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백제왕을 자칭하다
(
900년
)
견훤이 서쪽으로 순행하여 완산주註 001에 이르니 주(州)의 백성들이 환영하고 〔수고를〕 위로하였다. 견훤이 인심을 얻은 것을 기뻐하여 좌우에게 말하기를, “내가 삼국의 시초를 찾아보니, 마한이 먼저 일어나고 후에 혁거세註 002가 일어났다. 그러므로 진한과 변한은 그를 뒤따라 일어난 것이다.註 003 이에 백제는 금마산(金馬山)註 004에서 개국하여 6백여 년이 되었는데,註 005 총장(摠章) 연간註 006에 당(唐) 고종(高宗)註 007이 신라의 요청으로 장군 소정방(蘇定方)註 008을 보내어 배에 군사 130,000명을〔싣고〕 바다를 건넜고, 신라의 김유신(金庾信)註 009이 흙먼지를 날리며 황산(黃山)註 010을 지나 사비(泗沘)註 011에 이르러 당병(唐兵)과 합세하여 백제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지금 내가 감히 완산(完山)註 012에 도읍하여 의자왕(義慈王)註 013의 오래된 울분을 씻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마침내 후백제왕註 014을 자칭하고 관부를 설치하고 관직을 나누니 이때는 당(唐) 광화(光化)註 015 3년(900)이며 신라 효공왕 4년이었다. 오월(吳越)註 016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니 오월왕註 017이 답례의 사신을 보냈다.註 018 이에 검교태보(檢校太保)註 019의 관직을 더하여 주었는데, 나머지는 전과 같았다.註 020
완산주(完山州): 신라 9주 중 하나. 그 주치는 현재의 전라북도 전주시 일대이다. 신문왕 5년(685)에 설치되었으며, 경덕왕 16년(757)에 전주(全州)로 이름을 바꾸었다[본서 권제36 잡지제5 지리3 신라 전주].
혁거세: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를 가리킨다. 본서 권제1 신라본기제1 시조 혁거세거서간 원년(B. C. 57) 4월 15일조의 주석 참조.
마한이 … 일어난 것이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마한, 진한, 변한은 고대 한강 이남에 위치하였던 3개의 정치체였다. 그런데 삼국이 정립하면서부터는 삼국을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되었고, 후삼국을 삼한이라고 지칭하기도 하였다. 나아가 우리나라 혹은 우리나라 전부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盧泰敦, 1982, 「三韓에 대한 認識의 變遷」, 『韓國史硏究』 38). 위에 따르면 견훤은 마한을 백제, 진한은 신라, 변한은 고구려라고 파악하였다. 이는 최치원이 「상태사시중장(上太師侍中狀)」[본서 권제46 열전제6 최치원전]에서 마한은 고구려, 변한은 백제, 진한은 신라라고 한 것과 다른 점이 있다.
금마산(金馬山): 전라북도 익산시 소재의 금마산을 가리키는 듯하다. 익산은 본래 백제의 금마저군(金馬渚郡)으로 경덕왕이 금마군(金馬郡)으로 이름을 고쳤다[본서 권제36 잡지제5 지리3 신라 금마군].
고종(高宗): 이치(李治). 생몰년 628~683년. 당(唐)의 제3대 황제로서 재위는 649~683년이다. 태종의 아들이며, 즉위한 뒤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보다 자세한 것은 본서 권제5 신라본기제5 진덕여왕 4년(650)조의 주석 참조.
소정방(蘇定方): 생몰년 592~667년. 이름은 열(烈), 정방(定方)은 자(字)이다. 현경(顯慶) 5년(660) 3월 나당(羅唐) 연합군의 대총관으로 13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산동반도에서 황해를 건너 신라군과 함께 백제를 협공하였다. 사비성(泗沘城)을 함락시키고, 의자왕과 태자 융(隆)을 사로잡아 당으로 송치하였다. 다음 해 나당 연합군을 거느리고 고구려 평양성을 포위 공격하였지만 전세가 불리해지자 철군하였다. 본서 권제5 신라본기제5 태종 무열왕 2년(655) 3월조의 주석 참조.
김유신(金庾信): 생몰년 595~673년. 금관가야계 진골귀족 출신으로서 신라의 삼국통일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660년 그는 신라군을 이끌고 당군(唐軍)과 함께 백제를 멸하였다. 661년에는 당군의 고구려 평양성 공격을 도왔다.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킬 때 대당대총관(大幢大摠管)이 되었으나, 병으로 인해 원정에는 직접 참가하지는 못하였다. 본서 권제4~6 신라본기제4~6, 권41~43 열전제1~3 김유신 상·중·하 및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김유신조 등 참고.
황산(黃山): 현재의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일대이다. 자세한 설명은 본서 권제5 신라본기제5 태종 무열왕 7년(660) 7월 9일조의 주석 참조.
완산(完山): 신라 9주의 하나인 완산주(전주로 개명)의 주치이다. 현재의 전라북도 전주시 일대이다. 본서 권제36 잡지제5 지리3 신라 전주조에 따르면 전주는 본래 백제의 완산이었는데, 신문왕 5년(685)에 완산주를 설치했고, 경덕왕 16년(757)에 전주로 이름을 고쳤다고 한다.
의자왕(義慈王): 생몰년 ?~660년. 백제의 제31대 왕이자 마지막 왕이다. 재위 641~660년. 무왕(武王)의 장자로 무왕 33년(632)에 태자가 되었다. 즉위 초부터 신라를 공격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말년에는 지배세력이 분열하였고, 660년 나당연합군이 공격하자 항복하였다. 왕자, 대신들과 함께 당에 끌려갔다가 그해에 죽었다. 본서 권제28 백제본기제6 의자왕 원년(641) 3월조의 주석 참조.
오월(吳越): 중국 오대십국(五代十國)시대 십국의 한 나라이다. 907년 주온(朱温)이 당(唐)을 멸하고 후량(後梁)을 세우자 오왕(吳王)이었던 전류(錢鏐)는 신하를 칭하였고, 그 해 오월왕으로 봉해졌다. 이로써 오월국이 성립하였다. 923년 후량이 전류를 오월국왕으로 봉함으로써 정식으로 건국하게 되었다. 978년에 송(宋)에 항복하기까지 5왕 72년 동안 지속되었다. 항주를 중심으로 지금의 절강성 일대를 지배하였다(白寿彝 总主编;陈振主 编, 2004, 『中国通史 第7卷 上冊』[中古时代·五代辽宋夏金时期(上)], 上海人民出版社,178~179쪽).
오월(吳越)에 … 사신을 보냈다: 견훤이 900년 이전부터 견훤이 ‘오월’과 교류하였으리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申虎澈, 135~136; 허인욱, 45~50쪽). 그런데 900년은 오월 건국 이전이므로 이 기사의 신빙성이 문제가 될 수 있다. 이에 견훤과 오월국 건국 이전의 전류가 교류한 것을 국가적 교류인 것처럼 기록한 것으로 풀이하기도 한다(이도학, 276~277쪽).
〈참고문헌〉
申虎澈, 1993, 『後百濟 甄萱政權硏究』, 一潮閣
허인욱, 2016, 「後百濟의 對중국 교류 연구」, 『사학연구』 122
이도학, 2016, 「後百濟와 高麗의 吳越國 交流 硏究와 爭點」, 『한국고대사탐구』 22
〈참고문헌〉
申虎澈, 1993, 『後百濟 甄萱政權硏究』, 一潮閣
허인욱, 2016, 「後百濟의 對중국 교류 연구」, 『사학연구』 122
이도학, 2016, 「後百濟와 高麗의 吳越國 交流 硏究와 爭點」, 『한국고대사탐구』 22
검교태보(檢校太保): 당(唐)에서는 본관(本官) 앞에 검교(檢校)를 붙여 품(品)을 올려 주었는데, 모두 산관(散官) 혹은 가관(加官)으로서 직권이 없었다. 태보는 주대(周代)에 설치된 것으로 태사(太師), 태부(太傅)와 함께 삼공(三公)이라고 하였는데, 상설 관직은 아니었다. 수(隋)·당(唐)대도 존속되었으나 허직화(虛職化)하였고, 실권은 없었다[『송사』(1) 외국열전 고려조의 주석 참조].
이에 검교태보(檢校太保)의 … 나머지는 전과 같았다: 이전의 관직(관작)은 그대로 두고 새로 검교태보(檢校太保)를 더하였다는 의미이다. 이와 관련하여 견훤이 자서하였다는 관직(관작)은 오월로부터 받았을 것이고, 900년에 여기에 검교태보를 더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申虎澈, 135~136쪽). 이와 달리 견훤이 자서한 관직(관작)은 그가 자칭한 것인데, 오월에서 이에 더하여 검교태보를 준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권덕영, 143~145쪽).
〈참고문헌〉
申虎澈, 1993, 『後百濟 甄萱政權硏究』, 一潮閣
권덕영, 2000, 「後百濟의 海外交涉 活動」, 『후백제와 견훤』(충남대 백제연구소 편), 서경문화사
〈참고문헌〉
申虎澈, 1993, 『後百濟 甄萱政權硏究』, 一潮閣
권덕영, 2000, 「後百濟의 海外交涉 活動」, 『후백제와 견훤』(충남대 백제연구소 편), 서경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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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01
완산주(完山州): 신라 9주 중 하나. 그 주치는 현재의 전라북도 전주시 일대이다. 신문왕 5년(685)에 설치되었으며, 경덕왕 16년(757)에 전주(全州)로 이름을 바꾸었다[본서 권제36 잡지제5 지리3 신라 전주].
註) 002
혁거세: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를 가리킨다. 본서 권제1 신라본기제1 시조 혁거세거서간 원년(B. C. 57) 4월 15일조의 주석 참조.
註) 003
마한이 … 일어난 것이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마한, 진한, 변한은 고대 한강 이남에 위치하였던 3개의 정치체였다. 그런데 삼국이 정립하면서부터는 삼국을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되었고, 후삼국을 삼한이라고 지칭하기도 하였다. 나아가 우리나라 혹은 우리나라 전부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盧泰敦, 1982, 「三韓에 대한 認識의 變遷」, 『韓國史硏究』 38). 위에 따르면 견훤은 마한을 백제, 진한은 신라, 변한은 고구려라고 파악하였다. 이는 최치원이 「상태사시중장(上太師侍中狀)」[본서 권제46 열전제6 최치원전]에서 마한은 고구려, 변한은 백제, 진한은 신라라고 한 것과 다른 점이 있다.
註) 004
금마산(金馬山): 전라북도 익산시 소재의 금마산을 가리키는 듯하다. 익산은 본래 백제의 금마저군(金馬渚郡)으로 경덕왕이 금마군(金馬郡)으로 이름을 고쳤다[본서 권제36 잡지제5 지리3 신라 금마군].
註) 005
註) 006
註) 007
고종(高宗): 이치(李治). 생몰년 628~683년. 당(唐)의 제3대 황제로서 재위는 649~683년이다. 태종의 아들이며, 즉위한 뒤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보다 자세한 것은 본서 권제5 신라본기제5 진덕여왕 4년(650)조의 주석 참조.
註) 008
소정방(蘇定方): 생몰년 592~667년. 이름은 열(烈), 정방(定方)은 자(字)이다. 현경(顯慶) 5년(660) 3월 나당(羅唐) 연합군의 대총관으로 13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산동반도에서 황해를 건너 신라군과 함께 백제를 협공하였다. 사비성(泗沘城)을 함락시키고, 의자왕과 태자 융(隆)을 사로잡아 당으로 송치하였다. 다음 해 나당 연합군을 거느리고 고구려 평양성을 포위 공격하였지만 전세가 불리해지자 철군하였다. 본서 권제5 신라본기제5 태종 무열왕 2년(655) 3월조의 주석 참조.
註) 009
김유신(金庾信): 생몰년 595~673년. 금관가야계 진골귀족 출신으로서 신라의 삼국통일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660년 그는 신라군을 이끌고 당군(唐軍)과 함께 백제를 멸하였다. 661년에는 당군의 고구려 평양성 공격을 도왔다.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킬 때 대당대총관(大幢大摠管)이 되었으나, 병으로 인해 원정에는 직접 참가하지는 못하였다. 본서 권제4~6 신라본기제4~6, 권41~43 열전제1~3 김유신 상·중·하 및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김유신조 등 참고.
註) 010
황산(黃山): 현재의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일대이다. 자세한 설명은 본서 권제5 신라본기제5 태종 무열왕 7년(660) 7월 9일조의 주석 참조.
註) 012
완산(完山): 신라 9주의 하나인 완산주(전주로 개명)의 주치이다. 현재의 전라북도 전주시 일대이다. 본서 권제36 잡지제5 지리3 신라 전주조에 따르면 전주는 본래 백제의 완산이었는데, 신문왕 5년(685)에 완산주를 설치했고, 경덕왕 16년(757)에 전주로 이름을 고쳤다고 한다.
註) 013
의자왕(義慈王): 생몰년 ?~660년. 백제의 제31대 왕이자 마지막 왕이다. 재위 641~660년. 무왕(武王)의 장자로 무왕 33년(632)에 태자가 되었다. 즉위 초부터 신라를 공격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말년에는 지배세력이 분열하였고, 660년 나당연합군이 공격하자 항복하였다. 왕자, 대신들과 함께 당에 끌려갔다가 그해에 죽었다. 본서 권제28 백제본기제6 의자왕 원년(641) 3월조의 주석 참조.
註) 014
註) 016
오월(吳越): 중국 오대십국(五代十國)시대 십국의 한 나라이다. 907년 주온(朱温)이 당(唐)을 멸하고 후량(後梁)을 세우자 오왕(吳王)이었던 전류(錢鏐)는 신하를 칭하였고, 그 해 오월왕으로 봉해졌다. 이로써 오월국이 성립하였다. 923년 후량이 전류를 오월국왕으로 봉함으로써 정식으로 건국하게 되었다. 978년에 송(宋)에 항복하기까지 5왕 72년 동안 지속되었다. 항주를 중심으로 지금의 절강성 일대를 지배하였다(白寿彝 总主编;陈振主 编, 2004, 『中国通史 第7卷 上冊』[中古时代·五代辽宋夏金时期(上)], 上海人民出版社,178~179쪽).
註) 017
註) 018
오월(吳越)에 … 사신을 보냈다: 견훤이 900년 이전부터 견훤이 ‘오월’과 교류하였으리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申虎澈, 135~136; 허인욱, 45~50쪽). 그런데 900년은 오월 건국 이전이므로 이 기사의 신빙성이 문제가 될 수 있다. 이에 견훤과 오월국 건국 이전의 전류가 교류한 것을 국가적 교류인 것처럼 기록한 것으로 풀이하기도 한다(이도학, 276~277쪽).
〈참고문헌〉
申虎澈, 1993, 『後百濟 甄萱政權硏究』, 一潮閣
허인욱, 2016, 「後百濟의 對중국 교류 연구」, 『사학연구』 122
이도학, 2016, 「後百濟와 高麗의 吳越國 交流 硏究와 爭點」, 『한국고대사탐구』 22
〈참고문헌〉
申虎澈, 1993, 『後百濟 甄萱政權硏究』, 一潮閣
허인욱, 2016, 「後百濟의 對중국 교류 연구」, 『사학연구』 122
이도학, 2016, 「後百濟와 高麗의 吳越國 交流 硏究와 爭點」, 『한국고대사탐구』 22
註) 019
검교태보(檢校太保): 당(唐)에서는 본관(本官) 앞에 검교(檢校)를 붙여 품(品)을 올려 주었는데, 모두 산관(散官) 혹은 가관(加官)으로서 직권이 없었다. 태보는 주대(周代)에 설치된 것으로 태사(太師), 태부(太傅)와 함께 삼공(三公)이라고 하였는데, 상설 관직은 아니었다. 수(隋)·당(唐)대도 존속되었으나 허직화(虛職化)하였고, 실권은 없었다[『송사』(1) 외국열전 고려조의 주석 참조].
註) 020
이에 검교태보(檢校太保)의 … 나머지는 전과 같았다: 이전의 관직(관작)은 그대로 두고 새로 검교태보(檢校太保)를 더하였다는 의미이다. 이와 관련하여 견훤이 자서하였다는 관직(관작)은 오월로부터 받았을 것이고, 900년에 여기에 검교태보를 더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申虎澈, 135~136쪽). 이와 달리 견훤이 자서한 관직(관작)은 그가 자칭한 것인데, 오월에서 이에 더하여 검교태보를 준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권덕영, 143~145쪽).
〈참고문헌〉
申虎澈, 1993, 『後百濟 甄萱政權硏究』, 一潮閣
권덕영, 2000, 「後百濟의 海外交涉 活動」, 『후백제와 견훤』(충남대 백제연구소 편), 서경문화사
〈참고문헌〉
申虎澈, 1993, 『後百濟 甄萱政權硏究』, 一潮閣
권덕영, 2000, 「後百濟의 海外交涉 活動」, 『후백제와 견훤』(충남대 백제연구소 편), 서경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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