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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야 정벌에 공을 세우다 ( 562년 09월 )
진흥왕(眞興王)註 396이 이찬(伊湌) 이사부(異斯夫)註 397에게 명하여 가라국(加羅國)註 398 또는 가야국(加耶國)이라고도 한다.을 공격하게 하였다. 이때 사다함(斯多含)은 나이가 15~16세였지만, 종군하기를 청하였다. 왕은 그가 어리다고 여겨 허락하지 않았으나, 그가 열심히 청하고 그 뜻이 확고하였기에, 마침내 〔왕이〕 명하여 귀당(貴幢)註 399 비장(裨將)註 400으로 삼았다. 낭도로서 그를 따라 출전하는 사람 또한 많았다.註 401 그 국경에 이르자, 〔사다함은〕 원수(元帥)註 402에게 청하여 휘하 병사를 거느리고 먼저 전단량(旃檀梁)註 403 전단량은 성문의 이름이다. 가라의 말로 문(門)을 양(梁)이라 하였다고 한다.으로 들어갔다.註 404 그 나라 사람들이 생각도 못하고 있다가 갑자기 병사가 들이닥치자 깜짝 놀라 막을 수 없었다. 대군이 기세를 타서 마침내 그 나라를 멸망시켰다.註 405
註) 396
진흥왕(眞興王): 신라 제24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540~576년이다. 이름은 삼맥종(彡麥宗) 또는 심맥부(深麥夫)이다. 아버지는 지증왕의 둘째 아들이자 법흥왕의 동생인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이다. 입종갈문왕은 사부지갈문왕(徙夫智葛文王)이라 칭하기도 한다. 어머니는 법흥왕의 딸 김씨 지소부인(只召夫人)이고, 비(妃)는 모량부 소속 박영실 각간의 딸 사도부인(思道夫人)이다. 『삼국유사』 권제1 왕력에서 식도부인(息道夫人)이라 표기하였다. 입종갈문왕이 537년에 죽고, 540년 7월에 법흥왕이 아들 없이 사망하자, 조카이자 외손자인 삼맥종이 왕위에 올랐다. 진흥왕은 법흥왕 때에 정비된 중앙집권적인 국가체제를 바탕으로 대외정복을 활발하게 전개하여 한강유역을 차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모든 가야지역을 신라의 영토로 편입하였으며, 정복지역을 순행하여 창녕과 북한산, 마운령, 황초령에 순수비를 세웠다. 또한 청소년 교육과 인재등용을 위해 화랑도(花郞徒)를 창설하였고, 처음으로 신라의 역사를 정리한 『국사(國史)』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이밖에도 황룡사(皇龍寺)를 창건하고 거기에 장육존상(丈六尊像)을 제작하여 안치하였으며, 전몰장병을 위로하기 위해 최초로 팔관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바로가기
註) 397
이사부(異斯夫): 성은 김씨이고, 나물왕의 4세손이다. 조부(祖父)와 부모에 대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태종(苔宗)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지철로왕조에서는 박이종(朴伊宗)이라 하였다. 부계는 김씨이고, 모계가 박씨이기 때문에 이사부의 성이 박씨라고도 전하였다고 짐작된다. 지증왕대 초반에 가야국을 습격하여 취하였고, 지증왕 6년(505)에 실직군주(悉直軍主)로서 실직(강원도 삼척시)에 주둔한 정군단(停軍團)을 지휘하였다. 505년에서 지증왕 13년(512) 사이에 하슬라군주(何瑟羅軍主)가 되어 실직에서 하슬라(강원도 강릉시)로 이동하여 주둔한 정군단을 지휘하였고, 512년 6월에 우산국(于山國: 울릉도)을 정복하여 복속시켰다. 『일본서기』 권17 계체천황(繼體天皇) 23년(529) 여름 4월조에 상신(上臣) 이질부례지간지(伊叱夫禮智干岐)가 금관(金官: 경남 김해시) 등 4촌을 공격하여 빼앗았다고 전하는데, 이질부례간지는 이사부를 가리킨다. 540년대 후반 진흥왕 때에 건립된 「단양 신라 적성비(丹陽 新羅 赤城碑)」에 대중(大衆) 가운데 이사부지(伊史夫智) 이간지(伊干支: 이찬)가 보이는데, 이사부가 단양 적성의 점령에 관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진흥왕 2년(541) 3월에 병부령에 임명되어 중앙과 지방의 군사에 관한 일을 총괄하였고, 진흥왕 6년(545)에 『국사(國史)』의 편찬을 건의하였다. 진흥왕 11년(550) 3월에 도살성(道薩城: 충북 증평군 도안면)과 금현성(金峴城: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을 공격하여 빼앗았으며, 진흥왕 23년(562) 9월에 대가야(大加耶)를 정벌하는 데에 공을 세웠다(강봉룡, 2010; 김창석, 2009; 정운용, 2016; 전덕재, 2014).
〈참고문헌〉
김창석, 2009, 「신라의 우산국 복속과 이사부」, 『역사교육』 111
강봉룡, 2010, 「이사부의 생애와 활동의 역사적 의의」, 『이사부와 동해』 창간호
전덕재, 2014, 「이사부의 가계와 정치적 위상」, 『사학연구』 115
정운용, 2016, 「삼국시대 신라 이사부의 군사 활동」, 『선사와 고대』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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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398
가라국(加羅國): 가라 혹은 가야(加耶)는 한 국가의 이름이면서 동시에 그 이름을 가진 중심 소국을 중심으로 한 일정한 범위 내의 소국 연합·연맹체이기도 하다. 가라(가야)라는 이름은 전기 가야연맹의 중심이었던 김해의 금관가야나 후기 가야연맹의 중심인 고령의 대가야를 가리키는데, 여기에서는 고령의 대가야를 가리킨다.바로가기
註) 399
귀당(貴幢): 신라 중앙 군단 6정(停) 중 하나이다. 본 기록에서 진흥왕(眞興王) 23년(562)에 사다함이 귀당비장(貴幢裨將)에 임명되었고 하였는데, 이를 통해 신라에서 진흥왕 23년(562) 이전에 귀당을 창설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과 귀당이란 명칭에 주목하여, 진흥왕 23년 이전에 신라 수도에 사는 6부 지배자의 자제들을 중심으로 왕경에 주둔한 귀당이란 군단을 편성하였다고 보는 견해가 제기되었다(전덕재, 2018, 「『삼국사기』의 기록을 통해 본 신라 왕경의 實相-문무왕대 이후 신라본기와 잡지, 열전에 전하는 기록을 중심으로-」, 『대구사학』 132, 31~32쪽). 한편 이 기록 이외에 본서 권47 열전제7 눌최(訥催)조에 진평왕 41년(624) 겨울 10월에 백제가 속함성(速含城: 경상남도 함양) 등을 공격하자, 왕이 상주(上州), 하주(下州), 귀당, 법당(法幢), 서당(誓幢) 등 5군에게 출병하여 구원하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전하고, 문무왕 2년(662) 정월 기록에 귀당제감(貴幢弟監) 성천(星川) 등이 이현(梨峴)에서 고구려군과 싸워 물리쳤다고 전한다. 본서 권40 잡지제9 직관(하) 무관조에 문무왕 13년(673)에 6정의 하나인 상주정(上州停)을 귀당으로 고쳤다고 전하나, 문무왕 13년 이전 기록에 귀당에 대한 정보가 여럿 전하기 때문에 그대로 믿기 어렵다. 무관조의 기록본서 권제47 열전제7 취도(驟徒)조에 신문왕(神文王) 4년(684)에 고구려(보덕국)의 남은 적이 보덕성(報德城: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읍)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핍실(逼實)이 귀당제감(貴幢弟監)에 임명되어 반란군 진압에 참여하였다고 전하는 기록을 종합하여 보건대, 문무왕 13년(673)에 당시 일선(一善: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에 주둔하고 있던 정군단인 상주정과 귀당을 합친 이후에 그것을 귀당이라고 불렀다고 이해할 수 있다. 문무왕 13년에 상주정을 귀당이라고 고쳤다고 잘못 기록한 것은 왕경에 주둔한 귀당을 일선으로 옮겨 상주정과 합친 이후, 그 정군단(停軍團)을 귀당이라고 부른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인다. 상주정과 왕경에 주둔하였던 귀당을 합친 이후, 귀당의 지휘관인 장군의 정원은 4명이었고, 진골로서 관직이 상당(上堂)에서 상신(上臣: 상대등)까지인 자를 임용하였으며, 장군 예하에는 대관대감(大官大監), 대대감(隊大監), 제감(弟監), 감사지(監舍知), 소감(少監), 화척(火尺)이란 군관과 더불어 군사당주·감(軍師幢主·監), 대장척당주·감(大匠尺幢·監), 보기당주·보기감(步騎幢主·步騎監), 흑의장창말보당주(黑衣長槍末步幢主) 등의 군관이 배속되어 있었다.바로가기
註) 400
귀당(貴幢) 비장(裨將): 본서 권제40 잡지제9 무관 제군관(諸軍官)조에 귀당에 대관대감(大官大監) 5명을 두었다고 전한다. 여기에 귀당은 6정의 하나로 전하기 때문에 무관 제군관조의 기록은 귀당의 전신인 상주정(上州停)에 대관대감 5명을 두었다고 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문무왕 13년(673) 귀당과 상주정을 합치기 이전에 귀당의 정확한 군관조직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비장이 정확히 어떠한 직위인지 알 수 없지만, 이름을 볼 때 귀당의 최고 지위자인 귀당 당주(幢主)를 보좌하는 부장(副將)으로 추정된다. 비장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본서 권제4 신라본기제4 진흥왕 15년(554) 7월조 참조. 본서 권제4 신라본기제4 진흥왕 23년(562) 9월조에서는 왕이 이사부에게 가야 정벌을 명하고, 사다함으로 하여금 그를 보좌[副]하도록 했다고 되어 있다.바로가기
註) 401
진흥왕(眞興王)이 이찬(伊湌) 이사부(異斯夫)에게 … 또한 많았다: 본서 권제4 신라본기제4 진흥왕 23년 9월조에 “가야(加耶)가 배반하였으므로 왕이 명하여 이사부(異斯夫)에게 토벌하게 하고, 사다함(斯多含)에게 그를 보좌하도록 하였다.”고 전한다. 신라본기의 기록과 본 열전의 기록이 차이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바로가기
註) 402
원수(元帥): 다른 곳에서 확인되지 않는 직함으로, 고유한 직명이 아니라 단순히 최고 사령관을 의미한다고 추정된다. 대가야 정벌전의 최고 책임자인 이사부(異斯夫)를 가리킨다고 보인다.바로가기
註) 403
전단량(旃檀梁): 대가야 왕성의 문 이름으로 추정된다. 본 기록의 세주(細注)에서 전단량은 성문의 이름이며, 가라의 말로 문(門)을 양(梁)이라 하였다고 밝혔다. 본서 권제4 신라본기제4 진흥왕 12년(562) 9월조에 ‘전단문(栴檀門)’으로 나온다. 전단은 자단, 백단 등의 향나무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양(梁)’의 훈(訓)이 ‘돌’, ‘드리’, ‘도리’로 파악하고, 납입(納人) 또는 입문(入門) 즉 ‘목’의 뜻이라고 파악하기도 한다(이병도, 1996, 『국역 삼국사기』(하), 을유문화사, 398쪽).바로가기
註) 404
휘하 … 들어갔다: 본서 권제4 신라본기 제4 진흥왕 23년(562) 9월조에는 사다함이 기병 5,000을 이끌고 전단문으로 달려 들어가 흰 깃발을 세웠다고 하였다.바로가기
註) 405
그 국경에 이르자 … 그 나라를 멸망시켰다: 본서 권제4 신라본기제4 진흥왕 23년 9월조에 “사다함이 5,000명의 기병(騎兵)을 거느리고 먼저 전단문(栴檀門)으로 달려 들어가 흰색 깃발을 세우니, 성 안의 사람들이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사부가 군사를 이끌고 다다르자, 일시에 모두 항복하였다.”고 전한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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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http://db.history.go.kr/id/sa_001_0030_0020 (accessed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http://db.history.go.kr/id/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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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sa_001_0030_0020,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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