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한은 열두 개 작은 나라가 있어 각각 1만 호로 나라를 일컫다
진한(辰韓)또한 진한(秦韓)이라고도 한다.
≪후한서≫에 이르기를, “진한의 늙은이(耆老)들이 스스로 말하기를 ‘진나라 망명자들이 한국으로 오매 마한이 동쪽 지역 땅을 떼어 주었다. 서로를 부를 때 도(徒)라고 하니, 진나라 말과 비슷하였으므로 혹은 진한(秦韓)으로 이름했다.’고도 하며 열두 개 작은 나라가 있어 각각 1만 호로써 나라를 일컬었다.”라고 하였다.
또 최치원
註 391이 말하기를 “진한은 본래 연나라 사람으로서 도피해 온 자들이므로 탁수(涿水)註 392의 이름을 따서 그들이 사는 고을과 동리 이름을 사탁(沙涿)註 393·점탁(漸涿)註 394등으로 불렀다.”신라 사람들의 방언에 탁(涿) 자를 읽을 때 발음을 도(道)라고 한다. 그러므로 지금도 혹 사량(沙梁)이라 쓰고, 양(梁)을 또한 도(道)라고도 읽는다.
신라 하대의 학자로 자(字)는 고운(孤雲) 또는 해운(海雲)이라 한다. 12살에 당(唐)에 유학하여 17살에 과거에 급제했다.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나자 제도병마도통(諸道兵馬都統) 고병(高騈)의 종사(從事)가 되어 황소를 정벌하는 격문을 지어서 문명(文名)을 크게 떨쳤다. 헌강왕(憲康王) 11년(885)에 귀국하여 시독겸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 병부시랑(兵部侍郞) 지서서감(知瑞書監)이 되었다. 진성여왕(眞聖女王) 8년(894)에 아찬(阿湌)을 지냈으나 곧 사직했으며 만년에 가야산(伽倻山)에 숨어 살다 세상을 마쳤다. 저술로는 ≪사육집(四六集)≫과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이 있다(장일규, ≪최치원의 사회사상 연구≫, 국민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1).
註) 391
신라 하대의 학자로 자(字)는 고운(孤雲) 또는 해운(海雲)이라 한다. 12살에 당(唐)에 유학하여 17살에 과거에 급제했다.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나자 제도병마도통(諸道兵馬都統) 고병(高騈)의 종사(從事)가 되어 황소를 정벌하는 격문을 지어서 문명(文名)을 크게 떨쳤다. 헌강왕(憲康王) 11년(885)에 귀국하여 시독겸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 병부시랑(兵部侍郞) 지서서감(知瑞書監)이 되었다. 진성여왕(眞聖女王) 8년(894)에 아찬(阿湌)을 지냈으나 곧 사직했으며 만년에 가야산(伽倻山)에 숨어 살다 세상을 마쳤다. 저술로는 ≪사육집(四六集)≫과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이 있다(장일규, ≪최치원의 사회사상 연구≫, 국민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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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왕실>국왕>국명·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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