡지4 지리2의 한주 ‘중성현’ 항목 참조.
파해평사현(波害平史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파평현(波平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지금의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일대로 비정된다. ‘액봉(頟蓬)’으로도 일컬었다고 한다. 파해평사의 ‘파해(波害)’는 바위(巖, 石)를 뜻하고(도수희, 2005, 500~501쪽), ‘평사(平史)’는 지평(砥平)의 이칭인 지현(砥峴)의 ‘현(峴)’에 상응한다고 보아 고구려 광개토왕이 392년 7월에 함락시켰다는 백제의 석현성(石峴城)으로 비정하기도 한다(여호규, 2012, 181~182쪽). 392년에 광개토왕이 함락한 백제의 석현성이나 675년 당군이 매소성에서 신라군에게 패배한 다음 공격한 석현성이 모두 임진강 하류의 파주시 파평면 일대로 비정된다는 것이다. 본서 권35 잡지4 지리2의 한주 ‘파평현’ 항목 참조.
〈참고문헌〉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여호규, 2012, 「4세기 후반-5세기 초엽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 변천」, 『역사와 현실』 84
〈참고문헌〉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여호규, 2012, 「4세기 후반-5세기 초엽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 변천」, 『역사와 현실』 84
천정구현(泉井口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교하군(交河郡)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지명인데, 지금의 경기도 파주시 교하동과 탄현면 일대로 비정된다. 경덕왕 16년에 교하군으로 지명을 개칭하기 이전에는 현(縣)이었다는 점에서 본래 내소군(來蘇郡: 경기도 양주)이나 한양군(漢陽郡: 서울시 광진구)에 속한 영현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어을매곶(於乙買串)’으로도 일컬었다고 하는데, 어을매곶과 천정구(泉井口)의 지명 형태소 가운데 ‘어을(於乙)=천(泉)’은 ‘교(交)’의 옛 새김인 ‘ər[어울]’, ‘매(買)=정(井)’은 ‘강(江, 川)’이나 ‘물(水)’, ‘곶(串)=구(口)’는 바다 쪽으로 튀어나온 지형 등을 뜻한다. 어을매곶과 천정구는 임진강과 한강 합류처에 자리하면서 바다 쪽으로 튀어나온 오두산성 일대 지형에서 유래한 지명인데, 경덕왕대에 지명을 개칭할 때 두 강이 합류하는 ‘어을(於乙)’의 의미를 정확하게 표현하려고 ‘교(交)’로 한역(漢譯)한 것이다(도수희, 2005, 165~172쪽 및 214~226쪽). 광개토왕 시기에 고구려와 백제의 격전지였던 관미성(關彌城)의 ‘관(關’을 두 강이 합류하는 ‘어을(於乙)=교(交)’, ‘미(彌)’를 강을 뜻하는 ‘매(買)’에 상응한다고 보아 어을매=천정구와 같은 오두산성 일대로 비정하기도 한다(여호규, 2012, 182~186쪽). 파주 오두산성 일대는 삼국시기 이래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는 것이다. 파주 오두산성에서 통일신라 시기의 ‘천정(泉井)’명 명문기와가 출토되었고(경희대학교 고고미술사연구소, 1992; 박성현, 2008, 107쪽), 한주의 치소(治所)가 있던 하남 선동[광주 선리]에서도 ‘천구군(泉口郡)’명 통일신라 시기의 기와가 다수 출토되었다(서울대학교 박물관, 2002, 15쪽; 김규동·성재현, 2011, 564-567쪽; 박성현, 2021, 38~40쪽). 경덕왕대 지명 개정 이후에도 그 이전 지명이 널리 사용된 것이다(전덕재, 2021, 117~124쪽). 본서 권35 잡지4 지리2의 한주 ‘교하군’ 항목 참조.
〈참고문헌〉
경희대학교 고고미술사연구소, 1992, 『오두산성(Ⅰ)』
서울대학교 박물관, 2002,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명문기와』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전덕재, 2021, 『三國史記 잡지·열전의 원전과 편찬』, 주류성
박성현, 2008, 「신라 성지 출토 문자자료의 현황과 분류」, 『목간과 문자』 2
김규동·성재현, 2011, 「선리 명문와 고찰」, 『고고학지』 17
여호규, 2012, 「4세기 후반-5세기 초엽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 변천」, 『역사와 현실』 84
박성현, 2021, 「신라 통일기 한주(漢州)의 물자 이동과 조운(漕運)-하남 선동 출토 명문 기와를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121
〈참고문헌〉
경희대학교 고고미술사연구소, 1992, 『오두산성(Ⅰ)』
서울대학교 박물관, 2002,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명문기와』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전덕재, 2021, 『三國史記 잡지·열전의 원전과 편찬』, 주류성
박성현, 2008, 「신라 성지 출토 문자자료의 현황과 분류」, 『목간과 문자』 2
김규동·성재현, 2011, 「선리 명문와 고찰」, 『고고학지』 17
여호규, 2012, 「4세기 후반-5세기 초엽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 변천」, 『역사와 현실』 84
박성현, 2021, 「신라 통일기 한주(漢州)의 물자 이동과 조운(漕運)-하남 선동 출토 명문 기와를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121
어을매곶(於乙買串) : 신라 한주 소속 교하군(交河郡)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는 천정구현(泉井口縣)의 다른 이름이다. 어을매곶과 천정구(泉井口)의 지명 형태소 가운데 ‘어을(於乙)=천(泉)’은 ‘교(交)’의 옛 새김인 ‘ər[어울]’, ‘매(買)=정(井)’은 ‘강(江, 川)’이나 ‘물(水)’, ‘곶(串)=구(口)’는 바다 쪽으로 튀어나온 지형 등을 뜻한다. 어을매곶과 천정구는 임진강과 한강 합류처에 자리하면서 바다 쪽으로 튀어나온 오두산성 일대 지형에서 유래한 것이다(도수희, 2005, 165~172쪽 및 214~226쪽). 이에 광개토왕 시기에 고구려와 백제의 격전지였던 관미성(關彌城)의 ‘관(關’을 두 강이 합류하는 ‘어을(於乙)=교(交)’, ‘미(彌)’를 강을 뜻하는 ‘매(買)’에 상응한다고 보아 어을매=천정구와 같은 오두산성 일대로 비정하기도 한다(여호규, 2012, 182~186쪽).
〈참고문헌〉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여호규, 2012, 「4세기 후반-5세기 초엽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 변천」, 『역사와 현실』 84
〈참고문헌〉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여호규, 2012, 「4세기 후반-5세기 초엽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 변천」, 『역사와 현실』 84
술이홀현(述尒忽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봉성현(峯城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경기도 파주시 파주읍 일대로 비정된다. ‘수니홀(首泥忽)이라고도 일컬었다고 하며, 『고려사』 지리지1 양광도 남경유수관 양주 봉성현조에는 ’술미홀현(述彌忽縣)‘로도 나온다. 술이홀이나 수니홀의 술이(述尒)와 ’수니(首泥)‘는 ‘봉(峯)’의 훈을 새긴 고유어이며, ‘홀(忽)’은 봉성의 ‘성(城)’에 해당하는 고구려의 고유어이다(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499~500쪽 및 504쪽). 본서 권35 잡지4 지리2의 한주 ‘봉성현’ 항목 참조.
달을성현(達乙省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고봉현(高烽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경기도 고양시 관산동 일대로 비정된다. 본서 지리4 고구려조에 따르면 “한씨(漢氏) 미녀가 높은 산[高山] 위에서 봉화를 피워 안장왕을 맞이한 곳이라 하여 ‘고봉(高烽)’이라고 일컬었다고 한다. 대체로 6세기 전반에 한강 하류의 유력가가 왕실과의 통혼을 통해 중앙세력으로 진출한 사실을 전하는 설화로 이해된다(노태돈 1999, 462-466쪽). 달을성현의 ‘달(達)’은 고봉의 ‘고(高)’에 상응하는 고유어로 ‘높다(高)’ 또는 ‘뫼[山]’를 뜻한다(도수희, 2005, 498~499쪽). 한씨 미녀가 안장왕을 맞이하였다는 설화는 본서 권37 지리4 고구려조의 ‘개백현(皆伯縣)’에도 나온다.
〈참고문헌〉
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참고문헌〉
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안장왕(安臧王) : 고구려 22대왕으로 재위 기간은 519~531년이다. 본문 기사를 안장왕이 한강 하류 일대의 유력가와 혼인을 맺어 왕권을 강화하려 한 사실을 반영한다고 이해하기도 한다(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462~466쪽). 본서 권19 고구려본기7 안장왕 즉위년조 참조.
비성군(臂城郡)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견성군(堅城郡)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경기도 포천시 군내면 일대로 비정된다. 본문에서 보듯이 마홀(馬忽)이라고도 일컬었다고 하는데, 본서 권35 지리2 신라 한주조에는 ‘마홀군‘으로 일컬었다고 나온다. 마홀의 ‘홀(忽)’은 비성이나 견성의 ‘성(城)’에 해당하는 고구려의 고유어이다(도수희, 2005, 499~500쪽). 포천 반월산성(半月山城)에서 통일신라 시기의 ‘마홀’(馬忽)’명 기와가 출토되었는데(단국대학교 사학과, 1996; 박성현, 2008, 107쪽), 견성군=비성군의 치소(治所)로 파악된다(서영일, 1999, 243~249쪽; 박성현, 2010, 262쪽). 629년(진평왕 51, 영류왕 12) 8월에 신라가 점령하였다는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이 비성군(臂城郡)에 해당하는 것으로 파악되는데(서영일, 1996: 1999, 243~249쪽), 이에 따른다면 지금의 포천시 일대는 고구려가 629년까지 장악하였다가 신라에게 빼앗긴 것으로 이해된다. 본서 권35 잡지4 지리2의 한주 ‘견성군’ 항목 참조.
〈참고문헌〉
단국대학교 사학과, 1996, 『포천 반월산성 1차 발굴조사보고서』
서영일, 1999, 『신라 육상 교통로 연구』, 학연문화사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박성현, 2010, 『신라의 거점성 축조와 지방제도의 정비』,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서영일, 1996, 「抱川 半月山城 出土 ‘馬忽受解空口單’銘 기와의 考察」, 『사학지』 29
박성현, 2008, 「신라 성지 출토 문자자료의 현황과 분류」, 『목간과 문자』 2
〈참고문헌〉
단국대학교 사학과, 1996, 『포천 반월산성 1차 발굴조사보고서』
서영일, 1999, 『신라 육상 교통로 연구』, 학연문화사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박성현, 2010, 『신라의 거점성 축조와 지방제도의 정비』,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서영일, 1996, 「抱川 半月山城 出土 ‘馬忽受解空口單’銘 기와의 考察」, 『사학지』 29
박성현, 2008, 「신라 성지 출토 문자자료의 현황과 분류」, 『목간과 문자』 2
마홀(馬忽) : 신라 한주 소속 견성군(堅城郡)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는 비성군(臂城郡)의 다른 이름이다. 본서 권35 지리2 신라 한주조에는 ‘마홀군‘으로 나온다. 마홀의 ‘홀(忽)’은 비성이나 견성의 ‘성(城)’에 해당하는 고구려의 고유어이다(도수희, 2005, 499~500쪽). 포천 반월산성(半月山城)에서 통일신라 시기의 ‘마홀’(馬忽)’명 기와가 출토되었는데(단국대학교 사학과, 1996; 박성현, 2008, 107쪽), 견성군=비성군의 치소(治所)로 파악된다(서영일, 1999, 243~249쪽; 박성현, 2010, 262쪽).
〈참고문헌〉
단국대학교 사학과, 1996, 『포천 반월산성 1차 발굴조사보고서』
서영일, 1999, 『신라 육상 교통로 연구』, 학연문화사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박성현, 2010, 『신라의 거점성 축조와 지방제도의 정비』,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서영일, 1996, 「抱川 半月山城 出土 ‘馬忽受解空口單’銘 기와의 考察」, 『사학지』 29
박성현, 2008, 「신라 성지 출토 문자자료의 현황과 분류」, 『목간과 문자』 2
〈참고문헌〉
단국대학교 사학과, 1996, 『포천 반월산성 1차 발굴조사보고서』
서영일, 1999, 『신라 육상 교통로 연구』, 학연문화사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박성현, 2010, 『신라의 거점성 축조와 지방제도의 정비』,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서영일, 1996, 「抱川 半月山城 出土 ‘馬忽受解空口單’銘 기와의 考察」, 『사학지』 29
박성현, 2008, 「신라 성지 출토 문자자료의 현황과 분류」, 『목간과 문자』 2
내을매(內乙買)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사천현(沙川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지금의 경기도 동두천시 송내동 일대로 비정된다. ‘내이미(內尒米)’로도 일컬었다고 한다. 내을매와 매이미의 내을(內乙)=내이(內尒)는 사천의 ‘사(沙)’, 매(買)=미(米)는 ‘천(川)’에 상응하는 고유어이다(도수희, 2005, 497~498쪽). 이에 〈광개토왕릉비〉 영락6년(396)조의 백제 58성 가운데 하나인 미사성(彌沙城)의 ‘미(彌)’가 매(買)=미(米)=천(川), ‘사(沙)’는 내을(內乙)=내이(內尒)=사(沙)에 각각 상응한다고 보아 사천현 일대로 비정하기도 한다(여호규, 2012, 192쪽). 또 『일본서기』 권19 흠명천황 13년조에 나오는 신라의 니미방(尼彌方)을 ‘내이미’과 음이 유사하다고 보아 동두천 일대로 비정하기도 한다(전덕재, 2009, 109~110쪽).
〈참고문헌〉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전덕재, 2009,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과 지배방식」, 『향토서울』 73
여호규, 2012, 「4세기 후반-5세기 초엽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 변천」, 『역사와 현실』 84
〈참고문헌〉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전덕재, 2009,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과 지배방식」, 『향토서울』 73
여호규, 2012, 「4세기 후반-5세기 초엽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 변천」, 『역사와 현실』 84
내이미(內尒米) : 신라 한주 견성군(堅城郡) 소속 사천현(沙川縣)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는 내을매(內乙買)의 다른 이름이다. 내이미와 매을매의 내이(內尒)=내을(內乙)은 사천의 ‘사(沙)’, 미(米)=매(買)는 ‘천(川)’에 상응하는 고유어이다(도수희, 2005, 497~498쪽). 이에 〈광개토왕릉비〉 영락6년(396)조의 백제 58성 가운데 하나인 미사성(彌沙城)의 ‘미(彌)’가 매(買)=미(米)=천(川), ‘사(沙)’는 내을(內乙)=내이(內尒)=사(沙)에 각각 상응한다고 보아 사천현 일대로 비정하기도 한다(여호규, 2012, 192쪽). 또 『일본서기』 권19 흠명천황 13년조에 나오는 신라의 니미방(尼彌方)을 ‘내이미’와 음이 유사하다고 보아 동두천 일대로 비정하기도 한다(전덕재, 2009, 109~110쪽).
〈참고문헌〉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전덕재, 2009,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과 지배방식」, 『향토서울』 73
여호규, 2012, 「4세기 후반-5세기 초엽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 변천」, 『역사와 현실』 84
〈참고문헌〉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전덕재, 2009,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과 지배방식」, 『향토서울』 73
여호규, 2012, 「4세기 후반-5세기 초엽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 변천」, 『역사와 현실』 84
철원군(鐵圓郡)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철성군(鐵城郡)’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지명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鐵原邑) 사요리(四要里) 일대로 비정된다. 그런데 본서에는 경덕왕대보다 늦은 시기인 진성왕 9년 8월조, 효공왕 7년조와 효공왕 9년 7월조, 열전10 궁예전 등에 철성군으로 고치기 이전의 ‘철원’이라는 지명이 다수 확인된다. 이로 보아 ‘철원군’이 고구려 시기의 지명이라는 본서의 기사는 오류일 가능성이 있다. 모을동비(毛乙冬非)’로도 일컬었다고 한다.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 ‘철원군’ 항목 참조.
양골현(梁骨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동음현(洞陰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지금의 경기도 포천시 영중면 영평리(永平里) 일대로 비정된다. 다만 상기 기사에서는 양골현이 철원군(鐵圓郡) 다음에 기재되어 있고, 본서 권35 지리2 신라 한주에는 견성군(堅城郡: 포천시 군내면)의 영현(領縣)으로 나온다(김태식, 1997, 46쪽; 이정빈, 2019, 45~47쪽). 양골현(포천시 영중면)이 견성군(포천시 군내면)과 철원군(철원읍) 사이에 위치하였다는 점에서 경덕왕대에 양골현을 동음현으로 이름을 고치며 철원군에서 견성군으로 소속을 바꾸었을 가능성이 있다. 한주의 치소(治所)가 있던 하남 선동[광주 선리]에서 통일신라 시기의 ‘양골(梁骨)’명 명문기와가 출토된 바 있는데(김규동·성재현, 2011, 564~567쪽; 박성현, 2021, 38~40쪽), 경덕왕대의 지명 개정 이후에도 그 이전 지명이 널리 사용된 사실을 보여준다(전덕재, 2021, 117~124쪽).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 ‘동음현’ 항목 참조.
〈참고문헌〉
전덕재, 2021, 『三國史記 잡지·열전의 원전과 편찬』, 주류성
김태식, 1997, 「『삼국사기』 지리지 고구려조의 사료적 검토」, 『역사학보』 154
김규동·성재현, 2011, 「선리 명문와 고찰」, 『고고학지』 17
이정빈, 2019, 「임진강·한탄강 유역의 고구려 지명과 그 의미 - 경기도 연천 지역을 중심으로」, 『사학연구』 134
박성현, 2021, 「신라 통일기 한주(漢州)의 물자 이동과 조운(漕運)-하남 선동 출토 명문 기와를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121
〈참고문헌〉
전덕재, 2021, 『三國史記 잡지·열전의 원전과 편찬』, 주류성
김태식, 1997, 「『삼국사기』 지리지 고구려조의 사료적 검토」, 『역사학보』 154
김규동·성재현, 2011, 「선리 명문와 고찰」, 『고고학지』 17
이정빈, 2019, 「임진강·한탄강 유역의 고구려 지명과 그 의미 - 경기도 연천 지역을 중심으로」, 『사학연구』 134
박성현, 2021, 「신라 통일기 한주(漢州)의 물자 이동과 조운(漕運)-하남 선동 출토 명문 기와를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121
승량현(僧梁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동량현(㠉梁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지명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경기도 연천군 인목면 갈현리(북한의 강원도 철원군 갈현리) 일대로 비정된다. 다만 이 기사와 본서 지리4 고구려조 이외에는 ‘승량현’이라는 지명이 확인되지 않는다. ‘비물(非勿)’이라고도 일컬었다고 하는데, ‘비(非)’가 ‘승려(僧)’의 뜻으로 쓰였을 가능성을 상정하며 중세국어 ‘비구(比丘)’와 연관시키기도 한다(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507쪽).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 ‘동량현’ 항목 참조.
공목달(功木達)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공성현(功城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 하는데, 지금의 경기도 연천군 연천읍 일대로 비정된다. 다만 이 기사와 본서 지리2 신라 한주조 이외에는 ‘공목달현’이라는 지명이 확인되지 않는다. ‘웅섬산(熊閃山)’으로도 일컬었다고 한다.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 ‘공성현’ 및 ‘공목달현’ 항목 참조.
부여군(夫如郡)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부평군(富平郡)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金化邑)으로 비정된다. 본서 신라본기11의 진성왕 9년 8월조와 열전10 궁예전 등에는 부여군의 다른 이름인 ‘부약군(夫若郡)’이나 ‘부약성(夫若城)’ 등이 나오는데, 진성왕 9년(895년) 8월에 궁예(弓裔)가 부약 등 한주(漢州)의 10여 군현을 함락하였다고 한다. 한편 한주의 치소(治所)가 있던 하남 선동[광주 선리]에서 ‘부여(夫如)’명 통일신라 명문기와가 출토되었다(김규동·성재현, 2011, 564~567쪽; 박성현, 2021, 38~40쪽).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 ‘부평군’ 항목 참조.
〈참고문헌〉
김규동·성재현, 2011, 「선리 명문와 고찰」, 『고고학지』 17
박성현, 2021, 「신라 통일기 한주(漢州)의 물자 이동과 조운(漕運)-하남 선동 출토 명문 기와를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121
〈참고문헌〉
김규동·성재현, 2011, 「선리 명문와 고찰」, 『고고학지』 17
박성현, 2021, 「신라 통일기 한주(漢州)의 물자 이동과 조운(漕運)-하남 선동 출토 명문 기와를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121
어사내현(於斯內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광평현(廣平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강원도 평강군 평강읍(북한의 강원도 평강군 평강리)로 비정된다. 부양(斧壤)으로도 일컬었다고 하는데, 본서 권35 지리2 고구려조에는 경덕왕대 개칭 이전의 본명이 부양(斧壤)으로 나와 차이가 있다. 어사내의 ‘내(內)’는 부양의 ‘양(壤)’에 상응하는 고유어로 땅[地]을 뜻한다(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499쪽).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 ‘광평현’ 항목 참조.
부양(斧壤) : 신라 한주 부평군 소속 광평현(廣平縣)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는 어사내현(於斯內縣)의 다른 이름이다. 어사내의 ‘내(內)’는 부양의 ‘양(壤)’에 상응하는 고유어로 땅[地]을 뜻한다(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499쪽).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의 ‘부양현’ 항목 참조.
오사함달(烏斯含達)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토산군(兎山郡)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지금의 황해도 금천군(金川郡) 토산면 토산리(兎山里; 북한의 황해북도 토산군 월성리) 일대로 비정된다. 오사함달의 ‘오사(烏斯)’를 ‘조사(鳥斯)’의 오기(誤記)로 상정한 다음, ‘조사(鳥斯)’와 그에 상응하는 ‘토(兎)’는 모두 ‘됴ᄉᆞ>둇>돝’를 음차 표기한 것으로 ‘저(猪: 돼지)’의 옛 새김인 ‘돋’을 뜻한다고 보기도 한다. 오사함달의 달(達)은 ‘산(山)’을 뜻한다(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498~499쪽 및 510~511쪽).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 ‘토산군(兎山郡)’ 및 ‘오사함달’ 항목 참조.
아진압현(阿珍押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안협현(安峽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으로 나온다. 궁악(窮嶽)으로도 일컬었다고 하는데, 아진압의 ‘압(押)’은 상고음이 ‘kap’, 중고음은 ‘ap’으로 ‘악(嶽)’을 뜻한다(도수희, 2005, 501쪽). 본서 신라본기6 문무왕 7년 10월조에 아진함성(阿珍含城), 신라본기7 문무왕 15년 9월조에 아달성(阿達城)이 나오는데, 모두 아진압현과 동일한 지명으로 파악된다(정구복 외, 1997c, 212쪽 및 237쪽).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의 ‘안협현(安峽縣)’ 및 ‘아진압현’ 항목 참조.
〈참고문헌〉
정구복 외, 1997c,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참고문헌〉
정구복 외, 1997c,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소읍두현(所邑豆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삭읍현(朔邑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으로 나오는데, 지금의 경기도 연천군 삭녕면 삭녕리(朔寧里; 북한의 강원도 철원군 삭녕리) 일대로 비정된다. 다만 이 기사와 본서 지리4 고구려조 이외에는 ‘소읍두현’이라는 지명이 확인되지 않는다. 본서 백제본기1 온조왕 22년 8월조의 석두성(石頭城) 및 초고왕 45년 2월과 10월조의 ‘사도성(沙道城)’을 모두 음의 유사상을 근거로 소읍두현과 같은 지명으로 보거나(정구복 외, 1997c, 626쪽; 정구복 외, 1997d, 605~606쪽), 사도성의 위치는 미상으로 처리하고 석두성만 소읍두현과 같은 지명이라고 보기도 한다(이병도, 1977: 2012, 405쪽).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의 ‘삭읍현’ 및 ‘소읍두현’ 항목 참조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정구복 외, 1997c,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정구복 외, 1997d,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정구복 외, 1997c,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정구복 외, 1997d,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이진매현(伊珍買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이천현(伊川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지금의 강원도 이천군(伊川郡) 이천면(북한의 강원도 이천군 이천리) 일대로 비정된다. 다만 이 기사와 본서 지리4 고구려조 이외에는 ‘이진매현’이라는 지명이 확인되지 않는다. 이진매현의 ‘매(買)’는 이천현의 ‘천(川)’에 상응하는 고유어로 강[川]이나 물[水]을 뜻한다(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497~498쪽).
우잠군(牛岑郡)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우봉군(牛峯郡)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황해도 금천군(金川郡) 우봉면(북한의 황해북도 금천군 현내리) 일대로 비정된다. 우령(牛嶺)이나 수지의(首知衣)라고도 일컬었다고 한다. ‘우잠’이라는 지명은 본서 신라본기8 문무왕 13년(673) 윤5월조(문무왕 13년 윤5월조 없음)와 효소왕 3년(694) 겨울조, 신라본기10 헌덕왕 18년(826) 7월조 등에서 확인된다. 경덕왕 16년(757) 지명 개칭 이후에도 종전의 ‘우잠’이라는 명칭이 널리 사용되었던 것이다.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 ‘우봉군’ 항목 참조.
장항현(獐項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임강현(臨江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경기도 장단군 강산면 임강리(북한의 황해북도 장풍군 임강리) 일대로 비정된다. 고사야홀차(古斯也忽次)라고도 일컬었다고 한다.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 ‘장항현’ 항목 참조.
고사야홀차(古斯也忽次) : 신라 한주 우봉군 소속 임강현(臨江縣)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는 장항현(獐項縣)의 다른 이름이다. 고사야홀차의 ‘홀차(忽次)’는 장항의 ‘항(項)’에 상응하는 고유어로 바다 쪽으로 돌출한 지형인 ‘곶’을 뜻한다. 또 ‘고사(古斯)’는 장항의 ‘장(獐)’에 상응하는 표현으로 중세 국어에서 노루를 ‘노로’라고 일컬었지만, 그 이전의 옛 새김이 ‘고소’일 수도 있다고 한다. 한주 소속 오관군(五關郡)의 영현인 장새(獐塞)의 다른 이름이 ‘고소어(古所於)’인 것도 이를 시사하며, 노루를 일컫는 일본어 ‘kusa’와도 비교된다고 한다(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501·505쪽).
장천성현(長淺城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장단현(長湍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일대로 비정된다. 야야(耶耶)나 야아(夜牙)로도 일컬었다고 한다. 야야나 야아는 장천성의 ‘천(淺)’의 훈에 해당하는 고유어로 중세국어 ‘얕-’에 이어진다고 한다(도수희, 2005, 515쪽). 장천성현=장단현으로 비정되는 호로고루 일대는 임진강 하류 방면에서 배를 타지 않고 강을 건널 수 있는 최초의 여울목인데(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연천군, 1999, 48쪽, 정요근, 2005, 191~222쪽), 야야나 야아가 여울목이 형성되어 강물이 얕은 것을 묘사한 고유어 지명이라면, 장천성(長淺城)이나 장단(長湍)은 이를 한역(漢譯)한 지명이라 할 수 있다.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 ‘장단현’ 항목 참조.
〈참고문헌〉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연천군, 1999, 『漣川 瓠蘆古壘 정밀지표조사보고서』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정요근, 2005, 「7~11세기 경기도 북부지역에서의 간선교통로 변천과 '長湍渡路'」, 『韓國史硏究』 13
〈참고문헌〉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연천군, 1999, 『漣川 瓠蘆古壘 정밀지표조사보고서』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정요근, 2005, 「7~11세기 경기도 북부지역에서의 간선교통로 변천과 '長湍渡路'」, 『韓國史硏究』 13
마전천현(麻田淺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임단현(臨端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고 하는데,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마전리 일대로 비정된다. 니사파홀(泥沙波忽)이라고도 일컬었다고 한다. 마전천현의 ‘천(淺)’은 강물이 얕은 상태를 표현하는데, 마전천현의 치소로 비정되는 연천 당포성 일대가 양주분지에서 최단 거리로 임진강을 건너 북상할 수 있는 육상 교통로의 요지로 여울목이 발달한 상황을 묘사한 것으로 파악된다.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 ‘임단현’ 항목 참조.
부소갑(扶蘇岬) : 통일신라 한주(漢州) 소속 송악군(松岳郡)의 고구려 시기 명칭인데, 지금의 경기도 개성시(북한의 개성직할시 개성시) 일대로 비정된다. 부소갑의 ‘부소(扶蘇)’는 송악의 ‘송(松)’에 상응하는 고유어이며, ‘갑(岬)’은 험준한 산악을 뜻하는 ‘악(岳)’에 해당하는 고유어이다(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334~343쪽).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 ‘송악군’ 항목 참조.
약지두치현(若只頭恥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여비현(如羆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불일리(북한의 황해북도 장풍군 선적리) 일대로 비정된다. 삭두(朔頭)나 의두(衣頭)로도 일컬었다고 한다. 또 『고려사』 지리지1 왕경 개성부 송림현(松林縣)조에는 약지두치현(若只豆恥縣)으로 나오며, 지섬(之蟾)이나 삭두(朔頭)라고도 일컬었다고 한다.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 ‘여비현’ 항목 참조.
굴어압(屈於押)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강음현(江陰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황해도 금천군 서북면 강음리(북한의 황해북도 평천군 연홍리) 일대로 비정된다. 본서 권35 지리2 신라 한주조에는 ‘굴압현(屈押縣)’으로 나오며, ‘홍서(紅西)’로도 일컬었다고 한다. 『고려사』 지리지1 왕경 개성부 강음현(江陰縣)조에는 ‘강서(江西)’로도 일컬었다고 한다. 한주 치소가 있던 하남 선동[광주 선리]에서 통일신라 시기의 ‘굴압(屈押)’명 명문기와가 출토된 바 있는데(김규동·성재현, 2011, 564~567쪽; 박성현, 2021, 38~40쪽), 통일신라 시기에도 고구려계 지명이 널리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굴압이나 굴어압의 ‘굴(屈)’은 강음의 ‘강(江)’을 뜻하는 고유어로 중세국어 ‘ᄀᆞᄅᆞᆷ’에 해당한다(도수희, 2005, 508쪽). 다만 ‘압(押)’은 험준한 산악(山嶽: 山岳)을 뜻하는 고유어인데(도수희, 2005, 501쪽), ‘강음(江陰)’에는 그에 상응하는 한자어가 없다.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 ‘강음현’ 항목 참조.
〈참고문헌〉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김규동·성재현, 2011, 「선리 명문와 고찰」, 『고고학지』 17
박성현, 2021, 「신라 통일기 한주(漢州)의 물자 이동과 조운(漕運)-하남 선동 출토 명문 기와를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121
〈참고문헌〉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김규동·성재현, 2011, 「선리 명문와 고찰」, 『고고학지』 17
박성현, 2021, 「신라 통일기 한주(漢州)의 물자 이동과 조운(漕運)-하남 선동 출토 명문 기와를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121
홍서(紅西) : 신라 한주 송악군 소속 강음현(江陰縣)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는 굴어압(屈於押)의 다른 이름으로 전하는데, 굴어압의 ‘굴(屈)’이 강음의 ‘강(江)’을 뜻하는 고유어로 중세국어 ‘ᄀᆞᄅᆞᆷ’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홍서의 ‘홍(紅)’은 ‘강(江)’의 오기로 파악된다(도수희, 2005, 508쪽). 실제 『고려사』 지리지1 왕경 개성부 강음현(江陰縣)조에는 ‘강서(江西)’로 일컬었다고 한다.
동비홀(冬比忽)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개성군(開城郡)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지금의 경기도 개풍군 서면 개성리(북한의 개성직할시 개풍군 개풍읍) 일대로 비정된다. 동비홀의 ‘홀(忽)’은 개성의 ‘성(城)’에 해당하는 고구려의 고유어이다(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499~500쪽).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 ‘개성군’ 항목 참조.
덕물현(德勿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덕수현(德水縣) 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경기도 개풍군 봉동면 흥왕리(興旺里: 북한의 황해북도 개성시 봉덕리) 일대로 비정된다. 덕물의 ‘물(勿)’은 물(水)를 뜻하는 고유어로 덕수의 ‘수’에 상응한다(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508쪽). 『고려사』 지리지1 왕경 개성부 덕수현(德水縣)조에는 ‘인물현(仁物縣)’이라고도 일컬었다고 나오는데, 본서 열전10 궁예전에는 897년(건녕 4)에 궁예가 인물현(仁物縣)의 항복을 받았다고 한다.
진림성현(津臨城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임진현(臨津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장단리 일대로 비정된다. 오아홀(烏阿忽)로도 일컬었다고 한다.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 ‘임진현’ 항목 참조.
혈구군(穴口郡)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해구군(海口郡)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인천직할시 강화군 강화읍 일대로 비정된다. 본서 신라본기11 문성왕 6년(844) 8월조에는 혈구진(穴口鎭)을 두고 아찬 계홍(啓弘)을 진두(鎭頭)로 삼았다고 나오며, 열전10 궁예전에는 궁예가 897년(乾寧 4)에 공암(孔巖: 서울시 강서구), 검포(黔浦: 김포시) 등과 함께 혈구를 격파하였다고 한다. 경덕왕 시기에 지명을 고친 이후에도 ‘혈구(穴口)’라는 명칭이 널리 사용된 것이다. ‘갑비고차(甲比古次)’라고도 일컬었다.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 ‘해구군’ 항목 참조.
동음나현(冬音奈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호음현(沍陰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인천직할시 강화군 하점면 일대로 비정된다. 휴음(休陰)이라고도 일컬었으며, 『고려사』 지리지1 양광도 강화현 하음현(河陰縣)조에서는 ‘아음현(芽音縣)’으로도 일컬었다고 한다. 동음내현의 ‘동음(冬音)’은 대체로 둥근 모양이나 담장을 일컫는 고유어로 파악되는데(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522쪽), 호음현(沍陰縣)이라는 지명에는 그에 상응하는 한자어가 없다.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 ‘호음현’ 항목 참조.
휴음(休陰) : 신라 한주 해구군 소속 호음현(沍陰縣)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는 동음나현(冬音奈縣)의 다른 이름이다. 『고려사』 지리지1 양광도 강화현 하음현(河陰縣)조에서는 ‘아음현(芽音縣)’으로도 일컬었다고 한다.
고목근현(高木根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교동현(喬桐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지금의 인천직할시 강화군 교동면 일대로 비정된다. 달음참(達乙斬)으로도 일컬었으며, 『고려사』 지리지1 양광도 강화현 교동현(喬桐縣)조에는 고림(高林)으로도 일컬었다고 한다.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 ‘교동현’ 항목 참조.
달을참(達乙斬) : 신라 한주 해구군 소속 교동현(喬桐縣)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는 고목근현(高木根縣)의 다른 이름이다. 『고려사』 지리지1 양광도 강화현 교동현(喬桐縣)조에는 고림(高林)으로도 일컬었다고 한다. 달을참의 ‘달(達)’은 높다(高)나 뫼(山)을 뜻하는 고유어로 고목근의 ‘고(高)’에 상응한다(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498~499쪽). 달을참의 ‘참(斬)’은 고목근의 ‘근(根)’에 상응한 고유어일 가능성이 있는데, 거사참(去斯斬)을 양근현(楊根縣: 경기도 양평군 양평읍)으로 이름을 고친 사례가 있다.
수지현(首知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수진현(守鎭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인천직할시 강화군 양도면 일대로 비정된다. 신지(新知)라고도 일컬었다고 한다.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 ‘수진현’ 항목 참조.
대곡군(大谷郡)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영풍군(永豐郡)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지금의 황해도 평산군 평산면(북한의 황해북도 평산군 산성리) 일대로 비정된다. 다지홀(多知忽)로도 일컬었다고 한다. 본서 신라본기6에 따르면 고구려 멸망 직전인 668년(문무왕 8년) 6월 22일에 고구려의 대곡(大谷)과 한성(漢城) 등 2군(郡) 12성(城)이 신라에 귀복(歸服)하였다고 하는데, 대곡성이 고구려 시기에 이미 예성강 유역의 중심지였음을 보여준다. 본서 직관지(職官志)하에 따르면 신라 패강진전(浿江鎭典)의 두상대감(頭上大監)은 1명인데, 선덕왕 3년(782)에 처음으로 대곡성두상(大谷城頭上)을 두었다고 한다. 실제 본서 신라본기10에는 선덕왕이 782년에 한산주를 순행하여 백성을 패강진(浿江鎭)으로 옮긴 다음, 이듬해에 아찬(阿湌) 김체신(金體信)을 대곡진(大谷鎭) 군주(軍主)로 임명하였다고 나온다. 경덕왕대 지명 개칭 이후에도 ‘대곡(大谷)’이라는 명칭이 널리 사용된 것이다.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 ‘영풍군’ 항목 참조.
수곡성현(水谷城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단계현(檀溪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황해도 신계군 다율면 침교리(북한의 황해북도 신계군 침교리) 일대로 비정된다. ‘매단홀(買旦忽)’로도 일컬었다고 나온다. 수곡성은 일찍이 고구려와 백제가 각축전을 벌인 장소로 자주 나온다. 본서 고구려본기6과 백제본기2·3에는 369년(고국원왕 39, 근초고왕 24), 375년(소수림왕 5, 근초고왕 30), 394년(광개토왕 3, 아신왕 3)에 양국이 수곡성에서 각축전을 벌였다고 나오는데, 멸악산맥을 넘어 재령강과 예성강을 잇는 서흥-신계로가 지나는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백제본기4 무령왕2년(501년)조에도 백제가 고구려의 수곡성을 습격하였다고 나오지만, 백제의 웅진시기 한강영유 기사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사실로 보기도 하고, 실제 사실로 보기는 어렵다고 이해하기도 한다(본서 권19 고구려본기7 문자명왕 4년 8월조 참조).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 ‘단계현’ 항목 참조.
십곡현(十谷縣) : 신라 경덕왕이 진단현(鎭湍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황해도 곡산군 곡산면(북한의 황해북도 곡산군 곡산리) 일대로 비정된다. 본서 지리2 신라 한주조에서는 십곡성현(十谷城縣)으로 나온다. 덕돈홀(德頓忽)로도 일컬었다고 하는데, 신라본기9 경덕왕 21년(762) 5월조의 ‘덕곡(德谷)’도 십곡현의 별칭이다. 『고려사』 지리지3 서해도 곡주(谷州)조에는 ‘곡성현(谷城縣)’이나 ‘고곡군(古谷郡)’으로도 일컬었다고 나온다.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 ‘진단현’ 항목 참조.
동음홀(冬音忽)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해고군(海皐郡)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지금의 황해도 연백군 연안읍(북한의 황해남도 연안군 연안리) 일대로 비정된다. 본서 권35 지리2 신라 한주조에는 ‘동삼홀군(冬彡忽郡)’으로 나오며, ‘시염성(豉鹽城)’으로도 일컬었다고 한다. 동삼홀의 ‘홀(忽)’은 ‘성(城)’에 해당하는 고구려의 고유어이다(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499~500쪽).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 ‘해고군’ 항목 참조.
도랍현(刀臘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구택현(雊澤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황해도 연백군 은천면(북한의 황해남도 배천군 배천읍) 일대로 비정된다. 치악성(雉嶽城)으로도 일컬었다고 한다. 고구려와 백제가 369년(고국원왕 39, 근초고왕 24)에 처음 각축전을 벌인 백제 치양(雉壤)도 치악성=구택현으로 비정된다(이병도, 1977: 2012, 320쪽). 도랍현의 ‘도랍(刀臘)’은 치악의 ‘치(雉)’에 상응하는 고유어로 암컷 꿩을 뜻하는 ‘가토리’의 ‘토리’에 해당하며, 일본어의 ‘tori’와도 관련이 있다고 한다(도수희, 2005, 509쪽).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치악성(雉嶽城) : 신라 한주 해고군(海皐郡) 소속 구택현(雊澤縣)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는 도랍현(刀臘縣)의 다른 이름이다. 고구려와 백제가 369년(고국원왕 39, 근초고왕 24)에 처음 각축전을 벌인 백제 치양(雉壤)도 치악성=구택현으로 비정된다(이병도, 1977: 2012, 320쪽). 도랍현의 ‘도랍(刀臘)’은 치악의 ‘치(雉)’에 상응하는 고유어로 암컷 꿩을 뜻하는 ‘가토리’의 ‘토리’에 해당하며, 일본어의 ‘tori’와도 관련이 있다고 한다(도수희, 2005, 509쪽).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오곡군(五谷郡) : 신라 경덕왕이 오관군(五關郡)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황해도 서흥군 서흥면 고성리(북한의 황해북도 서흥군 고성리) 일대로 비정된다‘ 우차탄홀(于次呑忽)로도 일컬었다고 한다. 본서 권35 지리2 신라 한주조에는 오곡군의 오관군이 장새현(獐塞縣)을 영현으로 거느린 것으로 나오지만, 본문에서 보듯이 고구려조에는 양자가 관계 없는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에 이에 장새가 처음에는 독립된 군(郡)으로 설치되었다가, 경덕왕 사망 이후에 오관군(오곡군)의 영현이 되었다고 보기도 한다(전덕재, 2021, 『三國史記 잡지·열전의 원전과 편찬』, 주류성, 189~193쪽).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 ‘오관군’ 항목 참조.
내미홀(內米忽) : 신라 경덕왕이 폭지군(瀑池郡)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지금의 황해도 해주시(북한의 황해남도 해주시) 일대로 비정된다. ‘지성(池城)’이나 ‘장지(長池)’로도 일컬었다고 한다. 내미홀군의 ‘내미(內米)’는 폭지나 지성의 ‘지(池)’나 해주의 ‘해(海)’에 상응하는 고유어로 일본어의 ‘nami(波濤)’와 비교되며, ‘홀(忽)’은 지성의 ‘성(城)’에 해당하는 고구려의 고유어이다(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499~500쪽 및 509쪽).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 ‘폭지군’ 항목 참조.
한성군(漢城郡) : 신라 경덕왕이 중반군(重盤郡)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고 하는데, 재령강 상류인 북한의 황해남도 신원군 아양리 일대로 비정된다.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에는 식성군(息城郡)으로 나온다. 한홀(漢忽), 식성(息城), 내홀(乃忽)로도 일컬었다고 한다. 한성(漢城)은 고구려 후기 3경(京)의 하나였는데, 〈평양성각자성석〉에도 ‘한성’이라는 명칭이 확인된다. 신원군 아양리에서는 재령강 연안의 평지를 따라 고구려 한성 별도의 유적으로 보이는 대규모 도시유적이 확인되었다. 본서 신라본기6에 따르면 고구려 멸망 직전인 668년(문무왕 8년) 6월 22일에 고구려의 대곡(大谷)과 한성(漢城) 등 2군(郡) 12성(城)이 신라에 귀복(歸服)하였다고 하는데, 한성이 고구려 시기에 재령강 유역의 중심지였음을 보여준다.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 ‘영풍군’ 항목 참조.
식성(息城) : 신라 한주 소속 중반군(重盤郡)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는 한성군(漢城郡)의 다른 이름이다.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에는 중반군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 ‘식성군(息城郡)’으로 나온다.
휴류성(鵂鶹城) : 신라 경덕왕이 서암군(栖嵒郡)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황해도 봉산군 토성면 무정리(북한의 황해북도 봉산군 마산리 일대)로 비정된다. 본서 권35 지리2 신라 한주조에는 휴암군(鵂嵒郡)으로 나와 조금 차이가 있다. 조파의(租坡衣)나 휴류군(鵂鶹郡)으로도 일컬었다고 한다.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 ‘서암군’ 항목 참조.
장새현(獐塞縣) : 신라 한주 소속 오관군(五關郡)의 영현인 장새현의 고구려 시기 지명으로 지금의 황해도 수안군 수안면(북한의 황해북도 수안군 수안리) 일대로 비정된다. 신라 경덕왕이 고구려 시기의 이름을 고치지 않고 그대로 장새현으로 하였다고 하는데, 고소어(古所於)로도 일컬었다고 한다. 장새는 재령강 유역을 경유하지 않고 곧바로 대동강과 임진강 유역을 잇는 교통로인 수안-신계로가 지나가는 요충지이다. 이에 일찍부터 서북한과 중부지역을 내왕할 때 많이 이용하였는데, 본서 신라본기6에 따르면 662년(문무왕 2) 정월에 김유신이 평양 부근의 당군(唐軍)에게 군량미를 전달할 때 장새(獐塞)를 경유하였고, 667년 11월에는 문무왕이 당군을 만나기 위해 장새까지 진격하였다가 되돌아왔다고 한다. 한편 장새현이 상기 기사에는 휴류성(휴류군, 서암군) 다음에 기재되어 있고, 『고려사』 지리지3 수안현(遂安縣)조에도 장새현이 신라 때 서암군(栖巖郡)의 영현(領縣)이었다고 나오는데, 본서 권35 신라 한주조에는 오관군(五關郡)의 영현으로 나온다. 이에 장새가 762년에는 재령강 유역에 축조한 다른 6성처럼 군(郡)으로 설치되었다가, 경덕왕이 사망하는 765년(경덕왕 24) 6월 이전에 휴류군(서암군)의 영현이 바뀌었다가, 그 뒤 다시 오관군의 영현으로 바뀌었다고 보기도 한다(김태식, 1997, 46~47쪽; 전덕재, 2021, 189~193쪽).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 ‘장새현’ 항목 참조.
〈참고문헌〉
전덕재, 2021, 『三國史記 잡지·열전의 원전과 편찬』, 주류성
김태식, 1997, 「『삼국사기』 지리지 고구려조의 사료적 검토」, 『역사학보』 154
〈참고문헌〉
전덕재, 2021, 『三國史記 잡지·열전의 원전과 편찬』, 주류성
김태식, 1997, 「『삼국사기』 지리지 고구려조의 사료적 검토」, 『역사학보』 154
동홀(冬忽) : 신라 헌덕왕이 취성군(取城郡)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지금의 황해도 황주군 황주읍(북한의 황해북도 황주군 황주읍) 일대로 비정된다. 우동어홀(于冬於忽)로도 일컬었다고 한다. 동홀의 ‘홀(忽)’은 취성의 ‘성(城)’에 해당하는 고구려의 고유어이다(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499~500쪽).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 ‘취성군’ 항목 참조.
금달(今達) : 신라 헌덕왕이 토산현(土山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지금의 평안남도 중화군 상원면(북한의 평양특별시 상원군 상원읍) 일대로 비정된다. 신달(薪達)이나 식달(息達)로도 일컬었다고 하며,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에는 식달(息達)로 나온다. 금달의 ‘달(達)’은 ‘달(達)’은 토산의 ‘산(山)’에 상응하는 고유어로 높은 뫼[山]나 높다(高)를 뜻한다(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498~499쪽).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 ‘토산현(土山縣)’ 항목 참조.
식달(息達) : 신라 한주 취성군(取城郡) 소속 토산현(土山縣)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는 금달(今達)의 별칭이라고 하는데,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에는 ‘식달’이 고구려 시기의 본명으로 나온다. 식달의 ‘달(達)’은 ‘달(達)’은 토산의 ‘산(山)’에 상응하는 고유어로 높은 뫼[山]나 높다(高)를 뜻한다(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498~499쪽).
구을현(仇乙峴) : 고구려 시기의 지명으로 지금의 황해도 송화군(松禾郡) 풍천면(豊川面; 북한의 황해남도 과일군 과일읍) 일대로 비정된다(이병도, 1977: 2012, 610쪽; 정구복 외, 1997d, 364쪽). 굴천(屈遷)으로도 일컬었고, 『고려사』 지리지3 서해도 풍주(豐州)조에는 고구려 구을현(仇乙縣)으로 나온다. 구을현~곡도(鵠島) 등 재령강 서쪽 지역의 고구려 시기 12개 지명은 본서 지리지4 고구려조에만 나오고, 지리지2 신라 한주조에는 나오지 않는다. 이에 이 지역은 본래 신라가 군현제를 시행하지 못한 지역으로 후삼국이나 고려 시기의 지명이라는 견해(정상수웅, 1974, 87쪽; 김태식, 1997, 47~51쪽), 신라가 군현으로 편제하지 못하고 대곡성(大谷城=永豐郡, 황해도 평산)에 설치한 패강진(浿江鎭)이 일종의 군관구로 군사적으로 통괄하다가 궁예의 태봉에서 처음으로 행정구역으로 편제하였다는 견해(전덕재, 2013, 25~28쪽), 신라 9주에 소속되지 않은 지역으로 대곡진(大谷鎭) 두상(頭上)이 설치된 선덕왕 3년(782)년부터 패강진전(浿江鎭典)에서 독립적으로 관할하였다는 견해(박남수, 2013, 57~62쪽) 등이 있다. 이에 대해 헌덕왕 이후 군현으로 설치되어 패강진의 통할을 받았고 9세기 말에는 패강도(浿江道)라는 별도의 행정구역으로 편제되었다고 보기도 한다(강봉룡, 1997, 217~241쪽). 이들 12개 지명이 지리지2 신라 한주조에 기입되지 못한 이유로는 본서의 신라지 찬자가 신라의 군현으로 확신하지 못하였기 때문으로 보거나(강봉룡, 1997, 224쪽) 본서 지리지 신라조의 저본에는 없었기 때문에 신라 한주조에는 등재되지 못하고 지리지 고구려조 찬자가 태봉의 지방행정구역을 참조해 고구려조에 첨가하였다고 파악하기도 한다(전덕재, 2021, 188~189쪽). 『고려사』 지리지3 서해도 풍주(豐州)조에 따르면 고려 초에 ‘풍주’로 이름을 고쳤고, 성종 14년(995)에 도호부(都護府)로 승격시켰고, 현종 9년(1018)에 방어사(防禦使)를 두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3 황해도 풍천도호부(豐川都護府)조에 따르면 조선 태조 6년(1397)에 비로소 진(鎭)을 설치하고, 병마사로 지주사(知州事)를 겸하게 하였으며, 태종 13년(1413)에 ‘풍천’으로 이름으로 고쳐 군(郡)으로 하고, 은율현과 합쳐 풍률군(豐栗郡)이라 하였다가 다시 분리하였고, 세종 5년에 첨절제사로 고쳤고. 예종 원년에 도호부로 승격시켰다고 한다.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정구복 외, 1997d,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조이옥, 2001, 『통일신라의 북방진출 연구』 서경문화사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전덕재, 2021, 『三國史記 잡지·열전의 원전과 편찬』, 주류성
강봉룡, 1997, 「신라 하대 패강진의 설치와 운영」, 『한국고대사연구』 11
김태식, 1997, 「『삼국사기』 지리지 고구려조의 사료적 검토」, 『역사학보』 154
박남수, 2013, 「신라 浿江鎭典의 정비와 漢州 西北境의 郡縣 설치」, 『동국사학』 54
전덕재, 2013, 「신라 하대 浿江鎭의 설치와 그 성격」, 『대구사학』 113
井上秀雄, 1974, 「三國史記地理志の史料批判」, 『新羅史基礎硏究』,東出版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정구복 외, 1997d,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조이옥, 2001, 『통일신라의 북방진출 연구』 서경문화사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전덕재, 2021, 『三國史記 잡지·열전의 원전과 편찬』, 주류성
강봉룡, 1997, 「신라 하대 패강진의 설치와 운영」, 『한국고대사연구』 11
김태식, 1997, 「『삼국사기』 지리지 고구려조의 사료적 검토」, 『역사학보』 154
박남수, 2013, 「신라 浿江鎭典의 정비와 漢州 西北境의 郡縣 설치」, 『동국사학』 54
전덕재, 2013, 「신라 하대 浿江鎭의 설치와 그 성격」, 『대구사학』 113
井上秀雄, 1974, 「三國史記地理志の史料批判」, 『新羅史基礎硏究』,東出版
궐구(闕口) : 고구려 시기의 지명으로 지금의 황해도 신천군 문화면(북한의 황해남도 신천군 건산리·용산리; 이병도, 1977: 2012, 610쪽; 정구복 외, 1997d, 365쪽)으로 비정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황해남도 삼천군 고현리 일대로 비정된다. 구을현~곡도(鵠島) 등 재령강 서쪽 지역의 고구려 시기 12개 지명은 본서 지리지4 고구려조에만 나오고, 지리지2 신라 한주조에는 나오지 않는데, 상세한 설명은 위의 ‘구을현’ 항목 참조. 『고려사』 지리지3 서해도 유주(儒州)조에 따르면 고려 초에 ‘유주’로 이름을 고쳤고, 현종 9년(1018)에 풍주에 내속(來屬)시켰고, 예종 원년(1106)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고종 46년(1259)에 문화현(文化縣)으로 승격시켰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2 황해도 문화현(文化縣)조에 따르면 조선에서도 종전처럼 문화현으로 하였다고 하는데, 중종이 치소를 북쪽 13리로 옮겼고, 고종이 군으로 고쳤다.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정구복 외, 1997d,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정구복 외, 1997d,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율구(栗口) : 고구려 시기의 지명으로 지금의 황해도 은율군 은율읍(북한의 황해남도 은율군 은율읍) 일대로 비정된다(이병도, 1977: 2012, 610쪽; 정구복 외, 1997d, 365쪽). 율천(栗川)으로도 일컬었다고 한다. 구을현~곡도(鵠島) 등 재령강 서쪽 지역의 고구려 시기 12개 지명은 본서 지리지4 고구려조에만 나오고, 지리지2 신라 한주조에는 나오지 않는데, 상세한 설명은 위의 ‘구을현’ 항목 참조. 『고려사』 지리지3 서해도 은율현(殷栗縣)조에 따르면 고려 초에 ‘은율’로 이름을 고쳤고, 현종 9년(1018)에 풍주에 내속(來屬)시켰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3 황해도 은율현(殷栗縣)조에 따르면 조선 태조 5년(1396)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태종 14년에 풍주에 합하였다가 다시 분리하여 현감을 두었다고 한다. 현종이 장련(長連)에 편입시켰다고 복구하였고, 숙종이 문화(文化)에 편입하였다가 복구하였으며, 고종이 군으로 고쳤다.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정구복 외, 1997d,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정구복 외, 1997d,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장연(長淵) : 고구려 시기의 지명으로 지금의 황해도 장연군 장연읍(북한의 황해남도 장연군 장연읍) 일대로 비정된다(이병도, 1977: 2012, 610쪽; 정구복 외, 1997d, 365쪽). 구을현~곡도(鵠島) 등 재령강 서쪽 지역의 고구려 시기 12개 지명은 본서 지리지4 고구려조에만 나오고, 지리지2 신라 한주조에는 나오지 않는데, 상세한 설명은 위의 ‘구을현’ 항목 참조. 『고려사』 지리지3 서해도 장연현(長淵縣)조에 따르면 고구려 이래 같은 이름을 사용하였고, 현종 9년(1018)에 옹진현에〉 내속(來屬)시켰고, 예종 원년(1106)에 감무(監務)를 두었는데, 관내의 장산곶(長山串에서 봄 가을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3 황해도 장연현조에 따르면 조선 태조 원년(1392)에 만호를 두어 감무를 겸하게 하였고, 태종 2년(1402)에 비로소 진(鎭)을 설치하고 병마사로 판현사(判縣事)를 겸하게 하였다. 그 뒤 영강현을 병합하여 연강(淵康)이라 하였다가 복구하였고, 세종 5년에 병마사로 고치고, 첨절제사를 삼았다가, 현감으로 하였다고 한다.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정구복 외, 1997d,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정구복 외, 1997d,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마경이(麻耕伊) : 고구려 시기의 지명으로 지금의 황해도 송화군 송화면(북한의 황해남도 송화군 송화읍) 일대로 비정된다(이병도, 1977: 2012, 610쪽; 정구복 외, 1997d, 365~366쪽). 구을현~곡도(鵠島) 등 재령강 서쪽 지역의 고구려 시기 12개 지명은 본서 지리지4 고구려조에만 나오고, 지리지2 신라 한주조에는 나오지 않는데, 상세한 설명은 위의 ‘구을현’ 항목 참조. 『고려사』 지리지3 서해도 청송현(靑松縣)조에 따르면 고려 초에 ‘청송’으로 이름을 고쳤고, 현종 9년(1018)에 풍주에 내속(來屬)시켰고, 예종 원년(1106)에 감무(監務)를 두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3 황해도 송화현(松禾縣)조에 따르면 조선 태종 8년(1408)에 고구려 마경이(麻耕伊)였던 청송현(靑松縣)과 고구려 판마곶(板麻串)이었던 가화현(嘉禾縣)을 합쳐 ‘송화’로 이름을 고치고 현감을 두었다고 한다. 고종이 군으로 고쳤다.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정구복 외, 1997d,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정구복 외, 1997d,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양악(楊岳) : 고구려 시기의 지명으로 지금의 황해도 안악군 용산면(북한의 황해남도 안악군 로암리) 일대로 비정된다(이병도, 1977: 2012, 610쪽; 정구복 외, 1997d, 366쪽). 구을현~곡도(鵠島) 등 재령강 서쪽 지역의 고구려 시기 12개 지명은 본서 지리지4 고구려조에만 나오고, 지리지2 신라 한주조에는 나오지 않는데, 상세한 설명은 위의 ‘구을현’ 항목 참조. 『고려사』 지리지3 서해도 안악군(安岳郡)조에 따르면 고려 초에 ‘안악’으로 이름을 고쳤고, 현종 9년(1018)에 풍주에 내속(來屬)시켰고, 예종 원년(1106)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충목왕 4년(1348)에 지군사(知郡事)로 승격시켰으며, 관내에 아사진성초곶(阿斯津省草串)과 아사진도곶(阿斯津桃串)이 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2 황해도 안악군에 따르면 조선에서도 종전처럼 안악군으로 삼았다고 하며, 중종이 군치를 북쪽 13리로 옮겼고, 선조가 현으로 낮추었다고 다시 복구하였다. 조선 초기 이전의 안악군치는 현재의 안악면 남쪽 13리로 안악군 용순면 일대이다.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정구복 외, 1997d,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정구복 외, 1997d,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판마곶(板麻串) : 고구려 시기의 지명으로 지금의 황해도 송화군 장양면(북한의 황해남도 삼천군 괴정리) 일대로 비정된다(이병도, 1977: 2012, 610쪽; 정구복 외, 1997d, 366쪽). 구을현~곡도(鵠島) 등 재령강 서쪽 지역의 고구려 시기 12개 지명은 본서 지리지4 고구려조에만 나오고, 지리지2 신라 한주조에는 나오지 않는데, 상세한 설명은 위의 ‘구을현’ 항목 참조. 『고려사』 지리지3 서해도 가화현(嘉禾縣)조에 따르면 고려 초에 ‘가화’로 이름을 고쳤고, 현종 9년(1018)에 풍주에 내속(來屬)시켰고, 예종 원년(1106)에 감무(監務)를 두었는데 영강감무(永康監務)로 하여금 겸임하게 하였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3 황해도 송화현(松禾縣)조에 따르면 조선 태종 8년(1408)에 고구려 마경이(麻耕伊)였던 청송현(靑松縣)과 고구려 판마곶(板麻串)이었던 가화현(嘉禾縣)을 합쳐 ‘송화’로 이름을 고치고 현감을 두었는데, 가화고현(嘉禾古縣)은 송화현의 동쪽 60리에 있었다고 한다.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정구복 외, 1997d,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정구복 외, 1997d,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웅한이(熊閑伊) : 고구려 시기의 지명으로 지금의 황해도 송화군 연정면(북한의 황해남도 송화군 온천리) 일대로 비정된다(이병도, 1977: 2012, 610쪽; 정구복 외, 1997d, 366쪽). 구을현~곡도(鵠島) 등 재령강 서쪽 지역의 고구려 시기 12개 지명은 본서 지리지4 고구려조에만 나오고, 지리지2 신라 한주조에는 나오지 않는데, 상세한 설명은 위의 ‘구을현’ 항목 참조. 『고려사』 지리지3 서해도 영녕현(永寧縣)조에 따르면 고려 초에 ‘영령’으로 이름을 고쳤고, 현종 9년(1018)에 풍주에 내속(來屬)시켰다가 뒤에 신천(信川)에 편입시켰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3 황해도 송화현(松禾縣) 고적조에 따르면 영녕폐현(永寧廢縣)은 조선 태조 5년(1396)에 가화현(嘉禾縣)에 이속하였다가 태종 8년(1408)에 폐지하여 직촌(直村)으로 삼았는데, 고을 남쪽 30리에 있다.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정구복 외, 1997d,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정구복 외, 1997d,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수녕현(水寧縣) : 고구려 시기 지명인 웅한이(熊閑伊 : 현 황해도 송화군 연정면; 북한의 황해남도 송화군 온천리)의 고려 인종 때 이름인데, 『고려사』 지리지3 서해도 영녕현(永寧縣)조나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3 황해도 송화현(松禾縣) 고적조 등에는 모두 ‘영령(永寧)’으로 나온다. 위의 웅한이에 대한 주석 참조.
옹천(甕迁) : 고구려 시기의 지명으로 지금의 황해도 옹진군 옹진읍(북한의 황해남도 옹진군 본영리) 일대로 비정된다(이병도, 1977: 2012, 610쪽; 정구복 외, 1997d, 367쪽). 구을현~곡도(鵠島) 등 재령강 서쪽 지역의 고구려 시기 12개 지명은 본서 지리지4 고구려조에만 나오고, 지리지2 신라 한주조에는 나오지 않는데, 상세한 설명은 위의 ‘구을현’ 항목 참조. 『고려사』 지리지3 서해도 옹진현(瓮津縣)조에 따르면 고려 초에 ‘옹진’으로 이름을 고쳤고, 현종 9년(1018)에 현령(縣令)을 두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3 황해도 옹진현조에 따르면 조선 태조 6년(1397)에 진을 설치해 병마사로 판현사(判縣事)를 겸하게 하였고, 세종 5년에 첨절제사로 고쳤다가 다시 현령으로 하였다고 한다. 숙종이 소강진(所江鎭)과 합쳐 부(府)로 삼아 수영(水營)을 설치하였고, 고종이 강령(康翎)에 편입시켰다가 다시 군(郡)으로 삼았다.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정구복 외, 1997d,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정구복 외, 1997d,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부진이(付珍伊) : 고구려 시기의 지명으로 지금의 황해도 벽성군 운산면 관동리(북한의 황해남도 태탄군 운산리) 일대로 비정된다(이병도, 1977: 2012, 610쪽; 정구복 외, 1997d, 367쪽). 구을현~곡도(鵠島) 등 재령강 서쪽 지역의 고구려 시기 12개 지명은 본서 지리지4 고구려조에만 나오고, 지리지2 신라 한주조에는 나오지 않는데, 상세한 설명은 위의 ‘구을현’ 항목 참조. 『고려사』 지리지3 서해도 영강현(永康縣)조에 따르면 고려 초에 ‘영강’으로 이름을 고쳤고, 현종 9년(1018)에 옹진현에 내속(來屬)시켰고, 예종 원년(1106)에 감무(監務)를 두어 가화(嘉禾)를 겸임하게 하였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3 황해도 강령현(康翎縣)조에 따르면 고구려의 부진이(付珍伊)였던 영강현(永康縣)은 조선 태종 14년에 장연현과 합하였다가 다시 복구하였고, 세종 10년에 영강과 백령을 합하여 강령현으로 하고, 해주ㆍ우현(牛峴) 이남의 땅을 편입시켜 치소를 사천(蛇川)으로 옮기고, 진을 설치하여 첨절제사 겸 판현사로 하였다가 다시 현감으로 고쳤다고 한다. 옛날 영강현의 치소는 장연현의 금동역(金洞驛)에 있었다고 한다. 인조가 다시 해주에 편입시켰다가 복구하였고, 효종이 옹진에 편입시켰다고 복구하였고, 현종이 고요연촌(高腰淵村: 웅진군 부민면 강령리, 북한의 강령군 강령읍)으로 옮겼다.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정구복 외, 1997d,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정구복 외, 1997d,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곡도(鵠島) : 고구려 시기의 지명으로 지금의 인천광역시 옹진군 백령면으로 비정된다(이병도, 1977: 2012, 610쪽; 정구복 외, 1997d, 367~368쪽). 구을현~곡도(鵠島) 등 재령강 서쪽 지역의 고구려 시기 12개 지명은 본서 지리지4 고구려조에만 나오고, 지리지2 신라 한주조에는 나오지 않는데, 상세한 설명은 위의 ‘구을현’ 항목 참조. 『고려사』 지리지3 서해도 백령진(白翎鎭)조에 따르면 고려에서 ‘백령’으로 이름을 고쳐 진(鎭)으로 하고, 현종 9년(1018)에 진장(鎭將)을 두었는데, 공민왕 6년(1357)에 수로가 험난하다 하여 문화현(文化縣) 동촌(東村)에 머무르게 하였다가 진장(鎭將)을 폐지하고 문화현에 속하게 하였고, 공양왕 2년(1389)에는 문화현의 직촌(直村)으로 삼았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3 황해도 강령현(康翎縣) 조선 세종 10년에 고구려의 부진이(付珍伊)였던 영강현(永康縣)과 백령을 합쳐 강령현으로 삼았다고 한다.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정구복 외, 1997d,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정구복 외, 1997d,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승산(升山) : 고구려 시기의 지명으로 지금의 황해도 신천군 신천읍(북한의 황해남도 신천군 신천읍) 일대로 비정된다(이병도, 1977: 2012, 610쪽; 정구복 외, 1997d, 368쪽). 구을현~곡도(鵠島) 등 재령강 서쪽 지역의 고구려 시기 12개 지명은 본서 지리지4 고구려조에만 나오고, 지리지2 신라 한주조에는 나오지 않는데, 상세한 설명은 위의 ‘구을현’ 항목 참조. 『고려사』 지리지3 서해도 신주(信州)조에 따르면 고려에서 ‘신주’로 이름을 고쳤고, 성종 14년(995)에 방어사(防禦使)를 두었다가 현종 초에 방어사를 폐지해 황주목에 내속(來屬)시켰고, 그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2 황해도 신천군(信川郡)조에 따르면 조선 태종 13년(1413)에 ‘신천’으로 이름을 고치고 현감으로 삼았고, 예종 원년에 군으로 승격하였다고 한다. 예종이 군으로 높였다.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정구복 외, 1997d,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정구복 외, 1997d,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가화압(加火押) : 신라 헌덕왕이 당악현(唐嶽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지금의 평안남도 중화군 당정면 당촌리(북한의 평양특별시 강남면 장교리) 일대로 비정된다. 가화압의 ‘압(押)’은 당악의 ‘악(嶽)’에 상응하는 고유어로 험준한 산악(山嶽: 山岳)을 뜻한다(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501쪽).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 ‘당악현’ 항목 참조.
부사파의현(夫斯波衣縣) : 신라 헌덕왕이 송현현(松峴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지금의 지금의 평안남도 중화군 해압면 매현리(북한의 평양특별시 강남군 영진리) 일대로 비정된다. 구사현(仇史峴)으로도 일컬었다고 한다. 부사파의의 ‘부사(夫斯)’는 송현의 ‘송(松)’에 상응하는 고유어이며, 파의(波衣)’는 고개나 바위를 뜻하는 고유어로 여기에서는 송현이나 구사현의 ‘현(峴)’에 상응한다(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500~501쪽 및 504쪽).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 ‘송현현’ 항목 참조.
註) 052
한산주(漢山州) : 통일신라의 한주(漢州)에 상응하는 고구려 지명이라고 한다.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에는 ‘한산군(漢山郡)으로 나오며,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에는 고구려 시기의 군명으로 북한산군(北漢山郡)이라는 명칭도 나온다. 북한산군은 통일신라의 한양군(漢陽郡)에 상응하는 명칭으로 한강 북쪽의 아차산 일대로 비정된다. 이 기사의 ‘한산주’는 북한산군과는 구별되는 다른 행정구역을 지칭하는 것이다. 한강유역에 설치된 신라의 광역행정구역은 신주(新州: 553~637년), 한산주(漢山州: 637~757년), 한주(漢州: 757년 이후)로 변천하였고, 치소도 한강 북쪽의 아차산(北漢山)과 경기도 이천(南川: 南買)을 오가다가 7세기 중엽에 경기도 하남 이성산성 일대로 정해졌다. 통일신라 초에는 한강 남쪽에는 한산주의 치소가 있고, 북쪽에는 북한산군이 별도로 두어졌다. 이로 보아 이 기사의 ‘한산주’는 통일신라 초의 광역행정구역인 ‘한산주’를 염두에 둔 명칭으로 보인다. 본문의 고구려지 한산주의 저본 자료 성립 시기에 대해 종래 신문왕대(井上秀雄, 1974, 95쪽) 또는 경덕왕~흥덕왕대(김태식, 1997, 35~45쪽)로 보는 견해가 제기된 바 있다. 이에 대해 저본 자체는 신문왕 9년 무렵의 지방제도 정비 자료를 바탕으로 신문왕 9년에서 성덕왕대 전반 사이에 찬술되었고, 그 뒤 본서 지리지 찬자가 신라 경덕왕과 헌덕왕대, 태봉에서 새로 편제한 군·현에 대한 정보 등을 추가해 현전하는 고구려지 한산주조를 최종적으로 완성하였다고 파악하기도 한다(전덕재, 2021, 188~194쪽).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의 ‘한주’, ‘한산군’ 항목 참조.
〈참고문헌〉
井上秀雄, 1974, 「三國史記地理志の史料批判」, 『新羅史基礎硏究』,東出版
김태식, 1997, 「『삼국사기』 지리지 고구려조의 사료적 검토」, 『역사학보』 154
전덕재, 2021, 『三國史記 잡지·열전의 원전과 편찬』, 주류성
〈참고문헌〉
井上秀雄, 1974, 「三國史記地理志の史料批判」, 『新羅史基礎硏究』,東出版
김태식, 1997, 「『삼국사기』 지리지 고구려조의 사료적 검토」, 『역사학보』 154
전덕재, 2021, 『三國史記 잡지·열전의 원전과 편찬』, 주류성
註) 053
국원성(國原城)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중원경(中原京)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미을성(未乙省)이나 탁장성(託長城)으로도 일컬었다고 한다. 국원성은 충주지역으로 비정되는데, 도성과 평지를 뜻하는 ‘국(國)’자와 ‘원(原)’자를 합친 합성어이다(이도학, 1988, 102~106쪽). 국원성은 명칭상 도성을 모방해 건설한 평지성을 지칭하는데, 남한강 좌안의 탑평리 일대에서 고구려 연화문와당이 출토되었고(장준식, 1998, 23~108쪽), 2010년에는 고구려 주거지가 조사된 바 있다(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 2013, 89~96쪽). 국원성은 남한강변의 탑평리 일대에 조영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1979년에 탑평리 부근에서 〈충주고구려비〉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로 보아 고구려가 남한강 수로를 활용해 남한강 중상류 유역에 대한 지방지배를 도모하고, 소백산맥을 넘어 신라와의 외교교섭을 전개하기 위한 평지거점으로 국원성을 조영한 것으로 파악된다(여호규, 2002; 2021, 54~55쪽).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의 ‘중원경’ 항목 참조.
〈참고문헌〉
장준식, 1998, 『新羅中原京硏究』, 학연문화사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 2013, 『충주 탑평리유적(중원경 추정지) 발굴조사보고서』
이도학, 1988, 「永樂6年 廣開土王의 南征과 國原城」, 『孫寶基博士停年紀念韓國史學論叢』
여호규, 2002, 「한국 고대의 지방도시」, 『강좌 한국고대사(7)』,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여호규, 2021, 「고구려의 남평양 건설과 운영」, 『역사문화연구』 79
〈참고문헌〉
장준식, 1998, 『新羅中原京硏究』, 학연문화사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 2013, 『충주 탑평리유적(중원경 추정지) 발굴조사보고서』
이도학, 1988, 「永樂6年 廣開土王의 南征과 國原城」, 『孫寶基博士停年紀念韓國史學論叢』
여호규, 2002, 「한국 고대의 지방도시」, 『강좌 한국고대사(7)』,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여호규, 2021, 「고구려의 남평양 건설과 운영」, 『역사문화연구』 79
註) 056
남천현(南川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황무현(黃武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경기도 이천시 일대로 비정된다. 본서 신라본기 등에는 ‘남천(南川)’이 삼국시기 신라의 지명으로 다수 나온다. 본문에서 보듯이 고구려시기에는 국원성(國原城)의 영현(領縣)으로 나오지만, 본서 권35 잡지4 지리2의 한주조에는 한주(漢州) 치소(治所)의 직할현으로 나와 영속 관계에 차이가 있다. 이에 남천현이 본래 국원성의 영현이었을 가능성을 상정하기도 한다(김태식, 1997, 「『삼국사기』 지리지 고구려조의 사료적 검토」, 『역사학보』 154). 본서 권35 잡지4 지리2의 한주 ‘남천현’ 항목 참조.
註) 057
남매(南買) : 신라 한주 소속 황무현(黃武縣)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는 남천현(南川縣)의 다른 이름이다. 남매의 ‘매(買)’는 남천현의 ‘천(川)’에 상응하는 고구려의 고유어로 강[川]이나 물[水]을 뜻한다(도수희, 2005, 497~498쪽). 『일본서기』 권19 흠명기 13년 시세조에 우두방(牛頭方: 신라의 牛首州)과 함께 ‘니미방(尼彌方)’이 나오는데, ‘니미방’의 ‘‘니미(尼彌)’는 음이 비슷한 ‘南買(南川: 이천)’로서 568~604년경의 신주(新州: 임기환, 2002, 19쪽)나 660~664년경의 남천주(南川州; 여호규, 2021, 41쪽)를 지칭한다고 보기도 한다.
〈참고문헌〉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임기환, 2002, 「고구려·신라의 한강유역 경영과 서울」, 『서울학연구』 18
여호규, 2021, 「고구려의 ‘남평양(南平壤)’ 건설과 운영」, 『역사문화연구』 79
〈참고문헌〉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임기환, 2002, 「고구려·신라의 한강유역 경영과 서울」, 『서울학연구』 18
여호규, 2021, 「고구려의 ‘남평양(南平壤)’ 건설과 운영」, 『역사문화연구』 79
註) 058
구성(駒城)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거서현(巨黍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지금의 경기도 용인시 일대로 비정된다. 본문에서 보듯이 고구려시기에는 국원성(國原城)의 영현(領縣)으로 나오지만, 본서 권35 잡지4 지리2 한주조에는 한주(漢州) 치소(治所)의 직할현으로 나와 영속 관계에 차이가 있다. 이에 구성이 본래 국원성의 영현이었을 가능성을 상정하기도 한다(김태식, 1997, 「『삼국사기』 지리지 고구려조의 사료적 검토」, 『역사학보』 154). 본서 권35 잡지4 지리2 한주 ‘거서현’ 항목 참조.
註) 059
註) 060
註) 061
註) 062
註) 063
골내근현(骨乃斤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황효현(黃驍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경기도 여주시 소재지 일대로 비정된다. 통일신라 시기에 10정 군단의 하나인 골내근정(骨乃斤停)이 두어졌다. 골내근의 ‘골내(骨乃)’를 황효의 ‘황(黃)’에 상응하는 고유어로 보기도 한다(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503쪽). 본서 권35 잡지4 지리2의 한주 ‘황효현’ 항목 참조.
註) 064
註) 065
양근현(楊根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빈양현(濱陽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일대로 비정된다. 다만 본서 신라본기10에 원성왕 5년(789)에 도당 유학생 출신인 자옥(子玉)을 양근현 소수(小守)로 삼았다는 기사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경덕왕대 이후에도 ‘양근’이라는 지명이 공식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전덕재, 2021, 『三國史記 잡지·열전의 원전과 편찬』, 주류성, 117~124쪽). 본서 권35 잡지4 지리2의 한주 ‘빈양현’ 및 ‘양근현’ 항목 참조.
註) 066
註) 067
금물내군(今勿內郡)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흑양군(黑壤郡)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지금의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일대로 비정된다. 본서 지리2 한주 흑양군조에서는 ‘금물노(今勿奴)’로 나오며, ‘만노(萬弩)로도 일컬었다고 한다. 『고려사』 지리지1 양광도 청주목 진주(鎭州)조에는 ’수지(首知)‘나 ’신지(新知)‘라고도 일컬었다고 한다. 금물내의 ‘내(內)’, 금물노의 ’(奴)’, 만노의 ‘노(弩)’ 등은 흑양의 ‘양(壤)’에 상응하는 고구려의 고유어로 땅[地]을 뜻하며, 금물은 흑양의 ‘흑(黑)’에 상응하는 고유어로 중세 국어의 ‘거믈’에 해당한다(도수희, 2005, 499쪽). 진천 대모산성 및 그 북쪽의 송두리유적에서 고구려 토기가 출토되었는데(최종택, 2016, 4~28쪽), 고구려가 진천 지역을 영유한 사실을 반영한다. 한주의 치소(治所)가 있던 하남 선동[광주 선리]에서 금물노에 상응하는 ‘금만노(今万奴)’명 통일신라 명문기와가 출토되었는데(김규동·성재현, 2011, 564~567쪽; 박성현, 2021, 38~40쪽). 고구려 계통 지명이 통일신라 시기에도 널리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참고문헌〉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김규동·성재현, 2011, 「선리 명문와 고찰」, 『고고학지』 17
최종택, 2016, 「湖西地域 高句麗遺蹟의 調査現況과 歷史的 性格」, 『百濟硏究』 63
박성현, 2021, 「신라 통일기 한주(漢州)의 물자 이동과 조운(漕運)-하남 선동 출토 명문 기와를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121
〈참고문헌〉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김규동·성재현, 2011, 「선리 명문와 고찰」, 『고고학지』 17
최종택, 2016, 「湖西地域 高句麗遺蹟의 調査現況과 歷史的 性格」, 『百濟硏究』 63
박성현, 2021, 「신라 통일기 한주(漢州)의 물자 이동과 조운(漕運)-하남 선동 출토 명문 기와를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121
註) 068
만노(萬弩) : 신라 한주 소속 흑양군(黑壤郡)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 금물내(今勿內)의 다른 이름이다. 본서 열전1 김유신전에 따르면 서현(舒玄)이 만노군(萬弩郡) 태수로 부임하였으며 그곳에서 유신이 태어났다고 한다.
註) 069
도서현(道西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도서현(都西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지금의 충청북도 증평군 도안면 일대로 비정된다. 본서 권35 잡지4 지리2의 한주 ‘도서현’ 항목 참조.
註) 071
잉홀(仍忽)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음성현(陰城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지금의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일대로 비정된다. 잉홀의 잉(仍)은 ‘내(乃)와 같은 발음으로 ‘음(陰)’의 훈을 새긴 ‘그늘’에 상응하는 표현이며, 잉홀의 ‘홀(忽)’은 음성의 ‘성(城)’에 해당하는 고구려의 고유어이다(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499~500쪽 및 503쪽). 본서 권35 잡지4 지리2의 한주 ‘음성현’ 항목 참조.
註) 072
개차산군(皆次山郡)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개산군(介山郡)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지금의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일대로 비정된다. 한주의 치소(治所)가 있던 하남 선동[광주 선리]에서 통일신라 시기의 ‘개산(皆山)’명 명문기와가 출토되었고(김규동·성재현, 2011, 「선리 명문와 고찰」, 『고고학지』 17, 564~567쪽; 박성현, 2021, 38~40쪽), 안성 죽산의 봉업사지에서 고려 초기의 ‘개차관(皆次官)’명 명문기와가 출토된 바 있다(백종오, 1977, 93쪽; 서영일, 1999, 109쪽), 경덕왕대의 지명 개정 이후에도 그 이전 지명인 ‘개차산(皆次山)’이 널리 사용된 사실을 보여준다(전덕재, 2021, 117~124쪽). 본서 권35 잡지4 지리2의 한주 ‘개산군’ 항목 참조.
〈참고문헌〉
서영일, 1999, 『신라 육상 교통로 연구』, 학연문화사
전덕재, 2021, 『三國史記 잡지·열전의 원전과 편찬』, 주류성
백종오, 1997, 「안성 봉업사지 발굴조사」, 『’97 경기도박물관 발굴조사개보』
김규동·성재현, 2011, 「선리 명문와 고찰」, 『고고학지』 17
박성현, 2021, 「신라 통일기 한주(漢州)의 물자 이동과 조운(漕運)-하남 선동 출토 명문 기와를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121
〈참고문헌〉
서영일, 1999, 『신라 육상 교통로 연구』, 학연문화사
전덕재, 2021, 『三國史記 잡지·열전의 원전과 편찬』, 주류성
백종오, 1997, 「안성 봉업사지 발굴조사」, 『’97 경기도박물관 발굴조사개보』
김규동·성재현, 2011, 「선리 명문와 고찰」, 『고고학지』 17
박성현, 2021, 「신라 통일기 한주(漢州)의 물자 이동과 조운(漕運)-하남 선동 출토 명문 기와를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121
註) 073
노음죽현(奴音竹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음죽현(陰竹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지금의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 일대로 비정된다. 본서 권35 잡지4 지리2의 한주 ‘음죽현’ 항목 참조.
註) 074
나혜홀(奈兮忽)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백성군(白城郡)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지금의 경기도 안성시 소재지 일대로 비정된다. 나혜홀의 ‘나혜(奈兮)’는 백성의 ‘백(白)’의 훈에 상응하는 표현이며, ‘홀(忽)’은 백성의 ‘성(城)’에 해당하는 고구려의 고유어이다(도수희, 2005, 499~500쪽 및 503쪽). 안성 도기동산성에서 고구려가 백제 성곽을 재활용하여 성벽을 개축한 사실이 확인되었는데(김진영, 2017), 고구려 내혜홀의 치소일 가능성이 있다. 본서 권35 잡지4 지리2의 한주 ‘백성군’ 항목 참조.
〈참고문헌〉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김진영, 2017, 「안성 도기동산성의 발굴성과와 성벽구조에 대한 소고」, 『고구려발해연구』 58
〈참고문헌〉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김진영, 2017, 「안성 도기동산성의 발굴성과와 성벽구조에 대한 소고」, 『고구려발해연구』 58
註) 075
註) 076
註) 077
매홀(買忽)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수성군(水城郡)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을 중심으로 하는 수원시 일원으로 비정된다. 매홀의 ‘매(買)‘는 수성의 ‘수(水)’에 상응하는 고구려 고유어로 물[水]이나 강[川]을 뜻하며, ‘홀(忽)’은 수성의 ‘성(城)’에 해당하는 고구려의 고유어이다(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497~500쪽).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華城市) 봉담면(峰潭邑) 일대이다(정구복 외, 1997,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40쪽). 본서 권35 잡지4 지리2의 한주 ‘수성군’ 항목 참조.
註) 078
당성군(唐城郡)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당은군(唐恩郡)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남양면 일대로 비정된다. 본서 신라본기 권5~11에는 선덕왕에서 문무왕 8년(668) 6월 사이에 당항성(黨項城)이나 당항진(黨項津) 관련 기사가 다수 확인된다. 이에 당항성을 당성으로 개칭한 것은 문무왕 8년 6월 이후로 파악한 다음, 지리2 한주조나 지리4 고구려조에 고구려지명으로 전하는 군현명이 모두 고구려에서 사용한 지명이 아님을 보여주는 실례로 보는 견해가 있다(전덕재, 2021, 『三國史記 잡지·열전의 원전과 편찬』, 주류성, 193쪽). 또한 본서 신라본기10에 따르면 흥덕왕 4년(829)에 당은군을 당성진(唐城鎭)으로 삼았다고 하며, 신라본기11 헌안왕 2년(858)조나 열전10 궁예전에는 ‘당성군(唐城郡)’이나 ‘당성(唐城)’ 등의 명칭이 확인된다. 당성군은 당은군으로 고치기 이전의 명칭이 아니라, 흥덕왕대에 진(鎭)을 설치하면서 사용하기 시작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본서 권35 잡지4 지리2의 한주 ‘당은군’ 항목 참조.
註) 079
상홀현(上忽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차성현(車城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지금의 경기도 평택시 안중면 일대로 비정된다. 본서 지리4 고구려조에서는 ‘차홀(車忽)’로도 일컬었다고 한다. 상홀이나 차홀의 ‘홀(忽)’은 차성의 ‘성(城)’에 해당하는 고구려의 고유어이다. ‘차(車)’의 중세 훈은 ‘술위’인데, ‘상(上)’의 훈인 ‘술이’의 훈음차에 해당한다고 한다(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499~500쪽 및 504쪽).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499~500쪽)(참고문헌 중복). 본서 권35 잡지4 지리2의 한주 ‘차성현’ 항목 참조.
註) 080
부산현(釜山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진위현(振威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지금의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과 송탄동 일대로 비정된다. 송촌활달(松村活達)이라고도 일컬었다고 하며, 『고려사』 지리지1 양광도 수주(水州) 진위현조에는 옛날 연달부곡(淵達部曲)으로 금산현(金山縣)으로도 일컬었다고 한다. 본서 권35 잡지4 지리2의 한주 ‘진위현’ 항목 참조.
註) 081
註) 082
율목군(栗木郡)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율진군(栗津郡)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경기도 과천시 일대로 비정된다. 동사힐(冬斯肹)이라고도 일컬었다고 한다. 한주의 치소(治所)가 있던 하남 선동[광주 선리]에서 통일신라 시기의 ‘율목(栗木)’명 명문기와가 출토된 바 있는데(서울대학교 박물관, 2002, 20쪽; 전덕재, 2002, 27쪽; 김규동·성재현, 2011, 564~567쪽; 박성현, 2021, 38~40쪽), 경덕왕대의 지명 개정 이후에도 그 이전 지명이 널리 사용된 사실을 보여준다(전덕재, 2021, 117~124쪽). 본서 권35 잡지4 지리2의 한주 ‘율진군’ 항목 참조.
〈참고문헌〉
서울대학교 박물관, 2002,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명문기와』
전덕재, 2021, 『三國史記 잡지·열전의 원전과 편찬』, 주류성
전덕재, 2002,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명문기와 고찰」,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명문기와』, 서울대학교 박물관
김규동·성재현, 2011, 「선리 명문와 고찰」, 『고고학지』 17
박성현, 2021, 「신라 통일기 한주(漢州)의 물자 이동과 조운(漕運)-하남 선동 출토 명문 기와를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121
〈참고문헌〉
서울대학교 박물관, 2002,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명문기와』
전덕재, 2021, 『三國史記 잡지·열전의 원전과 편찬』, 주류성
전덕재, 2002,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명문기와 고찰」,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명문기와』, 서울대학교 박물관
김규동·성재현, 2011, 「선리 명문와 고찰」, 『고고학지』 17
박성현, 2021, 「신라 통일기 한주(漢州)의 물자 이동과 조운(漕運)-하남 선동 출토 명문 기와를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121
註) 084
잉벌노현(仍伐奴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곡양현(穀壤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지금의 서울시 금천구 일대로 비정된다. 잉벌노의 ’(奴)’는 곡양의 ‘양(壤)’에 상응하는 고구려의 고유어로 땅[地]을 뜻하고, 잉벌(仍伐)은 ‘나벌’로 발음되며 곡양의 ‘곡(穀)’에 상응하는 표현으로 중세 국어 이후의 ‘나부래기’에 비교할 수 있다고 한다(도수희, 2005, 499·504쪽). 서울 금천구 시흥동의 호암산성에서 ‘잉벌내(仍伐內)’명 청동숟가락과 함께 ‘잉대내(仍大內)’나 ‘잉대내관(仍大內官)’ 등이 새겨진 통일신라 기와가 다량 출토되었다(서울대학교 박물관, 1990; 박성현, 2008, 107쪽). 잉벌노라는 고구려 계통 지명이 경덕왕의 지명 개칭 이후에도 널리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본서 권35 잡지4 지리2의 한주 ‘곡양현’ 항목 참조.
〈참고문헌〉
서울대학교박물관, 1990, 『한우물 호암산성 및 연지발굴조사보고서』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박성현, 2008, 「신라 성지 출토 문자자료의 현황과 분류」, 『목간과 문자』 2
〈참고문헌〉
서울대학교박물관, 1990, 『한우물 호암산성 및 연지발굴조사보고서』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박성현, 2008, 「신라 성지 출토 문자자료의 현황과 분류」, 『목간과 문자』 2
註) 085
제차파의현(齊次巴衣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공암현(孔巖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지금의 서울시 강서구 가양동 일대로 비정된다. 제차파의의 ‘파의(巴衣)’는 공암의 ‘암(巖)’에 상응하는 고유어로 바위를 뜻하고, 제차(次)는 ‘공(孔)’에 상응하는 고유어로 추정된다(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500~501쪽 및 504~505쪽).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0 경기 양천현(陽川縣)조에 따르면 “현의 동쪽 10리 거리에 진산(津山)이 있는데 공암(孔巖)이라고도 일컫는다.”고 하며, “공암진(孔巖津)은 바위가 물 복판에 서 있고 구멍이 있어서 일컬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제차파의는 공암진 나루터에 있는 수중 바위를 지칭한다는 것이다. 본서 권35 잡지4 지리2의 한주 ‘공암현’ 항목 참조.
註) 086
매소홀현(買召忽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소성현(邵城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지금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일대로 비정된다. 미추홀(彌鄒忽)로도 일컬었다고 한다. 매소홀이나 미추홀의 ‘홀(忽)’은 소성의 ‘성(城)’에 해당하는 고구려의 고유어이다(도수희, 2005, 499~500쪽). 한주의 치소(治所)가 있던 하남 선동[광주 선리]에서 통일신라 시기의 ‘매소홀(買召忽)’명 명문기와가 출토되었는데(김규동·성재현, 2011, 564~567쪽; 박성현, 2021, 38~40쪽), 경덕왕 지명 개칭 이후에도 고구려 계통 지명이 널리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본서 권35 잡지4 지리2의 한주 ‘소성현’ 항목 참조.
〈참고문헌〉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김규동·성재현, 2011, 「선리 명문와 고찰」, 『고고학지』 17
박성현, 2021, 「신라 통일기 한주(漢州)의 물자 이동과 조운(漕運)-하남 선동 출토 명문 기와를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121
〈참고문헌〉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김규동·성재현, 2011, 「선리 명문와 고찰」, 『고고학지』 17
박성현, 2021, 「신라 통일기 한주(漢州)의 물자 이동과 조운(漕運)-하남 선동 출토 명문 기와를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121
註) 087
註) 088
장항구현(獐項口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장구군(獐口郡)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지금의 경기도 안산시 일대로 비정된다. 고사야홀차(古斯也忽次)로도 일컬었다고 한다. 경덕왕대 지명 개칭 이전에는 ‘현(縣)’이었다는 점에서 본래 율진군(栗津郡: 율목군, 경기도 과천시)의 영현이었을 수도 있다. 장항구의 ‘항구(項口)’는 사람의 목처럼 서해 쪽으로 기다랗게 뻗은 안산 일대의 지형을 지칭한다. 본서 권35 잡지4 지리2의 한주 ‘장구군’ 항목 참조.
註) 089
고사야홀차(古斯也忽次)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장구군(獐口郡)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지명인 장항구현(獐項口縣)의 다른 이름이다. 고사야홀차의 ‘홀차(忽次)’는 장항구의 ‘구(口)’에 상응하는 고유어로 바다 쪽으로 돌출한 지형인 ‘곶’을 뜻한다. 또 ‘고사(古斯)’는 장항구의 ‘장(獐)’에 상응하는 표현으로 중세 국어에서 노루를 ‘노로’라고 일컬었지만, 그 이전의 옛 새김이 ‘고소’일 수도 있다고 한다. 한주 소속 오관군(五關郡)의 영현인 장새(獐塞)의 다른 이름이 ‘고소어(古所於)’인 것도 이러한 가능성을 시사한다. 노루를 일컫는 일본어 ‘kusa’와도 비교된다고 한다(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501·505쪽).
註) 090
주부토군(主夫吐郡)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장제군(長堤郡)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지금의 인천광역시 계양구 일대로 비정된다. 주부토의 ‘토(吐)’는 장제의 ‘제(堤)’에 상응하는 고유어로 현대 국어의 ‘둑’을 뜻하는 ‘도’에 해당하며, ‘주부(主夫)’는 ‘장(長)’을 뜻하는 고유어로 추정된다(도수희, 2005, 502·505쪽). 인천 계양산성에서 ‘주부토(主夫吐)’ 명문이 새겨진 통일신라 기와가 다량 출토되었는데(선문대학교 고고연구소, 2005; 서봉수·박종서·박햇님·김우락, 2010; 서봉수, 2020), 경덕왕대 지명 개칭 이후에도 종전 지명이 널리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본서 권35 잡지4 지리2의 한주 ‘장제군’ 항목 참조.
〈참고문헌〉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선문대학교박물관, 2005, 『인천 계양산성 동문지 내 집수정 출토 목간 보존처리 결과 보고』
박성현, 2010, 『신라의 거점성 축조와 지방제도의 정비』,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서봉수·박종서·박햇님·김우락, 2010, 「인천 계양산성 출토 기와와 문자자료에 대하여 - 4차 발굴조사 결과를 중심으로」, 『木簡과 文字』 6
서봉수, 2020, 「계양산성 발굴과 문자자료」, 『木簡과 文字』 25
김진웅, 2021, 「인천 계양산성의 조사현황과 성과」, 『先史와 古代』 65(해당 논문은 인용되지 않았습니다.)
〈참고문헌〉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선문대학교박물관, 2005, 『인천 계양산성 동문지 내 집수정 출토 목간 보존처리 결과 보고』
박성현, 2010, 『신라의 거점성 축조와 지방제도의 정비』,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서봉수·박종서·박햇님·김우락, 2010, 「인천 계양산성 출토 기와와 문자자료에 대하여 - 4차 발굴조사 결과를 중심으로」, 『木簡과 文字』 6
서봉수, 2020, 「계양산성 발굴과 문자자료」, 『木簡과 文字』 25
김진웅, 2021, 「인천 계양산성의 조사현황과 성과」, 『先史와 古代』 65(해당 논문은 인용되지 않았습니다.)
註) 091
수이홀(首尒忽)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수성현(戍城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지금의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일대로 비정된다. 수이홀의 ‘홀(忽)’은 수성의 ‘성(城)’에 해당하는 고구려의 고유어이며, ‘수이(首尒)’나 ‘수(戍)’는 ‘상(上)’이나 ‘봉(峯)’의 훈인 ‘술이’를 나타낸 음차 표현으로 이해된다(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499~500쪽 및 504쪽). 본서 권35 잡지4 지리2의 한주 장제군 ‘수성현’ 항목 참조.
註) 092
검포현(黔浦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김포현(金浦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경기도 김포시 소재지 일대로 비정된다. 본서 열전10 궁예전에는 897년(乾寧 4)에 궁예가 공암(孔巖: 서울시 강서구 가양동), 혈구(穴口: 강화도) 등과 함께 검포(黔浦)을 격파하였다고 나온다. 본서 권35 잡지4 지리2의 한주 ‘김포현’ 항목 참조.
註) 093
동자홀현(童子忽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동성현(童城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지금의 경기도 김포시 하성면 일대로 비정된다. 구사파의(仇斯波衣)라고도 일컬었다고 한다. 동자홀의 ‘홀(忽)’은 동성의 ‘성(城)’에 해당하는 고구려의 고유어이다. 또 구사파의의 ‘구사(仇斯)를 ’동자(童子)‘를 뜻하는 고유어로 상정한 다음 일본어의 ’ko(子)‘에 비교하기도 한다(도수희, 2005, 499~500쪽 및 505쪽). 한편 한주의 치소(治所)가 있던 하남 선동[광주 선리]에서 통일신라 시기의 ‘동자(童子)’명과 ‘동성(童城)’명 명문기와가 동시에 출토되었는데(서울대학교 박물관, 2002, 19쪽; 전덕재, 2002, 27쪽; 김규동·성재현, 2011, 564~567쪽; 박성현, 2021, 38~40쪽), 경덕왕대 지명 개정 이후에 그 이전과 이후 지명이 혼용되던 양상을 보여준다. 본서 권35 잡지4 지리2의 한주 ‘동성현’ 항목 참조.
〈참고문헌〉
서울대학교 박물관, 2002,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명문기와』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전덕재, 2002,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명문기와 고찰」,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명문기와』, 서울대학교 박물관
김규동·성재현, 2011, 「선리 명문와 고찰」, 『고고학지』 17
박성현, 2021, 「신라 통일기 한주(漢州)의 물자 이동과 조운(漕運)-하남 선동 출토 명문 기와를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121
〈참고문헌〉
서울대학교 박물관, 2002,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명문기와』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전덕재, 2002,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명문기와 고찰」,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명문기와』, 서울대학교 박물관
김규동·성재현, 2011, 「선리 명문와 고찰」, 『고고학지』 17
박성현, 2021, 「신라 통일기 한주(漢州)의 물자 이동과 조운(漕運)-하남 선동 출토 명문 기와를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121
註) 094
구사파의(仇斯波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동성현(童城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지명이라는 동자홀현(童子忽縣)의 다른 이름이다. 구사파의의 ‘구사(仇斯)’를 동자홀의 ’동자(童子)‘를 뜻하는 고유어로 상정한 다음 일본어의 ’ko(子)‘에 비교하기도 한다(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505쪽). 또 구사파의의 ‘파의(波衣)’는 바위나 고개를 뜻하는 ‘암(巖)’이나 ‘현(峴)’에 상응하는 고유어인데(도수희, 2005, 500~501쪽), 성(城)을 뜻하는 동자홀의 ‘홀(忽)’과 상응한 표현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본래 ‘구사파의’로 불리다가 거점 성곽을 축조하면서 ‘동자홀’로 이름이 바뀌었을 가능성이 있다.
註) 095
평회압현(平淮押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분진현(分津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지금의 경기도 김포시(金浦市) 월곶면(月串面) 일대로 비정된다.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에는 ‘회(淮)’자가 ‘유(唯)’자로 표기되어 있다. ‘별사파의(別史波衣)’라고도 일컬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평회압의 ‘압(押)’은 험준한 산악을 뜻하는 ‘악(岳)’이나 ‘악(嶽)’에 상응하는 고유어, 별사파의의 ‘파의(波衣)’는 바위나 고개를 뜻하는 ‘암(巖)’이나 ‘현(峴)’에 상응하는 고유어로 각기 사용되는데(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500~501쪽), 여기에서는 고유어 ‘압’과 ‘파의’가 상응하는 사례로 나온다. 한편 ‘평회압’을 개정한 ‘분진(分津)’의 ‘진(津)’을 ‘압’이나 ‘파의’에 상응하는 표현으로 보기는 어려우므로 경덕왕대의 지명 개정 과정에서 지명의 의미가 바뀌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본서 권35 잡지4 지리2의 한주 ‘분진현’ 항목 참조.
註) 096
별사파의(別史波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분진현(分津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지명이라는 평회압현(平淮押縣)의 다른 이름이다.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에는 평회압현의 ‘회(淮)’자가 ‘유(唯)’자로 표기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별사파의의 ‘파의(波衣)’는 바위나 고개를 뜻하는 ‘암(巖)’이나 ‘현(峴)’에 상응하는 고유어, 평회압의 ‘압(押)’은 험준한 산악을 뜻하는 ‘악(岳)’이나 ‘악(嶽)’에 상응하는 고유어로 각기 사용되는데(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500~501쪽), 여기에서는 고유어 ‘파의’와 ‘압’이 상응하는 사례로 나온다. 한편 별사파의의 별사를 ‘별리(別吏)’의 오기로 보아 ‘평(平)’의 훈에 상응하는 ‘벌리’로 새겨 읽기도 한다(도수희, 2005, 505~506쪽).
註) 097
북한산군(北漢山郡)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한양군(漢陽郡)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군명(郡名)이라고 한다. 평양(平壤)으로도 일컬었다고 하는데, 한강 북쪽의 아차산 일대로 비정된다. 다만 ‘북한산군’은 고구려가 아니라 신라가 설치한 것으로 파악된다(전덕재, 2009, 107~116쪽; 윤성호, 2019, 306~309쪽). 고구려는 475~551년에 중랑천-아차산 일대에 ‘남평양’을 건설해 한강 유역을 경영하는 거점으로 삼았는데, 신라가 553년에 한강 유역을 차지한 다음, 고구려의 남평양이 설치되었던 한강 북쪽의 아차산 일대를 신주(新州)의 치소로 삼았다. 그 뒤 신라는 637년(선덕왕 6)에 신주를 한산주와 우수주로 분리하면서 한산주의 치소를 지금의 경기도 하남시 이성산성 일대로 옮기고, 아차산에는 북한산군의 치소를 둔 것으로 파악된다.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의 ‘한양군’ 항목 참조.
〈참고문헌〉
전덕재, 2009,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과 지배방식」, 『향토서울』 73
윤성호, 2019, 「아차산성 출토 명문기와를 통해 본 신라 하대의 북한산성」, 『한국사학보』 74
〈참고문헌〉
전덕재, 2009,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과 지배방식」, 『향토서울』 73
윤성호, 2019, 「아차산성 출토 명문기와를 통해 본 신라 하대의 북한산성」, 『한국사학보』 74
註) 099
평양(平襄) : 통일신라 한주 소속 한양군(漢陽郡)의 고구려 시기 명칭이라는 북한산군(北漢山郡)의 다른 이름이다. 『고려사』 지리지1 양광도 남경유수관 양주조나 『세종실록』 권148 지리지 경도 한성부에는 ‘남평양성(南平壤城)’으로 나온다. 다만 ‘평양’의 본명이라는 북한산군은 고구려가 아니라 신라가 설치한 군으로 파악된다(전덕재, 2009, 107~116쪽; 윤성호, 2019, 306~309쪽). 이에 이 기사는 백제의 한성 도성을 ‘고구려의 남평양’으로 비정한 본서 권37 지리4의 백제조를 잘못 인용하였다고 보거나(임기환, 2002, 19~20쪽), 고려 건국 초에 한강 이북을 고구려 땅이라고 주장하는 과정에서 한강유역에 고구려의 남평양을 설정하는 역사인식이 형성되었다고 이해하는(윤경진, 2017) 등 사실성 자체를 부정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본서 권44 거칠부(居柒夫)전에는 551년에 백제는 고구려의 ‘평양(平壤)’, 신라는 ‘죽령(竹嶺)-고현(高峴)’의 10군(郡)을 각각 분할 점령하였다고 나온다. 『일본서기』 권19 흠명기 12·13년조에도 백제가 종전의 도성이 있던 ‘한성의 땅(漢城之地)’과 ‘평양(平壤)’ 등 6군을 공취하였다고 나오는데(노태돈, 2005, 184~185쪽), 이 기사는 660년대에는 이미 성립되어 있었다(여호규, 2021, 35~42쪽). 이 기사의 사실성 자체를 부인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최근 고고조사 현황을 종합하면 고구려가 백제의 한성 도성을 점령한 다음, 구릉성으로 군사적 활용도가 높은 몽촌토성만 재활용하고 평지성인 풍납토성을 폐기하였다. 이로 보아 고구려가 풍납토성에 상응하는 평지거점을 한강 북안에 구축하였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 기사의 ‘평양’은 이를 지칭한다고 추정된다. 이에 아차산 일대에 밀집 분포하는 고구려 보루성을 남평양의 외곽 방어시설로 파악하거나(최장열, 2002, 34~50쪽) 아차산4보루 출토 토기명문의 ‘후부도□형(後阝都□兄)’의 ‘후부’를 한강유역에 설치한 남평양(漢城 別都)의 행정구역으로 추정하기도 한다(최종택, 2008, 154쪽). 최근에는 동대문구 장안동 일대가 본래 중랑천의 하중도(河中島)였다는 사실에 주목해 이곳에 남평양을 건설하여 한강유역을 지배하기 위한 핵심 거점으로 삼았다고 보기도 한다(여호규, 2021, 48~65쪽).
〈참고문헌〉
임기환, 2002, 「고구려·신라의 한강유역 경영과 서울」, 『서울학연구』 18
최장열, 2002, 「한강 북안 고구려보루의 축조시기와 그 성격」, 『한국사론』(서울대 국사학과) 47
노태돈, 2005, 「고구려의 한성 지역 병탄과 그 지배 양태」, 『향토서울』 66
최종택, 2008, 「고고자료를 통해 본 백제 웅진도읍기 한강유역 영유설 재고」, 『백제연구』 47
전덕재, 2009,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과 지배방식」, 『향토서울』 73
윤경진, 2017, 「고구려 ‘南平壤’의 실체와 출현 배경」, 『서울과역사』 95
윤성호, 2019, 「아차산성 출토 명문기와를 통해 본 신라 하대의 북한산성」, 『한국사학보』 74
여호규, 2021, 「고구려의 ‘남평양(南平壤)’ 건설과 운영」, 『역사문화연구』 79
〈참고문헌〉
임기환, 2002, 「고구려·신라의 한강유역 경영과 서울」, 『서울학연구』 18
최장열, 2002, 「한강 북안 고구려보루의 축조시기와 그 성격」, 『한국사론』(서울대 국사학과) 47
노태돈, 2005, 「고구려의 한성 지역 병탄과 그 지배 양태」, 『향토서울』 66
최종택, 2008, 「고고자료를 통해 본 백제 웅진도읍기 한강유역 영유설 재고」, 『백제연구』 47
전덕재, 2009,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과 지배방식」, 『향토서울』 73
윤경진, 2017, 「고구려 ‘南平壤’의 실체와 출현 배경」, 『서울과역사』 95
윤성호, 2019, 「아차산성 출토 명문기와를 통해 본 신라 하대의 북한산성」, 『한국사학보』 74
여호규, 2021, 「고구려의 ‘남평양(南平壤)’ 건설과 운영」, 『역사문화연구』 79
註) 100
골의내현(骨衣內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황양현(荒壤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지금의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일대로 비정된다. 본서 지리2 한주조에서는 ‘골의노(骨衣奴)’로 나온다. 골의내의 ‘내(內)’나 골의노의 ’(奴)’는 황양의 ‘양(壤)’에 상응하는 고구려의 고유어로 땅[地]을 뜻한다. ‘골의’는 황양의 ‘황(荒)’에 상응하는 고유어인데, 신라의 ‘거칠’부(居柒夫)를 ‘황’종(荒宗)으로 일컬은 사례로 보아 “골의~거질”을 거쳐 중세 국어의 ‘거칠’(거칠뫼=荒山: 『용비어천가』 8)로 이어진 것으로 추정된다(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499·506·514쪽). 본서 권35 잡지4 지리2의 한주 ‘황양현’ 항목 참조.
註) 101
왕봉현(王逢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우왕현(遇王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지금의 경기도 고양시(高陽市) 행주내동(幸州內洞) 일대로 비정된다. 개백현(皆伯縣)이라고도 일컬었다고 한다. 본서 지리2 한주에는 ‘개백현’을 고구려시기의 본명이라 하여 차이가 있다. 본문에서 보듯이 한씨(漢氏) 미녀가 안장왕을 맞이한 데서 유래한 지명이라고 하는데, 6세기 전반에 한강 하류의 유력가가 왕실과의 통혼을 통해 중앙세력으로 진출한 사실을 전하는 것으로 이해된다(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462~466쪽). 한씨 미녀가 안장왕을 맞이하였다는 설화는 아래의 ‘달을성현(達乙省縣)’에도 나온다. 본서 권35 잡지4 지리2의 한주 ‘우왕현’ 항목 참조.
註) 102
註) 103
안장왕(安臧王) : 고구려 22대왕으로 재위 기간은 519~531년이다. 본문 기사를 안장왕이 한강 하류 일대의 유력가와 혼인을 맺어 왕권을 강화하려 한 사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462~466쪽). 본서 권19 고구려본기7 안장왕 즉위년조 참조.
註) 104
매성군(買省郡)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내소군(來蘇郡)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인데, 지금의 경기도 양주시 고읍동(古邑洞) 일대로 비정된다. 본서 지리2 한주조에서는 매성현(買省縣)으로 나오며, ‘마홀(馬忽)’이라고도 일컬었다고 한다. 본서 신라본기7 문무왕 15년(675) 9월조에는 나당전쟁 최대의 격전지로 매소성(買肖城)이 나온는데, 글자 형태가 매성군(買省郡)과 유사하다는 점을 근거로 매소성을 매성군(내소군)의 치소로 비정되는 양주 대모산성으로 파악하기도 한다(이병도, 1977: 2012, 153쪽; 정구복 외, 1997c, 237쪽; 노태돈, 2009, 266쪽; 김병희, 2014, 197~215쪽). 한주의 치소(治所)가 있던 하남 선동[광주 선리]에서 통일신라 시기의 ‘매성(買省)’명 명문기와가 출토된 바 있는데(서울대학교 박물관, 2002, 20쪽; 전덕재, 2002, 27쪽; 김규동·성재현, 2011, 564~567쪽; 박성현, 2021, 38~40쪽), 경덕왕대의 지명 개정 이후에도 그 이전 지명이 널리 사용된 사실을 보여준다(전덕재, 2021, 117~124쪽). 본서 권35 잡지4 지리2의 한주 ‘내소군’ 항목 참조.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정구복 외, 1997c,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서울대학교 박물관, 2002,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명문기와』
노태돈, 2009, 『삼국통일전쟁사』, 서울대학교 출판부
박성현, 2010, 『신라의 거점성 축조와 지방제도의 정비』,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전덕재, 2021, 『三國史記 잡지·열전의 원전과 편찬』, 주류성
전덕재, 2002,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명문기와 고찰」,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명문기와』, 서울대학교 박물관
김규동·성재현, 2011, 「선리 명문와 고찰」, 『고고학지』 17
김병희, 2018, 「나당전쟁의 종료 시점에 대한 재검토 및 매소성 전역의 과정 연구」, 『한국고대사탐구』 30
박성현, 2021, 「신라 통일기 한주(漢州)의 물자 이동과 조운(漕運)-하남 선동 출토 명문 기와를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121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정구복 외, 1997c,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서울대학교 박물관, 2002,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명문기와』
노태돈, 2009, 『삼국통일전쟁사』, 서울대학교 출판부
박성현, 2010, 『신라의 거점성 축조와 지방제도의 정비』,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전덕재, 2021, 『三國史記 잡지·열전의 원전과 편찬』, 주류성
전덕재, 2002,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명문기와 고찰」,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명문기와』, 서울대학교 박물관
김규동·성재현, 2011, 「선리 명문와 고찰」, 『고고학지』 17
김병희, 2018, 「나당전쟁의 종료 시점에 대한 재검토 및 매소성 전역의 과정 연구」, 『한국고대사탐구』 30
박성현, 2021, 「신라 통일기 한주(漢州)의 물자 이동과 조운(漕運)-하남 선동 출토 명문 기와를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121
註) 105
마홀(馬忽) : 신라 한주 내소군(來蘇郡)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는 매성군(買省郡)의 다른 이름이다. 견성군(堅城郡)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 비성군(臂城郡)의 이칭도 ‘마홀(馬忽)’이라고 하는데, 견성군=비성군의 치소로 비정되는 포천 반월산성에서 통일신라 시기의 ‘마홀(馬忽)’명 명문 기와가 출토된 바 있다. 매성군으로 비정되는 양주시와 견성군으로 비정되는 포천시는 인접하였다는 점에서 양자 모두 고구려 시기에는 마홀(馬忽)이라는 같은 행정구역의 관내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지 않다면 매성군을 마홀로 일컬었다는 본 기사가 두찬일 가능성이 있다.
註) 106
칠중현(七重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중성현(重城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지명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일대로 비정된다. ‘난은별(難隱別)’이라고도 일컬었다고 하는데, ‘난은(難隱)’은 ‘7’을 뜻하는 순우리말 ‘나나’에 해당하며, ‘별(別)’은 ‘중(重)’에 상응하는 고유어로 중세국어 ‘ᄇᆞᆯ’에 해당한다(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502·512쪽). 본서 백제본기1 온조왕 18년조에 따르면 백제가 칠중하(七重河)에서 말갈을 격퇴하였다고 하는데, 칠중하는 칠중성(七重城: 파주 적성) 맞은편의 연천군 미산면-장남면 구간에서 일곱 차례나 곡류(曲流)하며 흐르는 임진강을 지칭한다. 칠중성은 ‘칠중하’라는 하천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칠중성은 7세기 중반에 신라 북방의 요충지로 고구려나 당과의 격전지로 자주 나온다. 본서 권35 잡지4 지리2의 한주 ‘중성현’ 항목 참조.
註) 107
註) 108
파해평사현(波害平史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파평현(波平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지금의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일대로 비정된다. ‘액봉(頟蓬)’으로도 일컬었다고 한다. 파해평사의 ‘파해(波害)’는 바위(巖, 石)를 뜻하고(도수희, 2005, 500~501쪽), ‘평사(平史)’는 지평(砥平)의 이칭인 지현(砥峴)의 ‘현(峴)’에 상응한다고 보아 고구려 광개토왕이 392년 7월에 함락시켰다는 백제의 석현성(石峴城)으로 비정하기도 한다(여호규, 2012, 181~182쪽). 392년에 광개토왕이 함락한 백제의 석현성이나 675년 당군이 매소성에서 신라군에게 패배한 다음 공격한 석현성이 모두 임진강 하류의 파주시 파평면 일대로 비정된다는 것이다. 본서 권35 잡지4 지리2의 한주 ‘파평현’ 항목 참조.
〈참고문헌〉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여호규, 2012, 「4세기 후반-5세기 초엽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 변천」, 『역사와 현실』 84
〈참고문헌〉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여호규, 2012, 「4세기 후반-5세기 초엽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 변천」, 『역사와 현실』 84
註) 109
註) 110
註) 111
천정구현(泉井口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교하군(交河郡)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지명인데, 지금의 경기도 파주시 교하동과 탄현면 일대로 비정된다. 경덕왕 16년에 교하군으로 지명을 개칭하기 이전에는 현(縣)이었다는 점에서 본래 내소군(來蘇郡: 경기도 양주)이나 한양군(漢陽郡: 서울시 광진구)에 속한 영현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어을매곶(於乙買串)’으로도 일컬었다고 하는데, 어을매곶과 천정구(泉井口)의 지명 형태소 가운데 ‘어을(於乙)=천(泉)’은 ‘교(交)’의 옛 새김인 ‘ər[어울]’, ‘매(買)=정(井)’은 ‘강(江, 川)’이나 ‘물(水)’, ‘곶(串)=구(口)’는 바다 쪽으로 튀어나온 지형 등을 뜻한다. 어을매곶과 천정구는 임진강과 한강 합류처에 자리하면서 바다 쪽으로 튀어나온 오두산성 일대 지형에서 유래한 지명인데, 경덕왕대에 지명을 개칭할 때 두 강이 합류하는 ‘어을(於乙)’의 의미를 정확하게 표현하려고 ‘교(交)’로 한역(漢譯)한 것이다(도수희, 2005, 165~172쪽 및 214~226쪽). 광개토왕 시기에 고구려와 백제의 격전지였던 관미성(關彌城)의 ‘관(關’을 두 강이 합류하는 ‘어을(於乙)=교(交)’, ‘미(彌)’를 강을 뜻하는 ‘매(買)’에 상응한다고 보아 어을매=천정구와 같은 오두산성 일대로 비정하기도 한다(여호규, 2012, 182~186쪽). 파주 오두산성 일대는 삼국시기 이래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는 것이다. 파주 오두산성에서 통일신라 시기의 ‘천정(泉井)’명 명문기와가 출토되었고(경희대학교 고고미술사연구소, 1992; 박성현, 2008, 107쪽), 한주의 치소(治所)가 있던 하남 선동[광주 선리]에서도 ‘천구군(泉口郡)’명 통일신라 시기의 기와가 다수 출토되었다(서울대학교 박물관, 2002, 15쪽; 김규동·성재현, 2011, 564-567쪽; 박성현, 2021, 38~40쪽). 경덕왕대 지명 개정 이후에도 그 이전 지명이 널리 사용된 것이다(전덕재, 2021, 117~124쪽). 본서 권35 잡지4 지리2의 한주 ‘교하군’ 항목 참조.
〈참고문헌〉
경희대학교 고고미술사연구소, 1992, 『오두산성(Ⅰ)』
서울대학교 박물관, 2002,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명문기와』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전덕재, 2021, 『三國史記 잡지·열전의 원전과 편찬』, 주류성
박성현, 2008, 「신라 성지 출토 문자자료의 현황과 분류」, 『목간과 문자』 2
김규동·성재현, 2011, 「선리 명문와 고찰」, 『고고학지』 17
여호규, 2012, 「4세기 후반-5세기 초엽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 변천」, 『역사와 현실』 84
박성현, 2021, 「신라 통일기 한주(漢州)의 물자 이동과 조운(漕運)-하남 선동 출토 명문 기와를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121
〈참고문헌〉
경희대학교 고고미술사연구소, 1992, 『오두산성(Ⅰ)』
서울대학교 박물관, 2002,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명문기와』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전덕재, 2021, 『三國史記 잡지·열전의 원전과 편찬』, 주류성
박성현, 2008, 「신라 성지 출토 문자자료의 현황과 분류」, 『목간과 문자』 2
김규동·성재현, 2011, 「선리 명문와 고찰」, 『고고학지』 17
여호규, 2012, 「4세기 후반-5세기 초엽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 변천」, 『역사와 현실』 84
박성현, 2021, 「신라 통일기 한주(漢州)의 물자 이동과 조운(漕運)-하남 선동 출토 명문 기와를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121
註) 112
어을매곶(於乙買串) : 신라 한주 소속 교하군(交河郡)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는 천정구현(泉井口縣)의 다른 이름이다. 어을매곶과 천정구(泉井口)의 지명 형태소 가운데 ‘어을(於乙)=천(泉)’은 ‘교(交)’의 옛 새김인 ‘ər[어울]’, ‘매(買)=정(井)’은 ‘강(江, 川)’이나 ‘물(水)’, ‘곶(串)=구(口)’는 바다 쪽으로 튀어나온 지형 등을 뜻한다. 어을매곶과 천정구는 임진강과 한강 합류처에 자리하면서 바다 쪽으로 튀어나온 오두산성 일대 지형에서 유래한 것이다(도수희, 2005, 165~172쪽 및 214~226쪽). 이에 광개토왕 시기에 고구려와 백제의 격전지였던 관미성(關彌城)의 ‘관(關’을 두 강이 합류하는 ‘어을(於乙)=교(交)’, ‘미(彌)’를 강을 뜻하는 ‘매(買)’에 상응한다고 보아 어을매=천정구와 같은 오두산성 일대로 비정하기도 한다(여호규, 2012, 182~186쪽).
〈참고문헌〉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여호규, 2012, 「4세기 후반-5세기 초엽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 변천」, 『역사와 현실』 84
〈참고문헌〉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여호규, 2012, 「4세기 후반-5세기 초엽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 변천」, 『역사와 현실』 84
註) 113
술이홀현(述尒忽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봉성현(峯城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경기도 파주시 파주읍 일대로 비정된다. ‘수니홀(首泥忽)이라고도 일컬었다고 하며, 『고려사』 지리지1 양광도 남경유수관 양주 봉성현조에는 ’술미홀현(述彌忽縣)‘로도 나온다. 술이홀이나 수니홀의 술이(述尒)와 ’수니(首泥)‘는 ‘봉(峯)’의 훈을 새긴 고유어이며, ‘홀(忽)’은 봉성의 ‘성(城)’에 해당하는 고구려의 고유어이다(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499~500쪽 및 504쪽). 본서 권35 잡지4 지리2의 한주 ‘봉성현’ 항목 참조.
註) 114
註) 115
달을성현(達乙省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고봉현(高烽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경기도 고양시 관산동 일대로 비정된다. 본서 지리4 고구려조에 따르면 “한씨(漢氏) 미녀가 높은 산[高山] 위에서 봉화를 피워 안장왕을 맞이한 곳이라 하여 ‘고봉(高烽)’이라고 일컬었다고 한다. 대체로 6세기 전반에 한강 하류의 유력가가 왕실과의 통혼을 통해 중앙세력으로 진출한 사실을 전하는 설화로 이해된다(노태돈 1999, 462-466쪽). 달을성현의 ‘달(達)’은 고봉의 ‘고(高)’에 상응하는 고유어로 ‘높다(高)’ 또는 ‘뫼[山]’를 뜻한다(도수희, 2005, 498~499쪽). 한씨 미녀가 안장왕을 맞이하였다는 설화는 본서 권37 지리4 고구려조의 ‘개백현(皆伯縣)’에도 나온다.
〈참고문헌〉
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참고문헌〉
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註) 116
안장왕(安臧王) : 고구려 22대왕으로 재위 기간은 519~531년이다. 본문 기사를 안장왕이 한강 하류 일대의 유력가와 혼인을 맺어 왕권을 강화하려 한 사실을 반영한다고 이해하기도 한다(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462~466쪽). 본서 권19 고구려본기7 안장왕 즉위년조 참조.
註) 117
註) 118
비성군(臂城郡)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견성군(堅城郡)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경기도 포천시 군내면 일대로 비정된다. 본문에서 보듯이 마홀(馬忽)이라고도 일컬었다고 하는데, 본서 권35 지리2 신라 한주조에는 ‘마홀군‘으로 일컬었다고 나온다. 마홀의 ‘홀(忽)’은 비성이나 견성의 ‘성(城)’에 해당하는 고구려의 고유어이다(도수희, 2005, 499~500쪽). 포천 반월산성(半月山城)에서 통일신라 시기의 ‘마홀’(馬忽)’명 기와가 출토되었는데(단국대학교 사학과, 1996; 박성현, 2008, 107쪽), 견성군=비성군의 치소(治所)로 파악된다(서영일, 1999, 243~249쪽; 박성현, 2010, 262쪽). 629년(진평왕 51, 영류왕 12) 8월에 신라가 점령하였다는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이 비성군(臂城郡)에 해당하는 것으로 파악되는데(서영일, 1996: 1999, 243~249쪽), 이에 따른다면 지금의 포천시 일대는 고구려가 629년까지 장악하였다가 신라에게 빼앗긴 것으로 이해된다. 본서 권35 잡지4 지리2의 한주 ‘견성군’ 항목 참조.
〈참고문헌〉
단국대학교 사학과, 1996, 『포천 반월산성 1차 발굴조사보고서』
서영일, 1999, 『신라 육상 교통로 연구』, 학연문화사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박성현, 2010, 『신라의 거점성 축조와 지방제도의 정비』,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서영일, 1996, 「抱川 半月山城 出土 ‘馬忽受解空口單’銘 기와의 考察」, 『사학지』 29
박성현, 2008, 「신라 성지 출토 문자자료의 현황과 분류」, 『목간과 문자』 2
〈참고문헌〉
단국대학교 사학과, 1996, 『포천 반월산성 1차 발굴조사보고서』
서영일, 1999, 『신라 육상 교통로 연구』, 학연문화사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박성현, 2010, 『신라의 거점성 축조와 지방제도의 정비』,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서영일, 1996, 「抱川 半月山城 出土 ‘馬忽受解空口單’銘 기와의 考察」, 『사학지』 29
박성현, 2008, 「신라 성지 출토 문자자료의 현황과 분류」, 『목간과 문자』 2
註) 119
마홀(馬忽) : 신라 한주 소속 견성군(堅城郡)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는 비성군(臂城郡)의 다른 이름이다. 본서 권35 지리2 신라 한주조에는 ‘마홀군‘으로 나온다. 마홀의 ‘홀(忽)’은 비성이나 견성의 ‘성(城)’에 해당하는 고구려의 고유어이다(도수희, 2005, 499~500쪽). 포천 반월산성(半月山城)에서 통일신라 시기의 ‘마홀’(馬忽)’명 기와가 출토되었는데(단국대학교 사학과, 1996; 박성현, 2008, 107쪽), 견성군=비성군의 치소(治所)로 파악된다(서영일, 1999, 243~249쪽; 박성현, 2010, 262쪽).
〈참고문헌〉
단국대학교 사학과, 1996, 『포천 반월산성 1차 발굴조사보고서』
서영일, 1999, 『신라 육상 교통로 연구』, 학연문화사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박성현, 2010, 『신라의 거점성 축조와 지방제도의 정비』,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서영일, 1996, 「抱川 半月山城 出土 ‘馬忽受解空口單’銘 기와의 考察」, 『사학지』 29
박성현, 2008, 「신라 성지 출토 문자자료의 현황과 분류」, 『목간과 문자』 2
〈참고문헌〉
단국대학교 사학과, 1996, 『포천 반월산성 1차 발굴조사보고서』
서영일, 1999, 『신라 육상 교통로 연구』, 학연문화사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박성현, 2010, 『신라의 거점성 축조와 지방제도의 정비』,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서영일, 1996, 「抱川 半月山城 出土 ‘馬忽受解空口單’銘 기와의 考察」, 『사학지』 29
박성현, 2008, 「신라 성지 출토 문자자료의 현황과 분류」, 『목간과 문자』 2
註) 120
내을매(內乙買)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사천현(沙川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지금의 경기도 동두천시 송내동 일대로 비정된다. ‘내이미(內尒米)’로도 일컬었다고 한다. 내을매와 매이미의 내을(內乙)=내이(內尒)는 사천의 ‘사(沙)’, 매(買)=미(米)는 ‘천(川)’에 상응하는 고유어이다(도수희, 2005, 497~498쪽). 이에 〈광개토왕릉비〉 영락6년(396)조의 백제 58성 가운데 하나인 미사성(彌沙城)의 ‘미(彌)’가 매(買)=미(米)=천(川), ‘사(沙)’는 내을(內乙)=내이(內尒)=사(沙)에 각각 상응한다고 보아 사천현 일대로 비정하기도 한다(여호규, 2012, 192쪽). 또 『일본서기』 권19 흠명천황 13년조에 나오는 신라의 니미방(尼彌方)을 ‘내이미’과 음이 유사하다고 보아 동두천 일대로 비정하기도 한다(전덕재, 2009, 109~110쪽).
〈참고문헌〉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전덕재, 2009,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과 지배방식」, 『향토서울』 73
여호규, 2012, 「4세기 후반-5세기 초엽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 변천」, 『역사와 현실』 84
〈참고문헌〉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전덕재, 2009,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과 지배방식」, 『향토서울』 73
여호규, 2012, 「4세기 후반-5세기 초엽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 변천」, 『역사와 현실』 84
註) 121
내이미(內尒米) : 신라 한주 견성군(堅城郡) 소속 사천현(沙川縣)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는 내을매(內乙買)의 다른 이름이다. 내이미와 매을매의 내이(內尒)=내을(內乙)은 사천의 ‘사(沙)’, 미(米)=매(買)는 ‘천(川)’에 상응하는 고유어이다(도수희, 2005, 497~498쪽). 이에 〈광개토왕릉비〉 영락6년(396)조의 백제 58성 가운데 하나인 미사성(彌沙城)의 ‘미(彌)’가 매(買)=미(米)=천(川), ‘사(沙)’는 내을(內乙)=내이(內尒)=사(沙)에 각각 상응한다고 보아 사천현 일대로 비정하기도 한다(여호규, 2012, 192쪽). 또 『일본서기』 권19 흠명천황 13년조에 나오는 신라의 니미방(尼彌方)을 ‘내이미’와 음이 유사하다고 보아 동두천 일대로 비정하기도 한다(전덕재, 2009, 109~110쪽).
〈참고문헌〉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전덕재, 2009,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과 지배방식」, 『향토서울』 73
여호규, 2012, 「4세기 후반-5세기 초엽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 변천」, 『역사와 현실』 84
〈참고문헌〉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전덕재, 2009,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과 지배방식」, 『향토서울』 73
여호규, 2012, 「4세기 후반-5세기 초엽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 변천」, 『역사와 현실』 84
註) 122
철원군(鐵圓郡)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철성군(鐵城郡)’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지명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鐵原邑) 사요리(四要里) 일대로 비정된다. 그런데 본서에는 경덕왕대보다 늦은 시기인 진성왕 9년 8월조, 효공왕 7년조와 효공왕 9년 7월조, 열전10 궁예전 등에 철성군으로 고치기 이전의 ‘철원’이라는 지명이 다수 확인된다. 이로 보아 ‘철원군’이 고구려 시기의 지명이라는 본서의 기사는 오류일 가능성이 있다. 모을동비(毛乙冬非)’로도 일컬었다고 한다.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 ‘철원군’ 항목 참조.
註) 123
註) 124
양골현(梁骨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동음현(洞陰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지금의 경기도 포천시 영중면 영평리(永平里) 일대로 비정된다. 다만 상기 기사에서는 양골현이 철원군(鐵圓郡) 다음에 기재되어 있고, 본서 권35 지리2 신라 한주에는 견성군(堅城郡: 포천시 군내면)의 영현(領縣)으로 나온다(김태식, 1997, 46쪽; 이정빈, 2019, 45~47쪽). 양골현(포천시 영중면)이 견성군(포천시 군내면)과 철원군(철원읍) 사이에 위치하였다는 점에서 경덕왕대에 양골현을 동음현으로 이름을 고치며 철원군에서 견성군으로 소속을 바꾸었을 가능성이 있다. 한주의 치소(治所)가 있던 하남 선동[광주 선리]에서 통일신라 시기의 ‘양골(梁骨)’명 명문기와가 출토된 바 있는데(김규동·성재현, 2011, 564~567쪽; 박성현, 2021, 38~40쪽), 경덕왕대의 지명 개정 이후에도 그 이전 지명이 널리 사용된 사실을 보여준다(전덕재, 2021, 117~124쪽).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 ‘동음현’ 항목 참조.
〈참고문헌〉
전덕재, 2021, 『三國史記 잡지·열전의 원전과 편찬』, 주류성
김태식, 1997, 「『삼국사기』 지리지 고구려조의 사료적 검토」, 『역사학보』 154
김규동·성재현, 2011, 「선리 명문와 고찰」, 『고고학지』 17
이정빈, 2019, 「임진강·한탄강 유역의 고구려 지명과 그 의미 - 경기도 연천 지역을 중심으로」, 『사학연구』 134
박성현, 2021, 「신라 통일기 한주(漢州)의 물자 이동과 조운(漕運)-하남 선동 출토 명문 기와를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121
〈참고문헌〉
전덕재, 2021, 『三國史記 잡지·열전의 원전과 편찬』, 주류성
김태식, 1997, 「『삼국사기』 지리지 고구려조의 사료적 검토」, 『역사학보』 154
김규동·성재현, 2011, 「선리 명문와 고찰」, 『고고학지』 17
이정빈, 2019, 「임진강·한탄강 유역의 고구려 지명과 그 의미 - 경기도 연천 지역을 중심으로」, 『사학연구』 134
박성현, 2021, 「신라 통일기 한주(漢州)의 물자 이동과 조운(漕運)-하남 선동 출토 명문 기와를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121
註) 125
승량현(僧梁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동량현(㠉梁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지명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경기도 연천군 인목면 갈현리(북한의 강원도 철원군 갈현리) 일대로 비정된다. 다만 이 기사와 본서 지리4 고구려조 이외에는 ‘승량현’이라는 지명이 확인되지 않는다. ‘비물(非勿)’이라고도 일컬었다고 하는데, ‘비(非)’가 ‘승려(僧)’의 뜻으로 쓰였을 가능성을 상정하며 중세국어 ‘비구(比丘)’와 연관시키기도 한다(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507쪽).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 ‘동량현’ 항목 참조.
註) 126
註) 127
공목달(功木達)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공성현(功城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 하는데, 지금의 경기도 연천군 연천읍 일대로 비정된다. 다만 이 기사와 본서 지리2 신라 한주조 이외에는 ‘공목달현’이라는 지명이 확인되지 않는다. ‘웅섬산(熊閃山)’으로도 일컬었다고 한다.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 ‘공성현’ 및 ‘공목달현’ 항목 참조.
註) 128
註) 129
부여군(夫如郡)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부평군(富平郡)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金化邑)으로 비정된다. 본서 신라본기11의 진성왕 9년 8월조와 열전10 궁예전 등에는 부여군의 다른 이름인 ‘부약군(夫若郡)’이나 ‘부약성(夫若城)’ 등이 나오는데, 진성왕 9년(895년) 8월에 궁예(弓裔)가 부약 등 한주(漢州)의 10여 군현을 함락하였다고 한다. 한편 한주의 치소(治所)가 있던 하남 선동[광주 선리]에서 ‘부여(夫如)’명 통일신라 명문기와가 출토되었다(김규동·성재현, 2011, 564~567쪽; 박성현, 2021, 38~40쪽).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 ‘부평군’ 항목 참조.
〈참고문헌〉
김규동·성재현, 2011, 「선리 명문와 고찰」, 『고고학지』 17
박성현, 2021, 「신라 통일기 한주(漢州)의 물자 이동과 조운(漕運)-하남 선동 출토 명문 기와를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121
〈참고문헌〉
김규동·성재현, 2011, 「선리 명문와 고찰」, 『고고학지』 17
박성현, 2021, 「신라 통일기 한주(漢州)의 물자 이동과 조운(漕運)-하남 선동 출토 명문 기와를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121
註) 130
어사내현(於斯內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광평현(廣平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강원도 평강군 평강읍(북한의 강원도 평강군 평강리)로 비정된다. 부양(斧壤)으로도 일컬었다고 하는데, 본서 권35 지리2 고구려조에는 경덕왕대 개칭 이전의 본명이 부양(斧壤)으로 나와 차이가 있다. 어사내의 ‘내(內)’는 부양의 ‘양(壤)’에 상응하는 고유어로 땅[地]을 뜻한다(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499쪽).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 ‘광평현’ 항목 참조.
註) 131
부양(斧壤) : 신라 한주 부평군 소속 광평현(廣平縣)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는 어사내현(於斯內縣)의 다른 이름이다. 어사내의 ‘내(內)’는 부양의 ‘양(壤)’에 상응하는 고유어로 땅[地]을 뜻한다(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499쪽).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의 ‘부양현’ 항목 참조.
註) 132
오사함달(烏斯含達)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토산군(兎山郡)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지금의 황해도 금천군(金川郡) 토산면 토산리(兎山里; 북한의 황해북도 토산군 월성리) 일대로 비정된다. 오사함달의 ‘오사(烏斯)’를 ‘조사(鳥斯)’의 오기(誤記)로 상정한 다음, ‘조사(鳥斯)’와 그에 상응하는 ‘토(兎)’는 모두 ‘됴ᄉᆞ>둇>돝’를 음차 표기한 것으로 ‘저(猪: 돼지)’의 옛 새김인 ‘돋’을 뜻한다고 보기도 한다. 오사함달의 달(達)은 ‘산(山)’을 뜻한다(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498~499쪽 및 510~511쪽).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 ‘토산군(兎山郡)’ 및 ‘오사함달’ 항목 참조.
註) 133
아진압현(阿珍押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안협현(安峽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으로 나온다. 궁악(窮嶽)으로도 일컬었다고 하는데, 아진압의 ‘압(押)’은 상고음이 ‘kap’, 중고음은 ‘ap’으로 ‘악(嶽)’을 뜻한다(도수희, 2005, 501쪽). 본서 신라본기6 문무왕 7년 10월조에 아진함성(阿珍含城), 신라본기7 문무왕 15년 9월조에 아달성(阿達城)이 나오는데, 모두 아진압현과 동일한 지명으로 파악된다(정구복 외, 1997c, 212쪽 및 237쪽).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의 ‘안협현(安峽縣)’ 및 ‘아진압현’ 항목 참조.
〈참고문헌〉
정구복 외, 1997c,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참고문헌〉
정구복 외, 1997c,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註) 134
註) 135
소읍두현(所邑豆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삭읍현(朔邑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으로 나오는데, 지금의 경기도 연천군 삭녕면 삭녕리(朔寧里; 북한의 강원도 철원군 삭녕리) 일대로 비정된다. 다만 이 기사와 본서 지리4 고구려조 이외에는 ‘소읍두현’이라는 지명이 확인되지 않는다. 본서 백제본기1 온조왕 22년 8월조의 석두성(石頭城) 및 초고왕 45년 2월과 10월조의 ‘사도성(沙道城)’을 모두 음의 유사상을 근거로 소읍두현과 같은 지명으로 보거나(정구복 외, 1997c, 626쪽; 정구복 외, 1997d, 605~606쪽), 사도성의 위치는 미상으로 처리하고 석두성만 소읍두현과 같은 지명이라고 보기도 한다(이병도, 1977: 2012, 405쪽).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의 ‘삭읍현’ 및 ‘소읍두현’ 항목 참조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정구복 외, 1997c,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정구복 외, 1997d,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정구복 외, 1997c,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정구복 외, 1997d,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註) 136
이진매현(伊珍買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이천현(伊川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지금의 강원도 이천군(伊川郡) 이천면(북한의 강원도 이천군 이천리) 일대로 비정된다. 다만 이 기사와 본서 지리4 고구려조 이외에는 ‘이진매현’이라는 지명이 확인되지 않는다. 이진매현의 ‘매(買)’는 이천현의 ‘천(川)’에 상응하는 고유어로 강[川]이나 물[水]을 뜻한다(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497~498쪽).
註) 137
우잠군(牛岑郡)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우봉군(牛峯郡)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황해도 금천군(金川郡) 우봉면(북한의 황해북도 금천군 현내리) 일대로 비정된다. 우령(牛嶺)이나 수지의(首知衣)라고도 일컬었다고 한다. ‘우잠’이라는 지명은 본서 신라본기8 문무왕 13년(673) 윤5월조(문무왕 13년 윤5월조 없음)와 효소왕 3년(694) 겨울조, 신라본기10 헌덕왕 18년(826) 7월조 등에서 확인된다. 경덕왕 16년(757) 지명 개칭 이후에도 종전의 ‘우잠’이라는 명칭이 널리 사용되었던 것이다.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 ‘우봉군’ 항목 참조.
註) 139
註) 140
장항현(獐項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임강현(臨江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경기도 장단군 강산면 임강리(북한의 황해북도 장풍군 임강리) 일대로 비정된다. 고사야홀차(古斯也忽次)라고도 일컬었다고 한다.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 ‘장항현’ 항목 참조.
註) 141
고사야홀차(古斯也忽次) : 신라 한주 우봉군 소속 임강현(臨江縣)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는 장항현(獐項縣)의 다른 이름이다. 고사야홀차의 ‘홀차(忽次)’는 장항의 ‘항(項)’에 상응하는 고유어로 바다 쪽으로 돌출한 지형인 ‘곶’을 뜻한다. 또 ‘고사(古斯)’는 장항의 ‘장(獐)’에 상응하는 표현으로 중세 국어에서 노루를 ‘노로’라고 일컬었지만, 그 이전의 옛 새김이 ‘고소’일 수도 있다고 한다. 한주 소속 오관군(五關郡)의 영현인 장새(獐塞)의 다른 이름이 ‘고소어(古所於)’인 것도 이를 시사하며, 노루를 일컫는 일본어 ‘kusa’와도 비교된다고 한다(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501·505쪽).
註) 142
장천성현(長淺城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장단현(長湍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일대로 비정된다. 야야(耶耶)나 야아(夜牙)로도 일컬었다고 한다. 야야나 야아는 장천성의 ‘천(淺)’의 훈에 해당하는 고유어로 중세국어 ‘얕-’에 이어진다고 한다(도수희, 2005, 515쪽). 장천성현=장단현으로 비정되는 호로고루 일대는 임진강 하류 방면에서 배를 타지 않고 강을 건널 수 있는 최초의 여울목인데(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연천군, 1999, 48쪽, 정요근, 2005, 191~222쪽), 야야나 야아가 여울목이 형성되어 강물이 얕은 것을 묘사한 고유어 지명이라면, 장천성(長淺城)이나 장단(長湍)은 이를 한역(漢譯)한 지명이라 할 수 있다.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 ‘장단현’ 항목 참조.
〈참고문헌〉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연천군, 1999, 『漣川 瓠蘆古壘 정밀지표조사보고서』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정요근, 2005, 「7~11세기 경기도 북부지역에서의 간선교통로 변천과 '長湍渡路'」, 『韓國史硏究』 13
〈참고문헌〉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연천군, 1999, 『漣川 瓠蘆古壘 정밀지표조사보고서』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정요근, 2005, 「7~11세기 경기도 북부지역에서의 간선교통로 변천과 '長湍渡路'」, 『韓國史硏究』 13
註) 143
註) 145
마전천현(麻田淺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임단현(臨端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고 하는데,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마전리 일대로 비정된다. 니사파홀(泥沙波忽)이라고도 일컬었다고 한다. 마전천현의 ‘천(淺)’은 강물이 얕은 상태를 표현하는데, 마전천현의 치소로 비정되는 연천 당포성 일대가 양주분지에서 최단 거리로 임진강을 건너 북상할 수 있는 육상 교통로의 요지로 여울목이 발달한 상황을 묘사한 것으로 파악된다.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 ‘임단현’ 항목 참조.
註) 146
註) 147
부소갑(扶蘇岬) : 통일신라 한주(漢州) 소속 송악군(松岳郡)의 고구려 시기 명칭인데, 지금의 경기도 개성시(북한의 개성직할시 개성시) 일대로 비정된다. 부소갑의 ‘부소(扶蘇)’는 송악의 ‘송(松)’에 상응하는 고유어이며, ‘갑(岬)’은 험준한 산악을 뜻하는 ‘악(岳)’에 해당하는 고유어이다(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334~343쪽).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 ‘송악군’ 항목 참조.
註) 148
약지두치현(若只頭恥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여비현(如羆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불일리(북한의 황해북도 장풍군 선적리) 일대로 비정된다. 삭두(朔頭)나 의두(衣頭)로도 일컬었다고 한다. 또 『고려사』 지리지1 왕경 개성부 송림현(松林縣)조에는 약지두치현(若只豆恥縣)으로 나오며, 지섬(之蟾)이나 삭두(朔頭)라고도 일컬었다고 한다.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 ‘여비현’ 항목 참조.
註) 151
굴어압(屈於押)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강음현(江陰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황해도 금천군 서북면 강음리(북한의 황해북도 평천군 연홍리) 일대로 비정된다. 본서 권35 지리2 신라 한주조에는 ‘굴압현(屈押縣)’으로 나오며, ‘홍서(紅西)’로도 일컬었다고 한다. 『고려사』 지리지1 왕경 개성부 강음현(江陰縣)조에는 ‘강서(江西)’로도 일컬었다고 한다. 한주 치소가 있던 하남 선동[광주 선리]에서 통일신라 시기의 ‘굴압(屈押)’명 명문기와가 출토된 바 있는데(김규동·성재현, 2011, 564~567쪽; 박성현, 2021, 38~40쪽), 통일신라 시기에도 고구려계 지명이 널리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굴압이나 굴어압의 ‘굴(屈)’은 강음의 ‘강(江)’을 뜻하는 고유어로 중세국어 ‘ᄀᆞᄅᆞᆷ’에 해당한다(도수희, 2005, 508쪽). 다만 ‘압(押)’은 험준한 산악(山嶽: 山岳)을 뜻하는 고유어인데(도수희, 2005, 501쪽), ‘강음(江陰)’에는 그에 상응하는 한자어가 없다.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 ‘강음현’ 항목 참조.
〈참고문헌〉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김규동·성재현, 2011, 「선리 명문와 고찰」, 『고고학지』 17
박성현, 2021, 「신라 통일기 한주(漢州)의 물자 이동과 조운(漕運)-하남 선동 출토 명문 기와를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121
〈참고문헌〉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김규동·성재현, 2011, 「선리 명문와 고찰」, 『고고학지』 17
박성현, 2021, 「신라 통일기 한주(漢州)의 물자 이동과 조운(漕運)-하남 선동 출토 명문 기와를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121
註) 153
홍서(紅西) : 신라 한주 송악군 소속 강음현(江陰縣)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는 굴어압(屈於押)의 다른 이름으로 전하는데, 굴어압의 ‘굴(屈)’이 강음의 ‘강(江)’을 뜻하는 고유어로 중세국어 ‘ᄀᆞᄅᆞᆷ’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홍서의 ‘홍(紅)’은 ‘강(江)’의 오기로 파악된다(도수희, 2005, 508쪽). 실제 『고려사』 지리지1 왕경 개성부 강음현(江陰縣)조에는 ‘강서(江西)’로 일컬었다고 한다.
註) 154
동비홀(冬比忽)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개성군(開城郡)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지금의 경기도 개풍군 서면 개성리(북한의 개성직할시 개풍군 개풍읍) 일대로 비정된다. 동비홀의 ‘홀(忽)’은 개성의 ‘성(城)’에 해당하는 고구려의 고유어이다(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499~500쪽).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 ‘개성군’ 항목 참조.
註) 155
덕물현(德勿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덕수현(德水縣) 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경기도 개풍군 봉동면 흥왕리(興旺里: 북한의 황해북도 개성시 봉덕리) 일대로 비정된다. 덕물의 ‘물(勿)’은 물(水)를 뜻하는 고유어로 덕수의 ‘수’에 상응한다(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508쪽). 『고려사』 지리지1 왕경 개성부 덕수현(德水縣)조에는 ‘인물현(仁物縣)’이라고도 일컬었다고 나오는데, 본서 열전10 궁예전에는 897년(건녕 4)에 궁예가 인물현(仁物縣)의 항복을 받았다고 한다.
註) 156
진림성현(津臨城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임진현(臨津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장단리 일대로 비정된다. 오아홀(烏阿忽)로도 일컬었다고 한다.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 ‘임진현’ 항목 참조.
註) 157
註) 158
혈구군(穴口郡)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해구군(海口郡)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인천직할시 강화군 강화읍 일대로 비정된다. 본서 신라본기11 문성왕 6년(844) 8월조에는 혈구진(穴口鎭)을 두고 아찬 계홍(啓弘)을 진두(鎭頭)로 삼았다고 나오며, 열전10 궁예전에는 궁예가 897년(乾寧 4)에 공암(孔巖: 서울시 강서구), 검포(黔浦: 김포시) 등과 함께 혈구를 격파하였다고 한다. 경덕왕 시기에 지명을 고친 이후에도 ‘혈구(穴口)’라는 명칭이 널리 사용된 것이다. ‘갑비고차(甲比古次)’라고도 일컬었다.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 ‘해구군’ 항목 참조.
註) 159
註) 160
동음나현(冬音奈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호음현(沍陰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인천직할시 강화군 하점면 일대로 비정된다. 휴음(休陰)이라고도 일컬었으며, 『고려사』 지리지1 양광도 강화현 하음현(河陰縣)조에서는 ‘아음현(芽音縣)’으로도 일컬었다고 한다. 동음내현의 ‘동음(冬音)’은 대체로 둥근 모양이나 담장을 일컫는 고유어로 파악되는데(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522쪽), 호음현(沍陰縣)이라는 지명에는 그에 상응하는 한자어가 없다.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 ‘호음현’ 항목 참조.
註) 161
휴음(休陰) : 신라 한주 해구군 소속 호음현(沍陰縣)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는 동음나현(冬音奈縣)의 다른 이름이다. 『고려사』 지리지1 양광도 강화현 하음현(河陰縣)조에서는 ‘아음현(芽音縣)’으로도 일컬었다고 한다.
註) 162
고목근현(高木根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교동현(喬桐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지금의 인천직할시 강화군 교동면 일대로 비정된다. 달음참(達乙斬)으로도 일컬었으며, 『고려사』 지리지1 양광도 강화현 교동현(喬桐縣)조에는 고림(高林)으로도 일컬었다고 한다.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 ‘교동현’ 항목 참조.
註) 163
달을참(達乙斬) : 신라 한주 해구군 소속 교동현(喬桐縣)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는 고목근현(高木根縣)의 다른 이름이다. 『고려사』 지리지1 양광도 강화현 교동현(喬桐縣)조에는 고림(高林)으로도 일컬었다고 한다. 달을참의 ‘달(達)’은 높다(高)나 뫼(山)을 뜻하는 고유어로 고목근의 ‘고(高)’에 상응한다(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498~499쪽). 달을참의 ‘참(斬)’은 고목근의 ‘근(根)’에 상응한 고유어일 가능성이 있는데, 거사참(去斯斬)을 양근현(楊根縣: 경기도 양평군 양평읍)으로 이름을 고친 사례가 있다.
註) 164
수지현(首知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수진현(守鎭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인천직할시 강화군 양도면 일대로 비정된다. 신지(新知)라고도 일컬었다고 한다.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 ‘수진현’ 항목 참조.
註) 166
대곡군(大谷郡)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영풍군(永豐郡)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지금의 황해도 평산군 평산면(북한의 황해북도 평산군 산성리) 일대로 비정된다. 다지홀(多知忽)로도 일컬었다고 한다. 본서 신라본기6에 따르면 고구려 멸망 직전인 668년(문무왕 8년) 6월 22일에 고구려의 대곡(大谷)과 한성(漢城) 등 2군(郡) 12성(城)이 신라에 귀복(歸服)하였다고 하는데, 대곡성이 고구려 시기에 이미 예성강 유역의 중심지였음을 보여준다. 본서 직관지(職官志)하에 따르면 신라 패강진전(浿江鎭典)의 두상대감(頭上大監)은 1명인데, 선덕왕 3년(782)에 처음으로 대곡성두상(大谷城頭上)을 두었다고 한다. 실제 본서 신라본기10에는 선덕왕이 782년에 한산주를 순행하여 백성을 패강진(浿江鎭)으로 옮긴 다음, 이듬해에 아찬(阿湌) 김체신(金體信)을 대곡진(大谷鎭) 군주(軍主)로 임명하였다고 나온다. 경덕왕대 지명 개칭 이후에도 ‘대곡(大谷)’이라는 명칭이 널리 사용된 것이다.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 ‘영풍군’ 항목 참조.
註) 167
註) 168
수곡성현(水谷城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단계현(檀溪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황해도 신계군 다율면 침교리(북한의 황해북도 신계군 침교리) 일대로 비정된다. ‘매단홀(買旦忽)’로도 일컬었다고 나온다. 수곡성은 일찍이 고구려와 백제가 각축전을 벌인 장소로 자주 나온다. 본서 고구려본기6과 백제본기2·3에는 369년(고국원왕 39, 근초고왕 24), 375년(소수림왕 5, 근초고왕 30), 394년(광개토왕 3, 아신왕 3)에 양국이 수곡성에서 각축전을 벌였다고 나오는데, 멸악산맥을 넘어 재령강과 예성강을 잇는 서흥-신계로가 지나는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백제본기4 무령왕2년(501년)조에도 백제가 고구려의 수곡성을 습격하였다고 나오지만, 백제의 웅진시기 한강영유 기사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사실로 보기도 하고, 실제 사실로 보기는 어렵다고 이해하기도 한다(본서 권19 고구려본기7 문자명왕 4년 8월조 참조).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 ‘단계현’ 항목 참조.
註) 169
註) 170
註) 171
십곡현(十谷縣) : 신라 경덕왕이 진단현(鎭湍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황해도 곡산군 곡산면(북한의 황해북도 곡산군 곡산리) 일대로 비정된다. 본서 지리2 신라 한주조에서는 십곡성현(十谷城縣)으로 나온다. 덕돈홀(德頓忽)로도 일컬었다고 하는데, 신라본기9 경덕왕 21년(762) 5월조의 ‘덕곡(德谷)’도 십곡현의 별칭이다. 『고려사』 지리지3 서해도 곡주(谷州)조에는 ‘곡성현(谷城縣)’이나 ‘고곡군(古谷郡)’으로도 일컬었다고 나온다.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 ‘진단현’ 항목 참조.
註) 172
註) 173
동음홀(冬音忽)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해고군(海皐郡)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지금의 황해도 연백군 연안읍(북한의 황해남도 연안군 연안리) 일대로 비정된다. 본서 권35 지리2 신라 한주조에는 ‘동삼홀군(冬彡忽郡)’으로 나오며, ‘시염성(豉鹽城)’으로도 일컬었다고 한다. 동삼홀의 ‘홀(忽)’은 ‘성(城)’에 해당하는 고구려의 고유어이다(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499~500쪽).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 ‘해고군’ 항목 참조.
註) 175
도랍현(刀臘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구택현(雊澤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황해도 연백군 은천면(북한의 황해남도 배천군 배천읍) 일대로 비정된다. 치악성(雉嶽城)으로도 일컬었다고 한다. 고구려와 백제가 369년(고국원왕 39, 근초고왕 24)에 처음 각축전을 벌인 백제 치양(雉壤)도 치악성=구택현으로 비정된다(이병도, 1977: 2012, 320쪽). 도랍현의 ‘도랍(刀臘)’은 치악의 ‘치(雉)’에 상응하는 고유어로 암컷 꿩을 뜻하는 ‘가토리’의 ‘토리’에 해당하며, 일본어의 ‘tori’와도 관련이 있다고 한다(도수희, 2005, 509쪽).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註) 176
치악성(雉嶽城) : 신라 한주 해고군(海皐郡) 소속 구택현(雊澤縣)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는 도랍현(刀臘縣)의 다른 이름이다. 고구려와 백제가 369년(고국원왕 39, 근초고왕 24)에 처음 각축전을 벌인 백제 치양(雉壤)도 치악성=구택현으로 비정된다(이병도, 1977: 2012, 320쪽). 도랍현의 ‘도랍(刀臘)’은 치악의 ‘치(雉)’에 상응하는 고유어로 암컷 꿩을 뜻하는 ‘가토리’의 ‘토리’에 해당하며, 일본어의 ‘tori’와도 관련이 있다고 한다(도수희, 2005, 509쪽).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註) 177
오곡군(五谷郡) : 신라 경덕왕이 오관군(五關郡)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황해도 서흥군 서흥면 고성리(북한의 황해북도 서흥군 고성리) 일대로 비정된다‘ 우차탄홀(于次呑忽)로도 일컬었다고 한다. 본서 권35 지리2 신라 한주조에는 오곡군의 오관군이 장새현(獐塞縣)을 영현으로 거느린 것으로 나오지만, 본문에서 보듯이 고구려조에는 양자가 관계 없는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에 이에 장새가 처음에는 독립된 군(郡)으로 설치되었다가, 경덕왕 사망 이후에 오관군(오곡군)의 영현이 되었다고 보기도 한다(전덕재, 2021, 『三國史記 잡지·열전의 원전과 편찬』, 주류성, 189~193쪽).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 ‘오관군’ 항목 참조.
註) 178
註) 179
註) 180
註) 181
내미홀(內米忽) : 신라 경덕왕이 폭지군(瀑池郡)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지금의 황해도 해주시(북한의 황해남도 해주시) 일대로 비정된다. ‘지성(池城)’이나 ‘장지(長池)’로도 일컬었다고 한다. 내미홀군의 ‘내미(內米)’는 폭지나 지성의 ‘지(池)’나 해주의 ‘해(海)’에 상응하는 고유어로 일본어의 ‘nami(波濤)’와 비교되며, ‘홀(忽)’은 지성의 ‘성(城)’에 해당하는 고구려의 고유어이다(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499~500쪽 및 509쪽).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 ‘폭지군’ 항목 참조.
註) 182
註) 183
註) 184
한성군(漢城郡) : 신라 경덕왕이 중반군(重盤郡)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고 하는데, 재령강 상류인 북한의 황해남도 신원군 아양리 일대로 비정된다.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에는 식성군(息城郡)으로 나온다. 한홀(漢忽), 식성(息城), 내홀(乃忽)로도 일컬었다고 한다. 한성(漢城)은 고구려 후기 3경(京)의 하나였는데, 〈평양성각자성석〉에도 ‘한성’이라는 명칭이 확인된다. 신원군 아양리에서는 재령강 연안의 평지를 따라 고구려 한성 별도의 유적으로 보이는 대규모 도시유적이 확인되었다. 본서 신라본기6에 따르면 고구려 멸망 직전인 668년(문무왕 8년) 6월 22일에 고구려의 대곡(大谷)과 한성(漢城) 등 2군(郡) 12성(城)이 신라에 귀복(歸服)하였다고 하는데, 한성이 고구려 시기에 재령강 유역의 중심지였음을 보여준다.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 ‘영풍군’ 항목 참조.
註) 185
註) 186
식성(息城) : 신라 한주 소속 중반군(重盤郡)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는 한성군(漢城郡)의 다른 이름이다.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에는 중반군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 ‘식성군(息城郡)’으로 나온다.
註) 187
註) 188
휴류성(鵂鶹城) : 신라 경덕왕이 서암군(栖嵒郡)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황해도 봉산군 토성면 무정리(북한의 황해북도 봉산군 마산리 일대)로 비정된다. 본서 권35 지리2 신라 한주조에는 휴암군(鵂嵒郡)으로 나와 조금 차이가 있다. 조파의(租坡衣)나 휴류군(鵂鶹郡)으로도 일컬었다고 한다.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 ‘서암군’ 항목 참조.
註) 189
註) 191
장새현(獐塞縣) : 신라 한주 소속 오관군(五關郡)의 영현인 장새현의 고구려 시기 지명으로 지금의 황해도 수안군 수안면(북한의 황해북도 수안군 수안리) 일대로 비정된다. 신라 경덕왕이 고구려 시기의 이름을 고치지 않고 그대로 장새현으로 하였다고 하는데, 고소어(古所於)로도 일컬었다고 한다. 장새는 재령강 유역을 경유하지 않고 곧바로 대동강과 임진강 유역을 잇는 교통로인 수안-신계로가 지나가는 요충지이다. 이에 일찍부터 서북한과 중부지역을 내왕할 때 많이 이용하였는데, 본서 신라본기6에 따르면 662년(문무왕 2) 정월에 김유신이 평양 부근의 당군(唐軍)에게 군량미를 전달할 때 장새(獐塞)를 경유하였고, 667년 11월에는 문무왕이 당군을 만나기 위해 장새까지 진격하였다가 되돌아왔다고 한다. 한편 장새현이 상기 기사에는 휴류성(휴류군, 서암군) 다음에 기재되어 있고, 『고려사』 지리지3 수안현(遂安縣)조에도 장새현이 신라 때 서암군(栖巖郡)의 영현(領縣)이었다고 나오는데, 본서 권35 신라 한주조에는 오관군(五關郡)의 영현으로 나온다. 이에 장새가 762년에는 재령강 유역에 축조한 다른 6성처럼 군(郡)으로 설치되었다가, 경덕왕이 사망하는 765년(경덕왕 24) 6월 이전에 휴류군(서암군)의 영현이 바뀌었다가, 그 뒤 다시 오관군의 영현으로 바뀌었다고 보기도 한다(김태식, 1997, 46~47쪽; 전덕재, 2021, 189~193쪽).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 ‘장새현’ 항목 참조.
〈참고문헌〉
전덕재, 2021, 『三國史記 잡지·열전의 원전과 편찬』, 주류성
김태식, 1997, 「『삼국사기』 지리지 고구려조의 사료적 검토」, 『역사학보』 154
〈참고문헌〉
전덕재, 2021, 『三國史記 잡지·열전의 원전과 편찬』, 주류성
김태식, 1997, 「『삼국사기』 지리지 고구려조의 사료적 검토」, 『역사학보』 154
註) 192
註) 193
동홀(冬忽) : 신라 헌덕왕이 취성군(取城郡)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지금의 황해도 황주군 황주읍(북한의 황해북도 황주군 황주읍) 일대로 비정된다. 우동어홀(于冬於忽)로도 일컬었다고 한다. 동홀의 ‘홀(忽)’은 취성의 ‘성(城)’에 해당하는 고구려의 고유어이다(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499~500쪽).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 ‘취성군’ 항목 참조.
註) 194
註) 195
금달(今達) : 신라 헌덕왕이 토산현(土山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지금의 평안남도 중화군 상원면(북한의 평양특별시 상원군 상원읍) 일대로 비정된다. 신달(薪達)이나 식달(息達)로도 일컬었다고 하며,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에는 식달(息達)로 나온다. 금달의 ‘달(達)’은 ‘달(達)’은 토산의 ‘산(山)’에 상응하는 고유어로 높은 뫼[山]나 높다(高)를 뜻한다(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498~499쪽).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 ‘토산현(土山縣)’ 항목 참조.
註) 196
註) 197
식달(息達) : 신라 한주 취성군(取城郡) 소속 토산현(土山縣)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는 금달(今達)의 별칭이라고 하는데,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에는 ‘식달’이 고구려 시기의 본명으로 나온다. 식달의 ‘달(達)’은 ‘달(達)’은 토산의 ‘산(山)’에 상응하는 고유어로 높은 뫼[山]나 높다(高)를 뜻한다(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498~499쪽).
註) 198
구을현(仇乙峴) : 고구려 시기의 지명으로 지금의 황해도 송화군(松禾郡) 풍천면(豊川面; 북한의 황해남도 과일군 과일읍) 일대로 비정된다(이병도, 1977: 2012, 610쪽; 정구복 외, 1997d, 364쪽). 굴천(屈遷)으로도 일컬었고, 『고려사』 지리지3 서해도 풍주(豐州)조에는 고구려 구을현(仇乙縣)으로 나온다. 구을현~곡도(鵠島) 등 재령강 서쪽 지역의 고구려 시기 12개 지명은 본서 지리지4 고구려조에만 나오고, 지리지2 신라 한주조에는 나오지 않는다. 이에 이 지역은 본래 신라가 군현제를 시행하지 못한 지역으로 후삼국이나 고려 시기의 지명이라는 견해(정상수웅, 1974, 87쪽; 김태식, 1997, 47~51쪽), 신라가 군현으로 편제하지 못하고 대곡성(大谷城=永豐郡, 황해도 평산)에 설치한 패강진(浿江鎭)이 일종의 군관구로 군사적으로 통괄하다가 궁예의 태봉에서 처음으로 행정구역으로 편제하였다는 견해(전덕재, 2013, 25~28쪽), 신라 9주에 소속되지 않은 지역으로 대곡진(大谷鎭) 두상(頭上)이 설치된 선덕왕 3년(782)년부터 패강진전(浿江鎭典)에서 독립적으로 관할하였다는 견해(박남수, 2013, 57~62쪽) 등이 있다. 이에 대해 헌덕왕 이후 군현으로 설치되어 패강진의 통할을 받았고 9세기 말에는 패강도(浿江道)라는 별도의 행정구역으로 편제되었다고 보기도 한다(강봉룡, 1997, 217~241쪽). 이들 12개 지명이 지리지2 신라 한주조에 기입되지 못한 이유로는 본서의 신라지 찬자가 신라의 군현으로 확신하지 못하였기 때문으로 보거나(강봉룡, 1997, 224쪽) 본서 지리지 신라조의 저본에는 없었기 때문에 신라 한주조에는 등재되지 못하고 지리지 고구려조 찬자가 태봉의 지방행정구역을 참조해 고구려조에 첨가하였다고 파악하기도 한다(전덕재, 2021, 188~189쪽). 『고려사』 지리지3 서해도 풍주(豐州)조에 따르면 고려 초에 ‘풍주’로 이름을 고쳤고, 성종 14년(995)에 도호부(都護府)로 승격시켰고, 현종 9년(1018)에 방어사(防禦使)를 두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3 황해도 풍천도호부(豐川都護府)조에 따르면 조선 태조 6년(1397)에 비로소 진(鎭)을 설치하고, 병마사로 지주사(知州事)를 겸하게 하였으며, 태종 13년(1413)에 ‘풍천’으로 이름으로 고쳐 군(郡)으로 하고, 은율현과 합쳐 풍률군(豐栗郡)이라 하였다가 다시 분리하였고, 세종 5년에 첨절제사로 고쳤고. 예종 원년에 도호부로 승격시켰다고 한다.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정구복 외, 1997d,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조이옥, 2001, 『통일신라의 북방진출 연구』 서경문화사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전덕재, 2021, 『三國史記 잡지·열전의 원전과 편찬』, 주류성
강봉룡, 1997, 「신라 하대 패강진의 설치와 운영」, 『한국고대사연구』 11
김태식, 1997, 「『삼국사기』 지리지 고구려조의 사료적 검토」, 『역사학보』 154
박남수, 2013, 「신라 浿江鎭典의 정비와 漢州 西北境의 郡縣 설치」, 『동국사학』 54
전덕재, 2013, 「신라 하대 浿江鎭의 설치와 그 성격」, 『대구사학』 113
井上秀雄, 1974, 「三國史記地理志の史料批判」, 『新羅史基礎硏究』,東出版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정구복 외, 1997d,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조이옥, 2001, 『통일신라의 북방진출 연구』 서경문화사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전덕재, 2021, 『三國史記 잡지·열전의 원전과 편찬』, 주류성
강봉룡, 1997, 「신라 하대 패강진의 설치와 운영」, 『한국고대사연구』 11
김태식, 1997, 「『삼국사기』 지리지 고구려조의 사료적 검토」, 『역사학보』 154
박남수, 2013, 「신라 浿江鎭典의 정비와 漢州 西北境의 郡縣 설치」, 『동국사학』 54
전덕재, 2013, 「신라 하대 浿江鎭의 설치와 그 성격」, 『대구사학』 113
井上秀雄, 1974, 「三國史記地理志の史料批判」, 『新羅史基礎硏究』,東出版
註) 200
註) 201
궐구(闕口) : 고구려 시기의 지명으로 지금의 황해도 신천군 문화면(북한의 황해남도 신천군 건산리·용산리; 이병도, 1977: 2012, 610쪽; 정구복 외, 1997d, 365쪽)으로 비정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황해남도 삼천군 고현리 일대로 비정된다. 구을현~곡도(鵠島) 등 재령강 서쪽 지역의 고구려 시기 12개 지명은 본서 지리지4 고구려조에만 나오고, 지리지2 신라 한주조에는 나오지 않는데, 상세한 설명은 위의 ‘구을현’ 항목 참조. 『고려사』 지리지3 서해도 유주(儒州)조에 따르면 고려 초에 ‘유주’로 이름을 고쳤고, 현종 9년(1018)에 풍주에 내속(來屬)시켰고, 예종 원년(1106)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고종 46년(1259)에 문화현(文化縣)으로 승격시켰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2 황해도 문화현(文化縣)조에 따르면 조선에서도 종전처럼 문화현으로 하였다고 하는데, 중종이 치소를 북쪽 13리로 옮겼고, 고종이 군으로 고쳤다.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정구복 외, 1997d,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정구복 외, 1997d,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註) 203
율구(栗口) : 고구려 시기의 지명으로 지금의 황해도 은율군 은율읍(북한의 황해남도 은율군 은율읍) 일대로 비정된다(이병도, 1977: 2012, 610쪽; 정구복 외, 1997d, 365쪽). 율천(栗川)으로도 일컬었다고 한다. 구을현~곡도(鵠島) 등 재령강 서쪽 지역의 고구려 시기 12개 지명은 본서 지리지4 고구려조에만 나오고, 지리지2 신라 한주조에는 나오지 않는데, 상세한 설명은 위의 ‘구을현’ 항목 참조. 『고려사』 지리지3 서해도 은율현(殷栗縣)조에 따르면 고려 초에 ‘은율’로 이름을 고쳤고, 현종 9년(1018)에 풍주에 내속(來屬)시켰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3 황해도 은율현(殷栗縣)조에 따르면 조선 태조 5년(1396)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태종 14년에 풍주에 합하였다가 다시 분리하여 현감을 두었다고 한다. 현종이 장련(長連)에 편입시켰다고 복구하였고, 숙종이 문화(文化)에 편입하였다가 복구하였으며, 고종이 군으로 고쳤다.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정구복 외, 1997d,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정구복 외, 1997d,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註) 206
장연(長淵) : 고구려 시기의 지명으로 지금의 황해도 장연군 장연읍(북한의 황해남도 장연군 장연읍) 일대로 비정된다(이병도, 1977: 2012, 610쪽; 정구복 외, 1997d, 365쪽). 구을현~곡도(鵠島) 등 재령강 서쪽 지역의 고구려 시기 12개 지명은 본서 지리지4 고구려조에만 나오고, 지리지2 신라 한주조에는 나오지 않는데, 상세한 설명은 위의 ‘구을현’ 항목 참조. 『고려사』 지리지3 서해도 장연현(長淵縣)조에 따르면 고구려 이래 같은 이름을 사용하였고, 현종 9년(1018)에 옹진현에〉 내속(來屬)시켰고, 예종 원년(1106)에 감무(監務)를 두었는데, 관내의 장산곶(長山串에서 봄 가을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3 황해도 장연현조에 따르면 조선 태조 원년(1392)에 만호를 두어 감무를 겸하게 하였고, 태종 2년(1402)에 비로소 진(鎭)을 설치하고 병마사로 판현사(判縣事)를 겸하게 하였다. 그 뒤 영강현을 병합하여 연강(淵康)이라 하였다가 복구하였고, 세종 5년에 병마사로 고치고, 첨절제사를 삼았다가, 현감으로 하였다고 한다.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정구복 외, 1997d,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정구복 외, 1997d,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註) 207
마경이(麻耕伊) : 고구려 시기의 지명으로 지금의 황해도 송화군 송화면(북한의 황해남도 송화군 송화읍) 일대로 비정된다(이병도, 1977: 2012, 610쪽; 정구복 외, 1997d, 365~366쪽). 구을현~곡도(鵠島) 등 재령강 서쪽 지역의 고구려 시기 12개 지명은 본서 지리지4 고구려조에만 나오고, 지리지2 신라 한주조에는 나오지 않는데, 상세한 설명은 위의 ‘구을현’ 항목 참조. 『고려사』 지리지3 서해도 청송현(靑松縣)조에 따르면 고려 초에 ‘청송’으로 이름을 고쳤고, 현종 9년(1018)에 풍주에 내속(來屬)시켰고, 예종 원년(1106)에 감무(監務)를 두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3 황해도 송화현(松禾縣)조에 따르면 조선 태종 8년(1408)에 고구려 마경이(麻耕伊)였던 청송현(靑松縣)과 고구려 판마곶(板麻串)이었던 가화현(嘉禾縣)을 합쳐 ‘송화’로 이름을 고치고 현감을 두었다고 한다. 고종이 군으로 고쳤다.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정구복 외, 1997d,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정구복 외, 1997d,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註) 208
註) 209
양악(楊岳) : 고구려 시기의 지명으로 지금의 황해도 안악군 용산면(북한의 황해남도 안악군 로암리) 일대로 비정된다(이병도, 1977: 2012, 610쪽; 정구복 외, 1997d, 366쪽). 구을현~곡도(鵠島) 등 재령강 서쪽 지역의 고구려 시기 12개 지명은 본서 지리지4 고구려조에만 나오고, 지리지2 신라 한주조에는 나오지 않는데, 상세한 설명은 위의 ‘구을현’ 항목 참조. 『고려사』 지리지3 서해도 안악군(安岳郡)조에 따르면 고려 초에 ‘안악’으로 이름을 고쳤고, 현종 9년(1018)에 풍주에 내속(來屬)시켰고, 예종 원년(1106)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충목왕 4년(1348)에 지군사(知郡事)로 승격시켰으며, 관내에 아사진성초곶(阿斯津省草串)과 아사진도곶(阿斯津桃串)이 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2 황해도 안악군에 따르면 조선에서도 종전처럼 안악군으로 삼았다고 하며, 중종이 군치를 북쪽 13리로 옮겼고, 선조가 현으로 낮추었다고 다시 복구하였다. 조선 초기 이전의 안악군치는 현재의 안악면 남쪽 13리로 안악군 용순면 일대이다.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정구복 외, 1997d,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정구복 외, 1997d,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註) 211
판마곶(板麻串) : 고구려 시기의 지명으로 지금의 황해도 송화군 장양면(북한의 황해남도 삼천군 괴정리) 일대로 비정된다(이병도, 1977: 2012, 610쪽; 정구복 외, 1997d, 366쪽). 구을현~곡도(鵠島) 등 재령강 서쪽 지역의 고구려 시기 12개 지명은 본서 지리지4 고구려조에만 나오고, 지리지2 신라 한주조에는 나오지 않는데, 상세한 설명은 위의 ‘구을현’ 항목 참조. 『고려사』 지리지3 서해도 가화현(嘉禾縣)조에 따르면 고려 초에 ‘가화’로 이름을 고쳤고, 현종 9년(1018)에 풍주에 내속(來屬)시켰고, 예종 원년(1106)에 감무(監務)를 두었는데 영강감무(永康監務)로 하여금 겸임하게 하였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3 황해도 송화현(松禾縣)조에 따르면 조선 태종 8년(1408)에 고구려 마경이(麻耕伊)였던 청송현(靑松縣)과 고구려 판마곶(板麻串)이었던 가화현(嘉禾縣)을 합쳐 ‘송화’로 이름을 고치고 현감을 두었는데, 가화고현(嘉禾古縣)은 송화현의 동쪽 60리에 있었다고 한다.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정구복 외, 1997d,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정구복 외, 1997d,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註) 212
註) 213
웅한이(熊閑伊) : 고구려 시기의 지명으로 지금의 황해도 송화군 연정면(북한의 황해남도 송화군 온천리) 일대로 비정된다(이병도, 1977: 2012, 610쪽; 정구복 외, 1997d, 366쪽). 구을현~곡도(鵠島) 등 재령강 서쪽 지역의 고구려 시기 12개 지명은 본서 지리지4 고구려조에만 나오고, 지리지2 신라 한주조에는 나오지 않는데, 상세한 설명은 위의 ‘구을현’ 항목 참조. 『고려사』 지리지3 서해도 영녕현(永寧縣)조에 따르면 고려 초에 ‘영령’으로 이름을 고쳤고, 현종 9년(1018)에 풍주에 내속(來屬)시켰다가 뒤에 신천(信川)에 편입시켰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3 황해도 송화현(松禾縣) 고적조에 따르면 영녕폐현(永寧廢縣)은 조선 태조 5년(1396)에 가화현(嘉禾縣)에 이속하였다가 태종 8년(1408)에 폐지하여 직촌(直村)으로 삼았는데, 고을 남쪽 30리에 있다.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정구복 외, 1997d,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정구복 외, 1997d,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註) 214
수녕현(水寧縣) : 고구려 시기 지명인 웅한이(熊閑伊 : 현 황해도 송화군 연정면; 북한의 황해남도 송화군 온천리)의 고려 인종 때 이름인데, 『고려사』 지리지3 서해도 영녕현(永寧縣)조나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3 황해도 송화현(松禾縣) 고적조 등에는 모두 ‘영령(永寧)’으로 나온다. 위의 웅한이에 대한 주석 참조.
註) 215
옹천(甕迁) : 고구려 시기의 지명으로 지금의 황해도 옹진군 옹진읍(북한의 황해남도 옹진군 본영리) 일대로 비정된다(이병도, 1977: 2012, 610쪽; 정구복 외, 1997d, 367쪽). 구을현~곡도(鵠島) 등 재령강 서쪽 지역의 고구려 시기 12개 지명은 본서 지리지4 고구려조에만 나오고, 지리지2 신라 한주조에는 나오지 않는데, 상세한 설명은 위의 ‘구을현’ 항목 참조. 『고려사』 지리지3 서해도 옹진현(瓮津縣)조에 따르면 고려 초에 ‘옹진’으로 이름을 고쳤고, 현종 9년(1018)에 현령(縣令)을 두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3 황해도 옹진현조에 따르면 조선 태조 6년(1397)에 진을 설치해 병마사로 판현사(判縣事)를 겸하게 하였고, 세종 5년에 첨절제사로 고쳤다가 다시 현령으로 하였다고 한다. 숙종이 소강진(所江鎭)과 합쳐 부(府)로 삼아 수영(水營)을 설치하였고, 고종이 강령(康翎)에 편입시켰다가 다시 군(郡)으로 삼았다.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정구복 외, 1997d,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정구복 외, 1997d,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註) 216
註) 217
부진이(付珍伊) : 고구려 시기의 지명으로 지금의 황해도 벽성군 운산면 관동리(북한의 황해남도 태탄군 운산리) 일대로 비정된다(이병도, 1977: 2012, 610쪽; 정구복 외, 1997d, 367쪽). 구을현~곡도(鵠島) 등 재령강 서쪽 지역의 고구려 시기 12개 지명은 본서 지리지4 고구려조에만 나오고, 지리지2 신라 한주조에는 나오지 않는데, 상세한 설명은 위의 ‘구을현’ 항목 참조. 『고려사』 지리지3 서해도 영강현(永康縣)조에 따르면 고려 초에 ‘영강’으로 이름을 고쳤고, 현종 9년(1018)에 옹진현에 내속(來屬)시켰고, 예종 원년(1106)에 감무(監務)를 두어 가화(嘉禾)를 겸임하게 하였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3 황해도 강령현(康翎縣)조에 따르면 고구려의 부진이(付珍伊)였던 영강현(永康縣)은 조선 태종 14년에 장연현과 합하였다가 다시 복구하였고, 세종 10년에 영강과 백령을 합하여 강령현으로 하고, 해주ㆍ우현(牛峴) 이남의 땅을 편입시켜 치소를 사천(蛇川)으로 옮기고, 진을 설치하여 첨절제사 겸 판현사로 하였다가 다시 현감으로 고쳤다고 한다. 옛날 영강현의 치소는 장연현의 금동역(金洞驛)에 있었다고 한다. 인조가 다시 해주에 편입시켰다가 복구하였고, 효종이 옹진에 편입시켰다고 복구하였고, 현종이 고요연촌(高腰淵村: 웅진군 부민면 강령리, 북한의 강령군 강령읍)으로 옮겼다.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정구복 외, 1997d,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정구복 외, 1997d,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註) 218
註) 219
곡도(鵠島) : 고구려 시기의 지명으로 지금의 인천광역시 옹진군 백령면으로 비정된다(이병도, 1977: 2012, 610쪽; 정구복 외, 1997d, 367~368쪽). 구을현~곡도(鵠島) 등 재령강 서쪽 지역의 고구려 시기 12개 지명은 본서 지리지4 고구려조에만 나오고, 지리지2 신라 한주조에는 나오지 않는데, 상세한 설명은 위의 ‘구을현’ 항목 참조. 『고려사』 지리지3 서해도 백령진(白翎鎭)조에 따르면 고려에서 ‘백령’으로 이름을 고쳐 진(鎭)으로 하고, 현종 9년(1018)에 진장(鎭將)을 두었는데, 공민왕 6년(1357)에 수로가 험난하다 하여 문화현(文化縣) 동촌(東村)에 머무르게 하였다가 진장(鎭將)을 폐지하고 문화현에 속하게 하였고, 공양왕 2년(1389)에는 문화현의 직촌(直村)으로 삼았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3 황해도 강령현(康翎縣) 조선 세종 10년에 고구려의 부진이(付珍伊)였던 영강현(永康縣)과 백령을 합쳐 강령현으로 삼았다고 한다.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정구복 외, 1997d,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정구복 외, 1997d,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註) 221
승산(升山) : 고구려 시기의 지명으로 지금의 황해도 신천군 신천읍(북한의 황해남도 신천군 신천읍) 일대로 비정된다(이병도, 1977: 2012, 610쪽; 정구복 외, 1997d, 368쪽). 구을현~곡도(鵠島) 등 재령강 서쪽 지역의 고구려 시기 12개 지명은 본서 지리지4 고구려조에만 나오고, 지리지2 신라 한주조에는 나오지 않는데, 상세한 설명은 위의 ‘구을현’ 항목 참조. 『고려사』 지리지3 서해도 신주(信州)조에 따르면 고려에서 ‘신주’로 이름을 고쳤고, 성종 14년(995)에 방어사(防禦使)를 두었다가 현종 초에 방어사를 폐지해 황주목에 내속(來屬)시켰고, 그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2 황해도 신천군(信川郡)조에 따르면 조선 태종 13년(1413)에 ‘신천’으로 이름을 고치고 현감으로 삼았고, 예종 원년에 군으로 승격하였다고 한다. 예종이 군으로 높였다.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정구복 외, 1997d,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정구복 외, 1997d,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註) 223
註) 224
가화압(加火押) : 신라 헌덕왕이 당악현(唐嶽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지금의 평안남도 중화군 당정면 당촌리(북한의 평양특별시 강남면 장교리) 일대로 비정된다. 가화압의 ‘압(押)’은 당악의 ‘악(嶽)’에 상응하는 고유어로 험준한 산악(山嶽: 山岳)을 뜻한다(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501쪽).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 ‘당악현’ 항목 참조.
註) 225
부사파의현(夫斯波衣縣) : 신라 헌덕왕이 송현현(松峴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지금의 지금의 평안남도 중화군 해압면 매현리(북한의 평양특별시 강남군 영진리) 일대로 비정된다. 구사현(仇史峴)으로도 일컬었다고 한다. 부사파의의 ‘부사(夫斯)’는 송현의 ‘송(松)’에 상응하는 고유어이며, 파의(波衣)’는 고개나 바위를 뜻하는 고유어로 여기에서는 송현이나 구사현의 ‘현(峴)’에 상응한다(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500~501쪽 및 504쪽). 본서 권35 지리2 한주조 ‘송현현’ 항목 참조.
주제분류
- 정치>행정>군현>주·부
- 정치>행정>군현>군
- 정치>행정>군현>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