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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왕이 만파식적을 얻다
왕은 놀라고 기뻐하여 오색 비단과 금과 옥으로 보답하고 사자를 시켜 대나무를 베어서 바다에서 나오자, 산과 용은 갑자기 사라져 나타나지 않았다. 왕이 감은사에서 유숙하고, 17일에 기림사(祗林寺)註 091 서쪽 냇가에 이르러 수레를 멈추고 점심을 먹었다. 태자 이공(理恭)즉 효소대왕(孝昭大王)이 대궐을 지키고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는 말을 달려와서 하례하고 천천히 살펴보고 말하기를, “이 옥대의 여러 쪽들이 모두 진짜 용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네가 어떻게 그것을 아는가?”라고 하셨다. 태자가 아뢰기를, “쪽 하나를 떼어서 물에 넣어보면 아실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왼쪽의 둘째 쪽을 떼어 시냇물에 넣으니 곧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그곳은 못이 되었다. 이로 인해 그 못을 용연(龍淵)으로 불렀다. 왕이 행차에서 돌아와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月城)註 092의 천존고(天尊庫)註 093에 간직하였다.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나으며, 가뭄에는 비가 오고 장마는 개며, 바람이 잦아들고 물결이 평온해졌다. 이를 만파식적(萬波息笛)으로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註 094 효소왕 註 095대에 이르러 천수(天授) 4년 계사(癸巳)에 실례랑(失禮郞)註 096이 살아 돌아온 기이한 일로 해서 다시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고 하였다. 자세한 것은 그 전기에 보인다.註 097

註) 091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 호암리 함월산에 있는 사찰이다. 선덕여왕 2년(643) 천축 승려 광유(光有)가 창건하여 임정사(林井寺)라고 했는데, 후에 원효가 중창하여 기림사로 개칭했다고 한다.바로가기
註) 092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101년 파사이사금이 축조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여러 번 개축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둘레 1,841m, 동서길이 860m, 남북길이 260m, 면적 112,500㎡이다. 성벽은 성 밖에서 측정하면 약 11~16m이고, 성안에서는 4~11m 정도이다. 월성에는 9~10개의 문지가 있고 월성 안의 궁궐은 ‘大宮’이라고 불렸으며, 조원전·숭례전 등 7세기 이후의 건물들이 많았던 것으로 생각된다(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월성해자 발굴조사보고서 Ⅱ-고찰-≫, 2004).바로가기
註) 093
천존고는 만파식적을 보관한 창고였는데, 이에 대해서는 전하는 기록이 없어 더 이상의 내용은 알 수 없다.바로가기
註) 094
이 설화를 이해하는 측면은 여러 가지이다. 불교 설화의 관점으로서 통일전쟁의 승리에 대한 감사, 통일 후의 태평 구가, 안일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한 경계, 문무왕과 김유신을 기리는 찬송을 담은 글로 보는 것이 있고(김영태, 「만파식적설화고(萬波息笛說話攷)」, ≪동국대논문집≫ 11, 1973), 신라인의 호국불교사상 가운데 하나로서 호국적 신화에 대한 신앙이라고 보는 측면이 있으며,(황패강, ≪신라불교설화연구≫, 일지사, 1975) 민속학적인 관점에서 현지에 전승되고 있는 설화를 채집하여 ‘거랑끊는 소리(비오기 전에 들리는 소리)’를 만파식적 설화의 원형으로 파악하기도 한다(서연범, 「방언에서 본 만파식적과 문무왕릉」, ≪한국민속학≫ 8, 1975) 그리고 역사적인 관점에서 김흠돌의 난 등으로 불거진 무열왕권의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 유교 정치이념과 예학사상을 도입하여 무열왕권의 정당화시키고 전제왕권을 확립시켜 나가던 당시 상황을 담은 글로 보는 연구도 있다(김상현, 「만파식적설화의 형성과 의미」, ≪한국사연구≫ 34, 1981).바로가기
註) 095
신문왕(神文王)의 맏아들로, 692년부터 702년까지 재위하였다. 휘는 이공(理洪), 또는 이홍(理恭)이었다.바로가기
註) 096
≪삼국유사≫ 권3 탑상4 백률사(栢栗寺)조와 같은 책 권4 의해5 자장정률(慈藏定律)조에는 ‘부례랑(夫禮郞)’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대현(大玄) 살찬(薩湌)의 아들로 천수 3년(692)에 화랑이 되어 1천 명의 무리를 거느렸는데, 이듬해 도적에게 붙들려가서 가야금과 만파식적이 함께 사라졌다. 이후 그의 양친이 栢栗寺에서 기도를 드리자 만파식적을 쪼개어 타고서 친구인 안상과 함께 돌아왔다고 한다.바로가기
註) 097
이와 관련한 자세한 내용이 ≪삼국유사≫ 권3 탑상4 백률사(栢栗寺)조에 기재되어 있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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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기사명, 자료명. URL (검색날짜)
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http://db.history.go.kr/id/sa_001_0030_0020 (accessed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http://db.history.go.kr/id/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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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기사명, 자료명.(사이트명, URL, ID, 검색날짜)
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sa_001_0030_0020,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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