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전성시대에 서울 호수가 178,936호에 1,360방, 55리, 35금입택이다
신라의 전성시대에 서울 안 호수가 178,936호(戶)註 395에 1,360방(坊)註 396이요, 주위가 55리(里)였다. 서른다섯 개 금입택(金入宅)註 397
부잣집 큰 저택을 말함이다.이 있었으니 남택(南宅)·북택(北宅)·우비소택(亏比所宅)·본피택(本披宅)·양택(梁宅)·지상택(池上宅)본피부·재매정택(財買井宅)註 398
김유신(庾信)공의 조상집(祖宗)·북유택(北維宅)·남유택(南維宅)반향사(反香寺)하방(下坊)·대택(隊宅)·빈지택(賓支宅)반향사 북쪽·장사택(長沙宅)·상앵택(上櫻宅)·하앵택(下櫻宅)·수망택(水望宅)·천택(泉宅)·양상택(楊上宅)양부의 남쪽·한기택(漢岐宅)법류사(法流寺) 남쪽·비혈택(鼻穴宅)법류사 남쪽·판적택(板積宅)분황사(芬皇寺) 상방(上坊)·별교택(別敎宅)개천 북쪽·아남택(衙南宅)·김양종택(金楊宗宅)註 399
양관사(梁官寺) 남쪽·곡수택(曲水宅)개천 북쪽·유야택(柳也宅)·사하택(寺下宅)·사량택(沙梁宅)·정상택(井上宅)·이남택(里南宅)우소택(亏所宅)·사내곡택(思內曲宅)·지택(池宅)·사상택(寺上宅)대숙택(大宿宅)·임상택(林上宅)청룡(靑龍)이란 절(寺) 동쪽이니, 못이 있다.·교남택(橋南宅)·항질택(巷叱宅)본피부·누상택(樓上宅)·이상택(里上宅)·명남택(椧南宅)·정하택(井下宅)이다.
‘17만 호’에 대해서는 이를 호구수로 보고 5(명)을 곱하면 85만여 명이 되는데 경주의 면적을 감안하면 이 인구를 모두 수용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이를 호구수로 보지 않고 인구수로 보는 것이 대체적인 견해이다(李丙燾, ≪韓國史-古代篇≫, 乙酉文化社, 1959, 702~703쪽). 그러나 당평백제비(唐平百濟碑)에서 백제 멸망 당시 인구가 620만이라 언급한 점을 감안하면, 신라 왕경의 인구를 85만명 정도로 추측하는 것이 결코 타당성 없는 주장은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이기봉, ≪신라 왕경의 범위와 구역에 대한 지리적 연구≫, 서울대 박사논문, 2002).
실제로는 39개의 금입택이 서술되어 있다. 때문에 부명(部名)을 갖는 양택(梁宅), 사량택(沙梁宅), 본피택(本彼宅), 한기택(漢岐宅) 등 4개의 금입택은 왕실의 이궁(離宮)일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이기동, 「신라금입택고」, ≪진단학보≫ 45, 1978).
김양종은 헌덕왕 2~3년경에 집사부 시중직을 역임한 인물로(≪삼국사기≫ 권10 신라본기 헌덕왕조)과 동일인으로, 김양종택은 그를 시조나 중시조로 하는 가문의 택호(宅號)로 볼 수 있다(이기동, 「신라금입택고」, ≪진단학보≫ 45, 1978, 1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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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395
‘17만 호’에 대해서는 이를 호구수로 보고 5(명)을 곱하면 85만여 명이 되는데 경주의 면적을 감안하면 이 인구를 모두 수용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이를 호구수로 보지 않고 인구수로 보는 것이 대체적인 견해이다(李丙燾, ≪韓國史-古代篇≫, 乙酉文化社, 1959, 702~703쪽). 그러나 당평백제비(唐平百濟碑)에서 백제 멸망 당시 인구가 620만이라 언급한 점을 감안하면, 신라 왕경의 인구를 85만명 정도로 추측하는 것이 결코 타당성 없는 주장은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이기봉, ≪신라 왕경의 범위와 구역에 대한 지리적 연구≫, 서울대 박사논문, 2002).
註) 397
실제로는 39개의 금입택이 서술되어 있다. 때문에 부명(部名)을 갖는 양택(梁宅), 사량택(沙梁宅), 본피택(本彼宅), 한기택(漢岐宅) 등 4개의 금입택은 왕실의 이궁(離宮)일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이기동, 「신라금입택고」, ≪진단학보≫ 45, 1978).
註) 399
김양종은 헌덕왕 2~3년경에 집사부 시중직을 역임한 인물로(≪삼국사기≫ 권10 신라본기 헌덕왕조)과 동일인으로, 김양종택은 그를 시조나 중시조로 하는 가문의 택호(宅號)로 볼 수 있다(이기동, 「신라금입택고」, ≪진단학보≫ 45, 1978, 1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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