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왕실과 조정에서 고려에의 귀부를 논의하다
청태(淸泰)註 252 2년 을미 10월에 사방의 토지가 모두 남의 나라 소유가 되고 나라는 약하고 형세가 외로우니 스스로 지탱할 수가 없었다. 이에 여러 신하들과 함께 국토(國土)를 들어 고려 태조(太祖)에게 항복할 것을 의논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옳으니 그르니 하여 의논이 시끄럽고 끝나지 않았다. 왕태자(王太子)가 말하기를, “나라의 존망(存亡)은 반드시 하늘의 명에 있는 것이니 마땅히 충신(忠臣)·의사(義士)들과 함께 민심(民心)을 수습해서 힘이 다한 뒤에야 그만둘 일이지 어찌 천년의 사직(社稷)을 가벼이 남에게 주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외롭고 위태함이 이와 같으니 형세는 보전될 수 없다. 이미 강해질 수도 없고 또한 약해질 수도 없으니, 죄없는 백성들을 참혹하게 죽게 하는 것[肝腦塗地]註 253은 나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시랑(侍郞) 김봉휴(金封休)註 254를 시켜서 국서(國書)를 가지고 태조에게 가서 항복하기를 청했다. 태자는 울면서 왕을 하직하고 바로 개골산(皆骨山)으로 들어가서 삼베 옷을 입고 풀을 먹다가 생애를 마쳤다. 막내 아들은 머리를 깎고 화엄종(華嚴宗)에 들어가 승려가 되어 이름을 범공(梵空)이라 했는데, 그 뒤로 법수사(法水寺)註 255와 해인사(海印寺)註 256에 있었다고 한다.
법수사(法水寺)는 경상북도 성주군 동쪽 가야산 남쪽에 있었던 절이다. 법수사는 신라 제40대 애장왕 3년(802)에 창건하여 원래는 금당사(金塘寺)라 하였으며, 이후 고려시대에 퇴락한 절을 중건하여 법수사라 하였다. 폐사에 대해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법수사에 관한 기록이 전하는 것으로 보아, ≪신증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된 조선 중종 25년(1530)까지는 법수사가 존재하였다고 본다. 하지만 조선 숙종 3년(1677)에 간행된 이 곳 지방지(地方誌)인 ≪경산지(京山誌)≫에는 폐사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임진왜란 때 폐사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문명대, 「法水寺의 摩訶毘盧舍那三尊佛」, ≪고문화≫ 5, 1969). 현재 법수사지에는 마을이 들어섰고 그 터가 경작지로 변하여 구체적인 사역의 규모는 확인할 수 없다. 지금은 건물지와 석축, 법수사지 당간지주(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86호), 법수사지 삼층석탑(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87호)이 남아있다. 이외에도 법수사지에서는 9세기 전반기의 양식을 보이는 비로자나삼존불(毘盧舍那三尊佛)과 석불좌상(石佛坐像) 등이 나오기도 하였다. 이 중 비로자나 삼존불은 절이 폐사된 뒤 인근 용기사(龍起寺)로 옮겼으나 용기사마저 폐사되자 1897년 범운(梵雲)이 해인사 대적광전으로 옮겨 해인사의 중심 불상이 되었다. 또한 석불좌상 중 미륵당에 있던 미륵불상은 1967년 경북대학교로 옮겨졌으며, 진등마을에 있던 목 없는 석불좌상은 대좌와 함께 백운초등학교에서 보관중이다(엄기표, ≪한국의 당간과 당간지주≫, 학연문화사, 2004).
註) 254
註) 255
법수사(法水寺)는 경상북도 성주군 동쪽 가야산 남쪽에 있었던 절이다. 법수사는 신라 제40대 애장왕 3년(802)에 창건하여 원래는 금당사(金塘寺)라 하였으며, 이후 고려시대에 퇴락한 절을 중건하여 법수사라 하였다. 폐사에 대해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법수사에 관한 기록이 전하는 것으로 보아, ≪신증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된 조선 중종 25년(1530)까지는 법수사가 존재하였다고 본다. 하지만 조선 숙종 3년(1677)에 간행된 이 곳 지방지(地方誌)인 ≪경산지(京山誌)≫에는 폐사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임진왜란 때 폐사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문명대, 「法水寺의 摩訶毘盧舍那三尊佛」, ≪고문화≫ 5, 1969). 현재 법수사지에는 마을이 들어섰고 그 터가 경작지로 변하여 구체적인 사역의 규모는 확인할 수 없다. 지금은 건물지와 석축, 법수사지 당간지주(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86호), 법수사지 삼층석탑(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87호)이 남아있다. 이외에도 법수사지에서는 9세기 전반기의 양식을 보이는 비로자나삼존불(毘盧舍那三尊佛)과 석불좌상(石佛坐像) 등이 나오기도 하였다. 이 중 비로자나 삼존불은 절이 폐사된 뒤 인근 용기사(龍起寺)로 옮겼으나 용기사마저 폐사되자 1897년 범운(梵雲)이 해인사 대적광전으로 옮겨 해인사의 중심 불상이 되었다. 또한 석불좌상 중 미륵당에 있던 미륵불상은 1967년 경북대학교로 옮겨졌으며, 진등마을에 있던 목 없는 석불좌상은 대좌와 함께 백운초등학교에서 보관중이다(엄기표, ≪한국의 당간과 당간지주≫, 학연문화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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