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로왕의 탄생과 육가야의 성립 설화
가락국기(駕洛國記)註 474
문종대(文宗代)註 475 대강(大康)註 476 연간에 금관(金官) 지주사(知州事)註 477의 문인(文人)이 지은 것으로 이제 그것을 줄여서 싣는다.
≪가락국기≫는 고려 문종조 태강연간(1075~1084)에 금관지주사인 문인(文人)이 지은 가락국(駕洛國)의 사기이다. 가락국은 가야의 제 국가 중 의 한 나라로 가락국기중에서 말함과 같이 대가야 또는 가야국이라 하여 육가야 중의 일국이라 하고 또 ≪삼국유사≫ 오가야조에서는 금관가야라고 하였으며 ≪삼국사기≫에서는 금관국이라고 하고 중국사료(≪삼국지(三國志)≫와 ≪후한서≫ 등)에서는 '狗(拘)邪韓國'이라고 하였으며 일본사료(≪일본서기(日本書記)≫와 ≪고사기(古事記)≫ 등)에서는 가야국(加羅國), 임나국(任那國), 임나가라(任那加羅)의 초기 주국으로 지금의 김해 지방에 위치하고 있었던 나라이다(정중환, 「駕洛國記의 文獻史的 考察」, ≪가야문화≫ 3, 가야문화연구원, 1990, 12쪽).
김해 지방은 고려시대에 들어와 여러 차례 그 명칭이 바뀌었다. 통일신라시대에 금관소경(金官小京), 김해소경(金海小京) 등으로 불리다가 고려태조 23년(940)에 김해부로 바뀌었고, 이후 임해현(臨海縣)으로 강등되었다가 다시 임해군이 되었다 광종 22년(971)에 금주도호부(金州都護府)로 승격되었고, 목종 3년(1000)에는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로 개칭되었다. 현종 3년(1012)에 금주(金州)로 개칭되었고 문종대에는 금주라는 명칭으로 불리었다(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역주 가야사사료집성≫ 제1권, 2004, 96쪽).
개벽 이후로 이곳에는 아직 나라의 이름이 없었고 또한 군신(君臣)의 칭호도 없었다. 이때에 아도간(我刀干)·여도간(汝刀干)·피도간(彼刀干)·오도간(五刀干)·유수간(留水干)·유천간(留天干)·신천간(神天干)·오천간(五天干)·신귀간(神鬼干) 등 아홉 간(干)註 478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이는 추장(酋長)으로 백성들을 통솔했으니 모두 100호註 479, 7만 5,000명이었다. 대부분은 산과 들에 스스로 모여서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고 밭을 갈아 곡식을 먹었다.
구간(九干)에 대하여 일찍이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 상에 인용되어 있는 김유신비문(金庾信碑文)에 김유신의 출자를 설명하는 가운에 ‘수로왕이 구지봉에 올라 가락구촌(駕洛九村)을 바라보았다’라고 보임으로써 수로왕의 출현 이전의 가락구촌이 있었다는 전승이 비교적 오래전에 형성되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1884년에 건립된 가락국태조능숭선전비(駕洛國太祖陵崇善殿碑)에 구부(九部), 구간(九干), 구경(九卿) 등으로 표기된 것도 이러한 전승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여진다. 즉 사료에서 구간이 추장(酋長)이라고 표기되었듯이 가락구촌에 지도자들이 존재하였음을 보여준다(이영식, 「九干社會와 駕洛國의 成立」, ≪가야문화≫ 7, 가야문화연구원, 1994, 33쪽). 구간사회를 국가형성론 상에서 볼 때 추장사회(Chiefdom)의 단계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으며(이종욱, ≪신라국가형성사연구≫, 일조각, 1982, 19쪽|이융조, 「한국고인돌사회와 그 양식」, ≪동방학지≫ 23·24, 1980, 306쪽), ‘읍락사회’라는 개념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金延鶴, 「伽倻의 國家形成」, ≪가야문화≫ 1, 16~17쪽). 그리고 김태식은 구간은 김해 지역에 산재하던 소단위 세력집단들인 구촌의 추장들로서, 그들은 수로의 강림 전부터 이미 존재하던 재지 세력으로 보았다(김태식, ≪가야연맹사≫, 일조각, 1993, 35~36쪽).
여기에 대해서는 두 세가지의 견해로 나뉘고 있다. 이종욱과 三品彰英은 一百戶의 ‘百’자는 ‘萬’자의 착오로 보고있고(이종욱, ≪신라국가형성사연구≫, 일조각, 1982|三品彰英, ≪三國遺事考証≫ 中, 塙書房, 1979, 315쪽), 이영식의 경우는 ≪삼국지(三國志)≫ 위지 동이전 변진조의 「..大國四五千家 小國六七百家 總四五萬戶」라는 기사를 근거로 4천~5천 家로 보고 있다(이영식, 「구간사회와 가락국의 성립」, ≪가야문화≫ 7, 가야문화연구원, 1994).
후한(後漢)의 세조(世祖) 광무제(光武帝)註 480 건무(建武)註 481 18년 임인 3월 계욕일(禊浴日)註 482에 살고 있는 북쪽 구지(龜旨)註 483
이것은 산봉우리를 일컫는 것으로 십붕(十朋)이 엎드린 모양과도 같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에서 이상한 소리가 부르는 것이 있었다. 백성 2, 3백 명이 여기에 모였는데 사람의 소리 같기는 하지만 그 모습을 숨기고 소리만 내서 말하였다. “여기에 사람이 있느냐.” 아홉 간(干) 등이 말하였다. “우리들이 있습니다.” 또 말하였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구지입니다.” 또 말하였다. “황천(皇天)이 나에게 명하기를 이곳에 가서 나라를 새로 세우고 임금이 되라고 하여 이런 이유로 여기에 내려왔으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산봉우리 꼭대기의 흙을 파면서 노래를 부르기를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만일 내밀지 않으면 구워먹으리’ 라고 하고, 뛰면서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대왕을 맞이하여 기뻐 뛰게 될 것이다.”
계욕(禊浴)이란 계욕(禊浴) 계음연(禊飮宴)이라고 한다. 계는 불계(祓禊)란 말이다. 불계는 제계목욕하여 심신을 맑게 하고 천지신명에게 양재구복(禳災求福)의 치성을 드리는 제의를 말한다. 한나라 대의 예제에는 3월 상사(上巳)에 특히 동으로 흐르는 물에서 심신의 숙구(宿垢)를 제거하였으나 위(魏) 이후로는 상사일을 다만 3일로 정하여 춘계를 행하게 되었다. 춘계라 함은 계춘 즉 3월 3일에 행하는 계욕을 말함이니 이에 대하여 7월14일에 행하는 계욕을 추계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계욕도 동으로 흐르는 물에서 행한다고 한다(정중환, 「가락국기의 건국신화」, ≪가야문화≫4, 가야문화연구원, 1991, 112쪽).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김해도호부산천조(金海都護府山川條)에 구지봉(龜旨峰)이 보이고, ≪삼국유사≫ 권2 기이 2 수로부인조(水路夫人條)에도 관련기사가 보인다. 원시신앙에서 구(龜)를 영적존재로 여겼을 것이며, 구지봉을 ‘굿’하는 봉우리로 한자로 음차한 견해도 있다(정중환, 「가락국기의 건국신화」, ≪가야문화≫4, 가야문화연구원, 1991, 115쪽)..
구간들은 이 말을 따라 모두 기뻐하면서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러러 쳐다보니 다만 자줏빛 줄이 하늘에서 드리워져서 땅에 닿았다. 그 줄이 내려온 곳을 따라가 붉은 보자기에 싸인 금합(金合)을 발견하고 열어보니 해처럼 둥근 황금 알 여섯 개가 있었다. 여러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기뻐하여 함께 백번 절하고 얼마 있다가 다시 싸서 안고 아도간(我刀干)의 집으로 돌아와 책상 위에 놓아두고 그 무리들은 각기 흩어졌다. 12시간이 지나註 484 그 이튿날 아침에 무리들이 다시 서로 모여서 그 상자를 열어보니 여섯 알은 화해서 어린아이가 되어 있었는데 용모(容貌)가 매우 훤칠하였다. 이에 이들을 평상 위에 앉히고 여러 사람들이 절하고 하례(賀禮)하면서 극진히 공경하였다. (이들은) 나날이 자라 10여 일이 지나자 신장(身長)은 아홉 자나 되었으니 은(殷)의 천을(天乙)註 485과 같고, 얼굴은 용처럼 생겼으니 한(漢)의 고조(高祖)와 같고, 눈썹에는 팔채(八彩)가 있으니 당(唐)의 요(堯)DB주석
와 같고, 눈동자가 겹으로 되어 있으니 우(虞)의 순(舜)과 같았다. 그달 보름에 왕위(王位)에 올랐다. 세상에 처음 나타났다고 해서 이름을 수로(首露)註 486라고 하였다. 혹은 수릉(首陵)수릉은 죽은 후의 시호이다이라고도 한다.
협진(浹辰)은 십이지의 자(子)로부터 해(亥)에 이르는 날짜를 가리키는 것으로 ‘열이틀’로 볼 수도 있다(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역주 가야사사료집성≫ 제1권, 2004).
수로는 가락의 시조이나, 김태식은 구간(九干)과 같은 재지 세력의 한 사람인지, 아니면 당시에 다른 곳에서 온 이주민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대체로 이주민이거나 또는 이주민으로서의 명분을 아직 잃지 않은 사람으로 추정하였고(김태식, ≪가야연맹사≫, 일조각, 1993, 36쪽), 이병도는 수로를 가락 최초의 군장이 아니라 가락이 소위 육가야의 맹주국으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을 때의 군장이라고 보았으며, 가락의 구간과 부원들이 대회하여 일인의 군장을 선출 추대한 사화에 있어 육란=육인이 나타났다는 것은 모순이라 파악하고 있다(이병도, 「수로왕고」,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315~316쪽).
나라 이름을 대가락(大駕洛)이라 하고 또한 가야국(伽耶國)이라고도 하니 곧 여섯 가야(伽耶)註 487 중의 하나이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각 가서 다섯 가야의 임금이 되니 동쪽은 황산강(黃山江), 서남쪽은 창해(滄海), 서북쪽은 지리산(地理山), 동북쪽은 가야산(伽耶山)이며 남쪽은 나라의 끝이었다.
육가야니 오가야니 하는 것은 결국 연맹단체를 말한 것으로 맹주국을 제외하고 그 이외의 제국을 말할 때에는 오가야라 하고, 맹주국까지 합하여 말할 때에는 육가야라고 할 수 있다. 가락국기에서는 수로왕의 금관가야를 제외한 나머지를 오가야라고 하였고, ≪본조사략(本朝史略)≫에서는 대가야를 제외한 나머지를 오가야라고 하고 있다(이병도, 「수로왕고」,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311~313쪽).
그는 임시로 대궐을 세우게 하고 거처하면서 다만 질박(質朴)하고 검소하니 지붕에 이은 이엉을 자르지 않고, 흙으로 쌓은 계단은 3척이었다.
즉위 2년 계묘 정월(43년)에 왕이 말하기를, “내가 서울을 정하려 한다”라고 하고 이내 임시 궁궐의 남쪽 신답평(新畓坪)이는 옛날부터 묵은 밭인데 새로 경작했기 때문에 이렇게 불렀다. 답자(畓字)는 속자(俗字)이다.에 나가 사방의 산악(山嶽)을 바라보고 좌우 사람을 돌아보고 말하였다.
“이 땅은 협소(狹小)하기가 여뀌 잎과 같지만 수려하고 기이하여 16나한(羅漢)註 488이 살 만한 곳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1에서 3을 이루고 3에서 7을 이루니註 489 7성(聖)이 살 곳은 여기가 가장 적합하다. 이곳에 의탁하여 강토(疆土)를 개척해서 마침내 좋은 곳을 만드는 것이 어떻겠느냐.” 이곳에 1,500보 둘레의 성과 궁궐(宮闕)과 전우(殿宇) 및 여러 관청의 청사(廳舍)와 무기고(武器庫)와 곡식 창고의 터를 만들어 두었다. 일을 마치고 궁으로 돌아와 두루 나라 안의 장정, 인부, 공장(工匠)들을 불러 모아서 그달 20일에 성 쌓는 일을 시작하여 3월 10일에 공사를 끝냈다. 그 궁궐(宮闕)과 옥사(屋舍)는 농사일에 바쁘지 않은 때를 기다려 이용하니 그해 10월에 비로소 시작해서 갑진 2월(44년)에 완성되었다. 좋은 날을 가려서 새 궁으로 거동하여 모든 정사를 다스리고 여러 일도 부지런히 보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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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474
≪가락국기≫는 고려 문종조 태강연간(1075~1084)에 금관지주사인 문인(文人)이 지은 가락국(駕洛國)의 사기이다. 가락국은 가야의 제 국가 중 의 한 나라로 가락국기중에서 말함과 같이 대가야 또는 가야국이라 하여 육가야 중의 일국이라 하고 또 ≪삼국유사≫ 오가야조에서는 금관가야라고 하였으며 ≪삼국사기≫에서는 금관국이라고 하고 중국사료(≪삼국지(三國志)≫와 ≪후한서≫ 등)에서는 '狗(拘)邪韓國'이라고 하였으며 일본사료(≪일본서기(日本書記)≫와 ≪고사기(古事記)≫ 등)에서는 가야국(加羅國), 임나국(任那國), 임나가라(任那加羅)의 초기 주국으로 지금의 김해 지방에 위치하고 있었던 나라이다(정중환, 「駕洛國記의 文獻史的 考察」, ≪가야문화≫ 3, 가야문화연구원, 1990, 12쪽).
註) 477
김해 지방은 고려시대에 들어와 여러 차례 그 명칭이 바뀌었다. 통일신라시대에 금관소경(金官小京), 김해소경(金海小京) 등으로 불리다가 고려태조 23년(940)에 김해부로 바뀌었고, 이후 임해현(臨海縣)으로 강등되었다가 다시 임해군이 되었다 광종 22년(971)에 금주도호부(金州都護府)로 승격되었고, 목종 3년(1000)에는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로 개칭되었다. 현종 3년(1012)에 금주(金州)로 개칭되었고 문종대에는 금주라는 명칭으로 불리었다(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역주 가야사사료집성≫ 제1권, 2004, 96쪽).
註) 478
구간(九干)에 대하여 일찍이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 상에 인용되어 있는 김유신비문(金庾信碑文)에 김유신의 출자를 설명하는 가운에 ‘수로왕이 구지봉에 올라 가락구촌(駕洛九村)을 바라보았다’라고 보임으로써 수로왕의 출현 이전의 가락구촌이 있었다는 전승이 비교적 오래전에 형성되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1884년에 건립된 가락국태조능숭선전비(駕洛國太祖陵崇善殿碑)에 구부(九部), 구간(九干), 구경(九卿) 등으로 표기된 것도 이러한 전승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여진다. 즉 사료에서 구간이 추장(酋長)이라고 표기되었듯이 가락구촌에 지도자들이 존재하였음을 보여준다(이영식, 「九干社會와 駕洛國의 成立」, ≪가야문화≫ 7, 가야문화연구원, 1994, 33쪽). 구간사회를 국가형성론 상에서 볼 때 추장사회(Chiefdom)의 단계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으며(이종욱, ≪신라국가형성사연구≫, 일조각, 1982, 19쪽|이융조, 「한국고인돌사회와 그 양식」, ≪동방학지≫ 23·24, 1980, 306쪽), ‘읍락사회’라는 개념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金延鶴, 「伽倻의 國家形成」, ≪가야문화≫ 1, 16~17쪽). 그리고 김태식은 구간은 김해 지역에 산재하던 소단위 세력집단들인 구촌의 추장들로서, 그들은 수로의 강림 전부터 이미 존재하던 재지 세력으로 보았다(김태식, ≪가야연맹사≫, 일조각, 1993, 35~36쪽).
註) 479
여기에 대해서는 두 세가지의 견해로 나뉘고 있다. 이종욱과 三品彰英은 一百戶의 ‘百’자는 ‘萬’자의 착오로 보고있고(이종욱, ≪신라국가형성사연구≫, 일조각, 1982|三品彰英, ≪三國遺事考証≫ 中, 塙書房, 1979, 315쪽), 이영식의 경우는 ≪삼국지(三國志)≫ 위지 동이전 변진조의 「..大國四五千家 小國六七百家 總四五萬戶」라는 기사를 근거로 4천~5천 家로 보고 있다(이영식, 「구간사회와 가락국의 성립」, ≪가야문화≫ 7, 가야문화연구원, 1994).
註) 482
계욕(禊浴)이란 계욕(禊浴) 계음연(禊飮宴)이라고 한다. 계는 불계(祓禊)란 말이다. 불계는 제계목욕하여 심신을 맑게 하고 천지신명에게 양재구복(禳災求福)의 치성을 드리는 제의를 말한다. 한나라 대의 예제에는 3월 상사(上巳)에 특히 동으로 흐르는 물에서 심신의 숙구(宿垢)를 제거하였으나 위(魏) 이후로는 상사일을 다만 3일로 정하여 춘계를 행하게 되었다. 춘계라 함은 계춘 즉 3월 3일에 행하는 계욕을 말함이니 이에 대하여 7월14일에 행하는 계욕을 추계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계욕도 동으로 흐르는 물에서 행한다고 한다(정중환, 「가락국기의 건국신화」, ≪가야문화≫4, 가야문화연구원, 1991, 112쪽).
註) 483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김해도호부산천조(金海都護府山川條)에 구지봉(龜旨峰)이 보이고, ≪삼국유사≫ 권2 기이 2 수로부인조(水路夫人條)에도 관련기사가 보인다. 원시신앙에서 구(龜)를 영적존재로 여겼을 것이며, 구지봉을 ‘굿’하는 봉우리로 한자로 음차한 견해도 있다(정중환, 「가락국기의 건국신화」, ≪가야문화≫4, 가야문화연구원, 1991, 115쪽)..
註) 484
협진(浹辰)은 십이지의 자(子)로부터 해(亥)에 이르는 날짜를 가리키는 것으로 ‘열이틀’로 볼 수도 있다(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역주 가야사사료집성≫ 제1권, 2004).
註) 486
수로는 가락의 시조이나, 김태식은 구간(九干)과 같은 재지 세력의 한 사람인지, 아니면 당시에 다른 곳에서 온 이주민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대체로 이주민이거나 또는 이주민으로서의 명분을 아직 잃지 않은 사람으로 추정하였고(김태식, ≪가야연맹사≫, 일조각, 1993, 36쪽), 이병도는 수로를 가락 최초의 군장이 아니라 가락이 소위 육가야의 맹주국으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을 때의 군장이라고 보았으며, 가락의 구간과 부원들이 대회하여 일인의 군장을 선출 추대한 사화에 있어 육란=육인이 나타났다는 것은 모순이라 파악하고 있다(이병도, 「수로왕고」,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315~316쪽).
註) 487
육가야니 오가야니 하는 것은 결국 연맹단체를 말한 것으로 맹주국을 제외하고 그 이외의 제국을 말할 때에는 오가야라 하고, 맹주국까지 합하여 말할 때에는 육가야라고 할 수 있다. 가락국기에서는 수로왕의 금관가야를 제외한 나머지를 오가야라고 하였고, ≪본조사략(本朝史略)≫에서는 대가야를 제외한 나머지를 오가야라고 하고 있다(이병도, 「수로왕고」,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311~313쪽).
註) 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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