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만랑의 낭도 득오가 모량리 익선의 부역에 동원되다
효소왕대 죽지랑
또는 죽만(竹曼) 또는 지관(智官)
제32대 효소왕(孝昭王)註 098 때 죽만랑(竹曼郞)의 낭도 중에 득오(得烏)또는 곡(谷) 급간(級干)註 099이 있었다. 풍류황권(風流黃卷)註 100에 이름을 올려놓고 날마다 출근하였다. 열흘 동안 보이지 않기에 낭이 그의 어머니를 불러 아들이 있는 곳을 물었다. 어머니가 말하기를, “당전(幢典)註 101인 모량(牟梁)註 102의 익선(益宣) 아간(阿干)註 103이 내 아들을 부산성(富山城)註 104의 창직(倉直)으로 뽑아갔는데, 빨리 가느라고 미처 낭에게 말씀드릴 겨를도 없었습니다”라고 하였다. 낭이 말하기를, “당신 아들이 만약 사사로운 일로 그곳에 갔다면 찾아볼 필요가 없지만, 이제 공사로 갔다니 마땅히 가서 대접 해야겠소”라고 하고, 이에 설병(舌餅) 한 합과 술 한 병을 가지고 좌인(左人)우리말에 개질지(皆叱知)라고 하니 노복(奴僕)을 말한다.을 거느리고 갔다. 낭의 무리 1백 37명도 위의를 갖추고 따라갔다.
화랑도의 명부로 ≪서언고사(書言故事)≫에 “황권에 이름을 썼다(書名黃권)”라고 한 기록이 보인다(김상현, 「화랑에 관한 제명칭의 검토」, ≪신라문화제학술발표회논문집≫ 12, 경주시, 1991).
신라 6부 중 하나인 모량부(牟梁部)를 가리키는 것으로 점량부(漸梁部)라고도 하였다. 현재의 경북 경주시의 서천(西川) 지류인 모량천(毛良川) 북쪽의 서형산 기슭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고려 태조 23년(940)에 장복부(長福部)로 개칭되었다(신종원, 「삼국유사 효소왕대 죽지랑조 역주」, ≪한국사상사학≫ 6, 1994, 96쪽).
註) 100
화랑도의 명부로 ≪서언고사(書言故事)≫에 “황권에 이름을 썼다(書名黃권)”라고 한 기록이 보인다(김상현, 「화랑에 관한 제명칭의 검토」, ≪신라문화제학술발표회논문집≫ 12, 경주시, 1991).
註) 102
신라 6부 중 하나인 모량부(牟梁部)를 가리키는 것으로 점량부(漸梁部)라고도 하였다. 현재의 경북 경주시의 서천(西川) 지류인 모량천(毛良川) 북쪽의 서형산 기슭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고려 태조 23년(940)에 장복부(長福部)로 개칭되었다(신종원, 「삼국유사 효소왕대 죽지랑조 역주」, ≪한국사상사학≫ 6, 1994, 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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